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협 나남문학번역선 12
하하키기 호세이 지음, 정혜자 옮김 / 나남출판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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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로부터 독립된 지 67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는 일제 부역자들의 후손이 대물림하여 기득권을 유지한 채 지배계급으로 횡행(橫行)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회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원인을 거칠게 정리하자면 내부적으로는 민족을 반역한 자들을 처단하지 못했기 때문이요, 외적으로는 가해자인 일본의 역사 은폐와 왜곡, 반성 없는 자세로 인한 역사 청산의 미완(未完) 때문이라 할 것이다. 결국 부정과 악덕, 폭력과 패악(悖惡)질이 시간의 망각작용과 증거와 증인들의 사멸(死滅)로 청산이 점점 어렵게 되고 있는 것이다.

 

왜놈들에 기생하여 동족을 짓밟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자들은 부와 권력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고, 이러한 부정의 계승은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의식을 지배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막론하고 나만 잘되면 된다는 이 기형적인 행태가 모든 사회문화적 관계를 구성하고 있다해도 무지한 말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1947년에 이어 1948년에 시도되었던 반민특위(反民族行爲處罰特委)가 바로 미군정을 통해 그대로 사회 지배권력을 승계한 일제부역자들과 이승만등의 탐욕스런 권력자들의 파렴치한 방해에 의해 동족을 배반한 반역자를 비롯한 과거사를 청산하지 못하게 된 것은 한국사회가 앞으로도 짊어지고 가야할 통한의 오욕이고 부정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1940년 독일 나치정권의 괴뢰정권이 된 프랑스 비시정권을 전쟁 종료 후 과단성 있게 처단한 프랑스사회와 명료한 대조를 이룬다. 동족 프랑스인을 배반한 비시정권의 수장인‘패탱’이하 각료들과 반민족 행위자를 철저하게 처벌한 프랑스는 오늘날 과거사의 문제를 우리처럼 되뇌지 않는다. 자신의 이익과 생존을 위해 동족을 짓밟았던 부역자들은 더 이상 같은 사회에서 호흡할 수 없다는 단호한 프랑스인들의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평에 앞서 이렇게 거친 울화와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것은 일본인이 쓴 이 소설이 바로 일제 부역자와 일본이 의도적으로 망각하고 은폐하려는 역사인식에 대한 환기(喚起)인 이유에서 이다.

 

침략국이자 약탈국이었으며, 침탈과 폭력의 가해자였음에도 역사의 진실을 인정하지도, 반성하지도 않는 바로 그 나라의 작가가 피해자인 한국인의 시선에서 자신들의 은폐된 역사를 성찰하고 있다는 것은 그 인식의 한계야 어떻든 예상치 못한 신선함이고 용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예술로서 하나의 문학 작품이기에 역사비평이라는 광활한 대지를 거닐 수는 없지만, 혼돈의 역사 속에서 고통스럽게 떠돌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의 조명을 통해 비도덕적 세상에서 도덕적 질서를 찾으려는 영혼의 분투를 발견케 함으로써 도덕적 상상력을 확대시키고 일깨우기에 부족함이 없다.

 

병약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일제의 탄광부로 강제 징용된 열일곱 청년의‘참혹한 생존기(生存記錄)’라고 하여야 할 것 같다. 강점된 피지배민인 조선인들에 가해지는 형언할 수 없는 유린과 폭행, 살해가 끊임없이 사악하게 자행된다. 하루 열여덟시간의 지하 갱에서의 목숨을 건 사투, 이 중노동과 부실하고 조악한 식사, 그리고 부족하고 불편한 잠, 다시 이어지는 채찍질과 무참히 가해지는 폭력에 조선인들의 생명은 하나씩 꺼져 들어간다. 일본인 감독관의 심복이 되어 동족을 감시하고 더 악질적으로 괴롭히는 조선인 부역자들의 잔혹성, 그래서 살기 위한 무모한 탈주가 이어지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붙잡힌 이들은 비밀스럽게 주검이 되어 사라진다.

 

일본인 감독관의 변절의 회유를 거부한 청년‘하시근’은 막장 채탄부로서 더욱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고 탈주를 시도한다. 탈주의 길목을 지키고 있던 일본인 보조감독관을 부득이하게 살해하고 청년은 조선인 노파의 도움을 받아 죽음의 현장인 탄광 도주에 성공한다. 그리곤 동포들의 도움을 받아 부두 건설현장의 노동자가 되고 해방이 되어 해협 너머 고향에 돌아 갈 날을 꿈꾼다. 조선인 동료들의 비난어린 시선에도 불구하고 전쟁미망인(未亡人)인 일본 여성‘치즈’와 사랑에 빠지고, 두 사람은 일본 패망과 함께 고국 조선의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이내 두 사람의 행로는 엇갈리고 반세기의 망각과 이별이 된다.

 

소설은 이렇게 가해자들의 잔악성을 수반한 비도덕적 행위와 비참하게 방황하는 영혼들,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역사의 배경 지식으로 독자들에게 이해를 요청한다. 그리곤 반세기가 지나 탄광 앞에 높게 쌓아올려진 폐석더미를 치워 역사의 진실을 없애버리려는 일본인들의 추악한 은폐 행위를 저지하기 위해 해협을 다시 건너는 하시근을 통해 한국과 일본이 무엇을 잊고 있는지, 또한 역사란 무엇인지를 생각게 한다. 왜놈들에 의해 강제 노역으로 시달리는 동족을 배반하고 오히려 왜놈의 악행을 대행하던 부역자들은 동족의 피로 축적한 부를 통해 버젓이 사회 지배층이 되어 거들먹거리고, 자신들의 과거 악행의 증거를 영원히 가리려 한다. 강제 징용되어 이국의 탄광에서 죽어간 조선인들의 유골이 묻혀있는 방치된 탄광폐석더미를 치워버리려 한들 존재했던 역사의 진실이 없어질 수 있을까?

 

어떠한 반성은커녕 악행의 흔적 제거에 급급한 뻔뻔한 일제의 부역자들과 일본인들, 반복되는 얘기지만 민족을 배반한 파렴치한들과 그들의 행위를 처단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무능한 현실이 빚어내고 있는 모습이다. 한편 작가는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탈주 중 불가피하게 살해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일본인 감독관에 대한 하시근의 죄의식을 부각한다. 그리곤 그 역시 광기에 사로잡힌 일본이란 국가의 한 낱 소시민이었음에 연민을 보내고, 약자에 대해 가했던 그네들의 폭력적인 연대를 미화하기도 한다. 아마 이것은 일본인 작가의 심리적 한계였을 것이다. 여기서 도덕적 정의에 대해 우린 갈등하게 된다. 내게 죽음을 요구하는 괴물을 죽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행동은 비도덕적이라 지탄받아야 하는 것인가?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라보는 탄광의 폐석더미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갖는다. 미관을 저해하고 지워버려야 할 흔적인가 하면 피와 죽음의 증거, 역사의 진실을 품고 있는 귀중한 터전일 것이다. 그러나 그 진실을 묻어버리려고 한들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산 자들의 유지가 계속되는 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역사를 무시하는 것은 존재했던 20세기의 한 토막을 빈 공간이 되게 하는 것이다. 역사의 공동화(空洞化)이다. 반성과 정리를 회피하기 위해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을 비워버린 민족은 미래의 전망을 왜곡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 왜곡은 갈등과 분노를 낳고 반목과 분열, 적대를 강화하게 한다. 한국과 일본은 이처럼 하나의 진실에 다른 관점을 투영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사회는 또 하나의 내적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청산하지 못한 민족을 배반한 일제 부역자들의 처단 말이다. 이것을 해내지 못하고 부정이 정의가 되고 권력이 되어버린 한국사회의 미래는 끝없이 불온하고 부패할 것이다. 일본인이 써낸 오욕의 역사, 은폐된 역사의 드러내기가 다시금 우리가 잊고 지냈던 진실의 의미를 깨우치게 한다. 화해와 화합을 위해, 미래의 밝은 전망을 위해 제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과거사의 청산은 필히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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