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미친 사내의 고백 모중석 스릴러 클럽 7
존 카첸바크 지음, 이원경 옮김 / 비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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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 심리스릴러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라는 경외(敬畏)의 탄성을 절로 질러대게 한다. 단순히 인간 내면 심리묘사의 디테일이 뛰어나다거나 사실성에 있어 명료하다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으나 그 내밀함과 몽환적 비현실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기억과 상상, 그리고 현실의 구분을 경계 짓지 않은 내용과 형식에서까지‘광기’에 대한 작가적 의지를 드러내는 것, 이성과 광기라는 비이성이 빚어내는 충돌의 전개까지 작품의 견고함이 하나의 흐트러짐도 없이 짜여 져 있다는 점이다.

정상인이라 자처하는 인간들이 구성하고 있는 사회, 그러나 자신들의 이성으로 독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격리, 이를 구분하는 담장의 폭력, 바로‘미친 사람’이라 치부하고 그들을 거부하는 바깥세상과 담장안의 세상은 어느 곳이 더 무서운 것인가?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척도는 과연 격리된 정신병동에서 어떠한 형태로 발현되는 것일까? 안 과 밖에서 달리 작동되는 이 허위의 개념이 환자로부터가 아닌 감시자인 의사, 심리치료사 등의 비이성으로 먼저 파괴되는 모순을 발견케 된다.

‘앰허스트 스테이트 정신병원’, 미국 북동부 뉴잉글랜드에 자리 잡은 정신병자들의 거대한 격리수용소의 다름 아니다. 작품은 내면의 여러 목소리에 시달리는 정신질환자‘프랜시스’의 버려짐과 격리, 그리고 죽음의 공포가 떠나지 않았던 정신병원에서의 기억과 현실의 망상을 교차한다. 자신을 “정상적인 세상의 가장자리에 선 인간”으로, 즉 스스로를 경계선에 위치한 인간으로 인식한다. 아마 이는 이 작품의 주제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라 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광기에 대해 이성의 폭력이 빚어내는 그 권력의 위선, 바로 그것은 또 다른 광기가 되어 수용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된다. 정상과 광기의 분별없음...

‘짧은 금발’이라는 손가락이 잘린 간호사의 사체가 발견되면서, 심리 게임은 본격의 국면으로 접어든다. 종교의 권위에 숨어 아동을 상습적으로 추행하는 성직자, 이를 처단하기 위해 교회에 불을 지르고 정신이상자로 수용된 소방수‘피터’라는 지극히 정상적 사고의 인물, 그리고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대학시절 강간이라는 육체적, 정신적 외상을 지닌 여검사‘루시’를 통해, 미친 자들의 세상이라는 정신병원에 바깥세상을 이식한다. 주임의사‘걸프틸리’라는 인물은 광기에 대한 정상인의 폭력적 권력을 뚜렷하게 대변하고, 환자들의 심리치료와 감시자인‘에반스’란 인물은 환자에 대한 통제의 집착이 “어떤 고집스런 환자의 광기도” 비할 바가 못 되는 광기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첨예한 정상과 광기의 대결은 광기와 광기의 대결에 다름 아니며, 바깥세상과 바깥세상의 대결이 된다.

악마를 처단해야 한다는 천사의 목소리, 바로‘천사’로 불리는 살인자와의 게임은 물론, 모든 것을 미친것이라는 이름하에 곡해와 무책임, 뒤죽박죽의 망상으로 버무리고 말려는 의료진과의 싸움까지 해야 하는 검사 루시와 소방수 피터, 바닷새 프랜시스의 절망과 비합리, 그리고 생생하게 밀려오는 공포와의 뒤엉킴은 시종 팽팽한 긴장으로 신경을 고추 세우게 한다.

“살인이야!”라고 소리치거나 비명을 질러도 그 어느 누구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세계, 그래서 악몽은 스스로 처리해야 하는 병원, 정신병을 낫게 하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시키는 곳, 환자의 쾌유를 위해 힘쓰는 사람이 없는 정신병원에서 살인자 천사의 숨결이 점점 이를 쫓는 루시와 피터, 그리고 프랜시스에 다가온다. 밤이면 굳게 잠기는 환자들의 방과 수없이 많은 문들이 잠겨 지지만, 이 강력한 살인자는 실질적인 힘, 접근권력인 열쇠를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살인자를 찾으려는 자와 살인자의 치열한 추적과 추적의 게임, 잠긴 문의 세상에서 진정한 승자는 누가 될 수 있을까? 악마를 추적하는 수도사처럼 변해버린 여검사와 부패한 종교의 협상에 무릎을 꿇어버린 피터, 살인자의 숨결을 아는 프랜시스와 살인자 천사의 호흡을 끊어버릴 듯한 장면에 이르기까지 스릴러의 진수를 만끽하게 하여준다. 완벽하고 깨끗하고 근사하지 많은 세상. “삶이란 그런 법이야. 누군가 상흔을 남겨도 우린 계속 살아가야지, 하지만 넌 자유로울 거야. 날 믿어.”라는 피터의 격려처럼 이성과 낙관이 통하지 않는 절망적이고 섬뜩한 세상의 구속에서도 인간의 자유로움에 대한 본성은 결코 부숴 질 수 없는 것이리라. 인간 의지의 숭고함이 섬세하게 그려진 심리스릴러 문학의 정수이다. ‘존 카첸바크’의 이 작품이‘심리소설의 교본’이라함에 그 누가 저항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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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물고기
권지예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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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고, 생활인으로서 요가강사를 하는 30대의 여성,‘서인’, 여성잡지 인터뷰에서 마주한 사진작가‘선우’는 그녀에게 야릇한 인상으로 마음에 새겨진다. 어둠이 내린 호수는 이야기 주위를 항상 맴돌고, 그곳은 어둡고 깊은 인간들의 욕망을 묻는 거대한“욕망의 쓰레기장”으로 소설의 사건들을 연결시키는 지위를 갖는다.


추리적 맥락을 삽입함으로써 등장인물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가둬져 있는 지워진 기억들을 시간의 진행에 따라 복원하는 전개구조는 전형적인 심리 스릴러물을 연상시킨다. 밤이면 호수가로 나가 열락의 정사(情事)를 벌이는 엄마에 대한 기억, 마침내 자식들을 버리고 집나간 엄마를 자살이란 가상의 흔적으로 지워버린 ‘서인’의 상처는, 몽유병 증세로 그리곤 성폭행의 희생자란 정신적 외상을 남긴다. 한편 상대역인 ‘선우’또한 고아로서 프랑스로 입양되었으나 이란성 쌍둥이 여동생‘안나’의 죽음을 호수에 던져 넣고서는, 파양(罷養)되어 돌아와야만 했던 깊은 심리적 상처를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이렇듯 정신적 상처를 지닌 두 사람의 사랑은 서로의 숨겨진 고독을 감지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여기에는‘사람을 만나 사랑의 감정을 느낄 때 우리는 타자를 가장 강하게 느낄 수 있다.’는 ‘레비나스’식의 타자성을 읽게 되는데, 누군가를 알아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점차 알아가는 것, 즉 그 사람을 알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인데, ‘서인’이 ‘선우’의 낯선 행동에 대해 “선우에 대한 서인의 의혹이 서서히 자라고 있었다. 그는 비밀이 많은 사람. ~ (中略) ~ 점점 알 수 없는 사람 같았다.”와 같은 기묘한 비대칭적 자각을 보여주는 것에서 읽을 수 있다.

이야기는 이러한 서로의 알아감, 자기만의 내밀한 것들을 드러냄으로서 사랑의 본질 속으로 향하게 되는 두 연인의 변질 될 수 없는 마법의 세계를 보여준다.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 줄 수 있는 그런 사랑, 선과 악이라는 인간 내면의 투쟁도 잠재울 수 있는 자기희생, 이타적 사랑은 상대를 온통 이해하는 과정이고 그러함의 과실이라는 것이다.
호수에 던져진 여자들의 주검, 실종 된 여자들, 건져진 사체들의 죽음은‘선우’와 그의 또 다른 인격 ‘미카엘’을 보여줌으로써,‘서인’이라는 여인의 사랑을 숭고함의 경지로 올려놓는다.

호반(湖畔), 악의 꽃,‘삐아졸라’의 광인을 위한 발라드, 검은 스타킹 등 암시와 복선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읽는 재미를 더한 이 또 하나의 사랑 이야기가 오늘의 사람들에게 진지하게 들려지기를 기대해본다.
다만, 트라우마, 정체성장애를 필연성을 확보하지 못한 작품들이 우연성을 보완하기 위한 소재로 빈번하게 사용하다보니 그 진부함을 극복하고 차별화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결국 소재의 빈곤과 식상함이란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린 흔하디흔한 이야기들이 될 수밖에 없는 위험을 갖게 된다. 이 작품 역시 이러한 경계를 걷다보니 얼개는 부담 없이 수용되지만 세밀(細密)에서는 엉성한 거칢의 거북함이 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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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니스 Welleness - 뇌를 바꾸는 운동 혁명
박수현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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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하면 건강해지고 정신이 맑아진다는 것은 으레 듣는 이야기이고, 이러한 구체적 사례들은 정보오락 프로그램이나 의학전문기획 프로그램, 건강관련 기사 등 각종 미디어 매체들을 통해 그 어느 때 보다 풍부하고 다양하게 전달되고 있으나, 실제의 삶에 긴박하게 다가온 적이 없다. 일상의 번잡함에 매몰되어 감히 건강타령이나 하고 있을 경황이 아니라는 생각에 지배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구나‘운동’에 대한 편견까지 있어, 몸을 쓰는 것은 두뇌의 활용이 좀 떨어지는 사람들의 행위정도로 치부하고, 책상머리에 붙어 앉아 한계에 도달한 머리를 쥐어짜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몸의 건강과 마음의 행복을 추구”한다는‘웰니스(wellness)’라는 이 파란 책 한권은 운동에 대한 이와같은 지금까지의 내 편협한 생각을 완전히 전복시켜버렸다. “뇌는 운동을 위해 태어나고 발달” 했으며, “더 정확한 몸놀림을 위해 뇌가 진화”했다는 한마디, 즉 우리 뇌가‘운동뇌(moving brain)’에서 진화 했다는 주장은 “움직일 필요가 없다면 뇌도 필요 없다”는 말과 결합하여‘사유’라는 뇌의 작용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내게는 일종의 충격이 되었다고 하겠다. 결국 두뇌의 활동은 운동에 지배되고 있다는 것이니, 진정 이렇다 할 신체의 운동이 극소화 된 나로서는 최근 겪고 있는 신체적, 정신적 침체와 위축의 원인을 비로소 규명하게 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운동에 의해 뇌의 활동이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점은 “운동이 사고와 감정을 조절하는 신경전달 물질의 분비를 촉진하고 그들의 화학적 균형을 맞춘다.”는 뇌의 메커니즘을 통한 확인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지방연소, 혈관밀도의 제고와 신경전달물질 세로토닌,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등의 분비를 촉진하여 감정을 조절하는 일련의 과정은 물론, ‘뇌유래 신경 성장인자’인 BDNF(brain-derived neurotrophic factor)의 분비를 통하여 기억력과 밀접한 장소인 해마 속‘치아이랑’영역에서 뇌세포로 성장할 수 있는 줄기세포가 매일 4백 개에서 1천개까지 생성된다는 사실은 정서와 신체적 건강을 넘어 우리 인간의“고도의 정신능력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한다는 의미”로서, 뇌과학의 획기적 진전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뇌가 변화된 환경의 영향을 받을 경우 스스로 구조와 기능을 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뇌과학자들의 ‘뇌의 가소성’에 대한 연구결과는 운동의 역할을 더욱 확신케 한다. 이는 복습에 복습을 반복하면 뇌는 이 정보를 학습하고 기억하기 위해 최대한 능력을 발휘한다는‘장기 증강’메커니즘을 의미하는데, 일례로서 마치 길이 없던 숲속에 오솔길이 생겨나듯이, 장기증강은 시냅스에 전기신호가 반복적으로 가해져 시냅스가 지나는 정보 전달 과정이 수월해진다는 것과 같다. 특히 뇌가소성은 대뇌피질에 잘 나타나는데 이는 동작 반응을 명령하며 기억력, 학습력, 사고력, 창의력의 터전이 되는 부위라는 점이어서 운동이 뇌를 똑똑하게 만들어준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책은 이들 뇌과학의 실험결과와 이론적 연구의 규명이 보다 친근한 실례로서 다가설 수 있도록 학문, 예술 등 지적 분야의 탁월한 성취를 하고 있는 인물들을 통해 그네들의 실질적 삶의 원동력으로서 운동이 작동하는 성과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수학과 같은“새로운 상황의 요구에 맞도록 자신의 지식을 재구성하는 능력”인 ‘인지적 유연성’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의 수학교수가 축구라는 운동을 통해 쉴 새 없이 충전하는 모습이나, 허영만 화백, 음악인 용재오닐이 1~2시간에 걸친 지속적인 산행과 조깅으로 두뇌의 휴식과 활성화를 지원하는 일상적 습관에서 뇌의 가소성과 두뇌의 확장능력을 엿볼 수 있게 된다.

한편,“고도로 집중한 상태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몰입적 사고”에 익숙한 이들의 지적 작업은 반복적이고 집중적 사고로서 “우리의 뇌는 이 문제를 생사와 직결된 문제로 판단”하여, 몸에 비상사태를 선언 하고, 신경 체제의 배선을 늘리고 강화하는 즉, 시냅스 형성 증대, 신경회로 확장을 통해 인지적 유연성의 제고를 돕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몰입’의 흥미로운 예로서, 정신 분열증이나 우울증으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뛰어난 예술성으로 역사를 바꾼 모차르트, 뉴턴, 반 고흐, 다윈, 슈만”을 열거하고 있는데 이들에게서 발견 할 수 있는 무리한 몰입은 신경전달물질인‘도파민의 과다’로 인한 사망이라는 역설로서 운동이 지니는 뇌의 균형적 작업을 더욱 간과할 수 없게 한다.

저작의 말미에는 이러한 두뇌를 똑똑하게 하고 사고의 유연성을 높여주며, 면역체계를 강화함으로써 병세를 호전시키기까지 하는‘운동’의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법들을 소개하여 단지 이론적 이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 속에서 바로 “진정한 건강이란 신체의 안녕을 넘어 삶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 살아가게 하는 힘이고 살아있는 느낌”이라는 웰니스의 핵심적 가치를 실현하는 내용들을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빨리 걷기와 중강도 운동이란 어떤 것인지, 뇌의 용적을 늘리고 신경세포의 생성을 돕는 ‘젊음의 분수’라는 인간성장호르몬(HGH)을 대거 방출하는 강도 높은 무산소 운동과 근력운동에 대해서, 각종 질병의 예방을 위한 개별 대응 운동에 대해서, 그리고 축적 운동법에까지 이른다.

“인간이 점점 덜 움직이면서 스스로 동물 본성을 포기한 데 대한 경고”로서, ‘알츠하이머’병이 증가한다는 말처럼, 인간은 유전자에 각인된 운동 본능을 따라야 정신활동이 온전해진다는 과학적 규명은 어쩜 뒤늦은 이해와 인정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운동이 뇌 세포를 새로 만들고, 뇌를 쾌적하고 젊어지게 한다는, 그래서 삶에서 참된 지식을 발견하고 긍정하기 위한 방법으로‘운동’의 선택을 말하는 이 저작은 우울하기만 한 오늘의 사회환경을 극복하고 정체된 삶의 기운을 회복하는데 신선하고 직접적인 자극이 되어줄 뿐 아니라, 국민 건강과 정서, 지적 역량의 배양을 위한 국가 체육정책의 중요한 가이드가 되어주기도 한다. 정신근로자, 성장기의 학생을 둔 부모들, 체육교육 정책자, 중노년기에 건강을 걱정하는 모든 분들에게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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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리전스 - 평범함과 비범함의 비밀을 밝힌 문화 지능의 지도
리처드 니스벳 지음, 설선혜 옮김, 최인철 감수 / 김영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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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진화생태학적 측면에서 오늘의 인간의 진화적 상태는 대개 1~3만여 년 전의 형질로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으며, 이는“지능이 인종에 따라 유전적으로 차이 나기란‘선험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의미를 뒷받침하는 과학적 배경이 된다. 즉 인간의 지능이 유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가 아니면 환경이 결정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론에서 케케묵은 인종적으로 지능의 차이가 있는가 없는가라는 예증은 백인중심주의라는 저변의 사고라 할 수 있다.

 

비록 이 저작이 인종 차별주의적 시각을 배제하려는 입장에 있기는 하지만, 그만큼 지능의 유전율과 환경지배력에 대한 설명으로서 환경결정론적 주장을 선명하게 입증하는 균형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이라고 하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다만, 지능이 유전자에 의존하는 것인지, 환경에 의한 것인지의 이론(異論)은 차치하고, 지능향상법에 대한 코치나 아이들의 양육과 학습이론 측면에서는 나름 귀동냥 할 참고 요소들이 소개되고 있어 교육자, 학부모, 교육당국자등에 유용한 학습프로그램들의 사례집으로서의 가치를 제공하고 있다 하겠다.

저술의 전체를 지배하는 개념은 IQ라는 지능지수이다. 이 지능지수의 백인과 흑인, 유색인종 등 빈곤, 소수계층의 비교를 통해 학습의 개입이나 사회계층이 제공하는 환경여건에 따라 지능지수를 높일 수 있다는 맥락을 가지고 있다. 또한 교육은 IQ와 성취간의 인과사슬에 매우 중요한 고리라는 신념을 통해 취학 전 유아동 및 학령기 개입 등 적극적인 학습 환경의 변화가 학업과 사회진출에서의 계층적 성취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론적으로 SES(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의 지적 자산을 향상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하면서 취학하기 전의 유아들에 대한 학습 환경의 개입프로그램 적용례와 학령기의 아이들에 대한 실험적 프로그램과 특수학교들의 개입사례를 통하여 IQ및 학업의 성취도가 신장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들 프로그램들이 소수 빈곤층의 아이들에게 커다란 효과를 나타내고 있으며, 백인계층의 아이들과 차이를 줄이기 위해 유효한 방법이라 소개하고 있다. 나아가 이들 프로그램의 수행에 있어 교사의 자질은 성취도에 높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학급이 적을수록 성취도 검사에서 수행도가 뛰어났음을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사실 이러한 결론은 교육학에 있어서는 ABC와 같은 이야기이기에 새삼스럽기까지 하지만, 우리사회에 있어 낙후된 벽지나 하위계층이 거주하는 지역의 학교에 이 저술이 소개하고 있는 개입 프로그램의 도입 등은 교육적 성취의 편차가 극심한 현실을 고려할 때 사회의 건강성이나 교육환경의 질적 균형을 위해 참고할 가치가 높다 하겠다. 물론 계층에 따른 학업성취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이러한 공적 비용이 막대하지만, “특수교육, 유급, 범죄와 복지비용의 지출을 막고 프로그램 참가자들의 소득이 증가”하여 연 17%의 투자수익에 상당하다는 노벨상 수상 경제학자인‘제임스 헤크먼’의 분석처럼 경제성 측면에서도 유효한 접근이라 하겠다. 더구나 상위 1%의 강부자들을 위한 세금감면 혜택 중 극히 일부만 축소하더라도 이러한 사회적 비용은 충분히 충당하고도 남으리라는 것이다.

한편, 저술 중 인상 깊은 용어들이 등장하는데 그 첫째는‘노력 낙관주의(effort optimism)의 부재’, 즉 “노력하면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의 부재”이다. 일종의 카스트적 소수집단의 사회에 대한 기대의 포기와 불신으로서 우리사회에도 엄연히 존재하는 하위계층에 대한 심리적 배려는 물론 학습장치의 제공의 중대성을 깊이 깨우치게 된다. 그리고 두 번째는 ‘고정관념 위협’에 관한 연구로서, “도전을 회피하고 학업을 추구하지 않는 식으로 평가에 대한 불편감에 적응”하는 상황의 인식이다. 이 역시 사회적 편견이 특정 집단에 가하는 압력의 고착이 결국 당해 집단의 내적 심리까지 장악하여 발생하는 폭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교육은 사회의 신뢰회복과 건강성, 빈곤의 세습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풀어주는 중요한 기능임을 간과할 수 없음을 확인케 된다.

끝으로 이 저작에 대한 몇 가지 아쉬움을 담는다면, 모두에서 지적했듯이 서구 백인의 편협성을 극복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한국인을 예로 하면서“IQ로 기대 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과잉성취(overachievement)'가 나타난다.”고 자신들의 과소성취가 아니라면서 동아시아인의 뛰어난 성취의 해석을 축소하는 식이라든가, 지능의 개념을 정서지능이나 음악지능, 신체운동, 게다가 실용지능, 창조지능하면서 “추상적 사고, 문제 해결능력, 지식을 습득하는 능력”으로서의 지능을 과다 확장하여, 수량화 할 수 없는 인간의 지적활동을 모조리 수량화(數量化)하여 서열화하고 물화(物化)시켜 버리는 사이비 과학의 요소를 안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이 저작은 지능지수(IQ)가 양호한 양육환경이나 교육환경을 갖추면 높아 질 수 있기 때문에 소수자 및 소외계층 등 하위계층의 학부모들에 대한 교육적 각성, 다양한 학습프로그램의 실행을 위한 공적지원 등으로 교육적 형평성을 제고 시키고, 이를 통한 이들 계층의 아이들이 사회적 성취를 높이기 위한 사회적 참여의 제안이라 할 수 있으며, 부모들의 수준 높은 어휘구사나 환경 탐구 행동의 격려와 같은 아동 학습과 지능 향상을 위한 방법 제안과 같이 학업성취 제고를 위한 교육방법론의 제언이라 하겠다. 진화심리학과 사회심리학의 대결, 또는 유전론과 양육론의 첨예한 과학적 대결의 기대는 무색해진다. 유치원, 초등학교의 아동을 둔 부모님들에게는 동기의 유발이나 성취욕의 자극, 학업능력 및 지능 향상의 유효한 지침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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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프리즘>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리영희 프리즘 - 우리 시대의 교양
고병권.천정환.김동춘.이찬수.오길영.이대근.안수찬.은수미.한윤형.김현진 지음 / 사계절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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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80년대 한국의 청년들, 그리고 대중의 사상적 은사였던 이영희 선생을 왜 지금 다시 논의하여야만 하는가? 다시 말해 ‘의식화’로 대변되는 정신의 혁명, 대중의 깨어남이 요구되는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당위의 질문에 대하여 이 저술은『전환시대의 논리』,『우상과 이성』으로 상징되는 잠자던 대중을 깨웠던, 즉‘깨어난 자들의 끊임없는 증식’을 통해,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던 독재의 암흑이란 철벽을 부수고 일궈냈던 민주화의 성취가 오늘에 다시금 어떠한 의미로 다가서는지를 세대와 분야를 아우르는 인물들의 담론으로 펼쳐내고 있다.

여기에는 인권이 유린되고, 자유는 억압되었으며, 밀실로 붙들려가 폭력에 시달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나가는 민주주의의 실현은 요원하기만 하였던 악독한 독재정권이 지배하던 시절, 역사의식도 없으며, 세계사적 흐름을 읽지 못하던 무지몽매한 지배계급의 폐쇄적 폭압의 시대에나 필요했지 오늘에 새삼스레 대중의 집단적 각성, ‘의식화’의 논리를 꺼내드는 것은‘꼰대’들의 구시대적 발상이라는 냉소도 있다. 더구나 온통 물화(物化)되어버린 사회, 당장 밥벌이라는 생존의 문제에 허덕이고 있는데 무슨‘자유’타령이냐, ‘자본주의에 편입’되기 위해 발버둥치기에도 모자란 형국이란 말이다. 라는 88만원 세대의 항변도 있다.

그러나 잠시라도 소위 자기 계발이란 것을 소홀히 하면 경쟁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높으니‘자본의 도구’가 되는 종속을 택하는 것이 옳다는 이러한 단순화된 양자택일의 논리는 왠지 설득력을 갖추기엔 미흡하지 않은가? 당장은 안전한 자신의 보위가 되는 듯 보이지만, 이는 결국 부정의와 불평등, 비인간화, 인간소외를 고착화시키고 자본의 노예로 길들이려는 지배계층에 굴종하는 삶을 완성하는 것 이상이 아닐 것이다. 오늘의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라는 무한경쟁 시장의 논리, 즉 시장만능의 이데올로기는 경쟁의 원리, 약육강식의 원리, 탐욕의 원리만 작동되고, 이를 위해서는 인권, 자유, 민주주의는 기꺼이 희생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국가경쟁력 제고라는 미명하에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자유를 부인하던 군부독재 시절로 역진된 형국과 한 치의 차이도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무감각, 무의식을 자처하고, 지배자들에게만 가치판단을 맡길 때, 어느덧 회복할 수 없이 잘 길들여진 비인간화된 노예의 삶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불평등, 억압, 배제와 차별이 고착화된 사회, 작은 물질에 자신의 자유를 내어준 사람들이 기대할 수 있는 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완전한 사고 정지증’에 걸린 듯한 오늘의 사람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집단적 각성, 의식화가 지닌 의미의 오늘에서의 재해석을 필두로, 신자유주의적 세속(反)윤리의 틀을 벗어나 경쟁의 바깥으로 탈주하는 것으로서의 책 읽기,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의 이해를 통한 전쟁의 파렴치한 속성들 - 권력과 민중 격차의 극대화, 제국주의의, 계급원칙의 적나라한 불평등... -에서부터 “사대주의에 기초한 허구적 주류의식과 무지몽매함”으로 한국전쟁의 참화와 분단국가의 서러움을 겪고서도 전쟁에서 완전히 벗어날 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오늘날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의 또다른 냉전체제의 병리현상을 지적하기도 하며, 정말 기형적인 한국 기독교의 본말이 전도된 제도 종교로서의 비판과, “예수를, 진리를 이기적 욕망충족의 수단으로 착각”하여 “욕망에 마음을 굽히고 돈에 허리를 굽히는 행위가 사실상 우상숭배라는 사실에는 아랑곳하지 않는”종교인에 대해 생각한다.

한편, 영어를 강조하는 상상력빈곤의 이 사회의 진정한 속셈인 “지배세력의 입장에서 볼 때 영어가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 할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이라는 통찰과, 창조적 사유의 자리가 없는 실용영어가 지니는 허위, 그리고 무엇보다 원어민 교육을 받아 혀 꼬부라진 그럴듯한 발음에도 정작 “비판적이고 포괄적인 사고력이 없는” 맹탕의 영어로 일그러진 한국인의 초상을 말한다. 그럴듯한 발음의 영어를 구사하지만 사유와 지식이 없는 무식한 영어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점이다.

특히, 지식인에 대한 사회적 책무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은 이 저술과 이영희 선생의‘배우게 하는 사람’이라는 스승의 개념과 연결되어, 학벌세상의 승자인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을 향해 매운 회초리를 든다. 삶과 앎이 불일치하는 한국 지식 사회의 고질병은 물론, 탈근대적 과제와, 여전히 매우 질 낮은 민주주의와 같은 근대적 과제까지 중첩된 한국사회에서의 합당한 지식인의 역할을 논의한다. “현학의 하늘에서 대중의 땅으로 내려와 그곳에서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체득해야 한다는 권유”는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자각한 파리아(pariah,주변인)의 관점’그것으로서, 지식인의 계몽자로서의 기능을 강조한다.
극단적인 신자유주의와 시장지상주의를 밀어붙이는 이 정권은 점점 대중의 사회안전망을 축소하고 개인의 행복이나 복지가 모조리 개인의 책임이 되는 사회로 퇴행시키고 있다. 또한 교육은 “‘약자를 보호하자’가 아니라, 심지어‘강자가 어떻게 약자를 더 잘 먹을 수 있을까’를 가르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옛날 옛적부터 잘 먹고 잘산 놈들이 제 권리를 잠시 빼앗겼는데 도로 찾으려 일어나는, 반동이 일어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 것은 역사의 경험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평등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보편적 복지가 높아지고 생산성도 높아질 수 있도록 가치관, 인간관, 세계관을 개량하는데 노력을 경주하여야 할 것이다. 눈앞의 풍요 속에 매몰되어 진정한 가치들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악덕한 제도, 정치, 사상에 굴종하지 않는다는 저항적 인간을 목표로 하는 자기의식의 전환을 이야기하는 이 저술은 그래서 지금에 다시 이영희를 말하고, 집단적 깨어남을 말하여야 하는 필연적 요구를 담고 있다. 오래전 대학신문사에서 독재정권의 말로를 지켜보고, 그리고 더욱 악질의 군사정권이 들어서는 폭력의 시대에 이영희의 저작들을 읽고, 민주화운동을 취재하며 학우들과 울분을 토해내던 그 시절을 떠올린다. 더 이상 이러한 집단 의식화를 얘기하는 세상이 아니기를 바랐건만 소비지상의 물화된 신자유주의라는 우상으로 바뀐 대상이 30년 전으로 사회를 역진시키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역사와 철학, 문학과 예술 등 다방면의‘특수 지식인’들이 바로 이러한 각성을 위해 대중을 향한 노력을 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변혁은 반드시 올 것이란 말을 되새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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