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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온난화에 속지 마라 - 과학과 역사를 통해 파헤친 1,500년 기후 변동주기론
프레드 싱거.데니스 에이버리 지음, 김민정 옮김 / 동아시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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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세기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이산화탄소의 배출로 인한 온실효과가 지구의 기온을 상승시키고 있다는 경고는 이제 정설로 회자되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마치 생태계를 파괴하려는 비윤리적 몽매자로 취급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만들어내는 이산화탄소, 아황산가스, 등등 배기물질이 자연의 섭리를 초과하여 지구 대기의 온도를 상승시키는 주범이란 말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일까?

저자들은 이에 대해 조작된 거짓 증거와 생태계의 공멸이라는 과장된 공포를 조장하여 자신들의 잇속을 차리려는 사이비 과학자들과 환경주의자들, 그리고 정치 권력자들의 터무니없는 왜곡이라 주장하고 있다. 과연 이들의 주장은 순수한 동기에서 출발하는 것일까?

이 저작은 이처럼 온실효과로 인한 지구온난화가 가져올 대재앙을 주장하는 내용들에 대한 반박으로, 지금의 온난한 기후는 지구의 기후 변동주기론에의한 지구온난기의 시기에 불과하다는 증거들로 구성되어있다.
‘기후전쟁’이란 제목으로 시작할 정도로 기존의 온실효과를 혹독하게 비난하고 있다. 그 증거의 기본은 1984년 단스고르와 외슈거가 그린란드에서 채취한 빙하코어(Ice Core)의 분석결과와 태양복사량의 변화와의 상관관계를 통한 1,500년 기후변동주기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곤 이를 뒷받침하는 세계 각 지역에서의 빙하코어, 해저침전물, 나무의 나이테, 고대 철(Iron)먼지, 동굴석순의 분석결과들을 끊임없이 제시하여 기후변동주기의 과학적 타당성을 입증하고 있다.

특히, 저자들의 환경주의자들에 대한 생태계보전의 논리를 공허하고 위선적이라고 까지 비난하는 주장은 인류공존에 대한 마치 새로운 관점을 제안하는 듯하다. 이는 2012년부터 실시될 탄소배출권에 대한 협약인 교토의정서에 대한 정치적 배경과 왜곡된 자료들의 거짓과 조작이라는 비판에서 시작된다. 여기에는 수많은 지질학자, 기후학자 등 과학자들의 연구결과가 망라되어 동원되고, 나아가 역사적 사실들의 기록에 나타난 현상들의 분석에까지 이른다.
온난기와 소빙하기가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있으며, 기원후 1300년에서 1850년까지의 소빙하기가 진행되었으며, 지금의 지구는 온난기에 위치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이산화탄소의 배출이 지구의 온도를 상승시켰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으며, 오늘의 기온현상은 자연적 현상으로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구나 온난기는 과학적 분석이나 역사적 사실에서 오히려 인간과 생태계를 안정화시켰으며, 이산화탄소 농도의 증가는 나무 등 식물의 생장에 유리한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환경주의자들의 화학비료 포기와 유기농 재배는 오히려 저수확으로 인해 경작지의 확대를 위한 산림의 파괴를 증가시키고, 이로 인해 야생동물의 멸종을 야기시키는 궁극의 생태계파괴를 가져올 뿐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저자들의 이러한 주장 이면에는 경제적 논리만이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우연일까? 산림파괴면적을 줄이고 제한된 경작지에서 고도의 수확량을 얻어내기 위해서 유전자변이, 화학비료의 사용은 권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것만이 인류가 생태계를 보전하는 진정한 길이라고 주장한다.

이 저작에는 오늘의 기온상승이 기후변동주기론에 따른 저자들의 주장처럼 지구 온난기의 온도에 지금과 같은 이산화탄소의 배출이 얼마나 영향을 주고 있는지, 아니면 전혀 영향을 미치고 있지 못한지에 대한 어떤 과학적 증거도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 다만, 온실효과를 주장하는 동식물 멸종에 대한 과학적 발표논문의 경고에서 현실적 입증이 없다는 반박적 대응으로 가능성을 아예 차단하고 있을 뿐이다.
OECD국가 중 공업화로 자본주의 대국이 된 미국만은 유일하게 교통의정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표면적이유는 20억 인구를 가진 개발도상국인 중국과 인도가 가입하지 않았다는 이유이며, 속사정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탄소배출의 억제를 위한 비용을 지불할 의사가 없음을 의미한다.

장황하게 기후변동 주기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나, 기후변동주기론이 오늘의 재앙적인 탄소배출의 생태계 영향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생물 멸종에 대한 경고나 자연재해에 대한 예고역시 자연적 현상일 뿐 경험치를 이탈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뿐이다.
이 저자들의 성향은 그래서 이 저작을 읽는데 중요한 동기를 제공한다. 이들의 소속인 허드슨연구소는 네오콘의 지배를 받는 미국의 보수기득계층의 자본으로 움직이는 기관이다. 당연히 미국 기업들의 이익을 위한 연구를 성과로 하는 집단이다. 과연 이들의 논리는 진실을 얼마나 담고 있을까? 온실효과를 주장하는 과학자들을 사이비로 몰아대는 이들이 정녕 사이비는 아닐까?...

미국 이익집단의 전위부대가 되어 몬산토의 대변인처럼 결론을 맺는 이들의 온실효과에 대한 반박의 증거들은 단지 기후변동 주기론만 입증하고 있을 뿐이다. 생태계의 보전, 미래의 인류를 위해서도 재앙을 예견할 수 있을 때 더 이상의 인간의 오만은 자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 저작은 지켜내야만 하는 인간을 포함한 지구생태계의 건강한 복원을 위한 방해세력의 실체를 명확하게 드러낼 뿐이다. 탐욕에 기생한 지성의 타락의 대표적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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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 살림지식총서 76
홍성민 지음 / 살림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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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디외’에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오늘의 사회인식에 유용한 통찰적 시각을 제공하고 있어서라 할 수 있다. 특히 보이지 않는 계급적 위계질서를 만들어내고 고착화 시키는 우리사회의 교육제도, 정치권력, 상징적 폭력으로서의 구별 짓기의 문제점을 분석하는 틀로서 모범적인 사례가 될 수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난해한 부르디외의 연구를 직접 접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작자의 지적처럼 선행되어야 할 이론적 학습 등 많은 배경지식을 요구하기에 그렇다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저작물은 부르디외 학문의 핵심개념을 이해하고, 우리사회의 현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실천적 도구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달성하고 있다.

 

특히, 부르디외의 학문적 개념을 전파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국사회의 독특한 병리현상과 정치변동의 흐름을 분석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안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어, 부르디외가 스스로도 말했듯이 사회투쟁을 위한 도구로서의 기초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 저작은 부르디외의 학문적 핵심개념에 접근하기 전에 그의 사상적, 언어적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전반적인 배경지식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는 아비투스(Habitus), 육체, 표상(도식)의 문제를 우리들 일상의 사례를 통하여 선명하게 이해케 하고, 한국사회의 현실에 접목하여 자성적 비판과 발전적 방향을 제시하는 순서를 취하고 있다.

부르디외의 사상은“인간의 행동은 엄격한 합리성과 계산을 근거로 행해지기 보다는 일정한 기억과 습관 그리고 사회적 전통의 영향을 받는다.”는 곳에서 출발한다. 즉 개인의 인식과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수수한 지식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전수되어온 도식(표상)이며, 문화적 성향을 만들어 내고, 사회적 행위에 일정한 코드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도식의 사회적 기능을 통해서 계급적 질서가 재생산되고 있다는 데 주목하는 것이다.

 

일례로“영화관에 가는 사람과 전이예술을 관람하는 사람들의 문화적 선택의 차이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우연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예술이나 문화작품에 대한 해석 가능성은 사회 내의 계급적 위치에 따라서 길들여져 강요된 것이라는 것이 부르디외의 설명이다.”여기에는 한 사회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지배계급의 취향이 녹아있는 학교를 통한 미학교육 속에 일정하게 틀 지워진 세계관이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고, 또한 예술작품에 대한 독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코드와 암호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한 사회의 지배문화가 피지배문화를 압도한다는 것이다.

사진작품, 음악작품, 소비방식 등을 통한 이러한 문화적 구별짓기는 미적성향이나 취향이라는 일견 순수한 것 뒤에 숨어있으나 이들에는 사회체계와 분리 될 수 없는 계급적 에토스(ethos;관습)가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계급적 구분을 만들어 내거나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억압하는 폭력의 한 양식이 된다.

부르디외는 이러한 차별화(구별짓기)양식의 선행하는 체화단계로서 교육체계에 주목하고 있으며, 오늘의 교육체계에는 경제적 기술주의 논리가 깊게 각인되어, 오히려 학교가 계급적 불평등의 관계를 통하여 개인들을 선별적으로 배제하는 기관이 되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역설적으로“학교의 중립성과 공정성이란 이데올로기 안에서 부르주아의 특수성과 불평등한 계급의 재생산을 은폐”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한국사회에서 선명하다 못해 노골적이기까지 한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 서울대, 세칭 일류대를 지향하는 것은 구별짓기의 극단의 사례라 할 수 있다.

 

교육체계의 변화는 곧 사회구성체의 체질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한국사회의 교육문제는 이러한 계급적 질서의 재생산을 위한 기득권 계층의 견고한 방어벽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구별짓기의 행태는 명품, 강남지역, 외제승용차와 같은 천박한 형태의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하다. 작자는 여기에 더해 한국사회의 고질적 병리현상으로 외국이 아닌 미국의 문화적 기준에 종속되어 있는 교육현장의 실태와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오리엔탈리즘 또는 후기 식민지성 논리의 중첩이라고까지 몰아댄다. 지식을 두고 전개되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기능주의와 사대주의적 풍조는 우리사회의 변하지 않는 기득권계층의 몽매한 욕망의 집착을 보여준다.

이와는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현상이 빈번하게 목격된다. 노동자(근로자), 분명 사회적 피지배계층임에도 선거의 행태는 보수기득계층의 정당에 표를 던지는 것이다. 왜 대중들은 자신들의 위치에 반하는 측에 손을 들어주는 것일까. 마르크스의 허위의식이나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뛰어넘는 것, 바로 “소비의 양식이 일상생활에서 계급의식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중형 아파트와 자동차, 가전제품, 적당한 교외의 휴식, 여행 등 과 같이 노동자들은 자신이 스스로를 피지배자로 인식하기보다는 문화적 혜택을 누리는 계급으로 오인하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우매함 때문이다. 이렇듯 문화적 구별짓기는 교묘하고 은폐되어 자신들이 지배되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상징적 폭력이자 불평등한 계급적 질서의 공고화인 것이다.

 

“모든 개인들은 자신이 점유한 위치에 따라 상이한 행동전략을 보인다.” 부르디외의 새로운 자본개념인 경제자본, 정보자본(문화자본을 포함), 사회자본의 그 내재적 총량에 따른‘장(champ)이론’은 오늘의 계급을 분석하는데 명쾌한 이론으로서, 객관적 계급위치와 개인들의 정치적 의사표현의 불일치에 대한 주관적 계급의 개념에 대한 성찰은 한국의 정치변동의 틀을 설명하는데 주효하며, 앞으로의 우리 정치사회의 변화과정에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오늘의 우리 정치는 형식면에서 민주적이라 말할 수 있지만, 실제에서는 권력과 돈, 그리고 여론조작에 의해서 왜곡된 비민주적 행태를 보인다. 또한 대중들은 일종의 보이지 않는 문화 권력의 그물망에서 평등의 실체를 망각하고 계급적 불평등에 익숙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 부당성과 불의를 당하면 이들 기득계층의 탄탄한 욕망의 연결망이 쳐져있음을 뒤늦게 깨닫고 비분한다.

이 문화적 구별짓기, 상징적 폭력, 터무니없는 계급적 위계질서의 고착화는 불평등과 부정을 당위화한다. 모든 이에게 평등한 기회가 보장되는 교육체제를 위한 근원에서 시작되는 교육의 대개혁은 그래서 사회의 건강성과 진정성을 확보하고, 실질적 민주주의와 정의실현의 중대하고도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 작자인 홍성민 교수와 함께하는 부르디외의 짧은 탐구의 여정은 방대한 그 어느 사회학저술에 못지않는 충실한 지적성취와 냉철한 사회비판의 시선을 제공한다. 그가 주창하는‘문화민주주의’의 보다 내실있는 발전적 성과와 한국사회의 건전한 진보를 위한 기여에 기대와 공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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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란
현기영 지음 / 창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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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높이를 한껏 낮추어 10대의 청소년도 세상을 읽어낼 수 있도록 쓰려한 작가의 고뇌가 느껴진다. 그래서 굳이 유치한 문장과 언어를 고르고 골라 쓰고, 어떠한 비유도 상징도 배제하였으며, 책 읽기를 거부하는 시각화된 대중미디어에 각성된 사람들도 히죽거리며 즐길 수 있을 정도의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통속성을 지향하고 있다.

아마도 70년대 박정희의 유신정권시절과 80년대 전두환의 군사정권시절의 폭압적이고 야만적인 사회였던 이 땅을 이야기하면 오늘의 젊은 세대들은 대개 환상문학의 비현실적 터무니없음과 낭만으로 새기는 모양이다. 이러한 세태에 대한 노 작가의 통찰은 다분히 총천연색의 현란한 수사와 직설화법의 선정적이고 충격적 형상화를 불가피하게 하였으리라.

민주화운동시절 죽음을 희구해야했을 정도의 지독한 고문의 희생자였던 세칭 386세대인 주인공‘허무성’이란 인물의 심리적 외상이 세월의 진행 속에서도 여전히 고문 받던 그 악몽의 기억이 그대로 얼어붙은 채 당시의 신경망에 갇혀 황폐화되어 가는 삶의 궤적을 좇는다.
인간으로서가 아닌 오직 본능만 살아있는 동물로 다루어지는 잔인한 뭇매와 물고문, 죽음의 원초적 공포만이 살아 꿈틀대는 그 느낌을 당하지 않은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어찌 공황장애자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동지들로부터 배신자로 배척당하고, 고문기술자의 조종은 발작적 두려움과 함께 그의 평생을 지배한다.
 

이렇게 행동하는 젊은이들의 희생으로 쟁취된 이 땅의 민주화가 가져온 오늘의 현실은 무엇을 우리에게 남기고 있을까. 밀물처럼 밀려들어온 세계화, 시장만능의 방임적 자유주의, 넘쳐나는 상품의 홍수, 모든 것이 희화되고 쾌락의 대상으로 변질되어야 생존하는 사회로 퇴락한 사회는 더 이상 진지함과 사유를 원하지 않는다.
“정신 연령이 십대수준인 사회”, 그저 TV를 보고 시시덕대고 왜곡된 뉴스에 현혹되어 온통 탐욕과 기득권 유지에만 일념 하는 기회주의적 권력에 부화뇌동하는 그런 유아적 단순성에 자족하는 말 잘 듣는 대중만 양산되고 있다. 자신들이 노예가 되고 있다는 어떠한 자각도 없이.

포르노 아닌 게 없는 세상, 장사꾼의 나라가 되어버린 세상, 경박함과 경쾌함도 구별하지 못하는 우매하지만 교활한 군중의 세상은 더욱 지배하기가 용이해졌다. 소비와 향락에 중독된 인간 군상들에 기대할 것이 남아있기라도 한 것일까?
보수당의 국회의원이 된 가해자인 고문기술자‘김일강’의 인형이 되어버린 피해자‘허무성’은 대학 강단에서, 동료집단에게, 사회의 깨어남을 기대하지만 이미 사고가 마비된 대중들에게 민주와 자유, 정의라는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 타인의 언어가 되어버렸다.
기회주의자여야 하고 속물이 될 것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제 정신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고통만을 남겨줄 뿐이다.

동족을 핍박하던 왜경(倭警)의 앞잡이는 고위관료로, 악랄한 고문기술자는 국회의원으로 이 사회를 조종하고 지배하는 기득권세력으로 여전히 활개치고, 피라미드의 계단 저 꼭대기를 지향하는 욕망의 무리들은 기회주의자가 되어 이들의 원숭이로서 권력의 전위부대로 설쳐댄다. 그리고 젊은 세대는 88만원이란 공포 그득한 세상, 극한적 경쟁시장에서의 생존을 위해 사유와 정의의 힘을 신뢰하지 않는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연민이 더 이상 삶의 미덕이 되지 못한다는 신념이 지배하고,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세상은 온통 거짓과 배신만이 자욱하다. 정의와 불의에 대한 시정을 외치는 인간은 사회 부적응자의 꼬리표가 붙거나 빨갱이, 친북용공세력으로 몰린다. 페미니스트라는 외피를 쓴 여교수조차도 자신의 쾌락을 정당화하고, 지위와 권력의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서 도덕적 정의를 활용할 뿐이다.
세상 어디에도 삶의 이유를 정당화할 가치가 없고, 존엄하다는 인간의 고귀한 그 어떤 것도 발견할 수가 없다.

정말 이렇게 아무것도 멀쩡하게 깨어있는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존재치 않는다. 박정희의 파시즘에 경도된 보수권력의 중심세력이 된 고문기술자에게 바보대중들을 조종할 선전도구로서‘스펙터클’이란 개념에는 권력화 된 시각문화를 조롱하는 작가의 안타까움이 배어있다.
그럼에도 이 비관적이기만 한 세상에 스프레이를 뿌리며 진정 살아있는 정신을 표현하려하는 여학생의 용기와 사랑에서 작은 한줄기 희망의 빛을 발견하려는 왠지 무기력한  행위에서조차 작은 신뢰와 사랑, 피폐해지고 부조리한 우리들 스스로에 대한 자각이 출발 할 수 있다는 기대도 없다면 삶을 무엇으로 지탱할 것인가.

이처럼 우리사회의 망라된 불합리와 불의, 부당성, 진리로서의 가치의 왜곡과 상실에 대해 노작가에게 이 혹독한 독설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한  현실이 너무도 아프게 느껴진다. 한국사회를 향한 이 뼈저린 현상들의 노골적인 드러냄이 욕망의 끈으로 탄탄하게 결속된 기득권자들에게, 그리고 이기주의적 쾌락에 도취되어 노예가 된 줄도 모르는 시민들에게 진정 자성을 위한 작은 시작이 되게 할 수 있을 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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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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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 할 수 없는 약자를 무참히 유린하고 학대해온 자를 처벌 하지 않는 사회시스템의 그 추악한 생명력에 무감각해지고 또한 그 시스템에 어떠한 형식으로든 참여하지 않으면 배척되는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기만 한 것인가? 작품은 시스템의 그 견고한 벽을 향한 작은 희망과 정의의 불꽃을 발견하려 한다.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그 네트웍의 구성들에게 호소하는 것은 온통 욕망의 이해관계로 얽혀있는 그들에게는 어쩜 공허한 울림일 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장애자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하는 특수교육시설, 보호시설에서 이들 시설의 운영주체인 이사장, 원장, 교장 등이 자신을 방어 할 수 없는 장애자들을 성적추행과 노동의 도구로 짓밟는 사건이 툭하면 매스컴을 장식하는 것을 목격하곤 한다. 그때마다 어리석은 대중을 만족시킬 선정적이고 표피적인 언론의 일회성 정보를 보고 혀를 한번 차대는 것과 같이 짧은 연민과 공감을 보낸 것으로 자신의 정의로움에 만족하는 것이 고작이다.
왜 우린 그 부당하고 부조리하며 파렴치한 사건의 진실에 주목하지 않고, 피해자인 그 취약한 사람들을 위해 잘못된 시스템의 시정을 지속적으로 감시하지 않는 것일까.

작품은 청각장애아이자 지체장애자들의 학교이자 기숙원인‘자애원’의 교장, 행정실장, 교사가 이들 연약한 아이들을 대상으로 상습적으로 자행하는 강간, 폭력, 협박, 고문 의 참을 수 없는 추행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취급되는가하는 우리사회, 아니 인간사회의 비굴하고 야만적이며, 교활한 구조를 통해 적나라하게 해체하고 있다.
가장으로 가족의 부양이란 피할 수 없는 책임으로 자애원의 기간제 교사로 부임하게 되는‘강인호’라는 인물이 겪게 되는 갈등은 바로 우리들이 생활인으로서의 부담과 사회정의를 위한 행동에서의 가치선택이란 어려운 딜레마를 성찰하게 한다.

교사들의 고용과 해고라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는 이사장이자 교장, 그리고 행정실장이라는 두 형제의 불의를 외면하는 교사들의 행동에서, 지역의 유지로서 행세하는 이들 형제를 비호하는 경찰과 사법조직에서, 그리고 관할 교육청과 시청 등 감시기관, 교회조직에 이르기 까지 욕망으로 연결된 네트웍은 사회적 불의와 인간의 사악함이 얼마나 공고한 난공불락의 성벽인가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아이의 성적피해를 고소하지만 늑장을 부리는 경찰, 결국은 지역인권센터, 성폭력상담센터라는 시민조직이 나서야 하는 불온한 사회, 신뢰와 정의가 존재치 않는 사회. 약자가 피해를, 불의의 시정을 요구할 공적 기관은 이 땅에서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이 작품의 본질적 무대가 되는 재판과정에서 우리는 바로 이러한 기득권 계층의 공고한 연결망만 확인하게 된다. 가진 것 없는 자들의 돈과 물질에 대한 취약함, 이를 이용하는 파렴치한 기득권자는 용서 받을 수 없는 범죄행위조차 맥없이 허물어뜨린다. 전관예우를 받는 변호사를 선임하고, 기득권자편에서서 위증을 하는 의사, 지역사회의 눈치를 보는 판사, 교회의 이익을 위해 사회정의를 호도하는 기업화된 종교집단까지.
이제 법정은 사회적 강자에게 합법적 면죄부를 발부하는 형식적 기관으로서만 작동한다. 소수의 사악한 이들 기득권 계층의 악행은 그렇다면 어떻게 처단할 수 있을까? 이 부당한 사회시스템을 어떻게 정의로운 시스템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까?

이 견고한 네트웍은 스스로 변하지 않는다. 달콤한 욕망의 쾌락에 사로잡힌 이들 인간군상에 일회적 맞섬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님을 이미 일상에서 수없이 마주하고 있지 않은가. ‘소위 실체적 진실’이자 너무도 당연하고 상식적인 사회정의라는 것이 무참히 짓밟히고 외면당하는 것이 현실이다. ‘나’, 바로 우리 개인들이 먼저 변해야 한다. 불의에 저항하고, 악행의 시정을 부단히 요구하며, 정의를 위한 이웃과 약자들, 타인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과 신뢰의 시선을 거두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 작품은 내내 화가 나고, 파렴치함에 치가 떨려오고, 불의에 영합하는 이 사회에 욕지거리가 터져 나오게 하지만, 어디선가 작은 희망의 불씨들이 항상 피어오르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고귀한 가치를 실현하려는 사람들이 존재함을 일깨운다.

이 땅의 연두, 유리, 민수들이 더 이상 다치지 않기를, 그리고 서유진 같은 정의를 지켜내려 하는 사람들, 이들을 바라보고 응원할 수 있게 된 강인호 같은 이들의 존재가 있음이 위로가 된다. 타인에 대한 우리들의 작은 연민이 신뢰하는 사회, 정의로운 사회의 밑거름이 될 터이다. 대중에게 또 하나의 사회적 통찰과 도덕적 양심의 각성을 선사하는 빼어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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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위의 작업실>을 리뷰해주세요
지구 위의 작업실
김갑수 지음, 김상민 그림, 김선규 사진 / 푸른숲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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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하나 없는 책도 팔아먹을 수 있을 정도로 미디어의 힘이 강함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어느 건물 지하에 자기만의 공간을 마련하곤 제 나름의 허섭한 이유를 갖다 댄 잡기인데, 어쨌건 작자의 세상 네트웍이 인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그 흔한 노동을 피하고 유유(悠悠)할 수 있으니 그 또한 능력이다.

 

그의 자기만의 지하 공간 이름이 뭐라 지어졌건, 커피마니아로서, 음반을 수집하고 클래식에 심취하건 극히 개인 취향의 독백이다. 이 독백이 활자화 되어 재화로 변화되는 자본주의 흐름에 기생하는 것 또한 세상 살아가는 기술이다.

결국 출판이란 무수한 어떤 이유들이 있겠으나 타인과 공감(비판적 공감을 포함)을 갖겠다는 의지인데, 내 얘기만 하면 되지 너 네들이 무슨 상관이야 하는 데에는 그의 말처럼 말 섞기도 싫다.

 

내용 여기저기에 자신의 솔직한 표현이라고 열거한 것이 진정한 자기대면의 결과인지는 모르겠으나, “내용하나 없는 인간”, “떠돌이, 날라리, 사이비, 그리고 얼치기”의 잡설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 작자의 말마따나 “키치는 가짜다.” 가짜가 보편적 진리의 측면에서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정성이 보이지 않을 때 가짜는 더 추해보이고 천하며 경박한 것이다. 키치를 비난 할 처지에 있긴 한 건가?

그가 조우석의 『굿바이 클래식』에 보내는 거친 부정의 의사와 같이, 이 시시콜콜한 잡 글 역시 어떤 의견도 굳이 회피하게 만든다.

 

인간 누구나 “타자의 신체가 주는 위협”이 짜증나고, 자기만의 공간, 자기연민을 핥아댄다. 그것을 이야기한다고 글이 되고 사유가 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 제멋에 살면 된다. 그런데 이 걸 팔아먹는 양심은 좀 아닌 것 아닌가? 아무튼 ‘버네이스’의 ‘Propaganda’이래 선전의 위선이 지배하는 세상 덕을 톡톡히 보는 자들을 탓해 무어하겠는가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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