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릭맨스티
최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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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과 여름이 만나 겨울이 된 남자와 여자의 얘기", 조락과 열정이 결합해 생명이 되고 죽음이 되는 순환의 얘기이다. 혹은 ‘소멸성의 무수한 쾌락’으로 이루어진 우리 인간들의 영원한 착각의 이야기이도 할 것이다.

삶의 안락을 조달하기 위해 자기 인생의‘보조 모터’를 필요로 한 여자와, 차이 없는 여자들과의 만남이 심드렁하지만 어느덧 습관이 된 여자와의 만남, 그리고 며느리를 들이고 싶어 하는 편모의 관습 같은 허영이 꾸며낸 결혼, 그 과정의 시시콜콜한 단면들이 묘사된다.

 

몇 차례 의미를 찾기 위한 만남이 이어지다, 서로의 몸을 탐색하고 그렇게 익숙해지면서 안락한 친밀감에 젖어들고 그 방심에 다른 인간들이 으레 하는 형식에 자신들의 삶을 맡기는 것. 가정을 꾸미고, 물건을 하나씩 쌓아가면서 욕망의 환상적 내용들이 충족될 것만 같은 기대로 부푼다.

그러나 “어디서 어떻게 이 많은 것을 욕망하는 것을 배웠을까?” 라는 여자의 자조적인 독백이 나올 때가 되면 더 이상 물건들의 세상이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목돈을 던져주지 않는 세상의 인색함! “늘 껄떡거리게 만드는 세상”에 슬슬 짜증이 몰려오고, 방 두 칸짜리 반 지하 전세는 두 젊은 남녀에게 자기 집의 소유를 향한 집념을 자극한다.

 

언뜻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에 등장하는 제롬과 실비의 커플에서 발견되는 세상에 맞서는 개성을 결핍하고, 외부에서 주어진 욕망들과 그 실현 가능성 사이에 벌어진 내면의 불안이란 동일한 소비사회의 갈등과 분열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여자는 내 집 마련 5개년 계획에 돌입하고, 욕망의 절제를 실천 하지만 사실은 이 자체가 또 다른 욕망이기도 하다. 여자의 이러한 집념에 반기를 들지는 않지만 “물질적이고 즉자적이며 육체적 자극에” 이미 민감해진 남자는 작은 부정의 유혹에 노출된다. 삶은 이렇게 서서히 진부해지지만 인생의 사건들이 잠시 제동을 걸어준다.

 

재산을 모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이 젊은 맞벌이 부부의 여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상의 동물인 ‘아기’가 자궁에 들어서고, 준비가 덜 된 여자는 남자와 낙태를 합의하는데 마트에서 세제(洗劑)의 용량 대비 가격비교의 순간보다 짧은 수초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우리 일반의 현실은 이처럼 피투성이 욕망 세계에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못한다. 끊임없이 욕망을 창조하는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속성이 우리를 절망시키고 안달 나게 하고 불안케 하여 그 대열에 들어서는 것만이 진리인 듯이 몰아대고 있음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조금 더 삶의 이해가 더해지면 남자는 참을 수 없는 수치와 굴욕의 기억이 될 것이고, 여자는 생명의 고통으로 온몸을 부르르 떨게 될 것이다.

 

아이는 또 들어서고 내 집을 마련한 여자는 사내아이를 낳는다. 남자의 편모는 손자를 위해 아들 내외와 동거하게 되고 여자는 직장에 전념하여 남자보다 먼저 승진한다. 삶은 살짝 지치게 하고 가벼운 일탈의 환상을 실재의 세계로 내려오게 하고 싶어진다. 본디 인생이란 것이 그렇게 되먹은 것이리라. 소설은 이처럼 꾸역꾸역 오늘의 우리들 대개가 살아가는 표정을 옮겨 담아내고 있다. 그러면서 그것들이 의미하는 욕망의 실재들이 무엇인지 관찰하게 한다. 무엇이 생명의 질서를 역행하게 하는지.

 

갈등이 있지만 소설의 멋진 표현처럼 “갈등을 통과한 연대의식”으로 부부는 위기를 넘어서고, 또 그렇게 또 다른 소멸의 쾌락을 향해 돌진한다. 아마 이 쾌락의 멸실을 극대화하려 했는지는 모르지만 소설은 극적인 전환을 하는데, 폭우 속에 계곡으로 추락하는 차내에서 야영지에 홀로 방치된 아이의 구원을 부르짖는 간절한 여자의 외침은 죽음의 순간과 새로운 삶의 신비로운 영속을 보게 한다.

 

여기서 장면은 벨기에로 입양된 한 청년의 ‘순간적인 죽음’이란 증세의 기억으로 전환되고 잠재된 무의식의 세계에 그려진 고통의 실재를 투영한다. 수소문 끝에 찾은 자신의 구출자인 산악구조대원과자신이 구조된 현장, 주홍색 석양이 평화롭게 물드는 계곡의 절경을 바라보면서 비로소 자기 부모들과 자신의 생명의 의미를 확인하는 말미는 어떤 이미지가 잡힐 듯 깊은 인상을 남긴다. 아마 청년 유진이 무의식 속에 중얼거리던‘오릭맨스티’라는 형체 없는 말에 의미가 부여되는, 선명하게 이해되는 장면인 탓이길 때문일 것이다. 오염되고 왜곡된 우리들의 삶과 역행적인 비본질의 것들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정화(淨化)와 회복의 감각을 되살려 주는 기운, 절망을 일깨운 지혜! 그것일 것이다. 내레이터가 흑백의 영상 기록물을 읽어주는 듯한 문장들, 그리고 강물 같은 이야기의 흐름이 인생의 거대한 질서의 엄연함을 더욱 진지하게 경청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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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안녕히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8
구보데라 다케히코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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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구조가 매우 흥미롭다. 매년 한 아파트 단지 내 초등학교 동창생이 줄어드는 숫자로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삶의 소소한 변화를 읽게 된다. 107명의 졸업생 동창이 마침내 0명이 되기까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소년‘사토루’는 중학교의 등교를 거부하고, 학교 담임선생의 오랜 설득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자신의 울타리를 방어하는데 성공한다. 아파트 단지 내로 자신의 생활범위를 정하고 단지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내딛지 않는 유폐(幽閉)된 삶의 경계를 단단히 걸어 잠그는 것이다.

 

일어나면 새벽 운동과 단지 내 복지관의 도서관에서 책을 닥치는 대로 읽고, 체력 단련실에서 가라데의 고수‘오야마 마스다쓰(한국명 최배달)’를 닮기 위해 운동에 매진하며, 그리곤 아파트 단지의 동창생들 집을 꼼꼼히 순찰하는 것이 그의 일과이다. 해마다 동창생들은 몇 명씩 이사를 하거나 등등의 이유로 줄어든다. 결국 그의 친구들,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관계가 감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소년, 아파트 단지라는 좁은 세계 속으로 자신의 인생을 닫아 건 소년의 삶에 펼쳐지는 단조로운 듯한 일상의 이야기들이 만만치 않게 재미있다.

 

베란다를 같이하는 이웃집에 사는 동창생,‘마쓰시마’는 소년이 소녀를, 여성을 알아가고, 삶의 기술들을 알아 가는데 더없이 좋은 이성 친구가 되어준다. 사토루의 무모한 듯, 혹은 무례 한 듯한 호기심과 질문에도 흔쾌히 솔직한 답변을 들려주는 소녀이다. 베란다 칸막이 사이로 종을 매단 줄을 연결하여 잡아당기면 얼굴을 내밀어 사토루를 맞으며 담배연기를 내뿜는 마쓰시마의 조숙해 보이는 모습을 곧 그릴 수 있을 것처럼 눈에 선하다.

중학교 졸업장이 쥐어지자 아파트 단지 내 상가에 있는 케이크 숍에 일자리를 가까스로 얻어낸 사토루와 사부(師父)로 부르기로 한 케이크 숍 사장과의 일화들이 친근하게 펼쳐지고, 파티시에가 되는 고단한 과정이 유쾌하게 그려진다.

 

사토루가 왜 아파트 단지 밖의 세계와 자신을 차단한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는 TV인터뷰 요청을 받고 출연의 결정을 고민하는 과정에 이르러서 회고담으로 초등학교 졸업식장에서 있었던 충격적인 사건의 전말을 듣게 된다. 여기서부터 소설은 더욱 동력을 얻은 것처럼 20대 청년에 들어선 남자의 이야기가 되어 세상과의 불가피한 접촉을 요구하는 내면의 갈등들이 조명되기 시작한다.

아파트 단지 내 유치원에 보육교사 발령을 받은 초등학교 동창생인‘사키’와의 연인으로서의 발전과 결혼에 대한 언약, 노쇠한 케이크 숍 사장으로부터 사업 후계의 약속 등 폐쇄된 공간에서의 삶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믿음을 갖게 되지만,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화하는 주변의 환경은 이러한 안주를 위협하기 시작한다.

 

사토루의 모든 것을 이해하는 연인이지만 사키는 결국 그를 떠난다. 결혼과 아이의 출산 등 예상되는 삶의 현실 앞에서 사토루의 은둔은 실질적인 장벽이 되는 것이다. 또한 케이크 숍의 사부도 기억력이 흐려지기 시작하고, 사업을 물려준다는 메시지와 함께 사라지고, 삶의 조언자였던 이웃집 마쓰시마도 자기의 인생을 향해 아파트를 떠난다. 아파트는 노후화하고, 빈집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연이은 화재와 부랑자들의 터전으로 쇠락해 간다. 케이크 숍도 마침내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형편으로 폐업하게 되고, 유치원 아르바이트마저도 여의치 않게 되고 만다.

 

화재를 피한 빈 집들에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들 들어서고 일본인과 결혼한 엄마를 따라 브라질에서 온 소녀에 대한 연민으로부터 마주하게 되는 단지 바깥, 세상으로 걸어 나가야 할 당위는 더욱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급기야 상처받은 어린 아들을 묵묵히 지켜봐준 어머니의 죽음은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야 하는 결정적 사건이자, 변화의 정점이 된다. 이처럼 소설은 엄청난 트라우마로 자신을 가둔 소년의 이야기이며, 동료들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소외와 폭력에 노출되어 신음하는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내면을 걸어 잠그고 고통스러워하며, 인간과의 관계를 주저하는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사랑, 이별, 성숙, 그리고 죽음이란 삶의 시간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특히, 동창생들을 세상의 무엇인가로부터, 그 잔인성과 폭력성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몸을 단련하고, 아파트를 순찰하는 소년의 영상은 깊은 인상이 되어 그의 말 할 수 없는 가슴에 안은 고통이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아파트 단지에 남은 유일한 동창생 명단에서 지우며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가는 그의 모습은 내 어깨까지도 같이 활짝 펴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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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의 시 민음 경장편 5
김사과 지음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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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한 가지 색에 사로잡힌 채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라고 시작한다. 그것은 노랗고 거대한 색일 것이고, 그 도시는‘서울=불법=섹스클럽’이란 도식을 성립시키는 그런 곳이다. 그리고 가장 안전한 개체이지만 그것은 이 도시에서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 존재자이지만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인 주인공‘제니’의 얘기이다. 그래서 ‘( )’, 아무것도 아닌 것, 그러나 무엇인 것이고, 이야기는“이름을 갖지 못한 것들의 긴 목록”이 된다.

 

매음굴에 짐작이 되어 팔려가고 그곳에는 필리핀, 러시아, 한국의 여자들, 그리고 국적불명(조선족)의 나, 제니가 있다. 환각제에 취해 매춘에 끌려 다니고, 고위공무원이 포함된 유한자들의 난교파티에도 포장되어 이 괴물들의 쾌락의 먹이가 되기도 된다. 쾌락과 돈이 서로 환원되는 이유이다. 섹스파티의 파트너였던 고위직 공무원이란 남자는 제니를 계속하여 찾고 그의 가정부로‘임차’되기에 이른다. 사람이 임차된다는 말은 이미 프로, 즉 자본주의 시장에선 일상화 된 표현이다. 인간이 상품, 즉 사물로서 거래되는 것에 사람들이 별다른 거부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자신들의 개성 없음, 무감각, 무관심의 자인(自認)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김사과의 감정 없는 시선은 아무런 열기를 지니지 않고 이 도시의 모습들을 이렇게 기록한다. 그러나 악다구니를 부리며 목청 높여 발악하는 그 어떤 냉소적 진술들보다 핏물이 배어나오는 통렬함이 있다. 이 고위관료 자식들의 국적 또한 걸작인데, 미국인인지, 한국인인지,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조차 지니지 못하는 한심한 인간들, 한국어가 오히려 서툴고, 미국산 주스, 미국산 토스트, 미국산 베이컨, 미국산 포크, 미국산 접시, 미국식으로 다리를 떨고, 미국산 소설을 읽으며, 영어를 투덜대며 아메리칸 블랙퍼스트를 먹어대는 이들의 천박한 장면은 경멸과 역겨움이 되어 한 폭의 우스꽝스런 춘화 같기만 하다. 푸른 눈의 영국청년이 가정교사로 들락거리고 제니는 이 청년‘리’를 따라나선다. 동류의 인간을 알아보는 본능, 자신의 나라를 도망치듯 벗어나 아시아 나라들을 흘러 다니다 아무런 목적도 의지도 없이 한국에 머물게 된 또 다른‘( )’이다.

 

이들이 머무는 곳, ‘페스카마 15호’. 자본 시장에서 비켜난 인간들,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제외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간이다. 두 사람이 포개지듯 눕기에도 옹색한 방이 다닥다닥 붙은 고시원 건물, 그리고 여지없이 들어선 교회, 매일 들려오는 주님의 사랑아래 행복해진다는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소리와는 정반대로 이곳 사람들의 삶은 매일 더욱 비참해져만 가는 아이러니가 공존하는 것은 왜일까? 목사에게 제니와 리, 이 두 이방인이 활용도 높은 수단으로 눈에 띄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몇 푼의 돈 봉투를 쥐어주고 부자 신도들 앞에 세워 그들의 험난했던 과거를 얘기하게 하곤 하나님의 종이 되었음을 간증토록 하는 대목에선 실소가 터진다. <주님이 허락하신 성공>이란 베스트셀러의 저자인 목사. 웃겨! 교회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인간들, 모두 같은 공장에서 찍어낸 것처럼 똑같아 보이는 서울의 교회는 한 가지 색에 사로잡힌 바로 그 서울 같기만 하다!

 

노동절 행사에는 노동자와는 아무런 관련 없는 사람들이 모여 이론을 떠들고, 부자동네의 미관을 해치는 낡은 페스카마 15호는 늦은 밤, 벽을 무너뜨리며 밀어닥치는 굴삭기와 함께 폐허가 되고, 재개발사업 용역업자들의 방망이 습격으로 사람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땅바닥에 끌려 다닌다. “지속 가능한 파괴”를 선이라고 하는 도시, 뉴욕도, 도쿄도, 런던도 아니고 세계 자본주의 최전선이 된 도시. 진짜 인간이 된다는 게 뭔지 알지 못하는 인간들로 구성된 도시. 값싼 연민을 보내는 것으로 휴머니스트가 된 듯 위선과 가식, 가면에 도취된 인간들, 그래서 휴머니즘을 쓰레기통에 쏟아버리는 제니의 행동은 논리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마약, 섹스, 폭력, 교회, 시장 자본주의가 쾌락을 향해 질주한다. 그 욕망의 전율을 쫓느라 미쳐버린 인간들에게 비정규직 노동자와 같은 프레카리아트라는 존재가 보일 턱이 없으며, 하물며 제니와 리 같은 이주 노동자의 존재는 거북하고 불편한 낯선 무엇 이상일 수가 없을 게다. 사회학자인‘이진경’이 그의 책(『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에서 지적한 실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존재를 지워버린 불온한 것들에 가 닿는다. 거북해서 보지 않고 외면하려는 것들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작업, 잔혹하게 착취하다가 제거하고 추방해버리며 그 존재를 부인하려는 우리들의 무능력한 이성과 망상을 까발리는 것이다.

 

꿈과 환각, 현실의 지대를 오가는 주인공 제니의 역겹기조차 한 얘기가 허구이기를 바라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니라고 손사래 치기에 급급해서는 우리들, 길을 잘 못 들어선 지배질서의 오인을 찾아 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소설은 이처럼 공생과 공존, 그 잃어버린 화합의 감각을 살려내는 지독한 처방이라 할 것이다. 또한 작가의 전작 장편 『풀이 눕는다』의 ‘나’와 ‘풀’이 삶과 이 사회의 기본적 딜레마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였다면, 이 작품의 제니와 리 커플은 그 제기된 문제들에 도사린 감추어진 치부, 사실들에 존재자의 이름을 일일이 부여하는 존재론적 명명식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김사과는 항상 다음의 작품을 기대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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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브레이커 - 세상과 온몸으로 부딪쳐 자신의 길을 찾는 소년의 이야기
파올로 바치갈루피 지음, 나선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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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에너지의 고갈,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으로 지구 생태계의 파괴, 인간의 도덕적 오만을 대표하는 유전공학 기술의 남용이 만들어 낸 반인(半人), 이렇듯 암울해진 미래의 인간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회는 극단적으로 양극화되어 부자들의 세계와 빈자들의 세계는 차단되어 폐허가 된 쓰레기 더미에서 재생품을 수집하기 위해 중노동에 시달리는 아이들과 그들을 착취하고 폭력과 살인, 배신과 기만만이 숨 쉬는 무법 공간의 지옥도가 펼쳐진다.


아무런 안전도구도, 생명에 대한 어떠한 연민도 없는, 생존의 욕구만 팽배한 현장, 거대한 폐선(廢船)을 해체하여 수입이 될 수 있는 구리, 철, 폐유(廢油) 등을 수집하기 위해 불빛조차 없는 암흑의 폐선 바닥과 좁은 덕트 속에서 쉴 새 없이 목숨을 건 노동을 해야 생존할 수 있는 곳이다. 사실 이러한 묘사는 상상의 미래도, 과장된 디스토피아도 아니다. 바로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거대 글로벌 기업들이 어린 소년소녀들의 노동을 착취하는 끔찍한 선박해체 작업의 현장은 즐비하기에 소설 속 소년과 소녀를 보는 마음은 안타깝기만 하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타인을 믿는다는 것은 커다란 위험이 되는 세계이고, 중노동일지언정 그것만이 유일한 생존의 길이다. 이 거친 일마저도 얻기 위해 비굴함과 폭력에 시달려야 하고, 노동력을 상실하면 장기를 비롯한 신체를 팔아야 하고 이마저도 없어지면 죽음만이 기다리는 그런 곳이다. 그래서 감독자가 되고 쓰레기 수거권리를 가지는 자가 되어 노동에서 벗어나는 행운을 쥐기 위해 남들이 찾아내지 못한 가치 있는 물건을 찾는 것은 이상이자 꿈이 된다. 선박 해체작업의 경량(輕量)팀 일원인 소년‘네일러’는 우연히 팀의 조장인 연상의 소녀인‘피마’와 해안 근처의 섬을 탐색하던 중 폭풍우에 전복된 부자들의 세계에서 온 쾌속선을 발견하고, 그들의 눈앞에 전개된 엄청난 귀중품들과 유일한 생존자인 부자들의 세계에서 온 소녀를 마주하게 된다.


네일러와 피마에게 있어 이것은 중노동을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을 의미한다. 소녀는 그들의 세계에 돌려주고 보상을 받을 수도, 아니면 신체라는 물질로서 팔수도 있는 대상이며, 그녀를 장식하고 있는 금과 다이아몬드등 귀금속만으로도 하나의 작업권리를 살 수 있다. 우리에게 이러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까? 내 생존의 수단으로서 한 인간 생명의 사생결단권을 갖게 되었을 경우 내 이익과 타자의 생명을 교환할 수 있을까? 더구나 자신들의 신체를 착취하고 인간적 존엄성을 부정하는 부자들의 세계에서 온 소녀를 위해 자신에게 온 행운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조차 여의치 않게 되는데, 폭력과 살인, 타자의 생명에 대해 어떠한 연민도 갖지 않는 잔혹한 인물, 바로 네일러의 아버지가 이끄는 일군의 무리와 생사를 건 사투를 벌이게 된다. 생명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살인, 끔찍한 이 세계에도 사랑과 보호와 연민의 유대는 있어 그들의 도움을 받아 경멸과 조롱의 의미를 담은 부자들, 스웽크(swank)인 소녀와 탈출을 감행한다. 소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소녀의 세계, 즉 부자들의 세계 또한 그치지 않는 탐욕으로 얼룩진 세계임을 드러낸다. 불법과 야만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서 소녀의 생명을 노리는 세력들로 인해 네일러의 꿈과 희망, 소녀의 귀환이라는 여정에는 끊임없이 위험이 놓이고 용기와 도전을 요구한다.


성취를 향한 길은 결코 평탄치 않다. 때론 예기치 않은 존재로부터의 도움이 있고,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장애를 넘어서야 하는 순간이 있으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선 절대 절명의 선택이 요구되기도 한다. 그것은 미지에 대한 과감한 도전의 용기이며, 폭풍우 몰아치는 거칠고 거대한 파도의 비탈과 협곡을 곤두박질치는 사투를 건 승부의 세계이기도 하다. 소녀 니타와 소년 네일러는 그들 서로에게 ‘러키 걸’, ‘러키 보이’라는 행운으로 불리지만 이들에게 다가온 행운(lucky)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하기위해서는 이처럼 힘겨운 풍랑과 마주하는 태도일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결론은 진부하고 낭만적인 교훈이라고, 선박해체작업에 내몰린 어린 소년소녀들의 실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공허한 소리에 불과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찾아야 할 꿈조차 꿀 수 없고, 도전해야할 희망조차 없다면, 우린 무엇을 말 할 수 있겠는가?


“교만과 죽음은 빨리 찾아오는 법”이라고 말한다. 오늘의 우리 세계가 보이는 행태는 인류 역사의 그 어느 시기보다 오만하고 자기 과신에 젖어있다. 물질은 정신을 압도하고, 과학은 자연의 본성을 통치하려한다. 아마 우린 죽음, 자신들의 운명을 재촉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 난자에 개, 호랑이, 하이에나의 유전자를 혼합하여 만들어낸 혼합생명체인 반인, 가난한 자들의 노동착취와 신체를 거래대상으로 하는 파텔, 로스앤칼슨 등 거대기업들의 부도덕성, 해수면 아래로 잠겨버린 한때 영화로 불리던 도시의 음울함 등은 이 소설이 전하려는 메시지들을 이처럼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 세대들, 지금의 어린 소녀 소년들에게 지향해야 할 인간의 진정한 가치, 덕목이 무엇인지를 생각게 하는 생명의 이야기가 된다. 생명, 인간의 존엄성, 그 고귀한 가치들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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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낮은 언덕들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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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외의 세상을 이해하는 데 인색해질 것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이 소설은 제법 도전적이다. 타인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데 서툴고 무관심하기만 한 사람들에게 따라 올 것을 기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마 소설에 등장하는‘말레비치’의 그림, <검은 사각형>의 일화를 통해 “세상에는 사회와 인민 이외의 무언가의 가치가 존재함”을 말하려 했듯이 은폐되고 드러나지 않은 것들, 보지 않고 외면한 것들, 알지 못한 것들을 드러내는 작업, 즉 익숙하지 않은 것들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하나의 수단으로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리라. 존재하는 것들을 진정 보려면 말이다.

 

금지된 그림을 인민에게 드러내는 기획, 삶의 방랑자이자 시간의 방랑자인 주인공‘경희’처럼“문제 아닌 모든 것들을 모두 한꺼번에 고요히 번뜩이는 적막한 별들처럼 생각할 수”있도록 해서, 우리와도시의 존재론적 본질을 목격하는 여정으로 끌어들이는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자면 “시간의 질적 한계에 다다르면” 이미 모든 것들, 산, 강, 도시...들은 더 이상 특정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듯이 인류 최초의 도시‘우르’에서부터 최후의 도시일 수 있는 베를린, 서울...에서 ‘존재의 중첩’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존재란 어쩜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흔적들, 혹은 그 소산임의 증거들일지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은 이‘도시’라는 현대 사회가 발산하는 의미들, 그것에 포획되어 방황하는 존재들의 흔적을 탐사하는 여정이 된다. 도시의 속성, 도시의 자연이 된 익숙한 문화표지들에 대한 단상, 직업과 화폐와 정주(定住)의 주소와 같은 도시의 요소와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주인공의 방랑적 삶의 이야기들이 기억을 주고받으며 “오렌지 색 폐허와 낮은 언덕들의 도시”인 우르에서 스타벅스를 발견할 수 있는 오늘의 도시사이의 그 엄청난 양태적 유사에서 시공의 엷음, 존재적 예시를 보게 한다.

그런데, 방랑자들에게 잠자고 쉴 수 있는 방이나 집을 회원들끼리 공유하는‘카라코룸’에 가입하면 전 세계에 동시적인 잠자리를 갖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코스모폴리탄적 이상처럼 들려주는 얘기에서 13세기 대제국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에 몰려든‘세계인’들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지금은 흔적조차 없는 옛 영화(榮華)와 대비되어 주인공처럼 살짝 현기증을 느끼게 된다.

 

한편, “어메리카나이즈드 코리아”와 같이 자기의 정체성을 지워버리고 문명적 일탈을 꿈꾸는 우리의 일그러진 문화사대주의는 카라코룸을 파괴한 러시아와 몽고인들의 어리석음에 가닿고, 이것은 환경주의 게릴라가 자신들의 생활이고 그들 자체여야 했던 사람들의 일화를 빌어 “추상적인 믿음을 위해서 피부색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지 못하는 우리들의 무지를 우회한다.

설혹 영혼의 동굴을 갖지 못한 기계화된 프롤레타리아 종족으로 전락했음을 인지했을지라도 우리가 “정체불명의 도시인이란 옷”을 벗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왜일까?

 

실존하지 않는 직업, ‘낭송극 전문 배우’라는 직업의 경희라는 여성의 도시 여행에서 마주하는 독일어 선생, 치유사, 미스터 노바디, 마리아, 인도인 반치, 익명의 남자...들과 나눈 이야기의 기록들이다. 그런데 이들, 그리고 경희의 실체는 왠지 잡을 수 없는, 우리에게 익숙한 그런 존재들이 아니어서 정말 “수많은 뼈와 돌들의 속삭임”처럼 아득하다. 그래서 더욱 신비롭고 저 깊숙한 시원의 어느 진실들을 비로소 보는듯한 느낌을 갖는다. 삶, 죽음, 그 순환의 위대함, 시간을 방랑하는 자들에게 그렇게 드러내는 존재의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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