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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의 시절 문지 푸른 문학
다치아 마라이니 지음, 천지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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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내내 흐르던 어둡고 우울한 숙명론적 이야기가 갑자기 일갈되고 새로운 삶의 지향으로 전환되는 대단원은 작가의 세상에 대한 미숙한 관점처럼만 보여 오늘의 시선에서 그리 세련된 작품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작품의 초반부, 엔리카 가족의 빈한한 일상과 단절된 소통에서 환경결정론적인 인간의 질서를 보는 것 같은 섬뜩한 회의마저 엄습한다.

주거환경의 불안과 엄마의 죽음, 아빠의 경제적 무능력, 어린 소녀의 가사노동의 부담, 학습기회의 제약, 인간관계 형성의 한계, 이러한 피폐한 정신적, 물질적 환경에서 과연 우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열정으로 콩닥거리는 가슴과 화창한 봄날의 희망으로 충만 되어야 할 17살 소녀 ‘엔리카’에게 이러한 환경은 정말 끔직스럽다. 그때 누군가의 달콤한 속삭임과 상냥한 손길이 창백해진 정신을 어루만지면 이를 회피 할 수 있는 정신이란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이러한 의문에서 작품을 바라보면‘방황(彷徨)’이란 언어로 소녀의 행동에 잣대를 갖다 대는 것은 몰염치한 이기적 시선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더더욱 작가의 시선에 동화하기 어렵다.

학위를 준비한다는 구실아래 항상 공부 핑계를 대고 만남을 거절하는 첫사랑 연인‘체사레’와의 관능적 사랑은 어린소녀가 극복하기 힘든 유혹이 아닐 수 없다. 체사레가 준비하는 학위란 것은 계층의 상승, 부의 획득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가치 이상이 아니며, 그래서 이는 부와 계층에 대한 상징적 기준이자 인간사회의 탐욕스런 이기심으로 보여 진다. 그럼에도 엔리카가 헌신적인 남자친구‘카를로’를 회피하고 약혼녀가 있는 체사레를 지향하는 것은 거부키 힘든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임을 보여주는 것일까?

이에 더해 가족의 안락함과 삶의 질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어떠한 가치부여도 불능한 ‘새장 만들기’는 경제적 소외자의 무능을 한껏 극대화시키고, 어머니의 직장벌이로 연명하는 생계는 세 사람의 소통장애와 위태로운 가족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취약한 가족관계의 뿌리는 거의 경제적 고통에 연유된 것으로 엄마의 죽음으로 급속하게 와해된다.

집세를 내지 못하는 아빠의 극단적 무능함은 부녀의 이별로 이어진다. 그러나 작가는 엔리카의 행동에서 당황의 기미를 읽어내지 못하게 못한다. 17살 소녀의 임신, 책임을 회피하는 체사레, 그리고 낙태에서조차 어린 소녀의 담담함만을 보게 된다. 결국 이렇게 냉혹하리만큼 처연한 엔리카의 묘사는 어떤 의미에선 절망의 초월처럼 보인다. 여기서 성장과정의 한 소녀를 상상하기는 어려우며, 그래서 소설이 취한 성장기의 방황이란 주제와 전후 모순을 읽게 된다.

홀로서기 위해 찾아가는 세상에의 첫 발은 체사레의 한때의 연인이었던 백작부인인‘바르덴고 부인’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삶의 반경이란, 인생행로에 직접적인 한계처럼 인식된다. 즉, 자신이 속한 일상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을 인생은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다는 환경결정론적 시각이 대두된다.

그러나 유산계급인 부자, 백작부인의 개인비서로 숙식을 해결하지만 이내 자기 또래의 어린 남자와의 관계에 몰입하는 비천함만을 목격하게 되고, 체사레의 부자 약혼녀와의 결혼과 그의 학업중단이 인생항로의 전환점으로 비춰지지만 엔리카의 지속되어온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는 결정적 갈등의 요소로 이해하기에는 무언가 필연성이 없음에도 급기야는 구태의연한 계몽적 귀결로 치닫기 시작하기까지 한다. 또한 부기학교 동료이자 희생적인 남자친구‘카를로’를 저버리는 행위는 사회의 계층과 부에대한 갈망을 고착화시키는 작가의 또 다른 의식처럼만 보인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 대해 단순한 육체적 해갈을 위한 욕망의 대상, 또는 계층과 부의 방편정도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렇다고 등장 여성들이 이를 극복하려는 어떠한 적극적 행위를 보이는 것도 아니다. 결국 이 작품은 한 소녀의 성장기 방황도 아니요, 침해받는 여성 권익의 보호도 아니며, 사회제도의 위선이나 자본주의의 계층적 고착화에 대한 고발도 아니며, 생존하는 것은 다만 환경결정론적 계층의 고착화 지지가 아닌가 할 정도로 당혹스럽다. 너무 극단적 해석이라 보여 질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이를 불식할 어떠한 필연적 이야기나 주장을 찾을 수가 없다. 1960년대 이탈리아 문학을 대표하는 걸작이라 하나 시대를 포용하거나 작품의 완결성 측면에서 오늘에 읽히기에는 많은 취약성을 가진 작품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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