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발레리 통 쿠옹 지음, 권윤진 옮김 / 비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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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쇼펜하우어가 『인생을 생각한다』에서 말하듯이 인간의 생애는 삶을 위한 고달픈 투쟁일까? 사람의 생애가 행복했다는 것은 적극적인 고통을 얼마나 적게 느꼈느냐가 척도라는 주장이 이젠 내 마음과 공명한다. 삶을 이어가기위해 비굴한 직업세계에서 전전긍긍하는 사람들, 부와 명예를 쥐었지만 가족을 지켜내지 못한 사람들,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왔음을 알게 되는 사람들, 이처럼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든 사람들에게는 고통의 다양한 모습들이 드리워져 있다. 마치 운명이란 것이 그렇게 계획되었다는 듯이 불가항력적으로 우리를 괴롭힌다. 꽤나 염세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삶이란 기나긴 고통과 지나 간지도 모를 만큼의 짧은 순간의 행복, 그리고 권태로 이루어졌다는 말을 부정하기가 쉽지 않다.

소설은 각기 다른 인생길에서 괴로워하고 자학하면서, 그리고 배신당하고 버림받아 좌절하며 생의 의지가 시들어 버리는 사람들을 독립적으로 클로즈업해서 그들의 일상을 쫓는다. 옴니버스 형식을 차용하여 이 개개의 독립된 삶의 단면들이 조명되면서 우리의 모습과 닮은 고통의 실체를 마주하게 한다. 자신의 아이만큼은 최저임금에 시달리는 계층을 벗어나게 하기위해 고용주의 무례함과 욕설, 횡포에도 불구하고“십년을 귀머거리처럼, 장님처럼 굽실거리며” 삶에 몸부림치는 엄마 가장 마릴루가 있고, “자기 자신 만큼이나 타인을 멀리하는 자발적 고립자”의 삶을 선택한 78살의 명망과 부를 쌓아올린 건축사업가 알베르가 있다. 또한 인종에 대한 편견과 그러한 사회적 시선에 굴복하는 삶에 대한 회의에 신음하는 법률자문회사의 변호사인 프뤼당스와 영화감독이자 대학교수로서 세상의 인정을 받고 있는 톰의 실패한 가정과 환멸의 고통이 있다.


눈앞에 전개될 것이 뻔히 예상되는 상사와 고용주의 폭력적 언행과 자신의 수치심, 비굴의 역겨운 냄새를 인식하게 될 때, 부모로부터 버려져 냉대와 차별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야 했던 고 고립감에 몸서리 칠 때, 사랑의 환희가 배신으로 한낱 환상이요, 꿈이고 착각임을 인정해야 할 때, 이렇듯 인생의 직접적 목적은 괴로움이란 것이 진리로 다가설 때 우리 사람들은 그렇게 운명 지어진 삶에 우리들의 의지를 내어줄 도리 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듯 삶의 의지조차 훨훨 날아가 버릴 듯한 인생의 어느 순간에 세상은 가끔‘딸꾹’하며 행복을 뱉어내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 작품이 아름답고 고상하게 이해되는 것은 바로 섬세한 삶의 통찰과 진실한 언어들 때문으로 느껴지는데, 특히 등장인물들의 뚜렷한 성격묘사로 깊은 내면의 세계가 제시되고 그네들의 고뇌를 거쳐 표면화되어 세계와 인간의 본성을 분명히 드러내어 예술적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기에 그럴 것이다.

한편 소설은 얄궂을 정도로 재미있는 순환체계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마치 도미노게임을 보고 있는 듯한 흥미로움에 젖어들게 한다. 삶을 포기하기위해 달려오는 지하철에 몸을 던진 남자, 그로인해 정체한 지하철, 이 우연한 사건은 지각으로, 그 지각은 사무실 폭파로부터 생명을 지키게 해주고, 이로 인해 누군가는 비굴하게 상사의 개나 산책시키는 수고를 피하게 해주지만, 이를 대신한 사람의 부자연스런 걸음은 사고를 만들어 낸다. 이 사고는 사랑의 실체를 깨닫게 해주고, 이로서 이들 낯선 사람들은‘병원’, 즉 치유의 장소에 모여든다. 이 상징적인 공간에 더해 행복의 중개자로서“사람들과 소통하는 재주, 타인에게 먼저 다가가서 손을 내밀고, 어린 아이의 낮은 어깨를 빌려주는”마릴루의 열세살 아들 폴로를 통해 고달픈 투쟁인 삶은 그렇지 않은 것이라고, 쇼펜하우어는 틀렸다고 속삭이기까지 한다.

그래, 가끔은 세상이 이처럼 딸꾹질을 해주어서 도저히 회피할 수 없을 것 만 같았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기도 할 터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삶의 희망을 애기하고, 인생의 낙관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선명하게 포착된 사람들의 묘사, 그리고 사건의 완벽한 흐름과 연결이 주제의식에 더해 이야기의 재미를 만끽하게 해주는 정말 잘 써진 예술작품이다. 내가 내 민 손을 스스럼없이 잡아줄 사람들을 찾아 보아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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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을 거닐며 역사를 읽다
홍기원 지음 / 살림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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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의 존재는 물론 성곽에 대해 이렇다 할 인식조차 없었던 내게 이 저작이 주는 학습 효과는 솔직히 충격이고 부끄럼이며, 감사한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조선조를 지나 대한제국과 일제치하, 그리고 한국전쟁과 군부개발독재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600여년을 한 나라의 도읍지로 위세를 지켜온 서울의 역사는 곧 우리의 얼굴이고, 우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거울이라 할 것이다.

조선의 도읍 한양을 에워싸고 있던‘성곽’, 분주히 거니는 도심에서 성곽을 볼 수도 없거니와 설혹 보았다 해도 한 낱 축대나 돌덩이 이상의 무슨 감흥을 가졌겠는가? 도로 옆으로 밀려난 조선조 여느 축조물이겠거니 하고 지나버린 문(門)들이나, 남산, 북악을 오르면서 무심히 지나버린 그나마 남겨진 성곽조차도 어떤 의미로 새겨 본 적이 없으니 내 역사의 인식이란 정말 보잘것없었다는 생각에 이른다. 서울 성곽의 길이는 18.12Km이고, 4대문과 4소문이 있었다는 사실도 이 저술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으며, 그 파괴되어 없어지고 옮겨진 문과 성곽들마다 서려있는 굴곡의 사연들에서 이제야 그 사라진 쓰라린 곡절들을 접하게 되었으니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노고에 고마운 마음이 새롭다.

화마(火魔)에 휩싸여 잿더미로 변하는 숭례문(남대문)을 무참히 바라보던 일이 어제 일만 같은데, 좌우에 성곽이 이어져 있는 1904년의 숭례문 사진은 그야말로 감개무량이다. 그러나 이러한 감흥도 순간에 머물게 되는데, 1907년 일본 황태자 환영도로 건설이라는 미명아래 일제가 한양도성 중 가장 먼저 헐어버린 곳이라는 설명에 그만 내 고장, 내 나라 역사의 무지에 할 말을 잃게 된다. 이후 일제의 근대화라는 각종 명분과 조선의 얼을 훼손하기 위해 파괴하고 없애버리고, 그나마 남아있던 한양을 보듬고 있는 사내산(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의 성곽들조차 군부독재시대의 무식한 전시(展示)개발 행위로 모두 파괴되어버렸으니 문화재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좌절감마저 몰려든다.

개발 독재시대가 지나고 나서, 문화재 복원차원에서 성곽 복원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나, 시멘트로 복원한 곳, 표지조차 없는 옹색한 복원 흉내를 낸 곳, 문화유적 앞에는 이유를 불문하고 소나무를 식재하여 생태적 변화에 대한 고려도 없는 무분별함, 본래의 의미는 아랑곳하지 않은 제멋대로의 복원은 물론, 역사적 의미와 유래를 안고 있는 서울시장공관과 같은 장소와 건축물에 대한 공공재로서의 환원에 대한 제안 등은 역사유적의 복원에 대해 시민으로서의 참여와 관심을 자극한다.

이 저술이 제공하는 관점은 이와 같은 문화재 복원행정과 같은 제언은 물론, 역사사회학적 시선으로 시민(국민)의 뜻과는 무관하게 신라호텔 부지와 같이 문화유산을 사적 소유물로 둔갑시킨 독재정권과 재벌의 야합이 빚어낸 어처구니없는 현실은 물론, “뿌리없이 브랜드만 찾는” 신자유주의 교육의 산물인 서울과학고(예전 보성중고)에 내준 성곽과 역사적 의미를 지닌 장소, 서울 성곽을 파괴하여 호텔과 반공센터의 축대로 사용하기도 하고, 남산 정상에 자신의 동상을 세운 이승만이나, 어린이회관을 세우고, 국회의사당 건립계획을 세우는 등 무지몽매하고 안하무인의 무소불위 권력과 탐욕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또한 잠자던 정신을 퍼뜩 뜨이게 한다.

한편 4대문과 4소문에 대한 최초의 축성과 중수, 복원 등에 얽힌 사적(史的) 지식은 물론, 저마다의 특징에서부터 이름의 유래, 얽힌 속설 등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우리 것에 대한 앎의 지평을 넓혀주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한 애정을 공고히 심어준다. 경복궁의 오른팔인 인왕산 능선이 끝나는 지점에 서쪽 문의 위치를 두고 고심하여 8개 문 중 유일하게 두 번씩이나 옮긴 끝에 자리를 잡았다는 돈의문의 얘기나, 북문인 숙정문(肅靖門), 일명 숙청문(肅淸門)이‘수(水)’에 해당하여 열어 놓으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지므로 항상 닫아놓았으나 기우제를 할 때면 열어 놓았다는 설명은 미련한 내게 확실히 기억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또한 서고동저의 지형으로 유일하게 평지 성문인 동대문(흥인지문)은 지반의 연약함과 평지라는 성곽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옹성을 가졌다는 것과, 이름에 갈‘지(之)’자를 넣은 것은 내사산 중 가장 기운이 허한 낙산을 보호하는 의미라는 것은 선조들의 유산 어느 것 하나 예사로움이 아니라는 점을 새삼 깊이 있게 느끼게 한다.  

자하문 일명 창의문에서, 실질적 북문 역할을 했던 혜화문, 일명 동소문, 그리고 시신이 통과 할 수 있는 두 개의 문인 서소문과 광희문까지, 게다가 사라진 성곽의 터에서 복원 된 성곽이나, 남아있는 성곽에 맺힌 사연들이 촘촘히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자취와 함께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들려지고 있다. 여기에 더해 서울 성곽이나 서울을 넓게 조망할 수 있는 환상적인 장소들도 알려주는데, “성곽 탐방로 조성의 모범 답안”이라고 저자가 칭찬하는 장충단 서울 성곽 구간은 꼭 들러 보아야 할 것 같다. 많은 구간에서 복원이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다. 1916년 매일신보에 실린 성곽을 한 바퀴 도는데 하루해가 걸렸다는‘순성(巡城)놀이’를 서울 시민들이 함께하며 우리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기회가 하루 빨리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도 가져본다. 600여년 역사의 장면들이 화보들과 수려한 글이 어울려 알찬 성곽 길라잡이가 되어주는 서울 역사 기행의 역작(力作)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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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의 염소들
김애현 지음 / 은행나무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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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된 주체로서 내가 또 다른 독립체인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동정과 연민, 사랑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아마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것일 게다. 내가 그 누군가의 감정에 이입되려고 노력하지 않고서 그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얼마나 오만하고 그릇된 이해겠는가? 소설 속 방송작가인 엄마와 개그우먼 지망생인 딸의 어긋나는 대화에서 소통이란 것의 공허한 틈새를 발견한다. 일에 심취해있는 엄마, 자기 삶에 대해 진지한 자세를 가진 엄마, 주변인들의 한결같은 존경의 대상이 되는 커리어 우먼인 엄마이지만‘나(딸)’는 소홀해 보이기만 하는 자식에 대한 불성실한 태도가 마땅치 않기만 하다.

우리들 삶의 여정에서 툭하면 대두되는 일과 가정에 대한 비중, 그 무게중심의 편차에 대해 구성원들의 갈등이란 것의 실체는 어찌보면 이기심이라는 본질을 벗어난 감정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일하지 않으면, 아니 일을 통해 경제적 재화를 획득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과연 그 때문이기만 할까. 일이란 우리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삶 그 자체가 되어버린 일이라면 그 사람을 그것에서 격리하려는 것은 오히려 고통이며, 삶의 의미를 포기하라는 압박이 될 수 도 있을 것이다.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저녁밥을 기대할 수없는 나에게 엄마의 일은 사랑의 경쟁자이기에, 그 일에 몰두하는 그녀는 더욱 알 수 없는 대상이 되어버린다. 딸에게 미안한 것이 있다면 젖을 먹이지 못했다는 엄마의 말이‘나’의 삶에 결핍을 낳는 근인으로 작용하는 것은 물론 갈망하는 사람의 결여라는 상징이긴 하지만, 그래서 그 공허함을 채우는 무의식의 행위로 젖병에 흰 우유를 넣어 마시는 장면들은 아직은 삶의 이해에 서툴고 에고를 벗어나지 못한 어린 사람의 불안이어서 거북하기만 하다.


한편, 소설의 표제인‘과테말라의 염소’는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엄마의 방송프로그램 현지취재 내용의 장면으로서 염소의 젖을 관광객에 팔아 살아가는‘호세’라는 청년의 죽은 엄마에 대한 비로서의 이해와 사랑의 비감한 회고로서 생전에 생계의 원천이었던 염소들이 그녀에게는 “그저 다섯 마리의 염소가 아니었어요.”라는 그 지고한 삶의 원천이자 자식에 대한 사랑의 복합체로서의 깨달음에 대한 일종의 우화이다. 이 이야기는 話者인‘나’의 엄마에 대한 그 먹먹하고 뭉클한 사랑과 그녀의 삶에 대한 새로운 앎의 각성 과정과 중첩되어‘어머니’라는 아릿한 태곳적 그리움에 젖어들게 한다.

중환자실에 아무런 의식조차 없이 누워있는 엄마, 병문안을 위해 찾아오는‘나’의 친구들이 들려주는 엄마의 전문가로서의 모습, 남자친구라는‘전 선생’의 엄마의 여자로서의 관계에 대한 고백과 ‘나’에 대한 사랑의 안타까운 이야기들에서“젖 먹던 힘”의 본질을 알아가고, 결핍의 번민, 그 허전함의 틈새가 채워져 나간다. 엄마에 대한 향수, 일의 이면에 내재한 도덕적 책임이라는 자애(慈愛)의 실재함, 그리고 이별이란 불가피한 통증의 수용이 담담한 필체로 다가와 마음을 적신다. “태풍의 눈처럼 고요한 슬픔의 한 복판”에 놓여 참았던 울음이 막 터져 나올 듯한데도 마치 딴 청을 부리는 느낌의 소설이다. 내겐 참으로 낯 선 감정의‘나’였고,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이십대의 감성, 언어, 삶의 시선에 대한 놀라운 다름의 시간이었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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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독스 논리학 - 제논의 역설부터 뉴컴의 패러독스까지, 세계의 석학들이 탐닉한 논리학의 난제들
제러미 스탠그룸 지음, 문은실 옮김 / 보누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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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사용치 않던 뇌의 어느 부분을 사용하는 부담을 느껴보게 하고, 궤변인지 진실인지 조차 구분할 수 없는 이야기나 멀쩡한 이성이 기만당하는 역설들에 내 사고력과 판단력, 그리고 논리력이 구멍이 숭숭 뚫려있음을 자각하는 겸허한 시간이 되게 한다.
몇 가지 논리학의 난제(難題)는 우리네 이성의 딜레마를 이야기 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것들이어서 살짝 건너뛰어도 되지만, 문제를 이해하기에 더없이 핵심만 압축적으로 제기하고 있어 두뇌에게 반복 학습의 시간을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아인슈타인이 어린 시절 궁리해 낸 수수께끼처럼 의외로 차분히 단서들을 대입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서부터 실마리를 찾지 못해 쩔쩔매다 해답란을 보고서야 아하~하고 이해하게 되는 확률의 논리문제도 있다. 또한 어수룩하고 섣부르기 그지없이 잘 속는 우리의 논리적 이성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도 하는데, 언어에 내재하고 있는 마법같은 술수, 확률의 함정을 결코 피해가지 못하는 추론 능력을 확인하곤 인간 지성의 취약성을 새삼스레 인정하는 시간이 된다.

역전의 역설이라고도 하는'심슨의 패러독스(Simpson's Paradox)'에서 각각의 게임에서 진 사람의 합계의 점수에서는 오히려 앞서는 기이한 현상의 진실로부터, ‘저지의 역설’을 대하면 핵전쟁의 발발과 같은‘최후심판 날의 기계’와 같은 자동화, 기계화의 아슬아슬한 위기가 상상되기하고. 연쇄삼단논법의 패러독스와 같이 우리가 세상에 대해 아는 것과 논증의 결론이 일치하지 않는 모순을 보게도 된다. 사실 직관으로는 분명히 옳지 않음을 알지만 진실과 반대되는 논리적 결과를 명쾌하게 반박하거나 그릇됨을 지적할 수 없는 역설들이 해결되지 못하고 존재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이 저작에서 발견하게 되는데, 거듭 인간지성으로 인간의 삶을 해석하지 못하는 것이 있을 수 없으리라는 내 신념의 붕괴를 인정치 않을 수 없는 당혹감에 잠시 휩싸이기도 한다.

특히 이 저작에서 시종 내 관심을 흐트러지게 하지 않는 두 개의 장인 철학적 난제와 패러독스 세계에 대한 것인데, 이 중에서도 자기스스로를 원소로서 포함하지 않는 집합들의 집합은 자신을 원소로서 포함하는가? 하는 일명 러셀의 패러독스나, 인과적 결정론은 인간에게 참 일 수 없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뷔리당의 당나귀 패러독스’는 자유의지에 대한 의문까지 실로 광대한 사유를 이끌어 내고, 지배원리와 기대효용이론의 지지로 나뉘는 뉴컴의 인간 사고실험이 보여주는 사람들의 논쟁은 얼마나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지를 생각게 한다.

정체성의 딜레마처럼 진지함에 머물게도 하지만, 1달러 지폐를 경매에서 팔면 수지가 남을까하는 계획의 실상처럼 미소 짓게 하는 인간의 심리, 본성, 이성의 맹점을 발견하는 재미도 아울러 지니고 있는 흥미로운 저작이다. 그리고 각 단원마다 짤막한 논리퀴즈(Logic Quiz)가 있는데 이 문제들 또한 단연 압권이다. “벨기에에서는 남자가 자기 과부의 자매와 결혼하는 것이 합법일까?”한 번 풀어보시라!
세계의 지성들이 탐닉한 난제들을 함께 생각하고, 해결해 보는 과정에서 생각지 못한 사고와 논리, 인간의 실체를 발견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몇 자 되지 않는 짧은 문장들로 이루어진 책자이지만 수월치 않은 시간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꼼꼼히 읽다보면 애장도서 목록에 추가하고픈 생각이 은근히 지배하는 그런 저작임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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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퍼의 복음
톰 에겔란 지음, 손화수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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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기원과 종교에 대한 고고학적 소재를 지닌 이 작품이 넘나드는 영역은 우주생물학, 천체학과 물리학, 그리고 영적 신비주의에서 A.D.325년 니케아 공회의를 전후한 성서의 정경화에서 배제된 외경(外經)을 둘러싼 신학의 갈등, 첨단 장비로 무장한 현대의 고고학에 이를 정도로 상상의 공간이 무한히 확장되고 있다. 게다가 현재와 과거의 시간을 오가면서 사건의 진실로 다가가게 하는 치밀한 플롯과 작품 곳곳에 쌓인 수수께끼들의 파편을 하나의 유기적인 서사로 엮어나가며 최고의 지적흥분을 불러오는 재미는 그야말로 과학 스릴러의 정수를 보여준다.

 ‘빛의 천사’‘루시퍼?’, 루시퍼는 타락한 천사, 아니 사탄, 악의 화신인가? 그 존재의 의미는 진정 무엇인가?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학 고고학 조교수인‘비외른 벨토’는 키예프의 수도원 큐레이터로부터 외경과 관련된 한 필사본의 연구의뢰를 받고, 내키지 않는 비밀유출을 돕지만, 곧 큐레이터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된다. 66개의 촛불에 에워싸인 채 피한방울 남지 않은 알몸의 시신으로 발견 된 것이다. 알 수 없는 이단(크리스트교 입장에서 보면)의 제의(祭儀)를 행한 것으로 보이는 흔적들. 그리곤 공동연구를 하기로 했던 동료마저 동일한 형태로 살해되고, 이를 돕기로 했던 프랑스의 고문서연구자인 여성까지 연이어 人身供犧의 희생자로 발견된다.   


 점차 죄어오는 죽음의 그림자가 벨토에게 다가오고, 아이슬란드의 한 연구소에 의문의 설형문자로 써진 필사본의 해독을 맡기고는 살해자들의 연고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네덜란드에 은둔하고 있는 사탄 연구자의 요청으로 로마로 향하게 된다. 소설은 여기서 불신과 믿음에서 갈등하는 벨토를 통해, 믿음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는 의외의 진실을 설득력 있게 펼쳐나가는데, 바로 벨토의 손에 들어온 「루시퍼의 복음」의 필사본을 건네줄 것을 요구하는 서로 다른 조직과 마주하게 된다. 양 쪽 모두 인류의 종말을 구원하기 위해 필히 자신들이 이 필사본을 가져야 한다는 당위를 주장한다. 무엇이 인류의 영속을 위한 진정한 행위인지를 알 수 없을 때, 선과 악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 것일까?

일명‘루시퍼 프로젝트’의 완결을 위해 미국의 정보기관부터 고고학, 물리학, 우주천제학, 생물학, 신학의 인사들이 망라되어 구성된 비밀 조직으로부터 벨토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필사본이 세 부분으로 분리된 루시퍼 복음의 마지막 부분임을 알게 된다. 사탄을 숭배하는‘드라큘라 기사단’의 죽음을 무릅쓴 필사본을 향한 무서운 집념을 피해, 루시퍼의 진실로 한걸음씩 접근하는 과정의 전율이 아찔하다. 결국 <모세의 오경>이 되었든, <에스마엘 서>나, <요한 계시록>등 신앙의 중요한 바탕은 항상 지구의 종말론에 이르는데, 작품 속에서 지적하듯이 “종말의 개념 없이는 존재의 영적 정화는 물론 삶의 목적이나 의미조차 찾기 힘들기에”, 다시 말해서 종말의 날을 어떻게 맞이하느냐의 문제가 종교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할 수도 있기에 그 진실에 대한 인간의 집요한 탐색은 불가피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작품은 나아가 상징적 표현인 성서의 문장들을 그대로의 의미로 해석하여 그 예언적 문장을 실현하려는 터무니없는 근본주의자들과 진정의 의미를 과학적 진실을 통해 규명하려는 집단과의 갈등으로 귀결시킨다. 물론 이라크의 사막 한 가운데, 알 힐라, 옛 우르지역에서 전설의 바벨탑 흔적인 지구라트(ziggurat)를 발굴함으로써 과학이 근본주의에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설의 결실은 그리 단순치가 않다.

지구 종말론의 실체는 무엇인가? 루시퍼의 복음에서 가리키고 있는 지구라트에 숨겨진 진실이란 무엇인가? 최초의 인간, 인간의 기원은 어떤 것인가? 날개달린 하늘에서 내려온 빛의 천사, 그들은 누구인가? 이 모든 것을 밝혀낸다. 구약에서부터 길가메시이야기, 고대문서들에 등장하는 거인족, ‘네피림’의 존재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200명의 천사가 빛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구약의 말은 진정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하마르게돈, 그리고 아마겟돈이라고까지 의미를 오도한 ‘하르가-메-기도-돔’의 진짜 의미, “지구로 되돌아온다.”는 말의 진의는 무엇인가? 마침내 현대과학이 파헤친 진실은“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창조론”을 만들어 낸다. “우주에서 온 손님, 오우하(Ouah)”, 여전히 미흡한 진화론의 인류 발생학에 대한 답으로서 이 뜬금없는 듯한 과학적 상상력은 꽤나 설득력을 갖는다. 만약 「루시퍼의 복음」에서 말하는 1,640,000일 후에 되돌아온다는 그 누군가의 말을 신뢰한다면 2012년에서 2024년 사이에 빛과 함께 나타나는 그들을 기다려 볼 일이다. 고고학을 비롯한 다채로운 지적도구들, 진정 호감을 가지고 읽어 볼 작품이라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인류의 기원과 종교에 관한 정말의 탁월한 기획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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