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 문학의 기본개념 8 문학의 기본 개념 8
이강엽 지음 / 연세대학교출판부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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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신화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니 만들어질 수 없도록 지배질서가 용납하지 않는다. 집요한 보수적 확장, 새로움은 배척되고, 질서에 대한 개혁은 단지 도발적 파괴로만 인지되어 거부되고 말살된다. 그리곤 대중 연예의 싸구려 감상으로 몰아넣고 진짜의 인간 감정이 들어설 자리는 박탈되고 있다. 신화학자,‘켐벨’이 말했듯이 깨어있는 의식과 매혹적 신비와의 호해나 도덕적 질서의 강화, 개인이 중심을 잡고 현재와 미래의 삶을 위해 나아갈 수 있는 신화의 기능이 들어설 곳이 없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젠‘개천에서 용났다’와 같은 신화는 들리지 않는다. 신화가 만들어지지 않는 사회, 생성될 토양 자체를 차단하고 거부하는 사회는 커다란 불행과 재앙을 불러낼 것이다. 어쩌면 우주의 질서는 이 순간에도 경고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대체 비현실적이고 비합리적 이야기이자 환상 같은‘신화’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푸념하는 것일까? “신화는 모름지기 가장 비현실적인 표면을 통해 가장 현실적인 이면을 드러내며, 갖가지 환상으로 어우러진 감각적 외피 속에 본질적인 사유를 감춰두고 있는 법”이라고 ‘프라이’는 말했다. 또한 “그 내용의 본질에 있어서 인간의 근원적인 물음에 답하는 참된 얘기이며 이야기의 구연 내지는 전승 방식에 있어서 특정 의례를 동반한 제의적 이야기이고, 효용적인 측면에서 신의 믿음은 물론 신의 힘에 의해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실용적인 이야기”라고 하였다.

신화는 창조와 파괴, 그리고 파괴를 통한 창조의 순환이며, “생성-탄생-죽음의 보편 법칙”이 지배하는 우주질서에 대한 겸허한 경외이다. 더구나 인간이 도달하고자 하는 불가능에의 도전과 그 여정에서의 고난과 실패를 통해 유한자로서 인간이 갖는 한계를 되돌아보고 마침내 세상의 중심에 서며, 그것을 타인과 이웃, 세상에 확산시키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사회는 신화가 발붙일 곳이 없다. 봉쇄되고 차단되며 왜곡되고 처단되는 차별화와 구별짓기가 터 잡고 순리에 역행하는 퇴행의 길을 고수하는 환경이니 말이다. 이에 더해 설혹 성공의 중심에 설지라도 그 수확이 확산되지 않는 배타적 이기심만이 찬양받는 곳에서 신화를 기대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신화가 만들어질 수 있는 사회, 신화가 풍성하게 회자되는 곳, 인간의 감정이 좌절되지 않는 곳, 그런 곳에 대해 꿈을 꿀 수 있는 사회적 토대가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더욱 신화를 이해하고 말하고 만들어내는 것은 우리들의 의무이고 책임이다. 이 책은 문학과 사상의 지평을 넓혀주기 위해 신화란 무엇인지, 신화는 어떻게 읽고 해석하여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 구성과 내용은 어떤 것인지를 쉽고 친절하게 설명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와 우리사회가 사라져버린 신화적 공간을 재생하고 삶의 본질에 근접하는 힘을 조성하는 길을 안내한다.
신화를 크게 “창조신화, 시조신화, 영웅신화”로 삼분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창조신화는 홍수신화와 같은 재생신화와 함께 무언가가 처음 혹은 새로이 만들어지는 질서의 부여와 집단의 사유체계를 드러내는 장치로서 묘사되어 존재(생명)의 순환을 이야기한다. 새로움을 위해 기꺼이 낡은 것이 자리를 내어주고, 악이 무성해지면 깨끗이 쓸어내는 물에 의해 청산되고 선을 다시여는 그런 것이다.

한편 영웅신화는 엄청난 고난과 시련을 극기하고 마침내 인간에게 금지된 공간에 성공적으로 진입함으로써 세상을 차지하거나 목적을 성취한다. 그러나 이 성취와 깨달음 뒤에 영웅은 머무르거나 출발지로 회귀하는가에 따라 그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지는데, 귀환을 거부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돌아가 그 성취를 세상에 확산하는가가 바로 핵심이 된다. 이 책에는 이러한 신화들이 세계의 각 지역,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로부터 인도,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이집트, 아프리카, 북유럽, 그리스신화에 이르는 신화들로부터 삶과 자연의 그러해야 함에 대한 진실, 진리의 틀을 보여준다. 이러한 예화 중에 3분의2는 신(神)이고 3분의 1은 인간으로 만들어진 ‘길가메시’처럼 불완전한 인간과 전능한 초월적 힘인 신의 능력이 결합되어 절묘한 양면성, 즉 영웅적인 강력한 추동력 이면에 불안과 번민하는 약점을 지닌 인간의 한계성을 노출하여 내적 성숙과 불균형의 묘미를 보여준다. 이들은 대개 지상과 천상, 지하세계 등 층위가 다른 세계를 차례로 겪어나가면서 세상의 중심, 삶과 죽음의 그 비의를 터득하는 데 이르게 된다. 헤라클레스가 겪는 12개의 고난이나 미궁 속 미노타우스를 물리치는 테세우스는 바로 이러한 것들을 대표한다.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물리치거나 극복하여야 하는 대상은 바로 우주와 대자연의 본질인 중심을 방어하는 괴물, 혹은 대상물을 이겨냄으로써 그 중심, 인간에게 금지된 공간, 각성, 깨우침, 달관에의 진입을 상징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신화를 보는 시각에 대한 이론들로서 기독교가 타 신앙들의 신을 평가절하하기 위해 신화를 일개 우의(寓意)로 해독하는 에우헤메리즘(euhemerism)을 전파하여 그 본질적 의미를 훼손하는가 하면, 역사적 사실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하여 카인과 아벨의 대립을 농경과 유목사회의 갈등, 인물의 이동경로를 추적하는 것과 같은 형식으로 이해하여 신화의 보편성을 해치는 방법들을 소개하기도 하는가하면, 갱신과 재생을 연관시키는 제의적(祭儀的)접근, 레비스트로스와 같이 신화의 내재적 구조를 파헤치는 구조적 접근등을 다채로운 세계의 신화들을 통해 신화가 지닌 논리적 모델을 찾아내기도 한다.  이밖에 프로이트나 융 처럼 심리적 접근을 통해 신화 속 상징물을 통해 개인과 집단적 무의식을 해석하여 그 본질적 의미를 발굴해내기도 한다.

신화를 해독하는 이와 같은 방법들을 아는 것은 우리가 우리사회나, 여타 문화적 산물인 책, 연극, 영화, 미술작품, 사회적 담론을 읽는 데 있어서 대단히 유용한 방향성을 제공한다. 일례로 신화에는 유독‘처녀 잉태’라는 초자연적 탄생이 많이 기술 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이것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기존 문화의 가치인 아버지라는 법인 전통적 관습이나 터부를 깨기 위해서는 아버지에 매이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터부를 깨는 사람은 공포와 견제의 대상이 되고 혹독한 모험과 시련이 앞에 놓인다. 결국 이를 이겨냄으로써 터부를 파기하고 새로운 질서를 창출해 낼 수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한편 “자아(自我)의 신화”를 얘기하는 코엘료의 『연금술사』처럼, 양치기 산티아고의 보물을 찾는 여정이 종국에는 맨 처음의 출발지로 돌아오듯이 자신이 선 곳, 바로 그곳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신화적 깨달음으로 안내하는 것이나, 영화 <쇼생크 탈출>처럼 감옥이란 시련, 그리고 길들여지지 않음, 이상세계에 대한 추진, 타협과 깨달음, 마침내 미궁(감옥)에서의 탈출은 영웅의 재현으로 현대적 신화의 이상적인 예로 등장하기도 한다.

메마르고 황폐화된 오늘의 현대사회에서 우린 이러한 신화를 잊고 살고 있다. 다시 말해 삶의 본질에 접근하는 힘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말로 표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판적으로 보아야 할 터부인 그릇된 제도와 장치들,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보수적 지배 권력들의 방해를 넘어서야 한다.
비록 그날그날을 똑같은 일에 종사하며 사는 시지포스의 운명 못지않은 부조리한 삶이지만 우린 분투해야만 하는 당연한 삶의 이유와 권리를 가지고 있다. 신화를 꿈꾸는 세상, 그리고 신화가 마구 양산되는 그런 세상이 우리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것 아닐까? 무릇 작가를 꿈꾸는 이들, 사회를 비평하고 해석하는 이들, 삶의 본원을 탐색하여 세상의 당위를 제시하고자 하는 철학하려는 이들, 삶을 보다 충실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의미 있는 상상력과 깨우침을 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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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계단
루이스 베이어드 지음, 이성은 옮김 / 비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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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인류사적 배경 못지않게 역사가 주목하지 않았던 10살의 어린 소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만으로도 왠지 울컥하는 마음을 야기하며, 거대한 정치적이고 역사적 담론 속에 묻혀 정작 인류가 경시하고 소외시켰던 것, 한 어린 인간에 대해 쏟아내는 군중의 맹목적 분노와 야만성, 그러나 박애와 인간의 도덕적 정의도 소수에 의해서라도 존재했다는 배제된 자들의 역사를 매혹적 이야기에 담아 그려내고 있다.

작품의 사건을 이루는 시대적 배경의 시점인 1789년은 프랑스뿐 아니라 이후 인류의 근대적 이성주의와 민주주의 확산에 대 전환이 된 시간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 대혁명(시민혁명)’이란 인류사적 사건은 너무도 흔하게 인구에 회자되었기 때문에 ‘루이16세’와 그의 처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일화나 처형에 얽힌 비화는 더 이상 어떤 감동을 주기에는 어려운 소재일 정도이지만, 그들의 자녀와 가족이 어떠한 상황 속에 처하게 되었는지는 전혀 다른 소재가 된다.

10살도 채 되지 않았던 왕세자‘루이 샤를(루이 17세)’과 공주인‘마리 테레즈’의 삶이 그들 부모의 처형이후에도 존속될 수 있었을까하는 물음은 우리들이 놓쳐서는 안 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게 한다. 1793년1월 루이 16세가 처형되고, 그리고 같은 해 10월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서 처형되었으니 부모를 잃은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무모한 정치권력을 행사하지는 않았겠지 하는 윤리적 기대는 사실 낭만적 기대에 불과하기까지 하다. 역사는‘루이 샤를’이 10살 되던 해 동물우리보다 못한 폐쇄된 더러운 공간, 온갖 고문과 매질, 굶주림과 질병으로 ‘탕플 탑’의 감옥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어린 소년의 죽음에 뒤늦은 인간의 양심이 발동하였는지, 아니면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의 생존 가능성과 관련한 무수한 뒷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것으로 상실된 군중의 인간성이 회복되기나 할 것인 냥 기대하는 면죄의식의 작동이 아닐까하는 씁쓸한 기분도 느끼게 된다.

작품의 현재 시점은 이로부터 20여년이 지난 1820년대, 나폴레옹의 공화정마저 무너지고 다시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시기이다. 의문의 남자가 살해되고, 그의 행적과 신분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죽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루이 샤를’의 실존 가능성과 어울려 탕플 탑에 갇힌 어린 샤를을 치료하고 보호하던 의사 ‘가르팡티에 박사’의 20여 년 전의 기록이 교차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어린 인물을 복원해 나간다. 여기에 더해 긴장감과 흥미를 배가하는 요소로 19세기 프랑스문학에 빈번하게 등장하던 프랑스 시민사회의 절대적 우상이었던 인류 최초의 탐정격인 명수사관‘비도크’가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게 하여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거대한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조류에 대해서 어떠한 이해도 가질 수 없는 어린 소년이 민중의 무관심 속에 쓸쓸히 방치된 채 권력의 희생양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서 좀처럼 합리적, 도덕적 타당성을 찾아  내기란 수월치 않다. 그러나 그 잔인한 행위의 주체가 시민들이 되었든, 탐욕스러운 권력자가 되었든 자신들의 이해를 획득하기 위해서 어린아이조차 죽음으로 내 모는 것이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어쨌든 이러한 군중적 야만성의 본질을 생각하면서 사건의 배후인물을 향한 여정이 긴박감을 지닌 채 전개된다. 특히 작품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요인으로 작동하는 이 소설만의 구성이 있는데, 역사적 사건이랄 수 있는 어린 샤를의 보호치료자인 가르팡티에 박사의 일기가 현재의 상황에 지속적으로 암시를 내뿜어 호기심이 마르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반드시 진실을 발견해야 한다는 책임 의식같은 것을 작품 속 인물들뿐 아니라 독자에게도 요구하는 듯한 그런 느낌 때문에 거듭 책장을 넘길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내용적 전개는 기발한 수사의 여정과 19세기 식 액션이 비도크란 영웅적 인물에 입혀져 생생한 현장감을 준다. 게다가 소소한 복선과 반전들의 짭짤한 재미도 곁들여서 이야기적 즐거움까지 압도적임에도 역사비밀주의에 대한 탐색이란 제재는 분명 이 소설의 결정적 흥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왕이 되었을 수도 있는 루이 샤를의 생존가능성이라는 발상. 이와 더불어 인간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상적 지향점을 위해서는 기꺼이 소수자, 반대자는 희생되어야 한다는 주류적 가치에 대한 정당한 반대와 저항의 진실된 가치를 생각게 되며, 버려지고 학대당하는 어린아이에 자기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 보살핌과 사랑을 중첩시켜 타자에 대한 사랑, 인류애, 인간의 보편적, 도덕적 진리란 무엇이어야 하는지도 요구하는 듯하다. 우리들이 정작 잃어버려서는 안 될 소중한 감성들, 베일에 싸인 역사의 이면에 갇힌 진실, 추리적 요소와 탐정의 액션, 이런 것들이 짜임새 있게 구축되어 그야말로 소설적 상상력의 진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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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5-24 0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모 사후 시점과 맞물려, 이 소년에게 `뇌청소'라는 것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나누고 쪼개도 알 수 없는 세상 - 과학자들은 왜 세상을 잘못 보는 것일까
후쿠오카 신이치 지음, 김소연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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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생명현상의 본질인 세포와 그 화학물질의 차원까지, 그리고 회화예술과 철학적 사유를 통한 은유의 세계를 형상화하여 그야말로 경외감 가득한 세상에 대한 이해를 유쾌하고 지적인 산책길로 안내한다. 분자생물학, 생리학의 시시콜콜한 실험과정으로부터, 때론 베니스와 로스앤젤레스의 미술관으로부터, 대학의 생물실험연구소의 일화로부터, 편의점 삼각 김밥 포장지에 명기된 함유물질로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가 과연 진실인가, 아니 어느 한 부분에 불과한 것, 일부를 보고 전체를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바로 생명의 안전한 유지를 위해 만들어낸 인위적인 환상은 아닌지를 사색한다.

저자가 안내하는 사유의 여정은 화려한‘게티 미술관’에 걸린‘비토레 카르바초’의 작품, <라군에서의 사냥(Hunting on the Lagoon)>과 이태리 베네치아의 차타레 강변과 인쿠라빌라(Incurabill)라는 수로에 얽힌, 한 일본 작가의‘비토레 카르바초’작품 <코르티잔>의 감상과 얽혀 낭만적 골목길에서 멈추어 서게 한다. 그러나 마냥 두 걸작품에 대한 소회에 머무는 것은 아니고, 미국과 이태리라는 각기 다른 나라의 미술관에 걸린 작품이 전체를 이루는 거대한 한 작품의 부분임을 알게 되면서 소위 미술평론가들이라는 전문가들이 떠들어대던 그 호사스런 해석이 초라하게 되었으니 인간의 앎이란 것의 실체란 것이 그리 내세울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분자생물학자인 만큼 미세한 분자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법, 그래서 우리 비전공자들이 이해하기 수월한 예를 든 것이 곧 김밥이다. 편의점에 놓인 김밥의 유효기간, 납품돼서 진열대에 놓여 판매되는 시간동안 부패하지 않도록 하기위해 첨가되는 물질에‘소브르산’이란 것이 있는 모양인데, 임상실험결과 인체에 유해하지 않기에 사용되고 있단다. 이러한 실험이란 것이 인간의 생체에 진정 무해한 것인지는 사실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 한 것임에도 부분적일 밖에 없는, 고작 인간이 이해 할 수 있는 분석에 의존하여 판단을 내린다. 사람의 대장에는 사람을 구성하는 세포보다 많은 장내 세균이 있고 이 세균이 정장작용을 도우며 공생하고 있다. 소브르산이란 일종의 방부제는 미생물의 번식에 장애를 일으켜 그 증식을 억제하여 부패의 속도를 지연시키는 기능을 하는 것인데, 사람의 장기 내에서 사람의 생명활동을 지원하는 세균들은 무차별적으로 이 소브르산에 노출되고 마는 것이니 결국 간접적으로 인간의 신체에 유해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란 얘기가 된다. 과연 인간이 안다고 자부하는 것이 신뢰 할 수 있는 앎, 진정 아는 것이기나 할까?

이 저술의 현미경 배율을 예로하지 않더라도 카메라의 배율을 갑자기 높여 대상물을 가까이 끌어당기면 그 화면을 가득 메우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즉 그 물체가 전체의 어느 부분인지, 그 화면의 우측에는 좌측에는 위에는, 아래에는 무엇이 있는지조차 알도리가 없게 된다. 이 확대된 대상물은 본래의 세계 속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우린 전체도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주변의 전경은 어떤지도 알지 못한다. 부분을 정밀하게 아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니란 말일게다.

이와 관련해서 아주 재미있는 예가 소개되고 있는데, ‘지도 의존형’ 인간과 ‘지도 무시형’인간의 행동 양식으로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인간은 정작 누구일까 하면 지도 의존형이란 것이다. 전체를 조감하고 목적지의 그 방향과 위치를 찾으려는 행위가 감만 가지고 자신의 전후좌우와 관계성만 가지고 찾는 지도 무시형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양식에 익숙한 것이 바로 우리들의 세포가 타자를 인식하는 시스템인데, 세포는 결코 자신이 인간의 신체에서 어디에 위치하고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체와 부분이라는 관계성이 전혀 필요 없다는 것으로, 오직 주변과의 관계성에만 의지하여 모든 세계를 구축하는 분산적 행동을 하여 완벽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를 상보성이라 하는데, 생명의 신비, 자연, 우주의 섭리, 그 자체가 경외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러한 정상적 세포의 행동,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 증식과 억제의 균형을 유지하는 세포와 달리 어느 순간 엄청난 에너지를 낭비하면서 무한 증식하는 세포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암세포이다. 마치 그 행동이 인간 사회에 만연한 탐욕스런 속성의 그 파괴성과 닮은 꼴 같기만 해서 우리 눈의 해상력이 0.01밀리미터의 식별까지만 가능하기에 망정이지 해상력이 더 뛰어났다면 끔찍했을 것 같기만 하다는 생각에 이르기도 한다.
눈의 해상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딱 이만큼만 보이도록 진화한 것은 기막히게 균형적인 것 같기만 하다. 그래서 조금은 겸손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두 아는 것이 결코 유익한 것만은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이 낭비적이고 몽매한 암세포의 얘기는 코넬대(大)의 한 연구실험의 일화로 이어지는데, 이 암세포의 증식과 분열을 조장하는 원인을 밝혀내면 암을 정복할 수 있으리라는 열의다. 이러한 인간의 갈망은 한 대학원생 연구자의 강박과 지도교수의 보고자하는 기대감이 결합하여 실험을 조작하여 가설을 입증하는 쾌거를 창조하는 것인데, 결국은 과학계의 대 스캔들로 과학의 깊은 불신만 낳았을 뿐이라니 그‘앎’에 대한 과욕이 실질을 보지 못하게 하였으니 안타까운 얘기이도 하다.

이처럼 흥미로운 분자생물의 세계와 여러 에피소드들은 사람의 눈이 보는 것, 사람의 인식이 발견하는 것이 실상이 아니라는 것의 보기들이다. 우리들, 그리고 우리사회의 지배적 사고는 부분으로 나누어서 정밀하게 이해하고나면, 또한 이들 부분들을 모으면 올바른 전체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데 기초하고 있다.  연속을 분절하고 경계를 강조하여 선명하게 하고 그리고 부족한 것들은 보충해서 보면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세상을 도식화하고 단순화하는 것이 곧 앎이라고.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의 눈, 세포의 행동양식, 밤하늘의 별빛, 누군가가 나를 보는 시선, 아미노산과 같은 분자생물의 메커니즘을 통해서 앎의 본질을 확인하게 된다. 실제로 보는 것은 망상, 인공적인 인식에 불과한 것임을. 세상에 부분이란 것은 없다. 어찌 부분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쪼갤 수 없는 것을 인위적으로 쪼개면 그 본성, 본질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데 말이다. 또한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들을 모두 집합하면 우리가 된다. 허나 그 세포 어디에 ‘내’가 존재하는 것인가? 삶과 죽음의 경계란 존재 할 수 있는 것인가? 그 경계의 순간이란 것이 정의 될 수 있는 것인가?

생명의 본질, 안다는 것의 본질, 그것은 물질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 에너지와 정보가 유발하는 효과, 그 흐름에 있다는 통찰력은 아마 이 저술의 차원을 저 높이 올려놓는다 할 정도로 거룩하게 인식된다. 명확한 구분은 그 어디에도 없다. 우린 모두 볼 수 없으며, 결코 모두 알 수도 없다. 우린 아는 것이 없다. 더욱 겸허해져야 할 터이다. 지금보다 더욱 더....그것이 바로 공부해야 하는 이유라는 저자의 말을 다시 되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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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식량 문학동네 시집 98
박찬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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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음, 이 시집만큼 내 마음을 관통하는 느낌들, 이미지들, 막연한 그 궁극의 깨달음이 공명한 것도 없으리라. 작고하시기 전, 시인 이재훈과의 대담이 실린 2001년 <현대시 11월호>에 실린 ‘해찰’하는 시인의 삶의 습속이 내 밑바닥에 가라앉은 무의식의 생김새와 닮아 있어 동지를 만난 냥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이것저것 부질없이 집적거리며 해치는 그 무심한 듯한 삶의 모양새, 끝없이 어떤 먼 곳에 대한 알 수 없는 그리움으로 실체가 다가오면 다시금 먼 곳을 응시하는 그의 모습이.

특히나 시인의 이 유고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한결같이 뭉클한 자연에 대한 겸손과 그 웅대한 우주의 섭리에 가까이 다가간 외로운 한 사람의 존재론적 숙명으로 더없이 마음을 끄덕이게 한다.
나와 너의 그 어딘가에 존재하는 바로 ‘나’, 그 무상심(無常心)과 무위(無爲)를 이제사 알듯하게 되었을 때, 바로 그 느낌의 실체를 비로소 지각할 때 보이는 세계의 모습을 말하기에는 모자란 것이 언어이지만 그걸 말하는 시인의 관조는 아름답다! 라는 엉성한 말 이외에는 할 길이 없다....

시집의 첫 장에 씌어 진 아래의 시 <그시절>의 마지막 구절은 눈시울이 붉어지는 감동으로 한 동안 먼 전경만을 무심히 바라보게 한다.

(......前略......)
뒷산 불던 바람 자연하고
흰 구름 둥둥 여여하였네
(......中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네
꽃잎만 한 잎
뚝! 떨어졌을 뿐 "

이러한 초월적 관조는 다음의 <예쁜 꽃>이라는 시에서 또 다른 느낌으로 접하게 되는데,

이제 더 이상 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겠다
꽃에 대해 얘기하자면 한이 없을 것이므로
그러다 마침내 꽃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므로

새벽 산책길에서
한낮의 호젓한 산길에서
행여 그 꽃을 보게 되면
그냥 생각만 하리
건들거리는 바람처럼....
“이쁜 꽃이 피었네”

하고 말이다. 언젠가 바람에 실려 산 속의 이쁜 꽃을 지나칠 때, 내 모습이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삶이란 걸 떠나보내려 할 때의 외로움 같은 거....그것들이 시인이 말하듯 “어차피 가야 할 곳인데, 싸목싸목 가면 되지” 않을까 싶다는 소리에 빙그레 수긍의 미소를 짓게 된다.
그리고 <散骨을 하며 - 어머님께>와 같은 시처럼

(......前略......)
매양 그러하지만 또 눈물납니다
이제 이 세상이 모두 당신 집이지만 당신은 어디에도 안 계십니다
어디에도 남아 있지 마십시오
그리움 속에도 그리워하는 마음속에도 부디 계시지 마십시오

라고 하지만 어찌 그 무상을 넘어 내 눈물조차 가릴 수가 있었겠는가하는 투명한 시인의 마음을 보는 것 같아 외로움과 그리움의 무게가 벅차게 다가오기도 한다. 보이는 현상의 이면에 가려진 진짜의 세계, 그 비가시적인 대자연의 섭리, 존재론적 삶으로의 본질적 회귀에 대한 시인의 성찰이 깊이 있게 내 가슴에 내려앉는다. 시인 박찬이 남겨준 이 마지막 시들은 나와 오랜 동안 동행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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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니아의 사랑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1
수사나 포르테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들녘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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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재촉하는 사랑이야기, 금지된 사랑의 저주와 그래서 더욱 고양되는 사랑이야기, 쾌락과 복수로 이어지는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비극적 사랑이야기이다. 또한 폐쇄되고 가부장적이며, 폭력과 기만, 억압과 공포로 이어지는 사악한 메커니즘이 지배하는 독재정권의 나라, 알바니아에서 신음하는 민중들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향한 애처로운 저항의 은유이기도 하다. 열정과 조바심, 죽음과 같은 쾌락과 사랑의 그 절실함이 작품전체를 격정적 분위기로 몰아댄다. 이해 할 수 없었던 말과 행동, 표정들의 아련한 기억들이 음울함과 내재적인 은밀함을 더욱 강렬하게 하고, 까무룩하게 눈이 절로 감기는 어떤 환각적 상태에 빠져들게 할 만큼 매혹적이다.

외부와 차단되고, 가부장적 권위, 근엄한 공포의 권력이 지배하는 공간에 갇힐수록 그 반작용은 더욱 파괴적이고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요, 질서일 것이다. 소설은 스페인내전, 유럽을 휩쓴 파시스트들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알바니아의 한 지배권력자인 ‘자눔 라드지크 가문’에 저주처럼 내린 사랑과 죽음의 비밀, 그리고 그 황폐화를 향해서 치달을 수밖에 없는 근원을 좇는다. 작품 속에서도 등장하지만 ‘카눈의 전설’을 소재로 한‘이스마일 카다레’의 장편소설 『부서진 4월』에서와 같이‘피는 피로 갚는다’는 보복의 순환은 비극을 예고하지만, 인간의 본능이란 금기(禁忌) 앞에서 더욱 초연해지는 것,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이기에 그 금지된 것을 넘어서는 사람들의 추동력은 격렬함, 간절함, 죽음의 불사를 초래한다.

우리들, 인간성이란 것의 본질인 욕망을 가두는 것, 그 자유로움을 억압하는 제도와 장치는 인위적으로 가둬지는 것이 아니다. 제지되고 폐쇄될수록, 아니 자연의 질서를 작위적으로 통제한다는 것이 이미 오만이고 무지이며 왜곡을 부르는 것일 게다. 고립과 차단의 질서화는 오히려 정신과 현상을 손상시키고 무질서와 황폐화만을 야기한다는 것을 우린 우리의 불행했던 현대사를 통해 아픈 경험으로 이해하고 있다. “무자비한 종교같은 독재 권력”을 휘두르는 암흑의 세계, “시체 애호가들의 나라이자 무덤을 찾는 자들의 나라”라 불릴 정도의 폭압성과 엄격함만이 작용하는 폐쇄적 공간인 1960년대 알바니아의 사회상은 라드지크 집안과 교차하며 비극의 본질을 공유한다.

소설은 라드쉬크 가문의 가장인 대(大)자눔의 둘째 아들인‘이스마일’의 어린 시절의 흐릿하고 몽환적인 기억들과 그의 성년으로서의 현실, 즉 과거와 현재시점을 오가며 비극적 기원의 비밀스런 윤곽을 드러낸다. ‘그 여자’로 지칭되는 엄마의 죽음에 숨겨진 이면의 진실, 엄마의 죽음과 동시에 가족과 항시 함께했던 의사 기오르크 박사의 사라짐은 시대의 폭력성과 가문의 비극성을 동시에 표출해낸다. 여기서 엄마와 기오르크의 관계가 지니고 있는 금기의 파괴가 낳은 결과는 은밀하고 잔인한 죽음의 원인이 되고, 그것은 곧 권력의 저항이자 관습의 순응이라는 대자연의 질서로의 회귀를 확인시켜주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동시에 금지된 사랑, 그 금기에 도사린 부인 할 수 없는 절대적 쾌락, 죽음까지 수용 할 수 있는 사랑, 그 죽음의 부름 속에 살아있음과 깨어있음을 찾았던 부조리의 격렬함이 거친 숨결로 다가오기도 한다.

급기야 형 빅토르의 아내인 형수 헬레나와의 초조함과 은밀함을 동반하는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감당할 수 있는 사랑의 거의 모든 것을 쏟아 낸다. “이스마일이 쓰다듬는 형수의 등은 이스마일을 빅토르의 우주로 접근시켜주는 작은 우주였고, 사랑하는 그녀의 세포 하나하나는 그에게 죽음과 같은 쾌락을 일깨워주었다.”라고 하듯이,  금기의 파괴는 질서와 제도, 권력의 중심을 파괴하려는 것의 다름이 아니다. 권위적인 가부장적 질서인 자눔과 그를 닮아가는 형 빅토르라는 기존질서를 무너뜨림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행위의 상징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이스마일과 헬레나의 사랑의 행위는 그 어떤 사랑보다 극한의 격정과 강렬함을 내 뿜는다. 그 격렬함, “서로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모든 무기를 서로에게 넘겨주게 되는” 사랑의 침대 속에 내재하는‘죽는다’라는 내밀한 고백처럼 쾌락과 죽음이 분리 할 수 없는 일체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총소리, 그러나 쾌락과 복수에 대한 갈망이 혼재된 적대감 앞에서의 침묵과 순응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 된다. ‘바타이유’를 연상시키는 이스마일과 헬레나의 사랑행위는 그것이 본질적으로 품고 있는 죽음과 삶의 경계를 초월하게 한다. 육체적 달콤함, 욕망의 본능,  그 촌각을 다투는 심장의 떨림, 그것이 추억을 이루는 물질들과 연결되어 설혹 상상의 세계일지언정 절실함이 만들어내는 삶의 진리로 이끈다.  에로티즘에 실린 그‘저주의 몫’을 이 보다 풍부하게 전달하는 작품도 없을 게다. 자유를 향한 연인들의 질주가 더 없이 황홀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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