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김현철 옮김 / 새물결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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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이 질 무렵, 가을의 낙엽이 쓸쓸히 구르는 평온한 호숫가를 바라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왠지 가슴에 아릿하고 시린 무엇이 날아들어 애잔함이 휘감아 도는 듯하다.
삶이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다. 무수한 성취를 향한 여정도, 사랑도, 욕망도...,걷잡을 수 없는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던 정염(情炎)도..., 이러한 것들이 지나가버리고 알 지 못했던, 알 수 없었던 인생의 모습들을 바라보는 그림이, 이야기가 흐른다. 세상을 지나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고 그 아내의 이야기이도 하다.

프랑스의 작은 도시 ‘라빌디외’에 인생의 진실이란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발다비우’란 인물이 발을 들여놓으면서 삶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라빌디외에 견사(絹絲)산업을 일으키려는 발다비우의 권유에 따라 정숙함과 아름다움을 지닌 아내 ‘엘렌’의 지고한 사랑을 받는‘에르베 종쿠르’는 이 사업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소재의 원천을 만드는 근동지역의 수입에 의존하던 누에알에 전염병이 돌면서 돌파구를 찾던 중, 세상의 끝이라고 여기던 일본으로부터 밀수입을 결의하게 된다.
            

소설의 이야기 구조는 인간의 삶처럼 지극히 단순한 반복이자 순환이다. 그러나 이렇듯 일정한 반복 속에 동일한 순간이 존재하지 않듯이 아주 사소하고 작은 우연이 인연과 필연을 만들어내고, 거기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인생의 이야기들이 담긴다. 프랑스에서 아시아의 동쪽 끝으로 가는 여정은 동유럽을 경유하고 시베리아와 바이칼 호수를 지나 중국 국경지대를 거쳐 일본에 이르는 실로 엄청난 대장정이다. 서구로부터 개방 압력이 거세어지던 19세기 중엽의 일본은 누에알의 유출을 차단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라 케이’라는 일본인의 도움으로 누에알을 입수하게 되면서, 그의 곁에 있던 동양의 신비를 간직한 아름다운 소녀의 미소에 매혹된다. 그리곤 동일한 경로를 거슬러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대장정, 밀무역의 여정이 거듭되면서 에르베 종쿠르는 동양의 소녀, 비단결 같이 부드러운 소녀의 감촉과 미소에 빠져든다. 일본의 내전(內戰) 소식이 전해지고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는 장정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욕망이란 열정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 폭풍 같은 그리움의 열병은 지나가기 전에는 영원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이 정염에 고통스러워하는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 엘렌의 심정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마침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장정에 오르는 에르베 종쿠르를 향한 엘렌의 간절함에 묻어난 한 마디에 모두 담겨있다.

“돌아오겠다고 약속해요”

         

그 어떤 장황한 말보다 이 한 마디에 남편에게 휘몰아치는 한줄기 바람 같은 욕망을 뛰어넘는 삶의 관용과 사랑의 진정함이 있다. 그래서 한 남자의 삶의 이야기 속에서 오히려 깊고 곧게 흐르는 여인의 아련한 사랑의 갈망에 더욱 주목하게 된다.
에르베 종쿠르의 온 정신과 육체를 감아 도는 세상의 끝에 있는 소녀의 편지인 듯 한 일본어로 씌어진 7장의 서신에는 여인 엘렌의 절절한 욕망과 사랑의 그리움이 넘실댄다.

「당신은 갑자기 어느 곳에선가 제 입술의 온기를 느끼게 될 거예요. 눈을 감고 계세요. 제 입술이 당신의 어디에 닿게 될 지 알 수 없도록. 눈을 뜨지 마세요. 이제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곧 제 입술의 감촉을 느끼게 될 거예요. 갑자기. ....中略 ... 사모하는 주인님. 지금 이 순간은 영원히 지속될 거예요. 지금으로부터 영원까지.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사람의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것, 그것은 광풍처럼 몰아치던 그 어느 순간들의 아린 사랑의 추억들일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을 묵묵히 지켜보며 한 남자의 삶을 온전히 보듬어 주었던 아내의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그녀가 희구하던 사랑을 알게 되는 것 역시 어쩌지 못하는 인생의 그러함 일 것이다.

「그는 바람 부는 날이면 종종 공원을 가로질러 호숫가로 산책을 나가 호수에 일렁이는 잔물결을 몇 시간 동안이나 바라보곤 했다. 호수의 물결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로운 무늬를 그리며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불어오는 것은 한줄기 바람에 불과해도 마치 수천 줄기의 바람이 거울 같은 호수 표면을 때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방에서 바람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장관이었다. 너무나 가벼운, 어디서 불어오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바람.」

호수의 물결이 만들어내는 종잡을 수 없을 정도의 다채로운 무늬, 그것은 한줄기 바람으로 시작되지만 인생에 무수한 변주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바람에 우리의 삶은 비록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풍요로운 것일 것이다. 비단의 부드러운 관능적 이미지와 아련한 사랑의 열망이 세상을 스쳐지나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에 담겨 가을의 정취 물씬 나는 낭만적 향기로 물들인다. 어느 가을날 인적 없는 호숫가를 거닐며 무심한 듯 수면을 바라보는 나를 떠 올리게 된다. 내 사랑들을, 그리고 닿을 수 없는 인생을...

짧은 문장으로 구성된 한 편의 낭만 시(詩)같은 이 소설이 그리는 인생의 이야기에 젖어들어 한동안 빠져나오고 싶지 않은 심정에 머문다. 『Silk(비단)』란 제목으로‘키이라 나이틀리’, ‘마이클 피트’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모양이다. 영상에 담긴 이 비릿한 사랑과 욕망과 삶의 이야기도 나를 유혹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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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거미
티에리 종케 지음, 조동섭 옮김 / 마음산책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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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독특하게도 두 개의 서체로 기술되어 있다. 굵은 서체로 써진‘너’에 대한 이야기와 보통체로 써진 시간의 흐름에 따른 유연한 서사는 제각기 다른 길을 걷는다. 어떤 연결점도 없어 보이는 서로 다른 인간들만 보인다. 단지 폐쇄된 공간에 어떤 인간이 길들여지고 있다는 막연한 유사성만을 어렴풋이 느끼게 될 뿐.

누군가가 쫓기고 그 집요한 추적 끝에 생포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기까지는 성실한 집중력이 요구된다. 그리고 그 까닭도, 또 왜 동물실험을 하듯 사람을 매어놓고 길들이는 작업처럼 보이는지도 암흑을 더듬듯 오리무중이다. 이러한 구성과 추리기법은 꽤나 낯섦에도 신선하고 매력적이다.

저명한 성형외과 의사인‘리샤르 라파르그’와 호젓한 그의 저택이 그려진다.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이브’가 있는 2층 방에서는 불빛과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평온하다기보다는 어둠과 석연찮은 기운이 덮여있으며, 역겨운 고통마저 느껴진다. 정신병원에 갇혀있는‘비비안’의 병문안, 이를 안타까워하고 애틋해하는 리샤르, 광기에 젖어있는 비비안을 병문안 한 이후에는 여지없이 이브를 잔혹한 변태매춘에 내몰고 그 학대받는 장면을 옆방에서 응시하며 리샤르는 쾌감을 맛본다. 그러나 이 행동의 이면에 감추어진 진실을 알아차리고 연민을 보내기 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하다.

또 하나의 시선은 은행털이 중 경관을 살해하고 도주하는‘알렉스’라는 이십대 청년을 쫓는다. 다리에 총상을 입은 채 공개수배를 피해 은둔하고 있는 자.
여기에 굵은 글씨로 써진 소름끼치고 음습한 너에 대한 이야기가 환각처럼 더해진다. 발가벗겨진 채 쇠사슬에 매여 있는 남자. 한 점 빛없는 어두운 지하실에 갇혀 얼굴을 볼 수 없는 자에 의해 2년에 걸친 정신의 개조와 신체적 순응의 집요한 작업으로 길들여진다.
거미줄을 처 놓고 자신은 어딘가에 숨어 엿보며 먹이가 걸려들면 서서히 말아 보관하고 조금씩 먹어치우는 독거미처럼 완전한 무기력 상태로 몰아넣고 사슬에 묶인 먹이를 찾아온다. 이 사악하고 잔인한 괴물을 청년은 '미갈(Mygale: 독거미)'이라 부른다.

동일 시점의 두 시선, 그리고 시점이 역행하는 또 다른 시선, 이렇게 세 시선의 이야기가 점점 급박하게 어떤 실마리를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 이 알 수 없었던 병적이고 기괴한 사실을 야기했던 사건의 실체에 이르면‘복수’, 아비의 끓어오르는 분노와 원한이 있으며, 정신과 육체를 개조당한 청년의 공포와 당혹감, 삶의 좌절에 대한 증오어린‘복수’, 이렇게 두 종류의 복수가 놓여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좌절과 고통, 그것은 범인을 향한 냉혹한 과정으로 이끈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가슴으로 철저하게 진행되는 복수의 절차들, 미갈, 괴물로 변해버릴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에게서 그가 도달하기 위해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목격하게 된다.

복수를 위해 메스를 들이대고, 한 인간의 삶을 온전히 앗아가려 하는 순간, 그 인간 또한 자신을 상실하여야 한다. 이미 괴물이 자신을 대체하기 때문이다. 결국 복수란 고통의 해결이 아니고 새로운 고통의 획득이 되어버린다. 촘촘히 얽힌 거미줄처럼 무수한 암시와 복선들이 직조되어 역겨움과 혐오, 두려움과 경외감으로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감성을 압박해 온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흥분과 강박감이 책장 넘김을 재촉한다. 상식을 뒤 엎어버리는 기이할 정도의 독창성, 그리고 수용하기 버거울 정도의 잔혹과 사악함과 세련미 넘치는 우아함까지 아울러 갖춰 기묘한 매혹에 빠져들게 한다. 흔해빠진 영미식 복수 추리극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환상적 미묘함이 있다. 소설 읽고 행복했다는 느낌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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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커이 지음, 허유영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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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중국의 개방화와 자본주의 물결을 거세게 흡입하고 있는 상징적 도시인 선전(深圳)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가부장적이고 남성 우월적인 전통과 서구의 개인적 자유와 평등적 사고는 사적(私的) 영역에서 수많은 잡음과 갈등, 신념의 혼란을 초래하고 있을 터이다. 특히, 사적 영역 중에서도 가장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는 성(sex)과 젠더(gender), 그리고 사랑의 가치에 대한 변화가 일으키는 사회적 파장은 결코 간과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이 중심에 서있는 여성의 성적 개방화를 비롯한 성적 지위의 생태변화는 필연적으로 기존의 남성 중심의 성적 권력관계를 구성하는 결혼제도는 물론 각종 남성 중심의 성문화와 사회적 기율, 제도적 장치들과 충돌하게 된다. 이는 성(性)을 사적 영역에만 머물 수 없게 하는 사회적인, 공적 영역의 문제로 견인되게 한다.

작가‘성커이’는 이러한 성 권력의 변화가 오늘의 중국사회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성 권력의 약화를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남성들은 이 새로운 성 질서에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 것인지, 또한 신장된 성 권력을 가지게 된 여성들은 또 어떻게 조화하고 균형을 갖추어 나아가야 하는지를 조명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수동적 성으로서의 여성은 더 이상 남성을 기다리는 억압된 성으로서의 여성으로 남아있지 않다. 자신의 감성과 욕망을 실현하는데 적극적이고, 사랑이 충족되지 않는 결합은 언제든지 털어버리고 해체시켜버린다. 이러한 새로운 섹슈얼리티에 기초한 사랑관은 미처 적응하지 못한 남성들, 여전히 권위적이고 전통적인 남성 우월적 성을 떨쳐내지 못한 남자들을 분노와 좌절,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더구나 섹스는 이제 생산적 기능을 떨쳐버렸다. 성적 결합 없는 재생산이 가능하게 되면서 이제 성은 완전한 해방을 맞이했다고 할 수 있다. 여성에게 섹스는 더 이상 구속이 아니며 자기 사랑의 확인이며 본능적 욕구의 실현 수단일 뿐이다. 결국 남성은 여성을 전통적인 성으로 구속할 수 없게 되면서 그동안 누려왔던 남성의 성적 자유를 일방적으로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즉, 남녀 간의 성적 평등이란 혁명적인 세상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순간에 이르렀다 할 수 있다. 이 엄청난 권력의 변화는 진행 중이며, 완전한 평등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상처 받는 사람들을 가공해 낼 것이다.

여성의 성은 한 남성의 소유로서 존재해왔다. 그러나 이 소유된 성이란 관념은 해체되고 있다. 소설의 여주인공인‘줘이나’는 혼전에 이미 성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정부 관리인‘첸진’과 오랜 성관계를 지속하지만 출신지역이나 신분상의 열등성, 그리고 약자로서의 여성에 대한 차별적 언행이 남자로부터 가해지고 깊은 상처를 받는다. 그럼에도 사랑하기에 결혼한다. 그러나 주방일은 여성의 의무이며 남자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가부장적 권위의식과 수동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요구, 거듭되는 인공유산은 갈등을 심화시킨다. 여기에 재혼한 여성‘위안시린’과, 이혼녀로서 성적 자유를 주장하는 ‘쑤만’이란 여성이 등장하여 기존 남성편향의 성 권력의 모순과 위선에 저항한다.

급기야 줘이나는 태국 여행 중에 만난 변호사‘좡옌’에게서 억눌렸던 자신의 성적 주체성을 발견하고 여성에 대한 섬세한 배려라는 균형 잡힌 매너에 빠져든다. 물론 남편 첸진에 대한 죄의식으로 갈등하지만 이혼을 요구하기에 이르며, 이혼 절차를 밟는 기간 중에 좡옌과의 열정적인 섹스에 탐닉한다. 한편 위안시린이라는 여성은 근육질의 흑인과 잠자리를 통해 눌렸던 욕정을 해소하며, 쑤만은 여러 남자들로부터 구속받지 않은 자유로운 성을 추구한다.
이에 대비하여 사업적 접대와 출장 등에서 매춘 여성들과의 성 관계를 가진다던가, 사회의 우월적 지위를 통해 성 접촉을 하는 위안시린의 남편을 통해 기성 사회가 남성 중심의 성 환경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줘이나가 그녀의 정부(情夫)인 좡옌이 출장 중에 여성으로부터 마사지 서비스를 받은 것을 계기로 감정적 충돌을 일으키는 것도 이러한 왜곡된 성의 구조를 강조한다.

여기에 더해 작가는 의미심장한 문제를 제기한다. 여성의 성적 지위가 향상됨으로써 위협받고 있는 결혼제도가 그것이다. 오늘날 서로간의 사랑이 의심되고 확인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바로 이혼이란 절차로 이어지고 가족이 해체되어버린다는 점이다. 그 의혹과 불신의 원인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줘이나의 경우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푸념이자 남편에 대한 조롱인데, ‘성적 무능력’, 즉 여성의 성적 주도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남자들의 자기중심적 성 관념에 대한 불만이 도사리고 있다. 위안시린이나 쑤만의 불만도 여기에 기초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나 오늘날 여성들의 사회진출, 직업인으로서 경제적 독립은 물론 오히려 남성보다 우월한 경제적 지위를 가지거나, 가질 수만 있다면 굳이 결혼이란 제도의 구속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줘이나의 경우 정부인 좡옌의 도움으로 직업을 유지하고 있어, 그녀에게 첫 성 경험을 안긴 남자를 만나 완벽한 성적 희열에 도취되어 있음에도 좡옌과의 이별을 망설이는 것이나, 쑤만의 높은 경제적 능력이 남자들과의 잠자리를 주도하는 것이 그런 예이다. 결국 이처럼 여성의 성적 지위 향상은 기존의 남성 우월적 성 권력에 의하여 짜여 진 사회 시스템의 재편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처럼 변화된 섹슈얼리티에 대해 남성들의 인식전환은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양상을 전해주는 사건이 있는데, 성병에 걸린 위안시린과 그녀의 남편‘마샤오허’와 사이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이다. 만취한 위안시린이 남편에게 외도한 사실을 말하고 그래서 성병에 걸렸음을 고백하는 것인데, 이것은 신뢰의 배반이라고 길길이 뛰며 이혼을 요구하는 구실이 된다. 그러나 이혼합의 시간을 지연시키던 위안시린은 종합검진결과 성병의 증세가 나타나지 않자 삼십만 위안을 요구하며 남편의 겁박을 오히려 역공한다. 공장운영을 하는 마샤오허로서 이러한 거금은 사업의 파탄을 의미하며 아내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구걸하는 위치로 역전되는 것이다. 이때 위안시린이 하늘하늘한 잠자리 가운을 걸치고는 눈길한번 주지 않고 육감적인 몸을 흔들며 성의 우월자로서 남편을 냉담하게 외면하는 것은 바로 권력 재편의 멋진 상징적 장면이 된다.

자칫 성 권력의 재편, 남성과 여성의 성적 평등을 말하기 위해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한 성의 추구를 말하는 것으로 왜곡될지도 모르겠다. 실로 오랜 인간의 역사 속에서 남성의 지배적인 성 구조와 종속된 성으로서의 여성에 대한 관념으로 굳어진 것들을 변경하는 것은 결코 수월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성을 소유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존중하고 독립적 주체성을 지닌 동등한 성으로서 인식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고 성적 본능의 추구만이 인간의 삶 전반이나 결혼과 가족과 같은 인류지속적 본질적 가치들을 지닌 제도들을 파괴할 도덕적 우위를 지닐 수는 없는 것이다.
소설의 대단원에 이르러 줘이나가 첸진 어머니의 임종에 같이 함으로써 가족이란, 부부란 어떤 것인지, 때론 갈등하기도 하지만 사랑하고, 위로하며 위로받기도 하는 것, 행복이란 고통과 함께하는 것임을 자각케 하는 것이다. 이에 더해 비로소 첸진 역시 성적 평등자로서 줘이나를 존중하고 이해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섹슈얼리티 시대에 요구되는 균형과 조화의 성을 발견케 한다.

이 소설은 분명 문제작이다. 등장하는 여인들의 성적 일탈을 둘러싼 당위에 대해서 엄청난 반향이 있을 것 같다. 또한 남성들이 당연시하는 오늘의 성 구조와 체계에 대한 모순이나, 부부간, 가족 내에서의 남성의 역할에 대한 논의도 분분할 것이다. 특히 결혼했으면 평생 함께 살아야 한다는 식의 전통적 결혼관계가 배우자와의 사랑이 없다면 미련없이 결혼을 깨어버린다는 당사자의 판단에만 의존하는 식의 내적인 인간간계인 '앤서니 기든스'가 말한 '순수한 관계(Pure Relationship)'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도 첨예한 물음이 될 것이다.
줘이나의‘평평한 가슴(小說 原題: 水乳)’이란 현대의 외형적 조형미에 대한 반감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새로운 욕구와 새로운 불안들을 만들어내는 오늘의 개방된 기획사회를 탁월하게 성찰해내고 있다. 소설적 완성도는 물론 주제의식과 가치 제안적 역량이 그 어느 중국 문학보다 높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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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쇼크 - 고령화, 쇼크인가 축복인가
테드 피시먼 지음, 안세민 옮김 / 반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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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엄마 뱃속부터 늙기 시작한다. 모든 인간은 죽음이 인접한 회색지대를 통과해야 한다. 그런데 이 회색지대가 현대문명이 제공하는 각종 환경조건에 의해 길어지고 있다. 즉, 전 지구적으로 인간사회가 ‘고령화’되고 있으며, 급기야는 ‘고령사회’가 되고 있다는 말이다. 인구구조가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것인데, 노년 인구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노년 인구가 많아진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노인에 대한 고정관념, 특히 부정적 인식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능하고, 무기력하며, 느려터진데다 기억력조차 흐리고 탐욕스럽고 더럽기까지 하다는 혐오와 경멸의 의식이 그렇다. 평균수명은 지속적으로 늘어나 지금의 10~20대는 100살에 육박하는 삶을 살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들은 인생의 절반을 사회에서 배제된 채 이러한 고정관념에 의해서 소외된 회색의 세월을 살아가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왠지 노년의 삶에 대한 재정의와 재구성이 필요한 것 같지 않은가? 이러한 고정관념에 기초한 사회인식과 공공정책, 경제적 행태는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 오늘의 사회, 특히 세계에서 손꼽히는 급속한 고령화가 진행되는 한국사회는 엄청난 충격과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전 지구적 과제가 된 피할 수 없는 고령화의 흐름을 어떻게 대처하고 활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그야말로 다각적인 방향에서 폭넓은 방법들을 단지 머리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찾아내고 있다. 노년의 삶이란 무엇인지, 고령화 사회로의 이행에 따른 사회경제적 구조의 변화란 어떤 것인지, 이로인해 야기되는 정치사회적, 경제적 문제는 무엇인지, 그 문제들에 직면한 국가와 지역사회들은 실제로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그리고 여기에 도사리고 있는 노동자와 기업가, 여성과 남성, 자식과 부모, 청년과 노년의 갈등과 해결을 위한 지향점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국가별 실례와 일화를 통해 심층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노년에 대한 인식과 고령화 사회의 현실


고령화라는 전 지구적 시스템의 문제는 회피하거나 그 어떤 처방을 통해 중단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대처 방법만 있을 뿐이다. 노년에 대한 이해와 인식은 극명하게 나뉜다. 쇠락인가하면 새로운 욕망의 전환기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특히 경제적 능력을 기반으로 정신적 육체적 능력을 가진 노인들이나 나이로 자신들의 능력을 규정하는 인식에 저항하는 자들은 노년을 마치 활력의 시기로 이상화시키는 위험한 주문을 외쳐댄다. “60세는 새로운 40세다!”라는 터무니없는 구호를 외치면서. 그러나 대다수의 노인은 세계 최고의 부국인 미국의 은퇴자들 절반이상이 50,000달러(한화 6,000만원)도 못되는 재산을 가지고 사회에서 이탈된다는 통계나, 65세 이상 노인 중 30% 이상이 빈곤 수준을 밑도는 생활을 한다는 영국의 예처럼 점점 가난해지고 생활수준이 악화된 상태가 된다는 것이 현실이다. 하물며 사회보장시스템이 열악하고 미비한 한국사회의 심각함은 거론할 여지도 없다.

이러한 배경에는 나이에 대한 고정관념이 작용하기 때문인데, 사회가 노인을 기피하는 노인 혐오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은 항상 실제보다 젊다고 생각하며 노년은 자신과 무관하다는 생각에 지배당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소위‘공포관리이론’에 기초하고 있는데 노인이라는 죽음의 공포를 피해야 한다는 생래적인 종교적 관념에 포획되어 있으며 이를 회피하려는 원시적 인지활동 탓이라 하는 모양이다. 물론 이러한 고정관념을 벗어난다는 것은 인간의 중추적이고 본원적 인지활동이기에 쉽지 않은 일이지만 고령화라는 새로운 현상을 마주하게 된 인간은 이러한 인지적 본성을 변화시키려는 어떠한 노력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노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나이든 자를 생산에서 배제시키고 지위를 낮추며, 그들의 역할을 폄하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우리사회는 이보다 더욱 잔인하다. 아마 어떤 기업이든지 50세 이상의 근로자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산업화와 근대화라는 변화중심의 트렌드에 전통이 밀려났고, 경험적 지혜가 창조력과의 대결에서 쫓겨났다. 또한 배금주의를 부추기는 소비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정책은 도덕적 신뢰성보다는 개인적 욕망의 정당성을 우위의 가치로 둠으로써 나이든 사람들은 일 할 곳을 잃었다. 이러한 도덕적 진공 상태는 고령화 시대에 정작 요구되는 공동체의 연대와 가족적 결합을 파괴함으로써 노인의 부양, 사회안전망의 확충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또한 그들에게 재정적 빈곤과 사회적 지위의 하락을 가속화시킴으로서 오히려 사회적 부담을 가중시키는 역효과를 낳고 있다. 물론 복지포퓰리즘이라고 필수적이고 절대적인 사회보장체계를 경멸하는 기득권을 차지한 부유층은 부담을 회피하니 그저 빈곤해진 대다수의 중노년층을 방치하면 될 걸 뭐가 문제냐고 할지도 모를 일이다. 과연 이러한 무관심과 회피로 사회가 유지될까? 그리고 보수 특권층과 자본가들의 탐욕이 유지 될 수 있을까?

이것은 근년에 발생하는 중노년층과 청년층이 동일한 자원을 나눠가지려고 경쟁하는 현상들에서 그 우려스러움을 발견할 수 있다. 청년 실업의 지속과 일자리를 잃은 4,50대 중년층이 사회 초년병에 돌아갈 일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것이다. 서로 생존하기 위한 불가피한 행동인데, 여기에는 사회 및 경제시스템, 신자유주의 지향 정부의 무책임과 몰지각, 그리고 과잉 탐욕이 도사리고 있다. 결국 임시직, 계약직, 파트타임직의 저임금의 초래로 중산층은 저소득층으로 이탈되어 재빠르게 빈곤층이 증가하는 빈곤국의 소득구조로 재편되고 있다. 엄청난 극소수의 부자와 대다수의 빈자가 사는 불평등사회의 고착화로. 또한 직업을 구하지 못한 젊은이들의 지속적 실업은 사회 활력을 저하시키고, 고령화 사회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부담을 악화시킬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양상은 경제적 압박으로 인해 결혼이 늦춰지고 출산을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인구보충율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수준에 머물 것이다. 사례로 등장하는 스페인이나 일본의 젊은이들처럼 가임 여성들의 자궁이 계속 비어있는 상태가 될 것이다. 이것은 국가 생산력을 저하시키는 직접적 요인으로 이어지며, 가뜩이나 부양해야할 인구가 늘어난 상황에서 그 사회적 부담의 한계로 매우 곤란한 지경이 될 지도 모른다. 한국사회의 다자녀 지원금 제도는 부유한 계층에게 부를 몰아주는 방식이다. 결혼과 출산을 미루고 할 수 없는 대다수의 젊은이들, 즉 가난한 대다수의 시민을 위한 정책과는 멀어도 한 참 먼 책략일 뿐 이다. 근본적인 대책, 젊은이들이 일 할 수 있는, 그들이 중산층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여기서 시작되지 않는 정책은 결코 이 사회가 마주하게 될 고령사회가 야기하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고령자들의 사회 - 선진국의 실례들

책은 고령화 사회를 맞이하거나 고령자들로 인해 야기되는 현상을 스페인, 미국, 일본의 실례를 통해 산업구조가 어떻게 재편되어야 하는지, 고령자들을 돌보는 사회적 시스템과 이로인해 유발되는 사회적 현상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고, 고령자들을 어떻게 처우하여야 하는지, 그리고 발생하는 문제점들 마다 어떻게 대처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중대한 시사를 던져준다.

미국 남부 플로리다주의 ‘새러소타’라는 노인인구의 비율이 절대적으로 높은 지역을 예로 들고 있는데, 도시 인구의 대다수를 점하는 노인들의 생활양태로 인해 도시산업구조가 어떻게 변화하고 형성되는지, 그들이 필요로하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해준다. 지방정부와 중앙정부가 그네들의 경영방식과 공공서비스에 대한 기존의 체계를 재검토하여야 하는 이유들이라 할 수 있다. “비용이 아무리 바싸더라도 삶은 여전히 인기가 있을 것”이라는 말처럼, 회색지대에 있는 사람들은 건강한 삶을 추구한다. 그들은 새로운 관계를 맺어 삶을 재구성하고 싶어하고, 신체활동을 위해서 학술강의는 물론 예술수업에 참여하려 한다. 노년의 속성인 비인간화와 비가시화, 주변화에 도전하려하며, 살아있는 동안만큼은 최상의 건상을 유지하려 한다.

또한 자녀들에 의지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대안을 선택하려 한다. 이러한 현상은 노화방지 치료 서비스를 활성화하고 각종 질병의 치료를 위한 의료산업을 산업의 중심영역으로 변화시키며, 그들의 인지능력과 재정을 보호하고 지원하기 위한 로펌, 회계법인, 건강관리 부문을 진작시킨다. 또한 그네들의 정신과 육체적 건강을 위한 사회적 네트워크의 요구로 인해 교향악단, 극장, 아트센터가 재배치되며, 간호학교, 홈케어 산업이 부양된다. 지역과 이웃이라는 공동체를 떠나려 하지 않는 고령자의 특성은 건강과 장수에 유익하며 따라서 이들 공동체를 지원할 시설을 확충한다. 이것이야말로 신체의 마모를 촉진시키는 외로움을 차단하는 효과적인 사회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미국의 사례는 고령화 사회에서 고령자들을 위한 정책과 산업구조를 편성하는 방향을 읽을 수 있게 해준다. 한편 스페인의 경우는 고령자들에‘돌봄 서비스’의 동향과 정책의 일면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 보살핌이 필요한 인구는 노인인구 15명중 1명 꼴이라고 한다. 도와주는 사람의 비율도 높아져야 함을 의미한다. 게다가 이 인구는 계속해서 증가할 것으로 추정되고, 역시 신생아의 출산율이 우리처럼 극도로 낮은 상태이다보니 생산 가능인구이자 노인 부양인구의 감소로 고충을 겪고 있다. 이들은 남미 개발도상국의 이민자들을 받아들여 그 부족한 인력을 충당하고 있다. 한국사회도 외국인 거주자가 백만명을 넘어섰다고 하지만, 단순한 산업노동 인력으로서만이 아니라 궁극적인 한국사회의 동력원으로서 적극적인 유입정책을 검토하여야 할 것 같다.

우리 정부도 고령화를 대비한 정책의 일환으로 대대적인 사회복지사의 양성이나 간호조무사 등 의료서비스 인력을 확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기능적 인적자원의 충당으로 고령화 사회의 대처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자연 발생적인 은퇴자들의 도시를 위한 기획이라든가, 사회복지 및 요양시설과 그 운영 및 지원시스템의 확충, 사회적 부담을 완화할 수 있는 고령자들의 일자리 창출, 나아가서 50대 중노년층의 조기은퇴를 종용하는 사회의 구조적 인식의 변화를 통한 직업의 안정성 확보 등 근원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정책들이 조속히 시민적 동의를 얻어내고 실천되어야 할 것이다.

우린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교조적 신봉으로 내가 중심이라는 개인적 욕망만의 추구를 지향해왔다. 물질적 풍요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제공하는 정부의 선전으로 가족과 공동체의 공감이 결여되고 파괴되었다. 이는 돌봄을 받아야 하는 고령자들이 급격히 증가함에도 사회보장시스템이 열악하며, 개인의 능력으로만 이를 극복하기를 바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전통적인 부양의무를 사라져 버리게 한 꼴이다. 뒤늦게 물신주의에 경도된 이웃나라인 오늘의 중국사회가 과거 유교적 전통을 상실하여 가족간의 부양정신을 상실한 채 허둥거리는 것과 상통하는 것이다. 이 도덕적 진공상태를 메우기 위한 정신적 부패를 시정할 제도적, 정책적 방안의 마련도 시급한 과제라 할 것이다. 부모의 부양의무가 옛날 남의 얘기처럼 되어버린 오늘의 한국사회는 그나마 더욱 복원되어야 할 미덕일지도 모른다.

고령화 사회가 우리에게 안겨주는 과제는 우리만 마주하는 것이 아니다. 전 지구적 문제이다. 따라서 그 대응책은 여러 선진국들의 대처에서 우리가 실천하기 유용한 정보와 정책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러한 의미에서 종합적이고 실천적인 실례들을 풍부하게 제공하고 있다. 취업과 실업의 문제, 산업의 문제, 노년의 생물학적, 심리적 의미와 경제적 사회적 파급의 문제, 공공정책과 관점의 변화에 대해서와 같이 총체적인 고령화 사회의 이해를 갖게 되는데 더없는 가이드가 되어준다. 회색지대의 연장이 우리들에게 쇼크가 될지, 아니면 인간사회의 새로운 전환이 될지는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달려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고 시민적 연대감을 되찾아 모든 사람들이 신뢰하고 안심하며 살 수 있는 건강한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정부 정책자들, 입법기관의 입법자들, 경제 및 공공서비스 기획 및 일선 행정관료들, 그리고 사회복지기관 관련자들이 관심을 기울여 읽어주었으면 하는 기대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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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면의 도시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5
정진열.김형재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린 각종 권력이 만들어 낸 무수한 장치와 제도, 법규 같은 시스템에 그 어느 때보다 잘 길들여져 살고 있다. 더구나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물질의 풍요와 소비, 향락의 물결은 이러한 시스템에 도취케 하여 마치 자유와 평등에 어떠한 제약이나 폭력성에 노출되지 않은 듯한 착각으로 몰아넣는다. 약삭빠른 이들은 자본과 권력의 하수인이 되어 혹여 권력과 부의 대열에 승차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이 시스템의 강화에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것이 마침내 자신과 자신의 가족과 동료, 이웃, 그리고 타인들을 향한 잔혹한 비수인 것을 알지 못한 채.

이 책은 일상의 삶을 덮어 인간 개체를 지배하는 바로 이러한 “시스템이 제공하는 기성화된 포맷의 균열된 틈에서 새어나오는 정보들을 재가공하고 재배열”하여 그것들이 어떻게 개인들을 좌절케 하고, 권력을 행사하며 삶의 불평등성을 심화시키는지, 또한 개인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자신들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는지, 그 실체를 드러내는 작업을 수행한다.
특히 CCTV, 지도, 명함, 전단, 다이어그램, 주민등록증, 인터넷사이트의 이미지, 이정표 등 시각적 언어들의 조각들을 재료로 하여 지배 시스템이 은폐한 새로운 의미들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신선한 기획으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하겠다.

편리성이나 삶의 안전성을 내세우는 시스템으로서의 도구인 CCTV나 신용(교통)카드를 생각해 보자. 맨해튼의 CCTV(감시카메라) 분포도가 예로 등장하는데 과연 이것이 범죄예방이라는 안전한 삶을 위한 도구로 설치되고 작동되고 있었을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감시하는 자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터무니없는 가정을 한다. 자신이 노출되고 감시당하며 추적당하는‘보이는 자’로서의 시선은 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까? 결코 우리 대다수의 시민들은 감시당하는 자들이다. 이 분포도를 분석한 결과 맨해튼의 대량 자본소유자들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결국 권력과 자본을 지키기 위해 대다수의 시민을 감시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지 시민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신용(교통)카드는 우리의 행선지와 이동경로, 시간, 먹은 것, 구매한 것 등 개인의 삶을 유리알처럼 드러내고 이것은 자본(금융)과 국가(공권력)가 개인을 구속하고 이용하는 근거로 활용 한다.

게다가 지문과 개인의 거주지, 주민번호등 신상내용이 기재된 주민등록증은 국가나 공권력 등 소수만이 접근하는 정보가 아니라 누구나 요구하고 이용하는 일상적 자료가 되어버림으로써 국경너머까지 접근을 허락하는 지경에 이르러 있다. 우리 사회가 개인, 프라이버시 침해에 대해 얼마나 무심한지, 사적 자유를 소홀히 취급하는지를 보여주는 한 징표라 할 수 있다.
이러하다보니 전화번호와 메일주소를 필요로 하는 성매매 비즈니스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까지 깊숙이 침투하는가하면, 노출된 개인을 등급화하여 신용점수를 매기고 개인의 정체성을 그들의 잣대로 결정해버린다. 사람들은 이제 시스템이 쳐놓은 제한된 그물을 벗어날 수 없다. 그 범주화된 경계 내에서 시스템의 입맛에 맞는 행위만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외에도 익명의 누군가가 작성하여 인터넷에 올린 조중동언론과 재벌의 혼맥도라던가, 막후실력자, 밤의 대통령, 배후 세력, 침묵의 카르텔 등 표면적 사실 이면에 긴밀하게 얽히고설킨 인적네트워크를 그린 다이어그램같은 시각언어들은 완전경쟁 시스템 하에서 공정한 경쟁을 한다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기만과 불온한 불평등을 읽어내게 한다.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진 대기업이라는 거대 자본이 어떻게 가격담합과 독과점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대다수 시민의 경제를 착취하는지 이 구조도가 한 마디로 정리해 주는 것이다.

한편, 이 책의 표지그림인 시청광장의 사진은 소위 소통과 의견 표출의 공간으로서의‘광장’이 탐욕스럽고 부정한 권력에 의해서 어떻게 훼손되는지를 보여준다. 시민의 촛불시위를 방해하기 위해 무장한 시위진압대와 경찰버스로 에워싸거나 광장 개방을 금지하는 작태를 자기들만의 언어로 합리화 한다. 강남권의 압도적 지지로 간신히 당선된 시장은 16차선의 넓은 광화문 거리를 조형물로 가득 채움으로써 광장 고유의 기능과 의미를 상실시키는 작업을 잽싸게 완료했다. 시민의 의사 표현공간을 봉쇄하겠다는 적극적 의지일 것이다. 자동차의 행렬이 그치지 않는 도심의 도로 한복판에 분수를 뿜어 올리는 공공 쉼터를 만든다는 이 천박한 발상, 위선과 기만을 무어라 해야 할지, 게다가 그곳에서 속없이 헤헤대는 인간들을 보는 것은 정말 눈뜨고 보지 못할 짓이다.

시각 언어가 이와 같이 우리에게 은밀하게 그 비밀을 속삭이는 예는 무수하다. 지하철 역사를 안내하는 안내도와 주변지도에서 우린 거대 상업 자본만이 독식하여 시민들의 삶을 온전히 지배하는 양상을 목격하게 된다. 영세지하상가와 주변상가는 이젠 몰락하여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먹고, 마시고, 입고, 놀고, 이동하는 모든 순간을 이들 거대 자본이 지배한다.

이 책은 이처럼 우리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혹은 일시적 흥미로 흘깃 보았던 것들, 그리고 일상적 삶을 에워싸고 있는 무수한 시각적 이미지들, 이 도시가 쏟아내고 있는 수많은 기호들의 이면에 어떤 부정함이 은폐되어 있는지, 그것들의 실질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실체적으로 드러내어 진정한 시민적 자유와 평등, 진실한 삶의 세계를 이해케 하는 또 다른 관점과 방법을 안내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권력과 거대 자본이 얼마나 교활하고 내밀하게 시민의 삶을 훼손하고 있는지 알아야만 정의(正義)로운 사회를 요구할 수 있으며, 말 할 수 있게 된다. 아주 짧은 글이지만 다양한 시각언어들의 실례와 결합하여 효과적인 비판 양식을 제공하는 참신한 기획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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