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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미술관 - 풍속화와 궁중기록화로 만나는 문화 절정기 조선의 특별한 순간들
탁현규 지음 / 블랙피쉬 / 2023년 2월
평점 :
조선이 중국(청)에 대한 사대주의를 언제까지 지속했을까? 그리고 어느 시점부터 이로부터 벗어나려는 실천이 시작되었을까? 회화 또한 시대의 정신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이다. 성리학에 의한 엄격한 가치를 백성에게 강요했던 이들 예속된 비루한 정신세계로부터 탈출은 숙종조인 1700년대에 이르러서야 시작되었음을 화원들의 그림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들 화가의 그림은 중요한 사료(史料)의 하나라는 것이다.
이 책은 조선 문화의 절정기인 숙종(肅宗)에서 정조(正祖)까지 태평시국을 반영한 화원들의 회화를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의 오랜 사슬을 끊고 조선 고유의 산수와 풍속을 그리기 시작한, 그야말로 조선 사람과 그네들의 풍경, 습속과 삶의 형상들을 보여주고자 하는 듯하다. 복색도 중국의 것을, 하다못해 묘사되는 동물도, 산천도 중국의 것을 그린 것만을 고집했던 이 철저한 굴종의 정신을 벗어나는데 조선 19대 임금에 이르는 시간이 요구되었다는 것은 사대주의에 뿌리를 내린 기득권 사회의 자기 보위라는 끈질긴 탐욕 때문이었다 할 것이다.
책은 전시관의 구성을 하고 있는데, 제 1전시관은 풍속화와 산수화를 통해 평민과 기생, 사대부와 사대부가 여인들, 사미승을 비롯 노비에 이르기까지 당대 인간들의 삶의 실체 속으로 뛰어들게 하고, 제 2 전시관은 임금의 기로소(耆老所) 입소를 축하하는 궁궐의 성대한 잔치 기록화인 숙종의 <기해기사첩>과 영조의 <기사경회첩> 대비를 통해 관료사회의 엄격한 형태와 복색과 문물, 가치관의 변화를 읽는다.
“조선 그림의 양대 산맥인 산수화와 풍속화를 모두 조선화(朝鮮化)시킨 화가가 겸재 정선이다.”
중국화를 벗어나 조선의 것, 진짜배기 조선의 진경(眞景)을 그리기 시작한 인물이 정선이고, 이는 진경풍속을 완성한 조영석(1686-1761)으로 이어지고, “평민 풍속의 종결자인 김홍도(1745-1806)와 양반 풍속의 끝판왕인 신윤복(1758-1813?)”으로 대미를 맞이했다. 그렇다고 이들 네 화가의 그림만이 소개되는 것은 아니다. 신윤복의 부친인 도화서 최고의 화가 일재 신한평, 긍재 김득신을 비롯 기록화를 그린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초상화 등을 통해 당대의 화풍이나 그네들 그림의 화법을 기웃거리듯 감상할 기회도 마주할 수 있다.
■ 시대의 풍속에 대한 이해들(정선, 김홍도, 신윤복 중심으로)
제 1 전시관에서는 무엇보다 진경 조선화를 연 정선(1676-1759)의 그림이 강한 인상을 준다. 율곡 이이의 이야기를 소재로 그려진 정선의 그림 <사문탈사>는 그의 나이 66세와 80세에 그린 두 점이 남아 봉은사로 추정되는 정경과 화가의 가치 변화를 발견하게 된다. 절 입구에서 도롱이를 벗는 이이와 그를 마중하는 스님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66세의 그림은 이이가 타고 온 소의 그림이 중국의 물소이고 복식도 중국색이 여전하다. 이것이 80세의 그림에서 조선의 황소로 조선의 전형적 복색으로 바뀌었다. 12년 사이에 사대부들의 가치 변화가 시작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예증으로 볼 수 있겠다. 이러한 변화는 어부와 나무꾼의 대화 장면을 그린 <어초문답(漁樵問答)>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아무튼 정선 그림의 회화적 우수성을 이해할 감식안이 없는 내게는 이러한 저항적 새로움의 태도가 보다 의미깊게 다가온다.
평민 등 하층민 삶의 정경을 주로 묘사했던 김홍도의 그림들은 그에게 머물렀던 시선, 평범성에 대한 태도를 해독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마치 살기좋은 태평성대라는 무비판적 관점이나 음풍농월, 자신의 여유로운 삶의 향유로만 여겨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나무 짐을 가득진 소년이 황소에 올라타 지나가는 장면을 “노동이 주는 고단함에서 중간에 맛보는 여유로움”이라 저자가 해석하듯 소년의 고됨을 미화하는 그림 <기우부신(騎牛負薪)>을 기득권적 자세로 읽을 수도 있다. 물론 있는 그대로의 묘사를 통해 백성들의 삶을 그린 이들의 풍속화가 정치의 방향을 가늠하는 표시로서의 가치도 있었을 것이다. 즉 통치 교과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김홍도의 그림은 머리를 갸웃거리게 한다.
【신윤복, <이부탐춘> 그림 일부】
반면 혜원 신윤복의 그림은 이와 달리 비판적 의식, 풍자를 통한 시대의 비판적 정신을 발견하게 한다. 그의 회화 소재의 많은 것들이 실외인 길거리이고 시냇가이며 설혹 울타리 안(內)이라할지언정 마당이다. 볼썽사나운 일이 벌어지는 공간들이다. 그것은 당대 기득권자인 양반들의 퇴폐성이고, 수절을 명분으로 여인들의 욕망을 억압하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질서에 대한 과감한 반기이다. 뿐만 아니라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다양성으로 인해 그의 회화는 사회 계층들의 의복은 물론 각종 장식물들을 고증하고 재현하는 중대한 자료일 만큼 무진장한 당대 삶의 다양성을 전해주고 있다. 특히 조선 시대 여인들의 일상생활을 속속들이 기록한 유일무이한 화가라는 점에서 어쩌면 페미니즘의 가장 앞선 징후를 엿볼 수도 있다.
사대부 여인을 주인공으로 한 <이부탐춘> 여인의 봄날 한 장면은 그 노골성과 민망함의 극대화를 통한 연출의 강렬함으로 꽤나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러한 부패한 시대정신에 대한 저항이나 계급이 지닌 처절한 고통이 양반가 인물들의 놀음을 그린 <임하투호(林下投壺)>나 <납량만흥(納涼滿興>과 대비되어 화가의 엄혹한 비판정신을 읽게 된다.
■ 궁중 기록화 - 숙종, 영조 2 시대의 공적 기록화
궁중 밖인 백성들의 일상에 대한 그림과 달리 궁중 기록물인 공적 기록화는 지배계급의 가치변화를 탐색할 수 있는 좋은 사료라 할 수 있다. 책은 사대부의 경우 정2품 이상의 문관으로 70세 이상이거나 임금의 경우 60세면 입소할 수 있는 조선 관료사회의 가장 영예로운 행사를 그린 숙종과 영조, 두 시대에 그려진 기사첩을 통한 물질과 정신사(精神史) 변화의 발견이다.
【기로소 행차 그림, 숙종시대】
기로소에 들어가는 사건을 그린 두 기록첩에는 등장인물은 물론 물건들이 빠짐없이 표현되어 있어 조선의 철저한 기록사회임을 엿보게 된다. 특히 이 그림에서 오늘은 소실되어 없어진 경덕궁(궁궐)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지금은 광화문 교보빌딩이 서있는 ‘한양 중부 징칭방’으로 일컬어지는 기로소가 있던 자리였음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 여기서도 성리학 우주관에 지배되고 있던 왕실 의례가 숙종에서 영조라는 25년의 시간에 느슨하게 변화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오행 순환의 상징인 성리학의 오방색(五方色)이 사라진 것이라든가, 여인의 모습이 일체 보이지 않던 숙종조의 기록화와는 달리 영조대에는 기생과 무희가 궁중에서 사대부들과 자리를 함께하고 있는 모습은 사소한 변화가 아니다. 남녀유별이 점진적으로 붕괴하고 있는 실상이다. 한편으로는 정 2품 이상의 기로신(耆老臣)인 고관대작들의 행차에 사용되던 가마의 변화라던가, 엄격한 품계의 상징물이었던 정 1품 상계에게만 적용되던 파초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미 영조대에 이르러 관료사회를 유지하던 견고하던 품계질서에 작은 균열이 시작되고 있음을 추정할 수도 있다.
【기로소 행차 그림, 영조시대, 가마에 바퀴가 달렸다】
조선 문명의 절정기였던 18세기 조선의 회화를 통해 당대 정신사의 변화와 가치관의 점진적인 교체의 움직임을 발견하고 이러한 새로운 가치를 선도하고자했던 예술가들의 실천을 엿보며 오늘 우리네가 처한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21세기 우리의 미술은 어떤 부패한 사회정신을 향해 어떠한 노력들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예술가들은 이러한 시대정신에 대한 책무를 각성하고 있는지 되묻게 된다. 이 책은 이러한 국면에서 시대가치 전환의 토대를 마련하고 그를 완성했던 7인의 화가를 둘러보며 미술과 미술가의 숭엄하기조차 한 반영을 배우는 기회가 된다. 현학적이지 않으면서 대중적 시선에서 필요한 핵심적 물음으로 옛 선조들의 의식으로 안내하는 이 책은 소박한 앎을 조금 더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