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콜하스(Michael Kohlhaas) - 법과 정의의 실재에 대한 물음

 

1805년에 집필되었던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소설 『미하엘 콜하스』가 200여년이 훌쩍 넘어 영화화되었다는 것은 여전히 소설 속에서 말하고 있는 문제의 근원에 있어서 거듭 환기되어야 할 충분한 것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화되자 한국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은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의 주제의식을 떠올리게 된다. 기득권 계층의 공고한 연결망인 부당한 사회시스템을 어떻게 정의로운 시스템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까? 하는 그것, 말(馬)장수인 ‘미하엘 콜하스’는 선량한 시민의 삶을 파괴하는 악행인 이 불의의 힘에 대항하여 정의를 지키는 것, 그리고 존재하지만 작동하지 않는 법의 존재론적 정당성에 대한 의문이자 또한 정당화에 대한 의지의 화신(化身)이다.

 

개봉되는 영화가 오늘의 우리에게 어떻게 이해될지 자못 궁금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법이 일반적 시민의 호소에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에 대해, 나아가 과연 법의 힘은 최초에 누가 부여한 것이며, 그 법이 항상 정의로운가 하는 것에 대한 의문 말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소송』에 첨삭된 그가 쓴 유명한 우화인 「법 앞에서」에 등장하는 법의 문 앞에서 들어가지 못하는 시골사람의 그 불가능성처럼 열려있지만 이미 법안에 있는 인간이기에 여는 것이 가능치 않은 그 법의 폐쇄성까지는 아닐지라도 일반 시민에게 그 법의 도달은 요원하기만 한 것이 사실이 아니겠는가?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말을 거래하기 위한 긴 여정에서 미하엘은 영주인 융커로부터 예기치 않은 통행세의 요구를 받는다. 이 새로운 통행권리에 대한 이해가 없던 미하엘은 융커 일원이 탐내던 그의 말과 하인을 담보로 하고 여정의 목적인 말 거래를 무사히 마친다. 그리고 융커가 요구했던 통행증에 대한 제도의 존재여부를 해당관청에 문의하지만 그런 제도는 실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즉 부당한 횡포이며 약탈인 것임을.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말과 하인을 찾지만 뼈만 앙상하게 남은 말과 융커 일원의 무례와 위협만을 마주하게 된다.

 

귀가한 미하엘은 변호사의 선임과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소송을 제기하지만 이미 권력망의 요지에 산재한 융커가문은 중간에서 소장을 파기하고 미하엘의 요구를 묵살한다. 자신의 소장이 최고 권력자인 선제후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인지한 미하엘은 직접 전달하려 하지만 여성의 유연성을 내세운 아내가 전달하기 위해 떠나고 이내 수많은 상처의 반죽음 상태로 마차에 실려 돌아온 채, 회복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지배계급의 파렴치와 탐욕, 그 전횡이 구조화되어 그네들의 부당, 불의, 부정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세계라는 인식에 도달한다.

 

미하엘은 이렇게 구조화된 불의에 맞서기 위해 일군의 피압박민들의 무리를 규합하여 얼마 전 한국의 대통령이 지적한바 있는 ‘구조적 난맥상’이라는 것, 더러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파렴치한들의 네트워크인 학연, 지연, 혈연으로 뭉쳐진 부정한 사회 시스템에 저항한다. 융커를 보호하는 도시를 방화하고 그를 비호하는 세력을 살해한다. 미하엘의 세력이 점점 불어나자 지배계층인 귀족들의 불안감은 점증된다. 이때 미하엘의 처사를 비난하는 루터의 포고문이 나돌자 미하엘은 루터를 방문하여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역설한다.

 

아마 주제를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미하엘과 루터의 질의와 응답으로 이루어진 대화는 이 소설이 이후 많은 사람들에게 사회의 시스템과 법의 궁극에 대한 사유의 기틀을 제공한 명문(明文)일 것이다.

누가 “불과 칼로서 침범할 권리를 주었느냐?”라는 루터의 물음에 미하엘은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답변한다. 그에게 어느 누가 폭력의 권리를 줄 수 있는가? 이것은 누가 법 제정의 권리를 부여하였는가 하는 질문과 다름없다. 루소 같으면 ‘일반의지’라고 말하겠지만, 사실 그 존재를 규명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이어서 “누가 이 국가 사회로부터 너를 추방했는가?”라는 질문에 미하엘은 자기만의 목소리로 답변한다. “추방당한 자란,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자를 말합니다.”라는 정의로 대신한다. 즉 누가 종용한 것이 아니라 작동하지 않는 법, 법이 무용한, 의미 없는 지대가 존재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루터의 중재안에 의해 미하엘 집단의 방화와 살인 등 반란행위의 사면과 안전한 귀가를 조건으로 저항집단을 해산하지만, 융커 가를 비롯한 이해집단은 미하엘의 소송을 무효화하고 오히려 국기문란과 재산 파괴 행위 등을 이유로 처형을 모의하고 실행하려 한다. 여기서 다시금 법과 정의의 실효적 발현을 위한 멋진 대화가 등장 한다. “나라가 제일 먼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은 융커를 악형에 처하라고 고소하는 것이고, 비로소 나라는 말 장수 미하엘 콜하스를 처형할 권한을 갖는 것”이라는 선언이다. 법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미하엘은 기꺼이 자신의 죽음을 담보하는 것이다.

 

사실 상대적 약자인 일반 시민이 자신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힘에 항변하고 자신의 기본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수월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사법부, 변호인, 교육청 등 사회적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자신의 사악한 행위에 대한 제도적 처벌을 회피하는 『도가니』에서 보여주는 권력의 구조적인 난맥상은 법의 의미 없음과 법의 문(門)을 열고 들어 갈 수 있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를 야기한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법과 법 집행의 이러한 자의성은 정의에 대한 어려운 과제를 던진다. 불의에 대한 약자들의 연대와 저항의 실행이란 힘겨움의 요구, 결국 자기희생을 담보하여야만 기능하는 정의의 실현이란 왠지 불분명해 보인다. 정의가 절로 작동하는 구조의 사회를 염원하기에 인간의 본성이란 무능력하기만 한 것일까? 21세기에 제작된 영화는 과연 이러한 의문에 대해 어떠한 시선을 더하고 있을지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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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동시대에 같이 호흡하게 된 두 젊은이를 사랑한다. 한 사람은 철학자 이진경이고 또 한 사람은 소설가 김사과이다. 그런데 마침 이 두 사람을 연결케 된 김사과의 소설『테러의 시』를 읽게 되었으니 정말 운수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읽고 나자 난 대뜸 이진경의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속 한 문장을 따다 <존재론 적 명명식>이라고 감상글의 제목을 붙였다. ‘테러의 시’는 한 가지 색에 사로잡힌 채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색은 노랗다. 오직 섹스와 폭력과 교회와 시장자본주의가 쾌락을 향해 질주하는 곳, 그래서 이 도시의 색깔에 휘말리지 못하거나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이 되는 곳이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 소설은 그들을 빈 괄호‘( )’로 표기한다.

 

구역질나지만 매혹적인 이도시의 아이러니에 은폐된 진실을 쫓는, 실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존재를 지워버린, 거북해서 외면하려는 것들의 거침없는 드러내기 작업이다. 항상 원초적이며 본질적인 질문을 하는 작가. 우리들은 현실이 아니라고 손사래 치지만 바로 우리들의 추한 모습을 거침없이 이것이라고 가리키는 작가의 일관된 의식에서 나는 우리들의 무능력한 이성과 망상의 지대를 매양 확인하게 된다. 가엾은 영혼들에 보내는 그녀의 진혼곡에 매료되는 이유일 것이다. 이름을 갖지 못한 우리 이웃들의 긴 목록인 이 작품을 많은 한국인들이 함께 읽어줄 것을 기대하며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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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안주를 이끌고 인식의 주류를 지배하는 중산층이란 의식, 이것은 특별히 냉소적이지도, 퇴폐적이지도, 악의적이지도 않지만 인식의 무능력지대를 횡단하며, 세계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한다. 압도적인 세상의 흉포함과 재난에도 무심한 이 의식의 끔찍함을 김사과 특유의 냉소적 시선이 포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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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지는` 그 격렬하고 환상적인 세계, 그리고 심리적 방향 상실과 감정을 마비시키는 너무도 아픈 실연의 시간,  사랑의 고통이라는 긴 터널을 통과하며 진정 `사랑 하는` 것으로의 이행,  신뢰와 헌신, 긴 노력, 그리고 기쁨에 다가서는 상처를 허락하는 것, 사랑이란 보답없는 것에 대한 사랑임을 아름답고 감동적인 문장을 통해 독자를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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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문학에서 본 우리들의 초상(肖像)

   - 近作 다섯 편의 한국문학을 중심으로

작성: 필리아(비의식)

 

소설문학은 시대성을 외면할 수 없다. 그것을 쓴 작가를 에워싼 시대의 습관과 제도와 문화, 정치가 그들의 삶을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의 형태에 대한 사유가 기저에 흐르고,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보지 못하거나 망각하고 있는 것들이며, 또한 외면하고, 경계 밖으로 치워버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되어버린 것들에 대한 환기이다.

 

나는 작금의 우리 소설문학 작품들에서 이를 위한 치열한 노력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박완서, 황석영, 성석제로부터 김영하, 정한아에 이르기까지 이들 소설가의 작품이 주류적 삶이 배척하고 배제하고 외면하고 망각한 것들을 말하는 것에서 내 마음의 양식을 채우고, 세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편협했던 인식과 사유의 범주를 확장시킨다.

 

- 『기나긴 하루』; 폭력을 삼킨 한국인의 아픔, 그리고‘같아지기’의 파국적 형상

 

故 박완서 작가의『기나긴 하루』는 한국인, 바로 시대를 이해하는 데 맞춤의 작품이라 할 것이다.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은 소위 “걷잡을 수 없는 증언의 욕구”로 불리는 주류의 역사에서 말하지 않는 것들, 배제하거나 은폐된 것들의 드러냄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전쟁의 모순 뒤에 숨어있는 터무니없는 폭력이고 맹목적인 복수의 잔혹성을 반복하는 한국인들이며, 이 폭력을 삼키도록 강요된 민중들의 아픔의 연대이다. “이념 갈등이 동기간의 골육상쟁으로 치달은”, 발설 할 수 없는 고통의 기억을 말하지 않는 화자의 굳은 입을 떠올리게 하는「빨갱이 바이러스」라는 단편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이 땅, 그리고 우리들의 상흔인 것이다.

 

한편, 속물들, 위선, 정말 하찮은 인간들을 양산하는 오늘의 현실세계를 시어머니의 위장가난, 이혼한 아들내외의 그 버르장머리 없음의 편린들로 맛깔스럽게 지펴낸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는 여인들의 내적 심리를 통해 이 사회가 안고 있는 세태, 즉 물질이 인간성을 압살하는 도시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표출하고 있으며, 단편「닮은 방들」에서는 물신주의의 또 하나의 속성인‘같아지기’라는 파국적 형상을 통해 마침내 그 극한인 간음(姦淫)의 자기 파괴로 명멸하는 절망적인 한국인의 초상을 진저리치게 묘사해내기도 한다. 결국 우리들의 자화상을 낯설게 보게 함으로써 가능의 외연을 확장시키고자 하는 작가의 애처로운 호소를 느끼게 된다.

-『낯익은 세상』; 절멸을 향해 달려가는 욕망과잉의 사회

 

그래서인지 이 같아지기의 물신주의 속성은 황석영 작가의 『낯익은 세상』에서 욕망의 과잉에 절제를 상실한 사람들의 모습으로 다시금 반복된다.

모든 것이 과잉이고 과도함이다. 그래서 거대한 소비는 또한 거대한 쓰레기 더미가 되어 산을 이룬다. 바로 소설의 배경은 역설적이게도‘꽃섬’이라 불리는 이 쓰레기 산이다. 자신들이 배출해 낸 욕망의 찌꺼기라는 오명을 두려워 한 인간들의 임기웅변이다. 그런데 바로 이 쓰레기더미를 생계의 터전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도시의 영역에서 떠밀려 사람들의 시선에서 외면당한 곳에, 때문에 주류의 시선에서는 보이지 않는 장소로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들의 더러움, 추악함, 두려움을 은폐하기 위해 너절한 수식을 하거나, 격리하고 외면해 버리며, 기억에서 지워버리려 한다. 여기에서 우린 욕망의 과잉과 소외의 깊은 연결성을 확인하게 된다. 소설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쓰레기장을 소독하기 위해 낮게 비행하며 무참히 살포하는 소독약이 그것이다. 쓰레기장의 더러움이 자신들이 사는 영역, 도시에 행여나 옮을까봐 두려워하는 의식이다. 게다가 그곳의 사람들, 영역에서 내쳐진 그들까지 소독해버리려는 듯 흥건히 그들의 속옷까지 적셔대는 과잉의 약물 말이다. 이 과잉의 소독약처럼 한국인들의 욕망은 온통 안전에 대한 두려움과 과잉의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 지나침이 무엇을 해결하거나 궁극의 행복을 가져다주기는 하던가? 이렇듯 제동기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과잉 욕망과 분리주의적인 주류의 배타적 의식에 대한 새로운 보기를 촉구하는 것이다. 정작의 의미를 강탈당한 욕망과잉의 사회, 우리들의 일그러진 초상을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 『위풍당당』; 삽질 개발의 광기와 그 폭력성

 

이 과잉의 탐욕은 인간과 자연으로까지 거침없이 밀고 들어와 폭력의 광기를 뿜어댄다. 성석제는 『위풍당당』이란 반어적 뉘앙스 물씬한 소설에서 이를 마음껏 놀려대고 야유를 보낸다.

외진 산기슭 강마을에 버려진 드라마 세트장, 이 우스꽝스런 공간의 대비(對比)는 꼭 우리들의 모순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한 미소를 짓게 한다. 문명의 장치들이 작동하지 않는 곳, 인간이 어떤 것으로 수식될 이유가 없는 곳, 그래서 과시와 허영과 기만이 부질없는 깡촌에 ‘아르마니 넥타이, 페라가모 구두, 베르사체 선글라스, 카르티에 시계’를 착용한 폭력배들이라는 소설의 구성은 더욱 희화적(戱畵的)이다.

 

문명과 자연의 싸움은 폭력조직과 촌동네 사람들의 전투란 소설적 사건이 되고 급기야 이 폭력성은 중장비와 덤프트럭 수백 대가 군대처럼 들어오는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4대강 개발이란 삽질정책으로 산하를 폐허화시킨 개발의 광기에 휩싸인 오만한 권력의 뻔뻔함이 겹쳐진다. “자연 잘못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자연이 가르쳐 준다”라고 외치는 자연 같아서 보이지 않는 사람, ‘여산’의 외침이 실낱같이 애처롭게 들리는 작품이다. 이 개발이란 미명하에 저질러지는 폭력에 의해 희생되는 우리들의 또 다른 몽매함의 경고일 것이다.

 

- 『너의 목소리가 들려』; 부인된 존재자들의 실재함에 대한 이야기

 

한편, 우리들의 이처럼 목불식정(目不識丁)같은 광기에 대해 약자와 소수자에게 가하는 보이지 않는 폭력성을 접하게 되는 것은 또 다른 낯섦일 것이다. 김영하의 『너의 목소리가 들려』가 바로 그것이다. 안 들리던 목소리를 비로소 들리게 하는 작업이다.

아마 근작 소설 중에서 가장 시인의 마음이 두드러진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존재, 사회에서 그 존재자의 존재를 부인하고 무시했던 존재를 비로소 보이게 하고, 관심의 영역으로 인식하게 하려했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오토바이 폭주족 하면 대개의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들에게 불온한 이미지를 바로 덧씌운다. 낯선 무엇인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할 때, 그 대상에 불편해하고, 불안한 감정을 갖는 것이다. 그리곤 곧이어 자신들의 영역에서 추방하기 위해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경찰력과 법이라는 잣대로 제단하고 배제시켜 버리는 것이다. 소설은 바로 이 불온한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기위해 시도조차 하지 않는 우리들을 향해 있다. 우리들이 낙인을 찍어 경계 밖으로 밀어낸 존재들, 그들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린 타자에게 조차 우린 신세를 지고 있다고.

 

이들 소수자, 약자들에게 보내는 비하와 동정의 양가감정을 수반하는 우리들의 비틀린 시선, 사회 약자들의 자식일 뿐인 치킨 배달부와 자장면 배달부, 퀵 운송업체 직원인 그들에게 차별과 서열화된 시선을 보내는 우리들을 볼 때 이 낯설고 화끈거리는 감정이 소설의 의미가 될 것이다. 우리들, 주류사회가 부정해야 했던 불온한 것의 의미를 되새김질 하게 된다.

 

- 『리틀 시카고』; 연민인가? 관음증인가? 수치를 모르는 우리들

 

그러나 연민의 이면에 있는 양가적인 감정이 우리들의 진심을 조롱하기도 한다. 진정함이란 무엇인가? 정한아의 『리틀 시카고』는 경계 밖으로 몰아내고 잊었다가 슬그머니 사회적 죄책감과 수치심에 어설프게 그들을 관심의 영역으로 초대해 인심을 쓰는 그 허위의 실체를 쫓는다.

 

소설은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쇠락(衰落)하는 기지촌의 시퍼런 멍의 기록이다. 미군 기지의 이전(移轉)과 함께 세상의 시선은 비로소 골목을 찾아든다. 심심한 대중의 관음증을 채우기 위해 카메라 무리를 이룬 방송사 촬영팀이 들어와 화제를 만들고, 몰염치한 말들을 쏟아낸다. 그때 대중을 향해 이를 관통하는 강렬한 소녀의 항변이 있다. “우리 골목 때문에 숨도 못 쉬게 마음이 아픈가요?”

 

이 문장은“연민의 한계, 그리고 양심의 명령까지 훨씬 더 진실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는『타인의 고통』의 저자 ‘수전 손택’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별도로 부탁했던 말에 가닿는다.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면 ‘우리’라는 말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는 진정의 충고를.

 

이렇게 다섯의 소설은 실재하고 있으나‘있음’으로 인식하지 않으려는 어떤 고집스러움에 대한 비로소의 현시(顯示)인 것이다. 여기에 문학의 위상이 있는 것일 게다. “문학이 에피스테메(Episteme)들 사이의 간격을 채워준다”는 푸코(Michel Foucault)의 말이 바로 그것이다. 시대를 지배하는 인식의 기초들 사이에 벌어진 틈을 채우고 연결해주는 것 말이다. 이를 통해 문학은 세상의 외연을 넓혀 낯선 곳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경계의 저편에 혹은 기억의 심연에 밀어두었던 것을 꺼내 궁극의 진실을 드러나게 하여, 시선과 사유의 영역을 확장하게 해준다. 결국 이 광대해진 인식능력이 서로 다른 것들을 이해하고 화합하게 하며, 두려움을 떨치게 하고, 행복과 희망의 가능성을 꿈꾸게 하는 것일 게다. 소설을 읽는 것, 읽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연유에서이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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