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덕의 불운 열린책들 세계문학 159
싸드 지음, 이형식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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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인간 세상에 대한 환멸과 경멸, 혐오감으로 분노와 증오에 가득 찬 싸드(Marquis de sade)의 냉혹한 눈초리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가련한 두 발 달린 개체를 짓누르는”, 아직 아마도 그 실체의 정의조차 내리지 못하는 섭리, 숙명이라는 존재의 괴이한 변덕이라는 우화를 통해 악의와 악덕에 익숙한 인간과 세상의 본성을 싸늘하게 그려낸다. “전체가 썩어버린 사회”에서는 미덕이란 그러한 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처럼 “다수의 이익이 인간들을 부패로 이끌어가고자 할 때, 특정인인 자기만 부패하지 않겠노라고 한다면 다수의 인간들과 싸우게 되고 결국 전체 이익에 대항하여 투쟁하게 되는 것”인데, 다수가 걷는 악덕의 길을 걷지 않으려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파멸하는 것이 불가피하니 미덕이나 악덕이나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것이 싸드의 속내였을 것이다.

‘싸드’를 말하면 으레‘싸디즘(sadism)’을 떠 올리지만, 그 가학적 음란성이란 표피성은 결코 본질이 아니다. 이 작품에서도 “쌩뜨-마리-드-부와(Sainte-Marie-des-Bois)”,즉 “숲속의 신성한 마리아”라는 이름의 그 본성과는 걸맞지 않는 수도원이 대표적 싸디스트 집단으로 등장하는데, 더럽고 모독으로 가득한 시궁창이며, 난폭성과 변태적 도착증으로 똘똘 뭉쳐진 괴물들인 수도사들의 위선과 악마성을 통해 온통 악덕으로 떡칠을 한 인간, 인간 세상에 대한 적나라한 고발을 대리하는 도구이다. 외설과 음란성에 관심을 집중하는 세상의 시선은 바로 그 금지라는 규범에 도사린 치졸함, 유치함, 폭로적 관능에 탐닉하는 자들의 자기 은폐일 것이다.

소설은 고아가 되어버린 두 소녀의 인생행로를 극단적인 대비 속에서 보여주는데, 미덕의 화신인 ‘쥐스띤느’와 악덕으로 뭉쳐진‘쥘리에뜨’자매의 삶의 섭리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와 해석의 결과가 인간세상에서 진실이라고 떠들어대는 것, 소위 인간 삶의“궁극적 목표에 이르는 길을 덮고 있는 어둠 위에 빛을 던져준다”는 철학의 승리라는 것의 실체라는 것이 얼마나 무용한 헛소리인가를 증명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일찌감치 큼직한 죄악으로 돌진해서 주도면밀한 매춘으로 귀족들을 갈취하고 살해하여‘로르상주 백작 부인’으로 상류층사회의 일원이 되는 쥘리에뜨와는 달리, 정숙함, 고결함의 미덕을 지키고 고귀한 신앙심으로 똘똘 뭉친 쥐스띤느의 일생은 전대미문의 엄청난 불행의 연속이다.

고리대금업자의 하녀로서 도둑질을 거절한 끝에 도둑의 누명을 쓰고 잔혹하게 쫓겨나는가하면, 어머니를 독살하려는 동성애에 빠져있는 방탕한 후작의 살해 공모를 거절하자 1백대의 채찍질 후에 버려지며, 선의인 줄 알았던 상처 난 몸을 치유해주었던 외과의사는 몸에 낙인을 찍고 매질을 하여 내치고, 지친 심신을 의지하려 찾아간 수도원의 지엄한 제단은 흉측한 괴물들의 집합소이며, 심한 폭행으로 상처 난 사나이를 구조해준 은혜의 결과는 채찍과 노예생활이란 보상으로 돌아온다. 오직 욕스러움과 피투성이 가시밭길로 점철된 그녀의 인생이란 사실 미덕의 저주이다. 악덕이 선(善)의 행세를 하는 세상에서 어찌 미덕으로 살아 가려하는가!

자신의 쾌락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어머니를 살해하려는 후작의 궤변(詭辯)은 아마 싸드의 역설이자 인간들에 대한 조롱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살해하는 것은 “자신의 유사체(類似體)를 파괴하는 것이고, 또한 그 파괴의 괴로움”이라는 두 가지 죄악이라 하겠지만 그건 순전한 환상 일뿐이라고 주장한다. 죽음은 단지“형태의 변화이지 절멸은 있을 수 없으며, 자연의 눈에 모든 것은 평등하며, 단지 물질 덩어리는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재생”할 뿐이라고 말이다. 즉 죽음은 자연이란 다양성의 실현이라고. 게다가“자연에게 하도 중요하여 인간의 파괴에 자연이 필연적으로 노하게 되었음을 증명”해봐라! 그러면 범죄를 인정하겠다고. 어찌 많이 들어본 말 같지 않은가?...

이러한 싸드의 역설적 궤변은 다 죽어가던 놈을 구해줬더니 채찍과 노예노동으로 보상하는‘달빌르’라는 위폐범이 하는 말에서 반복되는데, 자신은“선행, 인정, 따위 등이 재산을 축적하려는 사람에게는 발부리에 부딪치는 돌이라는 사실을 일찍 깨달”아서, “약자들을 희생시키며, 다른 사람들의 신뢰와 어수룩함”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는 것은 현명함이라고 으스대는 것이다. 또한 죄의식이나 회한이란 것은 일종의 환상으로 “너무 나약하여 그것을 감히 지워버리지 못하는 영혼의 천치같은 독백에 불과”한 것이고 실제 부를 손에 넣게 되면 모두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고 강변한다.

범죄 역시“법률이나 국가적 인습을 위반하는 행위에 불과한 것이고, 근본적으로 범죄라 칭할 만한 것은 없으며, 단지 견해와 지역의 문제”일 뿐이라고 설득한다. 현실을 봐라! “세력이 강한 자에게는 법이 미치지 못하고 운이 좋은 자는 법망을 빠져나가”지 않는가! 어찌 보면‘신성한 마리아 수도원’의 원장인 수도사 라파엘이나 앙또냉 같은 변태성욕자들이 탐욕의 대상자“몸에 나타나는 고통스러운 징후를 정성스럽게 포착하여, 그 율동에 자신의 관능적 전율을 조화”시키는 그 가학성과 아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은 사형을 선고받고 경찰에 끌려 호송되던 길 중에 우연히 만난 로르상주 백작부인에게 쏘피(쥐스띤느)가 들려주는 인생의 곡절과 사연의 형식인데, 미덕이 끊임없이 불행이란 보상으로 되돌아온 얘기의 마무리 끝에 두 여인은 얼싸안고 눈물을 흘린다. 18세기, 더구나 세기말의 작품이란 그렇듯이 세상과 삶이 깊은 절망에 휩싸이고 인생의 거의 절반을 감옥에서 보낸 시대의 반항아인 싸드로서는 아마 인간들의 악덕에 진절머리가 났을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에 동생 쥐스띤느의 죽음을 본 쥘리에뜨의 수녀원 귀의를 설명하면서 그녀의“기지의 밝음과 품행의 엄격함으로 모든 사람의 전범이 되었다.”고 이것은 마침내 미덕의 기쁜 보상이라고 너스레를 떠는데, 과연 이 말이 싸드의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빈정거림이었는지는 200년이 지난 지금 그에게 확인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세속화된 종교 권력의 파렴치함과 악덕으로 썩어빠진 인간들의 위선과 허영에 앙다문 이빨을 으드득 가는 차디찬 싸드의 분노가 끓어 넘치는 작품이다. 200 여년이 지났건만 싸드의 주장이 호소력 있게 들리는 건 결코 변하지 않는 인간의 악덕 때문일 것이다. ‘피터 박스올’의‘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1001권의 책’에 선정된 작품이라 했던가? 싸드를 이해하고 인간의 본성, 삶의 섭리를 이해하는데 이만한 책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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