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몽상가들 알마 인코그니타
뤼도빅 에스캉드 지음, 김남주 옮김 / 알마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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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삶은 지붕 위에 있다.”고 밤이 내리면 거대 파리의 건물들 위 지붕에 올라 그곳에는 내 행복의 양도할 수 없는 일부가 있다.”고 말하는 갈리마르 출판사 편집위원인 중년의 남자 뤼도빅 에스캉드가 있다. 그는 친구인 시인 뱅상과 함께 이웃한 그들의 7층 공동주택 지붕 위를 기점으로 렌가() 좁은 포장도로 7번지에 위치한 발행인 제롬 랭동의 유서깊은 미뉘 출판사의 지붕을 걷고, 지상 80미터 생 쉴피스 성당의 탑 꼭대기에서 수도의 좌안 전체를 내려다보며 관조의 시간, 마음의 격정을 내려놓으며 해방감을 만끽하기도 한다.

 

이 몽상가이자 괴짜는 돌싱남이다. 이혼한 아내가 아이들을 양육하지만 주말이면 협의하여 서로 아이들을 돌본다. 그에게는 새로운 젊은 연인 막신이 있다. 나는 화자이자 주인공인 뤼도빅보다 그의 연인 막신이라는 캐릭터에 더욱 애착을 지니고 읽게 되었는데, 프랑시스 퐁주의 시를 읽으며, 기타를 치며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활력 넘치는 일상의 그녀의 태도에 내 감응이 제대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뤼도빅이 저 위에는 뭐랄까, 자유로운 무엇인가가, 손상되지 않은 그 무엇이 있어.”라고 지붕 위 탐사를 포기할 수 없는 자신의 일부라 얘기하자, 막신은 손상된 건 당신들인 것 같은데.”고 대응한다. 막신의 명쾌하고 분명한 표현들은 아주 시원한 청량감을 주기까지 한다.

 

막신은 상대의 시선에 맞춰 세상을 볼 수 있는 여성이다. 뤼도빅이 가부장적 교육에 세뇌된 마지막 세대임을.  때문에 그의 젠더에 대한 고정관념조차 관대한 시선으로 보아줄 수 있으며, 뜬금없이 난 철학이 좋아라고 말하는 남자가 구토, 존재와 무...를 얼버무리면, 장폴 샤르트르, 일어나서 샤워해. 당신한테 냄새나.”라고 응대하며, 곧 문학적 공간이라는 상상을 공유할 줄 안다. 뤼도빅의 아파트 1층 카페 여직원 네스린이 선생님은 젊지도 않고 미남도 아니잖아요.....막신은 예쁜 여자고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아요.” 라며 당신의 진짜 모습을 사랑할 줄 아는 그녀를 붙잡으라고, 당신은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에 무조건 동의하게 되는 그런 인물이다.

 

막신은 뤼도빅이 뱅상과 함께하는 야간 외출을 점점 더 참기 어려워한다. 뤼도빅이 잔인한 투쟁의 삶을 요구하는 세계에서의 억제된 정신을 도시의 함석 지붕들을 아래로 내려다보고, 그 방대한 지대를 바라보며 느끼는 자유의 갈망을 막신은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뤼도빅이 건물 벽을 등산하듯 오르며 창문 밖을 보던 이웃과 눈이 마주치거나 지붕 위에서 불을 피워대는 행위는 이웃의 비난처럼 파렴치한 짓이고, 과잉의 자유, 어쩌면 방종에 가깝게 보이기도 한다.

 


뤼도빅에게 건물의 지붕 위는 탐사되기를 기다리는 드넓은 공간이고, 안정된 연애 관계의 달콤함의 설렘처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행복이다. 사랑의 스윗하고 순화된 느낌의 평온함과 경쟁관계에 있는 수직의 도시건물벽을 등반하고 지붕 위를 거니는 자유, 높이 오르려는 이 해방의 감정에 나는 수월하게 감응하지 못해 그저 이해의 한 대상으로 남겨둔다.

 

아마 이것이 이 책을 읽는 데에 있어 방해 요인이 되었던 것 같다. 작자의 감정과 사유에 대한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으로, 그가 어느 지붕 위에서 뱅상과 더불어 랭보의 취한 배를 낭송하거나, 자크 바로의 다락방 얘기와 피카소의 게르니카탄생의 일화, 지드의 지상의 양식속 한 문장들이 표현될 때마다 겉도는 서걱거림만이 더 크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뤼도빅이 막신이나 그의 아이들과 함께하는 일화에서 피어오르는 상황들에 맞춤으로 등장하는 노래들과 문학과 예술작품들을 음미하듯 말하는 장면에 스며있는 그 고유한 예술의 향취에 기분 좋게 흐뭇함의 시간으로 빠져들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이 소설은 현대 대도시 그랑 파리에서 살아가는 한 남자의 도시 기술문명에 대한 은밀한 저항이고, 이 반항에 잠재된 자유의 욕망이며,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가이자 문학과 예술의 찬미와 혼합되어 묘한 감상에 젖어들게 한다. 저녁 8시면 문을 닫는 시간에 뤽상부르 공원에 들어가 당대에 배척당했던 폴 베를렌의 동상이 아이러니하게 서 있는 시절 맥락의 모순적 변화를 바라보며, 아르튀르 랭보와 한 때 지독한 커플관계였던, 그 유명한 브뤼셀의 총격사건을 화두로 폴 베를렌의 시와 사랑과 광적 열정이 나지막히 흐르고, 자크 프레베르가 노래한 삶은 사랑하는 이들을 갈라 놓네. 아주 부드럽게, 소리도 없이.” 라는 샹송 고엽(枯葉; Les feuilles mortes), 막신이 기타를 치며 뤼도빅 앞에서 근사하게 부르는 에어로스미스의 꿈꾸며 살라; Dream on가 감미로운 장면으로 펼쳐지기도 한다.

 

뤼도빅의 한 밤의 지붕 위 탐험의 여정은 도시의 번잡함을 다소 벗어나고 아이들을 키우는 삶의 조건에 조금은 더 맞는 곳으로서 파리 서쪽 15구 외곽 앙드레 시트로앵 공원 근처 이사하면서 중단된다. 우리는 어쩌면 자신만의 고유한 양도할 수 없는 여러 행복의 감정들을 지니고 있을 터이다. 그것은 뤼도빅처럼 그랑 파리의 건물벽을 오르고, 그 장애 없이 펼쳐진 지붕 위를 거닐며 만끽하는 고양감이기도 하겠지만, "존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일 게다.

 

뤼도빅은 자신의 존재적 근원인 부분을 무엇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떠나버린 막신에게 다시 만남을 요청하는 연락을 하지만 그녀로부터 어떤 회신도 더 이상 받지 못한다. 뤼도빅은 사랑만이 결코 단절될 수 없는 근원이라 여겼던 걸까? 그는 행복하게 살아야 할 이유들이라는 퐁주의 시 구절이야말로 모든 시의 제목이 이것이어야 한다고 글을 맺는다. 나는 행복이라는 이 환상을 쫓는 중년의 남자, 도시를 내려다보며 파리의 피 흘리는 역사를 추출해내고, 현대 문명의 과잉과 과도함을 해독해내기도 하며, 문학과 음악 예술의 향취에 젖어들기도 하는 인물로부터 마지막 가부장적, 계급 편향성의 뿌리깊은 잔재를 읽기도 한다. 어쩌면 이를 인지한 인물의 그로부터 벗어나는 자신과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의 기록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자유에 대한 절대적 갈망이 조금은 타협될 여지가 있는 것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막신은 그래야만 돌아오지 않을까?

 

P.S. 뤼도빅의 지붕 탐사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파리 시가(市街)의 모습이 보이고, 갈리마르, 미뉘, 그라세 출판사 등 이 유명 출판사들의 지붕 위에서의 바라보이는 조망과, 특히 갈리마르의 뒤뜰 정원과 고대풍 기둥이 죽 늘어선 별채인 플레이야드 문화원등 구조가 보인다. 또한 생제르맹 대로의 서점 레큄 데 파주등 몇 몇 서점을 그려 볼 수 있는 부가적 여행이 될 수 도 있다. 파리 여행을 계획하는 이들에게는 독특한 문학탐방의 가이드로 삼아도 될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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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 묻는다 - <해방전후사의 인식> 출간 40년 기념기획
오익환 외 지음 / 한길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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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의도된 혼란, 시대착오적이고 극단적 퇴행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극우를 표방하는 청년 백골단의 사법부 시설 파괴와 공권력에 대한 도전, 민주주의 근간인 법치를 부인하는 집단 폭력 행위는 그저 임의적이거나 우발적으로 발생한 일회적 사건으로 볼 수 없다. 이들 모두는 역사라는 뿌리를 가진 것이고, 그 역사를 알아야만 이들의 행위가 지닌 의미를 알아차릴 수 있다. 여전히 너무도 많은 국민들이 오늘의 한국 정치사회를 해독하는 데 피상적이거나 그마저도 아닌 무지의 상태에 놓여있다.

 

이 책의 서론 격인 젊은이들에게 역사정신을이라는 글에서 김민웅 교수는 민족 정신사를 훼손하는 언행들이 지금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다. 민족사와 민족정신을 부인하고 배신하던 반민족행위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언행들이 쏟아지고 있다., 지난날 과오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게 하자는 취지에서 1949년 좌절했던 민족 반역자들의 발본색원 작업인 반민족행위처벌은 끝나지 않았음을, 바로 지금 시작할 수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 책은 바로 이러한 목적에서 해방전후사의 인식40주년 기념기획으로 일부 새롭게 집필되고 재구성된 중요한 우리의 역사정신이다.

 

민주주의의 근간인 법치주의를 훼손하고, 또한 헌법기관인 입법부를 무력으로 정지시키려 하였음과 더불어 표현과 언론의 자유를 비롯한 국민의 모든 기본권을 제한하려 획책된 내란 시도는 헌정질서를 문란케 하여 독재 권력을 항구화하려 한 추악한 욕망 이외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에 편승하여 민주주의를 파괴하려했던 내란에 동조하거나 이를 선전 옹호하려는 세력들의 준동이 폭력을 동원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이러한 세력들이 자신들의 퇴행적 반동성을 비판하는 국민을 향해 빨갱이들이라고 철 지난 카세트 녹음기를 틀어대는 몽매한 저열성과 야만성을 반복하고 있다. 이것들의 테러 수준의 반동의 뿌리는 2025년인 지금으로부터 76년의 시간을 거슬러 ‘19496월 6, 반민특위의 좌절이라는 역사적 시간에 놓여있다.

 

반민특위의 와해(瓦解), 역사의 왜곡 날조는 물론 친일 부역자 무리를 청산하려는 모든 반민특위 위원들을 빨갱이로 몰아 민족 내분을 격화시키고, 그 결과 흉포했던 일제 식민체제의 영속화 도모라는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반민족 세력의 공격을 일컫는다. 친일세력과 하나가 된 이승만은 헌법의 노골적인 무시와 입법부의 파괴를 통해 자신의 불안정한 권력을 항구화하는 독재를 위해 반민법의 운영을 고의로 방해는 물론, 급기야는 일제 부역자들의 무리로 구성된 경찰의 폭력을 동원하여 반민특위의 기능을 무력화 시켰다.

 

이때 이승만을 위시하여 윤치호 등 친일내각은 반민특위를 빨갱이, 빨갱이의 앞잡이이라고 날조 비난했다. 그리고 이승만은 기왕에 범죄가 있는 것을 들춰내서 함부로 잡아들이는 것은 치안 확보 상 온당치 못한 일이라고 반민특위를 향해 비난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독립 운동가들을 비롯한 동 애국지사, 일제에 저항하는 동족을 잔인하게 체포, 구금, 살해하는 데 앞장서 악명을 떨친 친일부역자 고등계 형사 노덕술을 반민특위가 체포하자 이승만이 직접 나서 반민특위를 기습, 무력화를 지시했다.(1949.6.7.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승만이 자신이 직접 지시했음을 공표했다) 친일 부역자 무리가 민족정신의 회복을 도모하려했던 반민특위를 빨갱이라 지칭하며 악의적 수법을 동원하여 체포, 투옥, 살해한 것은 이렇게 오래된 뿌리를 가진 것이다. 오늘의 친일 세력은 내란 우두머리인 윤의 권력이 등장하며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작금의 친일 세력들이 하는 짓거리의 뿌리는 일제가 심어놓은 그 구태가 그대로 이어진 것일 뿐이다.

 


1949626일에는 친일 세력 청산의 목소리를 높인 임시정부 수반이자 독립운동가인 김구 선생을 암살하고, 반민특위 활동을 주도하던 국회의원들을 남로당 프락치로 몰아 검거, 살해하였다. 이어 이승만은 친일 세력들을 애국지사로 둔갑시키는 일에 착수하여, 일제 부역자 무리들이 졸지에 국가 공훈자로 서훈되기에 이른다. 국내 기반이 없던 이승만은 오직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하여 3년의 미()군정기간을 통해 친일 세력과 결탁하여 기반을 확립, 확장하고자 했음이다. 드디어 친일 세력이 다시 이 땅에서 역사의 주인이 되어 세상을 거꾸로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친일 부역자 무리들은 이렇게 빨갱이 몰이로 자신들의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는 민족 앞에 머리 숙여 백배사죄는커녕 도리어 민족(국민들)의 심판자의 자리에 앉아 애국지사들의 투옥, 살해를 지속하고, 정치를 사리사욕의 장으로 삼았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를 알아야 하는데, 1945815일 해방이, 엄밀하게 말하자면 미국이 '점령군'으로 한국에 입성했다는 점에 있다. 이후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정부수립에 이르는 3년의 시간 동안, 미군정은 행정, 경찰, 검찰과 사법, 교육, 경제 등 국정 전반에 걸쳐 친일 부역자들을 그대로 충당했다. 특히 사법(검찰포함)부는 총독부 하에 부역하던 자들일 수밖에 없었는데, 일정한 교육과 경험이 요구되었기에 친일했던 반민족세력이 존속하도록 방치되었던 까닭이다.


이것은 2025년 오늘, 한국의 검찰과 법원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 한국 사법부는 위와 같이 그 출발부터 깊게 박힌 친일의 뿌리가 내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법 권력의 역사는 왜 저들의 역사의식이 친일 성향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근간인 것이다. 국회 청문회를 통해 임명부결이 제안되었음에도 윤씨가 임명을 강행한 이상민을 위시한 판사 출신의 고위직 관료들이 한결같이 친일을 마치 자랑하듯 표방하는 이유가 해명된다. (참조: 현재 서울지검 검사출신의 경북대 법학교수인 김두식의 법률가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탄생은 이에 대한 중요한 참고 문헌이 되어 줄 터이다.)

 

이 책, 반민특위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 묻는다라는, 좌절한 과거의 역사를 다시 소환하는 이유는 이처럼 오늘날 우리사회에 벌어지고 있는 구태들의 추악한 뿌리를 앎으로써, 이 퇴행적이고 반동적인 분열을 획책하는 세력들의 민낯을 직시하려 함이다. 반민특위의 논의는 이것들의 역사적 정체를 밝히는 일이다. 이것들의 정치적 본질을 드러내는 작업인 것이다. 친일 권력 그 자체였던 이승만과 군사 쿠데타로 친일을 이어갔던 박정희, 그 후예인 전두환과 노태우로 이어진 세력의 본산이 현실 정치에서 여전히 정당으로 존재하고 있는 오늘날, 민족의 앞날과 민주주의 장래를 위해 이 논의는 더더욱 절실한 것이기에 그렇다.

 


2019년 친일부역자가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자들의 서훈을 취소한다고 발표하자, 나경원이는 국론 분열의 책임을 친일파 검증의 행위로 돌리려는 의도로 반민특위가 국론을 분열 시켰다.”고 주장했으며, 황교안이는 좌파 중에 정상적으로 돈 번 사람들이 거의 없다, 다 싸우고 투쟁해서 남의 것을 빼앗은 것이라고 민주당을 비롯한 이를 지지하는 국민들을 약탈하는 강도들이라고 날조, 공격했다. 이러한 작태는 이종명, 김순례, 김진태, 김무성 등 일제 부역자들의 몰염치를 승계한 무리들은 문 정권을 빨갱이라 칭하며 청와대를 폭파하자고 테러수준의 언어를 쓰기까지 했다, 이들의 폭력성과 야만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작금에 쏟아지는 이것들의 말은 오직 자신들의 사적 이익에 맞추어져, 법치를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언어는 물론 폭동을 선동하며, 헌정질서의 훼손과 혼란을 부채질하기까지 한다.

 

사실 이것들의 이러한 작태는 민족반역자를 처단하려는 국민 열망을 무력으로 좌절시켰던 76년 전 그날의 시간에 펼쳐진 상황의 판박이다. 책의 시작은 친일 부역자 무리들, 해방 후에 오히려 더욱 세를 키우고 기득권을 유지하던 종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바로 지금에도 일제 식민지 시대가 연속되고 있는 역사를 치열하게 고발하는 작가 최인훈 선생의 총독의 소리의 문장으로 시작된다.   대일본제국 40년 경영에서 뿌려진 씨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으며, 이는 폐하(일본천황)의 유덕을 흠모하는 충성스런 반도인의 가슴 속 깊이 간직되어 있는 희망의 꽃입니다...해방된 노예의 꿈은 노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라며 식민지 부역자로서의 세력을 지금에도 공고히 하고 있음을 자랑스러워하는 문장이다. 오늘 우리들은 고위 관료라는 것들이 국회 청문회에 출석하여 뻔뻔스레 친일을 드러내놓고 그 부끄러움도 모르고 주절거리는 모양을 본다. 독도의 영유권을 부정하고, 위안부를 조롱하며, 신사참배를 숭배하기까지 한다. 그리고는 가해자의 논리를 한국 국민에게 감히 강요한다.

 

식민지 시대 일본의 주구노릇을 하고, 총독의 손발을 자청하며 동족을 잔혹하게 학대, 살해하던 군, 경찰, 밀정, 낭인들이 옷을 바꾸어 입고 대로를 활보하는 것을 넘어 민족의 주인 노릇을 하며 나라의 정치와 문화, 교육과 경제를 주물럭거리고, 자신들의 이익 도모에 열을 올리는 한 치의 변함도 없는 현실이 지속되고 있. 윤의 내란은 이것들, 바로 청산되지 못한 친일 부역무리를 그대로 잔존시킨 우리의 좌절된 현대사에 그 뿌리가 있음이다. 이 책의 고귀한 가치는 그 어떤 언어로 강조해도 부족할 것이다.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에 뿌리를 내리면서 민주주의의 근간을 파괴하는 일본의 파시스트 세력이 그대로 권력을 유지하게 된 연원에서부터, 친일 무리들의 극히 일부분의 척결조차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들, 부역자들의 구체적 면면, 이 역사적 상황이 지니는 오늘의 의미까지 2025년을 사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숙독해야만 하는 필독서라 할 것이다. 태생 자체가 기만과 거짓인 수구정당, 손쉽게 폭력을 동원하여 저항하는 이들을 짓밟음으로써 민주주의를 이 땅에서 오랜 세월 질식시켰던 것과 그 종자들이 왜 발본색원(拔本塞源)되어야 하는가를 성찰할 수 있으리라. 저자들은 이렇게 맺는다.

 

반민특위는 1949년 실패했으나 그렇다고 지금도 실패할 까닭이 없다.... 도대체 그날 그 순간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기억하고 알리며, 누가 가해자이고 희생자인지 직시하면 시작 할 수 있다.. 진실에서 후퇴하지 않는 역사를 우리는 지니고 있다고, 때문에 반민특위는 그 임무를 완수 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님을 선언한다. 이제 우리들은 반민특위를 재입법하고 그 실천을 완수해야 할 역사적 임무 앞에 섰다. 윤 씨의 부패와 퇴행성 덕택에 숨어있던 친일 종자들이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는가! 이것이 진정한 역사의 힘일 것이다.

 

(이 글에 대한 참고 글로 송건호 외 공저, 해방 전후사의 인식 1및 그 후기 참조-나는  해방전후사 1권이 출간된 1979년 다음 해인 전국 비상계엄령 하에 군부에 의해 판금되어, 대학 3학년 이었던 1980년에 돌려 읽어 너덜너덜해진 복사된 프린트물로 읽었으며, 그로부터 41년이 지난 2021년 정상적인 책으로 다시 읽었다. 40여 년 전의 상황으로 역행하는 그 퇴행성을 인식했던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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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적격자의 차트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6
연여름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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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눈빛은 이미 자기의 삶을 장악한 자의 것이었거든.” - 116쪽에서


강렬한 이야기다. 경계를 두르고 그 내부에 폐쇄적 집단을 형성하는 인간 무리들의 삶의 형식과 내용을 통해, 그들의 언어와 행동 양태를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바라보는 것은 야릇한 흥분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의 힘, 상상력의 힘이란 어쩌면 인류가 자신들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한 위대한 방편인지도 모르겠다. “2692823, 생애한도가 연장될 수 있다는 소문이 병원을 도는 중이었다.” 소설의 첫 문장이다. 그리곤 이번 오류 사건이 규모가 컸기 때문이라는 문장이 뒤따른다. ‘오류 사건은 소설의 표제에 있는 부적격자와 하나의 관련어로 묶여 이 소설의 서사를 이끄는 핵심어랄 수 있겠다.

 

부적격자라는 단어는 개념 자체에 어떤 기준을 내포함으로써 특정한 시대와 공간, 그리고 집단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새로운 다섯 차례의 세계대전과 기후변화, 바이러스로 인한 식수오염으로 종말의 위기에 내몰린 일군의 생존 무리들은 오염되지 않은 식수원을 찾아 방벽을 쌓고, 외부로부터의 오염원을 차단하여 생존을 보호하기 위한 경계를 두른다. 즉 경계 내부가 된 집단은 자신들만의 규범을 통해 적절함과 부적절함을 나눈다. 부적절함이란 이처럼 특정 집단 체제가 자신들의 안전이라는 명목 하에 배제하는 것들이다. 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 허구가 되어버리고 금지되거나 사장되어 버린다. 보이지 않는 폭력의 한 유형이다.

 

그런데 배제라는 것은 영구적으로 고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 상황의 다름, 적용 대상의 구분 등등 무수한 요인들에 의해 변화하는 것이다. 본래적으로 자의성을 내재하는 것이고, 개념상 상대성을 지닌다. 모세라는 인공지능의 제안으로 발견된 오염되지 않은 식수원의 발견에 따라, 한정된 자원 내에서 살기위해 불가피하게 구성원들의 생몰(生沒) 연령의 한계를 설정하게 되고, 집단의 리더가 지닌 인류의 경험, 권력이 고이고, 내부분열과 탐욕과 악의, 도덕적 해이로 인해 자멸하는 것을 알기에 인공지능과 인간은 상호협력 관계자로서 인공지능 모세를 중재자로 하고, 공동체의 구성원을 실무자로 하여 한정된 공간에서 8만 명의 인간이 안전하게 생존할 수 있는 대략 40년을 생애한도를 설정한다. 따라서 중재도시에는 그 어떤 리더도 없으며, 중재자인 인공지능 모세 또한 실무자들이 중재자의 제안을 받기를 원치 않는다면 언제든 사용을 중지할 수 있는 그런 존재이다.

 

중재자와 실무자가 합의한 생애한도 연령에 도달한 실무자는 소거된다. 소설의 시간은 그로부터 대략 9세대에 이른 시기이고, 주요 배경은 중재도시 중앙병원이다. 8만 명의 집단구성원은 모두 실무자로 불리는데, 제각기 방벽 내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일을 수행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책은 애초부터 부적격자 차트임을 거듭 강조한다. 어떤 실무자가 부적격자일까. 소설은 바로 이 부적격에 내포된 무수한 함의들을 통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조건, 그리고 산다는 것은 진정 무엇인지를 생각게 한다. 우리들은 생존을 위해 무엇까지 포기할 수 있는가?

 

세대를 이어가며 상시 8만 명의 생존유지가 가능한 세계가 목적인 곳, 그래서 최소의 필요로 살아가야 하는 곳이기에 효율성을 덕목으로 하는 합리(合理)가 최고의 원칙이다. 사치, 유희, 쾌락, 종교, 예술, 감정 등 인간의 모순을 촉발하는 변수들은 금지, 제거되고, 욕망과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 균형제라는 약물을 정기적으로 투여한다. 한편, 세대를 거듭하며 방벽 바깥이란 모두에게 각인된 근원적 거부로서의 의미를 띠게 됨에 따라, 모든 허구는 모순이라 여겨지고, 상상력은 죽은 단어가 된다. 실무자로 지칭되는 모든 구성원들은 점차 중재자의 합리에 길들여져 간다. 허구, 이야기, 상상력은 도시의 안정과 지속을 위협하는 개념이 된 것이다. 합리를 구성하는 효율성의 관점에서 허구는 불필요한, 군더더기요, 생존의 필요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기록은 그래서 철저하게 군더더기가 제거된 사실인 필요 내용이외에는 기재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융통성, 충동, 소중함. 애착, 애도와 같은 생존의 필요라는 효율성의 기준과 모순되는 단어들은 전부 죽은 단어가 된다. 한편, 사실로 확인되지 않거나 확인될 수 없는 꿈이나 상상과 허구를 이야기 하거나 이를 듣고도 중재자에게 고발하지 않는 실무자도 결점을 부과 받는다. 생애 연령 한도에 이르기까지 결점이 7회 누적되면 즉시 부적격자가 되어 3병동에서 소거된다. 하나의 예로 워터드롭이라는 중재자와 소통하는 일종의 리시버가 있는데, 이의 미착용도 결점 대상이다. 모든 대화는 이 워터드롭을 통해 중재자에게 전송되고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다. 일종의 감시체계이다.

 

따라서 이를 귀에서 제거하는 행위는 집단규범을 위협하는 행위가 된다. 이제 오류사건의 의미를 말 할 때가 된 것 같다. 오류사건이란 생애연령 한도에 도달하기 전에 몽증을 겪으며, 욕망과 감정을 통제하는 균형제라는 약물의 투입으로도 완화되지 않는, 결국 자기 소거를 감행하는 부적격자의 발생이며, 이는 실무자들에게 심리적 영향을 끼쳐 동시다발적으로 많은 실무자가 사망하는 일종의 재난을 일컫는다. 소설의 시작문장에 생애한도가 연장될 수 있다는 것은 실무자의 무더기 결손으로 불가피하게 한도에 도달한 실무자들의 연령한도를 연장하여, 중재도시의 정상적 순환을 가능토록 하는 조치이다.

 


실무자들은 중재도시에서 세대를 이어가며 생존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포기했다. 자신들의 감정과 쾌감과 욕망, 그리고 꿈과 상상력, 이야기마저도 효율성이라는 합리를 위해서. 이는 다시 말해서 인간이 지닌 모순성, 즉 두 가지의 판단, 사태 따위가 양립하지 못하고 서로 배척하는 상태에서 갈등하는 존재이기에 이 모순을 소거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꿈이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간의 현상이고, 이는 다양한 상상을 낳는다. 이 상상은 마음에 홀로 담기에는 버거운 것이고, 발설하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 또한 방벽 밖의 세계가 제아무리 근본적 부정을 의미한다지만 호기심, 궁금증은 물론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무수한 가공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게 된다. 인간은 이러한 행위를 통해 자신들의 지식을 늘려나가고, 그 무지를 줄여나감으로써 경계 밖의 존재자들은 물론 다름을 수용하고 포용성을 확대해 나간다.

 

그러나 중재도시에서 이것은 도시의 생존을 위협하는 범죄적 행위다. 합리의 저해는 곧 도시의 생존성 저해인 까닭이다. 오류사건으로 인해 생애 한도가 연장되자 소거 대상자의 최후 기록을 담당하던 1병동 근무자인 세인은 한시적으로 부상 또는 질병 실무자들을 치료하는 2병동에 근무하게 된다. 세인은 방벽에서 떨어져 기억을 상실한 방벽유지 보수 실무자인 레드를 담당하게 된다. 기억을 상실한 레드는 세인에게 허용되지 않는 군더더기의 이야기들, 사용하지 않는 죽은 단어들은 물론 도시 공용어인 존중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어느 날 레드는 자신의 귀에서 리시버인 모세를 빼 내고는 세인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암묵적 신호를 보낸다.

 

중재자가 들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지만 모세를 차단한 시간이 168시간, 일주일이 경과하면 결점이 1회 누적된다. 168시간은 레드가 결점 부과 한계시간을 알기 위해 자신의 귀에서 빼내 알아낸 사실이다. 부적격자로 강제 소거 될 위험을 알면서도 저지른 행위라는 점이다. 자신에게 죽음의 가능성이 설정된 한도보다 빨리 도래할 것임을 알면서도 저지른 이 행위는 그저 단순한 일탈이 아니다. 그는 내부 체계가 금지한 것, 특히 상실된 선택이라는 자유를 행사한 것이다. 무결점 실무자인 세인에게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그 역시 발설되지 않은 자신만의 꿈의 세계를 간직하고 있으며, 그 머릿속 상상의 세계에서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기에 레드의 제안을 수락한다. 모세를 자신의 귀에서 빼내고 레드와 세인은 자유롭게 확인되지 않은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군더더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너무도 많은 인간 삶의 조건에 대한 물음들이 내재하고 있다. 생애 한도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날이 도래하면 자발적으로 소거되는 삶에 대한 물음, 타인의 상상과 그에 기초한 이야기 나눔의 금지란 대체 인간에게 무엇인지, 그리고 방벽 바깥이라는 잊혀진 부정의 세계, 다시 말해 금지된 무지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 그 앎의 욕구에 대한 본질적 물음이다. 이에 더해 적격과 부적격의 구분이란 것의 그 자의적 분별이란 것 또한 중재도시가 금지한 허구의 하나가 아닌가하는 것이다. 이제 모두에 인용한 자기의 삶을 장악한 자의 의미가 조금은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외부에 무언가를 바라거나 거기에 어떤 목적을 두지 않는 내적 확신을 지닌 주체적 존재의 힘으로서 인간의 존재 조건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체계에 순종한 한 실무자의 고발에 의해 강제 소거된 레드가 14년 전 방벽 너머에서 보았던 하얀 머리를 한 낯선 인간에서 발견된 자기 삶을 장악한 자로서의 삶을 위해 세인은 3세대 이후 한 번도 열린 적 없는 굳게 닫힌 방벽의 육중한 출입문을 열어젖힌다. 세인의 이 행위에도 여러 의미들이 함축되어 있는데, 그는 레드의 몽증(夢症)을 공유했으며, 부적격자인 레드에 대한 애착을, 그리고 허구를 재생산하고, 이윽고 그것을 실행한 것이다. 그리고 세인은 레드를 이렇게 기록한다. 얼마나 비합리적인 사람이었는지, 얼마나 반짝거리던 사람이었는지.”라고.

 

우리는 이야기를, 허구의 소설을 왜 읽는가? 우리는 왜 꿈을, 희망을 갈구하는가? 아마 그것은 알지 못하는 내 인식 경계 너머의 존재와 존재자들을 알고자 함이요, 그를 통해 혹여 금지와 배제로 자기만의 동굴 속, 그 편협과 왜곡에 묻히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또한 두려움의 지대를 벗어나 가능성이 숨 쉬고 있을 경계, 방벽 너머로 나아가려는 삶에 대한 무한한 의지와 용기일 것이다. 세인을 따라나선 이폴, 그들은 언어라는 한정된 영토를 떠남으로써 새로운 언어를, 그 낯선 지대를 발견하고, 허구로 치부되었던 바깥이 곧 진실임을 알게 된다.

 

이 소설은 왜 허구의 이야기가 읽혀야 하는지를 강하게 역설하는 작품이다. 또한 바로 그 상상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들은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언어와 삶의 조건들을 발견하게 되고, 자유라는 선택의 주체로서 자기 삶의 지평을 확장해 나갈 수 있는 것임을 이야기 속에서 절로 깨닫게 이끈다. 레드의 차트를 기록하는 세인의 눈동자에 깃든 작은 불꽃, 또 그것을 바라보고 기쁨을 느끼는 이폴의 마지막 모습에서 인간의 모순성, 절망적 상황에서 죽음을 희망하며 한편으론 삶을 갈구하는 비합리가 어쩌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바로 그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만일 우리들이 어떤 특정한 집단만의 공동체를 꾸린다면, 그래서 그곳에서 생을 누려야 한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포기할 수 있을까? 생존을 위해 꿈과 감정과 선택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을까? 효율과 합리성만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 수 있을까? 이 소설은 자본주의의 척추인 이들 합리가 최고의 원칙인 오늘의 세계가 우리들에게 무엇을 앗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반면교사일 것이고, 감정과 상상력과 허구의 이야기가 지닌 그 강력한 힘이란 무엇인지를 깨우치게 하는 작품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한 호흡에 내쳐 달려 읽게 되는, 그와 동시에 굵직한 인간 삶의 본래적 조건을 생각게 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너의 처지를 기꺼이 상상하는 용기, 그러한 힘들이 이 무심한 세상을 완전히 박살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은 거라는 작가의 말로 감상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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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정치+철학 총서 5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최장집 한국어판 서문, 박상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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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다시금 소환되는 까닭은 바로 지금 한국사회가 처한, ‘위기가 일상화된 비상한 시기에 대응하는 정치론으로 써진 책이라는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오늘의 민주주의 정치사회에서 수용될 수 있는 것은 극히 소수의 문장일 것이고, 다만, 최초의 사실주의 정치 행동론의 저술이라는 점에서 반면교사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군주론단지 절대적 전제군주의 치국과 치정을 위한 책략과 자질(태도)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다만, 그것은 제15사람들, 그 가운데서도 특히 군주가 칭찬 또는 비난받는 일들에 관하여에서 거듭 강조하듯, 사변적 상상력보다는 사물에 실효적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훨씬 더 적절한 일이라며, 군주론은 정치적 행동주의로서 군주의 행동 방향을 말하는 것이지, 군주이외의 정치권력을 상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군주론이 집필된 피렌체를 비롯한 이탈리아가 이전투구(泥田鬪狗)의 혼돈과 약육강식의 시대였음을 새삼스레 설명하는 것은 진부할 정도이니 여기서 서술하는 것은 생략한다.

 

상호 먹고 먹히는 침략과 병합의 반복을 지속하는 이탈리아의 분열상을 끝내고 통일된 강대국의 건설을 위한 절대군주의 한 정형적 모델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군주론은 오직 이 소임을 달성하고 유지하기 위한 강력한 절대군주의 비르투(virtu ;자질, 역량)의 서술이다. 이 자질이 수행됨에 있어 그 배경이나 수단에 있어 백성의 호감은 음모에 대한 안전책이라던가, 군주에게 가장 훌륭한 요새는 백성이다. 훌륭한 요새는 백성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 것과 같이 민의 기반을 말하는 것은 오직 군주의 통치 안정과 유지를 위한 여러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이것을 공화주의 토대니 민주주의의 토대니 하는 것은 책의 의도가 아닌 후대의 자의적 해석일 뿐이다.

 

따라서 이 책은 통치 권력의 쟁취와 그 유지술책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마 이 책의 가치를 구태여 논한다면 도덕적 혹은 종교적 이상주의의 낡은 정치적 관념을 벗어나 정치적 사실주의에 기초한 최초의 경험주의적 정치의 장을 열었다는 점일 것이다. 정치를 도덕적 규범이나 종교의 세속적 실천 규칙으로 접근하면 할수록 정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멀어지고 정치의 타락은 심화되기 때문이다. 도덕적, 종교적 담론이 자기 이익추구의 인간 욕구를 배제하게 됨으로써 오히려 공공선을 의무로 해야 하는 자들에게서 도덕적 종교적 의무감으로부터 이탈하게 하기 때문이다. 정치를 허울 좋은 이상주의 장막으로 가리고 그 뒤에서 얼마나 잔혹하고 탐욕스러운 추악함이 요동치는가. 마키아벨리는 그 장막 이면을 드러내놓음으로써 현실 정치의 효능을 갖는 진짜배기 정치윤리를 찾으려 한 것이다. 군주론은 부정성(否定性)의 반성적 측면으로 독해함으로써 오늘의 이해를 지니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읽어야 할 곳으로 제 7타인의 군대와 행운으로 얻은 신생 공화국에서 군주론의 절대군주 모델이 된 교황 알렉산드르 6세의 서자로서 로마냐 공국의 군주가 되었던 체사레 보르자(발렌티노 공작)의 기만술 사례다. 점령지 로마냐 지방에서 저항과 반란의 목소리가 빈번해지자 심복인 레미로 데 오르코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파견한다. 레미로가 잔혹한 조치의 수행으로 평정하자, 그 잔인성은 체사레 보르자 자신과는 무관한 오직 그 자의 성품 탓이라고, 그를 참살하여 두 토막 내 광장에 놓아둠으로써 비난이 자신에게 향하지 못하게 한 일화다. 악역으로 이용하고 죽음으로 내치는 것인데, 한국의 작금의 상황에서 펼쳐지는 어제의 심복을 사살 명단에 넣은 것은 살아있는 실례(實例)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군주론은 엄청 나쁜 머리라도 이해 할 수 있는 책이라는 것이며, 나쁜 머리로 이해될 수 있는 책이기에 그 나쁨을 그대로 모방할 능력이외에는 없는 인간들 때문에 이 책은 불온하기 그지없는 책이라고도 하겠다.

 

마키아벨리는 유독 포르투나(fortuna ; 행운, 운명)와 비르투(virtu ; 용기, 자질, 역량, 야만성)의 적절한 조화와 더불어 비르투의 함양을 강조하고 있는데, 결국 포르투나는 인간 개체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그렇기에 비르투가 절대군주, 이를테면 오늘의 독재자에게 더없이 요구되는 역량이라 할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권력 쟁취를 위한 모든 자질을 비르투라 하는 것은 아니다. 동료 시민을 죽이고, 배신하고, 신의 없이 무자비한 행위로 찬탈하는 것은 비르투가 아니라고 제 8극악무도한 행위로 군주가 된 인물들에서 시칠리아의 폭군 아가토클레스의 힘은 비르투가 아니라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 사례의 기저로부터 마키아벨리 이전의 정치와 그의 정치술, 즉 근대적 정치론으로 나뉘는 하는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출현한 것일 테다. 그는 폭력이 단번에 모두 실행되어 이후에 지속되지 않으며, 백성들에게 이익이 되는 수단으로 바뀔 경우잘하는 정치라고 부르고, 폭력(잔혹한 행위)이 드물게 시행되다 점차 그 빈도가 증가하는 경우.”잘 못하는(나쁜) 정치라고 부르고 있다. 인민을 안심시키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위협과 가혹행위를 저지르는 권력자는 권력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15장과 17장은 군주론 중에서도 악랄한 독재자(절대군주)의 행위를 정당화 하는 몇 장에 해당한다. 15사람들, 특히 군주가 칭송받거나 비난받는 행동들에는 선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사람은 선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곧 몰락할 것이다.” 라며, 자신을 보존하고자 한다면 상황에 따라 선하지 않게 행동하는 법을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악덕 없이 지위를 유지할 수 없다면, 그 악행으로 인해 나쁜 평판이 발생하는 것을 개의치 말아야 한다.”, 절대군주의 지위 보신에 역점을 두고 있다. 오늘의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악덕이다. 주권의 소재가 인민에 있는 정치사회에서 가당치도 않은 자멸적 행태라 할 수 있다.

 


17인자함과 잔인함, 두려움의 대상이 될 것인가는 한 술 더 떠서 백성의 결속과 충성을 바치도록 할 수 있다면 잔인하다는 비난을 걱정할 필요 없다. 소수의 몇 명을 가혹하게 처벌해서 질서를 잡는 것이 공동체 전체를 위해 자비로운 행위다.”라며, 인간은 본디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럽고, 위선적이고 기만에 능하며, 비겁해서 위험을 피하려고만 하고, 이익에 눈이 어둡기에, 걱정 요소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인간 본성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다. 이것은 한국의 특정 지역민의 선거투표 행태가 보여주는 자신들을 개, 돼지 취급해도 다시 자신들을 무시하는 인물을 위해 투표하는 행위가 여실히 마키아벨리의 손을 들어준다. 그러니 인간 오물에 불과한 잡놈이 1년만 지나면 저것들은 모두 잊어버린다는 망발(妄發)을 할 수 있는 것일 게다.

 

해서 마키아벨리는 이런 말이 가능했을 것이다. 가장 악명 높은 장으로 지목되는 제 18약속을 지키는 법에는 위대한 업적을 이룬 군주들은 신의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기만을 통해 사람들을 혼란시키는 데 능숙했다며, 인간은 매우 단순하고 눈앞의 필요에 따라 쉽게 움직이기에, 능숙한 기만자이자 위선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마키아벨리가 살던 당대의 정치 감시체제는 오늘의 정치 사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폐쇄적이고 낙후된 것이었기에 가능한 말일 것이다. 물론 지금에도 폐쇄된 장막 안에서의 밀실 정치를 모두 헤아리는데 한계가 있으나. 그 정치적 행위가 표면화되는 순간, 엄청난 저항과 법의 세례를 마주해야 할 것이다.

 

이어서 사람들은 겉모습과 결과에 현혹되기에 외양만 자비롭고 신의가 있으며 정직한 것처럼 보이면 된다.”고 주장한다. 오늘은 이러한 위선과 기만이 가려지는 시대가 아니다. 이 말을 오늘에 실천하려했던 머리 나쁘고 탐욕스러운 인간의 저 비겁한 작태를 보라. 19경멸과 미움을 피하는 법에 이르면, 권력유지를 도와주는 집단이 부패했다면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들이 좋아하는 방식을 따라야 한다. 군주의 선행은 오히려 군주에게 해로운 일이다.”고 부패에 합류하고, 그 부패를 막아서는 군주는 오히려 위험하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이것이 지금 파면을 앞둔 독재자를 지지하는 파렴치한 무리들의 작태이다. 보수란 이처럼 무엇인가의 근절을 막는 반동적이고 퇴행적 행태, 즉 마키아벨리가 인간의 본성이라 인식한 그 더러운 습속의 다름 아니다.

 

25운명은 인간사에 얼마나 강력하고, 인간은 운명에 대하여...에서는 급기야 나쁜 짓을 하고도 벌을 면할 수 있다는 생각이라는 군주론의 정치핵심이 드러난다. 필요할 때 주저 없이 사악해져라. 오로지 선만으로는 권력을 지킬 수 없다. 덕이 없어도 그것을 갖춘 것처럼 위장하라.”라고, 중요한 것은 오직 결과라고 선악의 잣대는 정치에서 부질없는 것임을 역설한다. 이것이 바로 세간에 회자되는 그 악명 높은 마키아벨리즘의 실체다. 이것은 마키아벨리가 시종일관 사용하는 개념어인 네체시타(necessita;불가피성)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은데, 세상만사는 모두 인간 의지와 이성의 통제 밖에서 움직인다는 상황 대응론이다. 이것이 모순인 것은 포르투나에 제약 받음에도 비르투를 통해 극복하고 대응하여야 한다는, 책 속 무수한 성공 군주들의 사례와 상충하는 것이다.

 

막상 잔혹한 폭력성과 거짓, 기만, 위선을 행할 때면 상황론, 즉 네체시타라는 운명론을 들고 나오면서 그것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나의 독해와 반대 측에 선 정치론자들은 군주론은 선악을 초월한 정치 고유의 윤리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 고유의 윤리란 것이 인간 사회의 보편적 도덕윤리와 별도로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의 대답은 대의를 위해 작은 의의는 희생될 수 있다는 논리를 편다. 나는 이러한 영웅주의적 대의 정당화 논리의 역겨움을 여러 지면에서 지적한 바 있다. 제국주의의 논리요, 서세동점의 논리이며, 강자의 논리이다.

 

이것에 적절한 응답이라면 제21탁월한 존재로 여겨지려면 군주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서 발견되는 정치에서의 어떤 국가든 항상 안전한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어떤 선택이든 꼭 필요한 것인지 의심해봐야 한다.”는 문장일 것이다. 정치에는 완벽하게 안전한 선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 선택은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것을 회피하는 것이어야 하며, 배제됨이 가장 작은 다수의 충족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원칙일 것이다. 악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선하지 않을 수 있음을 배워야하는 것만으로는 바른 정치가 설 수 없다. 폭력에 비폭력으로 대항 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어야 하고, 그 비폭력적 저항이 수용될 수 있는 사회만이 인민의 자유와 안전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정치 이론가들은 말한다. 수단의 합리성만 다루는 정치론은 오늘의 정치에서 상상할 수 없는 것이라고. 헛소리! 이렇게 기만적인 소리들이 식자연(識者然)하며 이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다. 오늘의 정치는 그 어느 때보다 수단의 합리성, 법적 근거와 국민의 목소리라는 정당성에 기초해야 하는 것이지, 이 수단을 배제하고서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실천적 결과주의는 지금과 같은 패덕(悖德)을 낳는다. 목적론적 초법적 행위는 언제나 민의 희생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이상적 정치를 향한 노력의 경주가 그치는 순간, 다시 말해 민주주의의 근간에 대한 경계의 감시를 게을리하는 순간 인간 사회는 다시금 저 퇴행적 야만의 세계로 회귀할 것이기에.

 

이 책은 그칠 줄 모르고 피바람을 몰고 오는 정치적 격변의 시기에 좌절하는 수많은 인민들의 갈망이 담겨있는 저술이다. 힘의 논리에 의해 수없이 반복되는 불안정한 생의 환경에서 절망하는 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다. 통일된 이탈리아를 세울 강력한 군주의 출현을 위한 한 순간의 대의를 위한 참담한 제언으로 읽혀야 한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시종 인민(백성)의 시선을 그 권력의 토대로 삼고 있는 것일 게다. 그는 실효적 진실을 추구함으로써 정치의 그 생생한 민낯을 드러내어 권력의 한계를 인식시키고, 술책의 한계가 절로 떠오르게 한 것이다.

 

이러한 측면을 간과하고 특정 문장의 서술만을 꺼내 그것을 아전인수격으로 사용하는 것은 곧 독재자와 그 기생자들의 불의한 정당화 논리가 될 뿐이다. 이 책은 그야말로 세심하게 읽어야 하는 저술이다. 이것은 독재자를 위한 저술이다. 그러나 그 한계를 말한 것이고, 그 저변에 흐르는 정치 윤리적 토양은 민중주권과 시민참여의 정치다. 군주론으로 마키아벨리를 읽는 것으로 그쳐서는 이러한 그의 정치적 신념을 해독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를 읽는다면 필히 공화정과 민주정을 말하는 그의 로마사 론을 읽음으로서 완성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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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가 다른 곳에서 이미 말했다는 것은 그의 저술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 첫 10권에 대한 강론(Discorsi sopra la prima daca di Tito Livio)이다. 국내 번역본으로는 로마사 론, 로마사 논고마키아벨리 로마사 이야기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 이 글은 세 권의 국역본 군주론을 읽고 그 감상을 쓴 글이다. 주로 읽은 책은 후마니타스에서 출간한 박상훈 옮김, 최장집 해제의 군주론이고, 보조 읽기용 책으로 이시연 번역자의 더스트리 출간본이며, 이상두 선생 번역의 범우사 출간본은 내가 처음으로 읽었던 1975년의 번역판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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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07 13: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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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07 13: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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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하나는 거짓말 (니트 에디션) (3종 중 1종 랜덤)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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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번 허물을 벗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인 채 존재하는 기분이 어떨지 궁금했다.

그 과정에서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부분은 간직하는지...” - 59

 

소리, 지우, 채운, 소설의 세 주인공이다. 아이들은 오직 자신만이 답할 수 있거나, 스스로가 깨고 나와야 하는, 제 각기 자신에게 던져진 물음에 묻혀 있다. 그것은 폭력 가장에 대한 분노이고, 엄마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이며, 세상에 홀로 버려진 듯한 원망이기도 하다. 마음에 버거운 물음들이란 그 정답이란 것이 애초에 있지도 않은 것이고, 어쩌면 생의 여정이라는 시간 속에서 여물게 되는 것일 게다.

 

지우는 뇌종양을 앓던 엄마가 실족사하고, 엄마의 남자 선호아저씨 집에 의탁하여 산다. 지우는 작은 도마뱀인 용식을 돌보며, 서로 의지하는 삶을 산다. 지우는 엄마의 실족사가 자신의 미래를 위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하며, 이것은 엄마로부터의 버림받음과 희생이라는 원망과 안타까움의 감정을 오가게 한다. 소리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손이 닿은 사람들의 윤곽이 흐려지면 상대가 죽는다는 느낌을 갖게 됨에 따라 쾌활한 성품에서 사람들과 차츰 멀어지는 고립된 삶 속으로 들어간다. 소리는 오랜 투병을 하던 엄마를 잃었다.

 

채운은 지우와 소리가 있는 학급의 전학생이다. 그는 축구 선수의 삶을 의도된 부상으로 중단했다. 아버지의 무능과 폭력, 엄마에게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던 아버지의 살의에 대항하다 사고가 난다. 엄마는 채운을 대신하여 수감된다. 채운은 엄마의 수감, 그리고 사고의 불가피성과 응징하고 싶었던 욕망의 소용돌이에서 번민한다. 채운은 그의 반려견 뭉치에 의지하며 이모 내 신세를 진다.



소설은 그렇게 각자의 작은 재능과 타인의 시선을 반영하며 자기 이해를 넓혀나간다. 고사리 숲 사이로 노란 홍채가 고요히 빛나는용식이 여러 번 허물을 벗으면서 여전히 자신인 채 존재하듯, 세 사람은 그렇게 자신들 밖의 세계를 겪어내며, 동일하지만 다른 사람으로 조금씩 변화해 나간다. 지우가 연재하는 많은 지문을 지닌 만화 <내가 본 것>을 통해 채운이 자신과 타인의 번뇌를 읽어내고, 공사장 노동현장에서 하루하루 악착같이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로소 인식하며, 자신이 그리는 이야기 속 주인공들을 다 죽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건 결국 그 마음을 내려놓는 것임을 깨닫는 것처럼, 아주 조금씩 미세하게 변하는 세 사람의 여정을 그려내고 있다.

 

세상은 남의 불행을 바라는 저열함도 있으며, 상대적 약자를 무시하고 따돌리려는 유치하고 가혹한 놀이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부모님 병원비 마련을 위해 혹독한 노동을 감내하는 사람들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를 향한 따뜻한 손길도 존재하며, 순간의 비뚤어진 감정을 관대하게 용서하는 엄마와 같은 마음도 있다. 이 작품도 많은 성장소설들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지만, 세상의 편력을 거친 끝에 어떤 특별한 재능이나 지위를 이루었네 하는 얘기는 아니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 아님을 깨닫는 이야기, 그냥 그래도 괜찮다고, 우리 안의 무언가 작은 변화를 깨달은 그 마음을 지니는 것 자체를 긍정하는 이야기다. 소설을 읽어나가며 어느 순간부터 지우, 소리, 채운이 자신들의 물음을 쫓아 내딛는 발걸음들을 숨죽이고 응원하게 되는 자신을 느끼게 된다. 어른들이 할 일이 아주 많다. 내부자의 시선은 많을 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경계 너머의 타자의 세계를 생각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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