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그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아득하고 비현실적일 것만 같은, 배고픔과 향수(鄕愁), 연민과 혐오의 일상을 들려주는‘레오폴트 아우베르크’의 회상은 견고하게 세운 내 어쭙잖은 이성과 인간에 대한 신념을 완전히 무너져 내리게 하는 당혹스러움이 있다. 아니 항시 죽음이 드리워진 러시아 강제수용소의 삶이 아닌 삶의 사연들보다 감히 인간의 생각을 이렇게까지 묘사해 내는 작가의 언어와 문장에 더욱 경악하였다고 하는 것이 진솔한 얘기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굶주림의 실체, 고향과 가족에 돌아가야 한다는 귀향과 그리움의 본질, 그리고 그 실체와 본질마저도 갉아 먹혀 마음이 소실된 사물화 되다시피 한 사람의 처절한 내면을 보게 된다. 인종주의, 민족주의가 야기한 인간의 또 다른 폭력의 역사, 그러나 역사에는 기재되지 않은 역사 밖에서 자행되는 다수자의 야만성과 무관심, 기회주의적인 소수자 속의 다수자에 대한 비굴한 본성의 적나라한 드러냄의 다른 표현방식이다.

루마니아의 소수민족인 독일계 17살 소년,‘레오’는 가족의 대표로서 “너는 돌아올 거야”라는 대수롭지 않은 할머니의 말을 가지고 러시아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간다. 이후 생존해서 귀향할 때 까지 5년에 걸친 배고픔과 향수와 죽음이 넘실대는 혹독한 수용소의 일상이 철저할 정도의 감정이 배제된 담담한 사실적 묘사로 그 구체성과 내면의 작은 흐름까지 포착하여 두려움과 공포의 실체를 보다 선명하고 확연하게 들려준다.
몸이 일을 버텨내도록 하기위해 오직 삽질을 위해 삽질을 하는 처절하고 강도 높은 노동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단 한번 배급되는 800그램의 빵 한 조각, 그리고 양배추 건더기조차 없는 멀건 수프에 의존해야 하는 생존의 고통은 “모든 대상이 내 배고픔의 외연이 되었다.”고하는 정도에 이른다.

자신의 안에 사는‘배고픈 천사’에 조종당하고 농락당하는 나, 바람조차 허기를 먹여 키워, 추상이 아닌 눈에 보이는 음식들을 싣고 오는 순간, 항상, 늘 거기에 있으므로 제가 원할 때 원하는 방식으로 오는 배고픔에 휘둘리는 순간 배고픈 천사는 “숨결을 그네 뛰게 하고, 숨그네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심한 착란 상태”를 만든다. 배고픔을 잊기 위해 삽질을 하고, “삽질이 조금도 두렵지 않”으며, 두려운 건 오히려 나 자신이 되고, 삽질을 하는 도중에 딴 생각을 하는 것이 위험한 일이 된다.

격리된 시간과 공간, 그곳이 괴롭히는 것은 이렇듯 죽음이 엄습하는 배고픔 외에도 “원치 않아도 절로 떠오르는 생각”, 시간이 흐를수록 내용이 없어지고 구체적인 고향과 전혀 상관이 없는‘향수(鄕愁)’, 연기를 내며 타다가 결국은 사람을 병들게 하고, 끝내 생존의 의지를 무너뜨리는 또 하나의 두려움이다. 그러나 얄궂게도 2 년 만에 고향으로부터 날아든 어머니의 편지는 하얀 박음질을 한 엽서에 동생의 출생을 알리는 단 한 줄의 내용뿐이다. 문득‘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 떠오른다. ‘연민의 한계, 그리고 양심의 명령까지 훨씬 더 진실하게 생각해’보라는 그녀의 말을 우린 잊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하는 생각에 미처 우리들 스스로 자신들의 역사를 지우는 주체가 되어버리는 것 아닌가에 이른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억누르고 싶지만 두려움에서 벗어 날 수 없으므로 대신 현혹이라는 스위치를 누르고”있는 아들에게 보낸 어머니의 편지는“내가 그 한 줄에서 무엇을 읽었는지 안다면. 너는 거기서 죽어도 돼.”하는 레오의 인식에 이르러 뭉클한 안타까움이 가슴을 쓰라리게 한다.
“범인류적인 문화행사라도 되는 듯 위생적인” 빵의 배급의식을 치루는 수용소의 특권자일 수 있는‘펜야’앞에서, 그녀의 공정성을 북둗우기 위해 웃어 보이느라 입을 벌리고 이를 드러내는 레오의 모습은 배고픔과의 처절한 투쟁의 모습으로 강한 인상으로 남는다. 소설의 표현들, 어휘와 문장들이 주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이 강렬하고 시니컬하기도 하며, 담백한 느낌은 심장 깊숙이 파고드는 정말 새로운 감동이라 하여 할 것 같다. 소외된 역사와 불완전한 인간본성에 대한 새로운 돌발점을 지독하리만큼 세밀하게 폭로하는 이 소설의 뚜렷한 주제의식과 서사구조의 압도적인 탁월함을 감히 무어라 하여야 할지 나의 서술 능력의 한계를 느끼게 한다.

배고픈 천사와 싸우고, 중노동과 텅 빈 그리움을 부여잡고, 죽음을 격려하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던 세상과 격리된 수용소를 떠나 고향으로 향하는 레오가“자유로운 세상으로 떠밀리듯 보내진다는 공포”로 울부짖는 것을 우린 이해하지 못한다.
그가 돌아왔을 때 반가움보다 놀라움, 달갑지 않은 안도감을 보이는 가족에게서 우리들의 또 다른 이기심, 자기기만에 대한 연민이라는 우울한 자화상들을 보는 것만 같은 초라함을 확인하게 된다.

“세월에 약탈당하고, 한때 배고픔에 약탈당해 속은 황폐해지고 얼굴에는 눈(目)의 허기가 번득이는” 나는 여전히 수용소에 있고, 거기서 나오지 못한다. “허름하고 집요하고 은밀하고 혐오스럽고 잘 잊히고, 쉽게 용서하지 않으며, 닳아도 새것”인 그곳, 바로 그의 보물은 단지 구조바꿈만 하여 그를 타고 올라가 강박이라는 마법을 거는 것이다. 17살의 어린 소년이 22살의 청년이 되어 돌아온 고향은 그에게는 또 다른 고통의 장소가 되고 만다. 전쟁의 뒷길에서,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보이지 않는 폭력들, 그리고 바로 그 약자의 사회에서 다시금 반복되는 폭력, 너무도 아픈 상처들이 치유되지 못하고 우리사회에서 서성거리고 있음을 다시금 깨우친다. 작가의 고백처럼 이 작품을 시의 옷을 입힌 비극이고 이 시대의 처참한 문학적 증언이자 명예라 함에 무슨 이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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