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 이토록 가깝고 이토록 먼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지음, 김정훈 옮김 / 호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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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백하고 익숙한 이 자명한 ‘죽음‘, 그러나 필사적 반감에 휩싸이게 하는 이 ‘비-존재‘의 성찰 불가능한 앎의 사유로의 초대는 어쩌면 인간 앎의 필연적 통과지대가 아닐까요?, 앎의 축복을 향한 이 시대 최고의 걸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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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미술관 - 풍속화와 궁중기록화로 만나는 문화 절정기 조선의 특별한 순간들
탁현규 지음 / 블랙피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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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언제까지 지속했을까? 그리고 어느 시점부터 이로부터 벗어나려는 실천이 시작되었을까? 회화 또한 시대의 정신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이다. 성리학에 의한 엄격한 가치를 백성에게 강요했던 이들 예속된 비루한 정신세계로부터 탈출은 숙종조인 1700년대에 이르러서야 시작되었음을 화원들의 그림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들 화가의 그림은 중요한 사료(史料)의 하나라는 것이다.

 


이 책은 조선 문화의 절정기인 숙종(肅宗)에서 정조(正祖)까지 태평시국을 반영한 화원들의 회화를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의 오랜 사슬을 끊고 조선 고유의 산수와 풍속을 그리기 시작한, 그야말로 조선 사람과 그네들의 풍경, 습속과 삶의 형상들을 보여주고자 하는 듯하다. 복색도 중국의 것을, 하다못해 묘사되는 동물도, 산천도 중국의 것을 그린 것만을 고집했던 이 철저한 굴종의 정신을 벗어나는데 조선 19대 임금에 이르는 시간이 요구되었다는 것은 사대주의에 뿌리를 내린 기득권 사회의 자기 보위라는 끈질긴 탐욕 때문이었다 할 것이다.

 

책은 전시관의 구성을 하고 있는데, 1전시관은 풍속화와 산수화를 통해 평민과 기생, 사대부와 사대부가 여인들, 사미승을 비롯 노비에 이르기까지 당대 인간들의 삶의 실체 속으로 뛰어들게 하고, 2 전시관은 임금의 기로소(耆老所) 입소를 축하하는 궁궐의 성대한 잔치 기록화인 숙종의 <기해기사첩>과 영조의 <기사경회첩> 대비를 통해 관료사회의 엄격한 형태와 복색과 문물, 가치관의 변화를 읽는다.

 

조선 그림의 양대 산맥인 산수화와 풍속화를 모두 조선화(朝鮮化)시킨 화가가 겸재 정선이다.”

 

중국화를 벗어나 조선의 것, 진짜배기 조선의 진경(眞景)을 그리기 시작한 인물이 정선이고, 이는 진경풍속을 완성한 조영석(1686-1761)으로 이어지고, 평민 풍속의 종결자인 김홍도(1745-1806)와 양반 풍속의 끝판왕인 신윤복(1758-1813?)”으로 대미를 맞이했다. 그렇다고 이들 네 화가의 그림만이 소개되는 것은 아니다. 신윤복의 부친인 도화서 최고의 화가 일재 신한평, 긍재 김득신을 비롯 기록화를 그린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초상화 등을 통해 당대의 화풍이나 그네들 그림의 화법을 기웃거리듯 감상할 기회도 마주할 수 있다.

 

시대의 풍속에 대한 이해들(정선, 김홍도, 신윤복 중심으로)

 

1 전시관에서는 무엇보다 진경 조선화를 연 정선(1676-1759)의 그림이 강한 인상을 준다. 율곡 이이의 이야기를 소재로 그려진 정선의 그림 <사문탈사>는 그의 나이 66세와 80세에 그린 두 점이 남아 봉은사로 추정되는 정경과 화가의 가치 변화를 발견하게 된다. 절 입구에서 도롱이를 벗는 이이와 그를 마중하는 스님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66세의 그림은 이이가 타고 온 소의 그림이 중국의 물소이고 복식도 중국색이 여전하다. 이것이 80세의 그림에서 조선의 황소로 조선의 전형적 복색으로 바뀌었다. 12년 사이에 사대부들의 가치 변화가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예증으로 볼 수 있겠다. 이러한 변화는 어부와 나무꾼의 대화 장면을 그린 <어초문답(漁樵問答)>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아무튼 정선 그림의 회화적 우수성을 이해할 감식안이 없는 내게는 이러한 저항적 새로움의 태도가 보다 의미깊게 다가온다.

 

평민 등 하층민 삶의 정경을 주로 묘사했던 김홍도의 그림들은 그에게 머물렀던 시선, 평범성에 대한 태도를 해독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마치 살기좋은 태평성대라는 무비판적 관점이나 음풍농월, 자신의 여유로운 삶의 향유로만 여겨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나무 짐을 가득진 소년이 황소에 올라타 지나가는 장면을 노동이 주는 고단함에서 중간에 맛보는 여유로움이라 저자가 해석하듯 소년의 고됨을 미화하는 그림 <기우부신(騎牛負薪)>을 기득권적 자세로 읽을 수도 있다. 물론 있는 그대로의 묘사를 통해 백성들의 삶을 그린 이들의 풍속화가 정치의 방향을 가늠하는 표시로서의 가치도 있었을 것이다. 즉 통치 교과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김홍도의 그림은 머리를 갸웃거리게 한다.

 

신윤복, <이부탐춘> 그림 일부


반면 혜원 신윤복의 그림은 이와 달리 비판적 의식, 풍자를 통한 시대의 비판적 정신을 발견하게 한다. 그의 회화 소재의 많은 것들이 실외인 길거리이고 시냇가이며 설혹 울타리 안()이라할지언정 마당이다. 볼썽사나운 일이 벌어지는 공간들이다. 그것은 당대 기득권자인 양반들의 퇴폐성이고, 수절을 명분으로 여인들의 욕망을 억압하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질서에 대한 과감한 반기이다. 뿐만 아니라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다양성으로 인해 그의 회화는 사회 계층들의 의복은 물론 각종 장식물들을 고증하고 재현하는 중대한 자료일 만큼 무진장한 당대 삶의 다양성을 전해주고 있다. 특히 조선 시대 여인들의 일상생활을 속속들이 기록한 유일무이한 화가라는 점에서 어쩌면 페미니즘의 가장 앞선 징후를 엿볼 수도 있다.

 

사대부 여인을 주인공으로 한 <이부탐춘> 여인의 봄날 한 장면은 그 노골성과 민망함의 극대화를 통한 연출의 강렬함으로 꽤나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러한 부패한 시대정신에 대한 저항이나 계급이 지닌 처절한 고통이 양반가 인물들의 놀음을 그린 <임하투호(林下投壺)><납량만흥(納涼滿興>과 대비되어 화가의 엄혹한 비판정신을 읽게 된다.

 

궁중 기록화 - 숙종, 영조 2 시대의 공적 기록화

 

궁중 밖인 백성들의 일상에 대한 그림과 달리 궁중 기록물인 공적 기록화는 지배계급의 가치변화를 탐색할 수 있는 좋은 사료라 할 수 있다. 책은 사대부의 경우 정2품 이상의 문관으로 70세 이상이거나 임금의 경우 60세면 입소할 수 있는 조선 관료사회의 가장 영예로운 행사를 그린 숙종과 영조, 두 시대에 그려진 기사첩을 통한 물질과 정신사(精神史) 변화의 발견이다.

 

기로소 행차 그림, 숙종시대


기로소에 들어가는 사건을 그린 두 기록첩에는 등장인물은 물론 물건들이 빠짐없이 표현되어 있어 조선의 철저한 기록사회임을 엿보게 된다. 특히 이 그림에서 오늘은 소실되어 없어진 경덕궁(궁궐)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지금은 광화문 교보빌딩이 서있는 한양 중부 징칭방으로 일컬어지는 기로소가 있던 자리였음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 여기서도 성리학 우주관에 지배되고 있던 왕실 의례가 숙종에서 영조라는 25년의 시간에 느슨하게 변화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오행 순환의 상징인 성리학의 오방색(五方色)이 사라진 것이라든가, 여인의 모습이 일체 보이지 않던 숙종조의 기록화와는 달리 영조대에는 기생과 무희가 궁중에서 사대부들과 자리를 함께하고 있는 모습은 사소한 변화가 아니다. 남녀유별이 점진적으로 붕괴하고 있는 실상이다. 한편으로는 정 2품 이상의 기로신(耆老臣)인 고관대작들의 행차에 사용되던 가마의 변화라던가, 엄격한 품계의 상징물이었던 정 1품 상계에게만 적용되던 파초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미 영조대에 이르러 관료사회를 유지하던 견고하던 품계질서에 작은 균열이 시작되고 있음을 추정할 수도 있다.

 

기로소 행차 그림, 영조시대, 가마에 바퀴가 달렸다


조선 문명의 절정기였던 18세기 조선의 회화를 통해 당대 정신사의 변화와 가치관의 점진적인 교체의 움직임을 발견하고 이러한 새로운 가치를 선도하고자했던 예술가들의 실천을 엿보며 오늘 우리네가 처한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21세기 우리의 미술은 어떤 부패한 사회정신을 향해 어떠한 노력들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예술가들은 이러한 시대정신에 대한 책무를 각성하고 있는지 되묻게 된다. 이 책은 이러한 국면에서 시대가치 전환의 토대를 마련하고 그를 완성했던 7인의 화가를 둘러보며 미술과 미술가의 숭엄하기조차 한 반영을 배우는 기회가 된다. 현학적이지 않으면서 대중적 시선에서 필요한 핵심적 물음으로 옛 선조들의 의식으로 안내하는 이 책은 소박한 앎을 조금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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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출판사 창비 출간 예정인 이유리 작가외 5인의 학교괴담 앤솔로지인 스터디 위드 X가제본에 대한 감상글입니다.


다섯 달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수능 출제 방침에 혼선을 야기하는 무책임한 권력의 목소리로 가뜩이나 지치게 만드는 폭염 더위가 어린 학생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즈음이다. 경쟁에 내몰리고, 주변에서 가해지는 각양의 압박, 그리고 알록달록 널린 유혹을 인내해야 하는 곤혹스러운 환경이 에워싸고 있다. 지친 심신에 휴식을 줄 시간조차 없는 청소년 학생들이 이 소설 선집을 읽어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앤솔로지의 이야기들은 위로가 되고 공감의 목소리로 평온한 휴식의 기회가 되어줄 터이다.



수록된 여섯 작품은 어느 학교건 으레 하나쯤은 지니고 있는 학교괴담을 중심 소재로 한 이야기들이다. 그렇다고 몸을 으스스 떨어댈 만큼 괴기스럽거나 잔혹성을 표방하는 그런 선정성과는 거리가 먼 작품들이다. 고래로 전해오는 처녀귀신 이야기가 현생의 억울함과 불의를 호소하기 위해 마련된 장치였듯, 학교 괴담 또한 그곳에 존재했던 정당치 못한 어떤 사태에 내재된 고발을 품고 있을 것이다. 혹은 실현되지 못한 소망의 안타까움이나, 죄책감, 조롱과 모멸을 동반한 폭력, 강요되는 부당한 억압에 대해 항거할 수 없었던 취약하기만 했던 아이들의 이의제기와 같은 도덕적 표현일 것이다.

 

그래서 학교를 에워싸고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그 표현 방식을 떠나 애틋한 마음이 앞선다. 여섯 작품 모두 상이한 소재와 테마를 전하고 있지만 특히 나푸름 작가의 하수구 아이는 학생들의 집단화된 폭력성의 점진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소위 왕따라는 집단 따돌림의 형태가 보편적 행위처럼 광범위하게 번져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기성권력인 어른들이 왜 구체적 시정을 위한 정책적, 사회구조적 개선방안을 내놓고 있지 않은지 반성하게 된다. 무엇보다 부모의 권력과 부가 아이의 학교권력으로 이어지는 이 시대의 추악한 세습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하수구 아이에서 화자(話者)는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의 한 상황을 떠올리며 자신이 회피하려한 것의 정체를 마주하고 죄책감을, 친구를 감싸지 못하고 집단 폭력에 무관심의 형태로 동조했음을 뉘우친다. 누군가 가장 만만해 보이는 한 아이에게 결점이나 모욕이 될 언행을 시작하고, 이것을 본 주변의 아이들에게 대상이 된 아이에겐 무언가 결점이 있어 당할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 된다. 이렇게 존재치 않았던 결점이 대상의 것으로 굳어지고, 이것이 일상화되면서 집단은 의식적이고 악의적 따돌림, 폭력을 행사한다. “‘하수구에 사는 아이’. ...아이들은 그 애가 지나가면 코를 잡고 과장되게 얼굴을 찌푸렸으며...” , 화자는 그 아이의 집을 알지만 그 아이와 같은 취급을 받을까봐 진실을 발설하지 못하고 집단에 동조하고 만다. 집단의 불의를 시정할 용기를 지닌다는 것이 물론 힘겨운 일이다.

 

아마 이러한 양태에 대비되는 작품으로 조진주 작가의 그런 애의 주인공인 예나는 진정한 친구의 모습을 보여준다. 배우가 되려는 소망의 의욕이 앞선 나머지 과도한 몸짓과 치장으로 급우들의 비난과 조롱, 모멸을 당하는 친구 솔희의 노력을 감싸고 그녀에게 중단 없는 우정을 보낸다. 자칫 무너지거나 빗나갈 수 있는 친구에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음을. 네게는 저 알지 못하는 인간들이 아니라 너를 진정 이해하는 친구가 있음을.

 

상대에게 믿음을 주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얼마만큼의 주의력 깊은 눈을 요구한다. 타인을 알기위해서 노력하지 않는 인간들로 넘쳐나고, 또 세상은 그렇게 이끌고 있다. 네 주위는 내가 밟고 디뎌야 할 하찮은 경쟁의 무리만 있다고. 권여름 작가의 영고 1830과 이유리 작가의 스터디 위드 미는 이러한 오늘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영고 1830은 지역 내에서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입학하는 영흥고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다. ‘자로 시작하는 고등학교가 여럿 있지만, 소위 명문대 진학에서 압도하는 영흥고만이 영고로 불린다.

 

이 학교에는 섬뜩한 괴담이 지역에 모르는 이 없을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1학년 830번 학생은 죽어나간다는 것이다. 석차 순으로 반 배정과 번호를 부여하는, 즉 모욕을 아이들에게일상적으로 강요하는 이 학교에서 1830은 곧 꼴찌를 뜻하는 표상(表象)어다. 주인공 희준은 중학교 성적이 우수한 측에 속하지만 영고의 입학은 왠지 주저하게 된다. 자신이 1830이 되어 불행의 주인공이 될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그러나 영고의 교사인 아버지의 강압으로 희준은 영고에 입학하고 반배치 고사를 보게 되지만 행여나가 현실이 된다. 근심과 우려는 아이를 떠나지 않는다. 희준은 학교의 상징이자 불행의 전설 속 나무가 있는 장소를 마주하면 명치끝에 매달린 통증이 사라지고 편안함을 느낀다.

 

그 장소에 이사장실이 있어 누군가 그 앞에 서있는 것이 거슬린다고 엄금한 곳이다. 그러나 희준은 그곳만이 유일한 위안의 장소이기에 고통이 몰려 올 때면 반복적으로 찾는다. 이런 쪼다 새끼를 봤나....작살로 물고기 잡는 원시인처럼 이사장은 지팡이로 희준 몸을 여기저기 억세게 찔렀다. .... 8반 놈이지, .” 소설이 끝나가는 장면에서 한 학생의 죽음에 대한 아무런 연민도 없이 주절거리는 이사장의 대사는 그야말로 호러가 따로 없다. 황천 가는 관짝이지 뭐였겠어, 그게. ...호방하게 웃었다.” 이런 자들이 바로 오늘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들의 현주소이기에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매양 뻔뻔하고 자신의 도덕성에 대한 일말의 성찰도 없는 부패한 의식의 어른들 모습이 어른거린다.

 

이유리 작가의 스터디 위드 미는 영고 1830과는 그 궤를 달리하며 성적(成績)지상주의에 내몰린 아이들의 혼돈에 찬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 만연한 성적 경쟁이 지닌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극한의 경쟁심에 포획된 아이들의 어두운 심리, 그리고 성적이라는 진부하고 퇴색한 표상을 넘어 돌출적으로 비어져나가는 실태로서 온라인상에 번성하는 선정성의 관련성을 엿보게 한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수아는 <스터디 위드 미>라는 브이로그 영상을 운영한다. 어느 날 수아의 영상에 유령이 악의적 모습으로 그녀를 짓누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소연은 이를 수아에게 알려주고 싶어 하지만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한다.

 

마침 짝 윤서의 필통에서 저주 인형을 발견하게 되고 소연은 이것을 수아의 영상 속 유령과 연결 짓는다. 마침내 수아에게 이 사실을 전하지만, 수아의 대답은 정말 가관이다. 소연아, 이젠 단순히 공부만 잘하고 좋은 대학에 간다고 해서 무조건 성공하는 시대가 아냐. 성공하려면 유명해져야 돼. 돈이건 명예건 일단 유명해져야 따라온다구.” 속된 말로 어그로를 끌기 위해 합성한 영상임을, 아마 소연이 수아의 얼굴이 이제 소름끼치게 무서웠다고, 귀신들보다 훨씬 더 무서웠다고 하는 말은 진심일 것이다. 지금 아이들을 이렇게 내몰고 있는 우리 사회, 이 사회의 교육 현실은 잘 못되어도 한참이나 잘 못된 것 같다. 인기, 권력, 부를 성공이라는 언어에 담아 이를 향한 무한 경쟁만이 생존의 길이라고 가르치는 사회는 확실히 빗나간 방향을 가리키고 있음에 틀림없다.


누군가에게는 흥밋거리로 소비되지만

누군가에겐 절실한 생존이 걸린 문제가 된다.”

 

윤치규 작가의 카톡 감옥은 중학교 내내 동급생 병세 등으로부터 지속적 괴롭힘을 당했던 준우가 이들을 피해 멀리 외딴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비대면 수업으로 시작된 팬데믹 시절의 어느 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학급 단체 카톡방에서 반 친구 도상현으로 추정되는 'D‘라는 계정과 우정을 나누며 자신의 중학교 시절 괴롭힘 이야기를 들려주고, D는 준우의 복수를 해주겠다고 나선다. 한 번 들어오면 절대 나갈 수 없는 채팅방”, “카톡 감옥에 들어 온 것을 환영한다.” 아마 이 신선한 소재의 독특함이 소설적 재미를 더하지만, 동료의 괴롭힘이 얼마나 잔혹한 폭력인지를 등골이 서늘하게 깨우치게 하는 작품이라 하면 부족할까?

 

끝으로 은모든 작가의 벗어나고 싶어서는 교사 미진의 첫 사랑 이야기로 시작되는데, 학창시절의 친구 우리에 대한 고백되지 못한 순수한 사랑의 이야기다. 선생님, 첫사랑 얘기해 주세요. , 또 너냐?” 칠판을 보고 선 미진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아채는데, 소설의 이 시작 문장이 의미심장하다. ‘라는 반복과 보지 않고서도 아는 존재는 누구일까? 아마 이 보이지 않는 존재가 지닌 의미를 발견하는 읽기를 통해 이 작품의 애틋한 감성에 공감을 끄덕이게 될지도 모르겠다.

 

동료 인간을 범주화, 대상화해서 편협하고 악의적인 이미지를 덮어씌워 다름을 틀림이라는 부정의 존재로 낙인찍어 파괴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사회는 인간 모두를 파편화, ()인륜적 존재로 전락시키고 만다. 불신과 경계가 팽배한 사회에서 그 어떤 공존과 유대와 화합이 싹틀 수 있겠는가? 아이들이 처한 오늘의 환경이 낳은 이 무수한 학교 괴담들은 비뚤어진 이 사회의 반영일 것이다. 가장 익숙한 학교가 아이들에게 무서운 곳으로 인식되는 이 현실로부터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독특하고 신선한 이 젊은 시선의 이야기들이 흥미로운 공포담과 어울려 재미와 진실의 무게를 함께하며, 더위에 무거워진 우리의 심신에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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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캉스 소설 문학동네 플레이
김사과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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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을 활용하는 기술에서 자기가 해야 하는 것,

언제 그것을 해야 하고 얼마만큼 해야 하는지를 아는 자는 행복하다.”

- 플라톤 법률에서

 

작가의 호흡에 한 순간에 사로잡혀 홀리게 되는 소설이다. 한 때 수학천재로 불렸지만 프랑스혁명사에 필이 박히면서 문과로 전향한, 그래서 불문학을 전공한 이로아는 학부 동료가 잘나가는 네덜란드계 글로벌 컨설팅 업체인 FWIS에 지원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경쟁심에 허공에 펀치를 날리듯 지원했는데 합격 통지를 받는다.

 

입사 3개월 만에 한국 지사장 뤼카스 휘스먼의 개인 보조 분석가로 발탁되어 거대조직 FWIS를 위해, 휘스먼의 지도하에 수학적 재능을 유감없이 쥐어짜내며 화려하게 경력을 이어나간다. 즉 삶의 매 순간마다 진심을 다해, 허세가 극에 달한 미치광이처럼 헌신하지만 6년차에 이른 어느 날 새로운 부서로 발령이 나고, 이제 자신으로부터 더 이상 쥐어짤 것이 없어지자 버려진 것임을 깨닫는다.

 

이로아는 프로젝트에 치여 무력감이 몰려 올 때면 사내 정신과 상담의로부터 약을 처방받아 현실과 망상의 경계를 거닐며 시간을 견뎌내 오곤 했다. 그녀는 자신이 초고연봉의 글로벌 노예로 살아왔음을 감지한다. 발칙할 정도로 독아론(獨我論)적 삶을 살아온 소위 잘 나가는 삶의 본질을 알게 된 인물은 다시금 자신이 프랑스혁명사에 대한 덕질 끝에 도달한 깨달음, 자유란 없다, 원래도 없었고, 발명된 적도 없었고, ...., 자유란 완벽한 불가능성, 즉 인간은 전부 노예임을 상기한다. 그래서 독아론적인 인간, 곧 신이자 노예인 자기 삶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휘황찬란한 화려함과 고급 부대시설, 하물며 약 처방대신 대처법으로 쇼핑 중독을 처방하는 그야말로 경제 사정에서 어느 만큼 해방된 환경에 놓여있는 삶을 쫓게 된다.

 


두 백화점의 VIP고객이 된 이로아는 경제적 부담이 가중되자 소비를 축소하는 대신 돈벌이를 확대하기로 결정하는데, 이 제약없는 사고와 행동에 미묘하게 미끄러지듯 매혹되어 코를 석자는 빠뜨리게 된다. 그녀는 세계 뉴스에 감춰진 시그널을 꿰뚫고 원유 3배 레버리지 ETF에 투자하여 자신의 증권계좌에 찍힌 102억이라는 형이상학적 숫자를 바라본다. 이미 빠져들만큼 충분히 세련된 서사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마치 이미 지나온 이야기들은 아무것도 아니란 듯 본격적 행보를 시작한다.

 

다 잊고 이젠 나도 나 만의 삶을 살아가야겠지

가족으로부터, 회사로부터도 벗어난....”

 

과연 있기는 한지 모르겠지만 자유란 걸 찾기 위해 도달 한 곳, 오직 영원한 여름의 세계”, “오직 느낄 것, 느낌만을 따르고 그것에 복종할 것을 명령하는 듯한 리조트 타운 시타 델 마레(Cita Del Mare)가 펼쳐진다. 기후변화로 열대 지역이 된 제주에 들어선 미국계 호텔 체인의 위용과 금발의 드레드 머리, 올리브 빛 상채, 오렌지색 반바지 수영복과 맨발의 백인 남자 등 과잉의 위선적 부를 전시하듯 돈(money)질을 제법 한 풍경으로 시선을 압도한다.

 

줄거리는 이쯤에서 멈추어야 할 것 같다. 충분히 넘쳐나는 부()가 그저 무심히 배경을 차지하는 가운데 빼어난 생김새와 옷차림의 남녀, 짐짓 예술가인 루마니아인, 우연인지 다시금 모여든 뤼카스와 전 정신과 담당의() 여인까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오가며 이 낯선 지대에서 펼쳐지는 자본의 제국을 꿈꾸는 인간들, 그리고 그 과잉의 쾌락을 향해 치닫는 군상들의 한 판 게임이 펼쳐진다. 아마 소설의 변곡점이 되는 사건이라면 사건이라 할 이로아에게 나타난 소녀의 유령, 그리고 소녀의 목맨 죽음의 발견은 이로아 주변의 인물들과 얽히고설켜 현실인지 망상인지, 펼쳐지는 몽환적 풍경과 어울려 의심의 지대로, 불편한 진실이라는 이 세계의 지저분한 방종의 현실로 쏜살같이 내달리기 시작한다.

 

문득 미셸 푸코의 쾌락의 도덕적 문제 설정이라는 글이 떠올랐다. 인간 욕망이란 본래 잠재적으로 과도한 것으로 이 힘에 어떻게 맞서고, 제어하며 적절한 관리술을 확보하느냐가 바로 도덕적 문제라 설명한 문장이다. 아마 김사과의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어떤 과잉에 대한 절제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의 배경들 모두, 등장인물들 모두가 그것들을 초과하여 넘치고 있다는 인상이 주는 부도덕함이 지속하여 내 마음을 자극하고 있었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지역 공무원인 제주의 일개 국장이란 인물이 몰아대는 호화요트, 그가 소유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고가의 단독 콘도, 그리고 지방권력과 결탁한 거대 자본과 예술의 더러운 유착들의 이면에 가려진 악마적 욕구들이 마치 몽상처럼 흐른다. 신이 된 돈과 쾌락의 무절제함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이 소설은 지금 우리네 사회의 도덕적 문제를 보다 촉진된 지적 사고를 통해 이해할 것을 요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작가는 추악한 인간들을 처치하는 데 보다 세련된 모습을 보여준다. 바캉스 소설이란 제목처럼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이 여름날, 아마 많은 독자들을 열광케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작가의 모든 작품이 그러하지만 이 작품 또한 단연 올해의 화제작으로 추천한다.

 

자연은 인간 안에다 항시 정해진 목표를 넘어서고자 하는

초과와 과도함이라는 필연적이고 위험한 힘을 심어 놓았다.

여기서 도덕적 문제는 출발한다.”

-미셸 푸코, 성의 역사 2; 쾌락의 활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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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드 쿠쿠 랜드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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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원고:

유실된 그리스 산문설화 클라우드 쿠쿠 랜드는 안토니우스 디오게네스가 하늘에 떠있는 유토피아 도시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양치기를 쓴 작품으로 집필 시기는 서기 1세기 말경으로 추정된다.” - 18

 

소설은 다섯 명 개개인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다섯 서사와 양치기 아이톤의 이상의 장소를 향한 기이한 모험 이야기인 고대 필사본 클라우드 쿠쿠 랜드가 이들 서사와 맞물려 전개되는 구성을 하고 있다. 각 서사를 이끄는 인물들 저마다의 생의 기록을 이야기하기에 어쩌면 800여 쪽으로도 모자랐을 것이다. 이 소설책이 두꺼워진 까닭일 것이다. 사실 이 분량 때문에 빠른 속도로 읽게 되었는데, 이것은 큰 실수였던 것 같다. 남은 부분이 줄어들 때 끝나지 않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성급히 읽어댄 자신을 책망했으니 말이다.

 

폐허가 된 지구를 떠나 새로운 항성 베타 OPh2’를 향해하는 22세기 어느 즈음인가 우주선 아르고스 호의 소녀 콘스턴스가 클라우드 쿠쿠 랜드의 원고를 읽는 장면으로 시작되지만 조금 순서를 바꿔 감상글을 열고 싶다. 1453년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을 앞둔 며칠의 장면 속에서 묘사되는 자수(刺繡)작업으로 노예처럼 살아가는 안나라는 인물에 내 감정을 꽤나 많이 쏟아 부었던 까닭인 것 같다. 심부름길에서 우연히 문자를 가르치는 소리에 홀리듯 다가가 안나가 듣게 되는 것은 오디세이아. 안나는 선생 리키니우스에게 자수(刺繡)공방을 위해 심부름하던 포도주를 축내면서 문자를 배운다. 그 첫 배움의 단어가 오케아노스(Ωkεανοξ). 대양(大洋)’이다.

 

리키니우스는 그 단어를 에워싸는 원을 그린 다음 그 중심을 쿡 찌른다. 여기는 알려진 세계. 그런 후 이번에 원 밖을 찌른다. 여기는 미지의 세계. (71)” , 안나는 언어의 거대하고 신비한 힘에 매료되고, 이 그 언어가 가리키고 있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열망으로 문자를 배우기 위해 공방의 매질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피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장면을 바꾸어 같은 시대를 사는 불가리아 산 속 마을에 아버지가 죽는 날 언청이로 태어난 소년 오메이르를 쫓는다. 그에게 가해진 주변의 살벌한 눈빛들을 피해 할아버지의 보호 아래 가족 사랑의 온기로 숨기듯 양육되던 소년은 그가 키우던 두 마리의 소와 함께 술탄의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징발되어 전쟁의 욕망, 인간과 동물, 모든 생명체의 고통과 죽음으로 유지되는 전쟁의 실체를 목격한다. 소년이 꿈꾸던 휘황찬란한 대도시, 끝이 없어 보이는 콘스탄티노플의 성벽과 높이 솟아오른 건물들의 웅장함은 의미없음, 소년은 눈을 피해 전장으로부터 도주한다. 고향, 어머니와 누이가 있으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불가리아의 집으로.

 

700년 남짓의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아버지마저 여윈 채 후견자가 된 여인과 함께 고독한 삶을 살아가는 소년 지노가 쌍둥이 자매인 두 사서의 사이에서 그네들이 읽어주는 오디세이아가 흐르고, 황금당나귀,...신화들이 그의 귀를 적신다. 소년은 영웅적 희생이라는 대의에 떠밀리듯 한국전에 참전하지만 중공군의 포로가 되어 영국군 포로 렉스를 만나 땅 바닥과 서리 위에 써지는 낯선 그리스 문자를 홀리듯 바라보며 사랑을 키운다. 시간은 그의 나이 여든여섯 살, 레이크 포트 공공도서관에서 하루 앞둔 클라우드 쿠쿠 랜드(구름 뻐꾸기 나라)연극 공연을 위해 다섯 명의 어린아이들과 준비하는 리허설 장면을 비춘다. 이 때 한 발의 총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온다.

 

고된 청소일로 아들을 보듬기 위해 애쓰는 엄마 버니와 함께 사는 자폐 증상을 지닌 소년 시모어는 할아버지가 남긴 주변에 풍부한 삼림과 자연이 있는 주택으로 인해 세상의 온갖 개발 소음을 잠시라도 피해 고통으로 절규하는 자신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들의 탐욕이 어디 자연을 그대로 두던가? 그가 늘 찾던 트러스티프렌드(믿을 수 있는 친구), 올빼미가 더 이상은 살 수 없는 개발을 상징하는 불도저가 나타나 삼림을 갈아 없고 나무를 베어낸다.

 

에덴스 게이트 표지판이 등장하고....맞춤형 타운하우스와 별장, 최상급 택지 보장. 불도저들.....꿈꾸던 레이크포트 라이프 스타일을 누리세요.” 소년은 자신의 은신처가 망가지는 이 개발의 소음을 참을 수 없다. 그는 폭탄과 총을 들고 에덴스 게이트와 인접한 도서관을 폭파시키기 위해 찾아든다. 사서 섀리프에게 쏜 총이 그의 어깨를 관통하여 피가 낭자하게 바닥을 적신다.

 


이제 소설의 시작 장면으로 돌아가자. 지구 시간으로 592년이 걸리는 항성 베타 OPh2로 향하는 우주선 아르고스를 통제 관리하는 인공지능 시빌이 있는 격리된 볼트원이라는 공간에 열네 살 소녀 콘스턴스가 있다. 다리를 놓아주는 세대, 중간에서 연결해주는 존재. 후 세대가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수도 있도록 앞서 준비하는 세대로서, 세대를 거듭하며 폐쇄된 항해를 이어가는 존재이다. 그런데 우주선내 역병이 돌고 모든 사람들이 죽은 듯하다. 방호복을 입혀 10년 치에 달하는 생존식량과 함께 볼트원으로 자신을 밀어넣던 아빠의 마지막 모습을 지울 수가 없다. 시빌은 유일한 생존자를 지키기 위해 봉쇄된 문을 열지 않는다.

 

아빠가 들려주던 클라우드 쿠쿠 랜드의 아이톤의 우스운 여정 이야기, 자신이 무수히 반복해 들려달라 요구했기에 아빠가 하는 이야기의 다음을 말할 수 있었던 이야기의 기억들이 읽는 이의 감정을 촉촉이 적신다. 콘스턴스는 가상의 도서관을 찾아 가상의 지구인 아틀라스를 통해 아빠의 자취를 찾는다. 아빠와 엄마는 왜 우주선을 타야 했을까? 흐릿한 정경에 휘날리는 깃발을 누르자 보이지 않던 장면들이 드러난다. 거기서 아빠 책상위에 놓인 클라우드 쿠쿠 랜드를 보게 되고, 진실을 발견하게 된다. 콘스턴스의 진실을 향한 집요한 인내와 용기의 과정이 소설 밖에 있는 독자를 긴장하게 한다. 제발 진실이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게 해줘~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안나는 폐허가 된 소()수도원에서 가져 온 필사본과 우르비노의 필경사들이 급하게 피신하며 흘리고 간 법랑위에 도시의 그림이 그려진 코담배갑을 넣은 주머니를 지니고 부서져가는 쪽배를 타고 도주한다. 파도와 바위에 떠밀려 부서진 쪽배가 도달한 곳은 콘스탄티노플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한 곳이다. 그녀는 서쪽으로 발걸음 향한다. 굶주린 안나의 눈앞에 나타난 주인 없이 구워지고 있는 새를 덥석 입에 물지만 둔기가 그녀의 머리를 내리치고 의식을 잃는다. 도망 병사인 오메이르와 두 사람은 이렇게 만난다. 둘은 오메이르의 여정에 동행한다.

 

가는 길에 의심을 피하듯 안나는 포로, 오메이르는 의기양양하게 개선하는 점령군의 외향을 하면서, 오메이르는 안나가 꼭 껴안고 있는 꾸러미의 신비로움을 지켜주고 싶어한다. 고향 마을에 다다랐을 때 그는 커다란 나무에 파인 구멍에 그것을 숨겨두고 안나에게 동의를 구한다. 안나는 그것이 안전함을 안다. 문자의 마법에 대한 미신이 사람들을 어떻게 폭력화시키는지를. 안나는 오메이르의 아내가 되어 아이들을 낳는다. 폭우가 쏟아지는 어느 날 막내 아이가 고열로 시달릴 때 오메이르는 비를 맞으며 꾸러미를 안나에게 내민다.

 

안나는 필사본을 꺼내 아이톤의 모험 이야기를 낯선 발음으로 읽는다. 아이들이 모여들고 병들었던 아이가 열이 가라앉아 맑은 미소를 짓는다. 이 행위는 마법처럼 반복되고 아이들과 부부의 행복은 가이없이 흐르지만 안나는 쉰 넷의 나이로 “5, 한 해의 가장 화창한 날, 외양간 옆 나무 그루터기에 기대어 세 아들이 곁을 지키는 가운데 죽는다.” 이 죽음의 장면도 울컥하는 물살이 몰려들게 하지만, 죽은 아내가 간직하던 코담배갑에 그려진 도시그림에 의존해 꾸러미의 필사본을 들고 우르비노로 생의 마지막 걸음을 걷는 오메이르의 여정은 왈칵 눈물이 흐르게 한다. 이번 생이 다하면 또 다른 생이 있어 안나가 신의 날개 밑에서 자기를 기다려 주기를 기도한다.”

 

세상의 무수한 손가락질과 폭력의 위협 속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 언니 마리아의 죽음에 죄책감을 지니고 천애의 고아로 평화로운 삶을 갈망했던 안나의 이야기가 양치기 아이톤의 원치 않은 변신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세상까지 주저앉지 않고 찾아가려는 충동의 이야기와 맞물려 어떤 시원(始原)의 감성을 건드린다. 깊은 지혜 속에 깊은 슬픔이 있고, 무지 속에 많은 지혜가 있습니다.” 마침내 깨달음에 이른 아이톤의 이 발설은 많은 의미를 지니고 다가와 내 삶의 언어로 자리 잡는다.

 

이렇게 다섯 명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자페아, 사랑하는 이들을 상실한 아이들, 언청이와 같은 세상에서 소외된 이들이라는 여느 아이들이 겪지 않는 폭력적인 고통을 견뎌야 하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소설의 서사 축인 필사본 클라우드 쿠쿠 랜드의 멍청이, 바보, 미친짓을 하는 주인공 아이톤과 다르지 않다. 소설 속에는 이 원고가 어떤 경위로 콘스탄티노플 수도원 도서관에서 우르비노까지 가게 되었는지는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문장이 등장한다. 소설을 끝까지 읽은 우리는 안다. 그것은 용기와 인내, 사랑과 헌신의 걸음들이었다는 것을.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관문으로서의 책이 지닌 필연적 귀결이었음을.

 

소설은 생태계 자연, 지구라는 행성을 파괴하며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의 감각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있으며, 인간에게 아무런 의미도 건네지 못하는 전쟁의 폭력성, 인간의 다름에 대한 끈질긴 배제와 격리의 이기적 잔혹성, 그리고 이 모든 것, 추하고 더럽고 흉측한 것들을 지워 은폐, 포장하는 기만의 비판이 배경처럼 흐르며, 멸균 처리되어 미화된 이미지의 껍질을 벗겨 애초의 진실을 드러내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배경 서사에도 불구하고 단연 읽는 이의 감성을 휘젓는 것은 책과 이야기가 발하는 지성의 힘이다. 도서관 사서들이 세상의 고통으로 영혼을 잃어가는 아이에게 그 덫을 잠시나마 벗어나도록 읽어주는 한 구절의 책, 사랑하는 이들에 다가가는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로서의 책, 현실의 삶 너머에 또 다른 가능성의 존재를 암시하는 가르침의 책, 하나의 씨앗 안에 황야가 통째로 접혀있듯 세상의 모든 것이 잠들어 있는 책의 이야기가 홍수처럼 지면을 적시고 있다.

 

그리고 인간 기억의 안식처로서 영혼이 먼 길을 떠난 후에도 그 기억을 시간의 공격 속에서도 살아남아 후세에 전달하는 그 숭고한 힘, 그러함에도 얼마나 싑사리 이러한 인간 열의가 손상되고 사라질 수 있는지를 이야기 속에서 절로 체득케 된다. 분명 감동적인 책의 헌사이지만 이 소설은 분명 이 행성의 모든 인간과 시스템이 얼마나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깨우치게 한다. 아마 소설 속 15세기 콘스탄티노플의 소녀 안나가 축축한 골방에 앉아 말도 안 되는 옛날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세의 정원에서 천사들이 불러주는 찬송가를 듣고 있는 그 느낌처럼 어쩌면 동일한 감성에 젖어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책 한 권 한권이 또 다른 장소와 시간으로 들어가는 우리네 앞에 창창한 삶을 펼쳐보이는 문이라 했던가? 이 문을 열어보라, 아마 인류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얼굴이 여기에 있음을 보게 되리라.

 

세상의 모든 책을 읽어 깨우친 자는 오직 한 가지만 안다.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 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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