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기억은 왜 그토록 불안정할까 과학과 사회 3
프란시스 위스타슈 지음, 이효숙 옮김 / 알마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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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메커니즘을 정립하고, 뇌의 신경망과 뇌기능의 연구를 통해 궁극으로는 뇌의 외부적 손상이나 신경 퇴행성 질환으로 인한 기억상실 증후군, 알츠하이머병과 같은 정신착란증후군의 실제적 원인 규명을 위한 일련의 신경해부학적 성과에 대한 보고서랄 수 있다.
프랑스 캉 대학 국립보건의학연구소 신경해부학 팀장인 저자‘프란시스 위스타슈(Francis Eustache)'박사의 인지 신경심리학과 인간 기억의 기능에 대한 연구를 배경으로 하는 인간의 기억 메커니즘에 대한 진전된 성과는 소위 노인성 치매라 불리는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결정적 규명단계의 접근을 알리고 있어 개개인의 건강은 물론 사회적 효용측면에서도 커다란 기대를 갖게 한다.

이와 같은 질병의 의료적 개가에 못지않게 이 저술은 인간의 뇌기능과 기억의 메커니즘에 대한 수준 높은 성찰로 구성되어있다. 특히‘기억’에 대한 신경심리학적 언어들의 정의와 이해를 기초로 하여 기억의 층위(위계)별 역할과 기능, 나아가 인문학적 통찰에 이르는 기술(記述)은 독자를 인간 기억시스템에 관한한 견고한 이론가로 만들어줄 정도로 탁월하다.
‘신경심리학’은 “뇌의 상태에서 비롯되는 인지적 기능장애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정의된다. 그래서 정보의 획득과 저장, 회수의 시스템인 기억에 장애를 일으키는 요인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은 뇌의 구역별로 특정한 또는 지배적 역할의 파악을 가능케 하고, 인류의 정신건강은 물론 상상을 초월하는 혁신적 영향을 가져올 수 있다.

저자는 기억의 다양한 형태를 소개하고 있다. 단기기억과 장기기억, 일화적 기억과 의미적 기억, 서술적 기억과 절차적 기억이 그것인데, 이는 다양한 종류의 지각이 같은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는데 기초하고 있다. 명확한 공간적, 시간적 맥락 속에 위치한 사건에 관한 기억인 일화적 기억과, 이와는 달리 언제,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는 탈맥락화한 낱말, 세계에 대한 지식 같은 의미적 기억이나, 이와 같이 일반적이고 특별한 정보와 관련된 의미적 기억과 일화적 기억을 포함하는 서술적 기억, 훈련과 더불어 점진적으로 숙련성을 획득하고 저장하여, 이전 경험에 근거하지 않고도 회복할 수 있는 절차적 기억에 대한 설명은 우리들의 기억 방식이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 정보를 제공해 준다. 

여기서 절차적 기억은 우리들의 관심을 끌게 되는데, 우리가 운전할 때 기억의 도움을 받는다는 의식 없이 수행하는 것처럼, 이 기억의 표상은 암묵적이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 정신생활의 일부는 우리 의식을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때로는 이 기억이 우리도 모르게 욕망과 신념을 드러내어 정신의 중립성을 배반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는 저자의 말처럼 우리의 “기억의 세계는 이상하고 매혹적이며, 두렵기조차” 할 정도로 신비로움을 느끼게 한다.
기억은 자신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주관적 느낌과 시간 속에서 중요성 여부에 따라 정보를 지속적으로 보유하고 고정화시키기도 하지만, 불과 몇 초, 몇 분 뒤에 기억 속에서 날려버리기도 한다. 특히, 일화에 관한 기억은 며칠, 몇 달, 몇 년 에 걸쳐 형성된다고 한다. 이러하다보니 겪은 장면을 그대로 복사하듯이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주체의 관심과 욕망에 따라 기억이 구축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기억이란 ‘역동적 현상’이며, 부정확하고 불안정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처럼 불안정하고 장애를 일으키기 쉬운 우리들의 기억은 여러 형태의 질환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PET나 MRI와 같은 뇌기능 영상기술의 발전은 “전두부 피질은 전략적 회상을 담당하고, 해마는 에크포릭(ecphoric; 어떤 상황에서 기억에 자동 접근하고 심지어는 억누를 길 없이 접근하게 되는 것) 회상을 맡는다. 단어들의 코드화에 요구된 뇌 구역은 어디일까?”와 같은 뇌의 부분별 기능에 대한 탐색을 진전시켜왔고, 이러한 부단한 실험은 질환의 조기진단영역에서 ‘알츠하이머병’의 초기잠복진행을 발견하고 진행을 완화시키거나 심지어는 중단 시킬 수 있을 만큼 효과적 치료가 가능한 단계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이 이 저술은 인간 기억의 새로운 상호체계의 모델을 구축하고, 뇌기능의 탐색에 엄청난 기술적 발전의 진행상황을 보여준다. 인간 뇌의 신경망과 그 위치별, 영역별 기능과 역할이 정복되는 날, 다가올 의료적 낙관 못지않게 왠지 모를 불안도 엄습해온다. 치밀하고 세련된 논리와 구성, 차원 높은 사유가 돋보이는 뇌 과학을 기초로 한 기억 시스템의 선도적 저작이다.

「기억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해 두는 대뇌 활동이 아니라, 매순간 변하는 현재와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경험의 질료’이다」 - 추천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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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
알랭 드 보통 지음, 지주형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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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나래를 활짝 펴고 삶의 편린들을 모아 문학작품 속에 잠겨있는 진중한 정신세계를 비범한 통찰력으로 정리한 책 읽기의 진수라 해야 할까. ‘프루스트’를 읽어내는‘알랭 드 보통’의 방식 - 온전히 작가의 시대와 삶으로 들어가 작가의 시선과 생각으로 - 으로서만이 프루스트를 독해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매혹적이다.

프루스트를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세운 그의 대표작『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좀처럼 손에 들기가 여의치 않다. 7편 11권으로 국내에도 완역된 전질이 나의 서가에 나란히 꽂혀진지 몇 해가 지났는 지 모르겠다. 매번 읽어야지 하면서도 좀처럼 다가서지 못하는 내게, 그의 동생‘로베르’의 말처럼 “사람들이 매우 아프거나 다리가 부러지지 않고는 읽을 기회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는 조크가 진실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아마 밀폐된 침대에서 쓰인 글이라서 그런 것일까. 당시 프루스트의 열정적 팬들조차 작품의 길이가 너무 길어 난처했다할 정도이니 위안이 되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프루스트를 좋아 하세요』라는‘보통’의 프루스트 읽기를 따라가며 마주하는 인생의 작은 조각들과 사건들에 대한 광대한 사유는 세상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던 이면의 층위들을 깊고 색다르게 느끼게 해주는 멋진 길잡이가 되어준다.
프루스트가 들으면 정확히 기분 나빠할 얘기가 되겠지만,‘보통’의 이 에세이를 정의한다면, 삶을 바라보는 법, 그리고 감사하는 법의 탐색이 아닐까?
“신문 읽기라는 가증스럽고 음란한 행위”라고까지 단문과 빈약한 표현에 질색했던 프루스트이고 보면 조잡한 이 정의가 무책임하고 독자를 우롱하는 방해공작이라고까지 비난할지 모를 일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제1권 「스완네집 쪽으로」의 첫 페이지를 접하는 누구든 바로 느낄 수 있는 지루할 정도의 세세한 묘사와 설명으로, 지극히 단순해 보이는 장면을 몇 장에 걸쳐 기술하는 프루스트의 글쓰기가 당혹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보통’의 설명을 듣고 보면 그 구체적이고 작은 경험들이 모두 표현되어야 비로소 온전한 전달이 된다는 믿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는 “너무 빨리 하지 마세요.(N'allez pas trop vite)"라는 프루스트주의적 슬로건이 있으며, 너무 빨리하지 않으면 생기는 이점은 그러는 도중에 세상이 재미있어진다는 그의 신념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철학은 형태는 다르지만 “예술작품은 왜곡되었거나 지나친 현실의 측면들을 우리의 시야에 회복시키는 능력이다.”라는 예술작품에 대한 그의 생각과 공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생을 천식을 앓으며 커튼이 드리워진 침실에서 보낸 병약한 사람인 프루스트의 고통에 대한 찬양은 역설적이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고통에 빠지고 우리가 희망했던 대로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 까지는 아무것도 제대로 배울 수 없다.”는 고통스러울 때만 철저한 탐구심이 발현된다는 진리의 실천으로 느껴지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 될까.
어쨌든‘보통’은 프루스트의 이러한 삶의 견해로부터 “우리는 앓는다. 고로 생각한다.”고 데카르트를 차용한 재치 넘치는 명구를 만들어낸다.

한편 ‘보통’의 의도야 어찌되었든 ‘프루스트주의적’, ‘프루스트적’, ‘프루스트하다’는 표현들이 등장하는데 프루스트의 행동과 말, 그리고 그의 글들이 일체화되어 동시대인들을 비롯해서 오늘의 문학적 삶에까지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또한 정형화된 의미가 될 정도로 새로운 하나의‘가치’이자 ‘정신’이 되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특히 ‘보통’의 이 글이 돋보이는 것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등장인물들에게 프루스트의 작가관, 친교관계, 성장 배경과 과정, 삶의 자잘한 것들에 대한 신념, 예술관들을 명쾌하고 유연하게 이끌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작품 속 화가인‘엘스티르’는 “조잡한 그림에서 르아브르 항구에 대한 놀라운 재현”이라는 양극의 평가를 받았던 인상파 화가‘클로드 모네’의 일면임을 통해, 프루스트의 예술관을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 설명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은 프루스트가 하는 작은 상념의 자투리로부터 연결되어 무성한 기억의 층위들을 헤집는 모양과 아주 닮아있다.

프루스트의 친교관계를 쫒아가면서, 대화와 책이 갖는 장단점으로 이어지고, 다시금 프루스트의 내면을 조명하는 변화무쌍, 종횡 무진하는 ‘보통’의 글쓰기 역시 삶의‘이면(裏面)의 원인들’을 현란하게 탐색해 낸다.
부호(富豪)인‘공작부인’과 소시민인‘알베르틴’의 소비행태를 통해 “욕망과 기쁨 사이의 시간적 간격”이 주는 막대한 이득에 대한 식견이나, 프루스트의 성적(性的)이해와 의지에 대한 고찰로서 “오늘밤 시간 없어요.”라는 여성의 말이 소유가능성에 대한 의심의 여지를 만들고, 이는 진정하고 지속적인 욕망의 원인이 된다는데 까지 이르는 상상력의 연결은 가히 혀를 내두르게 한다.

평범하다고 생각한 것,(....)하찮다고 생각했던 자연에 위대한 예술이 있다는 것에 압도되었을 때, 철물과 질그릇도 매혹적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비자발적으로 생겨난 기억이 과거의 진정한 모습을 환기시켜줄 때, 오랜 망설임 끝에 예쁜 옷을 구입했을 때 느끼는 기쁨이야말로 행복이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것이 될 것이다.

프루스트의 높은 감수성과 “시간의 분해와 상실의 이면에 있는 원인들을 탐색하는”,‘보통’식 이 에세이는“대상자체 보다는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의 질에 달려있다.”는 그의 말처럼 세상을 이해하는 사고의 품격을 한 단계 올려주고, 우리의 정신적 삶을 한층 고양시켜준다. 풍부한 지성의 향취를 만끽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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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생각들>을 리뷰해주세요.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생각들 - 유가에서 실학, 사회주의까지 지식의 거장들은 세계를 어떻게 설계했을까?
황광우 지음 / 비아북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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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쳐나는 소비와 쾌락, 대중 미디어를 통한 무차별적인 욕망의 부추김과 우민화는 소수 지배계층이 힘도 들이지 않고 다수의 대중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그저 천박한 속물주의가 지상의 목표인 사람들에게 자유니, 민주니, 인권의 침해니, 비민주적이니, 정책이 옳으니 그르니 하는 말들이 들릴 리 없으며, 설혹 들린다 한들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알 턱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남의 이야기이고 좀처럼 자신들의 삶과 연결 짓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이 속해 있는 계층이 보이지 않는 위계에 얽혀있으며, 직접의 모욕과 침해가 발생하면 그제서야 기득권 계층이 어쩌니 저쩌니, 권력가진자들이 자기를 멋대로 취급한다느니, 돈 없고 백 없는 놈 서러워서 못살겠다느니 하는 것을 보면 이기적이고 교활하며, 어리석어 보이고 일면은 측은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보행자도로에서 아빠 목마를 탄 어린아이가 촛불을 들었다고 체포되고, 세 걸음 걷고 한걸음 쉬었다고 구속되는, 그리고 인터넷을 마구 감청하여 사생활이라는 기본권의 침해를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고, 정책을 비난하면 조직적으로 매장해버리는 점점 폭력적이고 인권을 마구 짓밟아대는 현실에도 모두 나 몰라라 하는 이 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일까. 극단적 이기주의와 타인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
그나마 모든 국민들이 오늘 이만큼의 자유와 민주적 질서를 누리고, 인간의 기본권을 가지게 된 것은 불과 20년 남짓에 불과한 것을 모두들 잊고 있는듯하다. 정치의 옳고 그름을 논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고, 실정(失政)과 독재적 일방주의를 비판하면 빨갱이로 몰아대고 악랄한 고문과 죽음으로 내몰던 자유가 억압되고 인권이 부정되던 야만의 시절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이다.

이제 언론까지 마음대로 하려들고, 비판 세력은 고립시키고, 국민을 딴따라 출신의 관료가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조롱할 정도로 이 막돼먹은 권력은 그 어느 때 보다 자유민주주의를 퇴행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국민들은 자신들의 기본권이 점점 축소되고, 자유가 손상되며, 민주적 질서를 폭력적 권위로 눌러대는 상황이 자신들과 관련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궁극적으로 권력이 오만 불손해지고 국민 위에 군림하여 명실상부한 지배계층으로 네트웍을 공고히 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심화 확장키 위해 전 국민의 노예화를 치닫는 사실을 결코 자각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탓일 게다.

이 『위대한 생각들』이라는 저작은 바로 이러한 오늘의 우리사회를 표현하고 있는 표면적이고 형식적인 체제와 이념을 구성하는 본질과 의미를 세상에 가장 쉬운 글로 정리하고 있다. 그래서 어린아이로부터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지켜내야 할, 그리고 당연히 주장하여야 할 권리와 질서, 즉 ‘자유민주의’국가라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갖는 내재적이고 실질적인 의미를 차근차근 전달해 주고 있다.
자유주의란 무엇인가, 그 자유주의가 가지고 있는 한계와 문제점은 어떤 것이고, 그래서 보완되어야 할 이념으로서 민주주의를 설명하고,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왜 결합되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써 오늘에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이른다.
또한, 자유주의의 대척점으로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적 본질과 민족주의에 대한 다각적인 시선, 빗나간 민족주의의 극단적 사례인 파시즘이 인류에게 남긴 상흔, 나아가 동아시아, 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의 근대이전의 사상과 정체성을 지배해 온 유학(儒學)과 그 밖의 도가, 법가 등 동양사상, 실학과 동학사상까지 우리의 사상적 계보를 아우르고 있다.

오늘의 인류사회에 자유주의 이념의 근본이 된 프랑스 대혁명과 인권선언, 이에 이르는 로크, 루소 등 인간의 기본권에 대한 사상, 시민계급(부르주아)의 사상이었던 자유주의의 정치적 한계와 노동자, 농민의 경제적 소외가 민주주의라는 확장된 의지의 포함까지 결합하는 자유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자유주의가 야기한 뚜렷한 불평등의 현실에서 자라난 평등사회의 꿈을 지향하던 인류의 유토피아라는 염원으로 시도된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의 태생적 오류를 지적하고, 비록 현실에서는 폐기된 이념이지만 계급의 해방을 위한 실천적 사상으로서의 가치를 새로이 조명하기도 한다.

특히 민족주의의 토대가 되는 국민국가라는 개념의 형성과정과 이 과정이 만들어 낸 국가적 이기주의와 편협성, 제국주의와 식민지 정책으로의 이향에 대한 배경, 그리곤 20세기 인류 이성에 근본적인 상처를 가져온 독일,이태리,일본의 빗나간 민족주의의 광기와 열정인 파시즘이 한국과 같은 제3세계 의 미숙한 국가들에서 어떻게 발현되고 교묘하게 전파되고 있는지 높은 통찰력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자유민주주의와 오늘의 인류에 여전히 중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이들 이념과 아울러, 한국인의 습속과 태도에 깊이 침착되어있는 유가(儒家)사상을 비롯한 동양사상의 본질을 꿰뚫고 있음은 이 저작의 또 다른 탁월함이랄 수 있겠다.

우리가 본격적으로‘근대화’라는 세계적 질서에 편입되는 1945년 이전의 시기에 한국인을 지배하던 사상은 ‘성리학’이다. “조선사회 전체의 행동규범이자 통치철학이었던 이 사상은 양반과 상놈을 철저히 나누어 서로 다른 일을 하는 현실을 정당화한 지배층의 사상”이었으며, 이는 역시 ‘군자(君子)의 학(學)’이라 했던 유가사상을 그 이념의 핵심으로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결국 18세기 실사구시의 실학사상을 시작으로 피지배계층이던 국민의 절대다수였던 농민의 수탈로 인한 ‘갑오농민전쟁’과 동학의 의의, 29개조로 구성된 폐정개혁안은 비록 무능한 당시 지배세력과 외세에 의해 무력화되기는 하였으나, 인내천(人乃天)등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대한 우리 선조들의 각성과 투쟁의 역사를 알려준다.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이 민주주의의 최전선이라는 생각으로 국민 각자가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각성하고 싸우지 않는다면 언제든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성큼 후퇴하고 말 것이다.”생명권, 신체권, 재산권, 자유권, 명예권, 인격권 등의 권리는 인간의 실존 조건이다. 불법과 불의를 감수하고 관용하는 비겁함과 무관심을 벗어던지고, 권리를 위한 투쟁을 하여야 하는 것은 그래서 당위성을 갖는 것이다.
진정 이 저작은 오늘의 한국인들을 위한 ‘위대한 생각’의 기초적 이해를 제공한다. 이 땅의 모든 이들을 위한 필독서로서 어떠한 손색도 없다. 저자의 의지와 노고가 돋보이는‘자유민주주의’의 대중교과서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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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계곡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10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0
마이클 코넬리 지음, 이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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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습하기 짝이 없는‘포’의 시구가 함께하던 어둠과 죽음의 사자,‘시인(poet)’이 돌아왔다!
FBI를 향한 시인의 도발, 그것도 즐비한 사체들을 쌓아두고 자신에게 총을 겨누었던‘레이첼 월링’을 수신자로 하는 소포와 함께.
이 작품은‘마이클 코넬리’의 주력 시리즈물의 주인공인 전(前) LAPD베테랑 수사관이던‘해리 보슈’가 해결사로 등장하면서 시인과의 대결에 한층 긴장감을 더해준다.

한 때 공조수사 파트너였던 전직 FBI요원인‘테리 매컬렙’의 심장질환에 의한 돌연사의 의혹을 시작으로 보슈는 사망하기 전 테리의 석연찮은 행적을 좇는다. 테리가 남긴 프로파일의 메모들은 네바다 사막으로 연결되는 '지직스 로드(zzyzx road)'를 가리키고,  한편 시인이 조종하듯 안내하는 사막에 묻힌 사체들로 레이첼을 비롯한 FBI수사팀은 시인의 의도와 행적을 찾지 못해 곤혹해한다.

결국 한 인물을 좇는 보슈와 FBI수사팀간의 미묘한 신경전은 레이첼의 애매한 입지로 수사력의 균형을 보슈로 기울게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전작(前作) 시인의 전체를 떠돌던 죽음의 망령이나 공포와 같은 음침하고 음울한 분위기의 스릴러에서, 걸출한 전직 수사관을 통해 본격적인 추리작품으로서의 속도감과 남성적 박진감이 장착된 범죄 수사물(탐정물)로 보다 강화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이렇듯 냉정한 이성적 전유물로서의 크라임스릴러(crime thriller)에는 여간해서 등장하지 않는 주인공의 가족이 등장하는 의외로움도 있다. 사건 해결의 중심에선 주인공인‘해리 보슈’의 전처와 그의 딸‘매디’의 출현인데, 이는 아이의 순수한 시선과 오염된 어른들의 사악한 사회를 교차시키고, 시인의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의 심리적 외상과의 대비를 통해 아이들의 양육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책임을 드러내는 작가의 의도가 아닐까. 어쨌든 이 작품만의 보기 힘든 특징이고, 시리즈의 다음 작품과의 어떤 관련성이 예견되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섬세한 감수성이나 타자에 대한 배려와 같은 보슈에게서의 인간적 갈등의 묘사가 몇 차례 등장하는 것도 새로운 형태의 추적자이자 형사의 인물상을 보여준다.

작품의 정점에 이르러서는 그야말로 피할 수 없는 감정이입과 몰입으로 긴장을 넘어 안절부절 못할 정도로 독자를 흡입해댄다. 세차게 퍼붓는 비와 급하게 휘감아 도는 검푸른 강물, 세상의 끝만 같은 계곡, 그리고 처절한 추격과 대결장면은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의 하나로 각인 된다. 단서 하나하나에 까지 미치는 정교하고 세심한 장치는 정통 크라임스릴러의 진수란 이런 것이다! 라는 작가의 자긍심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인지 LAPD(L.A.경찰국)로 복직 신청을 한 보슈의 다음 행보는 예사롭지 않다...영혼을 잃은 망자의 검은 눈이 떠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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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에 관한 잡학사전
미하엘 코르트 지음, 권세훈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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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전은 세계 문학에서 유명한 작품들이 슬프거나 우스꽝스러운, 혹은 어지러운 삶의 상황에서 어떻게 탄생했는지 보여줄 것이다.”라는 저자의 서문은 정확히 옳다. 틀에 박힌 일상으로부터 일탈하고, 거짓과 사기, 위선과 파렴치, 마약, 섹스, 음주 중독자인 비사회적 인간으로 살아갔던 110여명의 걸출한 작가, 사상가, 예술인인 그들의 또 다른 실체를 좇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들의 작품이나 저술과는 연결되지 않을 것만 같은 기행(奇行)과 위선을 보는가 하면, 자신의 난잡한 일상을 그대로 작품에 옮겨놓은 자들, 허풍과 기생(寄生), 구걸로 연명하는 낙오자의 얼굴들을 보는 당혹스러움도 있다.  

인류의 위대한 창작물들, 발견들, 사상은 불현듯 질서와 규칙을 진리처럼 지켜나가는 범인(凡人)들로부터는 출현 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수록된 인물들의 일상은 정상의 궤도에 있지 않다. 『광기에 관한 잡학 사전』의 표제처럼 이 저작물을 ‘광기(狂氣)’라는 언어에 맞추어 읽기에는 광기의 의미가 극단적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동성애도, 싸움질도, 육욕도, 도박도, 음주도 모두 광기의 한 측면으로 보아야 하고, 사기와 배반, 간통과 위선도 광기의 연장이 되어야한다. 그렇다면 광기에 휩싸여 있지 않은 인간은 존재치 않는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고, 이들은 곧 우리 모습의 투영이랄 수 있을 것이며, 일탈을 꿈꾸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이 저작이“자신의 결단과 행동을 낯설지 않게 해주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역자의 말 또한 동일한 관점의 이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이 걸출한 문인들, 사상가들의 궁박한 남루와 비굴함, 그리고 교활함, 역겨운 위선과 파렴치까지도 오늘의 우리에게 문학의 소재로, 삶의 아이디어로, 인생에 대한 다양하고 풍부한 시선을 제공한다.
윤리(倫理)의 사도로서 행세하던 ‘찰스 디킨스’의 추악하고 비도덕적인 비밀스런 애정행각이나, 욕망의 대상을 장난치듯 바꾸던 ‘조르주 상드’, “울타리 바깥에서는 막대기로 다루어야 하는 야수”였던 교활하고 막돼먹은 이중인격자 ‘루소’, “육체노동과 빈약한 음식이 아이들에게 밝은 정서 함양과 눈에 띌 정도의 건강한 발육을 보장해준다.”고 주장하던 어린이의 노동을 착취하던 근대교육의 아버지라는 ‘페스탈로치’의 위선은 인류의 사상과 감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그네들의 저술과 그들의 인격을 동일시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몰이해인가를 새삼 깨닫게 한다.

20세기‘정신의 비상’이라 일컬어지는 ‘비트겐슈타인’과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즈’의 우연한 만남의 일화에서, 시니컬의 대명사인 ‘쇼펜하우어’의 냉소적인 유머와 독설, 베를린대학에서‘헤겔’과 똑같은 시간에 강의를 함으로써 동시대에 성공하지 못했던 이유, “어떠한 상상력도 없었기 때문에”기억만이 귀중한 재산이었다는 ‘마르셀 프루스트’에 대한 삶의 일화들이 압축적인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엄청난 분량으로 이루어진 그네들의 평전을 능가할 정도의 통찰력과 넘치는 기지로 채워지고 있다.

또한,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 이들 명인들이 남긴 한 마디 한 마디가 삶과 죽음에 대한 寸鐵殺人의 언어로 장식되어 그네들의 삶이 때론 해학적이고, 때론 심원한 깊이를 가지고 철학의 언어로 독자를 매료시키기도 한다.
화려한 여성 편력 끝에 눈을 감는 시대의 연인이었던‘바이런’의 오만하고 자신에 찬 유언은 왠지 부럽기조차 하다.
“삶을 충분히 누렸기 때문에 헤어질 시간을 기꺼이 맞이하겠습니다. 왜 한탄해야 합니까? 과도할 정도로 삶을 즐기지 않았던가요?”
허, 정말 위대한 시인이지 않은가?  

이 밖에 세상을 조롱하는 재치 넘치는 말들도 이 저작의 또 다른 재미가 된다. “내가 이 세상에서 몇 사람만이 이해 할 수 있는 논문 몇 편으로 유명해지다니 정말 알 수가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유머나, “자비로운 하나님은 이 나라에서 대단히 귀중한 세 가지 재산을 허락했다. 언론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 그리고 이 자유를 한 번도 활용하지 않는 총명함 ”이라고 시대를 풍자하는 ‘마크 트웨인’의 신랄함은 역시 이 사전만의 탁월한 발견이고 시선이다.
“몇몇 남자들이 이러한 똥구덩이에 빠질 수 있었던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남성들의 수준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조르주 상드’를 향한 ‘니체’의 악평은 그 똥구덩이에 빠질 수 없었던 시기(猜忌)가 아니겠는가.‘하이네’,‘쇼팽’,‘플로베르’...180권의 책을 출판했기에 애인수도 그만큼은 되었을 것이라는 그 많은 그녀의 애인에 끼지 못했던 니체는 이러한 독설로 위안을 삼았을 것이다.

음주, 도박, 허풍, 싸움질, 육욕의 화신, 마약중독자, 동성애자, 마초맨...이었던 고골, 니체, 다니엘 디포에서 토마스 딜런, 파스칼, 하우프트만, 횔덜린까지 이들의 폭풍우 같은 삶과 그들의 꿈과 현실의 닿지 않는 대화 속에서 자유로운 심성, 정신의 비상, 위대한 상상력이라는 귀중한 재산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글을 쓸 때,  그네들의 작품을 읽거나 감상하게 될 때, 삶이 시들할 때, 이 작은 인물사전은 꽤나 위용을 자랑할 것 같다. 삶은 본디 위선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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