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발레리 통 쿠옹 지음, 권윤진 옮김 / 비채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쇼펜하우어가 『인생을 생각한다』에서 말하듯이 인간의 생애는 삶을 위한 고달픈 투쟁일까? 사람의 생애가 행복했다는 것은 적극적인 고통을 얼마나 적게 느꼈느냐가 척도라는 주장이 이젠 내 마음과 공명한다. 삶을 이어가기위해 비굴한 직업세계에서 전전긍긍하는 사람들, 부와 명예를 쥐었지만 가족을 지켜내지 못한 사람들,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왔음을 알게 되는 사람들, 이처럼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든 사람들에게는 고통의 다양한 모습들이 드리워져 있다. 마치 운명이란 것이 그렇게 계획되었다는 듯이 불가항력적으로 우리를 괴롭힌다. 꽤나 염세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삶이란 기나긴 고통과 지나 간지도 모를 만큼의 짧은 순간의 행복, 그리고 권태로 이루어졌다는 말을 부정하기가 쉽지 않다.

소설은 각기 다른 인생길에서 괴로워하고 자학하면서, 그리고 배신당하고 버림받아 좌절하며 생의 의지가 시들어 버리는 사람들을 독립적으로 클로즈업해서 그들의 일상을 쫓는다. 옴니버스 형식을 차용하여 이 개개의 독립된 삶의 단면들이 조명되면서 우리의 모습과 닮은 고통의 실체를 마주하게 한다. 자신의 아이만큼은 최저임금에 시달리는 계층을 벗어나게 하기위해 고용주의 무례함과 욕설, 횡포에도 불구하고“십년을 귀머거리처럼, 장님처럼 굽실거리며” 삶에 몸부림치는 엄마 가장 마릴루가 있고, “자기 자신 만큼이나 타인을 멀리하는 자발적 고립자”의 삶을 선택한 78살의 명망과 부를 쌓아올린 건축사업가 알베르가 있다. 또한 인종에 대한 편견과 그러한 사회적 시선에 굴복하는 삶에 대한 회의에 신음하는 법률자문회사의 변호사인 프뤼당스와 영화감독이자 대학교수로서 세상의 인정을 받고 있는 톰의 실패한 가정과 환멸의 고통이 있다.


눈앞에 전개될 것이 뻔히 예상되는 상사와 고용주의 폭력적 언행과 자신의 수치심, 비굴의 역겨운 냄새를 인식하게 될 때, 부모로부터 버려져 냉대와 차별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야 했던 고 고립감에 몸서리 칠 때, 사랑의 환희가 배신으로 한낱 환상이요, 꿈이고 착각임을 인정해야 할 때, 이렇듯 인생의 직접적 목적은 괴로움이란 것이 진리로 다가설 때 우리 사람들은 그렇게 운명 지어진 삶에 우리들의 의지를 내어줄 도리 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듯 삶의 의지조차 훨훨 날아가 버릴 듯한 인생의 어느 순간에 세상은 가끔‘딸꾹’하며 행복을 뱉어내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 작품이 아름답고 고상하게 이해되는 것은 바로 섬세한 삶의 통찰과 진실한 언어들 때문으로 느껴지는데, 특히 등장인물들의 뚜렷한 성격묘사로 깊은 내면의 세계가 제시되고 그네들의 고뇌를 거쳐 표면화되어 세계와 인간의 본성을 분명히 드러내어 예술적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기에 그럴 것이다.

한편 소설은 얄궂을 정도로 재미있는 순환체계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마치 도미노게임을 보고 있는 듯한 흥미로움에 젖어들게 한다. 삶을 포기하기위해 달려오는 지하철에 몸을 던진 남자, 그로인해 정체한 지하철, 이 우연한 사건은 지각으로, 그 지각은 사무실 폭파로부터 생명을 지키게 해주고, 이로 인해 누군가는 비굴하게 상사의 개나 산책시키는 수고를 피하게 해주지만, 이를 대신한 사람의 부자연스런 걸음은 사고를 만들어 낸다. 이 사고는 사랑의 실체를 깨닫게 해주고, 이로서 이들 낯선 사람들은‘병원’, 즉 치유의 장소에 모여든다. 이 상징적인 공간에 더해 행복의 중개자로서“사람들과 소통하는 재주, 타인에게 먼저 다가가서 손을 내밀고, 어린 아이의 낮은 어깨를 빌려주는”마릴루의 열세살 아들 폴로를 통해 고달픈 투쟁인 삶은 그렇지 않은 것이라고, 쇼펜하우어는 틀렸다고 속삭이기까지 한다.

그래, 가끔은 세상이 이처럼 딸꾹질을 해주어서 도저히 회피할 수 없을 것 만 같았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기도 할 터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삶의 희망을 애기하고, 인생의 낙관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선명하게 포착된 사람들의 묘사, 그리고 사건의 완벽한 흐름과 연결이 주제의식에 더해 이야기의 재미를 만끽하게 해주는 정말 잘 써진 예술작품이다. 내가 내 민 손을 스스럼없이 잡아줄 사람들을 찾아 보아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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