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의 회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2
헨리 제임스 지음, 최경도 옮김 / 민음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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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꼬리를 물기시작하면 그 생각의 심연에서 빠져나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사의 회전처럼 돌아 갈수록 더욱 죄어지고 깊어진다. 그래서인데 표현되지 못한 욕망이란 타인의 시선, 기성의 가치와 제도에 억눌려 은폐되곤 하지만,  이러한 억압의 환경을 벗어나 독단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은밀한 내면의 욕망은 환상적인 자아도취가 되어 절제 없는 자기 심화의 외곬으로 빠져든다. 아마 그 끝은 어둠의, 악의, 죽음의 그 언저리가 되지 않을까?
무의식 속에 잠재한 욕망을 실현하려는 충동은 환상을 만들어 내고, 존재하지 않는 환상을 실재하는 것으로서의 믿음을 강화하도록 이끈다. 이 강화의 행위는 절대적인 욕망충족의 과정이므로 이에 대한 장애의 제거는 필수적인 것이 된다. 그래서 누군가가 유령(환상)을 보았다면 자신의 심리적 욕망을 투영시키기 위한 욕구의 실재(實在)화라 해도 실수는 없을 것이다.

이 오래된 소설이 지금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이유는 이와 같은 인간 내면의 어두운 심리를 선구적으로 탐색했기 때문이지만, 이를 더욱 매혹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은 부존하는 대상에 대한 진술과 믿음을 주변사람들로부터 승인받으려는 심리적 기만과 강요의 모습, 그리고 타자의 심리와 진실성을 자기심리와 동일하게 취급하는 반사회적 성향 등 모호하지만 항상 자가당착적으로 작용하는 인간의식 흐름의 세련된 묘사라 할 수 있다.

작품의 도입부인 프롤로그를 제외하면 소설 속 등장인물은 환영(幻影)이나, 화자인 가정교사의 주인인 내용상의 인물을 제외하면 네 사람에 불과하다. 가정교사인 화자(話者)와 집사격의 그로스 부인, 그리고 삼촌에 의해 양육되는 고아가 된 어린 남매인 마일스와 플로라, 즉 구성원의 간결성은 폐쇄성과 권력이 용이하게 행사될 수 있다는 의미의 배경이다. 글을 읽지 못하는 선한 마음씨의 집사여인이나 아이들은 가정교사의 지적사고나 사회적 위치를 넘어설 수 없는 인물이며, 이것은 가정교사에게 더 할 수 없는 욕망 분출의 장소가 되고, 자기 의지대로 타인을 조종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한 것이다.

아이들의 가정교사로 저택에 도착하자 화자는 저택의 여주인으로서의 지위와 자유의 행복감에 젖지만, 이내 첫날 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어떤 소리가 반복해서 들려왔다면서, 그 소리는 자연이나 외부에서 들려온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내부에서 울려온 소리라고, 웅크리고 있던 억압된 욕망의 현재화를 위한 잠재적 준비가 그녀의 내면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너무도 아름다운 어린 소녀와 고귀한 모습의 소년, 충실한 집사, 그리고 고즈넉한 저택의 환경은 충만한 애정과 소유의 집착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결국 이러한 환경은 그녀의 상상력과 기질, 허영심이 혼합된 산물로서 유령의 존재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화자는 결코 유령이 자신의 정신세계가 만들어 낸 존재임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독자들은 유령의 출현이 위선과 거짓된 상상임을 모호하지만 알게 된다. 이러한 정황은 자기“내부의 예민한 기질이 결국 모든 것에 대한 함정이 되고 말았다.”라던가, “환상에 사로잡힌 나의 끔찍한 습성을 내 동료가 놀라움과 동정심이 반씩 섞인 채”와 같은 식으로 암시한다.

결국 유령의 부존재를 아는 독자는 가정교사의 심리를 쫒게 되는데, 자신이 본 유령의 악마성과 위협으로부터 어린 아이들을 지켜내기 위해 보호막으로서 속죄하는 희생양이 될 것이라고 집사를 설득하고 동료화시키는 자기 확신모습이나, 무심한 순수함의 어린 아이들의 행위에서 그들의“노골적인 매력이 계산적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거나, 자기 눈앞에 펼쳐지는 아이들의 평화로운 모습을 기만이라고 단정하는 판단에서 인간 본성으로서의 욕망이란 것이 사회의 제약을 상실했을 때 얼마나 파렴치하고 폭력적으로 변하는지 목격하게 된다. 이는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천연스러움을 “계속 순진한 표정을 가장”한 것으로 인식하고, 예전에 아이들의 보호자였던 이미 망자가 된 주인의 시종과 전임 가정교사를 유령의 정체로 함으로서 악의적인 적대세력으로 정의하여, 확신을 강화하고 심화시키는 나르시시즘(narcissism)에 이른다. 더구나 아이들은 알지 못하는 유령의 출현을 아이들의 은밀한 비밀로 간주하고는 아이들과 유령의 교통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진실을 추궁하고 강요하는 상황으로 치닫는데, 경계를 허문 낯선 존재로서의 유령에 대한 공포보다 환상이라는 무의식에 감추어진 인간의 추악한 욕망, 그 본성을 보는 것에서 오히려 수치스러운 외마디 비명을 지르게 된다.

마침내 소년‘마일스’를 추궁하던 끝에 그의 거짓 없음과 완전한 순수성을 보게 되지만, 욕망에 가려진 의식세계가 고작 하는 말이란, “만일 그가 순진하다면 나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고 자문하는 것일 뿐이다. 아이들의 운명을 자신의 욕망에 일치시켜 권력을 행사하는 가정교사가 아이를 절명 시키면서 내뱉는 마지막 선언, “악령을 쫒아 낸...”에서는 그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꽉 죄인 나사 같은 숨 막히는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심리소설의 선구작(先驅作)이라 불리는 이유를 입증하듯이 독자의 의식흐름까지 지배하는 사악하고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는 이 소설의 탁월성을 무엇이라 해야 할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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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의 미궁호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6
야자키 아리미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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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편의 소주제를 지닌 연작 혹은 장편 소설이다. 삶의 열기를 잃어버리거나, 희망을 저버리고 낙심하는 사람들, 목표를 이루지 못해 고뇌하는, 사랑의 진정함을 찾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열정, 꿈, 희망의 메신저가 되어주고, 사랑하는 가족, 친구, 연인들의 찢겨진 마음들을 봉합하고 복원해주는 작품이다. 이렇게 소설의 메시지를 정리하고 보니 왠지 딱딱하고 거창해 보이지만 내용은 한 없이 부드럽고 친근한 범인(凡人)들의 일상 이야기여서 말하는 빛바랜 분홍색의‘돼지인형’이라는 낯설고 당혹스러운 존재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인식에 별 저항감 없이 수용된다.

굳이 장르를 구분하려한다면 일종의 환영(幻影)문학이라 해야 할까? 그렇다고 현실세계를 이탈한 이질적 세계를 이야기하는 결코 아니며, 단지 삶의 현실을 아름답고 가치 있게 복원하는 수단으로서 꿈과 희망의 환상성을 도입했다고 하여야 할 것 같다. 소설의 기초는 현실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으며, 간절한 무엇을 간구할 때에만 현실과 비현실적 세계의 경계가 해체되어 현실적으로 가능치 않을 것 같은 존재와 조우하고, 도달할 그 무엇을 발견하게 하는 기본에 충실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어머니의 병간호, 가업인 꽃가게를 꾸리는 남동생의 부족한 일손을 위해 각본가로서의 꿈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의 잃어버린 자신감을 일깨워주고 마침내 아마추어 연극제의 연출보조자로서 다시금 충만한 삶의 열정을 되찾게 하거나, 사랑을 이용하는 여자의 진실을 드러내게 하여 진정한 자아와 사랑에 대해 생각게 하고, 해체된 가족, 상처받은 자존감을 어루만져 주고, 진정 원하는 것의 실체를 발견하게 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방향을 잃고, 때론 좌절하거나 상처받고 앓아눕기도 할 때면 해안가의 고상한 고급 리조트호텔인, 그랜드 호텔의 버틀러(집사), 핑크빛 봉제인형 돼지돼지 씨는 그네들의 눈에 보이는데, 움직이고 말하는 인형의 발견이라는 그 당혹스러움이 공포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 작고 둥글둥글하며 천으로 만들어진 소박함과 귀여운 얼굴 모습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독립적인 주체성을 지닌 봉제인형을 받아들이기가 용이한 일이 아니다. 해서, 작가는 중간 중간 모호함, 신비함, 부존재성의 암시를 남긴다. 대화 속에서 돼지돼지 씨가 “예컨대 저를 보실 수 있는 분이라든지요.”라든가, 앓아누워 몽롱함과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 인형의 존재를 확인 할 수 없으며, 특정인물에게는 보였으나 제3의 인물은 감지하지 못하는 장면들에서 그 것은 환각, 환상 속의 환영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존재하지 않을 것이지만 존재하는 것이기도 한 이 인형의 존재는 우리 사람들의 심리적 욕망이 투영된  일종의 구조로서의 은유물로 이해되기도 한다. 어쨌거나 나로서는 이러한 논리적 이해 수단을 마련하고서야 온전히 이 봉제인형이란 존재를 수용할 수 있었으니 이러한 유치한 단서를 마련하려 한 것은 타당한 것일 게다.

나는 다섯 편의 에피소드 중 특히 넷째 편인 <겨울 이야기>가 인상 깊었는데, 아마 여기저기서 읽었거나 보았던 기억들의 어떤 유사함이라는 친근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도 직접적으로 거명하고 있는‘코언형제’의 영화 <바톤 핑크>나, ‘스티븐 킹’의 소설 <샤이닝>에 공히 등장하는 호텔과 호텔에 묶인 작가라는 소재처럼 역시 이야기의 중심인물이 집필을 위해 호텔에 머무는 호러소설가이다. 즉 이들의 오마주라는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이 소설, 물질에 인간성을 부여한 의외적 존재가 등장함에도 기괴함이나 공포가 존재하지 않는 점에 대한 일종의 변명이 흥미로움을 일으키고, 더구나 환상성이란 장치가 기대하는, 현실이 결여하고 있거나 인간 세상의 위선이나 그릇되어 있음에 대한 비판성의 원론을 노골적으로 들먹이는 대사라 할 것이다.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 연장되어 환각, 상상의 세계에서조차 타자를 믿지 못하는 것인데, 자신을 진심으로 간호하려는 돼지돼지 씨에 대하여 “방심시켜놓고 덮칠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중얼거림과 같다. 또한 “환각은 좋은 소재야”라든가, “꿈과 현실이 분간이 안 되는”것처럼 독자를 향해 환상문학에 대한 직접적 학습을 주문하는 모습에서 작가적 열의와 집착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한 몫 했다 할 수 있다.

빠른 속도로 사람들의 소외를 심화시키고 진정한 소통은 오히려 사라져가는 오늘에, 또한 격심한 경쟁에 지친 우리들은 그 어느 시대보다 작고 따뜻한 정말의 위로의 말 한마디, 행동이 간절하다 할 것이다. 그래서인데, 작품 속 돼지돼지 씨 같은 이가 꿈이건 우리의 상상의 공간에서건 모습을 보인다면 아마 삶의 커다란 활력이 되고 행운이 무럭무럭 자랄 것만 같다. 중년 남성을 위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 했던가? 어른들을 위한, 삶에 지친 사람들을 위한 행운의 부적, 행운의 소설이라 불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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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아라베스크 - 한 점의 그림으로 시작된 영혼의 여행
퍼트리샤 햄플 지음, 정은지 옮김 / 아트북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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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언가가 내 시선, 내 맘을 멈추게 하는, 내게 직접 어떤 것을 얘기하는 대상과 마주했던 적이 있었던가? 내 발길을 붙잡아 채는, 내 고동을 멎게 하는,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상황 말이다. 아마 너무도 급속하게 달려가는 산업적 시간에 적응하느라 내 초조해진 육체가 이런 정신적 경험에 노출 될 여지조차 없었던 때문일 것이지만, 왠지 관조(觀照)라는 여유의 언어가 사치스럽게만 여겨지듯이 한가함과 쌍둥이인 은밀함, 관능성에 대한 위선적 거부의 습관에 절어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문득 멈추어서 응시하게 되는 그 어떤 것, 내 마음을 붙잡는 그 미지의 대상에 대해 알고자 하는 까마득한 매혹의 순간, 상상만으로도 설레는 그것, 그런 상황에 돌연 서고 싶다는 충동이 인다.

작가‘퍼트리샤 햄플’은 20대의 젊은 시절, 약속 장소인‘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를 지나던 중 우연히 보게 된 ‘앙리 마티스(Henri Emile BenoIt Matisse)’의 <어항 앞의 여인>앞에 시선을 빼앗긴 채 영원처럼 서있었던 영혼의 전환적 순간을 얘기한다. 그림에 대해 아무런 지식도 없었던 그녀를 멈추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테이블에 손을 괴고 어항 속 금붕어를 응시하는 여인, 그리고 그녀의 뒤에 푸른색 아라베스크 문양의 스크린이 있을 뿐인 그다지 관심을 이끌 요소가 없어 보이는, 마티스의 명성을 얻은 작품 군에 속하지도 못하는 그런 그림에도 불구하고.
응시를 버리고 힐끗 보기에 자리를 양보한 현대인의 시선과는 자못 괴리된 한가함, 이국적인 스크린 뒤에 펼쳐질 상상의 방,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욕망이었을까?

    

색채의 본질성을 굳게 믿었던 화가의 신성한 빛을 향한 여정, 특히 이국적 나른함이 물씬 풍기는 ‘오달리스크’들에 대한 호기심은 삶의 여행, 영혼의 여행과 잇닿는다. 그녀의 말처럼 “인생은 중단 없는 응시의 투명한 빛으로 가득차야 마땅”한 것일 터이지만 어디 우리네 삶이란 것이 그렇던가.  햄플에게 세상을 천천히 응시하며 살도록 영감을 준 마티스는 인생의 은인일 수밖에 없다. 그것도 젊은 나이에 그녀를 붙잡아 주었으니 어항과 어항 속 금붕어, 어항을 바라보는 여인, 푸른 아라베스크 스크린이 어울린 바로 그 구조의 그림은 신의 계시와도 같은 것이었을까?

1919년에서 1929년에 이르는 10년 사이에 하렘의 여자들 - 오달리스크 - 을 그린 마티스의 그림은 무려 50점이나 된다.  서구인들의 눈에 동양의 신비스러움, 이국적 관능의 향기를 물씬 안겨준 오달리스크는 진정 어떠한 의미였을까? 그리고 마티스에게는 또 어떠한 것이었을까? 마티스의 오달리스크의 연원은 그보다 1세기 앞서 하렘과의 짧은 만남에 황홀경에 취해 사악한 오리엔탈리즘을 번득였던 ‘들라크루아’의 오달리스크나, 방구석에 틀어박혀 고작‘레이디 메리’의 터키여인들과의 욕장의 단상에서 심상을 얻어 서구인의 식민지적 왜곡을 덧씌운‘앵그르’의 몽상의 계보를 잇는다. 그러나 마티스의 오달리스크들은 이들처럼 단지 이야기에 불과하고 보이는 대상을 그리는 것으로서의 그림이 아니라“보는 행위를 그리는 그림”, 즉 재현된 게 아닌 창조된 세계, 자신의 정신에 대한 것이 되려는, 인지와 의식에 대한 것이라는 점에서 경계를 짓는다. 마티스에게 오달리스크는 한가함의 미학, 삶의 관조, 오랜 노동 뒤의 안식, 아름다움에 대한 꿈, 사치와 노동자의 자긍심과의 연계...그러한 것들이었다.

햄플의 에세이는 오달리스크들을 쫒아 잠시 동양을 서성인다. 중동지역의 관광여행, 관광여행의 속성이란 살짝은 가벼운 식민주의 아니런가? 공허하며 서성대고 하는 일 없이 종일 킁킁대고 돌아다니고, 별나고 맛난 것, 노천카페에서 거피를 마시고 무지한 눈빛을 하고는 미지의 땅에서 흘끗 본 이미지를 가지고 돌아오는 것.  “소비의 쿵쿵대는 형판(型版) 아래에서 인간의 욕망의 마그마는 계속 끓어오른다.”는 그녀의 표현처럼 왠지 은밀하고 속물적인, 흘끗 보기 속의 덧없는 순간 같은 경박함이 느껴지지만, 바로 이 편안한 겉핥기 관광이 스케치와 기록의 기술을 창출했으며, 이것은 내밀한 자아의 고통을 지탱하는 형식의 기술이라고 연결 짓는다.

1920년부터 1905년 <살롱도톤>에서‘야수’로 불리기 시작한 마티스는 소위 야수파의 영지‘폴리우르’, 프랑스 남부의 어촌인‘카시스’를 그의 영원한 예술 공간으로 삼는데, 그 지중해 빛, 낭만적 태고의 시원을 간직 한 곳, 이국의 꿈을 지닌 비현실적 땅이어서 그랬던지, ‘스콧 피츠제랄드’, ‘캐서린 맨스필드’부터, 일종의 문화그룹이었던 ‘블룸즈버리 그룹’의 멤버들이었던 ‘버지니아 울프’, ‘E.M.포스터’, ‘존 메이나드 케인즈’,‘로저 프라이’,‘버네사 벨’등 오늘날 이름만으로도 화려한 문인, 사상가, 경제학자, 화가들의 무대로서 조명되고, 소녀시절의 기억을 다리 삼아  동네친구의 엄마였던‘도리스’라는 여인이 건네준‘캐서린 맨스필드’의 <일기>와 <서간집>, 그리고 실험영화인이자 거부(巨富)였던 ‘제임스 힐’의 <필름 포트레이트>라는 영화의 개인적 교감에 대한 추억들의 에피소드들을 정말 무심한 즐거움으로 묘사한다.

    

맨스필드의 “자신의 영혼을 발가벗길 수 있었던 사심없는 권위의 글쓰기”와 그녀의 자유분방함,‘버지니아 울프’가 “싸구려에 냉혹하고...파렴치하다.”고 편지글에 남겼던 맨스필드의 인상부터, 결핵으로 단명하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은 “‘자유’시대에 걸린 진단 미확정의 임질”이 죽음의 원인일 것이라고 발칙한 소문도 살짝 퍼뜨린다. “레몬 빛 태양이 내리쬐는 방통의 빌라, 이졸라 벨라”에서의 맨스필드는 마티스의 태양과 신선한 빛과 조우한다. 색채와 빛, 에로티시즘과 오달리스크, 프랑스 남부를 맴돌며 예술의 창조성에 응시한 시선을 멈추지 않는다. 다시 오달리스크, 서양인들의 오만방자한 동양의 왜곡과 서구인의 하렘 바라보기를 뒤집어 놓는다. 오달리스크는 ‘방’,‘학교’의 뜻을 가진 터키어 오다(oda)를 어원으로 하는데, 이를 서양인들이 열을 올리며 상상하는 모든 성 노예의 이미지로 둔갑시켜 ‘타락’,‘순결을 잃다’와 같은 탐욕스러운 상상의 산물로 뒤바꿔 놓았음을‘바이런’, ‘제임스 조이스’까지 일조하며, 마침내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유한여성, 첩으로 왜곡시켜 버리는 여정을 추적한다. 또한 유럽인이 하렘의 여인들을 구속된 성적 노예라는 음탕함으로 변질시켜버린 것처럼, 코르셋을 입은 유럽인을 바라보는 터키의 여자들이 영국 여자들의 예속, 새장 속의 새를 발견하는 모습으로 관찰자의 시선에 따른 역전을 보여준다.

새장 속의 새, 어항 속의 금붕어, 하렘을 바라보는 서구인의 시선은 그런 것이었다는 점은 마티스의 <어항 앞의 여인> 속 여인의 응시는 오히려 서구인의 자기 성찰, 자아에 대한 인식의 촉구가 아니었을까? 기억과 기록, 여행의 여정, 에세이의 종착지는 마티스의 마지막을 지켰던 젊은 간호학교 학생이었던‘모니카 브루주아’, 훗날 ‘자크-마리’수녀가 되어 마티스의 예술적 혼이 배어있는 ‘로사리오 예배당’을 지키며,  마티스적인 얼굴을 한 그녀와의 만남은 허구의 공간을 맴돌던 것 같은 나른한 기분을 순간, 현실로 돌려놓는다. 소설 같은, 회화와 문학을 오가는 햄플의 기억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그녀처럼 성스런 무심함에 젖어든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마티스의 오달리스크들을 그린 회화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예술적 향취 그득한 에세이는 소소한 지적 즐거움과 함께, 아름다움, 열정, 재능,  묵상적 삶의 정수, 인생의 이미지들이 기분 좋게 다가온다. 힐끗 보는 경박한 삶과 세계가 아니라 햄플이 기대하는 인생, “바라보고 생각에 잠기는 것, 혼자 남겨져 끝나지 않는 소설을 읽는 것, 이따금 몇 분씩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는 것, 세계를 응시해 거기서 지나가는 이미지의 문장을 만드는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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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03-04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항을 응시하는 여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보입니다. '오달리스크'의 원뜻이 저렇게 이상한 쪽으로 변질되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변질된 의미로만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 책을 보려면 그림에 대한 일정정도의 상식을 갖춰야 할 것 같은데요.

필리아 2011-03-05 09:32   좋아요 0 | URL
마티스의 그림이 플롯의 중심이긴 하지만 그림의 해독이나 작가의 일화보다는 <어항 앞의 여인>의 '응시'라는 관조의 모습이 시발점이 되어 삶의 진정한 미덕에 대해 문학,영화,문화적 현상들을 자신의 경험과 추억들을 통해 더듬어보는 에세이에요. 그러나 그림에 대한 일정한 상식의 전제를 요구하는 책은 아니랍니다.
 
피터 드러커 강의 - 세기를 뛰어넘은 위대한 통찰
피터 드러커 지음, 이재규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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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학하면‘피터 드러커’를 떠올릴 정도로 그를 배제하고는 기업과 조직의 경영에 대해 제대로 된 얘기를 할 수 없다 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그의 시대에 따른 관심과 통찰의 결과물들 탓이긴 하겠지만 어떤 세대는 그의 경영학 일반에 대한 지혜에, 또 어떤 세대는 조직이론에, 그리고 자기계발의 조언에, 생태환경과 미래의 전망과 같이 조금씩은 다른 측면에서 접하고,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이 저작은 그의 이러한 각기 다른 시대적 통찰을 시계열적으로 정리하여 그의 경영학 사상을 구성하는 전체적인 관점을 조망하게 돕는다는 점에서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 것 같다. 1940년대부터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매 10년을 한 개의 장으로 하여 지금까지 미발표된 중요강의 내용을 수록하고 있어 조각난 단편으로만 이해되거나 미처 알지 못했던 그의 사상적 기반의 변화나 관점이 어떻게 심화되고 있는지, 또한 경영환경이나 기술의 변화와 같은 시대환경을 읽어내는 그의 통찰력과 이의 결과로서 제시하는 역량과 방법론들에 대한 가르침을 총체적으로 읽을 수 있는 귀한 기회가 된다.

특히 경영 관리자들, 최고 경영자들, 행정 관리자들을 향한 조언들은 급변하는 기업환경, 정치사회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오늘에도 변치 않는 아주 중요한 가치들을 담고 있는데, 기본의 중대성을 역설하고 본질을 꿰뚫고 있는 주의 깊고 세심한 관찰력, 그의 겸손한 말처럼 “예측하는 대신에 그냥 창밖을 본다.”는 탐구심, 바로 세상에 대한 열렬한 애정 때문일 것이다.
그의 학자로서 초창기에 해당하는 1940~50년대의 강의에서는 비교적 원론적이고 기원적인 관심을 볼 수 있는데, 19세기 인간 실존문제의 해결 되지 못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서 수량적으로 측정하고 예측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으로‘생명보험’이 탄생하였다거나, 신화에 대한 현실성과 기초적 경험으로서의 인식을 통해 ‘조직된 집단’이라는 국가에 대한 이해나 인간 개인의 출현, 그 존재성을 발견하는 것은 이후 그의 거대기업에서의 경영조직이론이나 국가의 역할에 대한 입장을 구성하는 사상적 뿌리, 신념을 알게 해준다.

또한 수천 년 전 물의 공급 조절이라는 복합적이고 공학적인 시설의 건설인 관개(灌漑)문명을 통해 인간의 기본적적인 사회적, 정치적 제도들과 기관들의 형성과정을 설명하면서“인간은 자신이 이룩한 기술적 성취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며, 기술적 성취에 지배를 받는다”는 기술 혁명의 교훈을 일러준다. 그리고 단지 이러한 기술 변화가 요구하는 새로운 필요와 능력을 갖춘 제도의 개발이라는 문제를 넘어, 이의 결과로서 야기되는 보다 큰 문제로서 우리가“믿고 있는 가치를 구현하도록 보장하고 우리가 옳다고 주장하는 목적을 달성하도록 보장하고,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과 목적에 봉사하도록 보장하는 과제들”에 더욱 관심을 쏟아야 함을 지적하는 곳에 이르면, 오늘의 기술전능의 사고가 결여하고 있으며, 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한 50년 전의 그의 성찰에 절로 겸허해지게 된다.

이러한 드러커의 경영철학이 말하는 것을 경청하다보면 기본에의 충실, 근원적인 자기 성찰이 굳건한 사상적 골조를 이루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지금과 같이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기술적 혁신이 발표되고 있을 때 그 새로움에 대처하는 능력을 미처 갖추지 못해 우리는 혼란에 휩쓸리고 좌충우돌하지만, 그럴수록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교훈은 너무도 가슴에 와 닿는다. 그가 한 예를 들고 있는데, 해부학자가 인간의 해골을 꼼꼼히 연구하는 행위의 중요성으로 1680년 이래 뼈가 변한 건 없다는 것이다. 뼈가 추가되지도 제거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기본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조직들을 한번 둘러보면 기본이 부실해서 저지르는 어리석음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 깨닫게 된다. 필요도 없는 수레바퀴를 발명하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기본적인 가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가정이 포함하고 있는 한계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교훈은 우리가 처한 경영의 현실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드러커의 이 미발표(단지 출간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임) 강의내용 중 어느 것도 인상 깊지 않은 것은 없지만, 비대해진 거대기업의 경영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에 대한 것이나, 정보사회에 이른 오늘의 정보에 기초한 조직에 대한 조언, 그리고 지식을 관리하는 법은 조직을 떠나서 생각 할 수 없는 오늘의 우리들 모두가 정독해야 할 만큼 끈질기게 우리가 속해 있는 조직을 괴롭히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불과 수 일 전에 나는 모 대학의 이사장이 자신의 조직에 대해 불평하는 소리를 묵묵히 들어주어야 했는데, 자기는 모든 것을 열심히 잘하고 있지만, 조직이 자기 기능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규모가 비대해지면 복잡성이 점증할 수밖에 없다. 작은 조직에서는 의사소통이랄 것도 없다. 한 밧줄을 끌고 있으니 목적도 힘의 방향도 다를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기능과 역할이 다르고 전문성 또한 다른 여러 조직으로 분할 된 거대 조직에서 마찰이 가득하고 문제가 유발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경영자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한 자들이 경영을 하고 있으니 이러한 문제가 해결될 리 없다. 고작 그가 하는 말은 조직을 뭔가 새롭게 구축하는 것이다. 더구나 조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말이다. 이것이 아마 자본만 있으면 경영자 행세를 하려는 한국사회의 특징일 것이다. 구성원 개개인의 이해에서 시작하여 사람을 바꾸고, 보상(처벌)체계를 개선하는 것이 유연하고 역동적인 조직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도 모르는 경영자가 태반이라는 얘기이다. 아마도 오늘의 대다수의 기업이나 조직들은 지식노동자로 구성되어있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모두 각자 다른 지식작업을 하지만 하나의 공통된 가치 결과를 얻어내야 한다는 것은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오케스트라의 조직’, 피아노, 바이올린, 호른, 등등 전문가들로 모여 있고, 계층은 극히 단순하지만 하나의 조화로운 연주를 만들어 낸다. 오늘의 조직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이 외에도 환경, 인구구조, 교육, 세계화, 비영리조직 등 이 시대를 이해하는데 중대한 구성 인자들에 대한 귀중한 지침들, 조언들, 경영학적 성찰들, 미래의 예견들을 충실하게 들려주고 있다. 피터 드러커의 시대의 검증을 통해 살아남은, 아니 세기를 관통하는 이 탁월한 통찰들은 정보의 선별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 결정적인 자원인 지식을 동원하는 능력이 생존을 가늠하는 오늘에 그 기본을 더욱 공고하게 해주고 있다 하겠다. 드러커를, ‘경영’을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 기본서라 하여도 결코 허영이라 아니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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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色, 광狂, 폭暴 - 제국을 몰락으로 이끈 황제들의 기행
천란 엮음, 정영선 옮김 / 시그마북스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인 秦나라 영호해부터 明나라 희종에 이르는 역대 왕조에서 기행으로 오명을 뒤집어 쓴 20인의 왕과 황제들의 면모를 시시콜콜 엮은 책이라 하겠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차지한 국가의 지존인 이들인 만큼 그네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집중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취향과 일상, 또는 성향과 기질에 국가의 존폐를 전적으로 대입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으로 보인다. 다만, 수록된 20명의 제왕들의 기괴한 면면과 관련하여 만들어 진 성어(成語)를 비롯하여 시(詩)와 사(詞), 회화는 물론 상업문물 등 문화적 현상들에 대한 다채로운 모습들을 볼 수 있는 즐거움은 무성하여 일종의 문화사로서 이해하기에는 그 정보의 양이 풍성하다 할 수 있다.

일례로 수(隨)나라의 멸망을‘양제’의 호색(好色)과‘겉치레 공정’과 같은 개인적인 사치성향과 성적 탐닉과 결부시키고 있지만 이는 역사를 극단적으로 편협하게 만들어버린다. 오히려 세 차례에 걸친 고구려 정벌 원정의 실패나 대운하 건설과 같은 국가재정 및 백성의 피폐를 야기한 결정적인 사건을 외면하는 결과를 낳는다. 물론 집중된 일인지하의 통치권력을 휘두르는 제왕의 역할이 지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관료와 제도, 국제질서 등 대내외 정치경제환경을 배제하고서는 역사의 책임을 한 사람에게 물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따라서 폭넓은 역사인식을 부여하고자 했다는 엮은이의 포부를 그대로 신뢰하기에는 부족하다.

성적 욕망과 폭력성 및 광기는 그 기원의 동일성을 말하는 서구문화처럼 동양에서도 그 기질이 함께 논의되는 것을 보면 불가분의 관계성을 지니고 있음을 굳이 회피할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인지 소개되고 있는 제왕들의 기벽을 보면 대개는 이 세 가지는 거의 일체화되어 따라다닌다. 5세기 남송(南宋)의 폐제 유자업의 경우, 누이, 고모와 근친상간를 벌이는 광적이기조차 한 방탕, 음란함은 물론이고 사람 죽이는 것이 일종의 유희(遊戱)였다고 하니 삼위일체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특히 남송이란 나라의 경우를 보면 제위에 오른 유씨들이 모두 병적이고 괴팍한 난폭성으로 모두 신하들이나 자식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그들의 유전적 기질의 연구에 대한 어떤 자료로서의 가치까지 느껴진다.

색(色)은 본성이고 인간의 열정을 불러일으켜 수많은 문화적 영감을 탄생시킨 것을 우린 부인 할 수 없다. 폭력과 공포라는 色의 한 특징에서 그 본질을 탐색하기도 하지만, 이처럼 아름다움, 관능성, 미적 예술성이란 측면에서 찾을 수도 있다. 6세기 진(陳)나라 후주 진숙보에게서 볼 수 있는데, 비록 정치적으로는 무능함을 떨쳐낼 수 없지만 그가 총애하였던 귀비(貴妃) 장려화에 대한 극찬, 그래서 「옥수후정화」라는 詩까지 전해져 오니, 그 나라 백성이야 안타깝지만 역사는 오늘의 우리에게 色의 그 절묘한 본성을 풍성하게 음미하도록 해주지도 않는가? 이러한 예술가 기질이 뛰어난 황제로는 12세기 송(宋)나라 휘종을 또한 들 수 있는데, 음악과 회화, 서화집의 편찬 등 예술가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나 당대에는 예술이란 경망스러움과 천박함의 대명사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던가, 그의 예술과 색의 지나침은 역시 국가의 쇠망으로 이어졌다하니 애석하다. 황제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행복했을 사람들이 권력의 한 복판에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한편 당(唐)나라 희종, 일명 환관들이 추대한 황제라는 의미에서‘문생천자’로 불린 이현을 통해 내관이 통치하는 나라에 불과했던 이웃에게 우리의 삼국이 지리멸렬했다는 것은 참으로 뜻밖의 역사로 다가온다. 황제의 정치참여를 배제하기 위해 어린 황제의 등극을 도모했던 당의 권력체제가 만들어 낸 것이 바로 그들의 황제였다는 것인데, 결국 이들은 색(色)에 둘러싸여, 쾌락과 유유자적만을 위해 존재했던 어떤 의미에서는 정치 제의(祭儀)의 희생양이었던 모양이다. 이후 五大十國(5대10국)의 분열이 시작되었다니 사실 황제의 색광폭(色狂暴)이 국가의 멸망이나 분열을 초래했다기보다는 관료들의 무능과 부패, 환관정치의 비뚤어진 권력의 탐욕이 야기한 것이라 하여야 할 것이다.

어째든 BC 1세기의 한(漢)나라 성제의 육욕에 대한 탐닉역시 국가 멸망의 원인으로 이야기되고 있지만, ‘온유향(溫柔鄕: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 또는 미인의 처소, 미인의 부드러운 살결을 이르는 말)’, 그가 사랑했던 합덕의 품에서 눈을 감을 수 있었으니 이승의 복은 모두 누리고 간사람 아닐까? 중국 제왕들의 내밀한 기록을 통해 엿보는 역사의 일면은 그자체로 재미있는 소재임은 분명하다. 더구나 하나쯤 은밀한 야설을 제법 멋스럽게 전달하기에 그만인 이야기들로 넘쳐나서 즐겁기도 할뿐더러, 틈틈이 인용되는 시와 사(詩詞)들의 풍미와 의외의 역사적 의미를 지닌 사건들을 만날 수 있어 기대치 못한 지적 수확을 거둘수도 있는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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