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파간다 - 대중 심리를 조종하는 선전 전략
에드워드 버네이스 지음, 강미경 옮김 / 공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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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에서 뉴욕대 미디어학 교수‘마크 크리스핀 밀러’는 이 저술을 “버네이스의 교활한‘프로파간다(propaganda)'"라 하고 있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정부가 두려움과 반감을 가지고 바라보는 견해와 주의를 확산시키려는 목적의 은밀한 제휴를 비난하는 현대 정치용어”가 된 '선전(Propaganda)'에 대한 고전으로서의 지위를 가진 저작이다.

1928년 출간된‘에드워드 버네이스’의 ‘Propaganda’는 “사회의 보이지 않는 메커니즘을 조작하는”‘보이지 않는 정부(invisible government)’로서의 권력, 국민을 지배하는 권력으로 파악하고 있을 정도의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저술을 오늘의 진전된 홍보 및 광고의 전략적 식견으로서 읽는 것은 이 저술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한다. 물론 버네이스의 저작의도에는 당시 사회각계각층으로서 기업, 정치, 사회사업, 교육, 예술과 과학부문 등에 자신의 PR(Public Relation)역량을 입증하고자 하는 전략이 숨겨져 있어, 지금의 광고홍보부문의 기본적 원리와 방법론의 학습에도 기여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저작이 오늘에도 의미를 지니고 다가오는 것은 이미“소수가 다수에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수단”으로서‘선전’을 이해하고 있으며, 대중심리학, 정신분석학, 행동심리학 등 심리학을 적용한 과학으로서의 홍보이론을 정립, 발전시켰다는 측면에서 현대 홍보분야의 초석을 다진 저작물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하겠다.
특히,‘노엄 촘스키’의 추천사와 버네이스의 본 저술의 비평으로 ‘마크 크리스핀 밀러’의 탁월한 머리말을 포함하고 있는 이 번역판은 <PROPAGANDA>의 고전적 지위를 만끽하게 해준다.
 

‘특정한 원칙이나 행위를 전파하기 위한 제휴나 체계화된 계획 또는 일치된 운동’이라 정의 되는 ‘선전’이 오늘의 현대사회에서는 “기업이나 사상 또는 집단과 대중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사건을 새로 만들거나 일정한 방향으로 끼워 맞추려는 일관된 노력이다.”라고 그 속성을 진솔하게 적시하고 있는 저자의 성찰은 마치 21세기 미디어 사회를 내다보고 있는 것만 같다.

민주주의의 현실적 참여가 어찌되었든 오늘의 대중은 상대적으로 소수인 집단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을 부인 할 수 없다. 이들이 어떠한 수단과 방법으로 서로 다른 사상과 경험, 주장을 가진 이들을 지배할 수 있을까? 즉 대중의 동의 없이는 권력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선전은 대중의 마음을 단단히 틀어쥐고, 여론을 의도하는 방향으로 거의 정확하게 돌려놓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버네이스는 이러한 통찰에서 사람들을 통치하고 그들의 생각을 주조하고 취향을 형성하는 도구로서의 선전이 가지는 무한한 권력으로서 의미를 포착하고 있다. 그리곤 이 보이지 않는 권력으로 다수인 대중을 지배하는 선전방법론, 사회심리적 기제와 동인을 통한 여론 경로의 장악 등에 대해 탁월한 역량을 드러낸다.

‘월터 리프먼’의 “‘합의의 조작(manufacture of consent)’은 공적인 영역 어디에서나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라는 믿음을 갖기에 이르렀다.”는 지적처럼 대중의 의지를 바꾸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진실을 왜곡 조작할 수 있다는 깨달음은 ‘선전’에 대한 악명을 더욱 강조 한다.

거짓말도 반복하면 진실이 된다는 행동심리학이나 , 스스로 하는 판단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판단은 부지중에 우리를 지배하는 외부영향이 각인해 놓은 인상의 복합물이라는 집단심리학의 발견은 선전방법의 중대한 수단으로서의 틀을 제공한다. 버네이스의 이러한 이해는 당시 대중을 향한 실질적인 선전 전략의 실행으로 입증되고 있다.‘체이스 필드’의 담배판매전략, 쿨리지의 대통령 재선전략, 미국전력협회의 선전전략, 섬유업체의 패션전략 등 “점진적이고 개별적이면서 분산되고 반(反)의식적인 대중의 반응을 목표로 삼는” 대중 관행에 변화를 가져올 환경을 조성하는 은밀한 수단으로서 위력을 발휘한다.

버네이스의 선전이론을 따라가다 보면 오늘 우리사회에서 벌어지는 정부의 여론 장악을 위한 탐욕스런 발버둥, 거대기업들의 미디어를 통해 전개하는 대중의 관행에 변화를 가져올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보이지 않는 권력의 실체를 느끼게 된다. 대중은 시장권력, 정치권력이 획책하는 사실을 모른 채 어느덧 선전가의 의도대로 따르고 있게 된다. 선전가(정치권력, 시장권력)는 자신이 야기하는 소동에 초연해야 한다는 마치 '조지 오웰'의‘이중사고(doublethink)'같은 모호한 정신상태의 외면으로 가장하는 권력을 보는 이유가 설명된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선전인지도 모르는 선전에 노출되어 소수의 지배 권력의 꼭두각시가 되어 권력이 보여주는 현상을 진실로 믿어버리고 만다. 뉴욕타임스 1면에는 매일 여덟 건 중요 기사가 게재되며, 이 중 네 건, 즉 절반은 선전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처럼 뉴스기사라는 외피에 숨어있는 선전의 보이지 않는 힘은 대중의 인식을 조작하고 권력의 의지에 동의하게 하는 왜곡을 정당화한다. 탈법적인 강행처리로 대중의 의사를 거스르면서까지 입법화하려고 하는 현 정권이 고수하는 미디어법은 “선전을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사람들조차 선전에 쉽게 넘어간다.”는 선전의 속성에 대한 버네이스의 확신에 찬 주장을 뒷받침 한다. 언론을 장악한 시장권력이나 정치권력은 대중을 무한히 기만할 수 있기에 지울 수 없는 욕망이 된다.

“뉴스를 근원에서부터 오염시키는”이 보이지 않는 권력, ‘선전’은 그래서 오늘의 독자들에게도 유용한 시사를 던진다. 탐욕스런 권력에 조종당하지 않으려면 이 조정의 전략은 필독서가 될 것이다. 고전의 가치는 역시 세월에 풍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중은 당연히 갈수록‘선전’을 불신했지만 선전의 지지자들은 그 놀라운 성과에 혀를 내둘렀고, 그런 가운데 선전은 갈수록 세를 불려 나갔다.」본문 P50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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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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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주인공‘나’의 절대적 허기와 추위, 수치심을 위로받던 한 사람에 대한 상실감이 사악하고 메마른 야만적 폭력의 지배에 억압받던 시대상과 병치되어 오늘의 우리들이 앓고 있는, 아니 치유되어야만 하는 심리적 상처에 대한 아픈 글쓰기이다.

너무도 고통스러웠던 사건에 직면했을 때 충분히 슬퍼하고 아파해야 했는데, 그래서 애도하고 위로받는 소통이 있어야 했는데, 그 때는 그리할 수 없었지. “뜬금없이 피었던 엄동설한의 개나리”같았던 ‘서울의 봄’이 신군부세력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던, 그리고 그네들의 탐욕스런 권력을 위해 피비린내 나는 동족의 대학살이 감행되던 시대였으니 개인과 사회 모두 그 집단적 트라우마를 누구도 회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글을 쓸수록 문학이 옳은 것과 희망을 향해 가는 것이라고 말 할 수만은 없는 고통을 느낀다.”는 ‘나’로서, 어떠한 과거의 두려움, 불안감, 수치심이 고스란히 되살아날까 두려워하는 해결되지 않은 상처에 직면하는 것은 엄청난 고통을 수반했으리라.

그러나 그녀는 하얗게 지워지거나, 너무도 생생해지는 과도한 각성을 일으키게 하는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의 그 참혹한 기억에 마주 선다. “나는 글쓰기로 언니에게 도달해보려고 해.”라는 독백은 다름 아닌 바로 떠올리면 너무 아파서 회피해왔던 우리들의 깊은 상처에 정면으로 서는 것이리라.

“문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현실에선 불가능한 것. 금지된 것들을 꿈꿀 수가 있었지.(中略) 문학으로 인해 내가 꿈 꿀 수 있다면 사회도 꿈꿀 수 있는 것 아니야?”하는 그녀의 글쓰기는 우리들 개인, 그리고 사회를 어루만지고 위로해주는 상처 치유로서의 도구가 된다.

그럼에도 너무 가슴이 아프다. 그토록 마주하기 두려웠던 전철역 앞 구로 3공단의 서른일곱개 방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외딴방의 기억으로, 희재 언니에게로 다가가는 그 기억의 길이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그 때를 쓰는 것이 “다시 목숨을 걸고 거슬러 처음으로 돌아간다. 그래 돌아간다. 지나온 길을 따라. 제 발짝을 더듬으며, 오로지 그 길로.”처럼 생명을 걸어야 할 정도였겠는가.

우린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인 트라우마를 너무 안이하고 소홀하게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나만 당하지 않으면 된다...그러나 우리들, 우리사회가 얼마나 많은 떠올리기 싫은 끔찍한 상처를 받았는지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듯이 행동한다.

동족상잔에서 오랜 군부독재의 비민주적 억압 속에 자행된 국민을 향한 수 없는 폭력들, 60,70년대의 극악하고 파렴치한 경제권력과 기회주의적 정치세력의 시민착취, 쿠데타와 시민학살 등 개인과 사회에 가해진 상처들이 국민 모두를 고통스런 현실에 대해 지각하는 것을 둔하게 하거나 아예 부정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인격이 분리되는 해리현상에 빠져있게 만든 것처럼만 보인다.

그래서 마주하면 고통스러워서인지 불합리와 부조리, 불공정에 나서지 않고 무관심과 수수방관의 안일함으로 외면하고 결국 배타적 생각의 사회만연과 서로 불신하고 위협하는 사회로 치닫기만 하는지 모르겠다.

이처럼 커다란 심리적 상처들은 정면에 맞서지 않으면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기억저편으로 내몬 것 같지만 다시금 생생하게 살아서 두통에 시달리게 한다. 개인과 사회 모두가 앓고 있던 이 집단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치유는 바로 “그 근처(외딴방)엔 얼씬도 하지 않았”던 그 길로 향하는 길이고, 상처를 준 그 사건을 마주하고 충분히 슬퍼하고 아파해야 하는 것이다.‘나’의 ‘글쓰기’로서의 소설,‘외딴방’은 그래서 용기 있는 마주함이고 소통이며, 사랑이고, 따뜻한 치유가 된다.

이러한 마주함으로서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들, 우리사회의 불신과, 결함과, 수치심은 항구적으로 치유되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삼풍백화점의 붕괴와 같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재난, 부조리, 그리고 작금의 국민위에 군림하는 정치권력과 시장권력, 이제는 언론권력까지가 시민에 상처를 아무렇지 자행하는 무참함이 반복 될 수밖에 없다.

“도시로 나오니 하층민이다. 이 모순 속에 이미 큰 오빠가 놓여있고, 이제 열여섯의 나도 그 모순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물론 1979년의 ‘나’에게 다가왔던 세상과 지금이 동일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 불균형이 형태는 달리하지만 여전히 시정되지 못하고 우리들에게 부정적인 심리도식을 고착화시켜온 것만큼은 부인하기 어렵다.

내가 체감하지 못하면, 아니 사회적 약자와 억압받는 시민, 노동자는 다른 이들이라는 인식은 얼마나 허위인가? 외면하고 회피하는 그 상처는 나를 배제하지 않는다. “외사촌의 발랄함이나 나의 우울은 그곳에 살면서도 늘 그곳 사람들과 자신들이 다르다고 생각한 데에서 솟아나왔는지도 모른다.”는 ‘나’의 진솔한 고백은 치유로 한 걸음 다가가게 한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 그 골목이다. 그곳의 전신주이고 구토물이고 여관이다. 그녀는 공장 굴뚝이며 어두운 시장이며 재봉틀이다. 서른일곱 개의 외딴방들이 그녀. 생의 장소다.”그런 희재 언니의 죽음에서 자신의 죄책감을 떠나보내고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하기위해 외딴방을 향하는 길을 걷는 것은 우리들 모두가 선택해야 하는 필연의 길이 된다.

그래서 17년 여 만에 찾은 외딴방은 그녀와 우리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멋진 시작이 된다. 바닷물이 부드럽게 두통을 감싸주고, “몸은 말 할 수 없이 피로한데 정신은 점점 또렷해”지는 것은 피하려고만 했던 그 엄청난 상처가 낫는 과정이다.

열여섯 살 소녀, ‘나’의 시선으로 큰오빠, 셋째오빠, 그리고 엄마와 가족에 대한 연민, 노조와 ‘피로한 푸른 작업복’ 속에 갇힌 공장노동자로서의 시름, 산업체특별학급 학생으로서 키워나가던 작가로서의 꿈이 그 어떠한 치장과 덧댐 없이 소박하지만 시대의 진실을 도도하게 그려내고 있다. 우리 모두가 앓고 있는, 그러나 회피하고만 있는 질병의 문학적 형상화이다. 아프고 아름답고 용기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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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지평선 - 샹그리라, '마음속의 해와 달'을 찾아서
제임스 힐턴 지음, 황연지 옮김 / 뿔(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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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현실적 이상향을 묘사하고 있지만 책과 음악과 자연이 어우러진 세상과 차단된 곳, 그리고 우아한 지성이 교류되는 곳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모든 걸 뒤로하고 그곳으로 사라져 버리고픈 심정이 왜 아니 들까? 

문득 “정열이 고갈된 곳에서 지혜가 시작된다.”는 영국의 속담이 더없는 진리처럼 와 닿는 것은 세상의 번잡함에 아무리 긴 세월 단련돼도 적응되지 않는 나만의 생리적 거부감 때문인가?

티벳어‘푸른 달’이란 의미의 카라칼 계곡, “미지의 산맥 속에 감춰져 모호한 신권정치의 지배를 받는 이상한 문화 계곡”, 인간의 욕망이 미치지 못하는 세계, “샹그리-라”.

인도의 ‘바스쿨’지역 영국 영사인 ‘콘웨이’와 그의 부하 ‘멜린슨’, 금융사기범, 기독교 전도사, 4인을 태운 비행기가 의문의 인물로부터 납치되어 도달한 곳, 미지의 장소, 샹그리-라를 무대로 그려지는 낙원에 대한 신비로운 이야기다.

수백 살을 넘는 대승정 페로신부와의 대면, 쇼팽과 브론테자매와 동시대를 보낸 백 살이 넘은 라마승과의 대담, 하프시코디스트를 연주하는 여인‘로센’에 대한 아름다움에 대한 관조는 권력과 물질, 그리고 탐욕의 세계에 경도된 우리에게 너무도 낯선 세계일지도 모르겠다.


이 낯선 세계를 떠나고 싶어 하는 멜린슨의 현실적 사고와 행동은 그래서 현대인의 당연한 귀결로서 보여진다. 그러나 콘웨이의 샹그리-라에 대한 점점 늘어가는 풍요한 매력에의 도취는 또 다른 우리들에게 삶의 진정성에 대해 사유케 한다.

“그를 매혹 한 것은 개별적인 사물이라기보다는 서서히 나타나는 우아함과, 겸허하면서도 완벽한 안목과, 향기가 너무 짙어서 눈을 사로잡지 않아도 만족시키는 듯한 조화였다."

코를 찌르는 은은한 월하향(月下香)냄새와‘라모의 가보트’가 들려오는 조화로운 평화로움에서 원하는 책을 읽으면서 시간의 흐름을 잊은 채 살아갈 수 있다면, 아니 우리들의 세상이 이러할 수 만 있다면, 또한 단순하고 거대한 이념에 의하여 지배되기보다는 위로받을 수 있는 세계라면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할까?

“하려고만 들면 얼마든지 재미있는 일이 있는데도 줄곧 신경이 쓰여 한 번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그런 상태”에 휘둘리는 좇기는 우리들의 삶을 생각할 때, 푸른 달 계곡의 샹그리-라는 우리들 마음속에 하나쯤 품고 있음직한 이상의 공간이 된다.

멜린슨과 로센의 탈출에 동행하는 콘웨이가 확인하려했던 진실은 그의 방콕 북서쪽을 향한 여정에서 “멸망해가는 시대의 덧없는 아름다움을 보존하며, 그 열기가 모두 식은 뒤에 인류가 필요로 한 그 예지를 찾아나가는 것이오.”라는 대승정의 유언을 계승하기 위한 발걸음임을 우리는 안다.

불노(不老)의 계곡, 그래서 시간의 여유로움으로 조급함과 그로인한 욕망이 필요치 않은 곳, “최고의 만족감을 줌과 동시에 사람을 굶주리게 하는”클레오파트라가 아니라, “전혀 만족감을 주지 않음과 동시에 굶주림을 제거해”주는 로센의 바라봄의 사랑이 있는 곳은 이 미쳐가는 세계에 대한 인류의 새로운 희망의 장소가 된다.


1933년 발표된 티벳 고원의 그 어느 곳, 샹그리-라, 이 이상향에 대한 작품은 마음의 안식처를 찾아 헤매는 오늘의 현대인들에게도 짙은 정신의 울림을 제공하여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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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날>을 리뷰해주세요.
운명의 날 - 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니콜라스 시라디 지음, 강경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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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비평가의 한 도시에 대한 역사적 성찰이 유럽의 제국주의화, 근대화 나아가 인류 이성의 거대한 판도를 변화시키는 데에 이르는 폭넓은 통찰력을 보여주는 점에 감탄하게 된다. 21세기 오늘, ‘포르투칼’이라는 국가가 지구촌에 미치는 영향을 주목하는 이는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 나라의 수도인 ‘리스본’에 대한 관심도 이러한 이해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나 15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는 포르투칼, 아니 리스본은 유럽세계의 중심 무대라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는 교역, 상업, 경제, 문화의 거점 도시였다. 해상을 장악하고,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마카오)지역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식민지의 풍부한 황금과 설탕, 담배 등 자원뿐만 아니라 노예수출에 이르는 제국주의 본산이었으니 당시 유럽 제국들이 희귀하고 저렴한 이방의 산물을 위해 포르투칼의 항구도시 리스본에 몰려든 것은 당연한 양상이었을 것이다.

한편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에게 조차 ‘하느님의 도시’라 불릴 정도의 카톨릭 교세가 맹위를 떨치는 나라였으니, 세상의 모든 이치와 현상은 신앙의 정도에 따른 신의 단죄로 설명되는 중세적인 고행이 여전했음은 이미 볼테르, 로크, 홉스 등을 통한 계몽주의 이성의 시대가 열린 18세기 여타 유럽국가에 비해 시대의 인식이 낙후되었음을 대변한다.
볼테르의 한 묘사에서 “포르투칼의 왕에겐 종교행진이 곧 축제였다. 건물을 지을 땐 수도원을 지었으며 정부(情婦)가 필요하면 수녀 중에서 골랐다.”는 이 조롱어린 이야기는 포르투칼의 비뚤어진 종교적 삶의 실상의 다른 표현이다.

교황 니콜라스5세의 강력한 후원 하에 교회의 공식적 허가를 받은 노예무역, 그리고 식민지 착취를 통해 국가경제를 유지하려던 포르투칼의 가장 비열하고 탐욕적인 정신세계는 유럽의 다른 기독교 국가들까지 비난했던 종교재판소를 유지했던 하느님의 나라라는 비아냥과 절묘한 모순의 일치를 보인다.   

어떠한 산업기반도 없이 식민지의 금과 노예수출로 흥청대던 이 탐욕스런 신정국가의 수도에 1755년 11월 1일 만성절에 가해진 가공할 만한 대지진은 그네들의 카톨릭 사제들이 주장한 것처럼 신의 벌이었을까? 수도사, 주교, 대주교, 추기경은 선(善)하기만 한데 시민들이 타락해서 신이 벌했다? 그러나, 대성당, 종교재판소, 수도원이 지진으로 무너져 내리고 수도원장, 주교가 무너지는 돌기둥에 맞아 죽은 것은 신이 실수라도 했던 것일까? “칼을 휘두르며 인간의 양심을 강요하던”혐오스럽던 종교재판소의 편협함과 파렴치함이 한 나라를 역사의 이면으로 사라지게 하기까지 했다면 과연 지나친 이야기가 될까? 어쨌든 16.7세기의 유럽, 아니 세계를 호령하던 포르투칼은 오늘날 그때의 국가가 아니다.

이 저술의 빼어난 시선은 포르투칼의 세계 식민지 사냥이 유럽의 역사, 그리고 세계문명사에 끼친 영향에 주목하고 있으며, 그 발단을 당시 유럽, 세계시장의 중심도시인 ‘리스본’을 완전히 파괴해 버린 역사적 대지진을 전환점으로 지목하고 있다. 유럽에만 시선을 가두고 있던 유럽 국가들은 포르투칼의 신세계 탐험이 가져온 수확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는 곧 유럽 국가들의 제국주의화의 중대한 관점을 제공한다. 

또한, 대지진 후 세계 식민지의 첨병이었던 극악한 기독교 진단인 예수회와의 근대이성과의 갈등과 처절한 싸움의 무대로서 폐허가 된 리스본의 도시재개발은 오늘의 인류문명에 이르는 중요한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시대배경 하에서 ‘리스본 대지진’은 당시 유럽의 지성들에게 중대한 관심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으리라. 그네들의 기억으로 자연재앙이 인류에게 이보다 큰 상처를 입힌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폼페이우스 화산 재앙은 당시 확인되지 않았음)

‘라이프니츠’의 낙관주의에 대한 ‘볼테르’의 비판, 그리고 그 유명한 <캉디드>의 노골적인 낙관주의의 조롱은 리스본의 대지진과 종교재판소의 사악함을 소재로 한 종교의 위선적 악행에 대한 비난, 그리고 사회정의와 평범한 시민들의 고통에 대한 연민을 통한 근대 이성의 인문적 관점을 낳기도 한다.

이렇듯 전대미문의 최대 재난이 근대이성의 확산과 시민혁명의 발원이 되었음에 대한 분석과 병행하여, 평범한 소시민 출신의 총리가 회개와 종말론만 외쳐대는 당시 카톨릭의 실세인 ‘말라그리다’신부를 비롯한 사악한 예수회교회 세력과의 투쟁은 이 저술의 한 축을 구성하여, 광적 신앙과 인간 이성의 역사적 대결을 심도 있게 서술하고 있기도 하다.
결국 “권력 자체를 위해 권력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개인적 탐욕을 채우려 하지도 않았던 진정한 계몽주의자인 ‘카르발류(일명 폼발 후작)’총리의 개혁이 중세봉건주의의 낙후를 벗어나지 못했던 국가를 근대국가로서의 나아가 유럽계몽주의 시대의 정착에 기반이 되었음은 매혹적인 근대사의 한 장을 이룬다.

오늘날에도 툭하면 자연재해를 인류의 도덕적 해이에 대한 징벌로 몰아대는 이 땅의 기독교도들을 보면 리스본의 ‘말라그리다’와 어쩜 그리 닮았는지 섬뜩하기조차 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이들에 대항하여 실천적 행동으로 국가를 재건한‘카르발류’의 재난 관리를 위한 선구적 대책들과 그의 리더십, 추진력 등 대처 사례는 또 하나의 지혜를 선사해주며, 17,8세기 유럽사에 대한 개관으로서, 삶의 주체자로서의 인간에 대한 인본주의 사상의 개화에 대한 역사철학서로도 기여한다.

신의 섭리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로의 전환은 ‘리스본 대지진’이란 자연 재앙이 절대적인 공여를 한 셈이 된다. 흥미롭고 지적인 책이다.

「 리스본 지진은 단순히 자연적인 지각변동이 아니라 하나의 도덕혁명이었다. 」-포르투칼의 역사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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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결혼했다 - 우크라이나어로 쓴 트랙터의 짧은 역사
마리나 레비츠카 지음, 노진선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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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화려해보이기만 하는 서구 물질 사회의 일원이 되려는 서른여섯 살 우크라이나 여성의 드센 탐욕과 여든네 살 아빠의 삶을 지켜내려는 두 자매와의 에피소드가 인간 욕망의 갈등이라는 외피를 쓰고 시종 웃음을 머금게 하는 기발하고 코믹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작품에 도도히 흐르는 아빠가 쓰는 <우크라이나 어로 쓴 트랙터의 짧은 역사>와 어우러져 부모세대의 삶이 품고 있는 러시아를 비롯한 20세기 동구사회의 참혹한 이데올로기가 빚어낸 고통과 시련이 오늘의 웃지못할 사건과 교차하면서 인간본성과 사회체제를 슬며시 그러나 신랄한 해체를 진행시킨다.

소설은 여든넷 아빠의 무모한 욕망이 만들어낸 영국 중산층 가정의 대소동, 아니 중년의 두 딸과 아빠가 빚어내는 첨예한 갈등과 이해, 그리고 화해가 배꼽 빠지는 에피소드로 이어지는 향연이라 할 정도이다. 열세 살 아들이 딸린 우월한 가슴을 뽐내는 서른여섯 살 우크라이나 여자, ‘발렌티나’가 아빠와 결혼했다. 그녀의 목적은 오직 하나, 돈 많은 영국 노인과 결혼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영국 거주권을 따내는 것이다. 마흔 여덟의 나, 케임브리지에 있는 대학 사회학 강사인 ‘나데즈다’는 이 사악한 결혼의 저의를 아빠에게 설득하지만 여든 넷 노인의 젊은 여성에 대한 욕망을 잠재우지 못한다.
 

온통 절약과 근검, 자식의 뒷바라지만 하다 돌아가신 엄마 ‘루드밀라’의 2년 전 죽음으로 더욱 극단화 된 두 자매, 나데즈다(나디아)와 언니 ‘베라’의 갈등은 어처구니없는 이 황망한 사태(아빠의 결혼)에 공동으로 대처케 된다. 급기야 아빠와 결혼한 이 여자가 아빠의 재산을 거덜 낼 태세이고, 두드려 패기까지 한다. 이 여인네를 몰아내기 위해 자매와 발렌티나가 벌이는 대결은 일상의 해학 그자체가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근원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동구 공산주의 붕괴와 이들의 경제를 장악하는 서구 자본주의의 시장권력과 이에 결탁한 소수의 부패한 정치권력이 피폐해진 국민들의 삶을 한계로 내몰고 있는 상황에서 바로 그 서구의 한 사회에 진입하려는 동구(東歐) 여인의 욕망을 탐욕과 사악함으로만 치부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편은 도덕율의 잣대에서 자신의 이기적 욕망 달성을 위해 어떠한 파렴치와 수단도 용납되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과 같이 본원적인 이데올로기의 충돌이 있다.
 

물론 작가의 재치는 결코 이 문제를 표면적이거나 직접적으로 내 비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언니 베라의 목소리로 20세기 러시아 공산정권하의 참혹한 삶과 독일 수용소에서의 생존을 위한 극한적 삶의 기억들을 통해 공산주의, 파시즘으로 이어지는 이데올로기의 야만적이고 비열한 실체를 더듬고, 그녀의 흡연, 담배에 묻혀진 일화에서 끔찍했던 시대의 심리적 상처를 엿보게 한다.

냉소적인 언니와 현재의 중산층으로서의 삶을 긍정하는 나디아, 이 두 자매의 불가피한 화합이란 전제하에 벌어지는 사사건건의 이해 불일치는 분명 독자를 킥킥거리게 하지만 인간 본성은 물론 사회구조에 대한 시각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간사회에 대한 근원적 성찰이란 주제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러나 작가는 이러한 구분에 대해 서로다른 시대와 환경을 겪었던 이들에 대한 이해로 기우는 듯하다. 

“나는 인간 영혼 밑바닥에 도사리는 어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컸다.”
나디아의 이러한 이해는 다소 환경결정론적 관점으로 비추어질 수 있으나 이는 부모세대와 약자로서의 세계에 대한 수용과 이해의 다른 표현으로 서구의 동구에 대한, 나아가 타자에 대한 관용과 화해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분명 눈물나게 웃기는 이야기의 연속이다. 그러나 주고받는 대화들의 그 일상적 리얼함에 묻어있는 해학에는 풍부한 역사적 통찰과 인간정신의 고찰, 사회적 식견을 담고 있다. 노인의 성문제를 비롯한 노인시설, 사회제도적 문제, 이민문제와 문화적 충돌, 20세기 허위의 이념에 희생된 사람들과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통한 과학의 근대 이성으로서의 자성, 인간본성에 대한 탐색에 이르기까지 오늘의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그럼에도 그 어느 것도 이야기되지 않은 듯이 책을 읽는 내내 웃다보면 짙은 감동과 고귀한 삶의 이해가 가슴에 스며들어 있음을 알게된다. 정말 비상하다. 이 웃기는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에 이처럼 다채로운 지성을 담을 수 있다니 말이다. 훌륭하고 또 훌륭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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