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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복서간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1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2년 5월
평점 :
3편으로 구성된 옴니버스 형식의 장편소설이다. 이것이 모두 편지로 이루어져 있고, 편지만이 지니는 독특한 형식성과 내용에 반영되고 있는 사람들의 감추어졌던 이야기의 진실에 쏙 빠져들게 되는 구조이다. 이미『고백』으로 인간의 내면을 거침없이 휘저었던 작가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것은 물론이다. 편지라는 형식에 옮겨지는 글이 대개 미처 표현되지 못했던 가슴에 가두어두었던 말들인 경우가 많듯이, 은폐되었던 인간의 위선과 가장, 욕망, 진실들을 드러내는 수단이 곧 편지라는 점이다.
문득, ‘편지’와 ‘생각의 언어’는 서로 통하는 의미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편지는 쓰고 나서 보낼지 말지를 망설이게 한다. 요즘의 전자메일처럼 순간적으로 보내고 동시에 받아보는 그런 망설임 없는 가벼움의 언어가 아니다. 편지에 쓰는 어휘와 문장은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다듬어진다. 일상의 언어보다는 훨씬 생각이라는 시간의 여유를 요구한다. 또한 편지를 받으면 몇 번씩이나 읽어보게 되고, 음미하게 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 때문일 것이다.
고교시절 방송반 활동을 같이 하였던 동료의 결혼식으로 시작되는 첫 번째 작품은 얄궂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유일하게 결혼식장에 보이지 않았던 한 명의 여자동료에 대한 소문의 진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옛 기억 속에 묻혀있던 장면들에 대한 저마다의 내심을 드러내게 한다. 나타나지 않았던 친구에게 벌어진 사건의 진실, 그녀와 동행했던 두 명의 여성이 보았던, 그리고 내심의 생각들이 드러남으로써 오해가 누적되고 불신이 형성되는 과정들을 목격하게 된다. 산사(山寺)를 내려오다 넘어져 얼굴에 깊은 상처를 입은 친구에 대한 무성한 소문의 진상과 죄책감, 억측들에 개입된 인간의 은밀하고 이기적인 내면을 접하게 된다. 가장(假裝) 속에 숨겨진 욕망들의 적나라한 드러냄이 일품이다.
두 번째 작품은 여섯 명의 제자를 인솔하고 남편과 함께했던 소풍이 제자를 구하러 강물에 뛰어든 남편의 익사로 함께했던 아이들과 여교사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된 옛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나 은퇴를 앞두고 병석에 누운 여교사가 성년이 된 당시의 제자들이 사회의 건강한 일원이 되어 살고 있는지를 살펴 달라는 부탁을 받은 교사가 된 제자와의 왕복 서신이다.
그것에는 성인이 된 여섯 명의 아이들을 만나서 전해들은 당시의 사건에 담긴 저마다의 의미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물에 뛰어든 여교사가 남편을 먼저 물에서 끌어낸 행동에 대한 해석, 선생님이 자신을 구해주었다고 기억하는 아이가 느꼈던 사건의 무게와 정말의 고통이 된 말들과 존재, 물에 뛰어들지 못하고 강가에서 지켜보기만 했던 죄책감과 무력감, 원망과 이해와 연민이 교차하는 심경들을 통해서 인간에 대한 이해, 아이들에 대한 교사로서의 관점과 책임감 등이 잔잔하게 흐른다. 역시 얄미울 정도의 반전을 더해 이야기의 여운을 더욱 깊게 하면서.
마지막 작품은 꽤 깊은 인상을 남긴다. 기억의 자기보호 본능. 불현듯 해외자원봉사자가 되어 떠난 남자와 연인인 여자의 편지이다. 이 작품은 복선이나 대반전등 위의 두 작품에 비해 긴장감이나 놀람이 비교적 높게 다가온다. 어린 시절 어른들의 행위가 아이들에게 전이되는 형상, 숨겨진 욕망의 모습들, 그리곤 자신에게 닥쳐온 위기에서 되살아나는 지워졌던 기억의 진실들을 통해 인간 내면의 취약성과 야수성의 면목을 직시하게 된다. 자기중심적 이해의 오류, 미흡성, 한계들...에 대해서.
편지는 우리에게 타인의 슬픔과 아픔을 이해하는 수단이 되어주기도 하고, 자신을 살펴보는 생각의 시간을 부여해주기도 한다. 편지라는 의사전달의 독특한 특성이 함유하고 있는 이러한 묘미와 효용성, 효과를 살려내어 그것에 인간의 내면적 진심들을 투영해 낸 이 작품은 그래서 왠지 모르게 내 잠들었던 의식들을 깨워내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