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역열차 - 144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
니시무라 겐타 지음, 양억관 옮김 / 다산책방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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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주인공이 그들의 삶의 목표라 할 수 있는 욕망들을 추구하며 내외적인 적대적 요소들과 무수한 갈등을 일으키고, 그것에 도달하려는 용기와 좌절, 그리고 희망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을 통해 우린 인생의 또 다른 진실을 찾기도 하고, 마음의 정화를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은 이러한 현대소설의 양식과 사뭇 다른 느낌을 갖게 한다.
자기 삶에 대해 이렇다 할 의욕도, 희망도 없어 보이고, 삶의 균형을 깨는 요인들이라 이해하기에는 열악하기 그지없는 것들에 증오하는 태도의 인물로부터 고착화된 의기소침과 좌절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열패감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인지 쓸쓸하고 우울하다는 분위기 이상의 무엇에 도달하기가 여의치 않다.

마치‘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인간 실격』의 주인공이 부활한 것만 같은 인상을 받는다. 작가 자신의 신변에서 일어난 일상의 이야기를 수기처럼 써내려간 사소설(私小說)의 리얼리티가 극적 재미를 기대했던 독자를 배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개인사에서 인간과 세상의 보편적인 무엇을 발견하거나 공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사실 그것이 교감하는데 낯설다는 것이다. 또한 대단원을 향한 휘몰아치는 갈등과 그 해결이라는 재미와 감동이 있어야 하지만 사소설로서는 작가 인생의 대전환이나 혹은 죽음과 같은 극적인 상황에서나 가능한 것이니 이것이 박탈당한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이 수월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은근히 시선을 붙잡는 마력이 있다.

1.
마흔이 넘은 작가가 자신의 청년기 기억을 술회하고 있다. 성범죄자인 아버지, 가족에 보내는 사회의 시선, 그것은 수치심과 굴욕감에 포획되게 하고 보통사람들의 사회, 그 평범함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된다. 가까스로 중학교를 마치자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사회란 것은 막노동 이외에는 존재치 않는다. 항만에서 냉동 창고 하역작업의 막 일꾼으로 생활을 견뎌가지만‘간타’란 이 인물은 이조차 시큰둥하다. 하루 노동하곤 끼니를 구할 돈이 없어지면 다시 노동에 나선다. 그에게 목표란 것, 삶의 균형이란 것의 의식이 없다. 그러니 깨지고 말고 할 평형 상태란 것이 없다. 먹고 마시고 싸는 원초적 본능의 충족만이 전부다.

세상에 대한 낙심과 자신에 대한 혐오에 기초하는 좌절은 이렇게 희망의 기대를 지워버린다. 이러한 간타의 일상이 하역작업에서 동갑내기의 전문대학생을 만나면서 변화하는데, 타인과의 친근한 대화에 굶주렸던 그로서는 그를 만나는 즐거움으로 성실한 일용직 노동자의 대열에 서는 것이다. 이것은 술과 매음굴을 찾을 수 있는 금전에 대한 약간의 여유를 덤으로 주고, 창고 내에서 일하는 자의 점심 특혜와 지게차 운전기능을 습득할 기회가 된다. 그러나 희망을 제거한 인간에게 이를 실천할 용기나 열정이 있을 리가 없으니, 그에게 주어질 것은 다시금 단순 하역 노동자로의 복귀다.

한편 전문대생의 여자 친구인 대학생이 추구하는 삶의 목표가 그에게는 지적 허영이라는 역겨움으로만 인식되고, 열등감을 일깨운다. 이것은 그와 그들을 구분하는 일종의 구별 짓기로 이해되고 분노를 터뜨리는 구실이 된다. 이 사건은 유일한 친구를 잃어버리는 계기가 되고, 보통 사람들의 무리 속으로 다가 가는데 실패했다는 말이 된다. 열아홉 살 중졸 학력의 청년이 성범죄자의 아들이란 무게를 떨쳐내고 세상으로 나오는 것, 그가 삶의 욕망을 찾으려고 단단한 세상 경계의 벽을 깨기까지에는 평범한 우리들이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고역의 시간이 필요 했을 터이다. 그러나 여전히 하루벌이 일용 노동자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에도 그의 작업복 뒷주머니에 지니고 있던 사소설 작가 ‘후지사와 세이조’의 작품 복사물이 어느 순간 깨어났기에‘고역 열차’라는 신산한 삶의 얘기를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었을 것이다.

2. 
소설 『고역 열차』는 이처럼 열아홉 살 하역노동자로서의 삶의 기억인 「고역 열차」라는 미완의 이야기를 완성하려는 듯이 마흔이 넘은 사소설 작가로서의 삶인「나락에 떨어져 소매에 눈물 적실 때」라는 제목으로 비로소 욕망에 갈등하는 보통사람의 세상에 들어선 자를 얘기한다. 문학계의 파벌이나 인정이 개입하지 않은 그야말로 공정한 심사로 정평이 난 문학상으로서‘가와바타(川端)상’을 상정하고, 자신의 작품이 최종 후보작에 오르자 그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동종업자들의 자의적 평가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는 신념에도 불구하고 수상의 영광에 대한 기대를 떨쳐내지 못하는 헛된 집착의 비참함에 사로잡힌 자신에 대한 혐오, 자기부정과 합리화의 갈등을 보여준다.

달관한 척하면서 체념을 강요하지만 영예에 대한 희망, 그 명성을 얻지 못하면 일생 후회할 것만 같은 안타까움에 시달리는 것인데, “무작정 대접 받고 싶었다. 수많은 여성 독자들의, 설령 일회성의 무의미한 소통이라도 좋으니 어쨌든 하룻밤만은 속 일 수 있을 만한 인기를 얻고 싶었다.”는 고백은 코끝을 찡하게 울리는 감동을 준다. 소설가로서 인생을 마치고 싶어 하는 사소설 작가의 염원, 지니지 못했던 삶의 균형을 향한 작은 욕망이 현실의 아쿠타가와(芥川)상으로 전해졌으니 그가 비로소 세상에서 갖게 된 희망, 꿈의 실현으로 괜스레 덩달아 긍정으로서의 삶을 느끼게 된 것처럼 고무되는 것이다. 욕망 없는 세계에서 그를 건져준 사소설의 세계, 은근히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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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힘 - 매혹적인 스토리텔링의 조건
이창용 외 지음 / 황금물고기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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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힘’을 말하는 책이 혹시라도 정작 이야기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낭패일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이 문자 그대로‘이야기’의 위력이 무엇인지 제대로 설득하고 있지 못했다면, 그래서 책에 몰입케 하는 데 실패했다면 아마 소감을 남기려는 의지는 저 멀리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아니 외려 이『이야기의 힘』이 전해주려는 우리의 근원에 대한 이야기에 홀딱 빠져버렸다는 말이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야기에는 어떤 힘이 있기에 이렇게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일까? 이 책은 바로 이 이야기란 사람에게 대체 무엇이며, 모든 인간으로부터 공감을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조건, 나아가 그런 이야기들이란 어떤 형식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이다. 스토리텔링의 상업주의적, 소위 마케팅 테크닉을 전달하는 비즈니스 계발서 따위는 아니다. 물론 이야기의 힘을 응용하여 명성이나 성공적인 부를 쌓은 브랜드, 상품, 서비스의 사례를 볼 수 있으니 ‘이야기’의 총합적 개론서쯤이라 해야 할까?

이야기란 무엇인가? 왜 우리들은 이야기에 빠져드는 것일까? 이야기가 인간에게 필요했던 것은 기억을 잡아두고, 대화의 거리와 말의 벽을 넘어 다른 사람의 가슴으로 스며들어 마음을 변화시켜주며, 추상적 설명보다 구체적 이야기가 훨씬 이해하기 수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인간에게 전하려는 것, 삶을 풀어가는 것, 삶을 이해하기 위한 장치로서 이용한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가 인간에게 공감을 일으키고 마음과 행동의 변화를 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이 우리의 귀와 마음을 열고 매료되는 이야기, 훌륭한 스토리는 어떤 조건과 양태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이야기일 때 비로소 이야기 고유의 힘을 발휘한다.
                 
“이야기는 욕망이 주도한다.”는 시나리오 닥터인‘로버트 맥기’의 말은 한 문장으로 정련된 이야기에 대한 최고의 정의로 와 닿는다. 인류가 수천년간 이야기를 통해 설명하고 납득시켜온 것은 바로 인간은 균형을 잃었을 때 그것을 되돌리고자 분투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 깨어진 균형을 찾기 위해 무엇을 필요로 하고 갈망하는지, 즉 욕망의 성취를 향한 여정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야기 속 인물이 그 깨진 균형을 찾기 위해, 자신의 부정적 내면이 되었든 외부의 그 무엇이 되었든 적대적 환경과 맞서 싸우며 삶의 본질을 깨닫고 용기를 얻으며 희망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변화하며 새롭게 태어나기도 한다.

이야기의 인물이 추구하는 목표, 그 욕망의 대상은 독자, 관객, 청중들 각자가 “자기 삶의 균형을 되찾기 위해 원하는 바로 그것의 은유인 것”이다. 결국 이야기의 재료는 주인공이 끊임없이 바라는 욕망과 그 반대세력 사이의 간극이다. 우린 이 간극, 세상이 내어주지 않는 욕망 성취를 방해하는 힘과의 분투에 매혹되며 몰입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 속에서 방향을 찾고, 알려주지 않은 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우리들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이야기에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도 있으며, 정체성을 확인하게 하고, 현실 속에서 이루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도 불러일으킨다. 우린 이야기를 통해 무엇인가를 공유하며 함께 참여하고 변화를 가지려 하는 것이라 하겠다.

아마도 이 책의 백미(白眉)라 할 것인데, 이처럼 인간 삶의 균형을 회복하려는 그 수많은 형태의 삶의 이야기들을 훌륭하게 쓰거나 구성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 만들기’라는 소설, 시나리오, 그 밖의 스토리에 대한 단계별 작법이다.
한편의 단막 시나리오를 중심으로 하여 유명 영화, 방송 드라마의 사례를 곁들여 가며, 삶의 균형이 무너진 주인공이 그 균형을 회복하고자 여려 적대적인 것들과 맞서면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해 나가는 장면들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주인공의 성격 설정에서부터 시간과 배경의 설정, 삶의 적대자와 장애물 등 대립구조 만드는 법, 그리고 최고조에 이른 갈등, 즉 “갈등의 힘이 뚜렷할수록 그것을 풀어내는 스토리의 힘은 더욱 강해진다!”는 글쓰기의 준공리를 지켜내는 방식, 갈등해소와 복선의 활용, 화자의 철학과 가치관이 드러나는 핵심으로서의 결말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절로 훌륭한 스토리텔러가 된 듯한 자신감을 갖게 할 정도이다.

“이야기에는 무의식적 욕망, 금기된 것들의 욕망, 하지 못한 것들, 혹은 할 수 있는 것들”과 같은 우리의 근원에 대한 것들을 담고 있다. 그것은 우리들의 무한한 욕망과 관련되어 감성을 자극하고 공감대를 형성시켜준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부족한 것들, 다시 말해 욕망의 대상인 것들, 사랑? 미성숙? 부정적 태도? 등등 그것을 채워주는 이야기들은 지금도 무수히 만들어져 우리들 삶을 끊임없이 자극할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우리들을 더 가치 있고 선하며 도덕적 상승감에 연결시켜주는 한 우린 이야기의 힘에 매료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야기는 이처럼 일회적으로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는 추동력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그동안 접했던 소설, 영화와 드라마, 오페라의 스토리를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 일종의 분석적 이해력이 생긴다고 해야 할까. 또한 재미있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치기어린 자신감도 얻게 되며, 오늘날의 각종 소통수단들과 대화 도구를 통해 효과적 의사 전달에 대한 감각도 깨우치게 된다면 지나친 이해일까? 결국 삶의 원형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본질에 대한 탐구인 이 책은 본격적 이야기의 시대인 오늘에 신선하고 적절한 이야기 문화의 안내서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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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방 모중석 스릴러 클럽 29
할런 코벤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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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내적 욕망에서부터 외부환경과의 갈등으로 수시로 그 균형을 잃어버리고 고통과 고뇌로 슬퍼하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기울어진 균형을 되찾기 위해 용기를 내어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잃어버린 길은 무엇인지 찾아 나선다. 그러나 그 여정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어서 좌절하기도 하지만 희망을 저버리지 않기도 한다. 이처럼 삶이란 그것이 사랑이건, 재물이건, 어떤 지적 탐구를 수반하는 정신작용이건 성취하고자 하는 대상에 이르려는 장애물과의 욕망의 투쟁이고 이의 균형이다.

특히 삶의 균형을 해치는 고통 중에서 가족의 사랑,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라는 유대감의 상실만큼 인간을 고립시키고 좌절케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부모는 자신의 아이들이 성장해가는 데 절대적인 후원자이다. 혹여 마음이 다치지 않을까, 신체에 손상이 생기지 않을까, 그릇된 길로 들어서지 않을까, 그들이 미래의 성숙한 인간으로 가는 여정에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 아이와 부모의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부모의 관심과 아이의 관심사에 괴리가 생기고 그 간극은 미세하게 벌어지기만 한다.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어떻게 그 간극을 좁힐 것인가? 어디까지 개입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정답이 없는 양육의 딜레마에 봉착한다.

소설은 바로 이 난해한 위치에 들어섰을 때, 부모와 아이의 신뢰와 사랑의 균형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지, 아이들이 마음에 상처를 지니게 되었을 때 부모가 할 수 있는 방법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대처하며, 싸우게 되는지를 추적한다. 그리고 부모의 개입과 아이의 프라이버시 존중과의 경계에서 무엇이 선(善)일 수 있는지를 생각게 한다. 또한 내 자식을 보호하기 위한 행위가 남의 자식에게 위해가 되는 것일 경우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는지, 무심히 뱉어낸 어른의 한 마디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가 되는지 우린 목격하게 된다.

사소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이 문제들이 다양한 모습을 띤 중산층 가정들에 렌즈를 맞춤으로써 잃어버린 균형을 복원하기 위해 달려가는 인간의 용기와 사랑이 세련된 감수성, 독자의 강박적 긴장을 쥐락펴락하는 정교한 플롯의 구성, 치열한 갈등과 대립의 흥분 속에 온통 녹아 흐른다.
미스터리, 서스펜스, 극적 아이러니까지 총동원되어 호기심과 감정의 자극을 첫 장부터 마지막장에 이르기까지 쉴 새 없이 흐르는 이야기에 탈진할 정도의 재미로 독자를 몰아 부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얼굴의 형상을 완전히 짓뭉개 버리는 이들의 무참한 폭력살인, 게다가 알려지지 않는 살해동기와 신원을 알 수 없는 피해자까지 더해지고, 사건의 초등수사과정에서 드러나는 풋내기 여성 수사반장과 무능한 담당형사와의 첨예하고 혐오감을 자극할 정도의 수사권 갈등, 그리고 10대 아이들을 둔 중산층 가정들의 팽팽한 양육갈등, 이웃집 아이의 자살, 여자아이의 성적 정체성을 모독하는 선생의 감정적 언사가 만들어 낸 정신적 폭력 등 무수한 갈등들이 걷잡을 수 없이 모여들어 그야말로 부글거리는 감정의 도가니에 빠져들게 한다.

특히 홀로 침잠하는 아이의 고통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부모로서의 보호, 즉 개입의 문제와 관련하여 아이의 컴퓨터에 실시간 감시 장치인 스파이로봇을 설치하는 것은 과잉보호이며, 아이의 프라이버시 침해인가, 아니면 위험에 처해있을지도 모를 아이를 구원하기 위한 부모로서의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인가라는 답 없는 문제의 제기부터 복선으로 작동하는 무수한 인스턴트 그리고 SNS 메시지, 시스템 엿보기 장치에 이르는 오남용되고 있는 정보통신기술의 소재까지 진중한 주제와 신선한 소재의 믹스는 작품의 풍미를 더욱 풍부하게 해준다.

살해된 여성들의 관계가 파악되고, 살해 동기와 살인자의 신분이 드러나는 마지막의 여정에 이르면 무심히 던진 한 마디가 얼마나 우연이란 증폭의 기제를 타고 인간의 삶을 암흑의 구렁텅이에 처박아댈 수 있는지에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또한 자식의 보호를 위해 때론 부도덕을 불사하는 더없이 이기적으로 변하는 부모들의 편협성, 예기치 않은 우발적 피해가 삶의 행복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그 무서운 잔혹성의 실체를 보게 되기도 한다. 인간이 어찌 삶을 예측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불확실하며 우연함에 의해 조성되는 것이 삶일지라도 우린 그 우연을 만들어 낼 작은 요소들에 관심과 사랑과 신뢰를 보냄으로써, 그리고 비록 깨진 균형일지언정 되찾으려는 용기를 잃지 않을 때 소중한 것들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수많은 갈등 구조들과 치밀하게 얽힌 사건들의 인과관계가 밝혀지는 대 결말은 가히 최고조의 카타르시를 경험하게 한다. 이 소설이야말로 스릴러가 가족소설과 결합 할 수 있는 가능한 상상의 끝이라면 과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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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교양사상서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정영하 옮김 / 산수야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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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自由;liberty), 어렵고도 쉬운 말이다. 인간 개체의 생래적 본성 같기도 하지만 사회라는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존재로서 개체의 집단이 행사하는 자유까지 고려하면 이처럼 경계가 애매한 표현도 없기 때문이다. 사전적 의미를 보면 구속이나 억압에 반대되는 어휘이고, 법률이 되었든 그 어느 것이 되었든 외부적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행위, 또는 자연 및 사회의 객관적 필연성을 인식하고 이것을 활용하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전자의 경우는 개인적 자유를, 후자는 사회 등 외부 환경 하에서의 자유를 말하고 있다. 결국 이 둘은 어디선가 충돌하고 소음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J.S.밀은 이처럼 개인의 자유가 사회와 맞닥뜨리게 되면서 불가피하거나 불가결하게 침해받거나 통제되는 현상에 부당성과 불법성이 개입될 수 있음을 보았으며, 이에 대한 경계, 그 한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함을 직관했던 것 같다. 따라서 『자유론』은 “개인에 대해 사회가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본질과 한계”라는 시민적, 사회적 자유에 대한 논지를 핵심으로 전개하고 있다. 개인의 자유는 어디까지이며, 사회는 그 자유의 어느 지점에서 권력을 행사하여야 하는가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오늘의 사회는 거대한 정부와 다양한 사회집단, 게다가 민간기업조차 대규모화되면서 개인과 이들 집단과의 마찰의 형태는 엄청날 정도로 다양하며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즉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억압하려는 권력화 된 집단들이 무수히 증가하여 그 어느 시대보다 시민적 자유는 위협을 받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자유의 자기중심적 발현으로 인해 공동체의 건강성이나 사회적 안정에 해악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시민과 사회적 자유에 대한 최초의 담론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은 오늘의 우리에게 개인적 자유와 권력의 한계에 대한 판단의 귀중한 가치 기준을 제공하고 있다 할 수 있다.

개인의 자유에 간섭하는 것은 언제 정당화될 수 있는가?

밀은 공리주의자답게 “사회 전체의 부를 감소시키는 것이나, 전체의 행복을 감소시키는 것”은 사회가 간섭할 수 있는 개인의 자유라 주장한다. 이는‘벤담’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절대적 공리주의에서 조금 후퇴한 논리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행복의 크기를 침해하지 않는 한, 오히려 개인의 자유는 절대적으로 보호되고 지켜져야 한다는 자유지상주의적 견해라고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서 밀은 자신만의 공리를 내세운다. 개인의 자유재량에 일임하는 것이 전체적으로 보아 이익일 경우, 사회가 통제하면 오히려 개인보다 더 큰 해악이 발생할 경우, 사회가 단지 간접적 이해관계만을 갖는 경우의 개인의 자유는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와 간접적 이해관계를 갖는 자유는 왠지 개인의 절대적 자유로서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 보인다. 개인이 직접적으로 특정한 타인에게 행한 것이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있다. 언론과 출판의 자유, 결합(결사)의 자유는 이러한 유형의 대표적인 자유 형태가 될 것이다.

왜 언론 출판의 자유 등 간접적 이해관계의 자유는 절대적 자유이어야 하는가?

인간의 내부 의식세계의 영역에 있는 양심의 자유, 사상과 감정의 자유, 기호의 자유와 행복추구의 자유가 절대 불가침의 자유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지성은 없다. 그런데 사상의 자유와는 유사하지만 언론, 출판의 자유는 개인 일신상의 내면에 머물지 않고 공중을 향해 드러나는 자유이기에 의도하지 않지만 간접적으로 불특정인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즉 개인을 넘어 타인과 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러한 자유에 절대 불가침의 권능을 부여하면 해악이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떨쳐내기 어렵다. 그러나 밀의 논리는 의외로 간결하고 명확하다. 그 첫째 이유는 어느 누구의 의견도 ‘절대무오류’의 진리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억압하려 애쓰는 의견이 잘못된 의견이라고 단정할 정도로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세상은 절대로 아무런 잘못도 범하지 않는다는 맹목적 신뢰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으며, 시대라는 것도 개인 못지않게 잘못을 저질러 왔으며, 절대적 확실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정하고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진리 일 수 있음을 차단하는 형국이 되어버려 전체의 행복을 감소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둘째는 억압되는 의견이 설혹 잘못된 것일지라도 지배적 의견이란 항상 완전한 진리가 아니기에 일부 진리를 포함할 수 있으며, 셋째는 이미 일반에 널리 인정된 진리가 있을지라도 활발한 논쟁이 허용되지 않을 경우 대다수는 편견을 품어 합리적 근거를 이해하고 실감하는 일을 잃어버리게 되며, 끝으로 참된 진실로 향하는 전제인 비판을 통한 완전한 진리의 추구를 방해하여 인류의 인성과 행동에 미치는 결정적 영향력을 상실시켜 진리의 확신을 미완에 그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통제되고 억압된다면 개인들은 누구의 비위도 거슬리지 않으려는 기회주의적 태도로 결코 진리를 이야기하려 하지 않거나, 두려워 정신적 발전이 전면적으로 위축되고 이성이 겁에 질려 사상의 발전은커녕 획일화로 인한 편협한 세상으로 퇴보하게 되고 말 것이다.

자유와 개성, 그리고 개인주의에 대해서

반대 의견을 충분히 자유롭게 비교해본 결과, 즉 자유와 다양성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결코 진리를 발견 할 수 없으며, 이 다양성은 개성을 창조하고 발전시킨다. 개성의 시대라고 부추기는 오늘은 자유의 기초위에 서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 개성이란 것이 자제력을 상실하고 오직 욕망과 충동으로 치달아 좋지 못한 행위로까지 비난받기도 한다. 균형을 잃어버렸다는 지적인데, 그렇다면 개성은 억제되어야 한다는 것일까?

공리주의적 논리를 역설적으로 적용하였을 경우 그 개성이 공중에게 어떤 어리석고 저속하며 타락적인 해를 주는 것일지라도 존중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을 볼 권리, 싫은 것을 피할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아닐까? J.S.밀도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 행위는 도덕적 벌과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데 동의하지만, 단지 비호의적 판단인 악평과 긴밀하게 결부되어있는 불편일 뿐인 만큼 감수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태도는 오늘날 개인주의로 고착화되어 공동체의 의식을 저해하고 이기적 개성을 중시하는 민주주의 타락이란 오명으로 연결되어 오히려 시민의 권리를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밀의 주장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 시대가 지나면서 과거의 진리가 새로운 시대의 진리에 부정되기도 한다. 진리는 공리적으로만 판단 할 것이 아니다. 여기엔 중대한 함정이 있어 보인다. 공동체의‘연대의식’이라는 자연적 의무나 합의를 필요로 하는 자발적 의무를 넘어서는 의무에 적대하게 되는 것이다. 자유에서 출발한 개성도 사회라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욕망의 과잉으로 내 닫게 되면 우린 그것에 무언가 간섭을 해야 하지 않을까? 칸트의 말처럼 인간을 쾌락, 즉 전체의 행복의 도구로만 보는 그런 자유의 정의는 왠지 도덕적으로 수용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결 어

근대적 시민의 자유에 대한 최초의 정의에 나선 이 책은 이와 같이 사상과 언론의 자유, 그리고 인간의 개성이 자유의 필수 요소로서 존중되어야 하는 이유와 개인과 사회적 권위의 경계와 한계, 시민적 자유의 공리적 권위를 지니는 원리의 실질적 적용에서의 문제라는 주제로 사회와 국가, 개인의 자유에 대한 다층적 사례와 분석을 수행하고 있다. 우리가 오늘을 살며 부딪치는 각양의 정의의 문제에는 자유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가 있다. 인간 정신의 진보를 위한 진리의 발견이라는 본질적이며 인간사회 전반의 기초를 이루는 자유의 기준에 대한 밀의 공리는 세상을 보다 신중하고 입체적인 관점에서 생각토록 견인한다.

다른 의견이 존재한다는 것은 대단히 유용한 것이다. 잘못되고 버려진 의견이 진리일수도 있으며, 진리성을 명확히 이해하고 느끼기 위해서는 반드시 잘못과 싸우는 것이 필수불가결의 조건인 것이다. 모든 학문이나 종교적 진리조차 치열한 공박과 싸움에서 비로소 참된 의미로 접근해왔다. 논쟁이 가라앉는 것은 의견의 통일이 될 수 있지만 의견의 다양성의 범위가 좁아져 진실과 진리의 방향을 상실 할 수 있다. 더구나 진리는 두 편이 나누어 가지는 경우도 있다. 서로가 진리의 한 부분에 불과해서 반대의견을 통해 보충되고 완전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유의 정의를 넘어 개방적이고 진리에 대해 열린 자세를 취하는 위대한 지성으로부터 배우게 되는 자유와 정의, 진리의 탐구는 시민적 자유, 사회적 자유라는 정치철학 그 이상의 엄숙한 삶의 태도를 가르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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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바리 부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52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민희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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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가 아직 영글기 전이었으리라. 그때의 감상을 지금에 되살린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36년이 지나서 다시 읽게 한 데에는 아주 막연하게 당시에 내 마음에 어떤 파문을 일으켰던 기억 때문인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엠마’란 여인이 발산하는 나른한 정염, 더없이 낭만적으로 느껴졌던 사랑의 감미로운 쾌락에 대한 환상이었던 것 같다. 그 시절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감상이었을 것이고, 어린 마음을 풍성한 감성의 사람으로 성장시키는데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이 책으로 내 손길을 다시 이끈 것이라면 역시 환상일지언정 그 애정의 실체에서 어떤 새로운 이해를 발견하려는 의지가 있었음을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15세 소년의 감상과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지나 중년의 남자가 이해하는 세계의 간극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만큼 다르다. 보이지 않고 어떤 관점도 제공하지 않았던 인물들이 이제는 생생히 살아나 무언가를 내게 말한다. 그리고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어느 회화작품과 철학자의 이름조차 그 의미 속에 내장된 결코 작지 않은 이미지들과 관념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목욕하는 할렘 여인>을 자신에게 비유하는 엠마로부터 남성의 눈길을 유혹하는 듯한 관능미와 포즈를 연상하고, 계몽주의 사상가‘볼테르’가 대화에 비칠 때면 종교와 형이상학에 대한 강렬한 거부를 의지하는 인물임을 알아차린다. 갑자기 몇 곱절은 늘어난 풍부해진 의미와 다채로워진 장면으로 전혀 다른 『보바리 부인』을 읽게 된 것이다.

사실주의 문학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듯이 인간의 성향과 행동에 대한 관찰자적 분석이 장면들을 구성하고 있다. 때문에 그 실체감이 전달하는 느낌은 환상과 현실을 동일시하는 보바리 부인처럼 독자인‘나’를 어느덧 소설 속 인물에 매몰되게 하곤 된다. 아내의 생각을 알지 못하는, 혹은 자신의 행복과 타인의 행복을 혼동하는 무감각하고 무기력해 보이는‘샤를 보바리’야말로 내가 아닌가?, 권태와 환상에 젖어 새로운 쾌락을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엠마 보바리’야말로 나 아닌가? 아니 명예와 출세를 위해 수단으로서 인간관계를 사용하는 약사 ‘오메’는 또 다른 오늘의 우리모습 아닌가? 화려한 이미지와 욕망에 현혹된 우유부단한 저 청년‘레옹’도 내 안에 있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여기서 문득 오늘의 우리들, 바로 근대적 인간, 물질에 대한 욕망과 그 도달할 수 없는 한계를 위해 질주하는 인간의 탄생, 자본주의적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근대적 인간의 탄생

의사개업이나 초혼인 과부와의 결혼조차 부모의 의지의 결과일 뿐 자신의 의사가 없는‘샤를 보바리’란 인물은 치열한 인생의 목표를 가진 인물이 아니다. 이와는 대비되어 샤를의 재혼의 상대인 엠마는 현실에 대한 끝없는 탈출, 열정과 이상에 대한 추구, 화려함과 황홀함이 가득한 쾌락의 세계를 그리는 여인이다. 통속 소설에 취해 자신을 그 안의 낭만적 세계에 살게 하고, 어느 귀족의 화려한 파티장의 기만에 찬 우아함에 매료되며, 대도시 파리에 넘쳐흐를 환희가 자신이 누려야 할 당위의 것으로 생각하는 여성이다.

이러한 자아에 대한 인식은 동경과 몽상을 혼동케 하는데, 시골의사의 아내라는 위치는 그 간극으로 인생의 일상적 행복을 사라지게 하고, 인생에 대한 고통으로 남편과 현실에 대한 부정과 저주로 이어지게 한다. 귀족들의 우아한 품격, 열정적 아름다움과 시인같은 마음을 가진 남자, 자신의 욕망을 한 없이 고귀하게 해줄 남자에 대한 갈망은 제어 할 수 없을 정도가 된다. 나는 이 인물에서 근대적 인간의 출현을 목격한다. 억측일까? 욕망과 자제력의 균형을 잃어버리고 끝없는 욕망의 추구에 나선 오늘의 인간의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허영심을 충족시켜주는 물질의 추구, 간통, 어음과 같은 위선을 조작하기 위한 시간이란 근대적 산물의 악의적 사용, 화폐중심의 자본주의의 마약에 중독되어 끝 간 데 없는 욕망의 무한 추구에 몸부림친다. 또한 균형을 상실한 욕망은 도달하면 얼마되지 않아 권태가 습격해오고 드러난 바닥, 그 충족되지 못한 터 큰 쾌락의 욕망이 남아 엠마를 괴롭힌다.

인생에 대한 불만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내의 우아한 자태, 예쁜 딸아이‘베르트’, 소박하지한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직업과 가정이 행복일 것이라고 믿는 샤를과 달리 “지금까지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고 느끼는 엠마의 인생에 대한 불만은 남편의 무능함에 이유를 돌리고 있지만, 그 원인은 그들 각자에게 있음을 수 없이 목격하게 된다. 현실의 하찮음을 뛰어나와 동경하는 세계, 그에 대한 환상에 자신을 매몰시키는 현상을 표현하기위해‘보바리즘’이란 용어가 다 만들어졌듯이 욕망의 실체를 알지 못하고 자제력과의 균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또한 자기 연민에 골몰하는 이기적 인간, 즉 타자 읽기에 무심한 개별화되고 파편화를 강요하는 물질주의적 삶의 환경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샤를은 엠마가 자신의 불륜이나 현실의 저주를 은폐하기 위해 위장된 허위의 행동을 가족에 대한 애정의 행위로 단정하거나, 관능의 열정에 포획되게 했던 정부(情夫)로부터의 배신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아내의 내면을 보지 못하고 의료적 처방과 병간호에 몰두하는 어리석음으로 일관한다. 게다가 엠마는 아예 샤를에 대한 관심은커녕 외면과 존재의 부정으로까지 치닫는다. 타자 읽기에 전혀 무관심하고 실패하는 사회에 행복이란 것이 깃들 여지가 있을 턱이 없다.
        
결국 “미덕과 애정과 쾌락이 하나로 녹아들어” 있으리라는 몽상적 열정의 세계의 끝은 혐오와 저주가 숨겨져 있음을 발견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는다. 거듭된 부정(不貞)과 절제되지 않은 사치로 인한 거대한 부채는 동일한 것이다.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지고의 쾌락이란 행복은 결코 끔찍한 권태와 저주스런 실체만 드러내고,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더미의 강박일 뿐이다. 결국 플로베르는 두 사람의 생명을 지상의 세계에서 거두어 가는데, 어떤 의미에서 실제인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환상에 젖어있던 사람들의 실패를 확인해주고 싶은 의도가 아니었을까?

꿈과 현실의 간극을 인식하지 못했던 한 여인의 탐욕스런 불륜이 하나의 거대한 플롯을 이루고 있지만 이는 근대가 낳은 욕망에 대한 강박적 추구에 대한 비판적 은유이며, 공동체가 서서히 해체되어가며 개인화로 인해 파멸되어가는 근대적 삶의 모순에 대한 통찰이기도 하다. “보바리 부인은 바로 나다!”라는 플로베르의 말처럼 자기중심적이고 비루한 속물적 세계에 지배당하여 상처받고 고통 받는 인물들은 우리들 자신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소재 역시 당시 프랑스의 지방 소도시 의사와 아내의 실화였다는 측면에서 이 소설은 산업화, 물화로 인해 권태와 방탕, 쾌락적 욕망을 향해 치닫는 인간들의 비루한 실상에 대한 경종과 연민이었을 것이다. 여전히 근대적 삶이 생산하는 모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19세기에 써진 이 소설이 들려주는 진정의 목소리는 어떠한 생기도 잃지 않는 감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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