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심은 사람
장 지오노 지음, 마이클 매커디 판화, 김경온 옮김 / 두레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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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세계가 노래하는 소리를 들려주는 소설”을 쓰고자 했다는‘장 지오노’의 인간의 상처를 치유하는 행동주의 정신이 고결하게 배어있는 영혼의 글이라 해야 할까?

지극히 짧은 소설이지만 내 마음에 전해오는 메시지들, 감동은 어떠한 장황한 대서사시 이상이다.

 

소설은 세계 대전(1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1910년에 화자(話者)의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지역의 황량한 고산지대여행 중 만나게 된 양을 치는 남자와의 인연에서 시작된다.

매일 도토리 100개를 누구의 땅인지 관심조차 없이 아주 정성스럽게 심는 남자, 그래서 3년간 10만개를 심었고, 2만 그루의 싹이 나오고, 그 중 1만 그루가 생존하여 성장할 것이라는 애기를 전해 듣는다. 이후 전쟁 참전 후 잊고 있었던 도토리를 심던 남자를 기억하곤 10년 만에 찾았을 때 물조차 말라버렸던 황무지는 폭이 10킬로미터가 넘는 떡갈나무 삼림으로 변해있음을 발견한다.

“아무런 기술적 장비도 없이, 오직 한 사람의 영혼과 손에서 나온” 실천이 만들어 낸 자연의 멋진 변화. 자신과 관계된 일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것만을 마음에 두고 미래를 상상해보던 청년에게는 처음 보는 경이였을 것이다. 메마르고 너무도 황량해서 한정되고 제한 된 자원을 가지고 되풀이되는 경쟁에 좌절하고 무너져 버리던 고산지대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메마른 영혼 속에 푸른 잎을 피워 낼 내일의 도토리”를, 그 어떠한 경쟁적 속도도 숭배하지 않고 자기를 희생하며 일하는‘엘제아르 부피’란 남자에게는 이미 고매한 인격이란 수식도 어설프기만 하다. 아름다운 혼을 가진 사람, 철저한 고독 속에 홀로 일한 남자, 확실한 자신만의 열정, 선을 행하기 위해서 인내해야했던 무수한 절망과의 싸움이 짐작되어 절로 그 정신의 고결함에 겸허해 진다.

 

노인이 되었음에도 나무를 심는 평생의 일을 묵묵히 수행하던 1935년, 정부는 6~7미터의 나무로 빽빽한 삼리지대가 된 그곳을 ‘천연 숲’이라 부르며 시찰에 나선다. 천연의 숲이라니! 한 남자의 고결한 정신과 노동의 산물임을 알지 못하는 세상의 왜곡된 정신세계가 수치스러워지는 대목이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라는 인간들의 가공할 탐욕이 부딪히는 동안에도 노인은‘자연에 대립하는 인간’이 아니라‘자연 속의 인간’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간다. 아마 산의 웅장함과 고요함이 선사하는 우주와의 일체감에서 정말의 건강과 번영의 빛을 만나고 있지 않았을까?

한정된 자원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하다못해 앉는 자리의 위치를 놓고서도 경쟁하고, “선한 일을 놓고, 악한 일을 놓고, 그리고 선과 악이 뒤섞인 것들을 놓고 서로 다투”는, 정신이 실종된 오늘의 우리들에게 참다운 행복을 생각하는 시간을 준다.

 

우린 스스로들“‘인간이 인간에게 늑대(Home homini lupus)’ 인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한다. 자연을 통제하려는 오만을 여전히 고수하고, 물질이 뿜어내는 광기로부터 소외될까하여 줄달음치는 발걸음을 멈추지 못하는, 제로게임일 수밖에 없는 잔혹한 경쟁은 이젠 멈추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비와 눈이 숲 속으로 스며들어 옛날에 말라 버렸던 샘들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자연의 생명력처럼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태양 아래 서 있을 때”임을 우리의 육체와 정신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 책의 정신과 미덕은 작품의 첫 페이지에 밝힌 작가의 글처럼 ‘고결한 인격의 만남’이 주는 감동, 잃어버린 우리들의 인간성 회복에 대한 거대한 영감들, 게다가 강렬하고 풍성한 시적 서정성의 완벽한 하모니가 전해주는 정신의 숭고한 무엇, 그것의 지향인 인간의 희망과 행복의 부활을 꿈꾸게 하는 것일 터이다. 감동이 꽤 오래 마음에 남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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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유물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6-7 리졸리 & 아일스 시리즈 7
테스 게리첸 지음, 박아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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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집요한 죽음의 칼날이 언제라도 등을 꽂을 듯한 두려움, 경계의 긴장으로 팽팽해진 신경이 공포를 가득 채우고 첫 페이지부터 호흡을 조절하게 한다. 그리곤‘네페르 타리’(완벽한 아름다움)란 고대 이집트 왕녀의 이름을 가진 열네 살 딸아이,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데이아(Medea)』의 초법적이고 냉엄한 여성의 이미지를 지닌 한 여인, 이 두 모녀를 필사적으로 도피케 하는 어둠의 그림자를 인식하는 순간, 장면은 2000년 전의 미라로 추정되는 고고학적 유물의 CT촬영 현장으로 훌쩍 시공을 뛰어넘는다.

사설 고고학 박물관이 소장한 미라의 손상을 막기 위한 조심스런 단층 촬영은 뜻밖의 모습으로 참관자들을 경악케 한다. 다리뼈에 박힌 총알. 그것도 총상 후 뼈의 자생적 회복 후에 미라로 방부 처리되었음을 보여주는 징후는 고고학적 탐색에서 현실의 엽기적인 살인사건으로 급전시킨다.

 

이처럼 소설을 구성하는 소재들의 다양성은 작품 초입부터 읽는 이를 완전히 압도한다. 신화적 요소들, 미라를 비롯한 고대 유물들과 고고학을 배경으로 인간의 말린 머리인‘찬차’와 사체의 방부처리 기술을 사용하는 변태성욕자인 사이코패스의 엽기적 연쇄살인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스릴러의 신비감을 극대화시키며 소설적 재미로 강력하게 빨아들인다.

그리고 하나 더, 작품성을 아마 완전성에 도달시키는 요소가 아닐까 싶은데, 가족과 같은 혈연적 연대가 공공선을 방해하고, 인간의 신체를 사물화하는 현대인의 악마적 취미는 물론 악행의 존속을 가능케 하는 부의 권력화처럼 그 뿌리를 사회 심리적 요소에서 찾는 것 등은 이 소설의 탁월한 미덕으로 들고 싶다.

 

또한 작가의 내면적 의지가 반영되었다고 여겨지는데, 이 작품이‘제인 리졸리’라는 여형사와 ‘마우라 아일스’라는 여성 법의관 콤비 시리즈임을 떠나서 여성 인물들과 남성인물들이 뚜렷하게 기성의 젠더에 부여된 특성을 전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성들은 강인하고 선(善)과 사회정의를 지향하는 것과 대비되어 남성들은 심약하거나 소심하고 수동적이며 악(惡)과 도덕성을 파괴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리졸리의 파트너인 프로스트 형사는‘조세핀 펄시로’라는 박물관 여성 큐레이터의 미모에 현혹되어 수사관으로서의 판단을 잃어버린다거나 로스쿨에 들어간 아내로부터 버림을 받아 훌쩍이는 남성인가하면, 억만장자로서 아들의 범죄를 은폐하는‘킴벌 로즈’같은 인물은 사법질서를 초월하고 이기적 연대에 집착하는 사회악을 상징하기도 한다. 반면 조세핀이나 그녀의 엄마, 조세핀을 보호하는‘제머 해머턴’ 같은 여성들은 자기희생과 책임감, 강한 의지, 정의의 수호자로 그려져 성역할을 완전히 역전시켜 버리는 것이다. 여성 독자들의 환호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사건의 발단이 된 총알 박힌 미라의 살인사건화의 시작으로부터 박물관에서 추가로 발견된 세 개의 찬차는 추가적 살인행위가 있었음으로 이어지고,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큐레이터 조세핀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위험의 암시는 그녀의 차 트렁크에서 또 하나의 완전한 미라의 발견으로 종잡을 수 없는 의문의 사건으로 치닫는다. 여기에 비틀린 성의식에 매몰되어 극한적 쾌락을 추구하는 악의 종자들은 부모들의 막대한 부와 권력의 비호 하에 사회적 처벌을 피해가며 악마적 잔혹성을 더해간다. 이러한 현실의 시간적 진행은 이십 오년 전 이집트 유적 발굴 탐사단의 인물들로 모아진다. 박물관장, 거부인 고대유물 발굴 후원자인 킴벌, 그의 아들 브래들리, 조세핀의 엄마 메데이아..., 그 질긴 욕망의 사슬이 증오와 분노, 살인과 도피, 미라와 고고학이 되어 순환한다.

 

화려하고 지적인 소재들이 정교한 구성 속으로 들어가 이야기는 그야말로 풍부하고 다채로운 맛스러움을 더하고, 살인자의 신원은 엎치락뒤치락, 소설 첫 페이지를 장식했던 두 모녀에게 드리워진 죽음의 공포의 근원과 실체로 결합한다. 결국 작가는 그리스 비극 『메데이아』의 신화를 한편은 차용하고 또 한편은 뒤엎는다. 남편의 배신에 자식들은 물론 연적마저 죽이고 홀연히 떠나는‘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와는 달리, 희생을 무릅쓴 자식에 대한 보호와 같이 헌신적인 모성애로 새롭게 그려내지만 막강한 권력과 잔혹한 악인들에 강하게 맞서는 의지와 행동의 실천은 신화 속 여성을 그대로 닮아있다. 이는 여성이라는 전통적인 가부장적 인식의 구분을 벗어던지고 인간 그 자체가 지니는 본성, 욕망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작업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하려 했던 것일 게다.

 

한편, 여성의 사체를 쾌락의 도구로 하기 위해 그 소유의 영원성을 위해 미라(mummy)화하는 변태,엽기 살인자를 추적하는 여형사 리졸리와 그녀의 파트너 프로스트의 인간적 갈등이나 애환, 신부(神父)를 사랑하는 법의관 아일스의 성적 갈망 등 이들의 사생활이 양념처럼 흐르면서 삶의 본질이란 보편성으로서의 진실들을 보여주는 구성적 배치는 장르문학이란 언어적 폄하가 감히 미칠 수 없는 문학적 위치로 격상시켜 놓는다. 가히 환상적이고 압도적인 복수극을 등장인물의 완벽한 아름다움만큼이나 완벽하게 조성한 수작이다. 21세기의 메데이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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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카페에서 시 읽기
김용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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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철학을 얘기하고 시(詩)를 쓰고 읽는 것의 궁극의 이유는 무엇일까? 살아간다는 것, 대체 인간의 유한한 삶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고 가치를 가져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우리 존재의 놓여있는 환경, 즉 세상이란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깨우치려는, 아니 시도하고 조금은 발견하거나 알아차리는 사유의 여정이 아닐까? 대체 의지도 없이 삶을 살게 된 존재의 살아 갈 이유란 무엇인지, 그 이유가 있기나 한 것인지, 그리고 죽음이란 소멸의 부조리는 또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 것인지, 이렇게 모호한 삶임에도 왜 그리 심난하고 힘겨우며 온통 장애물과 거북하고 고통스럽기조차 한 것들이 세상을 채우고 있는지,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는 것인지, 삶의 진리란 것이 있기나 한 것인지,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지..., 그래서 우린 시에서 철학에서 이들을 찾는다.


그것들에서 우린 우리들의 마음에 어떤 공명을 느끼고, 미처 다다르지 못했던 진실을 발견하곤 각성의 순간에 이르기도 하며, 그릇된 삶의 이해, 환영을 쫓던 자신을 비로소 발견하게도 된다. 또한 실의와 좌절, 삶의 의미조차 상실한 공허함의 그늘에 표정을 잃은 채 방기된 우리들에게 삶의 이정표를 제시하기도 하며, 근원적이고 피해 갈 수 없는 실존론적 외로움에 몸부림칠 때 사랑, 박애, 생명과 같이 삶이 추구해야 할 가치들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살아갈 희망을 발견하게 이끌기도 한다. 이 책은 이러한 철학적 성찰을 기초로 시에 투사된 삶과 세상에 대한 각성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시의 속성인 은유가 지닌 세상의 다르게 바라보기, 경험을 상실한 오늘의 사랑이 실패하는 이유, 그래서 사랑이란 진정 어떤 것인지, 타자와의 관계에만 몰두하는‘직접성의 인간’들이 앓고 있는 절망의 실체, 나아가 “자연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분노”에 이르는 진정한 사색과 성찰이 흐른다.


‘안토니오 스카르메타’가 쓴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에서 대(大)시인 네루다가 우편배달부에게 알려주는 '은유(metaphor)'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는 이 책은 일상에서 벗어남과 다른 사실을 나타낸다는 의미가 깃든 “낯선 어떤 것에 속하는 이름을 사물에 적용시키는 것”이라는 정의를 통해 시란 ‘무엇을 다른 무엇으로 보는’ 작업으로서 다른 현실의 장을 열어 밝혀주는 것임을 설명한다. 즉 우리의 세계는 개개의 사물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통해 우리 스스로 읽어낸 그물망이라는 것이다. 보이는 것, 감각적으로 표피에 와 닿는 것만을 인식해서는 세상 본래의 의미를 해독할 수 없다는 말이다. 살아있는 은유, 원 관념이 가지고 있지 않은 다른 어떤 사실이 들어있는 표현, 시어(詩語)의 본성에서 우린 보다 진실에 가까운 무엇들을 인식하게 된다.


난해하고 어렵게만 인식되는 시와 철학의 본질을 이렇게 이해하게 되면 우린 삶의 무궁한 현상들을 보다 풍요롭고 광대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의 중심이자 삶의 본질일지도 모를 ‘사랑’에 대한 성찰은 시와 철학의 이 같은 작업의 본성을 통해 세상의 거의 모든 것들, 현상들로 확장되어 인생의 총체를 설명하는 것이 될 게다.

사랑의 시작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우연한 만남, 낯 선 두 사람의 만남은 서로 다름으로부터 야기되는 시련과 고난, 위험이 내재한다. 이 위험을 무릎 쓴 경험을 안 은 채 난 혼자가 아니라 그(그녀)와 함께 하나의 세계와 그 세계의 진리를 만들어 나가는 일이 사랑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사랑에는 만남의 우연성이 사라지고 있다. 계층, 집단, 파벌, 그리고 어떤 동일성에 의거한 계획되고 계약적인 만남으로 변화되고 있다. 사랑에도 효율이라는 합리성과 경제성이 자리 잡고, 사랑의 과정에서 야기되는 위험을 배제한다. 결국 “타자에게서 비롯된 시련이나 심오하고 진실 된 온갖 경험을 회피하려 하는 것”이다. 이처럼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도 사랑할 수 있다는 쾌락주의적 사고로 사랑이라는 집의 문턱이나 밟을 수 있을까? “삶의 경험에서 삶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삶의‘전부’이기 때문”이듯이, 사랑의 경험이 사랑에서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사랑의 전부이기 때문일 것이다. 효율성이 지배하고, 우연성을 배제하며, 경험을 경시하는 오늘의 사랑행태는 계층과 집단을 분리하고 그 괴리를 심화시켜 사회의 이원화된 정체성으로 갈등을 증폭시킨다.


또한 사랑을 대상의 문제로만 생각하고 대상을 만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사랑 받고 싶어 하면서도 항상 자기만 생각한다. 그리곤 쓸쓸해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사랑은 주는 것이고, 참여하는 것이며, 하는 것이다. 철저히 자신의 능력의 문제, 능동적 활동이다. 자기 스스로 가꾸어나가는 문제이다. “그림을 그릴 줄 모르면서 좋은 대상만 찾아내면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처럼 사랑은 대상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사랑을 대상의 문제로만 이해하는 것, 대상, 바로 3인칭으로 인식하는 것, 나와 너의 관계가 아닌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우린 진실한 사랑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상이기에 판단하려한다. “너는 부자야, 너는 가난해”, 판단하는 순간 이미 그(그녀)가 존재하는 자체로 사랑하기 불가능해진다. 구분 짓고 차이를 만들어 내는 이 동일성의 폭력에는 그 어떤 사랑도 이미 존재할 수가 없게 된다. 이제 그와 그녀가 아니라, ‘그대’, ‘당신’의 사랑이어야 한다. 사랑은 일방적 관계가 아니다. 포옹, 악수를 보라! 안는 행위이자 안기는 행위, 서로 맞잡는 행위, 이‘상호주관적 매듭’의 행위가 사랑이다. “그대가 없으면 나도 없는” 행위이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명제가 내가 존재한다는 명제보다 우선하는 까닭’은 그래서이다.


이 사랑 못지않은 인간의 존재론적 특성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실존론적 외로움’, 세상에 혼자 내쳐졌다는 근원적 외로움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외로움을 아무 관련도 없는‘그리움’으로 인한 것으로 혼동한다. 그래서 사방으로 동료를 찾아 헤매며, 타자를 흉내 내고,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데!”라며 갈래 길에서 어느 길에 발자국이 많은 가에만 매달려 그저 따라간다. ‘편안한 자신감과 자명한 느긋함’이라는 심리적 안정감으로 타자와 일치되기를 원하는,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서 사는 본래적 삶을 상실하는 것이다. 이는 전체주의적 획일성으로 귀환하는 것, 바로 퇴락(頹落)이다.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타자의 어떤 모범적 틀에 자아를 짜 맞추려는 식의‘자기계발’서(書)의 열풍에 매몰된 한국사회의 이상 열풍, 페이스북, 트위터 등 소셜 네트워크에 쏠리는 현상이 유난히 많은 것, 투기열풍, 명품 열풍, 몸짱 열풍, 다이어트 열풍, 성형 열풍..., 자신들의 퇴락한 삶에 대한 자각을 잃어버린 사회, 그러니 역사적, 사회적, 윤리적 양심이 들어서질 못한다. 무관심, 방기, 폄하, 비아냥거림 등 가치의 혼란에서 온 이러한 지적 퇴행은 후기자본주의의 욕망의 철학과 손잡고 조작된 내면의 황량한 풍경을 정당화 시키는 왜곡된 욕망으로 치닫게 한다.

“카르페 디엠! 지금 즐겨라! 댓가는 나중에! 내일의 쾌락을 오늘에!” 신용카드가 남발되고, 일상적 옷과 장신구들을 신속하게 초라하고 남루하게 보이도록 하여 페기처분하게 만드는‘패션’이라는 소비물질주의 첨병은 절제와 성찰적 삶은 무능한 인간의 변(辯)이라고 설레발치는데 까지 이르고 있다.


‘마티유 리쾨르’의 『행복 요리법』이라는 책에 등장하는 ‘늑대의 칼날 핥기’라는 우화는 이러한 오늘의 한국사회를 빗대는 우화가 있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에 동물의 피를 묻혀두면 피 냄새를 맡은 늑대가 다가와 칼날에 묻은 피를 핥지만 일단 피를 핥다보면 날카로운 칼날에 늑대 자신의 피가 줄줄 흘러내리게 된다. 피 맛을 본 늑대는 멈추지 못하고 계속 칼날을 핥다가 출혈로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 본문 P 285의 내용을 분량상 임의 압축함)

너무 잔혹하다고? 치명적 어플루엔자에 감염된 우리사회의 광적인 탐욕의 모습이 이와 결코 다르다고? “쾌락만을 탐닉하는 향락주의와 소유와 소비만을 추구하는 물질주의, 안락한 도피처를 제공하는 상대주의, 스포츠, 연예, 패션, 미용, 레저에 광적으로 몰입하는 열광주의”, 여기서 아니라고 부정 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때문에 사랑이 무엇인지도, 삶의 가치 - 살아야 하는 정말의 이유, 외로움과 진짜 죽는 죽음인 영혼이 죽어버린다는 것, 이에 대한 각성, 진실에 대한 이해로 나아가는‘카뮈’식 실존적 반항에 가치추구를 더한 철학적 인식의 제안은 우리에게 어느 때보다 중대한 실천적 사유가 될 것이다.


이 책은 이와 같이 진실과 사랑을 알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유로서 하이데거, 키르케고르, 샤르트르, 카뮈, 샤토브리앙, 스탕달 , 마르셀, 프롬, 레비나스, 푸코, 알랭 바디우, 보드리야르 등의 문학과 철학의 사상적 편린들과 김수영, 김광규, 신경림, 최승자, 강은교, 정희성, 정호승, 도종환, 진은영, 유희경 시인 등의 30여 편의 시가 어우러져 빚어내는 잘 짜인 인생 지침서이다. 또한  저자의 말처럼 “존재의 진리가 스스로 열어 밝히는 ‘고요의 울림’을 듣고 그 말씀을 시어로 보존하는”, 다시 말해서 삶의 지향을 마련해주는 시인, 바로 우리들의 사명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 장, 한 장, 책 넘김을 할 때마다 시적 갈망이 쌓여지고, 삶의 시련으로 놓았던 어떤 끈을 다시금 팽팽하게 잡아당길 의욕이 일어남을 느끼게 한다. 단순한 앎에 대한 욕구를 채우는 지식의 접근보다는 삶에서 주체성의 회복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자아와 세상의 인식적 차원을 제고시켜주는 책이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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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중년 프로젝트 - 배 나온 아저씨에서 호감형 퍼펙트 맨으로 거듭나는 방법
김종엽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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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이 어째 민망해서 낯이 화끈거리지만 나이 듦에 따라 그 현상들이 외형적 신체뿐 아니라 각종 신체기관에서 현저하게 달라졌다고 마구 신호를 보내는 통에 냉큼 집어 들었다. 그렇다고 ‘꽃’같다고 하는 어떤 환상을 가지고 덤빈 것은 아니다. 늘어난 주름살을 없애 팽팽한 겉모습을 만들어 보겠다는 야심은 가져 본적도 없으며, 다만 생물학적 나이를 넘어서는 과다한 노화로 급속한 생기의 상실만큼은 막아보자는 심산이었다 하겠다.

 

어느 날 세면대 앞에 있는 거울을 쳐다보게 되었는데, 바쁜 아침 시간에 왜 그런 여유있는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런데 눈 아래 축 처진 반달의 모양이 모습을 나타내고, 머리는 더욱 희끗한 색들이 돋아나 있으며, 어딘지 윤기를 잃은 것 같은 꺼칠한 정말의 중년 남자를 보았던 것이다. 아마 그 이후부터 내가 소위 늙기를 시작했구나 하는 나이 듦에 대한 진짜의 이해를 가졌던 것 같다. 이 자각은 이전에 단 한 차례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내 육신에 대한 연민을 불러왔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인지 중년의 건강한 삶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예사스럽게 그저 흘려보내지 못하곤 한다.

 

이 책의 미덕이라면 심오한 의료 비법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중년 남성이라도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생생한 현실 속에서의 가능한 실천방법들과 누구나 자기 의지의 여하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특히, 중년에 들어 선 남자들이 의례히 고민하고 관심을 집중시키는 부분들을 콕 집어 진단하고 처방을 내려주고 있어 더욱 요긴한 조언으로 다가 온다.

살이 쪄도 하필 배만 나와 신체의 균형미를 잃어버리게 하고, 머리카락은 왜 자꾸 빠지는지, 게다가 쉽사리 피로해져 만성적인 피로감을 떨쳐내지 못하는데다가, 피부의 탄력성은 나날이 상실되는 것 같고, 기억력도 가물가물, 술 담배는 여전히 끊지 못하여 입 냄새는 달고 다니는 등등, 아마 아저씨들 고민의 정곡을 찌르는 요인들의 구성은 단연 돋보인다.

 

이러한 구성 중에서도 아마 관심사들은 조금씩 다를 것이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주목하게 했을 것 같은데, 의사들의 밥상은 어떤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다. 그들의 밥상은 건강을 지키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정보라는 생각에서일 것이다. 칼로리를 염두에 둬라, 그러나 아침 식사는 삼겹살도 좋다. 칼로리도 생각지 말고 성대하게 먹어라, 그리고 채소를 늘리는데, 파프리카나 오이, 당근, 양파는 고기만큼 속이 든든하다고 자신의 밥상을 소개해준다. 물론 합당한 의학 지식을 설명하면서 그 타당성에 의거한 얘기이다. 또한 다이어트와 관련하여 ‘NO 지방’과 같은 지방섭취를 배제하는 신체손상의 프로그램들을 경고하듯이 잘못된 의료정보들에 대한 이해를 시정시켜주고, 적절한 지식을 전문 의사로부터 경청하는 기회를 베풀기도 한다.

 

한편 민간요법이라고 잘못 전해지는 발모 예방법들처럼 탈모로 고민하는 이들에게 중대한 정보가 소개되기도 하며, 의례히 겪는 만성피로증후군의 증상을 자가 점검하여 이상 징후를 발견하도록 돕거나, 그 진단과 조치의 단계를 통해 혹여 무시해버리고 넘어갔을 수도 있는 병원(病原; 병의 원인)을 통해 정밀 진단으로 우리의 발걸음을 이끌기도 한다. 일례로‘섬유근육통, 바이러스질환, 갑상샘 기능저하, 요로감염, 암 등’과 같은 질환이 만성피로로 은폐되어 있다는 것은 다시금 자신의 신체를 되돌아보게 한다. 한편 힘 덜 들이고 밥 덜 먹는 요령과 같은 조언에서는 우리의 상식을 깨버리는데, 지나친 저지방 식이는 오히려 식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허기지게 만들어 유해하다는 지적을 하고 있으며, 허기를 가라앉히는 데는 섹스를 열심히 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도 없다고 추천한다.

 

흥미로운 조언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초콜릿 복근’에 대한 갈망으로 너도 나도 식스팩 만들기에 여념이 없게 하는데, 중년 남자들의 건강에 참말로 유해하다는 것이다. 체지방이 4% 이하여야 초콜릿복근이 되는데 중년 아저씨들의 적정 체지방은 10~20%를 유지하여야 된다는 것이니, 생명을 담보로 한 외면 가꾸기의 폐해는 남성들의 수명을 단축시키기에 이른 모양이다. 또한 과도한 운동은 유해활성산소의 생성을 증가시켜 세포를 산화시켜 노화를 촉진하게 되니 무엇이든 과하면 화를 초래하기 마련인가보다. 그리고 이젠 대중화된 골프로 인해 워밍업도 없이 그저 스윙에 임하는 무지를 일깨워 주면서, 유연성과 골프용 근력을 향상시키는 방법을 슬쩍 알려주기도 한다. 플라이오메트릭스(plyometrics) 트레이닝이 그것인데, 이처럼 알아두면 좋은 운동방법도 의료적 배경 하에 소개되고 있어 저자의 세심한 배려를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표제처럼 소위‘꽃 중년’은 외면일 것이다. 외피, 진피, 그리고 피하지방으로 구성된 피부의 관리에 대한 지대한 관심인데, 외피의 방수기능을 비롯해서 가장 중요한 피부의 보습 방법, 하물며 스킨과 로션 또는 크림 등 화장품의 선택에 대한 조언에 까지 미친다. 게다가 입 냄새 치유의 경우, 치아, 혀, 치석, 보철물, 건조한 구강상태, 편도결석, 축농증, 인후두 역류 질환에 이르는 원인별 증상을 통해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자기 처방의 방안들을 파악할 수 도 있다.

끝으로 기억과 암기력의 퇴보와 관련하여 간접경험인 독서의 연상 작용이 기억의 원활을 도우며, 누군가를 가르치는 행위,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보의 유기적 연결훈련과 같은 유용한 처방을 얻을 수 있다. 뇌의 건강관리, 혈관을 비롯한 신체의 내장은 물론 보톡스 주사 등 성형까지 아우르는 외형적 건강관리에 이르는 그야말로 중년 남성을 총체적인 의료정보를 망라하여 진단하고 처방을 내려주고 있다.

 

실천은 개인인 자신의 노력이다. 또한 가는 세월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담배를 피우고, 식단조절에 실패하고, 운동을 소홀히 하며, 아예 책이라고는 담을 쌓고 지내는 자기 삶에 무심했던 생활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 친절한 의학 가이드는 가능성 있는 길을 충분하고 명확하게 제시해 준다. 꽃미남은 아닐지언정, 삶에 활기를 잃지 않고 자신감에 찬 건강한 인생을 일궈내는데 긴요한 책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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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 - 유가.묵가.도가.법가
이중텐 지음, 심규호 옮김 / 에버리치홀딩스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다분히 매력적인 책이다. 공맹과 묵가와 도가, 법가의 경전을 해석하고 그것의 심오한 진리를 단순히 소개하는 것이었다면 일찌감치 치워버렸을 게다. 다시 말해 이들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직접적, 전면적, 구체적으로 계승하자는 교조적 진술을 반복하는 것이 아닌, 현대 사회에서 가치와 의미를 지닌 방법과 사고방식이라는 핵심을 찾는 추상적 계승 작업을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다투어 이야기 한다’는 쟁명(爭鳴)처럼 아집에 사로잡혀 자신의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는 결점 투성이의 인간들에게 타인을 이해하고 세계를 인식하려했던 당대의 치열한 격론의 장, 사유의 터전이 수천 년 동아시아의 사상적 지배이념이었을 수 있는 힘으로서의 배경을 절로 확인케 하고 있다.

 

이들 제가백가가 활약한 시대는 기원전 5세기부터 300여년 남짓한 춘추전국시대라는 소용돌이 사회이다. 공자를 필두로 맹자로 이어지는 유가(儒家), 유가의 예악(禮樂)을 반대하고 겸애(兼愛)를 주장한 묵가(墨家), 유가와 묵가의 유위(有爲)가 세상을 어지럽힐 뿐이라고 무위(無爲)자연을 주장한 도가(道家), 그리곤 무위와 유위의 조화를 도모한 법가(法家)에 이르는 사상의 다툼은‘세상을 인식하는 법, 치국(治國)의 방법, 사람다움의 방법’에 대한 생각을 단련시켜 준다. 그래서 저자는 이들 4대가의 사상적 배경과 이념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은 왜 그러한 사상을 발전시켜야 했는지를 통해 궁극적으로 이들을 어떻게 오늘에 계승할 것인지를 논의한다. 이 과정에서 설명되는 경전의 토막들과 일화가 조화를 이루며 그 사상들의 비교로부터 도출되는 비판과 수용의 전개는 지적 재미와 아울러 자연스레 생각의 방법으로 연결되어 분석, 핵심파악, 재해석이 이루어지는 명쾌함으로 견인된다.

 

이들 제자의 사상들이 당대에 서로 다투어 이야기되면서 더욱 공고한 사상으로 발전하였듯이, 반대 의견을 충분히 자유롭게 비교해본 결과, 즉 다양성의 존재 속에서 비로소 진리를 발견 할 수 있으며, 이 다양성 이야말로 균형과 창조의 탄탄한 원천임을 다시금 확신하게 된다.

더구나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동양사상에 대한 미천한 지식으로 미처 발견치 못했던 묵자의 공리주의, 만인의 평등이라는 민권사상 등을 제자들로부터 보게 되는 야릇한 흥분에 감싸이기도 한다.

 

1. 유가와 묵가의 다툼

 

이 두 사상의 쟁론은 타자에 대한 인식의 다름에 있다. 인애(仁愛)와 겸애(兼愛)라는 사랑에 대한 인식의 뚜렷한 차이인데, 나와 내 가족, 내 친지에 대한 사랑이라는 자기사랑으로부터 시작하는 유가의 혈연중심의 사랑과는 대조적으로 타인을 나처럼 사랑한다는, 즉 타자의 사랑이라는 타인의 존중에서 시작하는 묵가의 개념은 그들이 지향했던 대상을 의미한다.

나와 타자를 구분하는 유가, 자타를 동일시하는 묵가, 요즘의 말로하자면 유가는 구별짓기, 즉 차별을 말하고 있으며, 묵가는 평등의 정의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유가의 중심사상인 예악(禮樂)의 비판으로 이어지는데, 예(禮)란 군주와 제후, 대부, 사(士)와 같은 상위계층의 질서로서 등급과 차별을 의미한다. 이 차별로 인해 소외된 평민과 노예 등 하위계층을 위무하기 위한 것이 악(樂)으로서, 즐거움과 음악이라는 조화를 이용하는 것이다. 즉 예악이란 차별의 제도이다.

 

당연히 만인의 평등이라는 민권사상을 주창했던 묵가로서 예악을 비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인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군주제인 당시에 평등과 질서가 유지되는 사회를 실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고 평등한 만인의 만 가지 주장은 질서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강력한 최고의 지도체제를 구상했는데, 바로 전제정치, 일종의 독재정치체제로의 귀결이 되고 만다. 평등과 민권을 추구했지만 결과는 전제와 독재가 되고만 미숙함에 머물고 말았다. 유가에서 우린 지배 권력이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행하는 태도의 역사적 기원을 볼 수 있다. 하위 계층에 대한 일종의 우민화, 고착화 정책으로서 쾌(快樂)와 음악(音樂)을 이용하는 것이다. 드라마, 아이돌, 성형과 패션, 명품과 연예계의 너저분한 이야기들인 엔터테인먼트의 홍수 속에 몰아넣음으로써 차별화된 세상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반면교사도 이 책의 미덕일지 모르겠다.

 

2. 유,묵가와 도가의 쟁론, 그리고 법가의 탄생

 

기막힌 비유가 있는데, 묵자는 의협심이 대단한 인물로서 문제에 처한 백성이 있으면 어디든 달려가 도움을 주곤 했다. 그래서 그를 “털 하나 남지 않을 정도로 일했다.”고 말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도가의 시발을 이룬 양주의 경우는 순기자연(順基自然), 즉 자연스러움을 따르는 것이 평화롭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라 하면서 “털 하나 건드리지 않을 정도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유가나 묵가든 무엇을 하면서 오히려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을 뿐이니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도가의 주장이 일견 옳은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몸이 없으면 병이 날 리 없고, 질서가 필요하지 않으면 질서에 관한 문제가 발생할 이유가 없다. ” 그러나 세상에 어찌 질서가 없을 수 있으며, 내 신체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무엇을 하나 안하나 마찬가지라면 도가의 주장은 있으나 마나한 것이 되고 만다.

묵가는 자신에게 이득이 될 일은 전혀 하지 않은 반면, 도가는 남에게 이익이 될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이 두 사상의 비유를 보고 있노라면 실없이 웃음이 배어난다. 어쨌거나 당대를 풍미했던 사상의 독특한 발상과 혹은 심오하기도 한 이들의 생각을 쫓는 여정은 즐거운 작업이 된다.

 

이제 한 술 더 떠서 이들 유위와 무위의 논쟁을 단 칼에 해결하려 한 세력이 등장하니, 그들이 법가이다. 사람이 자꾸 무엇을 하려하니 안 된다면 사람이 아닌 것으로 무엇으로 하면 되지 않겠는가? 결국 무위이면서 유위인 어떤 것의 주체로서 법(法)을 세우는 것이다.

인간이 무엇을 판단하면 정실이 개입하고, 부패하니 그것을 법에 맡기면 될 것이라는 사유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 근원적 사고는 당대에는 아마 대단한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는데, 오직 군주만을 위한 제도였다는 점이다. 군주의 권력과 지위와 재산을 지키기 위한 제도로서 철저하게 제안 된 것이다 보니 법치가 아니라 권치(勸治)로서 모사(謀事)의 술책으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문득 우리의 법집행에 대해 생각게 된다. 우리역시 법치국가라 하면서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실제 법의 집행과 적용에 있어서 평등치 않다는 것을 체감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오히려 공공연히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말이 성행하지 않는가? 권력자와 부자에게는 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아마 한비가 이해하고 있던 형(刑)으로서의 법인 백성의 통치만을 위한 것으로서 20세기 전의 법가의 권치로 퇴행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빵을 훔친 자는 징역을 살지만, 수십억을 받아 처먹은 자들은 떡 값이거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처벌되지 않는다. 주민등록법을 어기고 불법의 투기를 하면 서민들은 처벌되지만 고위공직 후보자는 역시 기억나지 않거나 미온적인 인정을 하면 유야무야된다. 2000여 년 전의 경전에서 법치가 권치가 되지 않을 길을 찾는 것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3. 백가쟁명의 교훈

 

제자백가들의 3세기에 걸친 이러한 사상의 대격돌이라는 토양이 수십 세기를 내려오며 풍화되지 않고 여전히 무수한 사상의 밑거름이 되는 것은 역시 다름에 대한 수용과 비판을 통한 다지기로 견고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우린 논쟁다운 논쟁을 하지 못한다. 남의 말에는 귀를 닫아버리고 자신의 말만 주절거리는 나르시시즘에 빠져 독단만을 주장한다. 결국 다양성이 창출해내는 창의와 조화, 진리의 추구는 멀어지고 만다. 그들은 진정으로 격론했다. 타인의 말을 경청했으며, 그를 담아내는 그릇으로 다시 논쟁했다. 유가, 묵가, 도가, 법가의 중심 사상들을 쫓다보면 그러해야 함과 해서는 안 될, 내쳐야 할 것들에 대한 분별을 알게 된다. 분별력, 정말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아는 도덕적 정신력을 상실한 요즈음의 우리에게 진정 인간을 위한 공헌의 정신을 깨우치게 한다.

 

춘추와 전국시대라는 기원전(BC)5~2세기의 이전투구(泥田鬪狗)의 혼란, 오랜 질서인 주왕조의 예악이 붕괴되면서 시작된 백가쟁명은 이렇게 21세기에 그들 선제자의 사상에 담긴 구체적인 상황과 원인에 내재된 보편으로서의 태도와 법칙, 정신들의 합리적인 부분을 계승하는 것을 돕는다. 물론 백가쟁명이 꼭 이러한 추상적 계승의 가치로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우리에게도 남아있는 각종 제례의 형식적 기원이나 관습적 예절의 양태 속에 어떤 정신이 숨 쉬고 있는지, 이들의 철학으로서, 문화적 기원으로서의 원형들을 알게 되는 심지(心智)의 성숙이란 즐거움도 있다. 이들 백가는 중국의 사상적 기원으로서가 아닌 우리들의 정신에 깃든 동양 사상의 기초이다. 이들을 경(經) 과 전(典)의 단순한 문구의 해석이라는 차원에서가 아닌 세상에 대한 인식과 실천 방법론으로서 고찰하는 이 새로운 기회는 서구사상 일변의 분석적 양식에 견주어 결코 손색이 없음을 느끼게 된다. 무궁한 지적 매력을 담고 있는 책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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