효율성, 문명의 편견 마이크로 인문학 4
이근세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은 동서(東西)문명의 ‘효율성’에 대한 세계관의 차이를 통해 양자의 전략적 장단점을 규명하고 이의 조화를 위한 종합적 성찰이자 제언이라 하겠다. 100쪽 남짓한 팸플릿이지만 문명 상호의 편견을 이루는 관념과 행동 양식을 비교적 풍부한 근거를 통해 제시하고 있으며, 특히 서구식 사고에 익숙한 오늘의 우리들에게 동양(중국)의 전통사상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인식케 하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

 

(1)서구의 효율성 인식

 

서구는 어떤 과제를 수행하기 이해서는 우선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수립한다. 그리고 이 계획을 수행한다. 즉, “실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관념적으로 먼저 구상하고, 그 후에 의지와 행동을 통해 관념적 구상을 현실 속에 구체화 하는”, ‘모델화’의 정식을 따른다. 그러나 이 관념적 구상은 이상적이고 완벽성에 가깝지만 이를 100% 실천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한계를 내재하고 있다. 그래서 이론과 실제를 매개할 수 있는 것으로서 사려깊음, 또는 신중함이라는 의미의 프로네시스(phronesis)를 상정하여 완전성을 지향한다.

 

그런데 모델화는 이처럼 이론과 실제의 괴리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전쟁과 같은 동태적 영역, 다시 말해서 수많은 부수적, 우연적 사건이 연속하는 경우에는 그야말로 계획은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만다. 결국 부딪친 난관과 같이 고착화된 구상을 실현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서구인은 영웅적인 행동주체의 출현을 기대한다. 아마 서구의 무수한 영웅의 출현은 이러한 배경을 설명하는 하나의 사례로 보아도 무난할 것이다. 사실 효율성(效率性: efficiency)이란 단어가 이미 서구적 표현일 것이다. 완전성인 모델에 도달한 실행 결과의 비율이란 의미이니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서구인은 완전성의 추구를 향한 지속적인 목표에의 도전이 가능했던 것은 아닐는지.

 

(2)동양(중국)적 효율성

 

서구의 영웅주의, 모델화가 지닌 한계, 즉 모델화에서 실재가 이탈할 때, ‘주체’의 임기웅변, 탁월한 대처능력이 요구된다. 영웅, 천재에 의존해야만 하는 서구적 합리성의 내적 문제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바로 이것이 전략의 중심축이 된다. 바로 상황의 흐름을 감지해내고 그 흐름을 이용하는 능력에 동양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래서 계획이니 모델이니 하는 서구의 복잡한 구상이 필요치 않다. 형세(形勢)라는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힘의 관계를 살피며, 그 상황 속에 함축되어 있는 잠재력을 점검하고 평가한다.

 

즉, 작동중인 역학관계를 총체적으로 점검하고 그것이 곧 형세의 귀결이라는 생각이다. 따라서 서구처럼 동태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계획을 이탈한 요인을 해결하기 위한 주체의 개입이 존재치 않는다. 마찰도, 운도, 천재성도 필요 없다! 결과는 단지 매순간 일어나는 함축된 힘의 관계에서 생겨난 필연적 귀결일 뿐이다. 객관적 조건이 유리하게 전개되는 상황을 만들거나 기다리면 된다. 쉽다. 아마 “실재는 운행이다. 천지는 말없이 행할 뿐이다.”라는 중국식 사고야말로 이를 잘 대변하는 말일 것이다. 일례로 중국 외교 전략에서 이러한 형세에 대한 특징을 살펴 볼 수 있다. “타인에 나의 지배력은 주체의 인위적 개입이나 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미 진행 중인 상황을 활용하는 것”, 귀곡자가 말한 ‘세를 세워서 장악(立勢而制事)’한다는 그것이다. 굳이 효율성을 비교하고 따질 이유가 없다. 동양에서는 이처럼 효율성은 근원적인 것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3)동서의 조화를 위해서

 

이렇게 보면 서구의 모델화, 영웅주의, 계획과 실천이라는 이원적 구조가 동양(중국)의 형세라는 근원적 효율성의 개념에 비해 열등한 것처럼 비친다. 그러나 형세의 개념에는 내밀함, 폐쇄성, 비가시성이 있다. 즉 객관적 조건의 조성에 참여하지 않은 구성원은 그것의 결과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서구의 모델화가 지닌 입장정리와 반대의 제기와 같은 토론의 과정이 없다. 바로 형세에는 이 공론화라는 과정이 부재(不在)하다는 점이다. 책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된 중국의 오늘로부터 이러한 형세의 이용을 발견한다. 값싼 노동력을 이용한 세계의 공장이 됨으로써 상대적으로 쉬운 성장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수동성의 전략인 상황과 세의 효율성 추구만으로 1등이 될 수 있겠는가에 의문을 제기한다. 논쟁이 조직과 공론화와 같은 민주주의적 상호 인정과 타협이 없이 자신의 효율성만을 계속 추구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다.

 

그리곤 “의미의 문제는 분명 중국을 뒤흔들 것이다”라는 이익이 아닌 이념의 추구, 즉 새로운 모델의 제시가 요구된다고 제안하고 있다. 세계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모델화는 당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이념의 추구’라는 유일한 노선만 있는 것일까? 20세기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오히려 이념은 폭력의 온상이고 처참한 잔악성이란 상처만 남기지 않았던가? 민족주의, 군국주의, 공산주의의 전체화 등등, 그리고 사적 권력의 존속을 위해 조잡하게 만들어진 무수한 이념들은 인류에게 분열과 고통만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지 않은가? 동서의 조화, 인류의 평화와 번영이란 이상을 구실로 다시금 이념(Ideology)을 만들어내는 것은 이젠 인류를 패망의 나락으로 밀어 넣는 일일지도 모른다. 외려 상황, 형세의 철학과 같이 자연을 객관화 혹은 대상화시키지 않으면서 협의와 참여가 가능한 어떤 자연적 실천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같이 책은 서구의 모델화와 동양의 전통 사상에 대한 종합적 성찰의 과제를 충분한 논거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어느 것이 좋고 나쁜가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는 토대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서로가 서로를 바깥에서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서로의 편견이 드러나고 그때야 대화가 가능해진다.”는 몰이해의 제방을 터뜨리는 시작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겠다. “철학의 가능성은 타성의 파괴”라는 아포리즘이 있듯이 우리의 인식을 옥죄고 있는 그 습관적 사고를 파괴하고 보다 넓고 멀리 바라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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