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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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주인공‘나’의 절대적 허기와 추위, 수치심을 위로받던 한 사람에 대한 상실감이 사악하고 메마른 야만적 폭력의 지배에 억압받던 시대상과 병치되어 오늘의 우리들이 앓고 있는, 아니 치유되어야만 하는 심리적 상처에 대한 아픈 글쓰기이다.

너무도 고통스러웠던 사건에 직면했을 때 충분히 슬퍼하고 아파해야 했는데, 그래서 애도하고 위로받는 소통이 있어야 했는데, 그 때는 그리할 수 없었지. “뜬금없이 피었던 엄동설한의 개나리”같았던 ‘서울의 봄’이 신군부세력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던, 그리고 그네들의 탐욕스런 권력을 위해 피비린내 나는 동족의 대학살이 감행되던 시대였으니 개인과 사회 모두 그 집단적 트라우마를 누구도 회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글을 쓸수록 문학이 옳은 것과 희망을 향해 가는 것이라고 말 할 수만은 없는 고통을 느낀다.”는 ‘나’로서, 어떠한 과거의 두려움, 불안감, 수치심이 고스란히 되살아날까 두려워하는 해결되지 않은 상처에 직면하는 것은 엄청난 고통을 수반했으리라.

그러나 그녀는 하얗게 지워지거나, 너무도 생생해지는 과도한 각성을 일으키게 하는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의 그 참혹한 기억에 마주 선다. “나는 글쓰기로 언니에게 도달해보려고 해.”라는 독백은 다름 아닌 바로 떠올리면 너무 아파서 회피해왔던 우리들의 깊은 상처에 정면으로 서는 것이리라.

“문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현실에선 불가능한 것. 금지된 것들을 꿈꿀 수가 있었지.(中略) 문학으로 인해 내가 꿈 꿀 수 있다면 사회도 꿈꿀 수 있는 것 아니야?”하는 그녀의 글쓰기는 우리들 개인, 그리고 사회를 어루만지고 위로해주는 상처 치유로서의 도구가 된다.

그럼에도 너무 가슴이 아프다. 그토록 마주하기 두려웠던 전철역 앞 구로 3공단의 서른일곱개 방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외딴방의 기억으로, 희재 언니에게로 다가가는 그 기억의 길이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으면, 그 때를 쓰는 것이 “다시 목숨을 걸고 거슬러 처음으로 돌아간다. 그래 돌아간다. 지나온 길을 따라. 제 발짝을 더듬으며, 오로지 그 길로.”처럼 생명을 걸어야 할 정도였겠는가.

우린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인 트라우마를 너무 안이하고 소홀하게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나만 당하지 않으면 된다...그러나 우리들, 우리사회가 얼마나 많은 떠올리기 싫은 끔찍한 상처를 받았는지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듯이 행동한다.

동족상잔에서 오랜 군부독재의 비민주적 억압 속에 자행된 국민을 향한 수 없는 폭력들, 60,70년대의 극악하고 파렴치한 경제권력과 기회주의적 정치세력의 시민착취, 쿠데타와 시민학살 등 개인과 사회에 가해진 상처들이 국민 모두를 고통스런 현실에 대해 지각하는 것을 둔하게 하거나 아예 부정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인격이 분리되는 해리현상에 빠져있게 만든 것처럼만 보인다.

그래서 마주하면 고통스러워서인지 불합리와 부조리, 불공정에 나서지 않고 무관심과 수수방관의 안일함으로 외면하고 결국 배타적 생각의 사회만연과 서로 불신하고 위협하는 사회로 치닫기만 하는지 모르겠다.

이처럼 커다란 심리적 상처들은 정면에 맞서지 않으면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기억저편으로 내몬 것 같지만 다시금 생생하게 살아서 두통에 시달리게 한다. 개인과 사회 모두가 앓고 있던 이 집단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치유는 바로 “그 근처(외딴방)엔 얼씬도 하지 않았”던 그 길로 향하는 길이고, 상처를 준 그 사건을 마주하고 충분히 슬퍼하고 아파해야 하는 것이다.‘나’의 ‘글쓰기’로서의 소설,‘외딴방’은 그래서 용기 있는 마주함이고 소통이며, 사랑이고, 따뜻한 치유가 된다.

이러한 마주함으로서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들, 우리사회의 불신과, 결함과, 수치심은 항구적으로 치유되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삼풍백화점의 붕괴와 같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재난, 부조리, 그리고 작금의 국민위에 군림하는 정치권력과 시장권력, 이제는 언론권력까지가 시민에 상처를 아무렇지 자행하는 무참함이 반복 될 수밖에 없다.

“도시로 나오니 하층민이다. 이 모순 속에 이미 큰 오빠가 놓여있고, 이제 열여섯의 나도 그 모순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물론 1979년의 ‘나’에게 다가왔던 세상과 지금이 동일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 불균형이 형태는 달리하지만 여전히 시정되지 못하고 우리들에게 부정적인 심리도식을 고착화시켜온 것만큼은 부인하기 어렵다.

내가 체감하지 못하면, 아니 사회적 약자와 억압받는 시민, 노동자는 다른 이들이라는 인식은 얼마나 허위인가? 외면하고 회피하는 그 상처는 나를 배제하지 않는다. “외사촌의 발랄함이나 나의 우울은 그곳에 살면서도 늘 그곳 사람들과 자신들이 다르다고 생각한 데에서 솟아나왔는지도 모른다.”는 ‘나’의 진솔한 고백은 치유로 한 걸음 다가가게 한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 그 골목이다. 그곳의 전신주이고 구토물이고 여관이다. 그녀는 공장 굴뚝이며 어두운 시장이며 재봉틀이다. 서른일곱 개의 외딴방들이 그녀. 생의 장소다.”그런 희재 언니의 죽음에서 자신의 죄책감을 떠나보내고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하기위해 외딴방을 향하는 길을 걷는 것은 우리들 모두가 선택해야 하는 필연의 길이 된다.

그래서 17년 여 만에 찾은 외딴방은 그녀와 우리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멋진 시작이 된다. 바닷물이 부드럽게 두통을 감싸주고, “몸은 말 할 수 없이 피로한데 정신은 점점 또렷해”지는 것은 피하려고만 했던 그 엄청난 상처가 낫는 과정이다.

열여섯 살 소녀, ‘나’의 시선으로 큰오빠, 셋째오빠, 그리고 엄마와 가족에 대한 연민, 노조와 ‘피로한 푸른 작업복’ 속에 갇힌 공장노동자로서의 시름, 산업체특별학급 학생으로서 키워나가던 작가로서의 꿈이 그 어떠한 치장과 덧댐 없이 소박하지만 시대의 진실을 도도하게 그려내고 있다. 우리 모두가 앓고 있는, 그러나 회피하고만 있는 질병의 문학적 형상화이다. 아프고 아름답고 용기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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