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는 혼자다 1
파울로 코엘료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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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대한 부, 명예, 영광,... 이것들의 의미는 진정 무엇일까? 천박한 미디어에 비치는 연예인의 치장을 따라하는 초라한 중생들, 조금 더 조금 더 하는 재화에 대한 멈출 줄 모르는 물욕, 이기심에 의식이 차단된 권력의 지향, 그리고, 또 그리고는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근접하려는 명예의 과시가 가져다주는 것은 궁극의 무엇일까?

    과시와 허영이 찬란하게 피어나는‘칸 영화제’는 그래서 너무도 적절한 무대가 된다. 러시아 정보통신그룹 총수인‘이고르’의 “어쩌면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건 이 시대의 미친 양상을 세상에 폭로하기 위한 게 아닐까. 그 궁극의 체현인 칸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말이지.”하는 독백은 이 작품의 주제를 관통하고 있다 할 수 있겠다.

    『연금술사』, 『오자히르』, 『포르토벨로의 마녀』등 지금까지‘코엘료’의 작품과는 사뭇 다른 구조와 속도감을 가지고 있다. 이틀 남짓의 시간이 촘촘히 나뉘어져 사건이 진행되는 급박한 전개로 스릴러의 형식미를 한껏 돋우고 있다. 불나방처럼 화려함을 좇아 프랑스 남부도시 칸으로 몰려드는 사람들, 욕망의 영원한 노예로 길들여져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라도 그 허황의 꿈을 실현하려는 인간 군상들의 정수, 칸은 바로 그 자체이다.

    문득 대중문화, 특히 영상, 패션, 방송, 인터넷 등 보여지는(視覺) 산업의 권력화가 대중의 영혼을 치명적인 질병으로 내모는 것이 더 이상 새로운 발견이 아닌 시대가 되었다는 생각이 몰려온다. 슈퍼클래스가 시중에 나오지도 않는 패션상품들을 선보이면, 너도나도 어울리지 않는 싸구려 의상에 고가의 브랜드 가방을 끼고 다니는 그 추레한 모습으로 허영을 과시한다. 마치 자신이 피라미드의 상층부에 근접하였다는 듯이. 이들 우매한 중생들을 바라보는 슈퍼클래스는 쾌재를 부르고, 더 많은 부와 권력과 명예를 쌓아간다. 불쌍한 인간들...

    이러한 인간 사회의 자기사유 상실의 한 단면으로“허영이 사람을 어디까지 몰고 갈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 속의 수피‘나스루딘’과 술탄의 터번에 관한 에피소드는 적나라하게 인간을 해부한다.

    백주대낮에 영화제의 중심거리에서 버젓이 벌어지는 살인, 이 살인은 사랑하는 이에게 보내는 메시지이다. 사랑을 위해 세상을 사라지게 하는 것, 한 명의 생명이 사라지는 것은 그 사람의 세상이 소멸하는 것.

    온갖 시련을 통해 거대기업을 일궈내 억만장자가 된 ‘이고르’의 그칠줄 모르는 욕망의 광기를 참아내지 못하고 떠난 아내 ‘에바’를 향한 사랑의 복원, 용서의 전언이다.

    제2, 제3의 메시지를 위해 무작위적 연쇄살인이 이어지고, 틈틈이 탐정소설의 서사를 이용하여 살인자를 이미 알고 있는 독자를 관찰자로 슬며시 밀어낸다. 그리곤 수사관까지 지향하는 가치가 오직 자신의 명예, 영광에 맞추어져 있음을 인식하게 한다. 영화배급업자에게 줄을 대려는 영화감독, 영화에의 캐스팅을 위해, 단 한 번의 기회를 잡기위해 우연이라는 불확실성을 기대하고 잠자리도 서슴지 않는 배우 지망생들, 모델들,... 제능력 이상의 영광을 얻으려 안달하는 무수한 인간들이 등장하고 사라진다.

    작가는 이들에게 결코 성취를 제공하지 않는다. 자신의 판단으로 무언가를 선택하지 않는, 매체에 현혹되고 속아 선택하고 있을 뿐, 또한 욕망의 노예가 되면서까지 자신을 팔아버리는 오늘의 인간들에게 고뇌의 바다를 벗어나는 축복을 안겨 줄 뿐이다.

    적과 흑의 대비가 강렬하게 표지를 장식하는 이 두 권으로 구성된 소설을 손에 들면 시간이 어떻게 지나버렸는지 모르게 된다. 아마도 “하지만 승자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제목과 상치되는 마지막 문장이 그토록 아쉬울 수가 없을 것이다.

    사랑이란 삶의 본질을 상실한 현대인들, 욕망에 눈이 멀어 영원한 노예로 남게 될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타인에 대한 관심도 열정도 사라지고 이기적 성취에만 몰두하는 손상된 영혼들, 미쳐버린 인간사회에 대한 혹독한 자기반성의 촉구이다.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지적 폭력에 대해서 무신경한 무지한 대중들, 이 뒤틀린 사회구조와 부조리를 거들떠보지 않는 인류는 영원히 노예의 삶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하비드, 에바, 가브리엘라, 저비츠 와일드, 모린,...욕망이란 이름하에 명멸한 사람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삶, 주인으로서의 삶, 진정한 승자의 삶은‘사랑’으로 회귀한다. 오로지 승자가 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인간들의 그 부질없는 행동의 실체를 시각문화의 대중 지배라는 관점을 통해 감각적이고 적나라하게 들춰낸 수작이다.

    「영이 최후의 심판대에 올랐을 때 신(神)은 다만 이렇게 물을 것이다. “살아 있을 때 너는 사랑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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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수정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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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린 시절 읽었던 책을 석양이 뉘엿뉘엿 저무는 시기에 이르러 다시금 읽는다면 그 독서는 어떠한 것이 될까? 책장마다의 단어와 문장이 이미 쉬이 넘어 갈 수 없는 수많은 추억을, 연상되는 언어와 이미지들로 들어차 미소를 머금게도, 슬며시 눈물이 흘러내리게 하기도 할 터이다.

작가의 말처럼 이젠 처음 펼쳐든 책에서도 순수한 독서는 더 이상 가능치 않고, “문학적 암시가 빼곡해지면서”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어려움과 복잡한 책으로 다가서는 것은 삶의 세월이 훌쩍 넘어선 제법이나 나이가 들어서인지도 모를 일이다.

 

작가‘망구엘’이 50대 중반에 들어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고 어떤 면에서는 지배하기도 했던 추억이 담긴 열두 개 작품을 매월 한 편씩 1년에 걸쳐 읽어나가면서 매순간 떠오르는 일화, 인상, 사색을 스케치하듯 적어나간 일기이다. 주제가 되는 열두 작품의 대부분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고전이거나 명작으로 번역되어 소개된 작품이나 ‘디노 부차티’의 『타르타르 스텝』, ‘호아킴 마리아 마차도 데 아시스’의 『브라스 쿠바스의 유고 회고록』은 국내에는 낯선 작품들이다. 또한 ‘마거릿 애트우드’의 『떠오름』은 국내에 『떠오르는 집』으로 번역되어 출간 된 적이 있으나 지금은 절판되어 더 이상은 찾기 힘든 책이 되어버려 작자와 공명하기 어려운 아쉬움도 있다.

또한 인용되거나 비유, 연상을 통해 등장하는 낯선 200여 문학작품들도 ‘망구엘’의 사색의 길을 좇는 일을 여간 벅차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감상적인 환상에 영속적인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일기를 쓰듯이, 현재를 기반으로 하는 이 매력적이고 세련된 통찰과 사색의 여담은 삶의 성숙한 관조(觀照)와 달관(達觀)의 평온함을 선사한다.

사실 작자가 선정한 열두 작품의 대개는 디스토피아적 이거나 인생역정에 대한 회고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작품들이어서 삐딱하게 경사진 시선을 바탕으로 하는 비평적 인상과 염세적인 가치관이 엿보이기도 한다.

소년 킴과 라마승의 여정을 담고 있는‘키플링’의 소설 『킴』에서, 당시 인도를 지배하던 제국주의 영국의 무지한 이성을 야만에 견주기도 하며, ‘샤토브리앙’의 『무덤저편의 회고록』을 통해 오늘의 우리사회인 “짧은 속보, 반복, 즉시성, 시공간의 어떤 거리도 허용하지 않는 끝없는 순간 같은 것”을  지옥에 대한 또 하나의 정의에 빗대어 현재의 인류사회가 지옥의 다름 아님으로 고뇌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페르디난도 카몽’의 기독교의 ‘타인’에 대한 관계의 목적론적 접근의 성찰이나, 현대 정치사회의 방관자적 구경꾼인 시민들에 대한 비난에 이르기까지 여유로운 독서가 만들어내는 명상과 통찰의 멋스러움을 자아낸다.

“내 시체의 차가운 살을 갉아 먹은 첫 번째 벌레에 헌정(獻呈)”한다는『브라스 쿠바스의 유고 회고록』처럼 독특한 ‘여담의 책’이나 “정의를 성취하는 것은 단순히 불가능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의로운 사람이 계속해서 정의를 추구해 나가도록 우리가 그걸 불가능하게 만들어 놨는지도 모른다.”는 정의의 단상은 우리사회의 현실과 어우러져 새로운 연상을 낳기도 한다.

‘망구엘’의 자유분방한 독서일기가 새로운 독서를 추구하게 한다. 더구나 그의 사유의 날개를 자꾸 놓치는 탓에‘괴테’의 『친화력』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면, 이 책은 소기의 목적을 이룬 것이리라.

“원하는 대로 읽어라! (LYS CE QU E VOUD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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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를 리뷰해주세요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기자와 나눈 3일간 심층 대화
오연호 지음 / 오마이뉴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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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600년의 역사, ‘패배하는 정의’의 역사를 청산하고, “이상이 현실에 굴복하고, 현실이 이상을 구박하는 시대”를 극복하며, 인간의 자존심이 활짝 피는 사회, 원칙이 승리하는 역사를 실현하려했던 바보 대통령의 시민을 향한 각성의 외침이다.

더 이상 (정치)권력이 권력의 주체인 국민을 지배하고, 특권을 누리려 하며, 반칙을 일삼을 때 분노하지 않고, 부당한 권리와 이익의 주장을 방관하여서는 안 된다. 권력을 사유화하고, 선출된 권력으로 시민과 소통하지 않으려 하는, 기회주의적이고 권위적인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시민들은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될 터이다.

작금의 미디어법의 강행처리, 4대강 유역개발과 같은 개인을 살찌우는 기술에 집중하며,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불공정한 게임을 주도하는 특권구조를 해체하는데 시민의 조직된 힘, 시민들의 행동이 그 어느 때 보다 요구되는 것은 그래서 당위화(當爲化)된다.

힘센 자에게 줄서는 권위주의와 기회주의가 결합된 특권의 유착구조는 불공정과 불균형, 신뢰가 무너진 사회를 고착화시키고 있다. 게다가 신자유주의 시장경제 만능의 경제정책과 세계화는 거대한 시장권력을 만들어내고, 국민의 권력인 정치권력을 위협하고 민주주의의 위기를 자아내기에 이르렀다.

“지배자 또는 지배집단이 어떻게 행동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회의 윤리의식, 가치 형성에 상당히 큰 영향을 끼치게 되어있어요. 그 윤리와 가치의 핵심이 신뢰입니다. - 中略 - 신뢰가 무너진 사회에서는 약속이 무력화되기 때문에 기능적인 기대도 다 배반될 수밖에 없습니다.”라는 바보 노무현의 신뢰에 대한 지적은 국민을 분열과 갈등에 내몰고 사회적 합의를 불가능케 하는 현 정권의 평가에 적절한 도덕적 가치 기준이 된다.

부조리한 권력을 분산하고, 권위주의를 해체하여, 낮은 사람으로 정치권력의 대표자가 되어 겸손한 권력으로 강한 나라를 만든 전형을 창출하려했던 인간 노무현의 정치적 의지와 정의의 사상이 이렇듯 진정함으로 시민정신을 일깨운다.

어느덧 시민의 편에 서있던 언론은 또 하나의 권력, 언론 권력으로서 시장권력의 편, 아니 스스로도 시장권력이 되어 국민의 권력을 겁박하기에 이르고, 정보의 장을 움켜쥐고 이데올로기를 조작하여 민주주의를 퇴화시키는 불공정과 권위주의의 한 축이 되어있다.

오늘날 권력은“공권력과 정보(이데올로기), 그리고 돈, 이 세 가지가 결합”해서 만들어진다. 이 중에서도 “유권자의 최종 선택을 결정짓는 정보(이데올로기)마당이‘결전의 장’이다.”그래서 미디어 공간, 언론은 중요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치권력을 독점하려는 시장, 언론 권력 등 특권세력, 특권구조의 해체는 이 땅의 민주주의 발전과, 계층간, 지역간 불균형의 해소를 위한 역사적 과제가 된다.  

 

“역사는 지배와 예속에서 발생하는 제반 갈등이다.”   

 

민주주의가 한 단계 더 발전하느냐 아니냐는 이제 시민들의 도덕적 성숙과 능동적 참여에 달려 있다. “신뢰와 원칙을 위해서 자기이익을 포기한 사람”이 들려주는 시민정신과 시민사회는‘관용의 정신과 타협을 아는 사람들의 연대’를 요구한다. 바로 지금의 획일주의 정치문화, 진보와 보수의 극한 갈등, 상대를 용납하지 않는 대결주의, 지역간 대립구조는 시민의 인간적 자존심이 지켜지고, 정의와 공정이 승리하는 사회의 실현을 위해 청산되어야만 하는 우리의 과제이다.

 

또한 노무현은 급진적인 진보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한다. “일부 고달프고 불평스러운 사람들을 선동해서 끌고 갈 수 있을지도 모르고, 일부 이른바 강단사회주의라 이야기하는 급진 지식인들은 뭉쳐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공허하게 교조적인 이론에 매몰되어서 흘러간 노래만 계속 부르지를 마라.”고 말이다. 그리고 “투쟁 없는 역사도 없지만 그러나 관용과 배려가 없는 역사도 성공하지 못한다.”고 투쟁과 절제가 함께 하여야 함을 조언한다.

이제 선출된 정치권력으로서 권력의 행사는 용인하되, 권력에 의한 지배, 권력의 사유화를 방관하는 시민이어서는 자유와 권리의 상실을 막을 수 없다. 권력과 지배를 분리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그렇기에 권력은 위임하되 지배는 거부하는 노력”, 바로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의 행동과 개입, 참여는 우리 시민들의 소명이 된다.

시장 권력, 언론 권력에 대해서는 상대편에 서있는 소비자로서, 소비자(시민)권력을 조직화하고 정치권력으로 묶어내어 시민 정치권력으로 시장, 언론권력을 통제하는 시민이 중심이 되는 사회, 진정한 의미의 시민사회의 주인의식으로 깨어나야 할 것이다. 공정성과 자유와 희망이 넘치는 정의가 승리하는 참된 민주주의 사회는 소비자 선택, 시민 선택에 달려 있음을 일깨우는 ‘부족한 우리들의 동지’의 마지막 목소리가 잠자고 있던 우리들의 의식을 선명하게 일으켜 세운다.

역사 이어달리기, 민주정부 10년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급작스럽게 시름에 잠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기에서 구하여 더욱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노력이 여기 있다.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는 행동하는 양심, 각성하는 시민, 바로 독자와 바보 노무현간의 뒤 늦지만 고귀한 소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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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희망이다>를 리뷰해주세요
거꾸로, 희망이다 - 혼돈의 시대, 한국의 지성 12인에게 길을 묻다
김수행 외 지음 / 시사IN북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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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정, 극한경쟁, 소외, 억압, 그리고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는 21세기 오늘의 한국인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여기에는 현 정권의 비(非)민주주의적 퇴행과 신자유주의 맹신의 경제적 부조리라는 정치경제적 삶은 물론, 개별적 존재로서의 자아의 탐색, 궁극적인 인간다운 삶을 위한 생태적 감수성의 회복, 사회문화, 역사적 정체성에 대한 환기와 자각에 대한 고뇌가 있다.

 

이 책에 수록된 12인의 담론은 사실 우리들이 이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성찰, 진단과 분석, 그리고 나름의 결론과 대안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보여주는데 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생태적 상상력과 공동체의 복원, 순환구조가 살아있는 농업으로의 회귀나, 지금의 경제적 공황(恐慌)에 대한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시장만능의 자본주의의 체제적이고 근원적인 한계, 너무도 대중화된 ‘하버마스’의 ‘부르주아 공론장’에 따른 이상적 소통집단의 축조, 이러한 현실적 대안으로서 ‘마을’이라는 우리 농촌사회에 대한 검토, 민주주의를 역진(逆進)시키는 파쇼적 원숭이들의 파렴치에 대해서도 그 이상의 식견을 가진 국민들이 우리사회에는 이미 상당히 축적되어있음에서 출발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아마 강연과 청자와의 질의응답이라는 구술적 대면의 내용을 문자화하다보니 그 내용의 깊이가 태생적으로 얕아져 심화되지 못한 측면이 있기에 그런 모양이다.)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 그리고 세계화란 흐름에 휩쓸려“사회적 자본, 즉 인간관계라고 하는 인생살이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가 망가진”극심하게 파편화되고 원자화된 개인들의 메마른 삶, 그리고 이를 심화시키는 권력의 독선에 대한 대항적 체제로서 중간 결사체(의료생협, 교육생협)의 활성화나 공동체(Commune)로서 농촌(귀농)의 제시는 민주주의를 살리고 근원적으로 안정적인 삶의 방안이 된다.
출발논리는 이와는 다르지만 ‘우정과 환대의 공간’으로서 “거대 권력 중심의 게임”보다는 “실제 삶의 언어에 신경”을 쓰라는 조언과 함께, 경직된 ‘사냥꾼의 질서’에 익숙한 현실을 탈피하여 안정성과 “공포심 없는 상식적 언어소통이 이루어지는” 기댈 언덕으로 농촌 마을을 ‘하버마스’式  공론장, 즉 민의(民意)의 소통과 큰 여론의 발전장으로의 주장은 보다 심도 있는 대안으로서의 검토과제로 기억된다.

한편, 오늘의 한국인, 나아가 현대인들의 ‘불안’에 대한 정신의학적 성찰을 통해 자기대면이라는 자신의 에너지 방향에 대한 인지(認知)와 현실에 대한 충실성의 교훈은 돈과 학벌과 같이 왜곡된 삶의 가치에 경도된 사람들에게 자아회복의 길을 마련해 주기도 한다.

이와 같은 미시(微示)적 검토와 아울러, 경제적 삶의 대안으로서 “공공목적을 기업 방식으로 실현”하는 ‘아름다운 재단’의 ‘아름다운 커피’, 수익전액을 기부하는‘러그마크(Rugmark)'와 같은‘사회적 기업’에 대한 제시는 21세기적 새로운 가치와 패러다임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여준다.

 

끝으로 안타깝지만 독립운동의 부인(否認), 친일파의 건국유공자 둔갑, 분단현실의 불인정을 내용으로 하는 현 정부의 1945.8.15이 아닌‘1948.8.15’의‘건국절’지정과 같은 악질적인 민주주의 역진적 행위에 대한 현대사의 왜곡은 이 정부의 부도덕성과 비민주주의적 성향을 여실히 보여주기도 한다.

이렇듯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의료, 생태분야에 이르는 12인의 오늘의 한국에 대한 진단과 해석, 그리고 보다 낳은 삶을 위한 대안의 모색은 작은 의식의 변화를 요구하기도 하지만, 때론 전면적이고 전복적인 상상력을 요구하기도 한다.

사회정의와 공정성이 비어있는 이 정권의 파렴치함과 명령하는 사회, 경쟁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 그래서 비판적 사고가 상실되고 호혜(互惠)의 감각을 잃어버려 소통이 단절된 사람들과 사회, 바로 이러한 오늘의 우리들의 미래와 희망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고 실현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소박한, 그러나 귀 기울여 경청할 이야기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진정 깨어있기를, 그리고 새로이 깨어나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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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과 올로지 - 세상에 대한 인간의 모든 생각
아서 골드워그 지음, 이경아 옮김, 남경태 감수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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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즘(Isms;~主義)과 올로지(Ologies;~論, ~說)가 이렇게 많은지 미처 몰랐다 할 밖에 없다. 영문 표기상 이즘과 올로지만 이 정도이니, 학문 좀 한다하면 저마다 자기주장을 표현하는 독특한 영역을 표시하고 싶어 하다 보니 아마 우리만의 ~주의(主義)나 ~론(論),설(說)까지 더하면 이들 모두를 기억하기에도 턱없을 뿐 아니라 의미도 시원찮은 것이 사실일 터이다.

이즘과 올로지가 들러붙은 세상의 어휘는 몽땅 수록된 것 같다. 정치, 역사에서 철학, 예술, 종교, 경제, 과학, 그리고 성도착 등 잡다한 일상의 분야에 까지 이르는 주의(主義)와 론(論),설(說)이 객관성과 저자의 주관적 의지를 왔다 갔다 하며 흥미롭게 기술(記述)되어 있다. 그러나 이 백과사전적 저술을 독서로 접하는 것은 말리고 싶다. 명색이 사전형식을 취하고 있다 보니 짬짬이 여가삼아 훑어보아야 이 저술 특유의 독특한 구성과 해설, 주석의 묘미를 만끽 할 수 있기에 그렇다.

또한, 세상의 이즘과 올로지만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특정 주의나 이론과 관련하여 설명을 필요로 하는 용어가 발생하면 주석에 빼곡하게 설명하는 것은 물론, 그 비중에 따라 별개의 단독주제로 소개하기도 하여 지적 갈증으로 안달하는 일을 아예 차단할 정도로 친절하다.

 

책을 읽다보면 주의와 론,설 때문에 독해가 연속되지 못하고 끊기는 것이 이젠 다반사라 할 정도로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미 익숙하게 학습된 자유지상주의, 형식주의, 이상주의, 실존주의, 다다이즘, 페티시즘, 마조히즘과 같은 용어들은 물론 머그웜프주의(Mugwumpism), 유퓨이즘(Euphuism), 빅토리아주의(Vctorianism), 노르딕 세계관, 우인론(Occasionalism)에 이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더구나 늘상 사용되는 파시즘, 보수주의, 상징주의, 인본주의, 근본주의와 같은 용어도 워낙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활용되다보니 모호하기 그지없는 정의를 다시금 정립하고 되새기느라 짜증이 몰려오고, 구태여 이즘과 올로지여야만 했을까 하는 회의가 찾아오기도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아서 골드워그’의 이 저술은 오늘의 독서인들에게 유용함은 물론 절대 필수적인 비치(備置) 도서가 될 것이다.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하면, 작은정부라는 당해 용어의 사전적 설명은 물론 유래, 관련 문학, 예술작품의 인용, 사회적 사건 그리고 미나키즘(Minarchism)같은 관련용어로의 연결, 더구나 저자의 위트와 유머가 은근하게 스며들고 조크까지 더해져 사전적 지식을 뛰어넘는 한편의 비평적 에세이에 이르기까지 한다.

일례로 ‘기독교(Christianity)'의 설명에 이르면“현실에서는 진정한 기독교인인 딱 한사람 존재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는‘니체’의 비판을 인용하면서 오늘의 페쇄적이고 기만적인 종교에 살짝 조소를 보내기도 한다.

또한 독불장군식의 부시 독트린을 지칭하는 ‘일방주의 (Unilateralism)’의 해설은 좌익지인 ‘가디언’지와 우익지인 ‘내셔널 리뷰’의 상이한 논쟁까지 곁들여 시사적 안목까지 배가시킨다. 그리고 ‘팽글라시언 (Panglossian)'을 통해 볼테르의 소설 ’깡디드‘를 새로이 떠올리게 되고, 진화학자인 ’스티븐 제이굴드‘의 ’팡그로스의 오류‘에 까지 의미를 두루 섭렵케 하여 주며, 부정적 사건이 연속되는 ’머피의 법칙(Murphy's law)'이 유사한 용어인 ‘소드의 법칙(Sod's law)' , '피네이글의 법칙(Finagle's law), 나아가 ’핸런의 면도날(Hanlon's razor)'의 일화에 이른다.

“돈 많고 무언가 불만을 품은 듯싶기도 하며 상상력이라고 없는 중년 남자”를 의미하는 ‘배비트리(Babbitry)', 천하고 무식한 유머의 의미를 가진 ‘라블레시언(Rabelaisian)', 위선적 시대의 대명사인 ‘빅토리아주의(Victorianism)’, 생시몽주의, 프리메이슨단 등등 흥미롭고 유익한 세상의 주장들을 볼 수 있다.

특히, 종교편에 도달하면 유독 주의와 론,설이 무진장함을 목격하게 되는데, 역시 종교만큼 자기영역과 주장을 과시하려는 분야는 없다는 확신을 주는듯하다. 당분간 독서 할 때에는 이 방대하고 재치 넘치는 지식 키워드(keyword) 저술을 옆에 두고 수시로 참조해야 할듯하다. 충실하면서도 자유분방한 필치로 망라된 21세기형 지식사전의 전범(典範)이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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