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의 이해 현대사상의 모험 8
마샬 맥루한 지음, 김성기 & 이한우 옮김 / 민음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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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 나를 에워싸고 영향을 미치는 환경을 이해하려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생물학적 본성인 자기 보존의 욕망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불완전하거나 불편한 요인들을 회피하거나 제거하여 안정적인 삶을 유지하려는 의지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그 세계가 작동하는 보이지 않는 기관(器官)들의 윤곽을 탐색하고 이해할 수 있는 원리들을 찾아낸다면 아마 이러한 의지와 욕망 실현의 접근에서 긴장을 떨쳐버릴 수 있을 것이다.

 

마셜 맥루언의 이 고전적 저작은 인간 신체의 확장물이자 촉진자로서 <미디어;Media>를 정의하고, 이 미디어를 이루는 기술의 점진적 변화와 발명에 따라 인간과 인간사회를 광범위하게 지배하게 되는 인식 및 지각 모델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 현상들을 역사적으로 탐사하여 지금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지를 제시하고자 하는 노력을 수행한다.

 

특히 기계화로 표명되는 산업혁명 이후의 시대와 전기(電氣)를 자원으로 하는 오늘의 시대가 지니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특징과 현상들을 규명하고, 이것이 인간의 정신과 정서, 그리고 행동에 미치는 양상들을 설명하고 있다. 오늘의 우리들은 매우 급속하게 인간 확장의 최종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는 저자의 선언적 문장은 문자시대와 기계시대의 사고(思考)에서 깨어나지 않으려는 관습적, 기득권적 존재들과의 필연적 갈등을 낳은 본질임을 보여준다.

 

어떤 미디어나 기술의 <메시지>는 결국 미디어나 기술이

인간사에 가져다 줄 규모나 속도 혹은 유형의 변화이다.” -36

 

인간 기술의 변화는 돌도끼에서부터 문자, 우마차, 인쇄기술, 철도, 방적기계, 화폐, TV, 영화, 고속도로, 비행기, 컴퓨터, AI Robot에 이르기까지 인간 신체를 확장하는 일련의 작업이다. 즉 이들 각각의 미디어(媒體)는 기존의 과정들을 증폭시키거나 가속화했을 경우 초래되는 정신적, 사회적 결과들을 만들어 낸다. 익숙한 예로써 철도는 이것이 등장하기 전까지 있던 각종 규모들을 가속화시키고 확대해 완전히 새로운 사회를 창출했다. 이 새로운 미디어는 도시와 노동과 여가 생활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삶을 만들어내도록 강요 한다. 미디어는 이처럼 인간의 행위와 결사(結社)의 규모와 형태를 형성하고 제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미디어는 곧 그 사회 속성 자체의 메시지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미디어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미 지나버린 것들을 붙잡고 낡아빠진 퇴행적 몸짓으로 세계를 혼란으로 몰아넣곤 한다. 이 까닭을 맥루언은 미디어의 <내용> 때문에 그 미디어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방해를 받는다고 지적한다. 미디어 그 자체가 내용을 지닌다는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전깃불이 <내용>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 때문에 미디어로서 주목하지 못하는 것은 이의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물론 오늘날 광통신망 등 전기의 커뮤니케이션, 정보 미디어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어떤 것이 작동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낡은 것이다.”는 오래된 아포리즘(aphorism)이 있듯이, 이 이해는 이미 진부한 것이 되고 만다.

 

시대를 읽을 수 있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너무도 중요한 것이지만 시대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설혹 기존의 형()들이 정점에 이르는 순간 새로운 정반대의 형들이 나타나는 순간을 바로 목격할 수 있기도 하지만 그만한 주의력과 집중력을 지니기란 사실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도 하다. 초음속 전투기가 음파를 돌파하기 직전에 음파들은 비행기 날개에서 비로소 가시적인 것이 된다. 소리가 끝나기 직전에야 소리가 보인다는 이 사실처럼 새로운 전환은 반대의 상황을 야기한다.

 

우리는 오랜 문자문화 시대와 서구에 비해 상당히 짧은 기계 시대를 살았다. 사실 오랜 문자 문화시대라 하지만 대다수의 평민인 피지배계층은 구술문자 시대에서 인쇄 문자시대로 이행한 것은 불과 1세기도 되지 않는다. 어쨌든 서구 사회에 비해 인쇄문자, 기계 시대의 경험이 짧기는 하지만 이로인한 급격한 변화의 유 무형 영향들을 받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기계 기술의 본질인 세분화 테크닉이라든가, 관계들의 유형화를 통한 단편적 분석의 경향성은 중심과 주변이라는 중앙집중적 태도를 심화했다. 이는 인쇄 문자와 어울려 더욱 분석적이고 전문적 심리를 정착화시킨다. 아마 이러한 양상들이 오늘의 합리주의 서구사회의 표상이며, 한국 사회의 지배 계층에 자리잡은 인식일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이미 탈기계화, 탈문자화하는 정보통신의 시대로 이미 깊숙이 전환되어 있다.

 

때문에 수많은 갈등과 혼란이 빚어지고 있는 것인데, 옮겨간 새로운 미디어 시대의 메시지를 읽어내지 못하는 계층과 이를 이해한 계층의 엄청난 간극이 발생한 것이다. 공장 기계화는 공정을 유형화하고 세분하여 효율화하는 것이지만 공장 자동화는 이들을 근본적으로 통합하는 동시성의 기술이다. 즉 중앙집중화(중심-주변)에서 탈중앙집중화(분산화)처럼 정반대의 현상을 의미하듯 두 사회는 아주 다른 사회이다. 문자문화(기계화)에 경도된 인간은 이 새로운 세계에서 감각마비에 상태에 빠지고 만다. 즉 무관심과 무지라는 부정성에 매몰되는 것이다. 인쇄 문자문화에 매몰된 문화적 편견으로 가득 찬 시각화된 이들 인간은 청각, 촉각 등 총합적 감각의 인간을 배제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이러한 현상이 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검찰정권의 시대착오적인 퇴행적 정치 양태 바로 그것이다. 또한 이러한 퇴행성 인간을 선택한 많은 대중들 또한 변화된 시대의 메시지를 읽는데 무능했음은 물론이다. 작가 로즈(A.L Rowse)가 영국 지배권력자들과의 인터뷰에서 그들은 각종 경고들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그들은 반공주의에 혈안이 되어있어 히틀러의 등장이 주는 메시지를 읽어낼 수 없었다.(50)”고 지적한 것은 바로 지금 우리가 겪는 실패와 동일한 예일 것이다. 인류의 가장 큰 적은 눈으로 보이지 않고 인식되지 않는다.“는 미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의 말은 시대 변화(메시지)를 읽는 데 있어 우리 인간들의 근시안에 대한 준엄한 비판일 것이다.

 


미디어, 새로운 기술의 효과들은 견해나 개념의 차원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 이 오해를 우선 벗어나야 한다. 미디어는 오늘의 스마트폰이나 인스타그램, 유튜브처럼 인간과 인간사회의 감각비율이나 지각 패턴을 서서히 그리고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으면서 변화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미디어의 출현은 인간 감각 생활의 확장이기에 사람들의 감각 생활을 재편하고, 사람들의 승인 여부와 관계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견해나 개념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감각생활의 재편임을 이해하여야 한다. 인간 감각이 시각문화에서 총체적이고 통합적 감각 체계로 변했다는 것은 정치와 경제, 사회문화 전반에 새로운 질서와 제도의 변화를 요구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작금의 권력은 여전히 낡아빠진 수구적 권위주의 독재정치의 회귀를 열망하고 있다.

 

우리 자신을 증폭시키고 확장시키게 해주는 새로운 미디어와 기술들은,

방부처리를전혀 하지 않은 채 사회라는 신체에 가하는 

어마어마한 집단적 외과수술이다.”   -113

 

기계시대(인쇄 문자시대)는 효율과 실용성을 추구하면서 인간 정서나 감정을 억제시키고 내몰았다. 이제 새로운 전기전자의 시대라는 급격한 반전지점을 넘어 돌아 올 수 없는 극히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음을 사람들에게 감지케 하고 있다.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일방적이고 기계적으로 팽창한다는 낡은 패턴의 집착은 이제 더 이상 이 세계에 아무런 영향력도 중요성도 가지지 못할 정도로 소용없는 것이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GPT’로 대표되는 인공지능의 보편적 일상화나 자동화공장처럼 분할된 작업 절차들의 모든 기능을 유기적으로 조직하는 복합적 기관(organs)으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변화된 감각비율, 새로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볼품없는 천박한 자아만 비대해진 인간, 물속에 비친 자기모습, 이 확장된 자기 이미지를 스스로 통제하기 전까지 마비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 소위 나르시스(narcissus) 신화다. 이 감각마비에 빠진 존재는 요정 에코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자신을 확장한 거울 이미지에 사로잡혀 깨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깨어나려면, 다시 말해 자신을 진정 확장하려면 자기 단절(절단)의 희생을 감수하여야 하는데, 이를 행하지 않는 이상 그는 영원히 이 마비에 매몰되어 있게 된다.

 

사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앎(지식)이 아니다. 우리 신체의 중추신경 조직은 상해를 일으키는 기관이나 감각, 기능을 단절하거나 고립시키는 전략을 통해서 스스로를 보호한다. 자기 확장은 이처럼 필연적으로 자기단절의 선행을 요구한다. 이 선행적 자기 절단의 희생을 회피하는 한 마비는 풀어지지 않고 비대해진 자아로 주변을 괴멸시킨다. 즉 야만적 폭력이 난무하는 퇴행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미디어는 인간 감각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지금은 새로운 미디어의 시대, 순간적이고 총체적인 장의 인식을 제공함으로써 좋든 싫든 한꺼번에 시야에 밀려드는 현상들에 의한 사회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를 제아무리 가리려한들 전자전기 시대인 오늘 인간들의 인식을 차단할 수 없다. 퇴행하는 인간들은 이 변화를 부정하고 통제하려들지만 그것은 필연적인 충돌을 낳는다. 혼란이고, 고통이다.

 

일방통행의 전통적 미디어들에서 다양한 통로를 열어둔 미디어로 이행 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관습적 지혜를 대표하는 사람들, 그들이 집착하는 미디어는 자신들의 지위와 안전, 기성의 지식이라는 단순한 형태에 의존해있기에 혁신(새로운 변화)은 파멸로 인식될 것이다. 케케묵은 부패한 지식이라는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이 추한 낡음은 변화된 인간 세계의 감각비율을 억지로 기계시대의 그것으로 되돌리려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전자전기 시대의 미디어가 지닌 본성을 돌릴 길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와 관련하여 미디어의 성질을 알아야 한다. 단일한 감각을 고밀도 데이터로 가득한 상태로 확장시키는 미디어를 '뜨거운 미디어(hot media)'라 부르며, 시각적 언어적 정보가 낮은 저밀도의 미디어를 '차가운 미디어(cold media)'라 한다. 지금 우리들의 세계는 뜨거운 미디어에서 차가운 미디어시대로 이동했다. 차가운 미디어는 이용자가 채워 넣거나 완성해야 할 것이 있어 이용자의 참여도가 높은 미디어다. 인스타그램, 유튜브, 페이스북 등 소셜 네트워크에 이용자들이 몰려드는 이유이다. 이는 전문성이 강한 인쇄문자의 권위주의적이고 중앙집중적 권력을 인정하지 못한다. 분산화되고 집단적이며 횡적으로 인간들을 통합하는 오늘의 새로운 미디어 시대가 의미하는 바를 읽어 내야 한다. 이를 회피하는 한 혼란과 문화지체를 피할 수 없게 된다.


광화문과 삼성동에 정권 선전용 전광판을 설치하고 일방적 메시지를 쏟아내려는 사태는 이들이 얼마나 시대의 변화, 변화된 미디어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의 여실한 표징 일 것이다. 차가운 미디어의 시대, 이용자(소비자)가 참여 할 수 있는 미디어를 봉쇄하고, 참여 불능의 일방적 미디어로 훈계하려는 이 역행성의 행위는 이들의 퇴행성을 입증할 뿐이다. 이로서는 결코 참여와 감정 이입이 일어나지 않음을 이들은 알지 못하는 듯하다. 이들 기득권 집단이 머물러있는 지나간 기계시대에 대한 향수는 오직 기만과 악의, 야만과 폭력의 야욕 냄새만을 뿜어댈 뿐이다.

 

하나의 감각만을 높이려 들면 최면상태가 일어나고, 모든 감각들을 냉각시키면 환각을 낳게 된다. 권력의 최면상태에 빠져 자신들의 감각을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하려들면 끔찍한 파멸이 야기될 것이다. 이것은 예언이 아니라, 이미 실증된 것이며, 이 세계의 원리이자 본성이다. 인간 확장물인 미디어는 어떤 것이 일어나게 하는 인자(因子)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현재의 경험이 지니는 불연속성들을 세밀하게 조사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회피하고 억압하는 기계화 시대의 방법으로는 이 사회는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양성, 획일성, 연속성, 계열성과 같은 기계시대의 패턴으로는 복잡성, 다양성, 유기적으로 얽힌 이 세계에서 아무것도 만들어 낼 수 없다.

 

현대 생활의 변화된 조건들을 발견 탐구하는 이 위대한 저작은 인터넷이 출현하기 20년 전에 써진 저술이다. 그러함에도 오늘날의 정보기술 혁명의 시대에 맞이한 미디어들을 해석하는 데 치밀하고 예리한 이해를 돕는다. 맥루언이 인간이 자신의 신체를 확장하기 위해 만들어낸 숱한 미디어들이 발생할 때마다 인간과 세계의 전환이라는 그 분별성의 원리를, 그 구조적 원칙을 새겨놓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디어는 새로운 힘으로써 세계의 근본적 재편성을 만들어내는 그 자체가 메시지인 존재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 세계의 현재와 나아갈 길이 보일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길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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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니비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4
박문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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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인간 사회 그 던적스러움에 대해서

 


사람들은 끔찍하다가도 애틋했고, 애틋하다가도 끔찍했다.

누추한 동시에 아름다웠고 아름다운 동시에 누추했다.” -37

 

 

우리네가 살고 있는 인간 세계의 곤혹스러움, 이것의 정체를 묻는 것은 터무니없이 멍청하고 기만적인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간단히 모든 어려움은 인간들이 앎을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라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무얼 모르고 있다는 것인가? 라 다시 묻는다면 자신들이 발 딛고 선 곳을 뜯어내고야 마는 몽매성, 변치 않는 태생적 불완전성이라 말하는 것으로 족할까? 어쩌면 이 소설은 이 답변의 한 양태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제초제와 수은 그리고 방사능에 절여진 땅’, 자신들이 망가뜨린 세계에 더 이상 희망 없음을 예견한 인간 무리가 마지막 우주선 아듀호를 타고 떠나버리고, 이의 탑승에서 배제된 인간들만이 남은 지구가 배경이다. 소설은 2199년 바로 이러한 마지막 이주가 진행되던 날의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200년이 흐른 2399년의 남겨진 인간들의 세계를 들려준다. 그러니까 200년 전에 진행되었던 탑승 자격과 기준도, 이의 결정권자자들도 알려지지 않은 채 비밀리에 진행된 도피성 이주, 한 무리의 인간들이 나머지 인간들에게 행한 이 얄팍한 사기극이 남은 인간들의 역사에 인류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으로 기억되는 세계이다.

 

즉 버려진 인간들의 역사이다. 아니, 사실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난 영악한 무리들, 그 쓰레기들이 버려진 것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사건의 현상이 그렇다는 말이다. 2399년의 세계는 대다수 인간이 자연임신 능력을 회복하지 못한 세상이고, 부족한 인간을 대신해 복제 인간 클론이 함께하는 세계이다. 원본과 사본의 문제는 실재와 관련하여 인류 역사의 오래된 논의거리다. 여기에도 이 글의 冒頭에서 기술한 앎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으며, 그 답은 어쩌면 자명한 것일지도 모른다. 구별 짓기의 원형적 뿌리에 대한 앎의 한계, 나와 너는 다르다. 다른 존재이니 언제든 배제시킬 수 있다는 폭력성이 은폐된 명칭이기도 할 것이다.

 

소설은 클론인 레아가 읽는 아듀호 사건 이후의 역사를 기록한 사진으로 살펴보는 21세기부터 24세기라는 책을 통해 2399년의 현재를 설명한다. 아듀 사태 직후의 지옥같은 인간 세상의 양상부터 무력해진 인간들의 생존책, 그리고 거주지구의 계층적 분할, ‘테트라로 불리는 여가형 전자기기와 일종의 편의 인간인 반려기계 휴루의 대중화 등 점진적 복구와 복귀 의 역사가 흐른다. 200년의 시대별 역사는 상징적 제목 하에 기술되고 있는데, ‘카오스 이후’, ‘서행, 슬로우 스텝 무브먼트(SSM)', '인간과 동해하기 시작한 클론’, ‘함께 계속 가야 할 길처럼 역사 시간의 진전에 따른 인간 세계의 변화를 그려내고 있다. 결국 소설의 세계인 2399년 현재는 클론과 인간이 함께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인간들이 으레 그렇듯 클론에 대한 구별 의식은 점잖은 휴머니즘의 윤리에 의해 폄훼되고 멸시된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유구하고 강력한 가치라는 인간적이라고 하는 윤리의식이다. 즉 클론을 차별하기 위한 이 거창한 위선의 논리가 윤리의 모습을 할 때, 클론은 상처를 입는다. 여기에는 역설적 모순이 내재하는데, 목적과 효용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이기심이 클론의 존재를 환영한다는 것이다. 사실 윤리의식이란 존재치도 않는 이러한 탐욕스러움이 오히려 차별을 지우는 것은 그 본색이야 어떻든 표면적 평등을 실현한다. 역시 인간 앎의 한계는 여기까지인가 보다.

 

긴 암흑기를 견뎌낸 인류는 병든 지구와 함께 늙어가며 몸을 천천히 회복해 나가고, 그 엄청난 분쟁과 소란의 역사를 겪은 이후 평화로운 세상으로 접어든다. 이 평화란 인간의 끔찍함과 누추함이 다시금 발현되는 비옥한 토양이 되는 것이 인간 사회 속성인가보다. 아마 인간과 인간세계란 항시 자신이 저지른 거짓과 기만에 대해 합리적 변명거리를 찾아내는 부도덕하고 몽매한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거주지는 도시와 빈민가, 재건지구로 삼분되어 각기 메트로, 게토, 리부트로 불리며, 살아가는 방식, 즉 지구 환경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계층화된 거주 구역을 이룬다.

 


소설의 상당한 서사는 이 구역 중 제로라는 구역의 게토에 거주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들은 버리지 말자, 사지 말자, 만들지 말자라는 ()행동 수칙을 엄중히 유지해나가는 공동체다. 이 게토의 수장은 라는 이름을 한 여인이다. (O)'조화, 조율' 쌍둥이 자매와 '마모루'라는 남자 아이와 함께 동굴에 거주하며, 그들 공동체의 수칙대로 살아간다. 가파른 산등성이 안쪽에 자리잡은 오래전 천주교 성지였던 곳으로 게토의 여타 지역 중 가장 폐쇄적인 곳으로 인식되는 곳이다. 수렵과 채취, 그리고 나눔과 돌봄이 자유로운 연대 속에서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사랑의 모양은 이성애 하나가 아닙니다. 인류가 혈연과 친족 관계에 매달리다

망친 걸 좀 들여다봐요. 어떻게 과거에서 배운 게 없어요?” - 73

 

만들지 말자라는 수칙은 이들 게토에서 어떤 새로운 생명체도 새로이 탄생하지 말아야 되며, 따라서 임신한 산부는 머물 수 없는 곳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의미에서 인간에 대한 처절한 회의와 통렬한 자성(自省)을 읽을 수 있다. 소설은 아듀 사태 이후 24세기까지 이어진 생존방식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200년의 역사시대는 폭주에서 순응으로, 그리고 성찰의 시대에 이르렀다고. 따라서 나는 이 소설을 인간과 인간 사회에 대한 성찰의 기록으로 읽게 된다. 그런데 돌연한 자전거 사고로 다리를 손상당한 쌍둥이 언니 조화의 임신으로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한다.(조화와 조율은 가임여성임이 소설 초반의 장면에 등장한다.)

 

임신한 여인으로서 조화는 공동체인 제로 게토에 머물 수 없으며, 더구나 아이의 출산은 그네들의 비행동 수칙이 용납하지 못하는 사태이다. 방법은 인간 구애 본능을 동력으로 작동하는 저열한 관찰예능서바이벌 프로그램인 <허니비>에 동생 조율과 마모루를 출연시켜 두 사람이 짝이 되어 조화의 아이를 자신들의 아이인 것처럼 위장하여 기르는 것이다. 수장인 오의 비난과 퇴출을 예상하지만 오히려 그녀는 조화의 요청을 적극적으로 진행할 것을 종용한다. 이 모순된 행위의 이유를 발설하는 것은 죄악이 되리라.

 

이 자연 임신과 출산 가능한 인간만이 출연 가능한 번식 쇼에 대한 대중의 평가는 양분되는데, 버려진 땅에서 아기를 잉태해 기르는 일이야말로 가장 헌신적인 형태의 인류애라며, 새 세대에 대한 기대와 열망으로 환호하는 부류와 바로 이 환상과 오해의 주입을 통한 인간과 클론을 구별짓는 저열한 기만극이라는 비난이 대립한다. 이 비속한 구애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에 대한 평가는 작금 한국 사회에 만연한 유사 프로그램을 상기하면 그 천박성을 굳이 나열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허니비 (Honey Bee)>라는 상징적 프로그램명은 다분히 자연 생식의 기만성을 떠올리게 한다. 어쨌든 자연 임신과 출산이 희귀해진 세계의 대중이 환상을 먹고 살든 대리 만족을 하든 이러한 욕망을 자양분 삼아 웃자라기마련이다. 이제 조율과 마모루는 조화가 출산할 아이를 위하여 출연하여 타 출연자들과 함께 열연한다. 여기에 클론인 레아가 해킹을 통해 신분을 속이고 출연자에 합류한다. 자신은 사본 같은 게 아니란 걸 보여주기 위해서.”

 

프로그램 <허니비>를 통해 소설은 예전 기수의 출연자가 겪는 프로그램의 후유증들 - 프로그램 후원자들의 지원과 압력과 함께 따라오는 육아에 대한 간섭, 부부가 된 이후의 관계 파탄, 모성애라는 근거없는 이해의 강요, 보여줌으로써 획득되는 재화에 내재된 무수한 갈등과 위선들 등등 - 이 신랄한 비평적 사유들과 함께 조율과 마모루, 레아 세 사람의 미묘한 구애 전선과 더불어 서사적 재미의 균형을 맞추며 진행된다.

 

희생과 양보라는 숭고한 가치와 한 주체의 피로라는 해로움이 대립되는 모성애 논의, 인간과 클론의 구별과 같이 존재를 타자화(他者化)하며 배제하는 불의한 영악함과 같이 소설은 실종되거나 매몰된 이 사회의 위선과 기만, 탐욕 등 자신들의 토대를 무너뜨리곤 책임을 외면하는 아듀호의 비열한 인간들, 그리고 마주하는 세계의 모든 어려움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 무심하고 몽매한 인간 군상들을 이야기 한다.

 

아마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조율과 조화 자매의 이름이 절로 떠오를 만큼 인간 세계에 대한 강력한 지향점을 가리키는 것만 같다. 강을 가로지르는 직선은 흐트러짐 없이 또렷했다. 레아와 마모루는 물에 도착한 조율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구별이 해제(解除)되고 비행동수칙, 즉 슬로우 스텝의 삶을 향해가는 굳은 신념의 인간을 나 또한 바라보면서 이 이상적 세상의 도래를 꿈꾸어 본다. 아니 어쩌면 무너져 내리는 인류 공동의 소중한 가치에 대한 감각 자체를 일깨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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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6-01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적 의미를 함유하고 있어 보입니다.

필리아 2023-06-01 10:53   좋아요 0 | URL
이야기의 재미에 더해 인간 성찰이라는 테마가 녹아 흐르고 있어요. 작가의 필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호시우행님~
 
사랑의 완성
로베르트 무질 지음, 최성욱 옮김 / 북인더갭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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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집에 대한 리뷰는 두 차례에 나눠 기술하기로 했다. 그 까닭은 무질이 생전 의도하여 출간했던 의지에 따름이기도 하고, 감상자 역량의 한계이기도 하다. 우선 사랑의 완성세 여인에 대한 감상을, 그리고 두 번째에 생전의 유고에 실렸던 지빠귀를 비롯한 15편의 단편들에 대한 리뷰로 분할하여 남긴다.

 


사랑의 완성』 ❶ 사랑의 완성과 세 여인에 대해


 Robert Musil (Klagenfurt, 1880 - Ginebra, 1942)


무질의 작품을 읽기에 앞서 전통적 형식과 내용을 벗어나 이야기 될 수 없는 것의 이야기, 즉 사실주의적 이야기로는 삶의 심연에 이를 수 없다는 그의 문학관에 대한 이해의 선()지식이 요구되는 것 같다. 무질에게 문학은 경험적 현실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닌 인간의 인지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현실의 포착 노력이며, 개념을 벗어난 사고의 표현을 시도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독자들이 무질의 작품을 회피하게 하는 요인일 것이다.


특히 인간 이성이라는 합리적 논리에 길들여진 오늘의 사람들에게 인과적 논리에 대한 혐오나 비논리적 감성, 비현실성, 불가능의 경계를 향해 돌진하는 무질의 문학은 이성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작품으로 쓸 필요는 없다.”는 그의 선언처럼 어떤 확정적 의미를 찾을 수 없게 한다. 따라서 그의 소설은 아무것도 확정된 것을 말하지 않으며 단지 시도된 표현들의 여정에서 생성되는 것이기에 독자 각자의 발견에서 비롯되는 것이 된다. 참으로 어려운 말이기도 한데, 이야기 아닌 이야기 그 자체를 통해 스스로 만들어지는 어떤 확실성을 발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마 이 책의 표제를 사랑의 완성으로 한 것은 무질을 대표하는 문학론적 의미를 따르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무질은 학문적 개념체계, 즉 이성의 논리 강요를 폭력으로 비유하며, 문학의 논리를 사랑에 비유하듯, 그의 소설들은 다분히 비논리적 감성, 어떤 비의를 향하고 있다. 그러나 이성을 표방하는 학문의 현학적 정확성은 오히려 객관성이라는 환상에 의존하고 있으며, 오히려 환상적 정확성을 표방하는 문학이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그의 생각처럼 문학이야말로 작가에 의해 창조된 세계의 완전한 모습임에 공감할 수 있다.

 

1. 사랑의 완성


 


무질의 작품 선집인 이 책은 그가 당초 발표했던 작품집의 의도가 드러나지 않는다. 단편 지빠귀가 생뚱맞게 별개로 제일 앞에 수록되어 있고, 각기 별도로 발표되었다가 후일 세 여인이라는 단편집에 묶여 출간된 작품이 두 번째이고, 사랑의 완성합일이라는 단편집을 위해 무질이 의도하여 개작하고 집필한 조용한 베로니카의 유혹과 함께 구성된 작품으로 독립하여 세 번째에 수록되어 있으며, 끝으로 생전의 유고는 무질이 분류하여 수록한 30편의 작품 중 그 절반만이 무질서하게 구성되어 있다.

 

출판사 혹은 번역자의 의도는 사건이나 행위 대신 회상과 상상에 의해 진행되는 조용한 베로니카의 유혹의 선형적 시간 순서를 파괴하는 전개가 독자에게 이해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배제한 듯하다. 또한 생전의 유고중 부분만을 선택한 까닭도 이러한 연유로 이해되지만, 이러한 편집은 어떤 의미에서 오만함이고 부주의함으로 읽힐 수 있다.

 

어쨌든 무질의 작품에 대한 출판시장의 척박함은 사실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미완성 장편 특이성 없는 남자를 제외한 그의 작품집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는 출판독서시장의 현실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수록 순서를 바꿔 표제작인 사랑의 완성에 대한 감상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이 작품은 출판사의 청탁에 의해 2년에 걸쳐 집필된 두 편의 단편으로 출간된 모음집 합일(Vereinigungen)중 한 편이다.

 

이 소설은 이야기에 대한 혐오에서 썼다.”고 할 만큼 실험적 시도가 지나치게 압도한 나머지 소설적 긴장이 결여되어있음을 작가도 고백할 만큼 독자의 이해를 불가능하게 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은 당대의 문제일 뿐이지, 무수한 실험적 시도의 작품에 익숙해진 오늘의 독자에겐 그리 낯선 것도 아니며, 독해 불능에 빠질만큼 어떤 난해성을 지닌 작품이 아니라 할 수 있다. 사설은 이쯤에서 멈추고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소설은 몇 안 되는 대화의 장면으로 시작된다. 사실 소설의 대부분이 기억의 회상과 몽상, 독백으로 이루어진 것에 비해 극히 예외적 장면이다. 정말 함께 갈 수 없어요?”, “안되겠소, 당신도 알다시피 급히 끝내야 할 일이 있소.” 딸 아이 릴리의 기숙학교 방문의 동행에 대한 남편과 주인공 클라우디네의 지극히 평범한 대화다. 그런데 이 대화에서 부부의 어떤 균열을 읽는다면 지나치게 과도한 해석이 될까? 딸 리아는 지금 남편의 소생이 아닌 결혼 전 치통으로 찾아간 미국인 치과의사의 자식이다. 여자는 홀로 기차 여행을 떠난다. 이 기억은 당시 열정과 과격하게 사로잡혀 저지른 평범한 충동일 뿐으로서, 본질상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흐르는 시냇물과 같은 것에 불과하다.

 

사실 여자의 회상과 몽상과 독백은 하나의 원 주위를 뱅뱅 돌 듯 은밀하게 숨겨둔 욕망, 과거의 문란했던 충동적 해방의 시절에 대한 강렬한 희구와 남편과 이룬 안정되었지만 억제된 삶으로부터의 도주라는 경계를 선회한다. 그런데 이 순환 반복되는 상념이 가져오는 낯설고 이질적 세계, 다름의 상태를 드러내려는 것이 아마 작가의 의도인지도 모르겠다. 이성과 비이성이 반복되는 오고 감의 반복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조화? 혹은 통일?, 이 점진적이며 눈에 뛰지 않을만큼 미세하게 이동하는 진행에서 클라우디네는 어떤 합일(合一)의 체험에 이른다. 소설의 모티프라야 정말 보잘 것 없다. 흔해빠진 유부녀의 관능적 욕망과 간통이라는 진부한 통속적 내용이지만, 이 소설은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모티프는 하나의 소설적 구실에 불과한 듯 여겨진다. 즉 성적 부정(不貞)에 대한 윤리적 탐구가 아니란 점이다.

 

무질의 작품들 전반에 자리잡은 독특성인데 주인공을 현실로부터 격리하여 고립시키는 것이다. 클라우디네는 폭설로 인해 소도시에 한동안 고립되는데, 이를 통해 현실 세계에서 작동하는 온갖 제약, 그 제한성을 이탈함으로써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감정의 세계라는 다른 세계에 진입하게 되는 것 같다. 소설은 이러한 다름의 세계에 대한 느낌이 도처에서 표현되고 있다. 길을 떠난 사람만이 느끼는 세상에서 가장 깊은 낯섦의 행복, 자욱한 안개 속을 달리다보면 모든 것이 실제보다 크고 어렴풋한 제 2의 윤곽을 띠는 것처럼...등등 인습적 틀의 사고를 벗어나 진실의 또 다른 면을 직시하게 하려는 장치일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작품은 무질 자신이 지향하는 문학을 말하려는 것이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때문에 사랑의 완성이란, 이성과 비이성(감성 등)의 합일을 추구하는 주인공을 통해 문학의 완전성을 말 하려한 것이 아닐까?

 

2. 세 여인


 

사실 연작처럼 묶여있지만 세 연인을 구성하는 세 편의 소설은 각기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던 작품들을 1924년에 단편집으로 엮어 출간한 것이다. 따라서 3부작으로 계획 집필된 작품이 아니라는 점이다. 수록된 세 작품에는 분명 여인들이 등장하지만 여자들은 실제 거의 말하는 인물들이 아니며, 남자의 상대역으로만 존재를 알릴뿐이다. 그런데 세 여인이라 제목을 붙였을까? 무질은 자신이 추구하는 비현실성과 비이성의 진실을 말하는 자기문학의 지향점으로서 여자를 설정한 것으로 이해된다. 즉 능동적 이야기의 주체가 아닌 침묵의 존재로 보이지만 실제는 바로 그 여자들이 소설이 말하고자하는 말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진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2-1. 그리지아(Grigia)

 

이 소설은 무질의 문학 정신을 대표하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살다보면 계속 이렇게 살 것이냐 아니면 방향을 틀 것이냐를 망설일 때처럼 인생이 눈에 띄게 느리게 흘러 갈 때가 있다.(40)” 소설은 이 시작 문장을 구체화한 기록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 작품도 예외없이 주인공인 호모는 오래된 금광 개발에 초빙되어 가족을 떠난다. 다시 말해 일상적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이동하며, 그곳은 곧 외적 환경으로부터의 고립을 뜻하고, 이로서 낯선 경험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이 낯섦의 공간은 소설 초입부에서 해당 지역에 있었던 일화로 설명되고 있는데, 미국에 돈 벌러 갔다 돌아 온 남편과의 동침을 했던 농부 아내의 기억에 관한 것인데, 남자는 남편을 흉내 낸 사기꾼이었다는 것이다. 여자는 자기 기억과 남자의 말을 비교해 보곤 듣자마자 자신의 기억과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챘음에도 어느 누구도 자기의 기억에 확신을 가질 수 없어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48~49)”는 것이다. 이성과 논리에 대한 전복이다. 갑자기 세상사의 모든 것이 불안에 빠진 듯한 이런 상황이 지배하는 곳, 왠지 꽤 오래 현실 세계와 격리된 공간을 연상시킨다.

 

이곳에서 호모는 그리지아라는 여인과 함께 살게 되는데, 그것은 동화같은 숲이 있으며, 자기 몸을 생전 처음 만져보는 것 같은”, “자기 삶의 생명력을 다 소진해버린 것 같은 그래서 그의 마음은 거지처럼 가난해짐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여기에 반전이 있는 것 같다. 이성으로 무장된 엔지니어인 호모가 마주한 여인과 장소가 허공에 떠있는 유희처럼 느끼게 하는 순수 자연의 세계, 문명이 스며들지 않은 비이성의 인간 세계라는 점이다.

 

일상적 현실 세계와는 다른 세계로 진입한 호모는 어느 날 버려진 갱에서 그리지아와 함께 쾌락을 나눈 후 잠시의 몽상 후에 여인은 없고, 갱 출구는 한 줄기 빛이 비치지만 큰 바위로 막혀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황당한 밑도 끝도 없어 보이는 이 동화같은 소설은 독자에게 잔뜩 수수께끼를 남기고 종료된 것이다. 호모는 탈출을 포기하고 죽음을 맞이하는데, 탈출의 가능성이 부재한다고 단언 할 수 없음에도 벗어나려는 시도를 중지한 그의 행동에 대한 해석이 남겨진 것이다.

 

평론가들은 이를 20세기 초 유럽이 처한 출구 부재의 상황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일상적 삶으로의 복귀를 거부한 것으로, 이성이라는 현학적 환상에 대한 혐오, 즉 신비와 비이성적 각성의 세계인 이 다른 공간에 머무는 것이 오히려 정직한 삶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어진다. 물론 호모의 내적 동기를 알 수는 없지만. 따라서 호모의 죽음 수용은 삶의 의지의 포기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삶의 열정적 추구처럼 보인다.

 

2-2. 포르투갈 여인(Die Portugiesin)

 


이 소설의 배경은 중세의 외딴 수직 암벽 위의 성이다. 자 또 고립이다. 오백 걸음 밑에는 작지만 물살이 센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물소리가 워낙 거세 ...교회 종소리가 울려도 듣지 못할 정도(77)”의 공간이다. 이 고립이 의미하는 바는 일상적 현실과 무관하다는 것이 아니다. 무질은 단지 외적 현실의 영향을 배제한 표본적 공간으로서, 일종의 실험 공간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학 박사 출신의 무질은 외적 영향 요인을 배제한 상태에서 순수 공간에서 인간들의 행동과 정신의 변화를 관찰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케텐의 영주 또는 케텐이라 불린다. 외부에서 결혼 할 여자를 취해야 하고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는 트리엔트 주교와의 싸움을 수행하여 승리하는 것을 소명으로 하는 존재다. 케텐은 주도면밀하고 냉철한 사람이며, 그의 아내 포르투갈 여인은 마법과 같은 행위를 보이는 사람이다. 이성과 비이성을 상징하는 존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몽환적 이야기는 주교와 마침내 종전에 합의함으로써 추구할 과제를 상실한 케텐의 상황으로 나아간다. 주인공 케텐은 케텐종족의 삶의 목표와 자아를 동일시한 인물이기에 종전의 결과는 자아 상실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마치 이를 증명하듯 케텐은 병들어 수척한 환자의 모습으로 변해간다.

 

그런데 이 변화를 가속화하는 존재가 출현한다. 언젠가부터 성에 와 있는 이방인 청년이다. 아내의 곁을 맴도는 인간에 대한 질투와 병마와 싸워야 하는 것이다. 케텐은 사경을 벗어나지만 점차 기력이 쇠잔해 간다. 소설에는 모호한 상징으로 늑대와 고양이가 등장하는데, 일종의 암시로 작동하는 것 같다. 자아의 상실로 쇠잔해가는 케텐은 무언가 행해야만 살아 있는 존재다.

 

케텐 사람들이 고양이를 죽이는 사건은 이를 자신의 행동에 대한 암시로 받아들이고, 이방인 청년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마치 행동의 실천, 의지만이 삶을 구원할 수 있다는 듯, 다 죽어가던 케텐은 오르기 힘든 성벽을 기적처럼 올라간다. 청년의 방에 도착했지만 이미 그는 떠나고 없다. 아내도 떠났으리라 생각하고 아내의 침실로 가 확인하지만 아내는 잠에 빠져 부드럽게 숨 쉬고 있을 뿐이다. 케텐은 불안감을 떨쳐버린 기쁨에 거의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기분에 빠진다. 그리곤   아무것도 증명된 것이 없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묻지 않았다, 정말 모호한 문장으로 소설은 끝난다. 대체 무얼 읽어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해석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한 작품이다. 아마 도전을 요구하는 이 활짝 열린 이야기를 어찌 해석해야 하는 지는 두고두고 음미해보아야 할 숙제이다.

 

2-3. 통카 (Tonka)

 

이 소설의 테마는 정말 얄궂은 데가 있다. 지극히 자명한 사실이 불분명한 지대를 거닐게 만든다. 남자 주인공은 이름 없이 다만 인 화학을 전공한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다. 그는 빈민 출신의 통카를 대도시로 데려와 동거한다. 어느 날 이들의 평범한 일상에 균열이 생기는 사건이 발생한다. 의사진찰 결과 통카의 임신과 성병이 발견된 것인데, 과거를 거슬러 잉태의 시점을 재구성하였을 때 그는 오랜 출장 중이었다. 결국 통카의 임신과 성병은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 편의 작품 중 가장 흥미롭게 읽은 작품이랄 수 있다. 그는 통카에게 진실을 말해 줄 것을 지속하여 요구하지만 통카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과학도인 그에게 이 침묵은 의학의 진실을 부정할 가능성을 인정하기 어렵게 한다. 통카의 특징으로 별로 말하지 않는 소녀라는 말 할 수 없음이 곧 통카의 결백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무질의 유머를 발견하는 것은 의외의 즐거움이다. 그는 한 여름에 내리는 눈송이’, ‘마리아의 잉태만큼이나 존재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침묵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게 기적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만든다.

 

그는 확률과 기적’, 이성과 비이성의 갈등에 빠져 허우적대고, 믿고자 하는 소망은 의학의 높은 확률의 가능성에 휘청댈 뿐이다. 여기 다시 역사적 진술에 관한 무질의 멋진 신념이 드러난다. 잉태의 시점, 즉 역사의 재구성이란 사건 현장의 확인성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실증적으로 해명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의 현실이 사고 속에서의 현실보다 적어도 100년은 뒤져있다는 무질의 주장이 의미하는 바와 같다. 역사란 창안되는 것이지 수집된 자료들을 꿰맞추어 객관성이라 주장하는 것은 허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역사란 인간 삶의 해석을 과제로 하는 학문이어야 한다는 주장과 맥락을 같이한다. 작가에 의해 자유로이 창작되는 세계야말로 완전한 세계라는 역사의식이 지닌 통념을 전도시키는 이 믿음의 수행이 무질의 문학이라는 것을 아마 가장 생생하게 실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일 것이다. 통카의 침묵은 단지 해석의 대상이 될 뿐이다. 주인공 화학도는 이성의 확실성에 집착하지 않고 통카의 침묵을 이해하려 한다.

 

무질은 이를 통해 그의 문학 논리인 사랑의 차원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그는 통카가 죽을 때까지 난 당신을 믿어요.”라는 말을 전하지 못한다. 평론가들은 통카의 침묵을 부정한 사실에 대한 시인이나 은폐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에 동의한다. 침묵은 침묵자체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 무질의 의지였을 것이다. 그래야 무질의 역사에 대한 인식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무질의 냉철한 이성과 비논리적 대담성의 통합, 즉 이성과 비이성의 합일 추구는 그의 소설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는 문학의 환상적 정확성에 대한 독특함일 것이다. 아마 그의 대표작인 특성없는 남자에서 울리히의 목소리를 빌어 주장하는 그 어떤 사물도, 그 어떤 자아도, 그 어떤 형식도, 그 어떤 원칙도 확고한 것은 없다.”며 무한한 가능성의 감각을 열어놓으려는 의도의 실천을 체험하는 사뭇 새롭고 흥미진진한 문학이라 하겠다.



*두 번째 리뷰 참조- <지빠귀> 및 <생전 유고>

  https://blog.aladin.co.kr/729034103/14620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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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6
문진영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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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번에 일어나는 구원은 신의 일이겠지만, 인간들은 서로를 시도 때도 없이,

볼품없이 구해줄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 <작가의 말> 에서


 


성급한 더위가 여름을 재촉하는 조금은 못된 계절이다. 폭설 내리는 겨울의 시간을 담고 있는 이 소설이 이러한 성급함과 못됨을 중화시켜주고, 아니 이 기운을 지그시 눌러주는 듯하다. 열이 잔뜩 오른 화를 다스리는데   창밖의 풍성하게 흩날리는 눈발은 아마 마음 평정에 제격일 듯싶다. 이 작품은 평온함, 따뜻해짐, 누군가와 같이함의 유대와 위로를 느끼게 해준다. 위에 인용한 작가의 말은 이러한 느낌, 아니 믿음의 반영일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란 무수한 갈등과 충돌을 헤치며 입은 상처를 어떻게든 봉합하고 다스리는 일이기도 하다. 소설은 죽음과 삶, 떠남과 떠나지 못함의 이 대조적 현상을 아주 소소한 마음들이 연결되어, 추운데도 펑펑 내리는 눈을 보며, 거짓말처럼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체험토록 이끄는 듯하다.

 

소설은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수평선도 지평선도 점차 희미해지다 결국에 사라지듯그렇게 영혼의 상처들이 지극히 일상적인 사소함의 나눔에 섞여 희미해지고 어느 샌가 평온함이 마음에 스며드는 그런 이야기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해변 전체가 마치 거대한 고물상처럼 퇴락한 바닷가 동네다. 이 공간을 중심으로 다섯 서사가 서로 물려들고 그 경계가 희미해지며 결코 뒤섞일 듯하지 않은 세상 모든 인간들의 고독과 상처가 바로 그 볼품없는 인간들에 의해 위로받고 평온을 되찾으며 삶을 지속할 동력임을 하나의 풍경으로 그려내고 있다.

 

서핑을 하면 (Ding)’나는 건 당연한 거니까. .....

그건...내가 오늘도 파도에 뛰어들었다는 증거니까.” -85

 

산다는 것은 세상에 뛰어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상처를 입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살아있음, 무언가f를 하고 있음으로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손상은 부정(否定)이 아니라 생()에 대한 긍정의 표시일 것이다. 떠남도, 떠나지 못해 떠남을 상상하는 것도. 소설은 이렇듯   퍽 다정한 침묵”,  “배고프지 않음”,  “폭설을 견딜 힘의 정체를 통해 위로와 평온을 선사하지만. 한편으로 세상의 남루함, 타인의 죽음을 일종의 가십거리로 삼는 기만과 위선의 천박함을 통해 이 사회의 몰지각과 부도덕성의 일상성을 넌지시 풀어 놓기도 한다. 사람이 죽었는데 벌금 몇 백 만원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컨테이너 숙소 때문이 아니라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였기 때문이다.”

 

마음 한구석이 불에 덴 것처럼 쓰라림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네 일회성 연민은 사실 세상의 불의에 대해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하지만, 귤 한 알의 건넴, 따뜻한 한 그릇 홍합 국물, 단지 함께 해 줄 수 있음으로 위태롭게 흔들리는 이 생에서 아주 잠시라도 닻을 내린 기분, 믿음의 안식이 된다. 이 소설의 따뜻함을 상징적으로 순환하는 귤은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다시금 또 다른 사람으로 이어지며 세상의 온기를 퍼뜨린다. 타인을 이해해보려 애쓰는 인간들이 있는 세계, 누군가 내민 것을 의심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의 평온함이 전편을 나지막하게 흐르며 순백의 눈송이가 되어 찬란하게 흩날리는 존재됨을 느끼게 해주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나라면 이 소설의 제목을 상황적 표현인 딩 보다는 고유한 결정체인 '눈송이들'로 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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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와 인간 - 가면과 현기증 (Le masque et vertige)
로제 카이와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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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이가 일상과 뒤섞일 때 그 사회는 부패한다!

- 주술과 홀림의 정치, 문명 퇴행의 표상에 대해서

 

 

이 책은 놀이를 출발점으로 하는 사회학의 기초를 놓고자 하는 작업이다. 인류의 오랜 역사 시간 동안 놀이를 단순하고 무의미한 어린이 같은 기본 놀이로 간주해왔고, 고작 심리학이나 생물학적 기반에 의한 교육 또는 훈련 역할정도의 연구가 고작이었으며, 지금의 현실도 이러한 범주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이는 지배 엘리트의 은폐된 어떤 의지에 대한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놀이에 대한 문화적 해석의 장을 전면적으로 열어놓은 요한 하우징거1938년 발표된 호모 루덴스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로제 카이와의 이 저술은 아마도 놀이에 은닉된 문화적 사회적 가치를 드러낸 지금까지의 가장 완결된 연구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책을 새삼 주목하게 되는 것은 놀이의 사회문화적 가치, 즉 현실 세계의 각종 제도와 규칙이 어떻게 놀이와 상호 작용하고 있는가에 대한 관심이며, 나아가 놀이는 한 문화의 도덕적, 지적 가치를 나타내는(58)” 중대한 표상이라는 점인 까닭이다. 다시 말해 어떤 사회의 지배적 놀이는 그 사회 실체의 얼굴이며, 야만과 문명 사이의 위치를 가늠하는 척도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저술은 바로 2023년 한국 사회의 문명적 위치를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수없이 다양하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놀이가 무엇인지부터 아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로제 카이와 놀이를 규정하는 특징을 여섯 가지로 규정하고 있는데, 자유로운 활동이어야 한다는 것과 시간과 공간의 범위가 한정된 분리, 격리된 활동이라는 것, 그리고 결과나 놀이의 전개가 결정되어 있지 않아야 하고, 재화나 부 같은 어떠한 새로운 요소도 만들어내지 않는 비생산적 활동이며, 규칙(약속)이 있는 활동이거나 허구적 활동이어야 한다는 것을 들고 있다. 이는 놀이란 즐거움 그 자체인 것이라는 점에서 언제든 하고 싶으면 하고 그만두고 싶으면 하지 않으면 되는 자유로운 것이며, 일상생활과 경계를 구분할 수 있는 놀이를 위한 별도의 장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개념 자체에서 당연히 도출되는 것이다.

 

특히 비생산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놀이가 생산에 참여하게 되면 실생활의 경계가 무너져 더 이상 놀이가 아닌 것이 되며, 놀이라는 순수한 즐거움을 파괴하게 된다. 아마 놀이의 가장 중요한 활동 요소일 텐데 필수적으로 해당 놀이의 절대적 규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규칙과 이에 대한 준수가 없다면 놀이는 놀이로 수행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이는 모두 규칙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규칙 없는 놀이도 있다. 자유로운 즉흥적 발상을 전제로 하는 인형놀이, 병정놀이, 기차놀이처럼 역을 맡는 즐거움으로 인해 노는 놀이가 있다. 이것은 감정이 규칙을 대신하는 놀이로서 이 감정(허구)이 곧 규칙인 놀이이다. 여기서 어떤 놀이든 오직 규칙을 지니든가 허구를 지니든가 둘 중 하나를 지닌다는 점이다. 둘 모두를 지닌 놀이는 존재 할 수 없으며 실제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 특징들, 특히 규칙과 허구의 놀이를 장황하게 서술한 이유는 이것이 곧 특정 사회의 문명의 위치를 가늠하는 중대한 분류 개념이기 때문이다. 허구의 놀이가 한 사회에 만연하는 경우 그 사회의 현실은 공정성이나 평등성, 민주주의적 의식의 쇠퇴, 사회적 불안정성의 증대를 예측케 하는 지표일 수 있는 까닭이다. 이를 보다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놀이의 역할에 따른 분류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카이와는 모든 놀이를 경쟁, 우연, 모의(模擬), 현기증’, 네 개의 역할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각기 아곤(Agon; 시합,경기), 알레아(Alea; 요행,우연), 미미크리(Mimicry; 흉내,연기,모의), 일링크스(Ilinx; 현기증,홀림,소용돌이)로 명명한다.

 

사실 오늘의 세계와 같은 법과 제도가 정비되고, 세습계급을 불식시키며 주술적이고 열광적 제의(祭儀) 사회를 벗어난 것은 불과 1세기도 되지 않는다. 물론 서구 사회의 경우 계몽주의가 태동한 17세기를 전후한 4세기 남짓 되겠지만 한국사회는 그야말로 30년 전까지 암흑 사회였다고 할 수 있으니 최근이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불과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허구적인 환상에 의존하는 혹세무민의 사회였음을 의미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놀이의 네 역할을 간략하게나마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놀이(Jeu, Play)의 네 역할(아곤에서 일링크스까지)

 

아곤(Agon) 적절한 연습, 부단한 노력, 승리에의 의지, 지속적인 주의를 요구하는 놀이다. 스피드, 인내력, 체력, 기억력, 재주와 같은 개인의 능력이 경쟁하는 놀이로서 체스, 당구, 축구 등등을 열거할 수 있겠다. 이러한 경쟁, 시합 놀이는 우선 공정하고 평등한 기회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불공평성을 최대한 배제하기 위한 규칙으로 점철되어 있다. 아이들의 여러 참을성 놀이는 아곤의 초기 놀이 양식일 것이다. 숨 오래 참기, 눈 깜빡거리지 않기 등 상대방에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는 순수한 개인 능력 드러내기 놀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알레아(Alea) 상대방을 이기기보다는 운명을 이기는 것이 문제인 놀이다. 의지를 포기하고 운명에 몸을 맡기고 숙명의 결정을 수동적으로 또 고의적으로 기다리는 놀이. 이 놀이의 본질은 노력과 성과에 대한 오만불손한 경멸이 자리잡고 있는데, 가혹한 현실 세계에서 노력과 능력으로 도달 할 수 없는 성취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놀이의 중요한 점은 참여자가 무릅쓴 부담과 위험에 엄밀하게 비례한 보상처럼 위험과 이익의 균형을 위한 주의가 기울여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현실에 없는 순수하게 평등한 조건의 인위적 조성이다. 우연만큼 평등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이에서 절대적 평등의 실현 규칙은 불가능하다. 아곤의 경우 먼저 시작하거나 나중에 하는 것이 유리하기도 하며 육상이나 빙상 트랙경기에서 안과 바깥쪽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물론 이를 상쇄하기위해 교대로 차지토록 하는 방법까지 동원하며 평등을 확립하려 한다. 복권같은 출생의 우연에 의한 환경적 우열, 체급별 경기의 체중의 불가피한 차이 등 완전한 절대 평등의 실현은 가능하지 않다. 알레아는 우연이라는 평등성으로 이를 보완한다.

 

미미크리(Mimicry)는 허구적 닫힌 세계를 일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한 놀이다. 가공의 환경 속에서 가공의 인물이나 사물이 되어 그것에 어울리게 행동하며 즐거움을 느끼는 놀이다. 집에 있는 의자를 죽 늘어놓고 칙칙폭폭 기차놀이를 하는 아이는 자신이 기관사인 척 하며 논다. 또는 엄마, 요리사, 군인, , 비행기, 자동차를 흉내 내거나 연기하며 논다. 어른은 가면을 쓰거나 변장을 하고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숨기고 실제의 인격을 해방시켜 방종의 분위기를 이용하며 논다. 미미크리는 곧잘 아곤과 결합하여 구경거리가 됨으로써 즐긴다. 운동선수, 영화배우, 아이돌스타 등은 능력 경쟁을 통해 관객과 청중에 과시함으로서 즐거워한다,

 

끝으로 일링크스(Ilinx) 일시적 지각의 안정을 파괴함으로써 기분 좋은 패닉을 즐기려는 목적의 놀이다. 몸을 빙빙 돌려 쓰러지거나 비틀거림을 즐기는 것, 높이 올라가는 그네, 광란적 회전을 즐기는 놀이를 들 수 있겠다. 혼란과 패닉을 즐기는 이 놀이는 고대 주술사의 광란적 환상의 몸놀림을 연상시킨다. 설명이 길어졌지만 이들 놀이의 역할과 그 수행을 앎으로서 이들과 현실 세계의 제도와 규칙, 사회의 특성을 대응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들 놀이가 인간의 강력한 본능들의 형식이며, 관념적이고 일정한 한계 내에서 일상생활과 떨어져 놀이하는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아곤은 페어플레이의 규칙 존중과 타고난 탐욕의 억제를 습관화 시킨다. 또한 알레아는 현대사회의 생존 경쟁이 요구하는 부단한 긴장과 경쟁의 열위의 체념을 보상하며 개인과 사회적 긴장의 배출구 역할을 한다. 미미크리는 자신의 인격에 잠시 타자를 받아들임으로서 공상과 환상을 즐기며 병적 일탈을 막으며, 일링크스는 기억의 부담, 책임의 고통, 세상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일시적 도피 수단이 된다. 이렇게 이들의 역할에 따른 기능을 해석하다보면 놀이라는 것이 사회적 순화, 배출, 훈련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일링크스에 분류되는 놀이가 만일 오염되거나 타락해서 더 이상 놀이의 범주를 벗어난다면 어떤 현상이 발생하는 지 생각해본다면 이 착란과 혼란의 추구가 일상생활 속으로 들어가 상습화되는 것이다. 아마 취함과 현기증 속에 있는 인간은 개인 자신은 물론 주변을 황폐화 시킬 것이 다. 다시 말해 놀이는 본능을 억제하며 제도적 존재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며, 이들 놀이를 부패, 타락케 하는 요인, 또는 사람, 권력의 침범은 질서와 규칙의 파괴를 낳게 될 것이다.

 

놀이의 부패와 타락, 그리고 사회적 표상으로서의 놀이

 

놀이는 인간에게 자연의 단조로움, 결정론, 맹목성과 난폭함에 저항 할 수 있게 해주는 사회적 순기능의 역할로서 작동한다. 격리된 놀이에 따른 장소, 시간적 한계, 그리고 규칙성과 생산의 부담 없는 비생산성의 해방감과 자유로운 진퇴, 실현 불능의 허구를 통한 감정의 우회와 일시적 분출의 창구로서 현실 사회의 가혹한 환경을 차단하고 휴식과 즐거움이라는 삶의 가능성을 조성하며 제도와 정치사회의 불충분성을 보완하는 균형추가 된다.

 

그런데 놀이가 일상으로 오염되기 시작하면 놀이의 성질 자체가 손상되고 놀이는 놀이로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즉 놀이가 현실 세계와 뒤섞이면 부패가 일어난다. 즐거움이었던 것이 고정 관념이 되고, 도피였던 것이 의무가 되며, 기분 전환이었던 것이 집착, 강박 불안의 원천이 되어버린다. 놀이는 현실에 감염되어 부패가 일어난다. 이 부패에 주목하게 되는데, 바로 오늘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양상을 해석하는 하나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놀이 정신에 의해서 더 이상 누그러지지 않는 대립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부패가 나타난다. ‘놀이 정신을 다시 반복 서술한다면 바로 정정당당한 규칙의 존중을 비롯한 모두에서 언급한 놀이의 여섯 특성과 같다. 놀이 정신은 곧 사회 제도가 반영하고 있는 원천이다. 작금의 한국정치사회는 이 놀이 정신이 훼손, 파괴됨으로써 도덕적, 사회적, 법률적 구속의 틈이 벌어졌다. 이 균열로 인해 경쟁의 선천적 난폭성, 즉 '자신의 반대자는 철저히 도륙한다'가  사회 속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규칙이 존중되지 않음으로서 폭력과 잔악성이 사회를 잠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탐욕과 폭력의 억제 습관을 붙이는 교화적 역할을 수행하던 놀이의 정신이 파괴되었음은 하나의 현실 사건만으로 입증이 충분하다. 아곤(경쟁, 규칙존중)의 타락은 심판과 판정이 모두 무시되는 곳에서 시작된다.(81)”고 한다. 검경 수사권 분리와 일제 징용공 보상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을 부정, 무시하며 권력 자신만의 독단을 내세우는 현 정권의 타락상은 적확한 판박이 사례라 하겠다.

 

인류 사회는 미미크리와 일링크스가 인간사회를 지배해온 끈덕진 야만의 역사시대를 벗어나는 데 거의 모든 인류의 시간을 보냈다. 주술과 미신, 환상과 공상의 허구 세계, 이를 벗어나 아곤과 알레아의 세계, 다시 말해 규칙과 기회의 평등이 지배하는 사회, 문명사회로의 진보를 이루어냈다. 따라서 자신들의 사회를 표상하는 재능과 노력의 산물을 겨루는 놀이들과 평등 실현을 보충하려는 제비뽑기, 공공 복권, 슬롯머신 등 우연 놀이가 현대 놀이의 중심을 이룬다. 사회가 제아무리 평등을 지향한다고 하지만 소질이나 악착같은 노력, 끈기있는 근면에도 획득할 수 없는 보상의 사회임을 부정 할 수 없다. 출생의 우연은 끈질기게 능력 경쟁을 방해하며, 차지한 기득권은 장벽을 세우고 사다리를 걷어차 기어오를 수단이나 기회를 차단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인간 사회의 오래된 비극적 실상이다. 우연 놀이는 이러한 현실을 보상한다.

 

이처럼 문명으로의 이행은 일링크스와 미미크리의 우위를 점차적으로 없애며 대신 아곤과 알레아, 경쟁과 우연의 쌍을 사회관계의 우위에 놓는 것이다. 이 세계는 능력과 운 사이의 불안정하며 무한히 변하기 쉬운 균형 위에 근거를 둔 불안정한 곳이다. 때문에 출생의 우연을, 계급 특권을 효과적으로 없애버리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이것의 투영이 아곤과 알레아다. 아곤의 시합에서 이길 수 없는 공정 실현 불능의 인간 사회에 무차별적 은혜인 우연놀이를 통해 마침내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링크스와 미미크리가 다시 재용출(再湧出)되고 있다. 흥분의 즐거움, 환상의 즐거움, 충격의 즐거움, 홀림과 취함의 세계로 회귀하려 한다. 일링크스가 놀이려면 한정된 시간의 추구여야 한다. 이것이 한정되지 않고 지속되면 혼란과 광기로 안전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한편 미미크리, 흉내와 가면 놀이가 놀이기를 멈추고 주술과 미신으로 실생활과 섞이기 시작하는 사회적 부패가 정치의 장에서 행해지고 있다. 놀이의 이러한 병적 일탈이 사회를 오염시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권력은 홀림과 취함을 지속하려고 매양 알코올 타령이고 왠 주술사가 국가 행정, 외교, 국방, 경제를 훈수하고 있다. 놀이는 풍부한 문화적 창조성을 설명해 줄 뿐 아니라 그 사회의 얼굴, 스타일, 가치를 보여주고 이해하게 해준다.(107)”고 했다.


이러한 표상들은 2023년의 한국 사회가 대략 30년 전의 망상적 주술사회, 불평등과 불공정이 만성적으로 날뛰는 야만적 세계로 퇴행하고 있음을 표상하고 있는 것이리라. 게다가 우중(愚衆)은 대중음악 스타와 스포츠 챔피언 등, 이들 필연적으로 단명(短命)하는 신()들을 숭배하는 일링크스 놀이에 심취해 화장법, 식사요법, 옷 입는 방식...까지 모방, 흉내 내며 동일시하려는 일반적 욕구로 대리 만족에 방목되고 있는지도 모른 체 문명과 정치적 퇴행에 일조한다,

 

출생과 실력(재능)의 싸움은 엉뚱한 교체가 일어나지 있는 이상 대다수의 군중은 결코 최상의 지위를 차지 할 수 없다. 여기서 일링크스 놀이, 즉 벗어나야 하는 환상의 대리라는 속임수가 생겨난다. 상상체험, 이는 알코올과 함께 타락한 사회, 부패한 기득권의 불안을 위한 평형추로 쓰인다. 제한된 장소의 한시적 체험이 아닌 일상과 뒤섞인 놀이는 놀이의 부패와 타락으로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 놀이에서 속임수를 쓰는 자보다 더 나쁜 자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카이와는 경고한다. 그것은 규칙을 조롱하거나 규칙에는 근거가 없다고 말하면서 거부하거나 경멸하는 자이다.(262)”라는 것이다. 법 위에서 행위하려는 불손한 인간들.

 

우중과 함께 이 사회의 가장 악질적인 자들에게 권력이 주어졌다. 무수한 희생과 노고 끝에 축적한 귀중한 사회적 제도와 윤리적 역량이 한 순간에 무너지고 있다. 이 몽매한 권력은 왜 낮은 소득 계층의 사람들에게 보상이 주어져야 하는지 모른다. 그것이 사회의 균형성과 안전성을 확립하는 것임을, 보다 문명적인 공정의 지향인 것을, 공정과 자유를 추한 입으로 뱉어내지만 놀이의 정신인 자유와 공정, 규칙의 엄수, 정정당당한 페어플레이 정신을 알지 못한다.

 

패자를 위로해주고 규칙있는 경쟁이 상대에게 손상을 입히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능력의 발휘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능력도 보여주지 못하며 단지 주술과 홀림의 정치를 하는 권력의 퇴행성이 이 오래된 책을 다시 읽게 했다. 이 책의 부제는 가면과 현기증이다. 가면 뒤에 숨겨진 본래의 얼굴을 내밀고 민중과 마주하여 진실의 대화에 나서야 한다. 이 사회에 아곤과 알레아는 위축되거나 사라지고 일링크스와 미미크리가 횡행한다는 것은 곧 문명 퇴행의 지표이다. 놀이를 사회학의 중요 주제로 연결한 이 역작에 이은 정치학으로의 가능성에 대한 연구가 있다면 어쩌면 놀라운 저작이 탄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무한한 영감을 지펴내는 위대한 걸작이다. 호이징가의 호모루덴스를 같이 읽는다면 더욱 알찬 지식 여행이 되어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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