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 비가
쑤퉁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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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그의 소설 『성북지대(城北地帶)』와 시대적, 공간적 배경이 거의 동일한데, ‘펑황’이란 이름의 여인이나, 마을의 중심축이 되는‘참죽나무길’까지 두 작품의 강한 유대감을 지니고 기댈 곳 없는 서민들의 삶의 소묘에서 우러나는 닮은 감성을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화씨 비가』는 반전이 없어서 더욱 쓸쓸하고 울적하다. 맹랑하고 허황되게 삶의 긍정을 그려내야 한다는 도식에 충실한 쓰레기처럼 쏟아지는 대다수의 소설들에 이봐라! 하며 소시민의 대물림되는 가난과 절망을 처절하게 각인시켜준다. 순박함이 곧 무지함으로 인식되는 오늘에야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마는 쑤퉁이 일관되게 귀를 기울이고 시선을 맞추는 배우지 못한 서민들의 목소리와 지친 몸뚱이들이 뿜어내는 삶의 해학은 그 어떤 숭고한 철학적 사유를 능가하는 가공되지 않은 진실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소설의 도입부는 그야말로 우문현답의 향연이다. 아내 펑황이 그녀의 근무 장소인 유류창고에서 목매 자살한 채 발견되자 감정의 혼란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창고에 불을 지른 뒤 심문을 받는 남편,‘화진더우(화씨)’와 재판장과의 대화인데, 이름을 묻는 답변에 출신성분까지 곁들여 “지주 집안이 아니고 아주 떳떳한 하층 빈농이랍니다.”라고 부연 설명하는가하면, 방화의 이유를 대라는 질문에 “그걸 진짜 모르겠다는 거 아닙니까요. (...)정신이 홱 나가버린 겁니다.(...)누가 내 머릿속에 매듭을 꽁꽁 묶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숨이 목구멍에 턱 걸려서는 들이쉴 수도 내쉴 수도 없는 겁니다.”라는 정말의 대답이 형식적이고 거만한 제도의 사회에서는 이해할 수 없으며 요구되는 대답이 되지 못하는 것에서 그 소통의 단절이 얼마나 깊은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성을 잠시 잃고 길길이 날뛰다보니 자신을 피하지 않고 눈에 들어오는 것이 하필 석유통이었고, 더구나 석유통에 불조심이라고 훈계하는 문자가 방화의 결정적이고 직접적 동기였다는 진술 또한 거짓 없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우린 여기서 피식하고 웃게 되지만 그 이상의 진실을 요구하는 사법제도가 오히려 진실을 벗어난 황당함이라 하여야 할 것이다.

결국은 예정된 판결결과에 대한 좌절과 절망으로 자살하고 마는 화진더우는 여동생과 네 딸, 그리고 아들 두후(獨虎)에 대한 걱정으로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과 저승사이인 구천에서 떠도는 궁상맞은 원혼이 된다. 어린 나이부터 생업을 위해 열심이었던 남자, 갓 스물에는 처자식이 있는 가장이 되어 혼자 세 사람 몫의 일을 해 댈 정도로 마소처럼 일한 사나이였지만 졸지에 고아가 된 다섯 남매의 아비로서 도움을 주지 못하는 혼령으로서의 그 애틋한 마음은 아이들을 떠나지 못하고 참죽나무길을 맴돈다.

“남들은 머리굴려 잘 먹고 사는데”, 그렇지 못한, 아니 배움이 없어 그럴 수 없는 사람의 푸념이 육두문자를 피할 길이 있을까?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라는 문장은 계급과 권위를 내포하는 말이다. 재판관이 하는 ‘여기가’하는 말은 웃기는 얘기가 아닌가. 여기가 뭐긴, 인민이 세금내서 지은 법정이고, 인민이 낸 세금으로 월급 받고 사는 인간들이 하찮은 권력을 왈가왈부하는 것이 더 웃기는 것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세상이 어디 그런가. 배운 놈, 가진 놈이 행세하도록 짜여있는 세상에서 화진더우나 그의 자식들, 벽촌에 사는 일가들에게는 아득히 먼 세계인 것을. 시집도 안 간 둘째 딸‘신란’이 덜컥 애를 배서 돌아오자, 알량하게 남은 체면을 지키려고 뱃속의 시한폭탄을 지우다가 사망하는 장면이 있는데 무산계급혁명을 부르짖으며 처단 되었던 부르주아 지주의 여식이 오히려 의사가 되어 화씨 집안에 대한 복수로서 낙태수술 중 절명시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체제라는 것도 인간사회의 오래되고 끈질긴 탐욕의 본성과는 무관한 하물며 변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웃들은 고아가 되어버린 화씨 남매에 대한 보살핌은커녕 회피하고 학대당하는 대상들이 되어 천덕꾸러기로 자란다. 특히 아들 두후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고 내려다보는 망자인 화진더우의 기대와는 달리 탈선과 무위도식으로 누이들과 고모를 고통스럽게 하고 급기야는 동성애자로 화씨의 손을 잇는 사내와는 멀어지는가 하면, 신메이, 신주, 신쥐, 세 딸에 대한 걱정을 떨치지 못하고 안타까움에 겨워 따라다니지만 혼령이란 아무런 것도 그들에게 줄 수 없음을 자책하는 망령의 옹잘거림은 그 애절함을 증폭시키기만 한다. 성인이 되고 짝들을 찾아 혼인하고 또 아이들을 낳는 자식들의 세월과 함께, 화진더우와 펑황을 대신해 아이들을 어미처럼 돌본 진더우의 누이인 고모의 애처로운 죽음에 이르면 이들 화씨에 떠나지 않는 불행이 더해 그 쓸쓸함이 더욱 애달프고, 소시민의 삶이란 이런 것인가? 하고 괜스레 가슴이 아려온다. 세습되는 가난과 소외, 도움을 주지 못하는 어버이의 쓰라린 심정이 구천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화진더우와 그의 전용 하늘 당나귀의 눈물이 되어 뿌려지는 듯하다. 외롭고 희망 없는 삶, 그러한 인생을 바라 볼 수밖에 없다는 것,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는 것, 어쩜 그것이 사람의 숙명인지도...작가의 말처럼 운명의 질긴 애증과 고독이 이 보다 절절하게 표현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처량하고 구슬픈 노래다. 그럼에도 아름답다. 부모의 사랑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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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덕의 불운 열린책들 세계문학 159
싸드 지음, 이형식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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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인간 세상에 대한 환멸과 경멸, 혐오감으로 분노와 증오에 가득 찬 싸드(Marquis de sade)의 냉혹한 눈초리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가련한 두 발 달린 개체를 짓누르는”, 아직 아마도 그 실체의 정의조차 내리지 못하는 섭리, 숙명이라는 존재의 괴이한 변덕이라는 우화를 통해 악의와 악덕에 익숙한 인간과 세상의 본성을 싸늘하게 그려낸다. “전체가 썩어버린 사회”에서는 미덕이란 그러한 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처럼 “다수의 이익이 인간들을 부패로 이끌어가고자 할 때, 특정인인 자기만 부패하지 않겠노라고 한다면 다수의 인간들과 싸우게 되고 결국 전체 이익에 대항하여 투쟁하게 되는 것”인데, 다수가 걷는 악덕의 길을 걷지 않으려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파멸하는 것이 불가피하니 미덕이나 악덕이나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것이 싸드의 속내였을 것이다.

‘싸드’를 말하면 으레‘싸디즘(sadism)’을 떠 올리지만, 그 가학적 음란성이란 표피성은 결코 본질이 아니다. 이 작품에서도 “쌩뜨-마리-드-부와(Sainte-Marie-des-Bois)”,즉 “숲속의 신성한 마리아”라는 이름의 그 본성과는 걸맞지 않는 수도원이 대표적 싸디스트 집단으로 등장하는데, 더럽고 모독으로 가득한 시궁창이며, 난폭성과 변태적 도착증으로 똘똘 뭉쳐진 괴물들인 수도사들의 위선과 악마성을 통해 온통 악덕으로 떡칠을 한 인간, 인간 세상에 대한 적나라한 고발을 대리하는 도구이다. 외설과 음란성에 관심을 집중하는 세상의 시선은 바로 그 금지라는 규범에 도사린 치졸함, 유치함, 폭로적 관능에 탐닉하는 자들의 자기 은폐일 것이다.

소설은 고아가 되어버린 두 소녀의 인생행로를 극단적인 대비 속에서 보여주는데, 미덕의 화신인 ‘쥐스띤느’와 악덕으로 뭉쳐진‘쥘리에뜨’자매의 삶의 섭리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와 해석의 결과가 인간세상에서 진실이라고 떠들어대는 것, 소위 인간 삶의“궁극적 목표에 이르는 길을 덮고 있는 어둠 위에 빛을 던져준다”는 철학의 승리라는 것의 실체라는 것이 얼마나 무용한 헛소리인가를 증명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일찌감치 큼직한 죄악으로 돌진해서 주도면밀한 매춘으로 귀족들을 갈취하고 살해하여‘로르상주 백작 부인’으로 상류층사회의 일원이 되는 쥘리에뜨와는 달리, 정숙함, 고결함의 미덕을 지키고 고귀한 신앙심으로 똘똘 뭉친 쥐스띤느의 일생은 전대미문의 엄청난 불행의 연속이다.

고리대금업자의 하녀로서 도둑질을 거절한 끝에 도둑의 누명을 쓰고 잔혹하게 쫓겨나는가하면, 어머니를 독살하려는 동성애에 빠져있는 방탕한 후작의 살해 공모를 거절하자 1백대의 채찍질 후에 버려지며, 선의인 줄 알았던 상처 난 몸을 치유해주었던 외과의사는 몸에 낙인을 찍고 매질을 하여 내치고, 지친 심신을 의지하려 찾아간 수도원의 지엄한 제단은 흉측한 괴물들의 집합소이며, 심한 폭행으로 상처 난 사나이를 구조해준 은혜의 결과는 채찍과 노예생활이란 보상으로 돌아온다. 오직 욕스러움과 피투성이 가시밭길로 점철된 그녀의 인생이란 사실 미덕의 저주이다. 악덕이 선(善)의 행세를 하는 세상에서 어찌 미덕으로 살아 가려하는가!

자신의 쾌락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어머니를 살해하려는 후작의 궤변(詭辯)은 아마 싸드의 역설이자 인간들에 대한 조롱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살해하는 것은 “자신의 유사체(類似體)를 파괴하는 것이고, 또한 그 파괴의 괴로움”이라는 두 가지 죄악이라 하겠지만 그건 순전한 환상 일뿐이라고 주장한다. 죽음은 단지“형태의 변화이지 절멸은 있을 수 없으며, 자연의 눈에 모든 것은 평등하며, 단지 물질 덩어리는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재생”할 뿐이라고 말이다. 즉 죽음은 자연이란 다양성의 실현이라고. 게다가“자연에게 하도 중요하여 인간의 파괴에 자연이 필연적으로 노하게 되었음을 증명”해봐라! 그러면 범죄를 인정하겠다고. 어찌 많이 들어본 말 같지 않은가?...

이러한 싸드의 역설적 궤변은 다 죽어가던 놈을 구해줬더니 채찍과 노예노동으로 보상하는‘달빌르’라는 위폐범이 하는 말에서 반복되는데, 자신은“선행, 인정, 따위 등이 재산을 축적하려는 사람에게는 발부리에 부딪치는 돌이라는 사실을 일찍 깨달”아서, “약자들을 희생시키며, 다른 사람들의 신뢰와 어수룩함”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는 것은 현명함이라고 으스대는 것이다. 또한 죄의식이나 회한이란 것은 일종의 환상으로 “너무 나약하여 그것을 감히 지워버리지 못하는 영혼의 천치같은 독백에 불과”한 것이고 실제 부를 손에 넣게 되면 모두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고 강변한다.

범죄 역시“법률이나 국가적 인습을 위반하는 행위에 불과한 것이고, 근본적으로 범죄라 칭할 만한 것은 없으며, 단지 견해와 지역의 문제”일 뿐이라고 설득한다. 현실을 봐라! “세력이 강한 자에게는 법이 미치지 못하고 운이 좋은 자는 법망을 빠져나가”지 않는가! 어찌 보면‘신성한 마리아 수도원’의 원장인 수도사 라파엘이나 앙또냉 같은 변태성욕자들이 탐욕의 대상자“몸에 나타나는 고통스러운 징후를 정성스럽게 포착하여, 그 율동에 자신의 관능적 전율을 조화”시키는 그 가학성과 아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은 사형을 선고받고 경찰에 끌려 호송되던 길 중에 우연히 만난 로르상주 백작부인에게 쏘피(쥐스띤느)가 들려주는 인생의 곡절과 사연의 형식인데, 미덕이 끊임없이 불행이란 보상으로 되돌아온 얘기의 마무리 끝에 두 여인은 얼싸안고 눈물을 흘린다. 18세기, 더구나 세기말의 작품이란 그렇듯이 세상과 삶이 깊은 절망에 휩싸이고 인생의 거의 절반을 감옥에서 보낸 시대의 반항아인 싸드로서는 아마 인간들의 악덕에 진절머리가 났을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에 동생 쥐스띤느의 죽음을 본 쥘리에뜨의 수녀원 귀의를 설명하면서 그녀의“기지의 밝음과 품행의 엄격함으로 모든 사람의 전범이 되었다.”고 이것은 마침내 미덕의 기쁜 보상이라고 너스레를 떠는데, 과연 이 말이 싸드의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빈정거림이었는지는 200년이 지난 지금 그에게 확인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세속화된 종교 권력의 파렴치함과 악덕으로 썩어빠진 인간들의 위선과 허영에 앙다문 이빨을 으드득 가는 차디찬 싸드의 분노가 끓어 넘치는 작품이다. 200 여년이 지났건만 싸드의 주장이 호소력 있게 들리는 건 결코 변하지 않는 인간의 악덕 때문일 것이다. ‘피터 박스올’의‘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1001권의 책’에 선정된 작품이라 했던가? 싸드를 이해하고 인간의 본성, 삶의 섭리를 이해하는데 이만한 책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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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와 공포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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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 공포와 저주로 변질된 역사, ‘저주의 몫’이 된 섹스의 뿌리 찾기이다. 욕망과 공포가 분리되고 또한 사랑과 섹스가 분리되기 시작한 고대 로마의 공화정이 제국으로 변모하는 바로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시작되는 성의 정치화와 권력화, 그리고 금기라는 규범화가 낳은 문명사적 고찰을 통해 성의 기원에 대한 풍성한 해석의 터전을 마련하고 있다. ‘미셸 푸코’가 말하는 성의 정치화에 고착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의 또 다른 판본이 될 수 있으며, ‘조르주 바타이유’의 죽음과 동일시하는 에로티즘의 이해, 즉 비생산적 소비로서의 섹스와 비견되는 언어학적 논증을 통한 공포와 섹스의 동일 기원에 대한 해석은 오늘의 우리와 우리사회를 이해하는 새로운 인식의 토대를 제공한다.

이와 더불어,‘파스칼 키냐르’의 이 저술은 그의 사상과 삶에 대한 관점 및 작품들(특히,『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이나 『은밀한 생』등)을 이해하는 기본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할 정도로 총 16개장(章)에 걸친 신화적, 미학적인 성의 문화사적 성찰은 가히 독보적이고도 귀중한 문헌학적 가치를 지닌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는 물론, ‘아플레이우스’의 『변신』이나,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비롯한 접하기 힘든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무수한 작가들의 서사시와 회화들의 해석은 매료될 수밖에 없는 독서의 즐거움을 준다.

매혹(fascinatio), 파스키누스(fascinus)와 직면한 죽음

로마의 제국화, 즉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의 권력독점에 따라 귀족들이 자발적으로 예속적 관리가 되는 것은 문화적 대변혁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성 문화에 있어서도 그대로 실현되고 접목된다. 여성의 성에 대한 억압으로 혼인한 여성, 과부의 매력 발산이나 하다못해 강간조차도 피해자인 이들 여성을 처벌하는 까다롭고 엄격한 시민남성 중심의 비상호적 성규범으로 변화한다. 고대 그리스의 영혼과 육체의 통일체로서의 인식은 분리되어 육체는 평가절하되고, 특히 매혹에 대한 여성의 좌절은 욕망과 공포를 분리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도시민들의 음담패설과 통음난무는 자유분방이라 할 정도로 로마에 넘쳐났는데 이는“남성성의 약화를 방지하려는 의례”의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외설스런 언어, 남근의 지배라는 권력은“능동적 힘, 태내의 번식력, 다른 국가들에 대한 승리의 힘”을 상징했고 로마인들의 이러한 영웅주의는 훌륭한 죽음이라는 강박관념으로 표출되어, 원형경기장의 잔악한 죽음 앞에 선 노예들, 화가들의 벽화에 그려진‘직면한 죽음’처럼, 죽음의 순간에 매료되어 환호하고 그것을 만끽하는 것으로 형상화 되었다. 이를보면 오늘의 우리사회와 쌍둥이같은 모습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데, 성은 수치스러운 몰가치로 저 심연 뒤로 규범으로 금지하고 감추어 놓고서는 다양한 기호들로 외설과 음란에 도취케하는 현대정치권력의 양면성과 빼 닮은 것이다. 성과 사랑, 욕망과 죽음, 영혼과 육신은 결코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분리하면서 모든 죄악과 위선을 뒤집어쓰고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사회의 모습은 실로 아이러니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한편 로마의 왕들은 베누스와 마르스의 아들인 에로스의 추종자가 되어 스스로 베누스의 아들임을 자처하여 성적능력을 곧 권력과 동일시하는 남근지배, 즉 인간 존재로서 비로소 가능성을 획득하는 존재 이전의 이미지, ‘섹스’, 즉 파스키누스(fascinus: 勃起한 남성)에 대한 매혹에 천착하게 되는데, 여기서 죽음에 직면한 공포에 질린 얼굴 - 인간의 고통을 보며 느끼는 쾌락 - 이 suavitas(감미로움)였음은 그 기원의 동일성을 엿보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 강직(剛直)에서 매혹(fascionatio)이 출현하는데, 이것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것은 프랑스어 대경실색(meduser), “피해야 할 것에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고 공포 자체를 숭배하게 하며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우리 자신보다 공포를 더 좋아하게 만드”는 무엇이다. 그래서 시선은 마주보지 못하고 언제나 곁눈질이며, 매혹은 언어의 사각지대에 대한 인식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종합하면 로마의 문화적 지표들인 폼페이의 벽화, 서사시에 표현된 직면한 죽음의 광경이나 원형경기장에서 사투(死鬪)의 형태로 연출된 희생이라는 우스꽝스런 죽음, 파스키누스의 풍자적 의례 등은 처벌을 초월한 복수, 위반에 대한 집단적 복수에 참여하는 승리의 시퀀스(sequence)라 할 것이다.

‘신비의 빌라’, 그리고 메두사(medusa)...

키냐르의 모든 작품에 단골로 등장하는‘신비의 빌라’는 존재가 있게하는 시원(始原)의 장소이기도 하며, 도시에 환멸이 난 시민들의‘은둔’의 장소이자, 은밀한 쾌락의 공간인 ‘매혹의 침실’,‘매혹의 빌라’이기도 하다. 아마 이 신비의 빌라에는 “천으로 덮여 키 안에 들어 있는 파스키누스를 향해 일제히 집중되어”있는 공포어린 사람들의 표정이 있는 벽화가 있는 모양인데, 이는 매혹을 마주하는, 또는 죽음에 직면한 놀라움, 바로 아연실색케 하는 매혹의 더없는 조합인 것이다.

사실 자연의 풍광이 그지없이 좋은 교외의 빌라라는 곳이라도 매일의 지리멸렬한 반복이다 보면 그것이 무슨 즐거움이겠는가. 아마 삶의 권태라는 태생적인 인간의 질환이 머리를 쳐들어 댈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흥분의 소멸, 위축되고 수축되는 순간, 그것은 분출되는 것의 고갈, 슬픔이라 할 것이다. 결국 남성은 동물적 쾌락 속에서 침몰한다. 그 침몰은 곧 나른한 권태이다. 지루함이다. 상징적 세계의 수축, 삶의 권태, 쓰라린 감정, 로마는 바로 이 불응기를 축소하기 위한 권태와의 전쟁의 역사인 것이다. 무감각해진 오늘의 인간들을 자극하기 위한 리얼리티 쇼같은 광적인 쾌락주의처럼.

신비의 빌라에 있는 돌처럼 단단한 파스키누스를 바라보는 놀라운 표정은 정신을 몽롱하게하고 죽음을 가져오는 에로틱한 시선이다. 바로 머리에 50마리의 뱀이 우글거리고 입을 활짝 벌린 여자의 얼굴을 한 메두사(medusa)가 바로 그것이다. 그녀를 바라보면 모두 돌처럼 굳어 죽어버린다. 황금비로 변한 제우스와 라르고스 왕의 딸인‘다나에’사이에 출생한 아들, ‘페르세우스’가 폭력적이고 성적이고 마법을 걸어오는, 놀라움으로 얼어붙게 만드는 시선의 메두사의 머리를 잘라오기 위해서는 결코 마주볼 수 없는 것이다. 마주보는 것은 곧 죽음이다. 마주보는 시선이 행사 할 수 있는 힘에 대한 두려움,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은 금기이며 이 정면의 파괴적 시선에 대응하는 것이 곁눈질이다. 겁을 내며 수줍게 바라보는 여자의 비스듬한 시선은 바로 페르세우스의 계략이다. 반들반들 거울처럼 닦은 페르세우스의 청동방패에 반사되어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 메두사의 공포의 경직은 쾌락의 극치인 것이다. 이는 호수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가 아니라 바로“반영(反映)에 잡아먹힌” 나르키소스의‘자기 살해적 시선’,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나르키소스 신화의 3가지 판본의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책 본문 참조)

“쾌락은 육체를 우월한 자아로 느끼게 하고 영혼을 신적인 존재로 끌어올린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경험은 오직 쾌락뿐이다. 육체와 영혼의 결합이 이루어지고서야 비로소 삶은 통합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노출을 은폐하고 성과 매혹을 금기시하는 사회는 파괴 불가능한 욕망을 알지 못하고 그 수축의 권태와 쾌락, 죽음을 제거하기 위해 기술적 광란에 집착한다. 권태에 집착하는 사회는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었음을 우린 역사에서 본다.“자신이 생겨난 섹스와 자신이 썩는 죽음의 부패 사이에 놓인 육체를 지니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우수와 더불어 권태와 증오”가 잇따르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인 것을, 인간인 것을 왜 부정하고 회피하려 하는가. “삶은 죽음을 배경으로 반짝이는 빛”이란 것을, 그 매혹의 빛, 설혹 돌처럼 굳어진들 정면으로 마주하는 그 아찔함의 순간적 경련과 경직은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저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 서있는 조각상의 아름다움처럼...

섹스와 공포, 성과 권력, 쾌락과 죽음이 매혹이라는 동일한 기원에서 태어났음을 어원학적으로 그리고, 고대 문헌과 회화를 배경으로 본질을 가려왔던 어둠을 과감하게 걷어내고 선구적인 윤리를 제시 해내는 이 저술은, 에로티즘의 본질을 파헤쳐 우리들이 지닌 왜곡된 선입견을 교정하고 새로운 문명사를 여는 에로티즘 정보의 광산이자 절대 걸작이라 함에 부족함이 없는 대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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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지대
쑤퉁 지음, 송하진 옮김 / 비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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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민의 여과되지 않은 감정, 날것의 삶 그대로임으로서 자연스레 우러나는 해학, 아마 이것이 쑤퉁(蘇童)소설의 특징이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너저분하게 포장하고 수식하지 않은 질박(質樸)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왠지 짙은 처연(悽然)함이 더욱 강렬하게 느껴진다.
“세 개의 큰 굴뚝은 성북지대(城北地帶)의 상징이다.”로 시작하는 소설의 첫 문장에서 이미 암울한 도시 서민의 애환, 피폐한 환경 등 소외되고 버림받은 그 무엇들, 애달픈 사연들을 떠올리게 한다. 문화혁명이라는 과도한 중공업정책, 사회주의 계급투쟁이 강조되던 1970년대의 소도시 끝자락, 툭하면‘무산계급 전제정치’를 노동자들의 무슨 권위라도 되는듯이 떠벌리는, 그러나 이념과, 권력투쟁과는 무관한, 또한 희생자일 밖에 없는 사람들의 고단한 삶이 투영되고 있다.

화학공장이 뿜어내는 분진과 쏟아내는 오염물질로 회색빛깔을 한 마을과 썩은 강물이 흘러 악취가 나는 도시, 참죽나무 없는 참죽나무길과 길에 피어나는 꽃들은 기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그저 피고 지는 사람들의 모습이 중첩되어 다가온다. 운치와 정감있는 마을길들의 이름과는 달리 그 역설의 해학을 피해갈 수 없게 하는데, 참죽나무길에 대해 실로 경악할 만한 내용을 발견하였다고 하면서 明⋅淸시대 죄수를 수감하던 북대옥(北大獄)이 있던 곳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다성, 쉬더, 쩔룩이, 홍치 라는 네 명의 불량소년과 그들이 팽개친, 아니 그들을 포용할 수 없었던 “줄곧 살인, 방화의 상징으로 유명”한 동펑중학교가 더해지면서 세상과 화해할 수 없는 괴리되고 반항하는 삶들을 목격하게 된다.

몇 푼의 돈에 딸을 팔아넘긴 뱀 장수, 이유도 모르고 낯선 남자의 아내가 되어야 했던 여인‘텅펑’, 이들의 아들‘다성’, 여기서 분명 비애감을 느껴야 할 것 같은데, 브레이크가 망가진 자전거를 멈추지 못해 트럭에 돌진해 비명횡사하는 다성의 아버지‘리슈예’의 하루는 오히려 웃음이 비어져 나온다. 죽음을 미소짓게 하는, 그러나 그 미소 뒤에 소시민의 애환이 몽땅 담겨있음에 바로 심각한 얼굴의 모드로 돌아오게 하는 절묘한 재주가 있다.
한편 과부, 홀아비, 오쟁이 진 무능한 남자, 고작해야 공장노동자들과 이들의 무력함에 저항하는 방치된 아이들, 가정은 물론 학교에서도 어떤 소명의식을 찾을 수 없는 그런 사회, 절망만이 팽팽하게 흐르는 황폐한 시간만이 썩은 물이 흐르는 해자와 같이 휘감아 돈다.

절제와 공존, 배려와 사랑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하나씩 사회에서 사라져간다. 순간의 욕망으로 이웃집 여자아이를 강간하고 인민재판에서 해충처럼 처단되는 열여덟 살‘홍치’, 강간의 수치와 주위의 폭력적 시선과 언어에 마침내 강물로 뛰어들어 생을 마감하는 어린 소녀‘메이치’, 폭력의 패자가 되겠다는‘다성’의 어이없는 죽음, 아비와 아들이 함께 탐하는 유부녀인 탕녀‘진란’, 건달패들의 추행에 저항하다 살해당한 쩔룩이의 누나, 온통 채 피어나지 못하고 죽거나 축축한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대는 아이들이 여느 막장 드라마 이상으로 음울하게 그려지고 있다.
인민의 삶과는 이격된 권력자들의 이념투쟁과 정책들은 등장하는 호적 담당 경찰관이나 유리병 세척공장 당 간부의“무산계급 전제정치가 그깟 화냥년 하나 다스리지 못하겠어요?”하며 호기를 부리지만 어느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에서 문화혁명기의 좌절된 사람들의 허탈과 분노를 읽게 된다.

이 작품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 저녁에 피어 아침에 지는‘야반화(夜飯花: 일명 분꽃)’라는 꽃이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키우는 사람의 마음을 더 잘 아는 것이 꽃”이며, “만일 꽃을 키우는 사람이 그 화초들 옆에서 귀를 기울여 들었다면 가지와 잎이 자라는 소리와 꽃봉오리가 마음껏 웃는 소리까지 다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라는 문장에 이르러서야 어느 샌가 참죽나무길에 빠른 속도로 퍼져 피어나는‘태양화’를 이해하게 된다. 어두운 밤에서 밝은 낮의 꽃이 피어나는 곳이 되는 것을. 절망과 무기력에 절고 상처받은 부모들, 그리고 성숙하지 못한 갈등과 혼란의 사회가 귀 기울여주고 보듬어주지 못했던 중국의 1970년대는 50살 중년이 된 오늘의 그들에게 안타깝고 눈물겨운 기억으로 간직되어 있을 것이다. ‘성북지대’, 무지막지함만이 그득해서 어딘가로 벗어나야만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은 곳, 제대로 어른이 되지 못하게 하는 그런 곳에서 아이들의 삶의 뿌리 내리기가 처연한 아름다움의 문장으로 그려진 성장소설의 걸작 중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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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시대의 경제학 - 늙어 가는 세계의 거시 경제를 전망하다 부키 경제.경영 라이브러리 5
조지 매그너스 지음, 홍지수 옮김 / 부키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작금의 무상급식에 대한 보수정당의 사회복지에 대한 인식을 보면 급속하게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는 한국사회에 대한 불안이나 걱정이 단순한 우려가 아니라 사실로 이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정치지배 권력은 단기적 이익실현에 사로잡혀 자신들의 부의 축적을 위한 정책을 위해서는 복지정책과 같은 장기적 사회안전망의 구축은 장애가 되는 것이고, 해서 기를 쓰고 복지정책을 축소하려한다. 또한 선거와 같은 이해관계에 얽힌 당사자들인 이들은 단기적이고 가시적 성과에만 열을 올려 10년, 20년, 30년 후의 한국사회가 부딪치게 될 문제에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부자 감세정책을 밀어붙이고 복지예산 역시 권력의 홍보 전략화하면서 가시적인 곳의 집행만 이루어져 정작 빈곤계층이나 노인 등 취약계층을 위한 예산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예산의 효율적이고 균형적 배분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더구나 베이비붐세대가 본격적으로 고령화되는 시기를 목전에 두고 있는 가장 급격한 노인인구 증가국의 하나이며 , 출산율 또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폴란드,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와 같은 살기 힘든 국가들과 같은 세계 최저 출산율 국가로서 세계평균의 50%를 밑도는 그야말로 앞뒤가 꽉 막힌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해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는 고령화 사회를 지탱할 생산가능인구가 부족하다는 의미이며, 노인 인구의 생존을 보장할 국가의 재정적 준비도 전혀 없이 오직 개인의 능력에만 의존해야만 한다는 심각한 사회적인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이 저술은 바로 이러한 인구구조의 변화, 즉 출산율 저하와 고령화의 급격한 진입에 따른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당면 과제와 이로인한 영향들을 제시하고, 이러한 변화에 어떻게 적응해 나갈 것인가를 고찰하고 있다. 적시되고 있는 구미 선진국 사회들의 고령화와 인구 구조 변화는 물론 개발도상국, 빈곤국들의 현상을 비교 분석하면서 발생가능하고 우려되는 고령화관련 비용의 증가로 인한 재정 압박을 비롯한 국가별로 직면하게 될 고통스러운 문제들을 검토하고 있으며, 또한 회피할 수 없는‘세계화’라는 자원의 무차별적 이동을 여하하게 국제사회가 균형을 유지하며 상호작용 할 수 있는지를 이민과 자본의 유출입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현재 세계 인구는 65억 명이고 2050년에는 92억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며, 세계의 중위 연령은 28세이나 2050년에는 38세로 높아진다. 출산율도 인구 대체율인 2.1명 이하로 떨어짐으로써 생산가능 인구가 줄어든다. 6억7000만 명인 65세 이상 고령 인구도 2050년에는 20억 명으로 4배 가까이 폭증한다. 이는 노인 1명을 부양하는 생산가능인구가 1/4로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의 인구 구조변화를 표현하는 이러한 지표가 지구촌 전체의 사회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지만, 한국 사회는 이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구미 선진국들의 경우 한국보다 고령화비율이 낮으며, 그 속도 또한 급진적이지 않으며, 출산율도 한국보다는 훨씬 양호하다. 게다가 사회보장제도가 한국의 열악한 수준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할 정도로 잘 갖추어져 있다. 이와는 달리 한국의 고령화 속도 및 고령 인구의 급증은 일본에 이어 세계최고의 수준이고, 출산율은 세계 1,2위를 다툴 정도로 낮으며, 65세 이상 고령 인구의 대다수는 빈곤층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있을 정도로 사회보장이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이러한 한국 사회의 불감증과 정치권력의 무책임성이 결합하여 곧 도래할 2020년의 한국경제는 대책 없이 불행과 궁핍에 직면할 지도 모를 일이다. 단순히 고령인구의 부양을 위한 재정적 준비만이 아니라, 소득세, 소비세 등의 균형적이고 절충적인 조세정책, 의료 및 생존을 보장하는 사회안전망을 유지할 수 있는 사회보장제도의 재정비, 부족한 노동인구의 충당을 위한 세밀한 이민유입 정책, 기타 공공정책 등에 대한 기반을 마련하여 할 것이다. 사실 한국사회는 이러한 준비와 재원, 제도정비를 위한 시간을 미룰 만큼의 여유가 없다. 이 저술에서도 지적하듯이 한국은 대만과 함께 연금 지출 등 재정적 압박으로 국가경제가 2010년부터 악화되기 시작하고 2035년 무렵에는 극심한 압박에 처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사실 저자의 지적처럼 오늘의 자유시장 자본주의체제로는“빈곤층의 요구는 고사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중산층의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도 역부족이라는 점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으며, “순조롭게 고령화 사회로 전환하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사회복지국가나 수정된 자본주의가 필요”할 것이다.
아마 이러한 변화는 불가피한 과정이 될 것인데, 줄어든 생산가능 인구를 늘리기 위해서는 여성인력의 참여를 위한 보육시설의 확충등 환경적, 제도적 기반 마련과 싱가폴과 같이 55~64세 연령의 의무채용 등 적극적인 정책이 요구되며, 특히 노동력 공급부족이 가장 극심할 것으로 예상되는 한국의 경우 이민의 적극적인 수용도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에 더해 부유층, 고소득자, 기업에 높은 세율을 적용해 사회보장재원을 확충하고 이의 일방적인 부담의 형평을 위해 일부분은 판매상품등에 소비세로 전환해 절충적이고 형평성 있는 조세정책으로의 개선을 하여야 할 것이다. 이는 모두 국가주도의 경제정책으로 다분히 준계획경제체제로의 돌입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인구 구조의 변화는 이처럼 단순히 영유아 인구의 감소와 고령화 인구의 증가라는 막연한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고령화는 벌어들인 것을 지출하는 즉, 저축율의 하락을 동반하고 공공지출의 증가를 초래한다. “고령화 논란의 핵심은 돈”이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지구촌이 마주한 최대의 경제적 시험무대이고 개인과 국가에 대한 압박이자 공포이다. 그러나 다행인지 위기인지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세계화’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돌파구가 되어줄지도 모르겠다.
사실 세계화가 미국, 영국, 프랑스, 호주 등 선진국들로의 자본과 노동력의 유입으로 개발도상국들과의 공존이 그나마 가능했다는 긍정성도 존재해왔다. 다시말해 중국과 같은 신흥국들의 거대한 자본축적이 선진국들에 투자로 유입되어 지금까지는 상호 의존적인 안정이 가능했으며, 부족한 노동력이 못사는 나라에서 잘 사는 나라로 이동하는 움직임을 자연스레 조장하여 균형을 맞추었으니 말이다.

한편 인구구조의 변화는 세계경제 및 정치적 위상의 변화를 수반하게 될 것이다. 젊은 층의 감소는 서남아시아 및 아프리카 등 영유아인구가 계속 늘어나는 젊은 나라들과는 달리 중위연령이 40세에 육박하는 나이든 나라들의 군사력, 국가 안보능력에 심각한 도전국면을 만들어 낼 것이다, 아마 갈등에 관여할 능력이나 의지를 감소시키고 이는 새로운 패자의 부상으로 이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우리 한국사회는 심각한 노동인구의 부족과 고령인구의 부담으로 경제적 위기를 맞이할 조건을 세계의 그 어느 나라보다 명료하게 갖추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미 100만 명이 넘는 외국인이 우리사회의 일원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이제 이민유입에 대한 정책도 보다 적극적이고 주도면밀하게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 이들의 저축과 보험 등을 통해 더욱 늘어나야만 되는 사회보장 비용의 재원을 거둬들여 새로운 수입원을 조성하고, 특히 유입인력의 질적 수준에 대한 고려도 장기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도래하는 베이비붐세대의 고령화는 분명 당면한 심각한 과제이다. 그러나 베이비붐 이후세대는 더욱 끔찍한 사회를 맞이할 수도 있다. 심지어 “불안하고 재정적으로 압박을 받으며 과도한 조세 부담을 안은 채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는”세대라 하여‘아이팟(Insecure, Pressured, Overtaxed and Debt-Ridden)’이라고 불리기까지 하는 이들을 일생 내내 경제적 불안에 시달리게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인구 구조 변화에 대한 한국사회의 움직임은 지나치게 적은 것이 사실이다. 시간이 없다. 재원마련을 위한, 아니 경제적 혼란과 이로인한 사회적 불행을 차단하기위해서라도 진중한 정책적 변화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세계사회가 직면한 고령화 시대를 진단하는 다양한 거시경제의 전망과 검증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이 저작은 우리와 이해관계를 맺고 있는 주변국과 세계경제를 예측하고,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고 준비케 하는 강력한 지침이 되어준다. 이 시대에 반드시 검토되고 숙지되어야 할 경제가이드라 하겠다. 국민 모두, 그러나 특히 정책 입안자들, 정치인들이 꼭 읽어주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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