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김현철 옮김 / 새물결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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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이 질 무렵, 가을의 낙엽이 쓸쓸히 구르는 평온한 호숫가를 바라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왠지 가슴에 아릿하고 시린 무엇이 날아들어 애잔함이 휘감아 도는 듯하다.
삶이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다. 무수한 성취를 향한 여정도, 사랑도, 욕망도...,걷잡을 수 없는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던 정염(情炎)도..., 이러한 것들이 지나가버리고 알 지 못했던, 알 수 없었던 인생의 모습들을 바라보는 그림이, 이야기가 흐른다. 세상을 지나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고 그 아내의 이야기이도 하다.

프랑스의 작은 도시 ‘라빌디외’에 인생의 진실이란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발다비우’란 인물이 발을 들여놓으면서 삶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라빌디외에 견사(絹絲)산업을 일으키려는 발다비우의 권유에 따라 정숙함과 아름다움을 지닌 아내 ‘엘렌’의 지고한 사랑을 받는‘에르베 종쿠르’는 이 사업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소재의 원천을 만드는 근동지역의 수입에 의존하던 누에알에 전염병이 돌면서 돌파구를 찾던 중, 세상의 끝이라고 여기던 일본으로부터 밀수입을 결의하게 된다.
            

소설의 이야기 구조는 인간의 삶처럼 지극히 단순한 반복이자 순환이다. 그러나 이렇듯 일정한 반복 속에 동일한 순간이 존재하지 않듯이 아주 사소하고 작은 우연이 인연과 필연을 만들어내고, 거기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인생의 이야기들이 담긴다. 프랑스에서 아시아의 동쪽 끝으로 가는 여정은 동유럽을 경유하고 시베리아와 바이칼 호수를 지나 중국 국경지대를 거쳐 일본에 이르는 실로 엄청난 대장정이다. 서구로부터 개방 압력이 거세어지던 19세기 중엽의 일본은 누에알의 유출을 차단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라 케이’라는 일본인의 도움으로 누에알을 입수하게 되면서, 그의 곁에 있던 동양의 신비를 간직한 아름다운 소녀의 미소에 매혹된다. 그리곤 동일한 경로를 거슬러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대장정, 밀무역의 여정이 거듭되면서 에르베 종쿠르는 동양의 소녀, 비단결 같이 부드러운 소녀의 감촉과 미소에 빠져든다. 일본의 내전(內戰) 소식이 전해지고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는 장정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욕망이란 열정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 폭풍 같은 그리움의 열병은 지나가기 전에는 영원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이 정염에 고통스러워하는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 엘렌의 심정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마침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장정에 오르는 에르베 종쿠르를 향한 엘렌의 간절함에 묻어난 한 마디에 모두 담겨있다.

“돌아오겠다고 약속해요”

         

그 어떤 장황한 말보다 이 한 마디에 남편에게 휘몰아치는 한줄기 바람 같은 욕망을 뛰어넘는 삶의 관용과 사랑의 진정함이 있다. 그래서 한 남자의 삶의 이야기 속에서 오히려 깊고 곧게 흐르는 여인의 아련한 사랑의 갈망에 더욱 주목하게 된다.
에르베 종쿠르의 온 정신과 육체를 감아 도는 세상의 끝에 있는 소녀의 편지인 듯 한 일본어로 씌어진 7장의 서신에는 여인 엘렌의 절절한 욕망과 사랑의 그리움이 넘실댄다.

「당신은 갑자기 어느 곳에선가 제 입술의 온기를 느끼게 될 거예요. 눈을 감고 계세요. 제 입술이 당신의 어디에 닿게 될 지 알 수 없도록. 눈을 뜨지 마세요. 이제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곧 제 입술의 감촉을 느끼게 될 거예요. 갑자기. ....中略 ... 사모하는 주인님. 지금 이 순간은 영원히 지속될 거예요. 지금으로부터 영원까지.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사람의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것, 그것은 광풍처럼 몰아치던 그 어느 순간들의 아린 사랑의 추억들일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을 묵묵히 지켜보며 한 남자의 삶을 온전히 보듬어 주었던 아내의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그녀가 희구하던 사랑을 알게 되는 것 역시 어쩌지 못하는 인생의 그러함 일 것이다.

「그는 바람 부는 날이면 종종 공원을 가로질러 호숫가로 산책을 나가 호수에 일렁이는 잔물결을 몇 시간 동안이나 바라보곤 했다. 호수의 물결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로운 무늬를 그리며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불어오는 것은 한줄기 바람에 불과해도 마치 수천 줄기의 바람이 거울 같은 호수 표면을 때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방에서 바람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장관이었다. 너무나 가벼운, 어디서 불어오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바람.」

호수의 물결이 만들어내는 종잡을 수 없을 정도의 다채로운 무늬, 그것은 한줄기 바람으로 시작되지만 인생에 무수한 변주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바람에 우리의 삶은 비록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풍요로운 것일 것이다. 비단의 부드러운 관능적 이미지와 아련한 사랑의 열망이 세상을 스쳐지나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에 담겨 가을의 정취 물씬 나는 낭만적 향기로 물들인다. 어느 가을날 인적 없는 호숫가를 거닐며 무심한 듯 수면을 바라보는 나를 떠 올리게 된다. 내 사랑들을, 그리고 닿을 수 없는 인생을...

짧은 문장으로 구성된 한 편의 낭만 시(詩)같은 이 소설이 그리는 인생의 이야기에 젖어들어 한동안 빠져나오고 싶지 않은 심정에 머문다. 『Silk(비단)』란 제목으로‘키이라 나이틀리’, ‘마이클 피트’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모양이다. 영상에 담긴 이 비릿한 사랑과 욕망과 삶의 이야기도 나를 유혹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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