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고 쪼개도 알 수 없는 세상 - 과학자들은 왜 세상을 잘못 보는 것일까
후쿠오카 신이치 지음, 김소연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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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생명현상의 본질인 세포와 그 화학물질의 차원까지, 그리고 회화예술과 철학적 사유를 통한 은유의 세계를 형상화하여 그야말로 경외감 가득한 세상에 대한 이해를 유쾌하고 지적인 산책길로 안내한다. 분자생물학, 생리학의 시시콜콜한 실험과정으로부터, 때론 베니스와 로스앤젤레스의 미술관으로부터, 대학의 생물실험연구소의 일화로부터, 편의점 삼각 김밥 포장지에 명기된 함유물질로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가 과연 진실인가, 아니 어느 한 부분에 불과한 것, 일부를 보고 전체를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바로 생명의 안전한 유지를 위해 만들어낸 인위적인 환상은 아닌지를 사색한다.

저자가 안내하는 사유의 여정은 화려한‘게티 미술관’에 걸린‘비토레 카르바초’의 작품, <라군에서의 사냥(Hunting on the Lagoon)>과 이태리 베네치아의 차타레 강변과 인쿠라빌라(Incurabill)라는 수로에 얽힌, 한 일본 작가의‘비토레 카르바초’작품 <코르티잔>의 감상과 얽혀 낭만적 골목길에서 멈추어 서게 한다. 그러나 마냥 두 걸작품에 대한 소회에 머무는 것은 아니고, 미국과 이태리라는 각기 다른 나라의 미술관에 걸린 작품이 전체를 이루는 거대한 한 작품의 부분임을 알게 되면서 소위 미술평론가들이라는 전문가들이 떠들어대던 그 호사스런 해석이 초라하게 되었으니 인간의 앎이란 것의 실체란 것이 그리 내세울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분자생물학자인 만큼 미세한 분자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법, 그래서 우리 비전공자들이 이해하기 수월한 예를 든 것이 곧 김밥이다. 편의점에 놓인 김밥의 유효기간, 납품돼서 진열대에 놓여 판매되는 시간동안 부패하지 않도록 하기위해 첨가되는 물질에‘소브르산’이란 것이 있는 모양인데, 임상실험결과 인체에 유해하지 않기에 사용되고 있단다. 이러한 실험이란 것이 인간의 생체에 진정 무해한 것인지는 사실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 한 것임에도 부분적일 밖에 없는, 고작 인간이 이해 할 수 있는 분석에 의존하여 판단을 내린다. 사람의 대장에는 사람을 구성하는 세포보다 많은 장내 세균이 있고 이 세균이 정장작용을 도우며 공생하고 있다. 소브르산이란 일종의 방부제는 미생물의 번식에 장애를 일으켜 그 증식을 억제하여 부패의 속도를 지연시키는 기능을 하는 것인데, 사람의 장기 내에서 사람의 생명활동을 지원하는 세균들은 무차별적으로 이 소브르산에 노출되고 마는 것이니 결국 간접적으로 인간의 신체에 유해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란 얘기가 된다. 과연 인간이 안다고 자부하는 것이 신뢰 할 수 있는 앎, 진정 아는 것이기나 할까?

이 저술의 현미경 배율을 예로하지 않더라도 카메라의 배율을 갑자기 높여 대상물을 가까이 끌어당기면 그 화면을 가득 메우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즉 그 물체가 전체의 어느 부분인지, 그 화면의 우측에는 좌측에는 위에는, 아래에는 무엇이 있는지조차 알도리가 없게 된다. 이 확대된 대상물은 본래의 세계 속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우린 전체도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주변의 전경은 어떤지도 알지 못한다. 부분을 정밀하게 아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니란 말일게다.

이와 관련해서 아주 재미있는 예가 소개되고 있는데, ‘지도 의존형’ 인간과 ‘지도 무시형’인간의 행동 양식으로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인간은 정작 누구일까 하면 지도 의존형이란 것이다. 전체를 조감하고 목적지의 그 방향과 위치를 찾으려는 행위가 감만 가지고 자신의 전후좌우와 관계성만 가지고 찾는 지도 무시형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양식에 익숙한 것이 바로 우리들의 세포가 타자를 인식하는 시스템인데, 세포는 결코 자신이 인간의 신체에서 어디에 위치하고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체와 부분이라는 관계성이 전혀 필요 없다는 것으로, 오직 주변과의 관계성에만 의지하여 모든 세계를 구축하는 분산적 행동을 하여 완벽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를 상보성이라 하는데, 생명의 신비, 자연, 우주의 섭리, 그 자체가 경외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러한 정상적 세포의 행동,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 증식과 억제의 균형을 유지하는 세포와 달리 어느 순간 엄청난 에너지를 낭비하면서 무한 증식하는 세포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암세포이다. 마치 그 행동이 인간 사회에 만연한 탐욕스런 속성의 그 파괴성과 닮은 꼴 같기만 해서 우리 눈의 해상력이 0.01밀리미터의 식별까지만 가능하기에 망정이지 해상력이 더 뛰어났다면 끔찍했을 것 같기만 하다는 생각에 이르기도 한다.
눈의 해상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딱 이만큼만 보이도록 진화한 것은 기막히게 균형적인 것 같기만 하다. 그래서 조금은 겸손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두 아는 것이 결코 유익한 것만은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이 낭비적이고 몽매한 암세포의 얘기는 코넬대(大)의 한 연구실험의 일화로 이어지는데, 이 암세포의 증식과 분열을 조장하는 원인을 밝혀내면 암을 정복할 수 있으리라는 열의다. 이러한 인간의 갈망은 한 대학원생 연구자의 강박과 지도교수의 보고자하는 기대감이 결합하여 실험을 조작하여 가설을 입증하는 쾌거를 창조하는 것인데, 결국은 과학계의 대 스캔들로 과학의 깊은 불신만 낳았을 뿐이라니 그‘앎’에 대한 과욕이 실질을 보지 못하게 하였으니 안타까운 얘기이도 하다.

이처럼 흥미로운 분자생물의 세계와 여러 에피소드들은 사람의 눈이 보는 것, 사람의 인식이 발견하는 것이 실상이 아니라는 것의 보기들이다. 우리들, 그리고 우리사회의 지배적 사고는 부분으로 나누어서 정밀하게 이해하고나면, 또한 이들 부분들을 모으면 올바른 전체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데 기초하고 있다.  연속을 분절하고 경계를 강조하여 선명하게 하고 그리고 부족한 것들은 보충해서 보면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세상을 도식화하고 단순화하는 것이 곧 앎이라고.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의 눈, 세포의 행동양식, 밤하늘의 별빛, 누군가가 나를 보는 시선, 아미노산과 같은 분자생물의 메커니즘을 통해서 앎의 본질을 확인하게 된다. 실제로 보는 것은 망상, 인공적인 인식에 불과한 것임을. 세상에 부분이란 것은 없다. 어찌 부분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쪼갤 수 없는 것을 인위적으로 쪼개면 그 본성, 본질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데 말이다. 또한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들을 모두 집합하면 우리가 된다. 허나 그 세포 어디에 ‘내’가 존재하는 것인가? 삶과 죽음의 경계란 존재 할 수 있는 것인가? 그 경계의 순간이란 것이 정의 될 수 있는 것인가?

생명의 본질, 안다는 것의 본질, 그것은 물질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 에너지와 정보가 유발하는 효과, 그 흐름에 있다는 통찰력은 아마 이 저술의 차원을 저 높이 올려놓는다 할 정도로 거룩하게 인식된다. 명확한 구분은 그 어디에도 없다. 우린 모두 볼 수 없으며, 결코 모두 알 수도 없다. 우린 아는 것이 없다. 더욱 겸허해져야 할 터이다. 지금보다 더욱 더....그것이 바로 공부해야 하는 이유라는 저자의 말을 다시 되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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