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스바루>를 읽고 리뷰해주세요.
굿바이, 스바루 - 뉴욕 촌놈의 좌충우돌 에코 농장 프로젝트
덕 파인 지음, 김선형 옮김 / 사계절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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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뉴욕의 도시생활에 익숙한 서른여섯 살 청년(?)이 미국 남부 뉴멕시코 사막지대에서 친환경적 녹색 삶을 일구어 나가는 좌충우돌 진솔한 생태 적응기이다.  짐짓 체하지 않는 이 젊은이의 미숙함과 실수, 그야말로 삶의 진정함이 배어있는 상처투성이의 체험에서 배우는 살아있는 생태 모험담은 슬며시 미소 짓게 하는 친근함이 있다.

이론과 목소리 높여 외치는 그 어떤 생태계의 보존과 복원, 탄소 저감과 온난화에 대한 위기의 언어보다 더욱 깊은 공감과 참여에 대한 희구를 불러일으킨다. 아마 우리네 같은 도시 촌놈이 접하게 될 그 자연과의 친화를 위한 일상이 동네 친구와의 허물없이 전달해주는 영웅담처럼 펼쳐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2년간의 기자 생활을 같이 해온 무고장의 내구력 강한 그의 애마, 일본산 SUV 스바루를 떠나보내는 에피소드에서 시작되는, 그의 독립적인 녹색 삶을 살아가기 위한 착수부터 사뭇 진지하고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유쾌하게 풀어 헤친다.
디지털 시대를 누리며 생활하는 오늘의 우리들이 녹색삶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의문에서, 이를 입증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게 되었다는 저자의 당찬 의욕이 어느덧 기름이 덕지덕지 묻은 우리네의 마음 저 깊은 곳에 숨겨진 꿈을 다시금 끄집어내게 한다.

우유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의 미래 조달원으로서 구입한 한 쌍의 염소를 자신의 새로운 집, ‘펑키 뷰트 목장’으로 데리고 오는 그 우여곡절과 병든 나탈리(암 염소)의 긴급 치료과정은 그의 탄소 줄이기 첫 작업이 순탄치 않은 고난의 서막임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이 짜증스러울 만한 일련의 과정에서 행복을 느끼고, 서서히 녹색의 환경에 일체화 되어가는 기쁨을 보는 것은 저자 ‘덕 파인’의 글재주 일 터이다.
수천 KM를 날아온 수입 과일과 곡물, 축산품등이 사용한 엄청난 탄소덩어리를 실제의 삶에서 줄이고, 궁극에는 하나하나 친환경의 녹색산물로 대체해 나가는 일화들에서 겪게 되는 숫한 어려움과 난제들에도 불구하고 즐거움이 연속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가 이웃 생태주의자 ‘허비’에게서 발견한 “낙관주의와 훌륭한 유머감각”을 그에게서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일 터이다.

화석연료를 뿜어내는 자동차 대신에 폐식용유로 굴러가는 디젤트럭의 구입과 개조, 그리고 식용유를 구하러 다니는 모습에서 천진스런 순결함을 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보탠다. 그리곤 수탉 한 마리와 여덟 마리의 암탉을 치고, 매일 수확하는 달걀들, 몰래 습격하는 코요테의 습격으로 비명에 가는 그의 영양원인 닭들에 대한 비가(悲歌)^^, 지하에서 끌어올린 식수 탱크가 넘쳐흘러 만들어진 물웅덩이로 인한 사막의 방울뱀 공포, 골프공만한 우박이 망쳐 논 농장, 그리고 잡초와의 시름, 야생 동물들과 서식지와 생존에 걸친 싸움, 그리고 화해를 밑거름으로 자연화 되어가는 인간의 모습이 내내 정겹기만 하다.

어느덧 자동차를 탈 일이 없어지고, 자급자족하는 생활에 이른 ‘덕 파인’과 그의 사랑스런 연인 ‘미셸’, 그리고 그들의 곁을 뛰어다니는 견공 세이디, 이젠 가족을 늘렸을 염소 나탈리에게서 젖을 짜내는 평화로운 전경이 눈에 그려진다. “자애로운 사기꾼 대자연”을 마주하면서 일궈나가는 녹색의 삶을 위한 걸음마다 농부가 된 ‘덕 파인’의 징징대는 소리가 들려오는가 하면, 염소의 매애애 소리, 닭들의 회치는 소리, 그리고 코에 꽃가루를 묻힌 채로 집에 들어오는 반려자 미셸의 달빛 향기가 느껴진다.

녹색 삶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정말 해야 할 일들이 무척이나 많다는 느낌이다, 또한 훨씬 참여적인 작업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피카소 작품을 사는 <월튼네 가족>”같은 위선적인 자연의 삶이 아니라 실천하는 자연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지금부터 ‘7 세대 이후를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 아닌가하고 묻는다.  친환경적 삶을 영유하는 일을 다음 세대가 반드시 숙고하고 이해하게 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저자의 펑키 뷰트 목장에서의 작은 목소리가 진중한 진실의 언어가 되어 우리에게 들려온다.
신나서 들려주는 흥겨움 넘치는 자연에서의 먹고사는 모험담이 시정(詩情)이 뚝뚝 묻어나는 글로 우리들을 자연의 매력에 흠뻑 도취하게 만든다. 지속 가능한 녹색 삶의 정취가 기분 좋게 기술되어 있는 빼어난 녹색환경 걸작 에세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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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추억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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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은 자리에서 쉼 없이 내처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흡입력이 강한 작품이다. 욕망에 가려진 음울한 현실세계와 심리적 외상으로 이중적 정체성에 시달리는 인간 군상들의 두려움과 고통이 빚어내는 선과 악의 실체에 대한 연민의 시선이 아닐까. 탐욕과 악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인공도시, ‘뉴아일랜드’, 그리고 퇴락과 소외의 지역이 된 침니랜드라는 대조되는 세계, 트라우마의 탁월한 메타포,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스릴과 서스펜스가 조화를 이루어 지성의 환기와 감성을 동시에 충족시켜주는 크라임 스릴러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이들 두 세계의 물리적 공간을 구분하는 것은 좁은 해협이지만, 상시적으로 뿌옇게 드리운 안개 또한 서로를 분리하는 장치가 된다. 욕망과 이면의 추함, 그 사악함을 가려주는 천혜의 은폐물(隱蔽物)로서 완벽한 상징성을 확보한다. “이 도시의 사람들은 두 얼굴을 지녔어요. 어둠속에서 죄를 짓고 사람을 죽이지만 안개가 사라지면 해협의 물결처럼 아름답게 보이죠. ~ 어떤 것이 진짜 모습일까요?”이처럼 선(善)과 악(惡)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주인공 ‘매코이’의 상태와 상치(相値)되어 정신적 분열을 앓고 있는 현대사회 모습의 다른 표현처럼 느껴진다.

마주하기 두려운 고통의 기억에 시달리는 매코이를 보면서, 문득 이러한 생각에 이른다. 도저히 참아낼 수 없는 아픔이 나의 몸을 누비면, 극한의 고통이 정신을 짓누르면,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까. 아마 도저히 피할 수 없는 통증이라면 정신 줄을 내 놓고 기절해 버릴 것이다. 기절도 할 수 없는 지속되는 아픔일 경우에는? 그럼 그 고통을 받는 것은 내가 아니라고, 다른 사람이 받는 것이라고 내 인격을 분리할 수 있다면 분리해 버릴 것이다. 그 고통을 받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녀석이라고.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일 것이며, 이러한 순간 인간이 필사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대응전략이 될 것이다.

과거의 아픔과 자기와의 관계를 송두리째 거부하는 사람, 그래서 아픔이 주체와 연결되지 못한 채 주체가 될 만한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만들어 내야만 했던 그 사람에게 우린 악인이라 할 수 있을까? 안개 속에 가려진 두 얼굴, 아니 그 분열 된 초상은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지 않을까? 연쇄살인을 정당화하고, 살인범을 변론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또한 현대인들 모두를 몰아 댈 생각도 없다. 그러나 고통을 가한 주체에서 우리들과 우리들 사회의 책임을 배제할 수 있을까? 유별나게 특별한 놈이 저지른 정신질환적 범죄일 뿐이라고.

사실 이 작품은 이러한 곤혹스런 주제의식에 사로잡힐 만큼 느슨하지 않다. 시간적, 공간적 변화가 엄청난 속도감을 느끼게 한다. 게다가 심리분석관 ‘라일라’의 배치는 감성적 배려와 사건 전개의 세밀함 등에 관계하면서 보다 집중적인 게임으로 유도한다. 또한 작품 초입부터 퍼즐이 게재된 신문과 같은 암시, 매코이의 고양이‘애들레이드’, 왼손잡이에 대한 편견을 넌지시 던져 복선여부를 혼동하게하거나,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진행은 어느덧 나를, 뇌의 부신피질에서 마구 분비되는 에피네프린으로 교감신경이 극도로 흥분되어 백 미터를 전력 질주한 선수처럼 헐떡이게 할 정도이다.

작품의 배경인 두 세계와 이중 정체성에 시달리는 개인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궁극으로 지향되어야 할 타자에 대한 연민, 신뢰, 사랑의 지고한 덕목이란 주제를 유연하게 표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장르적 요소를 통한 재미의 배가로 한국문학에서 장르와 주류의 경계에선 새로운 장을 개척하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진정 소설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갈채를 보내고 싶다. 『바람의 화원』에 이은‘이정명’의 또 하나의 역작(力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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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페리온 을유세계문학전집 11
프리드리히 휠덜린 지음, 장영태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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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페리온』을 읽어나가는데 있어 오늘의 시각만으로 접근해서는 즐거움을 만끽하기 어렵다. 동시대(18세기 말)의 그 어느 작품보다 당 시대 조류에 대한 선행적 이해가 중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바로 계몽주의의 이성 만능의 시대에 대한 강한 염증과 반발, 그리고 프로이센(오늘의 독일) 절대주의에 대한 저항의 시기라는 측면이다. 이 시기를 일반적으로‘질풍노도(疾風怒濤' strum und drang)의 시대' 라 하며, 이의 독특한 특성이 이 작품의 중심 사상이라 할 수 있기에 그렇다.

작중 화자(話者)이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휘페리온(Hyperion)'의 정신적 구조는 이 질풍노도의 정신적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하여도 그릇된 이해는 아닐 것이다. 작품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그리스’와 같은 최초와 시원적 야성의 힘에 대한 동경, 충동이나 감정, 상상, 직관을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수단으로 보는 점, 정열, 사회비판, 자연의 동경 등 감상주의 태도, 또한 자신을 능가하려는 반인, 즉 신적 충동을 지닌 인간, 기존의 일신론적 신학관의 거부와 개인의 자의식과 범신론적인 종교에 대한 태도는 18세기중후반기 독일 젊은이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은‘휘페리온’의 삶의 여정에 대한 회고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어린 시절의 스승‘아다마스’를 통한 삶과 죽음, 인간과 자연에 대한 배움으로부터 시작하여, 청년기의 스승이자 친구인‘알라반다’와의 우정과 연인‘디오티마’와의 사랑을 통한 정신의 아름다움과 숭고함, 예술과 종교, 범신론적으로 신격화 된 자연의 정신에서 비롯한 만물의 평등과 존재의 불변성에 대한 깨달음의 과정을 담고 있다. 특히,‘총체-자연’이라는 만물에 신성을 부여하는 범신론적 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불교의 윤회사상과 닮은, 존재의 불가변성에 믿음이 아름다움과 사랑과 결합하여 독특한 삶의 태도를 형성하는 것은 이 작품의 주된 관점이라 할 수 있겠다.

전쟁에 참여한‘휘페리온’의 우유부단한 이별의 편지는 사랑하는 여인‘디오티마’의 죽음을 가져오는데, 이에 대한 휘페리온의 스토아적인 태도는 사실 당혹스러움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죽음’ 즉 내면적인 기쁨 가운데서 죽는 것은 모든 것을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고귀한 정신이라는 이해를 보이는 것이다. 전쟁에서 죽음을 암시한 연인의 편지를 보고, 존재의 불가변성에 경도되어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 위해 죽음을 택한 디오티마에 보내는 이 감정은 “내가 위대하다고 존중했던 내 청춘의 생각들, 그 사상들이 나의 디오티마를 독살했던 것이라네!”하는 믿음이 실리지 않은 독백처럼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아무래도 시대의 엄청난 괴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서구인들의 감성과 정체성에 그리 공감하기에 어려운 것은 이 작품도 다르지 않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 제도, 인본주의적 태도, 그네들의 인간의 형상을 한 신의 모습, 신적 아름다움과 극단으로 치닫지 않는 절제의 미등 예술에 대한 찬양을 근간으로 하고 있어, 격심한 문화적 회의와 이질감을 일으키게 하는 것도 이 작품에 쉽게 동화되지 못하게 하는 방해요소가 되기도 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은 물론 호메로스와 그리스 신화, 독일의 화가‘빙켈만’, 작품의 배경이 된 그리스에 대한 묘사의 지침이 된‘리처드 챈들러’의 『소아시아와 그리스 여행』, 그리고 순수한 자연 속으로의 목가적 생활의 요구를 한 계몽주의 사상가‘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는 이 작품의 실질적 문장을 구성하고 있다하여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독해를 고달프게 한다.

“아! 아! 모든 것은 사랑의 복된 유희인 것을! ~ 서로 치켜세우는 말, 배려, 섬세한 반응, 엄격함과 관용 ~ 그 무한한 신뢰”와 같이 사랑에 빠진 휘페리온의 사랑 찬가처럼, 감정의 정당성에 대한 절대적인 옹호와 자유와 사랑 예찬, 자연인을 위한 자연적 질서의 추구를 하던 당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루소’는 완벽한 모델이었던 모양이다. 조화와 대립의 보편적인 화해라는 평화의 관념, 외적 결핍의 체험으로부터의 이상의 표상, 사랑의 자연스러움과 우정의 정신적-이상적 본질의 구분 등, 루소의 문학적 변주곡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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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남자 차이의 구축 과학과 사회 8
프랑수아즈 에리티에 외 11명 지음, 배영란 옮김 / 알마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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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와 남자, 그 차이에 대한 규명을 위해 이 저술처럼 망라된 연구부문의 논의를 보는 것은 이례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유전학, 인류학, 신경생물학, 인구통계학, 진화생태학, 분자생물학, 사회인류학, 인지심리학, 정신의학 등 자연과학과 인문사회학분야의 석학들이 쏟아내는 성(性) 구분론에 대한 진실의 과학적 탐구와 사회적 조명은 인류사회에 새로운 관점의 성을, 함께 살아가는 평등으로서의 성을 이야기한다.


바로 이 순간에도 우리는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고, 그래서 남자와 여자의 기능적 역할은 같지 않으며, 결코 평등한 관계일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이러한 불평등 관계의 명분으로 생물학적 특성에서 그 이유를 찾으려 하고, 이미 오류임이 입증된 엉터리 과학이나 전혀 과학적으로 타당치 않은 주장들이 대중을 기만하고 확대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 같은 자연주의적 환상에 기댄 논리에는 여자의 신체적 취약성, 아이의 양육 등 모성적 한계, 호르몬의 작용, 뇌 크기의 차이, 좌뇌와 우뇌의 남녀 차이 등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 불평등의 근원이라고 전제하는 이야기들은 과학적 진실일까. 성별에 따른 여자와 남자의 차이는 유전자에 이미 프로그래밍 되어있다는 결정론적 시각은 옳은 것일까.

이 남성 중심의 우월적 논리들은 여지없이 과학과 사회학적 증거들에 의해 전복되고 만다. 인간사회는 꾸준히 남녀 성별의 서열화라는 동일한 구조적 특성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의 사회에서  성 정체성과 성별 사이의 문제가 세계의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 정치 질서를 재편하는 중요한 '결절점(Nodal Point)'에 이르러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전통적인 남성의 영역에 여성이 진입하고, 남성의 역할과 여성의 역할이란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전환자, 동성애자 등은 이분법적 성별 기능과 역할을 더 이상 가능치 않게 하고 있다.

이렇듯 사회의 궁극적 변화는 물론, 성에 대한 과학적 진실에도 불구하고 성(性)사이의 불평등, 다시 말해 성별 관계가 순전히 유기체적 요구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운명을 주관하는 자연적 차이라는 망상과 같은 구닥다리 모델에 집착하는 것은, 인류 역사이래 남성의 지배적 습관을 청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일 게다. 그러나 그 차이를 만들고 있다고 믿던 과학적 내용의 진실을 이해하는 것은 모든 인간(남성, 여성, 중성)이 함께 살아가는 평등의 즐거움과 타자에 대한 배려와 사랑은 물론 인류의 지속성을 위해서도 더없이 중대한 지식이 될 것이다.

대중적으로 늘 접하는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에 대한 속설인 남자의 뇌가 여자의 뇌보다 크기에 남자가 여자보다 지적우위에 있다는 얘기는 한 마디로 터무니없는 이야기라는 점이다. 뇌의 크기(용적)와 지적 능력 사이에는 그 어떤 상관관계도 없음이 이미 밝혀져 있다. 뉴런 사이가 얼마나 잘 연결되어 있느냐의 문제이며, 인간 개인마다 자신의 뉴런을 활성화 시키는 고유의 방법을 발달시키는 전략의 문제임이 규명되어있다. 즉 시냅스라는 뉴런의 연결들은 단지 태어날 때 10%만 이어져 있을 뿐이며, 나머지 90%는 살아가는 동안 서서히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류의 속설 중 좌뇌와 우뇌의 기능별 차이를 거론하며 여자는 좌뇌를 남자는 우뇌를, 그래서여자는 언어능력이, 남자는 공간지각능력이 발달했다는 웃기는 얘기도 있다. 영상의학기술의 발달은 이러한 단순하기 그지없는 엉터리 과학 세계의 오류를 시정케 해준다.  뇌 기능은 한 쪽 뇌만으로 그 기능이 확보되지 않으며, 서로 망처럼 연결된 영역들에 의해 그 기능이 수행됨이 확인되고 있으며, 언어와 공간지각능력의 차이는 남녀의 차이가 아니라 개체간의 무수한 편차가 존재하는 극히 일반적 상황을 왜곡한데 불과한 것일 뿐이다.

특히 이 저술에서 가장 관심을 주목시킨 부분으로, ‘성 결정 유전학’과 성 정체성에 대한 것인데, “성 결정 단계와 성 분화 단계의 구분은 여전히 매우 자의적이다.”라는 것이며, 여자의 성 결정 유전학에 대해서 별로 알려진 게 없다는 것이다. 결국 배아가 6~7주 정도에 성별이 결정됨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의 성별 구분이란 것이 작금의 인간사회에서 구분하는 여자와 남자의 기능과 역할과 관련을 갖지 못한다는 의미로 해석 될 수 있다. 더구나 남성의 염색체인 ‘XY’에서 여성은 없는 ‘Y'염색체에 의미를 부여하지만 ’퇴화된 ‘X’ 염색체‘의 잔재에 불과하며, 이것이 성의 표현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오늘의 과학을 접하면 우리들의 성 구분론이 얼마나 자의적으로 진행된 것인가를 깨닫게 한다.

이에 더해 영아 및 유아들이 보이는 남자 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의 차이는 “부모의 성적 특성, 특히 성 본능(억압된 유년기 성 본능)이 젠더의 지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며, “부모 및 부모 이외의 성인이 여아 및 남아에게 대하는 태도나 표현, 기대 등이 매우 다르다는” 분명한 사실로 규명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남성과 여성이라는 젠더(gender) - 주체가 스스로 남자 또는 여자로 느끼며 그에 따라 처신하는 심리학적 행동의 구분 - 는 타고난 성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기대치인 개인 및 집단의 생각 속에서 구축된다는 것이다. 정말 센세이셔널하지 않은가!

또한 세 가지 차원에서 정의되는 성, 즉 Y염색체의 유무에 따른 유전적 차원과 정소와 난소로 구별되는 생식선의 차원, 그리고 외부 생식기관(페니스와 음부)의 양상은 항상 일치하지만은 않는 다는 사실 역시 인간의 성별 차이에 대한 편견에 다시한번 충격을 준다.  극단적인 표현을 빌면 XY염색체를 가진다해서 페니스를 갖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신체는 여자이지만 Y염색체를 지니고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며, 이처럼 유전적인 성과 생식선, 표현형 성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 성 정체성의 구축은 양육환경과 충돌 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케도 된다.

이외에도 이 저술은 피의 상징적인 중첩을 피하는 여자와 사냥의 관계를 통한 여성의 열등함으로의 이전을 위한 이데올로기의 구축이나, 에스키모인 이누이트족의 ‘시피니크(sipiniq)’라는 독특한 트랜스젠더의 현상, 한국과 중국의 심각한 남아와 여아의 성비 왜곡으로 인한 여성의 부족현상과 이로 인한 세대교체 필요 인구의 생산 불가능 사태까지, 과학적, 사회적 문제에 대한 탁월한 연구내용들이 즐비하게 들어차 있다. 성별의 차이는 과학과 이데올로기가 교묘히 얽혀있는 얄궂은 논란이다. 성 구별로 인한 불평등의 지속화와 편견, 그리고 이를 입증하려는 도구로 과학을 오용하는 시절은 이제 무대 뒤로 멀어지고 있다. 오늘의 남성, 여성에게 부과된 잘못된 기대는 평등을 훼손하고, 인류를 분열시킨다. 성이란 것은 인간의 자의적 산물에 불과하다.  ‘생물학적 비대칭성’으로 인한 불가피한 차별은 이제 제도적, 법적 보완과 유지는 물론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올바른 처우의 인식, 평등의 이상으로 나아가게 하여야 할 터이다. 남성과 여성이란 이 인위적 젠더에 지녔던, 왜곡되어있던 인식이 이 한 권의 저술로 완벽하게 해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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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를 풀며 - 리처드 도킨스가 선사하는 세상 모든 과학의 경이로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최재천.김산하 옮김 / 바다출판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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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경이로움을 향한 시적 욕망이 있다.” 이 욕망은 과학의 원동력과 다르지 않다. 즉, 인간의 삶과 자연, 우주에 대한 외경을 규명하고자 하는 과학의 노력, 진리의 탐구를 향한 숭고함, 바로 과학 안에 시가 있음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다보면 과학지상주의, 과학제국주의와 같은 오해나 선입견을 가질 수 있으나, 이 저술은 그렇게 편협한 주관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 나쁜 시적 과학 - 과학을 곡해하거나 왜곡하고, 과학인 척하는 의사(擬似)과학(pseudo) 등 - 으로 진실을 감추고 파괴하는 사람들과 세상, 그 경향에 대한 비판이고, 과학의 진정성, 그 아름다움에 대한 격조를 높인 훌륭한 시적 과학서이다.

제목인 “무지개를 풀며”는 영국 낭만주의 시인인 ‘존 키츠’가 ‘아이작 뉴턴’이 “무지개를 프리즘의 색으로 환원시킴으로써 모든 시정(詩情)을 말살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론에서 시작되어 별빛, 음(音), DNA 등 대상을 풀어헤치는 과학의 동기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그 경이로움까지 포함하는 과학의 세계를 의미하고 있다. 실제 빛의 물리적 성질에 대한 뉴턴의 분석에서 ‘프라운 호퍼’가 발전시킨 빛의 연구에 대한 매혹적인 이야기로 무지개를 풀어내기도 한다.
비록 ‘도킨스’는 ‘재미’라는 요소는 “잘못된 신호를 송신하며, 잘못된 이유로 사람들을 끌어들일지도 모른다.”고 우려하면서, 과학을 하향평준화시켜 고취되어야 할 사람들로부터 오히려 흥미를 잃어버리게 하는 ‘천박한 재미’를 비난하고 있긴 하지만, 이 저술은 그의 발표된 저술 - 이기적 유전자, 눈먼 시계공, 에덴의 강, 만들어진 신 등등 - 들이 그러하듯이 지적 재미를 결코 잃지 않고 있다.

여기에는 물리학, 분자생물학, 동물학, 생화학, 통계학 등 과학의 전 분야를 종횡무진하는 저자의 눈부신 과학세계의 안내와 주장이 단순한 과학이론의 소개와 같은 경박한 접근을 넘어서는, 어려울 수 있으나 도전할 만한 진정한 과학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특히, ‘이기적 협조자’로서의 유전자, ‘우연모집단’에 얽힌 자연선택과 현대 인간 행동의 불일치에 대한 통계학적 이야기, '자급적 공진화(self-feeding co-evolution)'와 같은 뇌와 외부현상의 ‘자기 되먹임’과 같은 내용은 그 탁월함으로 과학의 매력에 흠뻑 취하게 한다.
저자는 상징주의, 은유, 유사성 등을, 과학을 오염시키는 ‘나쁜 시적 과학’의 요인으로 경계하고 있지만, 우연의 일치에 불과한 사건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서, 직관적 통계학을 관장하는 우리의 두뇌 부위는 아직도 석기시대에 머물러 있다는 예화의 설명에서는 가히 ‘호메로스’와 ‘횔덜린’의 서사시를 넘어서는 문학적 작품성을 느낄 정도이다.

또한, 재미와 같은 대중적 접근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되는 체계적으로 공급되는 반이성적 시각이나, 하향평준화를 통한 과학의 껍데기만 둘러쓴 의사과학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쏟아 붙고 있다. ‘단속 평형설’을 주장하는 진화론의 글쟁이 ‘스티븐 제이 굴드’의 나쁜 시정, 페미니스트 과학자인 ‘샌드라 하딩’은 “편협한 미국적 쇼비니즘”의 발현이라고 혹독하게 비난하고 있으며, 우리네 안방의 TV화면을 가득 채웠던 <X파일>은,  “진정한 과학에 동기를 부여해야 할 경이로운 감정 대신 그 사생아인 ‘초현실성’과 손잡은” 음흉한 최악의 엉터리 과학의 일례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사실 우리들이 사회 현상에서 늘 목격하듯이, 특히 ‘계산된’ 하향평준화는 마치 배려하는 척하면서 멸시하는 대표적 방법론이기도 하다. “진정한 과학은 어려울 수 있으나, 고전문학 또는 바이올린 연주처럼 그 만큼의 보람이 있는 일이다.”라는 점이다. 무턱대고 대중화, 재미를 추구하는 과학은 인간의 숭고한 감성을 자극하기는커녕, 무의미한 말장난, 지적 사기, 진실의 파괴로 엉뚱한 결과를 초래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저술의 탁월함은 도킨스의 유전자에 입각한 진화론적 설명이 깃든 살아남기 위해 협조하는 이기적 협조자, 그리고 조상들이 살던 세계에 대한 암호화 된 설명이 그득한 고대(古代)도서관으로서의 DNA, 우리가 보는 이미지에 대한 뇌의 인식 과정으로부터 시뮬 레이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의 실제, 오스트랄로피데쿠스의 뇌에서 오늘의 인간 뇌 크기로의 뇌 용량의 크기를 설명하는 하드웨어-소프트웨어 공진화는 ‘수전 블랙모어’의 <모방자 기계: The Meme Machine>와 더불어 가히 과학세계를 만끽하는 즐거움을 준다.

아마도 우주를 이해하고 어떻게 우리가 여기에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알기위해 노력하는 삶, 잠시 머무르는 이곳과 머무르는 이유에 대해 이해 할 수 있는 진정 뜻 깊은 시간이 되어준다. ‘좋은 시정(詩情)’이 넘치는 과학은 아마 이러한 저술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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