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협 나남문학번역선 12
하하키기 호세이 지음, 정혜자 옮김 / 나남출판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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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로부터 독립된 지 67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는 일제 부역자들의 후손이 대물림하여 기득권을 유지한 채 지배계급으로 횡행(橫行)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회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원인을 거칠게 정리하자면 내부적으로는 민족을 반역한 자들을 처단하지 못했기 때문이요, 외적으로는 가해자인 일본의 역사 은폐와 왜곡, 반성 없는 자세로 인한 역사 청산의 미완(未完) 때문이라 할 것이다. 결국 부정과 악덕, 폭력과 패악(悖惡)질이 시간의 망각작용과 증거와 증인들의 사멸(死滅)로 청산이 점점 어렵게 되고 있는 것이다.

 

왜놈들에 기생하여 동족을 짓밟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자들은 부와 권력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고, 이러한 부정의 계승은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의식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막론하고 나만 잘되면 된다는 이 기형적인 행태가 모든 사회문화적 관계를 구성하고 있다해도 무지한 말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1947년에 이어 1948년에 시도되었던 반민특위(反民族行爲處罰特委)가 바로 미군정을 통해 그대로 사회 지배권력을 승계한 일제부역자들과 이승만등의 탐욕스런 권력자들의 파렴치한 방해에 의해 동족을 배반한 반역자를 비롯한 과거사를 청산하지 못하게 된 것은 한국사회가 앞으로도 짊어지고 가야할 통한의 오욕이고 부정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1940년 독일 나치정권의 괴뢰정권이 된 프랑스 비시정권을 전쟁 종료 후 과단성 있게 처단한 프랑스사회와 명료한 대조를 이룬다. 동족 프랑스인을 배반한 비시정권의 수장인‘패탱’이하 각료들과 반민족 행위자를 철저하게 처벌한 프랑스는 오늘날 과거사의 문제를 우리처럼 되뇌지 않는다. 자신의 이익과 생존을 위해 동족을 짓밟았던 부역자들은 더 이상 같은 사회에서 호흡할 수 없다는 단호한 프랑스인들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평에 앞서 이렇게 거친 울화와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것은 일본인이 쓴 이 소설이 바로 일제 부역자와 일본이 의도적으로 망각하고 은폐하려는 역사인식에 대한 환기(喚起)인 이유에서 이다.

 

침략국이자 약탈국이었으며, 침탈과 폭력의 가해자였음에도 역사의 진실을 인정하지도, 반성하지도 않는 바로 그 나라의 작가가 피해자인 한국인의 시선에서 자신들의 은폐된 역사를 성찰하고 있다는 것은 그 인식의 한계야 어떻든 예상치 못한 신선함이고 용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예술로서 하나의 문학 작품이기에 역사비평이라는 광활한 대지를 거닐 수는 없지만, 혼돈의 역사 속에서 고통스럽게 떠돌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의 조명을 통해 비도덕적 세상에서 도덕적 질서를 찾으려는 영혼의 분투를 발견케 함으로써 도덕적 상상력을 확대시키고 일깨우기에 부족함이 없다.

 

병약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일제의 탄광부로 강제 징용된 열일곱 청년의‘참혹한 생존기(生存記錄)’라고 하여야 할 것 같다. 강점된 피지배민인 조선인들에 가해지는 형언할 수 없는 유린과 폭행, 살해가 끊임없이 사악하게 자행된다. 하루 열여덟시간의 지하 갱에서의 목숨을 건 사투, 이 중노동과 부실하고 조악한 식사, 그리고 부족하고 불편한 잠, 다시 이어지는 채찍질과 무참히 가해지는 폭력에 조선인들의 생명은 하나씩 꺼져 들어간다. 일본인 감독관의 심복이 되어 동족을 감시하고 더 악질적으로 괴롭히는 조선인 부역자들의 잔혹성, 그래서 살기 위한 무모한 탈주가 이어지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붙잡힌 이들은 비밀스럽게 주검이 되어 사라진다.

 

일본인 감독관의 변절의 회유를 거부한 청년‘하시근’은 막장 채탄부로서 더욱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고 탈주를 시도한다. 탈주의 길목을 지키고 있던 일본인 보조감독관을 부득이하게 살해하고 청년은 조선인 노파의 도움을 받아 죽음의 현장인 탄광 도주에 성공한다. 그리곤 동포들의 도움을 받아 부두 건설현장의 노동자가 되고 해방이 되어 해협 너머 고향에 돌아 갈 날을 꿈꾼다. 조선인 동료들의 비난어린 시선에도 불구하고 전쟁미망인(未亡人)인 일본 여성‘치즈’와 사랑에 빠지고, 두 사람은 일본 패망과 함께 고국 조선의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이내 두 사람의 행로는 엇갈리고 반세기의 망각과 이별이 된다.

 

소설은 이렇게 가해자들의 잔악성을 수반한 비도덕적 행위와 비참하게 방황하는 영혼들,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역사의 배경 지식으로 독자들에게 이해를 요청한다. 그리곤 반세기가 지나 탄광 앞에 높게 쌓아올려진 폐석더미를 치워 역사의 진실을 없애버리려는 일본인들의 추악한 은폐 행위를 저지하기 위해 해협을 다시 건너는 하시근을 통해 한국과 일본이 무엇을 잊고 있는지, 또한 역사란 무엇인지를 생각게 한다. 왜놈들에 의해 강제 노역으로 시달리는 동족을 배반하고 오히려 왜놈의 악행을 대행하던 부역자들은 동족의 피로 축적한 부를 통해 버젓이 사회 지배층이 되어 거들먹거리고, 자신들의 과거 악행의 증거를 영원히 가리려 한다. 강제 징용되어 이국의 탄광에서 죽어간 조선인들의 유골이 묻혀있는 방치된 탄광폐석더미를 치워버리려 한들 존재했던 역사의 진실이 없어질 수 있을까?

 

어떠한 반성은커녕 악행의 흔적 제거에 급급한 뻔뻔한 일제의 부역자들과 일본인들, 반복되는 얘기지만 민족을 배반한 파렴치한들과 그들의 행위를 처단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무능한 현실이 빚어내고 있는 모습이다. 한편 작가는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탈주 중 불가피하게 살해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일본인 감독관에 대한 하시근의 죄의식을 부각한다. 그리곤 그 역시 광기에 사로잡힌 일본이란 국가의 한 낱 소시민이었음에 연민을 보내고, 약자에 대해 가했던 그네들의 폭력적인 연대를 미화하기도 한다. 아마 이것은 일본인 작가의 심리적 한계였을 것이다. 여기서 도덕적 정의에 대해 우린 갈등하게 된다. 내게 죽음을 요구하는 괴물을 죽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행동은 비도덕적이라 지탄받아야 하는 것인가?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라보는 탄광의 폐석더미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미관을 저해하고 지워버려야 할 흔적인가 하면 피와 죽음의 증거, 역사의 진실을 품고 있는 귀중한 터전일 것이다. 그러나 그 진실을 묻어버리려고 한들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산 자들의 유지가 계속되는 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역사를 무시하는 것은 존재했던 20세기의 한 토막을 빈 공간이 되게 하는 것이다. 역사의 공동화(空洞化)이다. 반성과 정리를 회피하기 위해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을 비워버린 민족은 미래의 전망을 왜곡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 왜곡은 갈등과 분노를 낳고 반목과 분열, 적대를 강화하게 한다. 한국과 일본은 이처럼 하나의 진실에 다른 관점을 투영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사회는 또 하나의 내적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청산하지 못한 민족을 배반한 일제 부역자들의 처단 말이다. 이것을 해내지 못하고 부정이 정의가 되고 권력이 되어버린 한국사회의 미래는 끝없이 불온하고 부패할 것이다. 일본인이 써낸 오욕의 역사, 은폐된 역사의 드러내기가 다시금 우리가 잊고 지냈던 진실의 의미를 깨우치게 한다. 화해와 화합을 위해, 미래의 밝은 전망을 위해 제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과거사의 청산은 필히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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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핵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
조셉 콘라드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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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 자연의 깊숙한 곳, 밀림 속 미지의 어둠, 문명이란 인간의 백치 같은 탐욕이 미치지 않은 곳, 그곳에 퍼부어지는 포탄 세례는 정말이지 광기이고 애처로운 익살이며, 터무니없는 공포일 것이다. 이것은 알 수 없는 무엇에 대한 탐색의 열망을 실천하는 인간들에게 칭송의 시선을 보내는 인간의 오랜 심리적 동인의 본질과 연결되는 무엇일 것이다. 암흑의 진실에 근접하려는 인간의 욕망, 그것에서는 왠지모를 죽음의 색깔과 또 인간 필멸(必滅)의 냄새가 감돌지 아니하는가?

 

광활한 아프리카 대륙의 오지(奧地), 그 암흑의 심연에 대한 탐험의 매혹적 갈망에는 이미 오만이 가득하다. 문명이라는 서구 백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텅 빈 공간, 임자 없는 공간, 누군가에 의해 이해되어야 하는 공간이라는 생각 말이다. ‘말로’라는 인물이 곧 이러한 욕망으로 가득한 인간이다. 콩고 원시 밀림의 자원 수탈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의 오지 운반선 선장으로 부임한다. 그곳에는 다른 어떤 곳을 합친 것보다 많은 상아를 모아 보내는‘커츠’라는 경외의 인물이 있다. “식물과 물과 정적(靜寂)으로 구성된 기이한 숲의 세계”, 그 압도적인 암흑의 실체에 완전히 동화되어 어둠 같은 존재가 되어 그 세계를 지배하고 군림하는 신화 속 인물이 된 인간.

 

소설은 낡은 운반선에 의탁해 말로라는 인물이 커츠라는 그들 세계의 영웅을 찾아가는 여정과 그와의 짧은 만남, 그의 죽음을 통해 이해하게 되는 삶의 기만과 암흑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의 정신세계를 들려준다. 문명의 공간에서 벗어나 암흑의 공간 깊숙이 들어가 궁극적인 인간의 열망, 자기의 본원을 찾으려는 응전의 세계가 비의(秘儀)의 주술처럼 흐른다. 그러나 그 실체, 사실이란 “금고를 터는 도둑놈에서처럼 도덕적 목표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시체 썩는 냄새 확 풍기는 그런 욕망일 뿐이다.

 

커츠를 향해가는 여정에서 백인들이 원주민들과 그들의 땅에 가하는 무지한 폭력의 장면들에 대해 말하는 말로의 시선은 마치 서구의 제국주의적 파렴치와 무례를 혐오하고 비난하는 듯하지만 그것은 단지 행위의 잔혹성과 무지에 대한 얕은 연민 이상으로 해독하기에는 저항을 일으킨다. 즉 아무런 방어의 의지도 없는 검은 인간들에 대한 약탈자의 야만성에 대한 본질적 반성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원주민들을 적이니 죄인이니, 일꾼이니 하는 우습기조차한 규정에 대해 반감을 표시한다거나, 커츠의 움막주위에 걸린 원주민들의 잘린 머리들에 명명된‘반항자’라는 터무니없는 표현의 고발에서 구태여 서구의 제국주의적 쾌락에 대한 본원적 회의와 자성(自省)을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말로라는 인물을 통해 탐색되는 서구 백인의 자신들 외에 대한 시각의 통찰은 비범한 곳이 있다. 즉 타자에 대한 사물화를 인식하는 점이다. 그 예는 자신을 도와 키잡이를 하던 검은 인간이 창에 맞아 죽은 후에 하는 자기중심적 연민의 발설에서 발견 할 수 있다.

키잡이 검둥이가 죽자 “일종의 유대관계가” 비로소 생겨나났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의 죽음으로써 “관계가 갑자기 깨지자 비로소 나는 그런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던 거야.”라는 말처럼 검은 인간이 도구적 수단, 이용물에 불과했으나 다소의 감정적 공감의 대상이었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아마 물화(物化)에 대한 문학상 최초의 인식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감정 유대, 공감이 상실되고 단지 이익의 거래 대상으로 변질된 타자에 대한 오늘의 인식은 이처럼 영토주의적 탐욕이 은폐된 것이 아닐까하는 이해 말이다.

 

이러한 타자, 자기외의 대상에 대한 무관심이 빚어내는 냉혹성, 자기애의 열중이 얼마나 끔찍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곧 커츠란 인물에 대한 탐구일 것이다. 우월한 문명적 도구로 원주민을 제압하고 어두운 밀림의 제왕으로 군림했던 인물의 죽음에 이르러 나타난 표정은 바로 암흑의 핵심, 그처럼 도달하려 했던 삶의 열망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항거의 어조, 진실의 끔찍한 표정”, “열망과 증오가 기이하게 뒤섞여”, “고통으로 가득하고 만물의 덧없음이나 심지어는 고통 자체의 덧없음에 대한 무관심한 경멸로 가득한 형상 없는 회색 비전”이 그것이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며 나지막이 외치는 “무서워라!”라는 한마디는 완벽하게 압축된 지혜와 진실인 것이다. 커츠의 이 말이야말로 암흑의 문턱에서 서성대던 말로라는 인물에게 삶의 구원을 허용한 진실의 언어였을 것이다. 오지와 텅 빈 공간에 대한 오만, 타자에 대한 물화, 이들 탐욕의 열망을 정의하는 한마디, 암흑의 핵심, 어둠의 심연에 대한 진실의 소리.

 

- 蛇足

사실 이 소설을 많은 비평가들은 정치적 주제로 해석하고, 서구 제국주의의 비판적 문장으로 독해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배경을 하나의 거대한 은유, 즉 인간의 삶에 대한 본원적 욕망의 탐색에 집중하면 그렇게 초라한 주제적 논의를 탈피 할 수 있을 것 같다.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백경)』의 선장 ‘에이허브’는 ‘커츠’와, 수부‘이시마엘’을 ‘말로’로 대입하면 죽음과 구원의 이미지는 더욱 선명해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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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반양장)
쑤퉁 지음, 김은신 옮김 / 아고라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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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시로, 도시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돈과 욕정과 행복을 보장하리라는 존재하지 않는 천국으로, 아니 죄악의 공간으로. 그곳에서 마주하는 것들은 서로에게 생채기를 남기고 증오와 분노가 되어 복수의 고통으로 번민하게 한다. 헐벗고 굶주린 자에게는 발길질이 먼저 가해지는 곳, 가진 것 없는 영혼에게는 멸시와 모욕을 뱉어내는 곳,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육체는 개 취급도 받기 어려운 곳이란 이해를 갖게 된다면, 그 사람의 어두운 내면에는 광포한 분노가 은둔하게 되지 않겠는가?

 

시커먼 탄가루가 수북한 화물칸에서 뛰어내리다 휘청거리는 시골 청년이 있다. 홍수가 휩쓸고 간 고향을 등지고 살기위해 도시에 발을 내딛은 사람의 몰골은 이미 남루함으로 거지꼴이다. 그가 처음 대면하는 것은 도로가에 웅크린 채 싸늘하게 식어버린 하나의 육체이고, 굶주림에 본능적으로 향한 곳은 부두가 폭력배들의 술판이다. 고기 한 점은 지독한 모멸의 감수와 집단적인 구타의 댓가라는 잔혹한 도시의 얼굴을 알려준다.

 

청년에게 쌀(米)은 곧 생존의 안위이고, 고향의 향기이며, 영혼의 어루만짐이다. 굶지 않을 수 있는 생명, 존재의 원천. 부두에서 쌀을 나르는 수레들이 향하는 곳을 정처없이 따라간 곳에는 미곡상회가 있고 얼이 빠진 청년은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그랬다. 그곳이 그의 영혼이 정착할 수 있는 곳일 밖에. 먹여만 준다면 땅바닥에서 자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 공짜로 얻는 노동력을 마다할 이유가 없는 쌀집 주인은 청년을 거두고, 엄청난 선심을 베푼 것이라 가진 자의 자기기만을 망각한다.

허나 “연민과 온정은 비 온 후 길바닥에 고인 물처럼 얕고 피상적이며, 바람이 불고 햇볕이 비치면 금방 사라지는 것”임을 청년‘우룽’은 모르지 않는다.

 

문득 소설의 배경이 되는‘청베이(城北)’ 와장가(街)의 지명이 작가의 다른 작품, <성북(城北)지대>를 떠올리게 한다. 절망과 무기력에 절고 상처받은 사람들, 그리고 성숙하지 못한 갈등과 혼란의 사회가 귀 기울여주고 보듬어주지 못했던 그 시대상의 처연함이 중첩된다. 자신의 몸뚱아리를 과신하는 쌀집의 첫째 딸 쯔윈, 약자에게 거침없는 모욕과 냉소를 보내는 둘째 딸 치윈은 우룽에게 무한의 복수심을 쌓는, 도시의 본성인 증오와 폭력의 정당한 명분을 확신시킬 뿐이다. 화냥질의 댓가로 씨를 알 수 없는 처녀 임신을 한 첫째 딸의 허물을 위장하기 위해 우룽은 쌀집 사위가 되지만, 장인은 사위의 살해를 청부하기까지 한다. 자신들의 허세와 기만을 위한 이용물 이상이 아닌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 이야기는 우룽의 몸 곳곳에 새겨지는 정말의 흉측한 상처들의 여정으로 들어간다. 청부업자가 남긴 발가락 절단, 쯔윈이 물어뜯어 놓은 발, 장인이 쑤셔놓은 실명한 한 쪽 눈, 마침내 죄의 씨앗인 쯔윈의 자식이 망가뜨린 나머지 눈, 그리곤 매독으로 썩어가는 몸통이다. 도시의 사람들이 그에게 상처를 남길 때마다 고집스럽게 집착했던 쌀집이 그의 것이 되지만 그가 느끼는 것은 여전한 방황과 혼돈일 뿐이다. "쌀집의 방들도 흔들렸다. 이곳 역시 기차간 하나에 불과했다. 기차가 광야에서 천천히 움직일 때 우룽 자신도 여전히 떠돌고 있었다. ~ 기차가 날 어디로 데리고 갈지 나도 잘 모르겠어..."

 

그를 버티게 한 분노와 증오, 복수심의 귀착은 무엇이었을까? 잔인함과 포악함으로 부두 폭력조직의 우두머리가 되기까지 하지만, 그의 두 번째 아내가 된 치윈의 시선처럼 “우룽의 영혼이 그 목합 안에서 광폭하게 요동치는 동시에 나지막이 통곡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누가 순수한 시골 청년에게 야수의 포악함을 주입했는가?

‘수퉁’은 그의 다른 작품에서 이러한 문장을 썼다. “만일 꽃을 키우는 사람이 그 화초들 옆에서 귀를 기울여 들었다면 가지와 잎이 자라는 소리와 꽃봉오리가 마음껏 웃는 소리까지 다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우리가 바로 외면하고 소외시키며, 씻기지 않는 오욕으로 분노를 주입시키는 장본인들 아닌가? 조금만이라도 그들의 작고 힘없는 목소리를 경청한다면 증오와 적대가 아니라 화목과 행복이 가능하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은 도시로, 도시로 몰려든다. 돈과 욕정이 거칠게 춤추는 죄악의 도시로. 도시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오늘 우리들의 연민과 온정이란 것이 고작 어떠한 것인지를 되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쌀이 수북이 쌓인 화물차에 실려 고향을 향한 마지막 길의 우룽이란 사람의 고독과 외로움, 그만이 간직했던 삶의 비밀들이 아득하게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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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매처럼 신들리는 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4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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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작가 ‘도조겐야’가 들려주는 토속적이고 향토색 짙은 괴담의 출발작품인 모양이다. 먼저 소개된 후속 작품들에 익숙해진 독자로서는 동일한 패턴의 양식이 주는 진부함으로 참신함에 대한 기대가 꺾이지만 고유한 민간전승의 독특함이 이내 이야기 속에 젖어들게 한다. 형식을 완전히 초월하는 스토리의 유일성, 즉 단독성이 발산하는 매력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들, 반면에 지키려하는 것의 표리관계에 숨겨진 욕망이 마귀가 되고 신령이 되어 이것들의 본질을 은폐한다. 이것은 고유의 신앙이 되어 사람들에게 경외의 대상이 되고, 그 대상을 주제하는 자는 권력자가 된다. 결국 인간 세상의 신비나 알 수 없음이란 것의 이면을 파헤치면 터무니없는 실제가 존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는 것일 게다. 다만, 작가는 이러한 명료성이 내키지 않은 듯 미완의 모호함을 남겨두지만 이미 사악할 만큼의 탐욕의 모습인 진실의 일면을 드러냈기에 소임은 다했다는 소설적 자신감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싶다.

 

가미구시가(家)라는 일인지하의 마을에 가가치가(家)라는 가문이 들어와 그 지위를 넘어서 마을이 양대 가계로 나뉘고 하나는 신(神)집이 되고, 다른 하나는 마귀(魔鬼)가계가 된 향토사(鄕土史)의 배경을 추적한다. 일종의 민속 유래의 복원과정을 거치는 작업을 하는 것인데, 이 자체만으로도 소설은 발군의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가가치가 되고 가미구시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지, 이들이 섬기는 허수아비 신령과 신령납치, 마귀인 염매 얘기가 회자되는지, 가가치가가 마귀가계로 불리게 된 연유는 무엇인지를 고증하여 미신의 요소를 이루는 것들의 본원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답(高踏)적일 수 있는 민간 신앙의 복원 작업이 모호하고 기이하며 불가해한 사건들과 마주하면서 그 실체의 적나라함이 현대의 합리주의적 해석과 충돌한다. 가가치가의 주인이자 무녀인 사기리와 혼령받이인 손녀 사기리로 이어지는 가계의 무수한 곡절들, 가미구시와 가가치의 반목과 뒤얽힌 혼인과 애정의 은밀한 산물들이 음습하고 기괴한 산과 강의 자연적 요소들과 어울려 마성(魔性)적 공간으로 깊숙이 끌어들이고, 기이한 형상의 주검으로 발견되는 첫 피살체가 발견되면서 미스터리한 불가사의 탐험을 본격화한다.

 

대대로 여아 쌍둥이가 출생하고, 하나는 무녀 혹은 허수아비 신령이 되고 또 하나는 혼령받이가 되어 가계의 신성을 잇는 가가치가의 신앙적 권위의 존속은 이미 신비이다. 그러나 소설은 가미구시가의 청년 렌자부로의 일기나 도조겐야의 취재일기, 가가치가의 손녀 사기리의 일기 등을 통해 이 신비에 은폐되어있는 사실성을 두려움과 모호한 기억에 실어 끝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그 불가해성에 담긴 진실을 쫓게 한다. 이 과정에 가가치가의 사람들이 연이어 살해되고 어떤 상징적 의미를 지닌 젖가락, 우산 등의 도구들이 입에 물려있는 기이하게 왜곡된 형상들을 마주하게 된다.

 

이들 죽음에는 미스터리의 흔한 도구인 밀실트릭이 한결같이 작동하고 있는데, 그래서 용의자의 규명은 더욱 미궁에 빠져버리게 된다. 용의자의 범위는 한없이 넓어지고 또한 한없이 단순화 된다. 아마 이것도 작가가 의도한 하나의 묘미일 것이다. 민간신앙의 고증, 미신과 현대의 과학적 합리주의의 갈등, 미스터리의 소설적 함정 등이 어울려 맛깔스런 독창적 작품을 조성해 내는 것이다. 가계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욕망은 살인이라는 범죄적 행위를 신의 징벌로 정당화하기에 이른다. 무릇 신앙은 인간의 탐욕을 위장하여 자신들의 부정을 신의 정의로운 명령에의 복종이라곤 한다. 물론 이 작품이 이렇듯 명쾌하게 신앙이 된 미신의 왜곡된 자기 정당화의 몫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 세계의 많은 모호함은 이러한 은밀함의 위장임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의 이성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 대한 경외는 여전히 존재하리라는 민속작가의 정체성을 놓지 않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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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의 발레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김의석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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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메타포의 언어로 인생의 의미를 투시했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의 그 기분 좋은 시적 문장들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작품이다. 치열한 자기 응시, 척박한 삶속에서도 피어나는 새로움에의 열망이 발산하는 찬연한 감동이 소설의 거대한 줄기가 되어 흐른다. 사회에서 배제되고 소외되어, 비록 가난하고 침울한 환경이 삶의 전망에 그림자를 드리워도 삶의 긴장과 희망을 위해 도전하는 자유로운 정신들은 아름다움이 되어 마음 저 깊은 곳에 어느새 들어와 앉고, 까닭모를 흐뭇한 위로와 안락의 기운에 감싸이게 된다.

 

절도죄로 수감 중이던 스무살 청년‘앙헬 산티아고’의 사면석방 풍경이 부패한 간수와의 미묘한 위협의 대화에 담겨 권력자와 피지배자의 삶의 시선이 되어 적대적으로 교차한다. 권력자인 간수는 자신이 가했던 파렴치 행위의 보복이 두려워 살인죄로 복역 중인 무기수를 빼돌려 앙헬의 목숨을 끊을 것을 청부한다. 참혹했던 오랜 군부독재가 종식되고 민주정부가 들어섰으나 사회 곳곳에 뿌리내렸던 부정과 타락과 부패는 단절되지 않고 여전히 그 악의 기운을 발하고, 편협과 독단, 획일과 고답으로 다양과 창의, 자유를 방해하며 기득권 유지의 불안으로 그 음흉함을 지속한다.

소설의 무대는 이처럼 근절되지 않은 부정의 구태에 새로움이 여전히 압도되고 있는 21세기의 칠레이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들은 사랑하고 꿈을 꾸며 자유로운 희망의 날개들을 퍼덕거리기 마련이다. 좌절된 꿈으로 절망하는 소녀, ‘빅토리아 폰세’와 앙헬의 만남은 서로에게 희망, 미래의 존재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의지가 된다. 민주화가 되었지만 독재 군부에 의해 피살된 사람의 딸에게 보내지는 사회의 시선은 달라지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퇴학당하고 발레학원에는 수강료를 지불하지 못해 발붙일 곳이 없어진 소녀와, 세상의 사악함을 온 몸으로 체득한 청년은 그래서 서로의 꿈이 된다.

 

국립극장 무대에서 발레 공연을 하는 자신을 상상할 수 없는 빅토리아를 위해 무일푼의 앙헬은 은퇴한 최고의 금고털이‘베르가라 그레이’를 찾아 부정으로 축재한 권력자의 은닉된 재산을 털자고 제안한다. 추앙받는 최고의 범죄자가 아니라 고요한 범부로서의 삶을 희망하는 베르가라를 마침내 설득하여 인생의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기 위해 의기투합한 이 주변인들의 행동이 위태롭지 않고, 불온해 보이지 않는 것은 왜일까? 추악한 권력의 희생자들인 이들이 취할 수 있는 불가피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도덕적 정당성에 관용을 부여할 수 있어서일까? 아니면 꿈꾸는 자들의 순수함, 새로운 세대에 대한 희망을 막아서지 않고 싶다는 기대에서일까? ...

 

한편, 알량하고 추한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고 위선과 기만, 불변이라는 수구성을 강요하는 구태와 자기성찰의 기회를 통해 이를 반성하고 약자와 소외자를 위해 작은 몸짓이라도 하려는 변화의 소소한 충돌이 희극적 언어와 행동으로 소설의 저변을 수놓는다. 퇴학의 철회를 위해 마지막으로 부여된 구술시험에서 획일성의 구태를 고집하는 국어선생과 빅토리아의 시(詩)에 대한 해석은 변화와 혁신의 장애가 무엇인지를 꼬집는다. 또한 독재정권의 하수인이었던 순경이 빅토리아의 국립극장 공연을 위해 앙헬을 도와 지배계급들을 기만하는 장면은 사회의 진정한 변화가 누구로부터, 또한 무엇으로부터 변모해야 하는지를 고발한다. 운집한 부자들과 권력자들을 몰아내고 발레 독무를 하는 빅토리아의 찬란한 아름다움이 영상처럼 시야에 그려지는 느낌은 그 어떤 화려함보다 멋지게 가슴에 들어차고, 왜 이러한 기성권위에 대한 도발이 감동인 것인지를 되뇌게 된다.

 

네루다와 그의 우편배달부 ‘마리오’, 마리오의 연인이고 아내가 된 ‘베아트리스’의 관계와 인생의 진정한 행복감, 유쾌함, 진지함의 투명한 본질들이 베르가라와 앙헬, 그리고 빅토리아로 변신하여 그대로 삶의 아름다움,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삶의 독자성이 더욱 견고하게 전달된다. 앙헬과의 벅찬 미래를 꿈꾸며 먼발치에서 연인을 기다리는 빅토리아의 간절한 시선이 못내 안타까움과 연민이 되어 더욱 작품의 여운이 오랜 파문을 남기지만, 거대한 하나의 메타포가 된 소설이 삶의 진지한 열정이 되어 비어버린 의지를 가득 채워준다. 영원처럼 다가오는 언어들과 문장, 이야기가 알 지 못하는 기쁨으로 충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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