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엉이의 불길한 말 문지 스펙트럼
루쉰 지음, 성민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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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鲁迅,1881-1936)의 산문 10편과 산문시집 야초(野草)전체로 구성된 모음집이다. 중국의 근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사회운동의 사상가로서의 사유를 읽을 수 있는 정선된 글들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대표적 소설인 광인일기Q정전은 많이 소개되고 있으나 정작 그의 사상적 진수라 할 산문이 비교적 덜 알려진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시대와 인간의 오랜 어리석음의 관성을 꿰뚫는 자기 성찰의 요구는 끈질기게 붙어 떨어지지 않고 시공을 거듭하며 이 세계를 혼란시키는 원인들을 명징하고 냉정하게 바라 볼 것을 요구한다.

 

이 책의 제목이 된 부엉이의 불길한 말이란 문구는 시집 야초(野草)에 수록된 산문시 희망(希望)의 한 구절이다. 20세기 초 혼란기 중국 사회의 청년들이 그 어느 늙은네들보다 더욱 늙어있음을 발견한 놀라움의 표현이다. 헌데 지금은 왜 이리 적막하지? [...] 세상의 청년들도 다 늙어버렸나?” 생물학적 연령은 젊은데 그 내면은 노인들보다 더 늙어빠진 젊음, 마치 동시대 독일의 소설가 토마스 만의 소설 마의 산의 붉은 뺨을 하였지만 죽음을 안은 등장인물들을 생각나게 한다. 부패한 아버지 세대를 비난하지만 정작 부패한 것은 표면의 젊음 속에 숨겨진 결핵을 품은 붉은 뺨의 젊은이들이듯 말이다.

 

이 동시대적 동일 양상은 나치와 기회주의적 극우 국민당이라는 끔찍한 세계로 이어졌다. 중국이나 독일, 이 역사적 동일 유사성은 오늘 한국 사회의 현실과 또한 동일 유사성에 닿는다. 1922년 출간된 그의 단편소설집 외침(吶喊)서문에서 그 어떤 반항도 도전에도 관심이 없는 청년세대의 평화의 안주, 그 사악함을 비판한다. 사실 그에게 평화는 암류가 잠복하는 음험한 파괴의 열화(烈火)에 불과한 것이다. 버젓이 벌어지는 불의에 눈감고 자기 이익에 열중하는 삶이 지속 가능할 것이라 여기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익에 전념한다는 것, 이것은 차츰 비겁과 인색으로, 후퇴와 공포로 변질되고 급기야 소박함을 잃은 말세의 각박함만 남게 되는 것이 필연적임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세상은 저항과 파괴의 도전 소리로 들끓어야 한다. 아무 일도 없는 듯한 평온은 익숙한 실리에 가려진 독선과 아집의 세계, 몰락한 정신과 구습에 감염된 습관화 된 눈의 오류가 보이지 않게 할 뿐이다. 산문 악마파 시의 힘(摩羅詩力說)은 어떤 세계든 그 내부의 다른 반항의 목소리가 끝없이 외쳐져야 함을, 그럼으로써만 세계는 아주 조금씩 선의 세계로 다가갈 수 있음을 문학예술론, 시론의 지향할 바를 통해 강론하고 있다.

 

6세기 중국의 문학비평서인 문심조룡(文心雕龍)시자지야, 지인성정(詩者持也 持人性情)’이라며 시라는 것은 잡아두는 것이다. 사람의 성정을 잡아둔다.”라고 했으며, 공자는 시경(詩經)을 설명하길 시삼백 얼언이폐지왈 사무사 (施三百, 一言以蔽之曰 思無邪)’라며, 시 삼백 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생각함에 삿됨이 없다.”라고 말했다. 루쉰은 이러한 자기 계급 유지 목적의 평화론이 얼마나 교활하고 탐욕스러운 것인가하고 비판한다. 인간의 성정인 시를 규범에 가두어, 그 어떤 다른 목소리도 가두고 죽여 없애려는 권력인 유교적 질서에 경멸을 보내는 것이다. 그 깊숙이 숨겨진 보수적 기만이 민중의 삶을 질식시키고 있음을.

 

루쉰은 이러한 세태에 자신의 문학예술이 아무런 변화도 가져 올 수 없다는 실의로 좌절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 그에게 쓰기를 요구했던 후배 문인과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중국의 먹물들에게는 제법 알려진 일화이다. 일명 쇠로 만든 방(鐵屋子)’이야기. 창문하나 없는 쇠로 만든 방이니 부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곳에 많은 사람들이 잠들어 있다. 머지않아 모두 숨 막혀 죽을 것인데, 혼수상태에서 죽어가는 것이니 죽음의 비애랄 것도 없다.

 

루쉰은 자신이 살고 있는 중국 사회를 이렇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큰 소리를 질러 몇 사람을 깨우는 것은 그 깨어난 소수에게 돌이 킬 수 없는 임종의 고통만을 주는 일이고, 그들에게 미안한 일이니 소리 지르는 일이 무용하고 공허한 일이라 말한다. 그때 후배는 말한다. 몇 사람이 일어난 이상 쇠로 만든 방을 부술 희망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죠.”, 루쉰은 그 말에 문득 깨닫는다. 희망, 그것은 말살해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래에 속하는 것이어서 [...]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라고.

 


몰락한 정신들을 깨워야 하고, 강건함과 저항, 파괴와 도전의 소리를 질러대는 악마가 되는 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그래서 그는 산문 눈을 뜨고 보는 것을 논함(論睜了眼看)에서 정시(正視)를 말한다. 무슨 일이나 눈을 똑바로 뜨고 보는 용기를 가지는 것, 감은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은 원만하고 [...] 문제도 결함도 불평도 없게 되고, 개혁도 반항도 없게 되는 것이니 문제와 결함을 보지 못하게 되고, 보이지 않게 된다고. 불온하고 불의한 세계의 개혁은 요원한 것이 되고 만다고.

 

오늘 우리의 세계에서 전개되는 형국이 이와 다르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자신들만의 폐쇄된 음습하고 어두운 공간에서 자기 이익에만 열중하던 한 탐욕스런 인간이 어느 날 한 낮의 눈부신 햇빛 아래 기어 나왔다. 그 자는 눈이 부셔 눈을 꼭 감은 채 잔존하는 옛 꿈만 계속 꿀 터이다. 눈 감은 그 자에게 어둠이나 빛은 보이지 않는 셈이고, 때문에 눈을 감고서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인다. 그렇게 기만과 사기가 이 세계를 가득 채운다. 어리석은 대중 또한 눈을 감고 있으니 자못 평화스럽다고 느낀다. 이렇게 세계는 시간을 퇴행하며 썩어 들어간다. 아마 어느 날 눈을 뜬 대중은 자신에게 공포 가득한 지옥이 열려 있음을 보게 되고 그 당혹스러움에 정신을 잃을지도 모른다. 루쉰은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정시(正視)하지 않고, 기만과 사기로 기묘한 도피로를 만들어서 그것을 올바른 길이라고 여긴다는 것. 여기에 국민성의 비겁함과 나태함, 교활함이 증명된다. 하루하루 타락하면서, 오히려 날마다 영광을 본다고 느낀다.”. - 論睜了眼看에서

 

아마 루쉰의 엄청난 산문들 중에서 그 상징적 의미에서 가장 웅변적이고 강경한 글은 단연코 물에 빠진 개는 때리지 않는다는 일견 관용적이고, ()을 막론한 도덕애(道德愛)의 지고로 여겨질 경구에 대한 치열한 반론인 페어플레이의 시행을 늦춰야 함을 논함('Fair-Play'應該綬行)이다.

 

여기서 물에 빠진 개는 호시탐탐 사람을 무는 개이고, 굽신거리며 사람을 기만하고, 수시로 악행을 저지르며, 악행이 드러나면 절름발이 흉내를 내며 동정을 애걸하고, 구제되면 다시금 전과 똑같이 사람을 무는 개다. 루쉰은 이러한 개들, 즉 악을 방임하면 그 개는 사람을 물어 댈 뿐 아니라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까지 던져 넣을 것(投石下井)이라고 말한다. 해서 물에 빠진 개는 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신에게 페어(fair) 하지 않은데 당신만 페어 하면 결국 폭행을 당하고 죽음에 내몰린다고. 페어 할 자격이 없는 것에 페어를 기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고 말이다. 민중이 일제 부역자들의 처단을 말 할 때, 이러한 것들에 공정한 도리를 말하면서 보복하지 말아야 하느니, 너그럽게 용서하라느니 떠들어 댄 결과가 오늘 한국사회의 역사적 퇴행을 보게 하고 있다. 이것들은 구제 받은 뒤 고마움이나 회개는커녕 나쁜 짓을 하려는 기회만을 호시탐탐 엿보다가 갑자기 튀어나와서는 사람들을 물어뜯고, 심지어 뱃속을 채우려 나라마저 팔아치울 태세다.

 

여기서 고사가 등장한다. 옹기를 만들어 그 안에 사람들 가두어 죽이는 방법을 고안한 주홍이라는 인간이 있었다. 그 자가 지독히 나쁜 짓을 하여 처벌을 받게되자 판관은 그 자를 옹기에 들어가게 하라!’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청군입옹(請君入瓮)’이라 한다. 악에 대한 방임을 마치 관용이라 고지식하게 관대한 체하다 오늘과 같은 역사를 부인하는 혼란 상태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것들에게는 관용의 도(恕道)가 아니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곧음의 도(直道)를 적용해야 하는 것이 옳다. 페어플레이는 폐단이 크다. 여전히 한국의 정치사회에서는 페어플레이, 물에 빠진 개는 때리지 않는다는 말은 이른 윤리적 잣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안타깝고 수치스럽지만 말이다.

 

당대 민중의 정신 개조를 위해, 쇠로 만든 방 같은 권력의 경계 속에 잠든 인간들을 흔들어 깨우는 목소리를, 들리든 말든, 위협이 다가오든 말든, 그침없이 반항의 목소리를 외치던 이방의 문인이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초월해 오늘 이 땅에 잠에 취한 몽롱한 인간들을 깨운다. 뜻있는 사람이 발양(發揚)하려면 먼저 자기를 성찰하라고 했다. 또한 반드시 남을 두루 알고서야 자각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자각의 소리가 나오면 그 소리는 반드시 사람들의 마음에 적중하고, 그 깨끗함과 맑음이 이 세계를 향한 빛이 될 수 있다고. 이 땅의 인간과 세계는 한 치도 변하지 못했는지 모른다.

 

사실 적절한 인용이 되지는 않겠지만 사람과 사람의 차이는 때로 유인원과 원인(原人)의 차이보다 더 크다는 인간과 인종 차별 등의 논리를 만들어낸 문제 많은 사회진화론자 에른스트 해겔(E. Haeckel)의 웅변마저 공감되는 시절이다. 구제된 물에 빠졌던 개들이 설치는 형국이니 관대하게 이해될 것으로 믿는다. 이 자기 성찰적 산문을 이제야 발견하고 읽게 된 것도 어쩌면 스피노자기 말하는 유일한 실체로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인 것만 같다. 안타까움과 분노로 가득 한, 그러면서 자기 성찰적 지혜로 꽉 채워진 글을 읽으며 켜켜이 쌓인 체증이 조금은 내려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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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의 문학사적 위치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헤아려야 한다.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소설가 체사레 파베세(1908~1950)’어른이 되어서는 두 가지 경험, 즉 성공과 실패밖에 없다는 말을 했다. 서글픈 말이다. 극단의 투쟁, 살기 아니면 죽어야 하는 것이 그가 숨 쉬던 파쇼 사회였기에 가능한 말이었을 것이다. 흰 고래를 죽이든지 배가 난파되든지 둘 중의 하나라는 이 양단의 잔혹하고 참담한 이야기의 교훈이 무엇이겠는가?  한 메이저 온라인 책 판매 사이트에 벌어지고 있는 흉물스런 얘기다.

 

폐쇄집단의 자기이익 실현에만 능숙한 한 천박한 인간이 모비딕을 읽었다는 것을(정말 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천박성을 넘어 수치도 모른 체 책 판매의 선전문구로 사용하고 있음에 아연실색했다. 해당 출판사와 인터넷 서점 두 집단의 권력을 향한 더러운 아부이자 정치적 야합(野合)일 것이다.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그리고는 그 실패를 덮기 위해, 다시 한 방을 돌려주기 위해 무슨 일이든 실행하는 폭력성, 무도함을 내놓고 지껄이는 이 후안무치함을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다. 겁에 질렸거나 이익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기회주의적 패거리들이 극성을 부린다.

 


에이허브는 마치 빈틈이 없으면 강제로라도 뚫어 만들어내서 그 구멍에 온갖 추잡한 것들을 들이 밀어야 한다는 강박적 악의에 경도된 인물이다. 이 인물에 매료된 인간 군상들을 상상해 보라. 왜소한 능력으로 장대한 상대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저 무엄함과 무법성을.

 

거대하고 불가해한 자연에 도전하는 인간 불굴의 의지라고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하며, 인간의 지성과 무한한 능력의 한 표본으로 제시되어 왔지만, 이것은 배에 탑승한 모든 이들의 생명을 담보로 한 가장 유해하고 극악하며 탐욕스런 욕구 이상이 아니다. 아직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위엄이 인류사회에 터 잡지 못했던 180년 전 야만의 시대(1851년 초판출간)에 출현한 옛날의 허구 이야기다. 타인의 희생을 토대로 하는 이러한 영웅주의적 기만은 오늘의 세계에서 더 이상 그 도덕적 지위를 정당화하지 못한다. 불의와 어리석음이 저지르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도구, 그 배경의 인식 수단으로 모비딕을 이용하는 저열한 욕심만이 선명하게 드러날 뿐이다.

 

나와 다른 상대를 죽여 없애거나 거꾸러 뜨려야 할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것,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해야 하고, 나만이 옳다고 믿는 것, 그것이 파시즘이다. 파시스트의 세계가 무엇인지 너절한 설명을 생략하겠지만. 그것은 수많은 사람의 참혹한 학살의 역사임을 알려준다. 그것의 끝은 광기와 전쟁, 공멸의 이야기로 구성된 것이다.

 

출판업자와 유통판매업자의 무지함이 빚어낸 실수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판매 전략은 의도라는 적극성의 산물이니까. 어느 누구도 시선을 피할 수 없게 배너 창까지 띄워대고, 더러운 욕망을 노골적으로 과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원시적이고 퇴행적 교활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한국 사회가 이렇게까지 부패하고 있다는 것의 한 상징적 이벤트 같다.

 

어느 누구나 모비딕을 읽을 수 있으며, 또한 읽어야 하는 고전적 지위를 확보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것이 한낱 파렴치한 인간의 정치적 선전 수단의 도구로 둔갑했다는 것, 그리고 이에 적극적으로 뇌동(雷同)하는 인간 집단이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모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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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1-09 0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필리아님!

필리아 2024-01-12 22:35   좋아요 1 | URL
네, 너무도 흉물스러워서요...

그레이스 2024-01-12 2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속이 시원하네요
 
꿰맨 눈의 마을 트리플 22
조예은 지음 / 자음과모음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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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집은 세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 단편은 연작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각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연속성을 지닌 동일 캐릭터이며, 배경 또한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난화로 인해 극지대의 빙하가 80퍼센트 너머 녹기 시작하면서 활성화된 신종 바이러스로 인류 신체의 변형이 발생한 근미래(近未來)이다. 이러한 감염자(변형 신체자)들이 증폭되자 변이를 겪지 않은 일군의 사람들은 인간이 찾지 않은 황야에 마을을 건설하여 자발적 고립을 선택한다. 이렇게 건설된 곳이 소설 속 인물들이 살아가는 타운이라 불리는 곳이다.

 

표제작 꿰맨 눈의 마을을 시작으로 히노의 파이그리고 의 순서로 수록되어 있는데, 하나의 원처럼 첫 단편과 마지막 단편이 시간상 맞닿아 있으며, 그 사이에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회상의 시간이 놓여 소설의 의미를 풍부하게 만들어 주는 듯하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미안합니다

교장 나침이 조례 때마다 하는 말이었다.”

 

타운을 변이를 겪지 않은 사람들로만 유지하기 위해 감염자, 즉 신체에 변형이 발견된 사람들은 타운 밖으로 버리듯 내쳐진다. 그래서 타운을 지키는 제 1규칙은 얼굴이 아닌 곳에 난 이목구비를 보면 신고하라!”. 교장의 말은 한 아이가 버려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꿰맨 눈의 마을은 이렇게 한 아이를 타운으로부터 퇴출시키는 사건을 중심으로 고립된 공간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관찰토록 한다.

 

자신의 등에 또 하나의 눈을 옷 속에 감추고 살아 온 소년 이교는 타운 밖 황야로 내쳐진 절친 에 대한 그리움과 그와 나누었던 타운 밖의 세계에 대한 상상의 이야기들, 그곳에 관한 소문들을 통해 타운의 규칙들이 공포라는 하나의 장치에 의존한 공간이라는 의심을 키운다. 폐쇄적 공간의 존립은 외부 정보의 유입 차단과 단일 정체성을 위한 수많은 장치들로 구성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틈의 발생은 불가피하며 장치들은 거짓으로 축조된 것임을 드러낸다. ‘이교는 자가용 비행기의 추락으로 타운에 떨어져 만나게 된 타운 밖의 변형된 존재인 으로부터 타운내 사람들이 구인류, ‘도망친 포비아들로 불린다는 것을, 최선이자 배려라 믿었던 타운의 규칙이 야만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단일성, 순수성이라는 역겨운 폭력성의 잠재태임을...

 

히노의 파이는 조카인 이교를 황야에 버리고 돌아온 문지기인 백우의 자기 행위에 대한 윤리적 성찰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감염자로부터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타운 밖 황야에 감염자를 유기하는 일, 그들에게 치사량의 독극물을 버무려 구워낸 미트파이와 콜라 한 병을 들린 채 버리고 돌아오는 일의 정당성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동정심이나 죄책감으로 감정을 소모하는 것은 멍청한 문지기라는 신념으로 할아버지까지 버린 문지기인 아버지의 대를 이은 문지기 백우는 외부자로서 독극물 파이를 구워내야만 했던 히노와의 사랑의 추억, 히노가 그에게 던졌던 황야에 남겨진 이들의 최후에 대한 상념으로 이어지며, 타운의 규칙들에 의혹을 품지 않았던 자신을 발견한다.

 


권력의 명령, 체제의 수호를 책임진다는 미명 하에 젊은이들을 고문하고 죽음으로 몰아가며 자신의 도덕성을 돌아보지 못했던 민주화투쟁 시절의 고문기술자를 떠 올리게 한다. 백우는 최선을 다하는 게 어떤 최악에 도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는 점에서, 사유할 줄 모르는 이 땅의 공권력 수행자들과 다르다. 타운의 장노들, 권력이 요구하는 짐짓 배려인 채 행하는 유기가 과연 추방되는 이들의 선택, 문지기인 자신의 선택이라 할 수 있는지 자신이 외면했던 질문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이다. 황야로 자발적으로 사라진 히노에 대한 그리움, 그녀가 미트파이 레시피와 함께 남겨놓은 우리는 언젠가 황야 너머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널 위한 쿠키를 구워둘게. 사랑해, 백우.”, 라는 메모는 그가 행한 일에 대한 정당화란 비루하기만 한 한낱 위로와 합리화에 불과했다는 각성에 이르게 한다.

 

단편 은 추방된 이교의 친구 램의 버려진 황야에서의 삶을 향한 도전의 걸음이다. 램은 굶주림에 독이 있다는 미트파이를 꼭꼭 씹어 삼킨다. 스스로 조용한 죽음에 이르기 위한 행위지만 그는 깨어난다. 미트파이에 독극물이 주입되지 않고 만들어진 것은 아마 히노의 은밀한 전환, 타운의 체제에 대한 저항, 동료 주민에 대한 연민의 행위였을 것이다. 램은 이교와 나누었던 황야에 대한 상상, 괴물이 득실거린다는 황야란 공포를 조장하기 위한 한낱 거짓이었음을 상기한다. 램은 추락하는 비행기를 환영처럼 발견하지만 그 실체의 확인을 위해 추락지점으로 반죽음의 육신을 옮긴다. 그리곤 추락한 비행기 무전기에서 울리는 교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타운은 소거법으로 유지되는 땅.  그렇다면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그 곳에는 몇이나 남게 될까?”   -155쪽에서

 

이렇게 꿰맨 눈의 마을에서 추락했던 비행기와, 추락한 비행기의 소년 람과 이교의 발걸음 은, 시체가 파이와 나뒹구는 황야를 조카 이교가 벗어나길, 그리고 그리운 이 히노를 향해 황야를 걷는 백우의 히노의 파이를 경과하여, 다시 무전기를 향해 살려주세요를 부르짖는으로, 회귀한다. 세 편의 소설은 굵직한 하나의 주제들을 품고 우리들에게 윤리적 질문을, 그리곤 자성(自省)을 촉구하는 듯하다. 세계 밖을 상상해 보세요, 그 상상의 지대에 진실이 숨 쉬고 있어요. 라고.

 

이 가상의 이야기들은 작가의 에세이 빛나는 모형들에서 들려주는 진실보다 더 진실로 여겨지는 삿포로 시장의 어느 음식점의 진열대 너머 모형이 일으키는 진짜에 대한 맛의 상상처럼, 더욱 풍성한 맛을 느끼게 해준다. 닫힌 세계, 고립을 요구하는 폐쇄된 세계를 벗어나 열린 외부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면, 우리는 무수한 다양성, 그 다름의 세계와 인간을 사랑할 수 있게 될 터이다. 타자를 향한 너그럽고 부드러운 시선, 조금은 더 진실의 세계에 다가갈 수 있으리라. 때론 가짜가 거짓을 말하는 진짜의 위선보다 더 진실하다는 것을. 나른한 평온함과 밝은 생명력이 절로 발산되는 조예은 작가의 이 소설을 읽으며 왠지 세상이 살만한 이유가 있다고 느꼈다면 과장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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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사악함을 못 본 체함으로써 혹은 그것을 부정함으로써 허무주의를 극복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와 반대로 유일한 희망은 허무주의를 명명하고, 질병의 치료약을 찾기 위해 그것을 목록화하는 데 있다. 요컨대 지금이 희망의 시간임을 인식하자. 비록 실현되기 어려운 희망일지라도."

Nous sommes dans le nihilisme. Peut-on sortir du nihilisme? C’est la question qu’on nous inflige. Mais nous n’en sortirons pas en faisant mine d’ignorer le mal de l’epoque ou en decidant de le nier. Le seul espoir est de le nommer au contraire et d’en faire l’inventaire pour trouver la guerison au bout de la maladie. Cette collection est justement un inventaire.

 -갈리마르에스푸아르 총서, 책임편집자 알베르 카뮈,

출처: <카뮈, 지상의 인간2> 47, 한길사

 

 

인용한 위 문장은 에스푸아르(Espoir) 총서 모든 책의 뒤 표지에 표기되었던 알베르 카뮈의 글이다. 프랑스 최고의 출판사인 갈리마르의 책임편집자였던 알베르 카뮈는 에스푸아르(희망)라는 소설과 비소설을 망라한 총서 발간의 책임자로서, 전후(戰後) 프랑스인들의 앞에 놓여있는 납득할 수 없는 불의한 세계의 성분을 직시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때문에 이 총서의 초기 목록들은 어둠이 지배하는 저작들이었으며, 표지조차 회색빛을 띤 소프트 커버였다고 한다.

 


설혹 달성이 미완에 그칠지라도 무엇인가를 희망하기 위해서는 직면한 문제들을 회피하거나 부정하지말고 정면으로 바라보아야 함을, 그 문제가 품고 있는 혐오스러움, 더구나 그것이 마주 선 자신의 것일지라도 전부 열거해서 제대로 성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믿음의 천명이다. 전후 독일 부역자들의 처리문제로 프랑스 사회는 용서와 처벌로 양분되어 곤혹을 치렀다. 그럼에도 드골 임시정부는 엄중하고 주저 없이 민족 반역자들을 극형으로 단죄했다. 프랑스 문단에는 친독은 아닐지라도 기회주의적 방관자들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인 양 슬그머니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을 얹어 놓고 있었다. 카뮈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마주해야 하는 현실이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카뮈는 시몬 베이유의 유작 <뿌리 내리기>의 한 문장을 인용한다. "공식적인 역사는 살인자들의 말에 대한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 천박한 영혼이 아니고서 어느 누가 알렉산더를 성심껏 찬미할 수 있겠는가?" , 알렉산더의 동방침략 전쟁과 2차 세계대전은 물론 인간의 역사는 이렇듯 무법자들의 언어로 써진 기록이다. 카뮈에게 인간은 이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의무를 가져야 한다고 여겼던 듯하다. 인간들 자신의 어둠의 지대를 죽 나열해서 그것들에 웅크리고 있는 어둠의 욕망들을 들춰내는 것이 당대 문학예술의 의무라 생각했다고 이해된다.


한국 사회는 이러한 지성의 노력을 갖지 못했을 뿐아니라, 민족을 배신한 파렴치한들을 단죄하지 못한 역사를 가지고 지금에 이르렀다. 지금 우리에겐 이같은 목록화된 문제들의 기록이 없다. 때문에 치료약도 없으며, 희망의 목록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70여 년 전의 과거에 발목이 잡혀있다. 지금이라도 이러한 노력을 하여야만 할 것이다. 역사에 늦은 것이란 없다. 이 목록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 미래를 꿈꾼다는 것은 부질없는 모래성 쌓기가 될 것이다. 현실이 그러함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오늘 한국의 시인들, 문인들은 희망이란 단어를 삭제하고 이 단어에 혐오와 의혹의 눈초리를 보낸다. 그것이 모두가 될 수는 없다. 목록을 만들어라! 사악하고 부정했던 것들의 목록을. 이 노력을 회피하면서 희망은 무지하고 분별없는 인간들이나 하는 망상이라 말하는 것은 무책임과 의무의 방기일 뿐이다. 상처를 보려 하지 않는다고 그 상처가 없었던 것이 되지 않는다. 카뮈의 희곡 작품인 <오해>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실존 전체를 다루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 기반 자체를 갱신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면 미래에 대해 희망을 걸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전시(戰時)에 의지와 관계없이 고향 알제로 돌아갈 길이 차단된 채 이방인으로 프랑스 본토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한 인간의 고뇌어린 성찰이다.

 

"정신이 마침내 칼은 칼로써 정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무기를 들고 승리를 쟁취했을진대, 어느 누가 정신으로 하여금 잊을 것을 요구하겠는가? " 이 발언의 의미는 증오가 아니라 기억에 기초한 정의 그 자체의 실현이다. 정의를 잃어버린 민족에겐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책을 읽다 하나의 단상을 더해 놓는다.

 


"이상도 고결함도 갖추지 못한 자들이 정치와 인간의 운명을 빚고 있다.

정치판에서 고결함을 갖춘 이들은 찾아볼 수 없다."

-출처: 알베르 카뮈, 작가 수첩 1,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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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독서를 정리하지 못했다. 이제 마음에 어떤 작은 흔들림을 주었던 책이 무엇이었나를 생각해 본다. 국내 문학(소설과 시, 에세이)은 여러 이유에서 소홀히 했다. 부분적으로 새로운 작가들의 몇몇 작품을 읽긴 했으나, 어떤 의무감에 가까운, 작은 기여의 차원이라는 소박한 심정의 독서였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렇다고 무수히 발간되는 모든 책을 망라할 사진 기억술을 지닌 것도 아닐 뿐 아니라, 취향 또한 편협해서 비평과 철학을 비롯한 역사분야와 해외 문학의 범주를 벗어나지도 못했다. 특히 올 한해는 알베르 카뮈의 글 읽기에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내게 새로운 이해를 안긴 역사 및 문화 비평과 세계를 진술하는 방식의 다양성에 관한 저작들이 비교적 인상 깊게 남아있는 정도이다.

 

문학 분야부터 정리한다면, 단 하나의 작품만이 마음에 남아있다. 인간 실존의 본질적 문제를 들여다보게 해준 헝가리 작가, ‘서보 머그더도어이다. 역사를 말하지 않으면서 역사적 실존을 탐색하게 하고, 그 가운데 인간 존재의 변화를 인식할 수 있게 한 작가의 발견이었다고 해야겠다.

 

그리고 국내 문학분야는 이미 등단시점부터 읽어 온 김사과 작가에 대한 짝사랑이 지속될 뿐이다. 그리고 안윤 작가와 올 한해 새롭게 알게 된 한정현 작가와 성해나 작가의 작품 정도가 여전히 기억에 살아있다. 두 날카로운 시선의 작가와 유머 넘치는 즐거움 속에서 진지한 사유가 피어오르도록 쓰는 두 작가는 아무래도 내가 좋아하는 취향인 까닭일 것이다.

 

그리고 분야의 분류가 까다롭기는 하지만 문예비평에 가까운, 그럼에도 문화사에 가까운 한스 블루멘베르크난파선과 구경꾼은 인류가 지혜를 전달해 온 오래된 방법으로서 은유를 재발견을 하도록 해주었다. 진열된 앎이 아니라 표면과 달리 짐짓 진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비-개념의 이 특별한 언어 도구와 이를 수단으로 한 인간 역사의 통찰은 세계를 인식하는 시선을 확장해주었다고 하겠다.

 

이와 아울러 로버트 단턴의 사회문화 현상의 저변에 자리잡은 개인들에 잠재하고 있는 집단적 의식과 무의식, 즉 광범위하게 시대의 삶을 지배하는 정신을 탐색하는 망탈리테의 역사인 미시사를 알게 해준 고양이 대학살은 정말 아름답기까지 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과학분야라면 단연 움베르또 마뚜라나프란시스코 바렐라로 대표되는 인간 유기체의 의식과 정신 작용에 대한 생물학적 접근을 통한 자기 고유의 구조적 역동성과 자기생성과 적응에 대한 것이다. 이젠 고전적 과학 저술이 된 앎의 의지자기 생성과 인지두 저술은 아마도 다윈의 책보다 내게 더 많은 영향을 지속적으로 미칠 것 같다. 이렇게 정리해보면 이렇다 할 독서라고 내세울 것도 없어 보인다.

 

아마 2024년의 독서도 이 범주를 벗어나는 일은 내겐 극히 예외적 사태일 것만 같다. 카뮈와 카프카를 비롯한 고전이 된 작품들의 몇몇 작가는 여전히 내 머리 속을 맴돌고 있으며, 마뚜라나와 바렐라, 그리고 블루멘베르크도 거듭 읽는 저술이 될 것 같다. 보르헤스가 이미 말했듯 이 세상에 새로운 이야기는 더 이상은 없을 것이다. 다만 내 앎이 부족 할 뿐이지 그 무엇이 새로울까? 2024년은 읽었던 책들의 내용이 보다 깊숙이 내게 체화되는 독서를 이어갈 계획이다. 아마 거듭 읽기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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