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새 1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지음, 이재형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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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냄새, 악의 냄새, 어둠이 분비하는 즙의 냄새” 가 옅은 안개처럼 낮게 드리운 채 작품 전체를 아우른다. 외교관 부부의 양자로 하릴없이 젊은 삶을 지탱하는 ‘루이 앙티오슈’와 조류학자 ‘막스 뵘’의 만남은 이례적이다. 작품은 처음부터 복선과 암시, 그리고 독자를 긴장으로 안내한다. 역겨운 인간의 잔인성이란 극한적 치부를 드러내며 숨까지 멎게 할 지경으로 몰입을 재촉하고 두 권짜리 이 스릴러물을 단시간에 읽어내게 한다.

스위스 국적의 황새 전문 조류학자 ‘막스 뵘’은 쇠고리를 황새의 다리에 매달아 이동경로와 습성 등 생태 연구를 하던 중 유럽에서 터어키, 근동(이스라엘,요르단등)지역을 거쳐 중앙아프리카를 왕래하던 그의 황새들이 돌아오지 않는 상황에 직면한다. 주인공 ‘루이’는 막스 뵘의 의뢰를 받아 황새들이 사라진 이유를 찾기 위해 이동경로를 따르는 여정을 시작하려 한다. 그러나 막스뵘은 황새들의 부리에 심하게 손상된 사체로 발견되고, 스위스 경찰 ‘뒤마’의 석연찮은 수사와 의문을 시작으로 황새의 이동경로를 쫓게 된다.

경로를 쫓는 여정에서 의문의 미행자들을 만나게 되고, 황새의 경유지를 안내하던 자들이 무참히 살해당하는 상황에 처한다. 예리한 메스에 잘려나간 신체의 부위들과 장기들, 그리고 숲속에 버려져 동물들에 손상된 채 발견되는 막스뵘의 지역별 조력자들, 사악함의 냄새가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루이는 어느덧 이유도 모른 채 쫓기는 인물이 되고, 막스뵘의 죽음에 석연찮은 비밀이 도사리고 있음을 감지한다. 사건의 추적과 이동은 더욱 빠른 속도로 전개되고,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소스라침을 던지며 척추를 오르내리는 전율을 느끼게 한다.

이 미지(未知)의 두려움과 무서움은 바로 루이 앙티오슈의 앞에 펼쳐지는 끔직한 폭력과 흥건히 흐르는 피의 강과 황새의 관련성을 찾아내지 못하는 공포이다. 잔인하게 도살된 사람들과 황새는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그리곤 느닷없는 다이아몬드의 출현은 작품의 내용을 정교하고 풍부하게 해준다.

스릴러물들이 한결같이 진부하게 사용하는 작의적인 음울한 소재로서의 배경 등은 일체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음습한 악의 냄새가 뇌에 각인된다. 작가의 의지와 강요되지 않는 주제의식이 독자의 적극적 의지와 무관하게 혈관에 흐르는 것 같다.

그리고 풍부하고 일관된 작가의 고발의식은 이렇듯 욕지기가 터져 나올듯한 서스펜스와 스릴에 내재되어 ‘세계는 하나’라는 의료구호단체의 도덕적 허위성 위에선 인간사회의 위선, 빗나간 부정이란 착란적이기 까지 한 인간 근원의 이기적 잔인성, 집시와 아프리카 흑인에 대한 인간적 질시 등 백인서구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 의식, 근동(近東)지역에서의 무차별적 복수와 반목 등 끊임없는 긴장과 종교적 악의성에 이르기 까지 끝없이 우리의 본성을 자극해댄다. 이러한 요소는 바로 우리의 지적 욕구를 진정시키고 작품의 높은 역량에 감동을 느끼게 한다.

“이 사건은 혼란과 감정과 폭력으로 점철된 하나의 사랑 얘기라고 말 할 수도 있습니다.”라는 주인공 루이의 열정적 선언과 같이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본원적이고 필사적이기까지 한 사랑에서, 삶의 언저리에서 방황하는 두 남녀의 열정적 사랑, 재화에 대한 무궁한 탐욕, 왜곡된 의술의 사악한 자선(慈善)까지 그 이기성과 이타성의 얼룩진 혼합물로 사랑이 그려지고 있다.

또한 극적(劇的)요소들의 적절한 배치와 반전의 반전, 크라이맥스의 가파른 고지로의 걷잡을 수 없는 속도감은 문자대로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재미와 지적흥분, 스릴러의 책임감, 가식과 위선의 폭로로 이어지는 카타르시스까지 완벽한 구성을 갖춘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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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다리 - 제1회 문학의 문학 5천만원 고료 소설 공모 당선작
우영창 지음 / 문학의문학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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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를 달래려고 부딪는 세상에서 우린 항상 외롭고 고독하다. 스스로 펼쳐놓은 욕망을 향해 내닫지만 그곳 어디에서도 우린 어떤 충족의 대단원을 맞이하지 못한다.

도심의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올라 위용을 자랑하는 거대한 고층빌딩의 허영과 그 공간속에 살아가는 그칠 줄 모르는 인간의 허위와 탐욕스러움이 끈적거릴 정도로 적나라하게 그려지고 있다.

“나는 그리고 싶었습니다. 자본의 두려운 유혹과 문명의 음울한 매혹, 명멸하는 숫자와 기름띠 같은 네온에 떠오르는 익명의 존재들을요.”하고 작가는 말한다. 그래서 작품 속 주인공 ‘맹소해’는 이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유혹에 시종 몸을 떨어댄다. 31세의 증권사 영업 대리라는 그녀의 직함은 자본을 쫓는 우리들의 다른 이름이다.

동성(同性)과의 애욕, 직장상사와의 정사(情事), 그러나 결코 쓸려가지 않는 공허함과 결핍의 그 무원한 고독, 그리곤 그 허영의 공간에서 마주한 남자, 그와 같이하는 섹스가 가져다주는 풍요로운 쾌락, 다시 시선을 돌리면 허위와 기만으로 그득 찬 자본시장의 온갖 추물이 넘실대고 그 과실(果實)을 따먹는 인간들의 비어버린 가슴을 바라보게 된다.

진정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인물들로 가득 차있다. 모두 자기 연민에 훌쩍이고 자아실현이란 이상한 구호에 매어있는 에고이스트들뿐이다. 우리의 깨어있는 의식은 어느덧 감각적 황홀함에만 반응하는 구조로 변해있다. 발가락을 핥고, 성기를 입에 넣고, 축축이 젖어오는 아랫도리의 진저리에 순간적 만족의 소리를 질러댄다. 그리고는 다시 찾아오는 의식의 공백에 고독이라는 영혼의 흐느낌을 부둥켜안고 자신을 어루만진다.

무수하고 다양한 인간관계의 연속에서도 그리고 그 복잡다기한 화려하게 윤색된 도시의 휘황찬란한 문명에서도, 끝없이 추구하는 재화의 축적에도 우린 부족한 그 무엇으로 허기져한다. 돈으로 지탱되는 삶속에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들을 위한 기부는 도덕적 허위, 부자의 허영으로 치부된다. 이렇듯 이 작품에서 과제의 해결의식을 찾을 수는 없다. 작가가 풀어헤치고 싶은 무수한 문제의식만 무성하다. 작가의 과욕으로 작품의 구성은 산만하고 소설적 요소의 결여가 무슨 실험 작품인 냥 지루하게 펼쳐진다.

사랑도 이기적이기만 해서 궁극의 구원이 사랑이 되지도 못한다. 끓어오르는 정염(情炎)의 속성만 자극적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순간적이다. 자본과 욕망의 연결, 하늘다리는 그 허영  만큼이나 속되다. 작가는 이 만큼이나 진실하지 못하다. 맹소해로부터 어떠한 인간의 진정성도 읽을 수가 없다. 사람의 내면이 이렇게 조작되고 인위적이기만 할 수 있을까? 작가의 쏟아내고 싶은 무수한 언어들의 과잉이 만들어낸 부조화에도 불구하고 소재의 새로운 시도에 작은 위안을 삼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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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 라이터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4-3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4
로버트 해리스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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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오랜 동안 가슴에 묻어둔 진실에 관한 이야기를 어렵게 토해낸 것 아닌가하는 뒤숭숭한 걱정이 꼬리를 문다. “눈치 챘겠지만 이 글로 인해 난 일종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주인공의 입을 통해 기억과 진실이란 저 밑바닥에 감추어 두었던 비밀이 이 뛰어난 작가의 질긴 고통이었음을 단정 짓게 한다.

기존의 작품들(아크엔젤,이니그마,폼페이 등)이 역사적 사건과 실존 인물을 배경으로 한 팩션 이었다는 점과는 달리 오늘의 정치, 권력 세계를 배경으로 한 권력조직과 그 구성계층들을 중심으로 한 허위와 기만, 음모와 배신과 같은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어떤 작품보다 더욱 작가의 의지가 드러나는 작품이라고 하고 싶다.

영국의 전 수상인‘애덤 랭’의 자서전을 대필하는 작가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어, 이러한 의구심은 더더욱‘로버트 해리스’자신의 익명성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작품의 긴장감은 자서전의 원 대필자의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부여되기 시작하고, 주인공의 1인칭 시점을 이용하여 펼쳐지는 상황마다의 복잡한 심리의 움직임이 포착되도록 한 진행은 그 강도를 더하게 한다. 특히, 영국과 미국이라는 서방세계의 최 상층부 정치세계의 인물들을 대상으로 함으로서 실존 인물들과 교묘히 대조케 하는 위험한 곡예를 느끼게 한다.

“마침내 내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지 않는가? - 中略 - 어차피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지 않은가?”하는 불가피하게 직면해야 하는 다가온 죽음의 그림자 앞의 독백은 소설이 가지는 주제의식의 명료성과 사회적, 도덕적 가치에 대한 존중에 대한 작가의 극적 선회의 확신으로 보인다. 그의 기 발표된 작품들 역시 인간군상 개체에 대한 어리석음이나 헛된 욕망,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사회의 부조리와 파편적 사건을 이야기하였으며 바로 이러한 문학적 내면을 팩션이란 형식으로 간접적인 시사를 하였다는 측면에서 선회라는 표현이 부적절 하게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작품 ‘고스트 라이터(Ghost)'는 숨김의 미덕을 최종적으로 부인하고 있으며, 설사 아무도 믿지 않을지라도 진실을 말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전환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극단적 예로서 어처구니없는 당혹스러움과 터무니없는 허구를 전제로(작가의 의도된 구성이지만) 미국 CIA에 의해 조종되는 꼭두각시에 불과한 영국수상의 추정이나, 자신들의 세계를 보호하기 위한 냉정한 관계청산의 수단 등은 실로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같은 스릴을 준다. 이 작품의 묘미는 또 하나의 관점에서 주의를 주고 있다. 주인공(유령=자서전 대필자의 은어)의 행보에서 취약한 인간 의지의 구조를 해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체로 발견된 전 대필자‘맥아라’에 대한 죽음 의 궤적을 따라 만나게 되는 ‘폴 에미트 교수’, ‘영국 전 외무장관 라이카트’그리고 다시 ‘애덤 랭’과의 대면에서 보이는 인간이 조정하는 인식의 허약한 변화, 그리고 사실, 즉 실제 하는 존재의 가치에 갈등하는 혼란스런 내면 등 인간의 본원적 취약성을 추적한다. 물론 작가는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결국 진정성이라는 결론을 마지막 페이지에서 시사하고 있긴 하지만, 작품 전체에서 보여주는 오늘날의 서방 정치세계를 비롯한 권력계층에 대한 시니컬한 시선은 거두지 않는다.

이 작품은‘로버트 해리스’의 모든 작품들이 그렇듯이 읽는 자의 재미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일종의 추리스릴러의 형식을 가미하여 사건의 진행, 단서와 암시, 그리고 대립과 갈등, 긴장과 불안, 트릭, 보이지 않는 반전 등으로 독자의 상상력의 공간을 가득 채워 작품의 내용으로부터 도피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면, 그러니까, 그러면...,”하고 자신의 지난 행위를 더듬는 황폐한 망설임의 불온하고 불완전한 세상의 폭로라는 진실에 흥행을 멋지게 덧 칠 할 줄 아는 작가이다. 정말 대단한 작품이다.

“오, 세상에 루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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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뒤흔드는 소설

추리, 스릴러, 공포등 장르문학의 역사가 일천하지만 높은 학습열기가 제공하는 상상력, 창의력, 논리와 추론등 탄탄한 이론적 무장과 영상 등 미디어 매체의 발달이 역량 있는 작가들이 탄생 할 만큼 충분한 토양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서구중심의 유명 작가와 최근에는 일본의 장르문학까지 무차별적 대량 마케팅의 공략이 뛰어난 우리 작가들의 작품을 사장시키고 소외시키는 경향까지 느껴진다. 이에 근간(近刊)을 중심으로 높은 작품성과 세계시장에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뛰어난 국내작가들의 추리, 스릴러 문학작품을 소개코자 한다.

로맨틱한 초상
이갑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랜덤하우스중앙) / 2007년 7월

13년만의 재출간, 42세에 작고한 잊혀진 평범치 않은 작가의 작품, 간질로 대발작을 겪었던 순탄치 않은 병력을 지닌 작가, 그리고 추리소설.... 책 표지에는 ‘아트사이코팩션’이란 설명이 붙어있다. ‘팩션’! , 추리소설이 팩션이란다. 작가의 경험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독특한 작품. 작품을 대하는 내내 이 이야기가 작가와 무관치 않다는 기억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독자들에게 잘 알려지지도 못하고 일부 매니아만 인지하고 뒤안길에 묻혀 질 뻔한 걸작이다. 우리나라 추리소설의 경지를 한 단계 올려놓았으며, 외경(畏敬)을 넘어 우리나라 장르 문학작품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안개의 사나이
김성종 지음 / 뿔(웅진) / 2008년 1월

우리나라의 대표적 추리소설 작가인 김성종의 근작이다. 이 작품

은 주인공에 독자들의 감정이입을 완벽하게 유인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작가가 던져놓는 암시들로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하나 하나의 단서들이 베일에서 드러날 때 마다 주인공의 안일함에 은근히 안절부절 하지 못하게 되고, 범인과 같이 사고하고 연민을 가지게 된다.

또한, 독자들이 추리소설이란 장르에 가볍게 다가설 수 있도록 수월하게 그리고 평이하게 그려낸 작품이란 인상이다. 작가의 선의가 느껴질 정도로 치밀성과 섬세함의 틈을 내놓은 추리소설이다. 그래서 오히려 진중함과 높은 작품성을 느낄 수 있다.

 

 

손톱
김종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랜덤하우스중앙) / 2008년 1월

 

등골에 소름과 전율이 좌르륵 흘러내리는 진저리를 몇 번인가 치다보면 어느덧 작품의 말미에 이르러있을 정도로 이야기의 재미에서 시선을 뗄 수 없는 작품이다. 특히, 작품의 치밀성과 구성의 정교함, 신선감 넘치는 이야기의 전개는 수준 높은 장르문학의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공포 스릴러의 진수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장르소설로서, 그 내재하는 인간 숙원의 선과 악의 본질을 탐험하는 악몽의 여행은 우리들이 자행하는 왜곡된 진실에 대한 어두운 이면을 재생의 밝음으로 견인하는 역량으로까지 나아간다. 많은 독자들이 새롭게 형성될 것처럼 보인다.

얼음나무 숲
하지은 지음 / 로크미디어 / 2008년 1월

음악과 텍스트가 이처럼 찬란하게 결합한 소설은 없다 할 정도의 몽환적 음악의 선율, 얼음 나무라는 전설과 저주의 환상적 조화가 돋보인다. 초반부터 독자의 호흡을 휘어잡은 채 내달린다. 많은 독자들이 읽는 내내 책의 분량이 줄어듦을 안타까워 할 만큼 그 흡입력이 대단하다. 작품의 배경과 소재의 탁월함에서부터 문장, 이야기의 흐름 등 높은 격조로 독자를 안내한다. 정말 뛰어난 수작(秀作)이다.

빼어난 우리 작가들의 위 작품들은 잠시 외부에 시선을 돌린 우리 독자들의 시선을 고정시키기에 충분하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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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당무
쥘 르나르 지음, 연숙진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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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혹스러움이 급습한다. 아이들이 하는 익숙한 행동 속에 자리한 무수한 의미들이 그저 아이라서 하는 당연한 과정으로 받아들여지고 말았다는, 무언가 많은 부분을 놓치고 있었다는 자괴감이 들게 한다. 어린아이‘홍당무’가 이토록 가족에게 세상에게 체념적이도록 만든 것은 무엇일까? 아이의 이 위악은 인간의 본질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일까?

19세기 말,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문학이 정착하던 시기에 쓰인 작품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경험과 체험적 재현, 작가의 어린시절 우울한 성장기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측면은 독자의 감정이입을 돕는 역할을 한다. 작가의 1899년7월16일자 일기에서 “『홍당무』는 ~ 中略 ~ 구성되어진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다. 나는 정리하고 재단할 수 있었지만,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하였듯이 하나의 작품이라기 보다는 “누더기를 걸친 영혼을 늘어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기적이고 냉정하며 아이에 대한 사랑을 모르는 엄마, 르픽 부인, 그리고 가정의 내부를 외면하고 외부세계에만 관심 있는 아빠, 엄마를 빼 닮은 듯이 동생 홍당무를 괴롭히고 학대하는 에고이스트 형 펠릭스, 그리고 무관심하지만 그나마 잔정을 보여주는 누나 에르네스틴의 삭막하고 단절된 어두운 감정의 세계가 때론 익살맞고, 괴이하거나, 어린 사색을 통해 평범한 일상을 사실적 현실 그대로 묘사되고 있다.

엄마의 극단적이기까지 한 막내아들 홍당무에 대한 거침없는 위협과 억압, 매질, 그리고 어린 영혼에 대한 그 잔혹한 언어들이 만들어내는 상처는 시종 심산한 감정이 가슴을 억누른다. “르픽 집안의 자녀가 된 건 그 누구 때문도 아니지 않겠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일 뿐, 따라서 본의 아니게 혈연관계가 된 것에 감사할 필요는 없지”텅 빈 토끼장안 토끼 굴에 들어가 앉아서 아늑하고 편안한 마음을 누리는 아이, 어두운 굴속에 사는 토끼의 영혼으로 본연의 자신에 돌아왔음을 느끼는 아이로부터 삶이란 세계에서 무수히 겪을 수밖에 없는 상처들이 생각나 괜스레 통증을 느끼기도 한다.

모처럼의 가정에서 만나는 아빠의 어정쩡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을 통해 가장으로서, 아이의 양육에 책임과 의무를 가지는 자로서 세상의 이치가 어린 홍당무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배려되지 않은 거친 삶을 그대로, “우리란 게 누구냐? 우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란 말도 마찬가지지, 그 누구도 아니지~ 以下 省略”그리고 “행복을 포기해라. 내 미리 말해두는데, 넌 지금보다 결코 더 행복해질 수 없을게다. 절대!”라고, 그리곤 “ 너와 가장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을 존중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되면 삶이 즐거워 질 게다.”이 너저분하고 구차한 조언조차 음울하기만 하다.

“모두들 나름의 고통이 있겠죠, 그러나 제 자신을 위한 정의의 몫을 달라고 주장 할래요”홍당무의 억압에서의 탈출을 위한 저항, 시도와 내면의 복잡한 양면적 관계가 엄마에 대한 증오로 표출된다. 마지막장‘홍당무의 앨범’은 그의 시련과 갈등이 집약화 되어 묘사된다. 집 밖으로 나오면 모든 것에 초연한 사람처럼 휘파람을 불다가도 엄마 르픽 부인이 나타나면 휘파람을 이내 그쳐버리는 아이의 소심한 두려움이 반복된다. 백양나무 꼭대기에 매달린 나뭇잎 하나에서 나무에서 떨어져 혼자 자유롭게 살아가는 처럼 보인다고 공상에 잠기는 홍당무를 통해 가족, 부모의 역할, 형제자매의 관계, 그리고 세상에 대한 시선에 대해 아이들을 위해 함께 생각하는 진실된 시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아이의 사실적이고 디테일한  심리묘사를 비롯해 49조각에 이르는 영혼의 이야기는 가히 가족소설의 백미(白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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