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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8 제너시스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7
버나드 베켓 지음, 김현우 옮김 / 내인생의책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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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창세기? 창세기 앞에‘새로운’이라는 수사를 하는 것이 모순이긴 하지만 이 작품은 2050년 이후의 새로운 인류에 대한 기획이기에 분명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단지 4시간의‘학술원 회원 구술시험’이라는 단순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음에도 숙연해 질 정도의 무게감 있는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에 대한 철학적 사유의 세계가 있는가하면 흥미진진한 SF적 소재로 재미를 견인하고, 신(新)인류에 대한 구상의 당위를 숙고하게 할 정도로 균형을 갖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2050년부터 충돌하기 시작하여 2051년 마지막 전쟁을 벌이던 세계를 피해 해양방벽을 쌓고 세계로부터 문을 잠그는데 성공한 새로운 섬, 플라톤의‘공화국’이 건국된다. 이 이상적인 국가의 건설은‘토머스 모어’식 <유토피아>인지, ‘H.G웰스’식 <디스토피아>인지는 개인이냐 집단이냐라는 관점에 따라 달리 이해될 수 있지만, 화자(話者)인 ‘아낙시맨더’는 “개인적인 잠재력을 발휘하는데 가장 적합한 국가를 만드는데 성공했는가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한다고 하는 것으로 보면 디스토피아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만 같다.
부모와 떨어져 양육되고 생후 1년 뒤 검사 결과에 따라 계급 배치를 하거나 제거하는 획일적이고 냉혹한 제도나, 공포 분위기에서 공화국의 틀을 유지한다는 식의 표현은 디스토피아로서의 공화국을 확신케 한다.

이 소설의 시발은 철학자>기술자>군인>노동자로 이루어진 공화국의 4계급제도라 할 수 있는데, 사회의 안정을 위해 반란세력화 할 수 있는 하위계급인 군인, 노동자를 대체할 수 있는‘충분히 진보한 로봇’의 개발을 통한‘평등사회’를 구현한다는 배경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소설 전편을 대표하고, 내재하는 암시와 복선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화자의 구술시험 시점에서의 공화국을 구성하는 존재들은 과연 누구인가? 를 이미 말하고 있음에서이다.
한편 주인공으로서의 화자인 아낙시맨더와 화자의 이야기 속 주인공인‘아담’이라는 중층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아낙시맨더의 구술시험 주제인 공화국의 역사에 있어 전환점이 된‘아담의 삶’을 고찰하는 가운데 인간과 인간성의 본질에 대한 궁극의 사유를 객관적 시선으로 그려내기 위한 수단으로 보인다. 그래서 아낙시맨더의 구술답변이라는 형식으로 소개되는 아담의 신화적인 내용은 아낙시맨더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또한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아담, 이브, 플라톤, 헬레네, 아리스토텔레스, 페리클레스, 아낙시맨더(아낙시만드로스)와 같이 그리스 철학자와 창세기 인물들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사상적 원천이나 기원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하려는 작가의 의지를 엿보게 한다.
아담은 공화국의 실질적인 최초의 존재로서 이해된다. 초기 공포의 정치로부터 안정화된 공화국이 점차 “선택에 대해, 기회와 자유에 대한 말”들이 성행하기 시작되던 시대에, 외부세계를 차단하는 해안 방호벽을 지키던 아담이 국법을 어기고 해안가에 표류하는 이브를 구원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는 국가적 사건으로 재판이 이어지고, 아담의 행위에 연민과 동조를 하는 국민의 반란이란 압력과 타협하여 아담은 사회성 계발모델에 입각한 혼돈의 창발(創發)이라는 프로젝트하에 ‘아트’라는 안드로이드의 완전성을 위한 인간 실험자로 생활하게 된다.

여기서 충분히 진화된 안드로이드, 즉 로봇인 ‘아트’와 인간인‘아담’의 인간이란 무엇인지, 인간의 정신이란 무엇인지, 인간과 기계의 차이를 경계 짓는 요인이란 무엇인지, 의식과 관념의 본질은 무엇인지에 대한 원초적 설전(舌戰)을 통해 인간성, 그리고 생명의 본질을 사유케 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삶에 생명을 불어넣는 거야. 나는 사유에 대해 생각하는 사상가지, 내가 호기심이고 이성이고 사랑이고 증오인 거야...(中略)...세상은 내 안에 머무르는 거야. ~ 내가 바로 의미야.”하고, 아담이 분노하여 인간의 차별성을 주장하는 문장들은 그 어떤 철학적 강론보다 멋지다.
그러나 안드로이드인 ‘아트’의 관념과 사유에 대한 강변 또한 인간의 실체성에 대한 의문을 충분히 제기한다. “왜 진화가 육체적인 것만 적용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진화는 매개체를 가리지 않습니다...(中略)...다른 기생충과 마찬가지로, 관념은 적합한 숙주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中略)...저를 만든 건 인간이 아닙니다. 관념이 저를 만들었죠....(中略)...사유는 어느 쪽을 더 선호 할까요?”

이 작품의 위대성은 실험공간에 갇혀있던 인간과 안드로이드가 탈출하는 장면에 있다. 과연 기계가 탈출 의지가 있을까? 즉 기계가 관념을 지닐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창발이론이 진정 실현되는 것인지의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자신을 통제하려는 모든 것에 저항하게 마련”이라는 관념의 존재는 아트의 탈출로 이어지고, 이것은 곧 기계의 인간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특히 죽어가는 아담과 아트의 마주한 시선에서 관념의 승화가 이루어지고 그 관념은 자신의 숙주가 된 프로그램을 다시 짜기 시작한다. 아담과 이야기를 하며 보내는 동안 관념의 전이가 진행되고 아트는 아담이 된다. 아담은 아트가 자신의 프로그램을 전송하여 복제를 시작했을 때 이를 방조한다. 여기서 아낙시맨더의 구술시험 시험관은 그걸‘원죄’라고 부른다고 한다. 찬탄을 연거푸 하게 하는 장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랑우탄의 모습을 한 아트들, 기회와 두려움 사이의 균형을 찾고, 관념에 정면으로 맞서 그것과의 타협을 통해 지속적인 평화를 만들어가는 새로운 인류, 그것의 힘은 ‘본성’이라 한다. 점점 근본주의화 되어가고 그래서 서로 불신이 깊어지며, 정신은 쇠퇴하고 두려움과 비관주의가 공공담론을 지배하는 오늘의 세계에서 우리 인간의 모습은 진정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생각게 하는 정말의 대단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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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 - 판도라의 역사와 생태에 관한 기밀 보고
마리아 윌헴.더크 매디슨 지음, 김현중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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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한국 영화시장을 달군 명장‘제임스 카메론’감독의 <아바타>에 대한 관람객들의 소감은 그야말로 대단한 외침들이었다. 경이롭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색체험이고 상상력을 초월한다!.... 장장 14년간의 구상과 제작기간만 4년이 소요된 한결같이 걸작이라는 이 영화를 지지하는 저변의 사상과 스토리, 그리고 영화적 탁월함이 어떤 것인지 진정 호기심을 외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인류의 게걸스런 탐욕과 이기심, 이로 인한 지구 생태계의 파손과 자원 고갈이 몰고 온 22세기의 지구와 인간, 황폐화된 지구에서 두려움과 공포, 질병과 죽음의 초조함에 휩싸여 있을 인간 앞에‘판도라’라는 의미심장한 탄소 순화체계를 가진 생명체가 존재하는 행성을 발견케 한다는 것은 과연 인간의 자기 정화로서의 의미를 신뢰했기 때문일까.


카메론이 그려내는 인류 구원의 신세계는 태초의 지구가 그러했을 것만 같은 경이로운 원시 자연과 수렵과 채집의 자유를 만끽하는 지적 생명체로 나타난다.

지구보다 작은 중력과 높은 밀도의 공기, 떠다니는 동산, 자체 발광(發光)하는 생물들, 덩쿨손처럼 뻗어나온 신경계 큐(queue)를 통한 생명체들 간의 교감과 영혼의 주체자로서의 판도라 등 정교한 과학 이론과 무한한 상상력이 결합하여 이룩한 인간이 도저히 만들어 낼 수 없는 이상(理想)의 공간을 보는 순간 관객들은 입을 정말 딱 벌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가 전달하려한 그‘진중한 메시지’라고 표현하는 것들을 구성하는 식물, 동물, 장비, 판도라의 지질과 대기, 첨단 무기와 운송수단, 나비족의 문화에 대한 과학적 주석과 영화의 서사와 연결된 배경의 설명 모두가 수록되어 있는 이 저술은 그래서 더욱 매혹적인 정보이자‘자료’로서 빛을 발한다. 설혹 영화를 보지 못한 이들에게까지도 한 편의 영화가 담아내는 경외의 담론들과 찬연한 색깔들, 소재 하나하나에 까지 미친 치밀한 구성에 찬탄을 금치 못하게 할 것만 같다.

인간 조종자의 유전 물질을 아바타 배아 안에 삽입하여 나비족과 동일한 육체와 정신의 복제된 나비족 인간을 만들어내는 인간은 여전히 탐욕스럽기만 하다. 최첨단 기술 없이도 자연에 순응하며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나비족과 완전한 생태균형을 이루고 있는 거대한 우림으로 뒤덮여 있는 판도라는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요, 모체와 같은 공간으로서의 의미로 다가온다. 여기에‘물질-반물질’ 에너지 생성에 필수 물질이라는 언옵타늄(unobtainium)의 채굴을 비롯해, 호기심의 충족을 위해서, 그리고 상품화를 위해서 다시금 판도라의 원사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의 모습은, ‘균형’이라는 단어로 대표되는 나비족과 대비되어 파멸과 생존의 극명한 대비를 만들어 낸다.

판도라 대기의 구성성분이 지니는 생태학적 이해, 자기장과 이온화된 방사능, 식물의 굴성, 식물과 동물의 특성을 동시에 가진 생명체, 자식인 머리와 부모인 몸이 결합한 공생하는 동물, 식물과 새가 함께 진화하는 공진화,  질량이 없고 운동량만 포함한 양자, 중력에 대해서 갖는 지향성이 없는 식물 등등 생명체에 대한 메커니즘,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학적 지식에 대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전복시키는 그야말로 가공할만한 상상의 과학적 지식이 즐비하게 소개되고 있다. 어느새 즐거워하고 반짝이는 눈과, 유쾌하고 정교한 미래과학 지식의 향연에 푹 빠진 자신을 자각하게 된다.

이러한 영화의 소재와 배경에 대한 세세한 물질들의 내용에 버금가는 판도라와 나비족의 정신세계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인류의 고대 신화와 종교와 연결되어 점점 상실되어가는 인간의 정신과 영혼의 부재를 일깨운다. “생존과 번영 그리고 전통의 강력한 상징”인 의식용 활, 가장 신성한 곳으로서의 ‘어머니 베틀’과 같은 나비족의 성소(聖所)에 내재한 신성한 존재, 에이와와의 영적 교감, 판도라와 나비족을 포함한 자연생태계 모두의 긴밀한 영적 유대는 인간의 그러해야 함이라는 당위를 제시하는 듯만 하다.

호기심 충족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위험으로 내몰고, 인간 자신과 자연에 위협을 가하여 자멸의 길을 내딛는 인간을 지칭하는 나비족의 단어, “얼간이, 눈이 먼 사람”만큼 바른 표현도 없을 것 만 같다. ‘절대로 열어 보지마라!’라는 판도라의 상자는 결코 열려서는 안 되었던 것일 게다. 머나먼 행성, 원시의 낙원인 행성‘판도라’는 인간에게 열려서는 안 되었을 곳인지도. 그러나 이 책은 그 열려서는 안 될 판도라의 모든 것이 그 속살을 모두 드러내어 독자를 반기고 있으니, 호기심이란 아이러니는 참으로 막아내기가 불가능한 인간의 본성인 모양이다.
“한 쪽을 구원하기 위해 한 쪽을 파괴해야 한다는 모순”이라는 이 엄청난 딜레마, 인간의 DNA가 교배된 나비족 복제인간은 어쩜 카메론이 고민하고 꿈꾸는 인간의 과제이자 신인류의 모습인지도. 참으로 많은 영감을 주는 특이한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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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4 01: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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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4 18: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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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24 08: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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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세계화
쟝-피에르 바르니에 지음, 주형일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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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즉 파편화 되어있던 지역이 단일한 관계망이라는 체제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16세기의 교역을 시작으로 19세기 산업화로 인한 운송수단의 극적인 발전을 배경으로 이해한‘월러스틴’의‘세계 체제’를 기본 개념으로 하고, ‘문화’는 “일정 사회 집단에 소속되어있다는 인식과 그의 동화를 위한 행동, 언어, 문화의 집합”으로서의 정체성과, 어린 시절부터 지워지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의 몸과 정신에 스며든 것으로서의 전통, 그리고 우리가 선택 할 수 있는 행동과 표상의 지침을 제공하는 방향 지시기능으로서 이해를 가진다.

그래서 지리적으로 지역화 되어있던 민족과 국가들 개별의 특수한 문화가 서구의 민족국가화로 인한 역사성에 기초하여 식민지의 건설과 제국화를 통한 계몽주의 보편성이라는 척도로 문화의 변질과 말살, 즉 전통적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의 제거라는 의도적인 문화파괴와 같은 근대세계체제로의 형성과정이라는 배경에서 힘의 상대적 약소국가나 민족이 우려하는 문화의 세계화가 내포하는 혐오감과 두려움의 진정한 실체를 논의한다.

운송수단과 정보통신기술의 비약적인 발달, 시장자유주의라는 현상은 물건과 행동양식의 교류를 세계화하는 것에 거의 어떠한 장벽도 없을 정도가 되게 하였으며, 이는 곧 막강한 자본의 힘에 의해 일방적인 전통문화의 침식이라는 우려를 낳는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문화’는 문화 그자체가 아니라 ‘문화산업’, 다시 말해 문화를 생산하고 상품화하고 전파하는 산업 활동으로서 문화는 아니라는 것이며, 실제 파편화되어있고, 민족화 되어있으며, 전통적이고 특수한 지역 고유의 문화는 변질되거나 파괴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세계화, 특히 미국화에 대한 위험은 그렇다면 상상속의 두려움에 불과한 것인가? “청바지를 입고 코카콜라를 마시지만 우리들의 삶은 다른 곳에 있다.”라고, 수많은 본질적인 문화를 간과할 수밖에 없는 돈 되는 스타에 의존하는 쇼 비즈니스가 지니는 미디어의 한계를 빗대어 문화상품을 만드는 것과 정체성을 주고 방향을 제시해줄 문화의 건설과는 다른 문제라는 인식을 보인다. 즉 미디어나 문화산업은 이윤추구와 시장의 확대라는 탐욕스런 자본의 논리일 뿐이지, 실제 문화자체를 이야기하지 못하며, 인류 공동의 나침반과 기준의 제공과 같은 진정하고 보편적인 문화 세우기와는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문화는 문화의 상품화를 통해 세계화의 파도 속에 불평등과 정치기구의 낙오와 같은 강자 중심의 일방적인 폭주의 징후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UNESCO의 문화유산에 대한 세계정책의 리더로서의 역할이 이러한 문화의 물질화로의 촉진으로 WTO(세계무역기구)에 빼앗길 정도이니 자국의 특수문화의 침식에 대한 방어와 긴장은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영화산업에 대한‘문화적 예외’의 선언이나, 문화의 국제기구(제2의 WTO)를 통한 힘의 균형에 대한 제안은 나름 의미있는 제안으로 이해된다.

한편 저자는 문화란 헌팅턴식의 문명권과 같은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적이고 정치적인 것이며, 이것이 문화 변화의 동인(動因)으로 권력관계, 즉 집단과 사회적 범주의 이해관계에 따라 문화적 식별을 동원하고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쟝보드리야르, 쟈크아탈리의 거시적 문화담론과 근대대량생산체제가 지닌 진정한 문화의 상실을 비판했던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등 프랑크프루트 학파를 비관주의라 비난하면서 미시적, 지역적 관점만이 문화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으며, 주체의 창조, 상상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의 세계에서는 고유한 지역 특수성과 전통은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멸종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기계’로서 항상 상황에 맞게 재가공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존재라고 강변한다. 즉 시장과 자본, 산업의 논리로는 식별 및 방향지시기능을 지닌 문화를 결코 전복 시킬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과장되고 편향된 문화침식에 대한 논리의 실체를 이해할 것을 강조한다. 
 

경제주의적 관점을 폐기하고 진정한 문화의 세계화를 생각하는 방식을 이야기하는 이 저술은 이러한 문화의 지역적 특수성과 고유성의 항구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에 못지않은 다양한 문화적 담론과 흥미로운 세계화의 논의들을 적시하고 있다. 문화산업의 기원이나 문화의 세계적 정치경제학, 문화정책과 특수문화의 침식에 대한 담론은 문화를 구상하고 문화의 주체와 보편성에 대한 귀중한 배경지식을 제공하여준다. 또한 담론, 소리, 영상, 예술, 그리고 사회구성원인 인간에 의해 획득된 모든 다른 능력과 습관을 발신하고 상품화하는 문화산업 활동에 대한 진중한 미래 방향에 대한 지침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과연 문화의 세계화는 가능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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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비밀
톰 녹스 지음, 서대경 옮김 / 레드박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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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기원과 종교에 대한 고고학적 소재를 지닌 이 작품은 인간의 호기심에 있어서 단연 으뜸인 자신을 알고자하는 본능 탓인지 책장을 여는 순간 손에서 놓을 수 없게 된다. 특히 인류 최고(最古)의 사원(temple)으로 추정되는 터키의 동남부 시리아 접경지역인 샤늘르우르파 인근 '괴베클리 테페(Gobekli tepe)'의 거석(巨石)발굴이란 고고학적 사실에 기초한 팩션(Faction)이라는 측면에서 잠자던 인문학적 지식욕까지 발동하게 한다.

중세에서부터 18~19세기의 비밀종교단체, ‘윌리엄 워즈워스’와 ‘제임스 조이스’등 영국의 문호들이 인용되고, 인류학, 고고학, 진화심리학의 논리적 접근이 이루어지며, 『성경』속 이야기와 외경(外經)인 「에녹서」의 구절들, 「창세기」에 숨겨진 비밀들까지 작품 속 고고학적 진실에 이르는데 동원되는 지식들은 아마도‘지적 탐험의 극치’라 하여야 할 정도이다.
게다가 런던경시청의 형사, 더 타임지의 해외특파원, 미모의 고고학자 등 등장인물들의 매력적 구성은 물론 잔악한 인신공희(人身供犧)를 모방한 연쇄살인, 종교와 인종적 갈등이 첨예한 분쟁지역인 쿠르디스탄 지역에서의 불안과 위협까지 가세하여‘미스터리 팩션’의 진수를 느끼게 해준다.

작품은 영국 런던에서의 살인미수 사건과 터키의 거석발굴지인 괴베클리테페가 이원화 되어 궁극에는 계속되는 영국에서의 연쇄살인사건의 동기와 1만 년 전 인신공희가 시작된 곳, 괴베클리테페가 지닌 의미와 결합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살인범이 행하는 희생제의(祭儀)로서의 성격을 갖는 인신공희의 수법은 잔혹함을 넘어서는 사악함과 참담함을 보여준다. 바이킹족, 아즈텍족 등의 잔인한 살해방법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그 사실감을 높이고, 살인범의 가계(家系)를 따라 18.9세기 영국의 귀족과 지식인으로 구성되었던‘헬파이어 클럽’의 실체를 고증하여 그 역사적 진실성으로 다가가게 하여 작품의 신비성을 극단적으로 제고시킨다.

인신공희를 즐기는 사악한 연쇄 살인범, 웨일리가문의 악마,‘제이미 클론커리’를 좇아 기독
교 정통 교리를 비웃고 반대하던 역사적 근거와 배경에 얽힌 이야기는 그대로 하나의 이야기 축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고, 인류 기원의 비밀을 지니고 있는 쿠르디스탄 지역의 이교도집단인‘예지드파’를 중심으로 괴베클리테페의 발굴지에 숨겨진 비밀, 바로 그 비밀을 둘러싼 각축은 살인범과 더 타임지의 특파원인‘로버트 로브 러트렐’기자와의 대결에 이른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그 긴장과 궁금증은 거의 폭발 지경에 이르게 한다.


이러한 정교한 스릴과 미스터리한 구조의 궁극이 도달하는 곳은 소설의 표제처럼 최초의 인류 기원에 대한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다. 결국 최초의 인간, 그러니까 인류의 첫 조상 인류들의 상호교배에 대한 설화적 기억을 풀어낸다. 작품 곳곳에 쌓인 수수께끼들의 파편을 하나의 유기적인 서사로 엮어나가는 최고의 지적흥분을 불러오는 재미, 인류의 수렵채집문화에서 농경문화로의 급작스런 전환의 사유, 인간 타락의 정체에 대한 근원, ‘아브라함’그리고 ‘하란’, 일신론 종교 모두가 바로 괴베클리테페의 끔찍했던 사건으로 모이는 것으로부터 일종의 스트레스 신드롬으로서의 종교출현까지, 어쩌면 인간 본성에 깃든 병적인 폭력성에 대한 탁월한 지적 기획이라고 하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가학적 성향을 가장 폭력적 방식으로 계승한 오늘의 인류, 그래서 썩은 내가 진동하는 모든 망상, 인간 영혼이 지린 지독한 똥오줌 냄새. 그게 바로 종교이고 성배라고 주장하는 악마, ‘클론커리’의 인간 내면에 대한 폭로가 이야기의 본질이고 작가 정말의 의도인지도. 고고학을 비롯한 다채로운 지적도구들, 액션 어드벤처, 미스터리 그리고 서스펜스, 아무튼 이 종합선물세트 같은 소설을 무어라 명명해야 할지...진정 호감을 가지고 읽어 볼 저술이라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인류의 기원과 종교의 발원이 모두 까발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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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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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하고 비현실적일 것만 같은, 배고픔과 향수(鄕愁), 연민과 혐오의 일상을 들려주는‘레오폴트 아우베르크’의 회상은 견고하게 세운 내 어쭙잖은 이성과 인간에 대한 신념을 완전히 무너져 내리게 하는 당혹스러움이 있다. 아니 항시 죽음이 드리워진 러시아 강제수용소의 삶이 아닌 삶의 사연들보다 감히 인간의 생각을 이렇게까지 묘사해 내는 작가의 언어와 문장에 더욱 경악하였다고 하는 것이 진솔한 얘기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굶주림의 실체, 고향과 가족에 돌아가야 한다는 귀향과 그리움의 본질, 그리고 그 실체와 본질마저도 갉아 먹혀 마음이 소실된 사물화 되다시피 한 사람의 처절한 내면을 보게 된다. 인종주의, 민족주의가 야기한 인간의 또 다른 폭력의 역사, 그러나 역사에는 기재되지 않은 역사 밖에서 자행되는 다수자의 야만성과 무관심, 기회주의적인 소수자 속의 다수자에 대한 비굴한 본성의 적나라한 드러냄의 다른 표현방식이다.

루마니아의 소수민족인 독일계 17살 소년,‘레오’는 가족의 대표로서 “너는 돌아올 거야”라는 대수롭지 않은 할머니의 말을 가지고 러시아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간다. 이후 생존해서 귀향할 때 까지 5년에 걸친 배고픔과 향수와 죽음이 넘실대는 혹독한 수용소의 일상이 철저할 정도의 감정이 배제된 담담한 사실적 묘사로 그 구체성과 내면의 작은 흐름까지 포착하여 두려움과 공포의 실체를 보다 선명하고 확연하게 들려준다.
몸이 일을 버텨내도록 하기위해 오직 삽질을 위해 삽질을 하는 처절하고 강도 높은 노동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단 한번 배급되는 800그램의 빵 한 조각, 그리고 양배추 건더기조차 없는 멀건 수프에 의존해야 하는 생존의 고통은 “모든 대상이 내 배고픔의 외연이 되었다.”고하는 정도에 이른다.

자신의 안에 사는‘배고픈 천사’에 조종당하고 농락당하는 나, 바람조차 허기를 먹여 키워, 추상이 아닌 눈에 보이는 음식들을 싣고 오는 순간, 항상, 늘 거기에 있으므로 제가 원할 때 원하는 방식으로 오는 배고픔에 휘둘리는 순간 배고픈 천사는 “숨결을 그네 뛰게 하고, 숨그네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심한 착란 상태”를 만든다. 배고픔을 잊기 위해 삽질을 하고, “삽질이 조금도 두렵지 않”으며, 두려운 건 오히려 나 자신이 되고, 삽질을 하는 도중에 딴 생각을 하는 것이 위험한 일이 된다.

격리된 시간과 공간, 그곳이 괴롭히는 것은 이렇듯 죽음이 엄습하는 배고픔 외에도 “원치 않아도 절로 떠오르는 생각”, 시간이 흐를수록 내용이 없어지고 구체적인 고향과 전혀 상관이 없는‘향수(鄕愁)’, 연기를 내며 타다가 결국은 사람을 병들게 하고, 끝내 생존의 의지를 무너뜨리는 또 하나의 두려움이다. 그러나 얄궂게도 2 년 만에 고향으로부터 날아든 어머니의 편지는 하얀 박음질을 한 엽서에 동생의 출생을 알리는 단 한 줄의 내용뿐이다. 문득‘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 떠오른다. ‘연민의 한계, 그리고 양심의 명령까지 훨씬 더 진실하게 생각해’보라는 그녀의 말을 우린 잊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하는 생각에 미처 우리들 스스로 자신들의 역사를 지우는 주체가 되어버리는 것 아닌가에 이른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억누르고 싶지만 두려움에서 벗어 날 수 없으므로 대신 현혹이라는 스위치를 누르고”있는 아들에게 보낸 어머니의 편지는“내가 그 한 줄에서 무엇을 읽었는지 안다면. 너는 거기서 죽어도 돼.”하는 레오의 인식에 이르러 뭉클한 안타까움이 가슴을 쓰라리게 한다.
“범인류적인 문화행사라도 되는 듯 위생적인” 빵의 배급의식을 치루는 수용소의 특권자일 수 있는‘펜야’앞에서, 그녀의 공정성을 북둗우기 위해 웃어 보이느라 입을 벌리고 이를 드러내는 레오의 모습은 배고픔과의 처절한 투쟁의 모습으로 강한 인상으로 남는다. 소설의 표현들, 어휘와 문장들이 주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이 강렬하고 시니컬하기도 하며, 담백한 느낌은 심장 깊숙이 파고드는 정말 새로운 감동이라 하여 할 것 같다. 소외된 역사와 불완전한 인간본성에 대한 새로운 돌발점을 지독하리만큼 세밀하게 폭로하는 이 소설의 뚜렷한 주제의식과 서사구조의 압도적인 탁월함을 감히 무어라 하여야 할지 나의 서술 능력의 한계를 느끼게 한다.

배고픈 천사와 싸우고, 중노동과 텅 빈 그리움을 부여잡고, 죽음을 격려하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던 세상과 격리된 수용소를 떠나 고향으로 향하는 레오가“자유로운 세상으로 떠밀리듯 보내진다는 공포”로 울부짖는 것을 우린 이해하지 못한다.
그가 돌아왔을 때 반가움보다 놀라움, 달갑지 않은 안도감을 보이는 가족에게서 우리들의 또 다른 이기심, 자기기만에 대한 연민이라는 우울한 자화상들을 보는 것만 같은 초라함을 확인하게 된다.

“세월에 약탈당하고, 한때 배고픔에 약탈당해 속은 황폐해지고 얼굴에는 눈(目)의 허기가 번득이는” 나는 여전히 수용소에 있고, 거기서 나오지 못한다. “허름하고 집요하고 은밀하고 혐오스럽고 잘 잊히고, 쉽게 용서하지 않으며, 닳아도 새것”인 그곳, 바로 그의 보물은 단지 구조바꿈만 하여 그를 타고 올라가 강박이라는 마법을 거는 것이다. 17살의 어린 소년이 22살의 청년이 되어 돌아온 고향은 그에게는 또 다른 고통의 장소가 되고 만다. 전쟁의 뒷길에서,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보이지 않는 폭력들, 그리고 바로 그 약자의 사회에서 다시금 반복되는 폭력, 너무도 아픈 상처들이 치유되지 못하고 우리사회에서 서성거리고 있음을 다시금 깨우친다. 작가의 고백처럼 이 작품을 시의 옷을 입힌 비극이고 이 시대의 처참한 문학적 증언이자 명예라 함에 무슨 이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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