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지먼트 2
권남기 지음 / 도모북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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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릇 열광의 속성에는 호기심과 탐욕스러움이 있다. 대중의 이 원초적 욕망을 자극하는 것만이 성공이라는 것을 가장 잘 터득한 자들이 요즘의 대중연예 종사자들이라 해도 그릇된 얘기는 아닐 것이다. 흔들고, 장식하고, 드러내고, 벗기고... 그래서 관능적인 몸짓으로 흐느적거리며, 고가의 패션으로 치장하고, 하의(下衣) 실종이라는 극한적인 노출도 부족해서 스크린은 온통 욕망으로 꿈틀대는 나체의 몸뚱이들로 가득 들어찬다. 여기에서 욕망의 광기만 제거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모든 것의 과잉, 무엇인가 넘치기 시작하면 그것은 광적으로 변한다. 광기의 시대! 권력을, 명예를, 물질을, 성(性)을, 이것들 모두가 돈으로 살 수 있는 비도덕적 재화가 되어 고유의 도덕적 규범이 들어설 자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오직 남보다 더 갖는 것만이 미덕이라고 떠들어 댄다. 이것들을 더 소유하기 위해 돈이라는 성공을 쫓는데 혈안이 되어있다. 돈에 대한 광기, 각종 미디어는 성공을 말하는데 여념이 없고, 그것은 곧 돈 방석을 말한다.

 

이처럼 세상이 온통 원초적 욕망에 열광할 때 인간의 욕망에 호소하는 수단으로 몸뚱이에 의존해야 하는 인간들은 여기에 가장 부합하는 대중연예인이야말로 망설일 여지가 없는 선택지가 된다. 그들은 과시적 소비와 물질의 열광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성공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신주의의 광기에 휩싸인 세상에서 이것은 진실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즉 물질적 과시에 열광하는 세계에서 이보다 진실인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미 도덕도, 정신도 들어설 자리가 없는 이 세계에서.

 

소설은 바로 이러한 우리의 세상, 지금 우리의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는 오직 원초적 욕망만이 미덕이라고 하는 현실을 그리고 있다. 몸뚱이로 상징되는 물신주의의 화려함 속에 명멸하는 구역질나는 추악(醜惡)함의 세계를. 배신과 기만과 야합과 뒷거래, 그리고 파렴치함이 정직과 성실과 순수함과 열정을 누르는 사회를. 부정과 부패가 또 다른 부정과 부패의 먹이가 되는 그런 사악함의 사슬만이 존재하는 세상을. 감각적 쾌락을 충족시켜주는 천박한 본능의 시대를.

 

강렬한 자극! 대중을 온통 사로잡은 최고의 아이돌 미녀 스타인‘오유경’이 수많은 취재진이 모인 기자회견장에서 자신의 머리에 탕! 하고 권총을 당긴다. 붉게 물들어가는 하얀 테이블보, 탐욕스런 카메라의 셔터소리와 불빛만이 번쩍인다. 왜 자살해야만 했을까? 누가 이 상황에까지 몰아댔을까? 누가, 무엇이 책임져야 하는 것인가? 소설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서이다. 오유경이란 연예스타가 만들어지고 대중의 별이 되기까지에 이르는 이 사회의 맨 낯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거대 매니지먼트 기획사는 정,관(政,官)계 거물, 재벌기업 2세, 공중파방송 프로듀서, 연예미디어 기자, 영화감독, 작곡가, 광고주 등등이 얽히고 섥혀 욕망을 교환하는 공간이 된다. 연예스타라는 미끼는 성(性)의 물질적 거래를 통과의례로 하고, 성적 노리개의 대가로서만이 방송출연과 스크린 데뷔, CF 계약을 담보한다. 욕망의 경로를 틀어쥔 이들 X새끼들의 더러운 쾌락의 일회적 배출구가 되어야 하는 이 어두운 세계의 단면들이 여과 없이 책장을 채워나간다. 이러한 일그러진 연예 매니지먼트의 관행을 거부하고 노력과 실력이란 정의를 추진하여 왜곡된 거대한 연예계의 시스템에 대항하여 오유경이란 소녀를 최고의 스타로 올려놓는 인물을 통해 매니지먼트의 당위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부패한 사회, 이미 욕망의 광기에 휩싸인 사회에서 백조를 가만히 둘리가 없다. 돈의 위력은 모든 것을 배반하게 한다. 우리 사회를 한 동안 들끓게 했던 연예인 섹스 동영상 유출, 성(性)접대에 시달리던 어느 연예인의 자살 사건 등이 오버랩된다. 연예인의 지극히 사적인 생활을 관음증적으로 소비하는 대중들의 실종된 의식세계, 악취나는 연예계의 성거래 커넥션, 여기에 물신과 성공의 미덕을 부추기는 몽매한 시대의식에 매몰된 연예인 지망생들의 무분별함이 결합하여 빚어내는 우리사회의 비극적 초상을 보게 된다.

 

화려한 의상과 악세사리, 고가의 물질로 가려진 이면의 추악함과 파렴치함, 역겨움을 직시하지 못하는 한 또 다른 우리 아이들의 희생은 계속 될 것이다. 너무 커다란 인생의 상처와 박탈이 될 수 있음을, 물질의 소비와 과시라는 욕망의 추구는 결코 삶의 진정한 미덕도, 선도 아니라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진정 사랑했던 사람과의 모습이 대중의 일회적 욕구의 소비를 위해 거래되는 세상에 대한 대중적 자각도 요구된다. 오유경은 누가 죽인 것인가? 우리 대중들 모두가, 이 시대가 죽인 것이지 않을까? 연예계의 뒤안길을 처절하다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담아낸 이 소설은 욕망의 광기를 자각하지 못하는 우리들 모두에게 방아쇠를 당기고 있다. 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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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복서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1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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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으로 구성된 옴니버스 형식의 장편소설이다. 이것이 모두 편지로 이루어져 있고, 편지만이 지니는 독특한 형식성과 내용에 반영되고 있는 사람들의 감추어졌던 이야기의 진실에 쏙 빠져들게 되는 구조이다. 이미『고백』으로 인간의 내면을 거침없이 휘저었던 작가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것은 물론이다. 편지라는 형식에 옮겨지는 글이 대개 미처 표현되지 못했던 가슴에 가두어두었던 말들인 경우가 많듯이, 은폐되었던 인간의 위선과 가장, 욕망, 진실들을 드러내는 수단이 곧 편지라는 점이다.

 

문득, ‘편지’와 ‘생각의 언어’는 서로 통하는 의미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편지는 쓰고 나서 보낼지 말지를 망설이게 한다. 요즘의 전자메일처럼 순간적으로 보내고 동시에 받아보는 그런 망설임 없는 가벼움의 언어가 아니다. 편지에 쓰는 어휘와 문장은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다듬어진다. 일상의 언어보다는 훨씬 생각이라는 시간의 여유를 요구한다. 또한 편지를 받으면 몇 번씩이나 읽어보게 되고, 음미하게 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 때문일 것이다.

 

고교시절 방송반 활동을 같이 하였던 동료의 결혼식으로 시작되는 첫 번째 작품은 얄궂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유일하게 결혼식장에 보이지 않았던 한 명의 여자동료에 대한 소문의 진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옛 기억 속에 묻혀있던 장면들에 대한 저마다의 내심을 드러내게 한다. 나타나지 않았던 친구에게 벌어진 사건의 진실, 그녀와 동행했던 두 명의 여성이 보았던, 그리고 내심의 생각들이 드러남으로써 오해가 누적되고 불신이 형성되는 과정들을 목격하게 된다. 산사(山寺)를 내려오다 넘어져 얼굴에 깊은 상처를 입은 친구에 대한 무성한 소문의 진상과 죄책감, 억측들에 개입된 인간의 은밀하고 이기적인 내면을 접하게 된다. 가장(假裝) 속에 숨겨진 욕망들의 적나라한 드러냄이 일품이다.

 

두 번째 작품은 여섯 명의 제자를 인솔하고 남편과 함께했던 소풍이 제자를 구하러 강물에 뛰어든 남편의 익사로 함께했던 아이들과 여교사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된 옛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나 은퇴를 앞두고 병석에 누운 여교사가 성년이 된 당시의 제자들이 사회의 건강한 일원이 되어 살고 있는지를 살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교사가 된 제자와의 왕복 서신이다.

 

그것에는 성인이 된 여섯 명의 아이들을 만나서 전해들은 당시의 사건에 담긴 저마다의 의미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물에 뛰어든 여교사가 남편을 먼저 물에서 끌어낸 행동에 대한 해석, 선생님이 자신을 구해주었다고 기억하는 아이가 느꼈던 사건의 무게와 정말의 고통이 된 말들과 존재, 물에 뛰어들지 못하고 강가에서 지켜보기만 했던 죄책감과 무력감, 원망과 이해와 연민이 교차하는 심경들을 통해서 인간에 대한 이해, 아이들에 대한 교사로서의 관점과 책임감 등이 잔잔하게 흐른다. 역시 얄미울 정도의 반전을 더해 이야기의 여운을 더욱 깊게 하면서.

 

마지막 작품은 꽤 깊은 인상을 남긴다. 기억의 자기보호 본능. 불현듯 해외자원봉사자가 되어 떠난 남자와 연인인 여자의 편지이다. 이 작품은 복선이나 대반전등 위의 두 작품에 비해 긴장감이나 놀람이 비교적 높게 다가온다. 어린 시절 어른들의 행위가 아이들에게 전이되는 형상, 숨겨진 욕망의 모습들, 그리곤 자신에게 닥쳐온 위기에서 되살아나는 지워졌던 기억의 진실들을 통해 인간 내면의 취약성과 야수성의 면목을 직시하게 된다. 자기중심적 이해의 오류, 미흡성, 한계들...에 대해서.

 

편지는 우리에게 타인의 슬픔과 아픔을 이해하는 수단이 되어주기도 하고, 자신을 살펴보는 생각의 시간을 부여해주기도 한다. 편지라는 의사전달의 독특한 특성이 함유하고 있는 이러한 묘미와 효용성, 효과를 살려내어 그것에 인간의 내면적 진심들을 투영해 낸 이 작품은 그래서 왠지 모르게 내 잠들었던 의식들을 깨워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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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그리고 무한 - 칼링가 상 수상자 대표작 김영사 모던&클래식
조지 가모브 지음, 김혜원 옮김, 곽영직 해제 / 김영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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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과 생명, 우주적 영감을 발견케 하는 최고의 교양과학서

 

자연 현상에 대한 많은 의구심들, 혹은 가늠할 수 없어 막연한 장벽에 부딪게 하는 최초의 탄생과 그 종말에 대한 무시할 수 없는 호기심의 문제들, 그렇다. 어떤 우주적 영감을 찾고자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영원한 관심사일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이것들을 찾으려했고, 그리고 이 욕심은 달성됐다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열악한 지적 상상력이 이해하지 못했던 4차원의 세계, 유기체와 무기물의 그 경계, 나란 생명이 발을 딛고 있는 작은 행성과 태양계, 그리고 은하와 우주의 생성과 그 모습을.

 

수(數)의 발명과 수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자연을 이해하려는 요구의 인간의 탐구심, 그것이 물질을 규명하고 그 규명된 지식이 우주의 섭리를 이해하는 초석이 되고 물질과 생명의 근원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며, 어린 시절 막연한 과학의 원리로만 주입되었던 것들이 어떤 의미와 배경을 가진 것이었으며, 바로 그것들이 우주의 모든 물질과 생명의 탄생과 소멸을 말하려는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내가 밖에서 볼 수 있는 것들, 내 육안으로 확인 할 수 있는 것들, 아니 과학적 도구를 통해서라도 볼 수 있는 것들의 경계를 초월한 것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구성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비로소 배웠다고 해야 하겠다.

 

길이와 너비와 높이로 이루어진 입면체인 3차원을 벗어나 4차원은 시간이 더해진다는 것은 누누이 들어왔던 상식이지만 그 형태를, 그리고 단위가 다른 시간을 어떻게 다른 세 개의 단위인 거리로 변환하고 이 과정의 의미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지 선명하게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우주 공간 전체에 미치는 시간의 표준 속도화는‘광속’, 즉 1초에 30만Km, 1피트 입방체라는 공간은 단지 0.000000001초에 불과하다는 것을, 바로 공간의 존속기간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존속 기간이 길어지려면 시간축의 방향으로 길게 잡아 늘려야 하며, 그것은 이 비틀린, 또는 휜 공간의 모습을 그리게 하고, 광활한 우주의 형태를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한편 제곱해서 -1이 되는 허수 'i(√-1)'의 탄생, 그것의 소용을 보게 된 것도 이 책의 미덕일 것이다. 4차원의 공간에서 시간거리를 표현하는데 얼마나 적절한 개념인지를 말이다. 단지 수학 그 자체의 계산방법으로서만 이해했던 것을 세계를 이해하고 상상하는 수단으로서 눈을 뜨게 해준 것이다. 이렇게 이 책은 내 감겼던 눈을 뜨게 해주는 설명들로 가득하다. 빛의 파동 운동처럼 아무런 느낌도 전해주지 않던 것이 모든 물체의 원자들 사이뿐 아니라 성간공간(星間空間)을 균일하게 채우고 있는 물질, 바로 ‘빛을 나르는 에테르’라는 가설적 물질을 매개하고, 분자, 원자, 그 안의 전자들의 운동을 가늠하는 데로 이어진다. 궁극의 물질을 이해하는 귀중한 개념으로서.

 

이렇게 빛과 그 속도의 무한한 개념의 영역을 여행하다보면 그 여정들, 과학적 설명의 과정에서 순간순간 SF적 상상의 세계를 그리는 몽상에도 빠져들게 된다. 달리는 열차의 식당간에 앉아있는 내가 줄어든 모습을 그려보기도 하고, 광속으로 지구에서 18년 떨어진 시리우스 별로 항해하고 온 내가 주변 사람들의 폭삭 늙은 얼굴에 당혹해하는 장면도 떠올려 본다. 시간과 공간의 그 상대성의 세계를. 이것은 신비의 영역도 환상의 세계도 아니다. 바로 입증 가능한 과학의 세계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양자 물리학’? , 뉴턴의 고전 물리학도 다 이해하지 못하겠는데, 양자물리학이라니! 그러나 고전 역학의 개념들이 원자의 세계에 적용되지 않는 물체들의 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즉 물체의 실제 운동에 대한 진실을 규명함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요긴한 접근임을 알고서는 그 낯섦과 이질감을 벗어던지게 된다. 그 설명들이 어찌나 친절한지, 가모프가 자신의 아들을 염두에 두고 집필했기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비록 초고를 읽게 한 당시 그의 초등학생 아들이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욕심 부리지 않고 천천히 숙독하면 오히려 가모프가 말해주고자 하는 과학의 세계에 푹 빠져들고 말 것이다.

 

그리고 조금만 더 이해를 증진시키면 물리학의 개념들이 인문,사회학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들의 전(前)개념으로서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즐거움도 맛볼 수 있다. 일례로 어떤 주의나 이념의 충돌과 소멸의 현상을 말하는 ‘쌍형성 과정’이 반대 전하(電荷)를 가진 두 전자의 소멸 과정이라는 것을 통해 모호했던 이해가 분명해지기도 하고, ‘핵변환 과정’이나 ‘열해리’와 같은 분자간의 충돌 현상에서 사회적 변환에 대한 어떤 상상적 은유와 통찰의 빛을 발견할 수 도 있다.

 

온도란 분자 운동의 정도에 불과하다는‘브라운 운동’으로부터 섭씨 6000도의 태양 표면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나아가 태양내부의 엄청난 온도로 인해 모든 전자껍질이 벗겨져 원자조차도 존재하지 못하는 벌거벗은 핵과 자유전자들의 혼합물을 상상하는데 어려움 없이 도달하게도 된다. 그리고 그 무질서의 상태, 불규칙 운동에서 조차 확산이라고 부르는 거리를 측정할 수 있음을 보고는 인간의 그 상상의 지적 능력, ‘생각’의 능력,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아마 이 책이 주는 최고의 미덕일 것이다. 미처 우리네 학교교육이 가르쳐주지 않는 과학적 탐구, 무언가를 알고자 할 때 어떻게 생각해야 했는지를 규명하기 위해 창안해낸 도구들의 원리와 상상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의 실체들을 접하게 해주는 것이다.

 

70만 Km의 반지름을 가진 태양의 중심에서 빛이 표면 밖으로 나오는데 30만Km 의 속도를 지닌 빛이 2초여 만에 나오지 못하는 이유, 소금과 같은 결정체의 성장이 왜 생명현상으로 간주되지 않는 것인지, 순전히 물리적 화학적 과정인 분자의 이성변화와 생물학적 현상인 돌연변이가 얼마나 동등한 물질적 현상인지, 다양한 화학원소의 결합인 전기 인력이 행성계의 결합인 중력과 얼마나 유사한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발견케 한다. 또한 태양계를 포함한 은하계에서 태양계는 수억 개의 별들로 구성된 원반의 가장자리에 놓인 작은 행성계라는 사실, 나아가 이러한 은하계가 수없이 우주에 존재한다는 사실, 그 우주의 휘어진 모양에 이르기까지가 물질의 최소 단위인 핵자와 중성미자, 전자의 운동을 통해 유려하게 설명되고 있다. 단지 과학의 걸출한 고전적 입문서의 지위를 넘어 우리가 우주자연의 존재를 이해하는데 더할 나위없는 지적 소양을 지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나는 분명 이 책에서 내가 부렸던 우주적 영감에 대한 욕심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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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2-05-24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필리아님의 리뷰를 읽어보니 문득 '과학의 형식'이 지니는 본질적인 한계(?)를 지적한 어느 철학자의 글 내용이 떠오릅니다. 다소 길지만 재미삼아 한번 읽어 보셔요~

* * *

과학이라는 것

세상에서 흔히 과학이라는 것은 철저하고 확실한 전제에서 나온 옳은 추리에 의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무조건 참된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순수하게 논리적인 추리의 연쇄로 얻어지는 것은 아무리 그 전제가 참되다고 해도, 그 전제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의 명료화나 상세한 풀이 이상은 아니다. 따라서 함축적으로 이해된 것을 설명해 내보이는 것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것으로 칭찬받는 학문은 수학적인 것, 특히 천문학이다. ······

그러나 천문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진리의 근원은 사실 귀납이다. 즉, 많은 직관 속에 주어진 것을 정리하여 직접 기초한 옳은 판단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판단에서 후에 가설이 만들어지며, 가설이 경험에 의해 완전성으로 다가가는 귀납으로서 확정되면, 최초의 판단이 증명된다. 가령 여러 유성이 운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 이 유성 궤도의 공간적 관련에 대해서 많은 가설이 있었지만, 결국 옳은 가설이 발견되었고 다음에는 그 운행을 지배하는 법칙(케플러의 법칙)이 발견되었으며, 마지막에는 그 운행의 원인(만유인력)도 발견되었다. 주어진 모든 사례가 가설과 일치하고, 또 그 가설에서 나온 결론, 즉 귀납과 일치한다는 것이 경험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이 가설들은 모두 확실성을 얻게 되었다. 가설을 발견하는 것은 주어진 사실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그것을 적당히 표현하는 판단력의 작업이지만, 귀납, 즉 여러 가지 직관이 그 가설의 진리성을 확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우주를 자유로이 뛰어다닐 수 있고, 또 망원경과 같은 눈이 있다고 하면, 오직 하나의 경험적 직관에 의해 이 가설의 진리성이 직접 기반을 얻는 일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추리는 인식의 본질적이고 유일한 원천이 아니고, 사실은 응급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

그 밖에도 과학적인 형식은 특수한 모든 것을 보편적인 것에 종속시키고, 그렇게 하여 점점 위로 올라가는 것이지만, 이러한 형식의 당연한 결과로서, 많은 명제의 진리는 논리적으로만 기초를 이룬다는 것, 즉 다른 명제에 의존함으로써 동시에 증명으로 나타나는 추리에 의해 기초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이 형식은 모두 인식을 쉽게 하는 수단이지 더 큰 확실성을 얻기 위한 수단은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떤 동물의 성질을 그것이 속하는 종(種)에서 다시 올라가서 속(屬)과 과(科), 목(目)과 문(門)에서 인식하는 것은 그때그때 주어진 동물을 그것만 독립시켜 연구하는 것보다 쉽다. 그러나 추리로 이끌어 낸 모든 명제의 진리성은 언제나 진리가 아니고 직관을 기초로 하는 어떤 진리에 제약되며, 결국은 거기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직관을 기초로 하는 진리가 추리에 의한 연역과 언제나 같은 것처럼 명백하다고 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직관을 기초로 하는 진리를 택해야 할 것이다. ······

따라서 어떠한 경우에도 직관적인 명증성이 증명을 거친 진리보다 훨씬 훌륭하며, 증명을 거친 진리는 직접적인 명증성의 근원이 아주 먼 경우에만 용인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이것이 증명을 거친 진리와 같은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경우나 더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경우에는 한층 더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

우리의 신념은 직관이 모든 명증의 제1 원천이며, 여기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계를 갖는 것이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이다. 또 개념에 의한 매개에는 많은 착각이 따라다니기 때문에, 이 절대적인 진리에 가장 가까운 길이 언제나 가장 확실한 길이다. 그런데 확신을 갖고 되풀이하여 말하지만, 유클리드에 의해 과학으로 확립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수학'을 보면, 수학이 걸어가고 있는 길이 이상한 것이고 전도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이 원하는 것은 모든 논리적인 기초를 직접적인 기초로 환원하는 데에 있다. 그런데 수학은 도처에서 수학 특유의 직관적인 명증을 제마음대로 물리치고 여기에 논리적 명증을 대치시키고 있다. 이것은 지팡이에 의지하여 걷기 위해 스스로 다리를 절단하는 것과 같다. 또는 괴테의 《감상주의의 승리(Triumph der Empfindsamkeit)》에 나오는 왕자가 현실의 아름다운 자연을 외면하고는 자연을 모방한 무대 장치를 보고 기뻐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나는 논리적으로 주어지는 수학적 진리의 단순한 인식 근거와 공간 및 시간의 각 부분이 직관적으로만 인식될 수 있는 직접적인 연관인 존재의 근거 사이의 차이를 새삼 설명하지 않고, 여기 언급한 소견을 앞에서 말한 것과 결부시키는데, 이 연관을 통찰해야만 참된 만족과 근본적인 지식이 얻어진다. 그런데 단순한 인식 근거는 언제나 표면에 머물고 그것이 '그렇다'는 지식은 줄 수 있지만 '어째서 그런가'라는 지식은 줄 수 없다. · · · · · ·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분석론 후편(Analyt. post)》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물이 그렇게 있다는 것과 왜 그렇게 있는가 하는 것을 동시에 가르치는 지식은 이것을 따로 가르치는 지식보다 더 정밀하며 우수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물리학에서 어떤 것이 그렇게 있다고 하는 인식이 '왜' 그렇게 있는가 하는 인식과 하나가 된 경우에만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中에서


필리아 2012-05-26 16:17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읽은 글입니다. 적절한 인용이네요. 고맙습니다. 가모프의 이 책이 만족스러운 것도 바로 왜 그런가와, 어떻게 그런가를 이해시키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여전히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때 그것은 불확실한 가설로 남겨두고 있어요. 또한 미래의 지식에 기대하고 있기도 하구요. 제겐 그런 그가 믿음직스러운 과학자인 거죠...
 
세상 모든 행복
레오 보만스 엮음, 노지양 옮김, 서은국 감수 / 흐름출판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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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표제처럼 경제, 정치적 위상에서 차이를 가지고 있으며, 서로 다른 문화와 풍토의 지구촌 곳곳에 사는 사람들이‘행복’을 말한다. 또한 심리학, 사회학, 경제학, 경영학 등 다채로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이다 보니 ‘행복(happiness)’이란 하나의 관념에 대해서 실로 다양한 정의와 사유를 담아내고 있다. 생태환경에서,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가치로서 말하는가 하면, 개인적 가치로서만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으며, 물질의 소비와 쾌락은 결코 행복을 말해주지 않는다는 사람에서부터 오히려 행복은 시간, 돈,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이라는 사람도 있다.

 

또한 행복에 접근하는 황금 열쇠란 없으니 개인의 내면을 풍부하게 하는 노력을 하라고 주문하기도 하고, 반면에 행복의 요소라고 줄줄이 나열하며 접근로를 말하는 이도 있다. 게다가 행복은 유전적 기질에 좌우되는 것이라는 결정론적 관점을 보이는 사람도 있으며, 유전적 성향이 기반이 되지만 결국은 개인의 가치지향에 따라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이처럼 행복은 이 책에 즐비하게 정의되는 것처럼 단순하고 획일적인 정의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란 얘기일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느끼는 행복에 대한 보편적인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순간적 쾌락이기도 하고, 성취를 향한 과정일수도 있으며, 내면적 평온, 정신적 해방감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그런가하면 내면 깊숙한 곳의 어떤 고유한 생명력을 느끼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대체 행복이란 것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그것에 접근하려 하는 것일까? 이 책의 많고 많은 행복의 편린들에서 자신의 내면에 공명하는 행복을 찾아내는 것이 답이 될 것이다. 그렇게 선택지가 많은 행복론들이 여기 있다.

 

나는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에 살고 있다. 이 도시는 작은 땅위에 엄청난 밀도의 사람들이 한정된 자원을 두고 극한의 경쟁을 벌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회적 재원과 물질, 서비스가 집중된다. 이 도시는 물질과 소비를 권장하고, 각종 미디어는 수입차와 고가의 브랜드 패션을 칭송하며 물질경제의 성장을 미덕이라고 부추긴다. 끊임없이 사양을 추가한 제품이 출시되어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를 구분하여 소비 욕구를 자극하고, 이 물질 소유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곧 인생의 성공이고 행복이라고 주입한다. 이제 미덕이 되고 선이 된 물질, 성공의 척도이자 권력의 상징이 된 물질에서 나는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게 되고, 이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 물질이 집중되어 있는 이 도시를 떠날 엄두를 내지 못한다. 혹여 뒤처질까봐. 내 고향이기에. 물질만이 삶을 행복하게 해주리라는 믿음에서?

 

그러나 이 도시에 사는 대다수 사람들의 얼굴에서 나는 행복을 쉬이 발견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명품가방을 들고, 유명 패션으로 치장하고, 테이크아웃 커피를 손에 들고 있는데도 삶의 만족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다. 복합상영관에서 영화를 보고, 수입차에 몸을 싣고 근교의 레스토랑에서 음악을 들으며 식사를 해도 행복은 찾아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하지 않는다. 사실 이유는 너무도 뻔하지 않은가? 삶의 목적, 그 지향점이 물질의 획득에 있는 한, 자신들의 한정된 돈, 부족한 돈, 없는 돈,... 없는 데 쫓는 것처럼 인간을 비참하게 하는 것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항상 물질이 자신의 재원을 앞지른다. 그 도달할 수 없는 욕구 충족의 미완(未完)이 행복을 앗아가고 고통으로 불행하게 한다. 그래서 삶이 불만족스럽기만 하다.

 

책에는“돈과 소비가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하는 뉴질랜드의 어느 교수도 있지만, 아마 그는 상당한 부를 소유한 자이거나, 소비의 절제를 깨우쳐서 적절한 소비에서 즐거움을 찾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우리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이 사람처럼 막대한 돈도 없을 뿐 아니라, 물신주의를 완전히 떨쳐내지도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행복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물질을 통해 얻는 행복감, 그것은 대체 짧은 순간의 희열로 끝나기 마련이고, 곧 이 상태에 적응해서 그 순간의 쾌락은 부질없이 축소되고 사라진다. 소위 경제학에서 말하는 한계수확체감의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만일 무진장한 돈을 가진 거부(巨富)가 되어 최고의 물질들만 소유하고 있다면 행복해질까? 이러한 물음은 이미 수 없이 있어왔고 또한 답을 얻기 위한 수많은 실험과 연구가 있어왔다. 또 뻔한 대답이 나올 것을 우린 알고 있다. 행복이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처럼 우린 물질이 우리의 삶을 결코 행복하게 해주는 수단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행복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이 책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행복을 찾아야 할 곳에 대한 진지한 사색들이 도처에 숨어서 빛을 발하고 있다. 그렇다고 모든 글들이 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의 발견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삶의 만족스러움과 삶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자기 노력, 자기 발견, 자기 사유 없이 얻어 지는 것이 아니듯이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자신을 사로잡는 행복의 빛을 찾을 만큼 다양하고 풍부한 진실의 얘기들이 빼곡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말한다. “자율성, 사랑, 대인관계”만큼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없다고 한다. 즉, 가족, 친구, 연인, 이웃과의 관계성이 삶의 의미를 풍부하게 해준다는 말이다. 이것은 유대감, 사회적 연대감이 우리 인간들의 삶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확인케 한다.

 

그러나 이렇게 거창하고 추상적인 관념적 이해만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니다. 행복 자체를 추구해서는 행복이 오지 않는다는 의미심장한 얘기들도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일상적 슬픔, 아니 고난이 몰고 오는 슬픔까지도 행복에 이르는 통로임을 느낄 수 있다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그러나 내 마음에 유독 깊이 닿은 몇 개의 문장이 있다. “진짜 행복은 소소한 일상 속에 있다.”는 말이다. 먹고사는 일의 사사로운 구체적 만족이 사실 전체 인생의 만족을 이루는 것 아니던가? 내가 무어 그리 대단한 것에서 행복을 느꼈던가? 그런데 이 소소한 것, 먹고 사는 일이 그리 녹록치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 먹고 산다는 것의 기준이 무얼까? 노쇠하여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굶지 않고, 헐벗지 않으며, 내 몸 하나 누워 비바람 막을 곳이 있으면, 이 정도를 걱정하지 않을 정도면 족한 것일 게다. 그러하면 사사로운 구체적 만족의 최저 기준은 충족된 셈이다. 여기에 내 가족과 서로 사랑하고 보호해주며, 공고한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으면, 그들이 서로 믿음을 주며, 그 믿음에 기댈 수 있으면 더 할 나위없는 풍요로운 삶이 될 것이다. 그러나 왠지 밋밋하다. 일상의 단조로움을 상쇄할 무엇인가가 있어야 할 터이다. 그렇다. ‘내 캔버스에 아직은 빈 공간’이 무지하게 많다. 이렇게 욕망에서 자유로워진 나는 내 인생에 투자할 시간이 많아지고, 그것을 내가 즐거이 관심을 가진 것에 보내게 될 것이다. 아마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짜릿한 전율을 일으키는 쾌락과는 다른,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에우라이모니아’! 쾌락도 욕구만족도 아닌 내면 깊숙한 곳에서 자라던 고유 능력이 생명을 얻는 지속가능한 평온함의 행복을 알게 되지 않을까.

 

“인생은 상대 평가다.” 그 상대 평가의 끊임없는 비교의 잣대를 내게서 떨쳐 버리는 순간, 내게서 벗과, 이웃과 사랑과 관계를 격리시키는 물질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을 떨어버리는 순간, 행복은 성큼 다가오지 않을까? 순응과, 경쟁을 가르치는 교육밖에 모르고 성장한 내게 이 만큼의 행복을 말 할 수 있게 해준 이 책은 분명 행복의 길을 발견하게 해준다. 학교 교육은 ‘회복 탄력성’을 가르쳐 주는 곳이어야 한다는 오스트레일리아 학자의 말에서 인간이 진정 배우고 알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기 삶의 만족을 위해 자신을 책임질 줄 아는 인간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행복은 왜 개인적 문제이면서 사회적 문제인지, 국민총생산처럼(GNP)처럼 시장경제의 모호하기 그지없는 지표가 우리의 행복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해주지 않음을 깨달은 작은 산악의 나라, 부탄의 국민총행복(GNH)의 불명확한 지표가 오히려 더욱 가슴에 와 닿는 이유를 알게 되기도 한다. 설혹 슬픔과 고통이 내 삶을 침범할지언정 정말의 행복, 삶의 풍만함을 잃지 않는 길을 발켠케 해준다. 내 가족이 돌아가며 읽어보고, 친구들에게 한 권씩 선물해야 할 터이다....

 

“사람이 없다면, 결코 천국도 갈 곳이 못된다.” - 레바논 속담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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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씨의 거세에 관한 잡스러운 기록지
강병융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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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는 소설이다. 60여 꼭지의 신문기사와 편지, 책 추천사, 참고문헌 등이 배치되어 한 편의 소설을 이룬다. 물론 신문기사 등 모두가 허구의 산물이다. 그런데 이 단편적인 글들이 일관된 서사를 향하여 긴밀하게 조응하고 있어, 그 재구축의 재주에 미소를 짓게 만든다. 그리고 한없이 빠져든다. 모 작가의 설레발처럼 “몰입도가 가히 폭력적”수준이란 말에 동의하는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린 신문이나 뜨내기 잡지 등에서 현재의 사건, 사고를 비롯한 잡다한 기사들을 읽는다. 어디서 구립문화센터가 건립되었고, 아동성범죄가 발생했으며, 따돌림을 비롯한 학교폭력사건이 있었다는 토막을 본다. 그리고 지역 특산물축제 소개와 새 책 안내, 유명 화가의 미술 개인전 소식을 접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아이돌 그룹의 음반 발표 소식과 그네들의 패션, 개인사 등이 가십이 되어 잡다하게 기사화되어 무료한 시민들의 입담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우리에게 분명 일관된 무슨 메시지를 말하고 있을 것이다. 아이돌의 음반발표 소식이 왕따와 어떤 관계가 있으며, 더구나 아동성범죄와 미술전시회가 관련을 맺고 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 모두가 우리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으며, 더욱이 동시대에 일어나는 일이니 연결하여 생각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소설을 나는 작가의 예민한 사회적 감수성, 아니 통찰력이 창안해낸 기발한 시스템적 창작품이라 하고 싶다.

 

소설은 <환경과 산모 신문> 0000년 9월 8일자, 둥근산부인과에서 기형아 탄생을 알리는 기사로 시작하여, <헤럴드 뮤직>, <사랑과 인권신문>, <구로구청 신문>, <범죄동향신문>, <주간소설소식>, <주간입시동정>, <화학과 범죄>, <월간 지움>, <법의학 저널>, <국어만세신문> 등 절묘한 이름을 한 서로 다른 분야의 신문, 잡지 기사가 0051년 10월 16일자로 끝난다. 독립된 기사들이 하나의 일관된 사회의 정체성, 주류의 의식을 지향하고 있으며, 그곳에 경계 밖으로 밀려나는 약자와 소외된 자들의 외침이 있음을 들려주는 것이다. 주류와 다른 것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편협과 이기심의 몽매를.

 

최초의 기사는 문경에서‘Y’라는 코 없는 기형아의 탄생을 알린다. 바로 ‘다르게’생긴 아이의 존재와 그 아이의 삶을 쫓는다는 얘기다. 여기에 늦게나마 자신의 동성애자로서의 성정체성을 깨달은 Y의 아버지는 아내와 이혼하고 남자 파트너와 함께 Y를 양육한다. 안면장애를 지닌 Y, 동성애자 아버지는 이미 포용하지 못할 우리 사회를 예견케 한다.

이것은 Y의 코 없이 두 개의 구멍만 뻥 뚫린 밋밋한 얼굴을 사포로 문질러대는 아이들의 가학적 학교 폭력 기사로, 작가인 Y의 아버지 작품에 대한 세간의 편견에 사로잡힌 자들의 비난과 소송 기사가 되어 자신들과‘다름’을 낯섦의 폭력으로 대할 줄 밖에 모르는 우리의 초상을 드러낸다.

 

‘다르다’는 의미에 대해 인색하고 두려움조차 갖게 되는 것은 곧잘‘틀리다’는 표현으로 혼동하여 말하는 버릇과 어떤 관련이 있는 듯하다. 자신과 생각과 의견이 다르면 곧 적대시하는 이 사회의 편협성과 불관용성에는 자신감의 취약성과 소심함, 비겁함, 얕은 지식에 대한 가장을 은폐하려는 자기 보호의 무의식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돼지꼬리가 달리면 어떻고, 손가락 하나 없으면, 다리가 셋이면 인간이 낳은 개체가 인간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인가? 물질과 소비의 광기를 지적하면 빨갱이가 되고, 옹호하면 수구꼴통이 되는 극단밖에 알지 못하는 다름에 대한 이해의 결여는 혹여라도 자기의 기득권적 영역으로의 침범에 겁을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잃을 것이 그리 많지 않은 대중들의 이런 편협성은 사실 기이하게 생각되기만 한다.

 

나로서는 이 소설만이 지니는 미덕으로 생각되는 것이 있다. 굳이 구별될 이유가 없는 보편적인 주체에는 익명을 부여하고, 풍자의 대상에게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유사기호로 이해의 친밀도를 높인 것이다. 소설을 구성하는 모든 기사에 인용되는 전문가, 담당자들의 이름이 한결같이 '오OO'으로 무차별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그렇다. 한편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삶을 대변하는 유명 아이돌스타의 이름이 ‘불나비스타일쏘세지글러브’(쿠바의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을 패러디)라거나, 소설『변신』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를‘츠란프 프카프’의 ‘변심’으로 사용하는 것을 비롯해 그 해학과 풍자를 통한 조롱이 깊이 밴 즐비한 기관 명칭의 약어들이 그러하다. 이것은 읽는 재미와 더불어 그 의성(擬聲)의 유사가 지닌 강렬한 의미의 환기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다.

 

어쨌든 다름의 희생물로서 Y는 유년시절 자신의 뱃속에 나비가 날아다니는 것만 같은 사랑에 빠졌던 소녀에 대한 환상과 그 실현 불가능의 트라우마는 아동성범죄자가 되게 하고, 또 다시 신문의 지면을 장식한다. 성범죄의 재발 방지를 위한 사회 각층의 방안이 기사화되고, Y는 재발방지 수단인 화학적 거세에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그러나 모범수가 되어 가석방된 Y는 성적 욕구를 통제하지 못하고 연쇄적인 범죄를 지속하다 마침내 자신의 성기를 물리적으로 거세하기에 이른다.

                  

이때 세간의 주목을 받는 유명 화가의 개인전이 문화단신으로 소개되는데, 그 장소도 또한 걸작이다. 삼선 미술관‘지움’이다. 어느 갤러리를 말하는지 독자는 피식하고 바람 빠진 미소를 지을 것이고, 주목 작품명이 <소시지, 피 그리고 눈물>이란 것에서 예술의 사회적 반영을 목격하게 된다.

 

이 그림에 대한 허영으로 가득한 왜곡과 아전인수의 평단의 해설에 배꼽을 잡게 한다. 거대한 소시지가 잘린 상태로 바닥에 떨어져 있으며, 그 주변에 피와 눈물이 흐른 흔적이 있는 그림은 평단의 말처럼 환경오염의 경고도, 작가의 희생도 아니라는 것쯤은 독자들은 안다. 그녀의 아들 Y에 대한 어머니로서의 연민과 슬픔이라는 것을. 이렇듯 어쭙잖은 평단이란 지식인입네 하는 자들의 무지와 위선, 기만은 돼지꼬리 달린 아이가 등장하는『백 년 동안의 고독』의 작가‘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연상시키는 ‘후안 마누엘 마르케스’라는 권투선수가 쓴 책의 추천사를 번역문과 영어원문을 동시에 수록하여 번역의 세태에 조소를 보내는 것과 상통한다.

 

사실 Y라는 소외된 자의 삶을 단편적 기사들의 집합으로 기막히게 완벽한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 엮어낸 구축술은 차치하고라도 이 사회를 지배하는 가식과 기만의 형상들, 배척과 배제의 불관용의 아집들이 매 꼭지의 기사마다 완벽하게 자기의 주제와 음성을 가진 자기완결성이 있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리는 것은 독자 자체로서의 내면적 반전의 놀라움이기도 하다. 소설은 스스로 자기 해설과 평론조차 한 꼭지의 기사에 담아 아예 어설픈 평론 따위를 차단하는가 하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합성어로서 동성애 커플의 한 편을‘아마’란 신조어로 등장시킴으로서 다름을 수용하는 결말은 경계를 폐지하고 모두가 연대하는 공동체적 삶의 희망을 기대케 한다. 이 소설책은 두 배의 값을 치러도 아깝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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