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 살림지식총서 76
홍성민 지음 / 살림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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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디외’에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오늘의 사회인식에 유용한 통찰적 시각을 제공하고 있어서라 할 수 있다. 특히 보이지 않는 계급적 위계질서를 만들어내고 고착화 시키는 우리사회의 교육제도, 정치권력, 상징적 폭력으로서의 구별 짓기의 문제점을 분석하는 틀로서 모범적인 사례가 될 수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난해한 부르디외의 연구를 직접 접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작자의 지적처럼 선행되어야 할 이론적 학습 등 많은 배경지식을 요구하기에 그렇다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저작물은 부르디외 학문의 핵심개념을 이해하고, 우리사회의 현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실천적 도구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달성하고 있다.

 

특히, 부르디외의 학문적 개념을 전파하는데 그치지 않고 한국사회의 독특한 병리현상과 정치변동의 흐름을 분석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안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어, 부르디외가 스스로도 말했듯이 사회투쟁을 위한 도구로서의 기초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 저작은 부르디외의 학문적 핵심개념에 접근하기 전에 그의 사상적, 언어적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전반적인 배경지식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는 아비투스(Habitus), 육체, 표상(도식)의 문제를 우리들 일상의 사례를 통하여 선명하게 이해케 하고, 한국사회의 현실에 접목하여 자성적 비판과 발전적 방향을 제시하는 순서를 취하고 있다.

부르디외의 사상은“인간의 행동은 엄격한 합리성과 계산을 근거로 행해지기 보다는 일정한 기억과 습관 그리고 사회적 전통의 영향을 받는다.”는 곳에서 출발한다. 즉 개인의 인식과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수수한 지식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전수되어온 도식(표상)이며, 문화적 성향을 만들어 내고, 사회적 행위에 일정한 코드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도식의 사회적 기능을 통해서 계급적 질서가 재생산되고 있다는 데 주목하는 것이다.

 

일례로“영화관에 가는 사람과 전이예술을 관람하는 사람들의 문화적 선택의 차이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우연적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예술이나 문화작품에 대한 해석 가능성은 사회 내의 계급적 위치에 따라서 길들여져 강요된 것이라는 것이 부르디외의 설명이다.”여기에는 한 사회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한 지배계급의 취향이 녹아있는 학교를 통한 미학교육 속에 일정하게 틀 지워진 세계관이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고, 또한 예술작품에 대한 독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코드와 암호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한 사회의 지배문화가 피지배문화를 압도한다는 것이다.

사진작품, 음악작품, 소비방식 등을 통한 이러한 문화적 구별짓기는 미적성향이나 취향이라는 일견 순수한 것 뒤에 숨어있으나 이들에는 사회체계와 분리 될 수 없는 계급적 에토스(ethos;관습)가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계급적 구분을 만들어 내거나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억압하는 폭력의 한 양식이 된다.

부르디외는 이러한 차별화(구별짓기)양식의 선행하는 체화단계로서 교육체계에 주목하고 있으며, 오늘의 교육체계에는 경제적 기술주의 논리가 깊게 각인되어, 오히려 학교가 계급적 불평등의 관계를 통하여 개인들을 선별적으로 배제하는 기관이 되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역설적으로“학교의 중립성과 공정성이란 이데올로기 안에서 부르주아의 특수성과 불평등한 계급의 재생산을 은폐”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한국사회에서 선명하다 못해 노골적이기까지 한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 서울대, 세칭 일류대를 지향하는 것은 구별짓기의 극단의 사례라 할 수 있다.

 

교육체계의 변화는 곧 사회구성체의 체질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한국사회의 교육문제는 이러한 계급적 질서의 재생산을 위한 기득권 계층의 견고한 방어벽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구별짓기의 행태는 명품, 강남지역, 외제승용차와 같은 천박한 형태의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하다. 작자는 여기에 더해 한국사회의 고질적 병리현상으로 외국이 아닌 미국의 문화적 기준에 종속되어 있는 교육현장의 실태와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오리엔탈리즘 또는 후기 식민지성 논리의 중첩이라고까지 몰아댄다. 지식을 두고 전개되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기능주의와 사대주의적 풍조는 우리사회의 변하지 않는 기득권계층의 몽매한 욕망의 집착을 보여준다.

이와는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현상이 빈번하게 목격된다. 노동자(근로자), 분명 사회적 피지배계층임에도 선거의 행태는 보수기득계층의 정당에 표를 던지는 것이다. 왜 대중들은 자신들의 위치에 반하는 측에 손을 들어주는 것일까. 마르크스의 허위의식이나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뛰어넘는 것, 바로 “소비의 양식이 일상생활에서 계급의식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중형 아파트와 자동차, 가전제품, 적당한 교외의 휴식, 여행 등 과 같이 노동자들은 자신이 스스로를 피지배자로 인식하기보다는 문화적 혜택을 누리는 계급으로 오인하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우매함 때문이다. 이렇듯 문화적 구별짓기는 교묘하고 은폐되어 자신들이 지배되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상징적 폭력이자 불평등한 계급적 질서의 공고화인 것이다.

 

“모든 개인들은 자신이 점유한 위치에 따라 상이한 행동전략을 보인다.” 부르디외의 새로운 자본개념인 경제자본, 정보자본(문화자본을 포함), 사회자본의 그 내재적 총량에 따른‘장(champ)이론’은 오늘의 계급을 분석하는데 명쾌한 이론으로서, 객관적 계급위치와 개인들의 정치적 의사표현의 불일치에 대한 주관적 계급의 개념에 대한 성찰은 한국의 정치변동의 틀을 설명하는데 주효하며, 앞으로의 우리 정치사회의 변화과정에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오늘의 우리 정치는 형식면에서 민주적이라 말할 수 있지만, 실제에서는 권력과 돈, 그리고 여론조작에 의해서 왜곡된 비민주적 행태를 보인다. 또한 대중들은 일종의 보이지 않는 문화 권력의 그물망에서 평등의 실체를 망각하고 계급적 불평등에 익숙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 부당성과 불의를 당하면 이들 기득계층의 탄탄한 욕망의 연결망이 쳐져있음을 뒤늦게 깨닫고 비분한다.

이 문화적 구별짓기, 상징적 폭력, 터무니없는 계급적 위계질서의 고착화는 불평등과 부정을 당위화한다. 모든 이에게 평등한 기회가 보장되는 교육체제를 위한 근원에서 시작되는 교육의 대개혁은 그래서 사회의 건강성과 진정성을 확보하고, 실질적 민주주의와 정의실현의 중대하고도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 작자인 홍성민 교수와 함께하는 부르디외의 짧은 탐구의 여정은 방대한 그 어느 사회학저술에 못지않는 충실한 지적성취와 냉철한 사회비판의 시선을 제공한다. 그가 주창하는‘문화민주주의’의 보다 내실있는 발전적 성과와 한국사회의 건전한 진보를 위한 기여에 기대와 공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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