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의 시절]의 서평을 써주세요.
방황의 시절 문지 푸른 문학
다치아 마라이니 지음, 천지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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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내내 흐르던 어둡고 우울한 숙명론적 이야기가 갑자기 일갈되고 새로운 삶의 지향으로 전환되는 대단원은 작가의 세상에 대한 미숙한 관점처럼만 보여 오늘의 시선에서 그리 세련된 작품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작품의 초반부, 엔리카 가족의 빈한한 일상과 단절된 소통에서 환경결정론적인 인간의 질서를 보는 것 같은 섬뜩한 회의마저 엄습한다.

주거환경의 불안과 엄마의 죽음, 아빠의 경제적 무능력, 어린 소녀의 가사노동의 부담, 학습기회의 제약, 인간관계 형성의 한계, 이러한 피폐한 정신적, 물질적 환경에서 과연 우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열정으로 콩닥거리는 가슴과 화창한 봄날의 희망으로 충만 되어야 할 17살 소녀 ‘엔리카’에게 이러한 환경은 정말 끔직스럽다. 그때 누군가의 달콤한 속삭임과 상냥한 손길이 창백해진 정신을 어루만지면 이를 회피 할 수 있는 정신이란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이러한 의문에서 작품을 바라보면‘방황(彷徨)’이란 언어로 소녀의 행동에 잣대를 갖다 대는 것은 몰염치한 이기적 시선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더더욱 작가의 시선에 동화하기 어렵다.

학위를 준비한다는 구실아래 항상 공부 핑계를 대고 만남을 거절하는 첫사랑 연인‘체사레’와의 관능적 사랑은 어린소녀가 극복하기 힘든 유혹이 아닐 수 없다. 체사레가 준비하는 학위란 것은 계층의 상승, 부의 획득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가치 이상이 아니며, 그래서 이는 부와 계층에 대한 상징적 기준이자 인간사회의 탐욕스런 이기심으로 보여 진다. 그럼에도 엔리카가 헌신적인 남자친구‘카를로’를 회피하고 약혼녀가 있는 체사레를 지향하는 것은 거부키 힘든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임을 보여주는 것일까?

이에 더해 가족의 안락함과 삶의 질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어떠한 가치부여도 불능한 ‘새장 만들기’는 경제적 소외자의 무능을 한껏 극대화시키고, 어머니의 직장벌이로 연명하는 생계는 세 사람의 소통장애와 위태로운 가족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취약한 가족관계의 뿌리는 거의 경제적 고통에 연유된 것으로 엄마의 죽음으로 급속하게 와해된다.

집세를 내지 못하는 아빠의 극단적 무능함은 부녀의 이별로 이어진다. 그러나 작가는 엔리카의 행동에서 당황의 기미를 읽어내지 못하게 못한다. 17살 소녀의 임신, 책임을 회피하는 체사레, 그리고 낙태에서조차 어린 소녀의 담담함만을 보게 된다. 결국 이렇게 냉혹하리만큼 처연한 엔리카의 묘사는 어떤 의미에선 절망의 초월처럼 보인다. 여기서 성장과정의 한 소녀를 상상하기는 어려우며, 그래서 소설이 취한 성장기의 방황이란 주제와 전후 모순을 읽게 된다.

홀로서기 위해 찾아가는 세상에의 첫 발은 체사레의 한때의 연인이었던 백작부인인‘바르덴고 부인’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삶의 반경이란, 인생행로에 직접적인 한계처럼 인식된다. 즉, 자신이 속한 일상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을 인생은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다는 환경결정론적 시각이 대두된다.

그러나 유산계급인 부자, 백작부인의 개인비서로 숙식을 해결하지만 이내 자기 또래의 어린 남자와의 관계에 몰입하는 비천함만을 목격하게 되고, 체사레의 부자 약혼녀와의 결혼과 그의 학업중단이 인생항로의 전환점으로 비춰지지만 엔리카의 지속되어온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는 결정적 갈등의 요소로 이해하기에는 무언가 필연성이 없음에도 급기야는 구태의연한 계몽적 귀결로 치닫기 시작하기까지 한다. 또한 부기학교 동료이자 희생적인 남자친구‘카를로’를 저버리는 행위는 사회의 계층과 부에대한 갈망을 고착화시키는 작가의 또 다른 의식처럼만 보인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 대해 단순한 육체적 해갈을 위한 욕망의 대상, 또는 계층과 부의 방편정도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렇다고 등장 여성들이 이를 극복하려는 어떠한 적극적 행위를 보이는 것도 아니다. 결국 이 작품은 한 소녀의 성장기 방황도 아니요, 침해받는 여성 권익의 보호도 아니며, 사회제도의 위선이나 자본주의의 계층적 고착화에 대한 고발도 아니며, 생존하는 것은 다만 환경결정론적 계층의 고착화 지지가 아닌가 할 정도로 당혹스럽다. 너무 극단적 해석이라 보여 질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이를 불식할 어떠한 필연적 이야기나 주장을 찾을 수가 없다. 1960년대 이탈리아 문학을 대표하는 걸작이라 하나 시대를 포용하거나 작품의 완결성 측면에서 오늘에 읽히기에는 많은 취약성을 가진 작품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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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비행기 - 팝아트 소설가 죠 메노 단편집
죠 메노 지음, 김현섭 옮김 / 늘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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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치면 범상치 않은 제목들이 생경하게 다가온다. 사람이 구름이 되어가고, 달의 건축양식이란 또 뭔가? 세상의 종말에는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일까? 미니어처 코끼리는 인기가 있다니! 그리고 비현실적인가 하면 아이의 낙서 같기도 하고, 멋진 추상화 같기도 한 삽화들이 책장 곳곳에 숨어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그 전형적 냄새가 확 끼친다. ‘앙드레 브르통’의 극단적 문체주의 작품보다는 ‘나탈리 사로트’ 의식과 의식저변의 재현에 가깝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상당히 순화되어 그저 흐름을 따라가면 될 정도이나 몇몇의 작품은 작가의 시선을 쫓는 것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굳이 작가의 의도를 살피느라 재미를 반감시켜서는 곤란하다. 그저 와 닿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음미하면 전체가 구상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면 의외의 즐거움에 빠져들게 되는 자신을 발견 할 수 있고, 나아가 공감키 어려운 비판의식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도 할 것이다.
이 작품집을 구성하고 있는 단편 속 인물들에서 21세기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정형을 담아내기 위해 20편이란 숫자를 맞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이없이 은행 강도가 되는 미친놈에서부터 동성애자, 말단 경찰관, 외로움에 지친 여자와 입 다문 딸아이, 바람피우는 아내와 자살하는 남자, 권태와 진부에 몸을 떠는 사람들, 못난이와 에고이스트들, 위선과 가식, 그리고 진실의 실체를 쫓는 무수한 사람들에서 어쩔 수 없는 고독의 두려움과 좌절, 우주의 유한성과 제어력을 잃어버렸음에도 질주하기만 하는 인간들의 무한공포가 있다.

황당함, 기이함, 취약함, 하찮음, 어리석음, 결여, 분노, 짜증, 상실, 이별, 죽음, 미친 세상, 어둠... 이 무수한 인간의 변화무쌍한 감성이 다양하게 변주되어 흐르고 있다. 여기에 ‘상실감’이니 어쩌니 하는 주제를 찾으려는 어쭙잖은 노력은 거두는 것이 좋다. 소외된 감성들, 잊혀진 언어들, 어쩔 수 없는 고독들, 이성의 거대한 사유와 무력함, 그리곤 어느 순간 정말 소중한 것들이 잿빛 의외성으로 가슴에 실린다.

거대 담론에 휩싸여 보이지 않던 그 안에 바들바들 떨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본다. “세상의 종말에 들리는 소리”처럼 그것은 한낱 로크론일수도 있으며, 사막의 전쟁에 나간 남편의 무심함과 달리 아이의 고집스런 무언(無言)과 하얀 린넨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빛의 에어포트”에서 삐죽이 올라오는 마천루나 “유나바머와 우리 형”의 문명이 뱉어내는 찌꺼기의 추악함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며, 폭탄테러 뒤의 조작된 ‘문명의 충돌’이니 하는 허위의식과 ‘스톡홀름 신드롬’과 같은 지식의 허영과 억측스러울 뿐 보잘것없는 이야기들에 대한 조소와 반란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룸메이트와 그녀의 남자친구가 벌이는 그 열정적이고 격렬한 섹스의 울림을 피해 우주인 헬멧을 뒤집어 쓰고 있는 오드리나, “오션랜드”에서 보여 지는 나와 타자간의 진실의 간극, 인간피라미드 꼭대기에 서는 치어걸의 실존의 체험과 같이 세상과 화해하고 조화하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몫임을 확인한다. 지독스럽게 고독하고 공허한 이야기들이 손을 대면 구름수증기로 변해버리기만 한다. 작품집의 마지막 편인 인구 30여 만 명의 작은 나라,“오늘날의 아이슬란드”는 그 화산과 지진, 혹한 등 척박한 땅위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그 사실의 이야기는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죠 메노’의 이 작품집은 이처럼 의외의 소재와 상상력이 결합한 낯선 표현으로도 사람과 세상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구나 하는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읽을수록 맛이 나는 “달의 건축 양식”이나, “사람은 구름이 되어간다”는 오랫동안 회자될 명작으로 추천하고 싶어진다. 어쩜 세상은 진지함을 코믹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진실이 드러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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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난화 경제이야기 - 환경이 세계 산업지도를 바꿔나가고 있다
김종서 지음 / 참콘경제연구소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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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류가 자연에 실력을 행사하는 존재가 되면서부터 지구를 폐허로 만들기 시작했다.’는 ‘앨런 와이즈먼’의 인간이 저지른 극악한 환경침해의 경고 메시지가 시급한 현실의 문제로 그리고 존속 가능한 세계를 열기위한 처방전으로 구체화 되어 기술되고 있다.
지구환경 오염, 그 폐해의 지적과 개선에 대한 목소리가 어제 오늘의 외침은 아니다. 다만, 성장과 소비 일변으로 치닫는 인간 욕망의 그칠 줄 모르는 무한성이 이를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 저술은 우리 인류가 아니 우리 대한민국도 이러한 지구환경의 절망적 상황에서 예외일 수 없으며, 바로 이러한 위기에 대한 다급성을 명료하고 바르게 인식함으로서 생존, 나아가 성장 동력의 준비와 발굴,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어 내야 하는 당위성에 직면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재앙에 대한 위기의 실상 - 지구위에 존재하는 얼음의 90%가 있는 남극의 해빙과 해수면 상승, 국지성⋅게릴라성 집중호우 등 기후 이변, 산성비의 수용성(水溶性) 알루미늄 적출로 인한 생명의 멸종, 사막화, 물 부족 등 - 을 통해 오늘의 환경오염은 지구의 자정(自淨)능력을 이미 초과하고 있음을 보다 긴박한 목소리로 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에 대한 세계 각국의 환경보전을 위한 동향은 물론 선행되어야 할 과제의 제시, 대안의 모색까지 아우르고 있는 사회시스템의 통합적 성찰을 담고 있다.

특히, 1997년 12월, “온실가스의 감축 없이는 지구의 미래는 없다.”는 교토의정서의 선언을 시작으로 2005년 11월,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탄소배출권의 거래(ET: Emission Trading), 청정개발체제(CDM: Clean Development Mechanism), 동시이행 (JI: Joint Implementation)을 내용으로 하는 교토메커니즘 도입으로 구체화되고, 2009년 이들의 실질적 로드맵 확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세계적 환경규제 활동 일정이 각국의 경제적 부담의 과중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으며, 이의 대응을 위한 우리의 자세는 어떤 것인지에 대해 명쾌하게 기술하고 있다.

즉, 온실가스의 배출에 대한 규제는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당위의 명제가 되었으며, 2005년부터 시작된 EU국가들의 탄소배출권 거래제도는 기업들, 국가경제의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과 같다. 전력을 비롯하여 제품생산에 투입되는 각종 원재료와 에너지는 석탄, 석유, 가스등의 화석연료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이는 필수적으로 온실가스를 배출한다. 바로 이러한 탄소배출 제품을 판매, 수출하기 위해서는 탄소배출권을 돈을 주고 사야하는 시스템이다. 결국 탄소배출의 저감을 위한 노력이 없는 기업의 경우 제품가격의 상승 초래, 이윤의 감소, 기업경쟁력 약화, 국가경제의 위기까지로 이어지는 정말의 생존적 위기를 안아야 한다.

이미 일본을 비롯한 선진유럽 각국들은 2013년부터 가동되는 탄소배출 규제조치에 대한 다양한 준비와 실행이 이루어지고 있다. “환경은 돈이다.”라는 적극적 의식의 전환은 환경보전을 위한 비용의 증가라는 소극적 사고를 벗어나게 하고 있으며, 환경오염 물질의 최소 발생 억제라는 수준에서 생산은 물론 운송, 사용, 폐기, 재활용에 이르는 전방위적 환경규제라는 적극적 보전개념으로 변화함으로서 근본적 산업시스템의 변경은 불가피하게 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더구나 교토메커니즘의 제도화에 따른 “배출거래 시스템의 구축 -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파생상품시장, ESCO(Eenrgy Saving Company)사업, 탄소관련 컨설팅, CDM중개서비스, 온실가스 감축인증 서비스”- 은 위기를 기회로 인식케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시장경제 패러다임의 변화를 최소화한 기반하에 경쟁적으로 참여 할 수 있는 기초를 만들고, 지속가능 사회로 전환하려는 인식을 확고하게 하였다.

이제 "환경과 경제가 통합되는 새로운 제3차 산업혁명 시대, 왓트컴(WATTCOM)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한다. 캐나다, 호주 등 조림사업이 잘 된 나라는 자국의 탄소생산 제품 판매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은 물론 탄소 잉여배출권을 판매할 수도 있으며, 기존의 생산 시스템에서 탄소배출량을 감축하게 되면 탄소배출권을 획득할 수 도 있다. 탄소배출권이 돈인 시대에 진입해 있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지구 환경, 지구 생태계의 보전을 위한 지구촌 각국들의 합의는 자국의 탄소 배출량을 억제하는 적극적 노력으로 그 어느 때 보다 급속하게 전환되고 있다. 앞으로 40년 후면 고갈될 석유자원을 대체키 위한 신생 에너지의 개발, 탄소배출을 야기하는 제품의 재활용은 궁극적으로 “거대한 소비패턴을 줄여야 하는”필연성으로 인한 불가피한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인류를 재앙으로 몰고 가는 온실가스의 감축을 위해서는 화석연료의 억제인 에너지 소비억제, 대체 에너지 개발, 폐기물의 재활용 방안 마련이라는 자원순환체제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유럽을 비롯한 선진국들처럼 국가차원의 환경보전 로드맵, 즉 중장기 환경 보전계획이 아직 없다고 한다. 다만, 지자체, 일부 대기업, 국책연구소등의 개별적인 대책마련이 진행되고 있으나, 2013년부터 실행되는 탄소거래제도라는 당면의 문제를 위해서도 시급히 준비되어야 할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극한적 자원경쟁 시대인 지금 태양광 발전, 태양전지, 담수화 사업, 대체에너지 개발 등을 비롯하여 각종 공해방지 장치기술, 폐기물 재활용 기술과 같은 5RE - Reduce, Reuse, Refine, Recycle, Reconvert to energy -기술개발은 이러한 세계경제환경 하에서 향후 우리의 국가 미래 산업으로 중대한 요청으로서“위기관리에서 산업의 성장 동력을 찾아내야”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끝으로 이렇듯 존속 가능한 세계를 열기위한 과제로서 “새로운 정보 변혁이 전제되어야 한다고”지적하면서“상상력, 네트워크, 진실 알리기, 학습, 그리고 사랑을 동원하여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는”것은 낱개이면서 동시에 전체인 세상(홀로닉스:Holon, Whole+One)을 인식하고 실현하는 길이라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세계를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이 저술은 산업화와 거대소비를 부추기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가 불러온 멈춤 없는 온실가스의 배출이 이젠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시점에 임박해 있음, 그리고 지금 당장 온실가스를 감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구촌 곳곳의 현상들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성장만능의 인식과 경쟁지향의 자세는 자제되어야만 할 궁극의 패러다임 전환의 시기에 도달해 있음을 각성케 하고 있다. 이렇듯 경고하는 위기의 메시지에 더해 탄소저장고 조성계획, 해외 조림사업을 통한 청정개발체제를 통한 탄소배출권의 확보와 같은 준비와, 소개 된 다양한 기회산업들의 제시, 과제의 제안 등은 기존의 많은 환경침해의 메시지와 차별되는 실용적이며 현실적 대안으로서의 가치를 제공하고 있다. 환경보전을 위한 우리의 이야기로서, 우리 한국의 시선으로 기술된 환경경제 학습을 위한 노작(勞作)이다. 개인은 물론 기업인, 행정관료, 정부정책자들 모두가 읽어 보야 할 필독서로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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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비타 악티바 : 개념사 1
최현 지음 / 책세상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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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人權), 그리고 당위적 가치에 머문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는 이 권리를 실현하는 제도, 즉 인권을 구체적으로 현재화(顯在化)시키는 권리로서 시민권의 발전과 오늘의 세계에서 보완되어야 할 기본권들을 정리하고 있다.

특히, 자연법(自然法)사상에서 출발하여 장 제르송, 수아레스, 그로티우스의 근대 인권사상, 그리고 계몽주의 사상가인 홉스, 로크, 루소의 자연권, 토마스 마셜, 아이리스 영, 소이잘에 이르는 현대 시민권에 대한 이론까지 인권과 시민권에 대한 발전과 방향에 대한 다각적인 인용과 설명으로 심도 있는 기초 학습의 안내서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인권이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위해 요구할 수 있는 자유와 서비스”라는 사전적 정의에 더해, 인간의 권리가 “자연법에 따라 ‘자연스럽게, 정의로운 상황에서, 정당하게 가지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에서 발전”하였음을 고대 그리스, 로마 자연법사상의 출현을 시작으로 고대의 시민적 지위로서의 시민권을, 보편주의 시민권, 자연법에서 자연권으로의 사상적 성숙, 시민(Citizen)과 국민국가의 성립, 1789년 프랑스의《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으로 비로소 근대적 의미의 시민권 확립, 자유권적 기본권에서 사회권적 기본권으로의 시민권리 확장, 그리고 다문화 시민권, 지구시민권에 이르는 오늘과 21세기 인권의 지향점을 제시한다.

비록 유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시민 권리의 성문화라는 흠결을 가지고 있으나,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며, 신체, 재산, 언론사상, 출판의 자유 등이 확립된 프랑스 인권선언은 오늘의 인권개념의 성립에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본가를 중심으로 한 시민 권리는 “개인주의와 보편주의를 강화해 평등한 시민권을 정당화 했지만” 동시에 경제적 불평등을 낳아 평등한 시민권을 다시금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이러한 시민계급의 분화와 사회발전은 자유권적 기본권에 머물렀던 시민권을 점차 선거권을 포함하는 정치권적 기본권, 나아가 공교육, 공중의료 등 사회권적 기본권까지 보다 온전한 인권으로 발전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자들은 사회권적 기본권에 대해 시장경제를 거스르는 자본주의 공격을 위한 도입으로 왜곡하고 있기도 하지만 이는 “시장의 변덕과 불완전한 고용상황을 늘 고려해야 하는”현실에서는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불가결한 인권으로 인식하여야 함을 지적한다.

나아가 국민국가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인권의 내외민(內外民)에 대한 차별은 다른 국가시민의 인권을 침해하는 문제 등 지구화(Globalization)에 따른 지구공동체의 실현, 즉 전지구의 보편적 인권이란 가치를 실현하는데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문제화하고 있다.

또한, 여성, 노동자, 유색인종,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보호와 특정국가내 다종족, 다문화로 인해 소외되는 시민의 권리까지 보장해야 한다는 다문화시민권까지 인권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기도 한다.

이처럼 인권과 그 실현제도로서의 시민권에 대한 개념을 오늘의 문제적 인식까지 포함하여 기술하고 있으나 몇 가지 아쉬운 점을 지적치 않을 수 없다.

첫째, 국민과 국가를 뛰어넘는 기구와 조직으로서 유럽공동체를 제시하고 다종족, 다문화의 통합예로서 온전한 인권, 지구화된 인권의 예로서 설명하고 있으나, 유럽공동체의 실상은 독일과 프랑스의 2개 핵심국과 영국, 벨기에, 이태리 등 크리스트교(카톨릭 포함)라는 종교권으로 통합되고, 오히려 동일 유럽권에 있으나 동방정교, 이슬람교권인 국가들은 적극적으로 배제하는 배타성으로 더욱 선명하게 블록화하는 현재의 실상을 왜곡하는 설명이 되어 인권의 지구화가 아니라 인권의 극단적 차별과 훼손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설명치 못하게 되고 있다.

둘째는 지구화, 집단인지적시민권,  다문화시민권 같은 거대 담론에 치우쳐 오늘의 세계에서 자행되는 인권유린의 현장인 중동지역에서의 서구와 유태민족주의의 반인권, 비인간적 인권부정의 실상을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실제 시민권, 인권의 문제는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미국과 서구에 의해 또다른 형태의 자본식민화, 재앙자본주의에 의해 18세기의 인권에도 미치지 못하는 억압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현실세계에서 발생하고, 가까운 미래에 예견되는 서구 중심적 편협의 극치라 할 수 있는 ‘문명의 충돌’과 같은 왜곡의 발상이 오히려 문명권의 패권주의로 치닫게 하여 세계를 종교적, 자본적 정체성에 의해 새로운 블록으로 재편하고 시민권 즉, 인권의 배타적이고 차별적 실행을 심화시키는 것을 설명치 못하고 있다.

이러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 소책자는 모두(冒頭)에서 언급하였듯이 인권, 시민권에 대한 기본적 개념 정립을 위한 기본안내서로서 쉽고 충실하게 정리되어 있어 대중적 이해를 확충하는데 유용한 기여를 하는 도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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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가노 리포트 - 21세기 자본주의의 유지 방안
수전 조지 지음, 이대훈 옮김 / 당대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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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근본주의자들, 그리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자본주의자들의 헤게모니 유지존속을 위한 전략보고서라 하겠다. 이 보고서는 어떠한 미사여구로 미화하여도 지상에서 가장 사악하며 잔혹하고 무자비한 서구중심의 더러운 술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이 보고서가 작성되어 제출된 해가 1997년 11월이니 이미 11년이 훌쩍 넘어선 자료이나 보고서내용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재난(災難)자본주의는 이미 브랜드가 되어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라는 미명하에 전 세계를 유린하고 있어 이 야만적인 전략전술자료를 거들떠보는 것이 의미가 없지는 않다.

비서구 세계, 그리고 서구 자본주의에 종속된 민족, 국가, 지역, 문명 등에 사용 할 다양하고 잔인한 전략들이 시종 역겹게 하지만,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며, 경제적 쇼크충격요법처럼 이미 상당한 내용은 2009년 오늘 우리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것들이다. 특히, 이 보고서가 시카고보이즈(Chicago Boys)의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인 신고전경제학파의 논리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으며, 시장지상주의, 자유시장경제 만능의 미국 자본주의자들의 기득권 유지 및 강화를 위하여 작성되었음을 인지 할 수 있다.

이 보고서의 작성 취지 및 본문 내에서도 수차례 언급되고 있지만 “문명사회와 서구문화의 영속”에 걸림돌이 되거나 위협이 되는 세계를 제거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여기서의‘문명사회’란 서구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의 사고에 입각한 비서구 사회를‘야만’이라고 하는 것의 대응 개념으로서, 서구사회를 위장한 개념일 뿐이다. 즉, 비서구의 성장이란 위협으로 인한 서구의 긴장감에서 시작된 그들만의 세상으로의 재편을 위한 긴급전략으로서의 성격을 갖으며, 따라서 미국과 유럽(헌팅턴이 자신의 저서‘문명의 충돌’에서 언급한 크리스트신앙의 유럽동쪽 경계선에 이르는 국가)이란 서구 이외의 전 지구를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

보고서 작성자들인‘특별연구팀’으로 불리는 이들은 분명 이 보고서가 “인종집단이나 종교, 민족에 대한 증오심을 품고 있지 않다.”고 천명하고 있으나, 보고서가 지향하고 있는 목표로 내세운 “1. 개인의 성공기회와 행복추구 기회를 최대화 시키는 경제적 환경 창출 2.인간과 다른 생물종이 살아 갈 수 있는 주거환경의 보호 3. 문명사회와 서구문화의 영속”이란 세 가지 정강(政綱)은 인종과 민족, 집단에 대한 무차별적 퇴출을 이상으로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들의 기본논리는 기막히게 단순화되어있다. 자본주의는“인간 역사에 가장 빛나는 집단적 발명”이라고 자신들의 경제이념을 자찬한 후 그네들이 관찰하고 있는 세계에 무수한 위협요인(자본주의 근본자들의 이념에 대한)들이 도사리고 있으며, 이로 인한 충격흡수를 할 수 있는 완충제 - 오늘의 국제기구들의 무력(無力)성 등 - 가 갖추어져 있지 않아 자신들의 존재와 행위를 드러내지 않고 비서구 세계를 뇌사시키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어 이들의 시종일관하는 핵심전략은 지구상의 인구축소로 집중되고 있으며, 자연스럽게 재앙촉발을 통한 비 서구지역의 몰락과 붕괴, 그로인한 서구자본주의의 성장과 부의 축적을 도모하고 있다.

앞서 언급된 이들의 목표 중 1호인 개인의 성공기회와 행복추구 운운의 실상은 “공동체 즉, 서구사회의 생존권이 우선되어, 개인의 인권을 약화시키는 바로 이런 사고방식을 적극권장”하는 전략의 다른 표현 이며, 2호인 인간과 다른 생물종이 살아갈 수 있는 주거환경의 보호란 것의 허위는 다음의 이들 주장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유전자 조작물질이 오로지 남반구, 즉 인구통제 방안으로서 식량이용도의 축소와 기아 및 기근의 강화가 목표인 남반구에서 배타적으로 재배되는 한에서는 적극 권장, 지지한다.” “기왕에 유전자 조작 작물이 재배된다면 그 사용을 가난한 인구과잉 국가들에 국한시켜”인류사회에서 영원히 퇴출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이들의 모든 생물종이 공존 공영하는 환경정책의 실제 모습이다. 그리고 3호인 문명사회와 서구문화의 영속은 보충적 설명이 필요 없는 그들만의 세상을 실현하자는 선동적 서구중심의 세계관이다.

18세기 시인 쿠퍼까지 들먹이며 자유방임(laissez-faire)은 신의섭리라고 까지 극화하는 이들의 논리는 그야말로 모순의 연속이다. 이들 특별연구팀은 이러한 근본주의적 자본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쇼크(Shock)요법을 최고의 공리로 간주하고 있다. 즉, “(지구에 대한)충격 = 소비 X 테크놀로지 X 인구”라는 산식에 입각하여 그들의 현실을 파악하고 있으며, 문제해결의 접근 또한 바로 이 산식에 의거한다.

특히, 인구를 충격의 가장 핵심적 변수로 판단하고 있으며, 실제 이 리포트의 제반 내용은 인구의 축소에 모아지고 있다고 하여도 이해에 무리가 없다. PRS(population Reduction Strategies), 즉 인구삭감전략의 실현을 위해 각종 재앙(災殃)을 비 서구사회에 몰아넣는 방법이다. 바로, “적극적인 인구관리 전략에 지적, 도덕적, 경제적, 정치적, 심리적 정당성을 부여해 줄 개념과 논점과 이미지를 개발해 나가야 할 것”에 집중하고 있다. “전염병과 기근, 전쟁, 지진과 같은 하늘의 응징은 인구가 지나치게 많은 나라에서는 일종의 축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에게 유익한 이른바 이런 재난들 덕분에 재앙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그 자손들은 지구의 드넓은 수혜를 다시 한 번 누리게 될 것이다.” 정말 멋진 이성(理性) 아닌가! 합리주의 사고의 극치이며, 공동체를 위한 인권의 말살은 정당성을 찾는다. 사악함과 잔인함의 극한이다! 이것이 이들이 말하는 자본주의이다.

극단적으로 이들은 “윤리를 일정한 사회의 집단적 생존전략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면 오늘날 윤리는 철저한 점검이 필요한 상태이다.”라고 하면서, “살아남은 자와 퇴출당한 자로 양극화된 사회를 창출한다는 것을 스스로 냉정하게 인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 것이다.”즉, 사회를 극단의 양극화하는 것, 소수의 엘리트, 부자 또는 소수의 부국(富國; 즉 서구사회)만이 생존하는 하는 것만이 정당하다는 새로운 윤리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궤변을 늘어놓기까지 하고 있다.

각론에 이르러서는 그 내용의 무자비함과 사악함의 극치를 보게 된다. “식품가격을 상승시킴으로써 음식물 섭취 수준이나 질병에 대한 저항성을 악화시킨다. 여성들은 매춘부로 나설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에이즈에 감염되어 전염시킬 수 있다. 공중보건 예산과 기금이 대폭 삭감되어 각종 질병이 창궐하고, 저임금은 유료 의료, 약품이용의 기회를 원천봉쇄하는 결과를 가져 온다.”그야말로 비용을 안들이고 인구를 줄일 수 있는 기막힌 방법 아닌가? 또한, “사회 집단들 간의 적대의식 같은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집단 간의 적대감은 그 자체가 인구감축으로 직결”하며, “정체성 정치는 폭력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정체성 정치는 폭력의 희생자들 사이의 연대를 약화시킨다. 극단적으로 서로 철저하게‘이방인’이 되고‘너’와‘나’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된다.”그리곤 갈등, 전쟁, 영원한 퇴출로 이어진다.

한 술 더 떠 “야만인(비서구인을 의미)들은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성향을 지닌 것만큼은 분명하다.”고 비 서구인들은 본래 서로 죽이게끔 되어있다고 주장한다. 당연히 서구인이 아닌 인간은 그들의 생존을 위해 죽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제“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현대세계에서 상당히 촉망받는 인구감축 전략이다. 신생 이슬람공화국들에서 전쟁은 전혀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니다. 이 지역들에서 전쟁은 ‘사치스러운 증가(즉, 이슬람국가들에게는 출산이 사치스럽다는 의미)를 정리하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전쟁의 선(善)으로서의 가치에까지 이른다. 전쟁은 그들의 선을 위해 다시 말해 재난자본주의자들의 부의 창출을 위해 종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배후에서 조종하는 자신들의 모습이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 “지배체제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분쟁지역에서 50명의 인명을 구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담게 되면, 이것은 그 이면에 있는 5만 명이 제거될 수 있는 상황을 가려주는 매우 편리한 커튼역할을 하게 된다.” 요컨대 인도주의 활동은 인간 학살을 위장하는 권장사항이 된다. 이 보고서의 극악성과 파렴치함, 무자비함은 이루 다 형언할 수가 없을 정도다. 더구나 세계인에게 존경받는 사상가인 ‘노엄 촘스키’는 “우울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세계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고 이 쓰레기 같은 리포트에 진정성을 부여하였다. 서구인들에게 깊이 잠재된 시선을 단적으로 엿보는 대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보고서 대부분의 내용은 한국을 비롯한 비서구의 세계 각 지역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이미 한국은 1997년에 이어 2008년부터 바로 지금에까지 그대로 이들 자본주의 근본주의자들, 미국의 방임적 자본주의에 무참하게 공격당하고 있으며, 이들 논리를 맹렬하게 추종하는 자들이 공기업합병, 공기업인원감축, 방송통신, 의료, 상하수도, 전기등 사회기간산업 즉 서민의 생활에 직결하며 자신들의 무자비한 정책을 홍보할 수단을 민영화하며, 대대적인 규제를 해제하여 방임적 착취구조를 이행하고 있다.

이 어처구니없는 보고서가 바로 지금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이기에 그렇다. 우리사회가 이들이 휘두르는 자본, 특히 미국금융자본, 다국적기업들, 재난을 부추기는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자들의 모습을 정확히 이해하는데 기여 할 수 있다. 21세기 우리가 마주하는 자본주의 실체를 들여다보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역겹고 추하며 쓰레기의 보고(寶庫)이지만 적을 알아야 우리를 곧추세우고 잔혹한 세계에서 생존 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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