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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사라진 날 저학년 읽기대장
고정욱 지음, 이예숙 그림 / 한솔수북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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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가 없으면 아이가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 큰 어른일지라도 살기 힘들어진다. 어디 그뿐일까. 핵가족화된 현대인들은 '엄마'가 사라지는 순간부터 사회가 존속할 수 없게 되고 국가조차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지금 전세계를 다스리는 건 '남성 지도자들'이 대다수이지만, 그들도 '엄마'가 사라진다면 국가를 운영할 수 없게 될 것이 틀림없다. 왜냐면 '엄마'가 사라지면 한 가정이 황폐해지고, 가정이 황폐해지면, 사회가 위태롭게 되고, 사회가 위태로우면 국가는 결코 운영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엄마의 헌신과 희생'을 바탕으로 국가가 존속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엄마의 잔소리'는 듣기 싫다. 어제도 했고, 오늘도 하고, 내일도 할 '엄마의 잔소리'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날마다 새로운 잔소리를 한다면 들어줄 법도 한데, 그러면 애초부터 '잔소리'라고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전세계의 모든 어린이들은 날이면 날마다 '엄마의 잔소리'를 듣고 또 들어야만 한다. 그래서 하루라도 '엄마의 잔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는 푸념이 들릴 만도 하다. 실제로 '엄마가 외출'이라도 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물론 외출에서 돌아와서는 '폭풍 잔소리'가 시작될 게 뻔하지만, 아이도, 아빠도, 잠시잠깐이나마 엄마가 사라지는 것을 그렇게 반길 수가 없다.

  그런데 간절한 소원대로 엄마가 사라지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여기 재미난 상상을 한 책이 있다. <엄마가 사라진 날>이라는 이야기책이다. 이 책에선 전세계의 엄마가 모두 사라지게 된다. 아니 , 정확히 말하자면 '웃음 바이러스'라는 병에 걸려 코로나 팬데믹이 발생했던 것처럼 '바이러스에 감염된 엄마들'을 격리병동이나 요양원에 가둬버리고 국가의 철저한 감독 아래 갇혀 지내게 된다. 당연히 '가족면회'도 금지 당했다. 일단은 '아이를 낳은 여성(엄마)'만이 세계적인 감염이 된다고 알려졌지만, 언제 어느 순간에 모든 사람에게 폭발적인 감염을 일으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의사들도 '웃음 바이러스'의 감염원인을 찾으러 백방으로 연구하고 있지만, 증세가 더욱 심해지기만 할 뿐 뾰족한 수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엄마가 없는 집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된다. 청소며, 빨래며, 식사까지 엄마의 손길이 사라진 집구석은 점점 엉망이 되어 간다. 아빠는 '회삿일'도 바쁜데 '집안일'에 '아이돌봄'까지 하느라 그야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아직 아이가 어린 남편들은 아이를 맡길 곳을 찾지 못해 아이를 안고 업고 '출근'을 하기에 이른다. 전국 곳곳의 '어린이집'과 '유치원'의 원장과 보모들의 태반이 '병원'에 격리되어 있기 때문에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다. '여성인력'을 많이 쓰는 직장이나 가게는 속속 문을 닫기 시작했다. 일손이 부족해진 공장도 가동을 멈추고 문을 닫기에 이르렀다. 이젠 '국가시스템'까지 망가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물론 이야기는 기적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엄마'가 되돌아왔다. 그런데 엄마가 없는 '빈자리'가 이렇게나 크다는 것을 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그간 엄마들은 스스로를 '헌신'하고 '희생'했으면서 왜 아무런 생색도 내지 않았던 걸까? 아니다. 엄마들이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알고도 '모른체' 했고, 듣고도 '못들은체' 했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잔소리'를 더 크게, 더 자주 했었는지도 모른다. 해도해도 고쳐지질 않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이제라도 '엄마의 잔소리'를 달콤한 초콜릿처럼 들어야겠다. 엄마가 '잔소리'를 하기에 앞서 '알아서' 척척 해야 겠다. 그래도 엄마는 잔소리를 멈추지 않을 거다. 엄마가 '하는 일'은 너무 많고 너무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해도해도 끝이 나지 않는 것이 전세계 엄마들이 해온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엄마가 아프면 온세계가 아프게 된다. 제발 엄마가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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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사라진 날 저학년 읽기대장
고정욱 지음, 허구 그림 / 한솔수북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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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역시,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대결의 승패를 보면서 '학교'가 사라질 거라는 상상을 했더랬다. 왜냐면 단편적인 지식은 더는 '암기'할 필요가 없어지고 '검색'만 하면 누구나 지식을 '소유'할 수 있는 '인공지능 시대'가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인공지능' 덕분에 힘든 노동을 할 필요도 없게 될 것이다. '단순 노동'의 경우에는 인공지능이 탑재된 로봇이 24시간 쉼없이 일을 '대신'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인공지능 로봇'이 제대로 작동하는지만 감독하면 그만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인간이 단순 암기의 고통과 고된 노동에서 해방되면 마냥 놀고 쉬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노동을 하는 '직업'을 갖는 까닭이 바로 '임금'을 얻기 위해서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는 인간이 필요치 않게 되면 '노는 인간'은 임금을 한 푼도 벌 수 없게 되고, 그러면 '경제'의 주체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공장에서 물건이 만들어져도 그 물건을 살 수 있는 '소비자'도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인간은 몇몇 소수만 풍족하게 살아가고 나머지는 살아갈 쓸모도 없고, 의욕도 잃게 되어 끝내 버림받고 말 것이다. 더구나 멀쩡한 사람도 버림받을 지경에 이르면, 장애를 갖고 있거나, 병들거나 늙은 '사회적 약자'들은 아예 폐기처분해버릴 수도 있다. 이런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인공지능의 발달'을 멈추거나 늦추자는 주장도 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 책에서는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해 '학교'가 사라지고, 배움을 잊은 사람들이 오직 '인공지능의 명령'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어두운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초등 저학년을 위한 어린이책이므로 그보다는 조금 덜 심오하게 '학교가 사라져서'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의 행복한 미소를 보여주고 있지만, '학교'가 사라지고 난 뒤의 슬픈 현실을 조금이나마 미리 엿볼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왜냐면 학교를 대신해서 집에서 '인공지능이 짜준 스케쥴' 대로만 따라야 하는 일상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공지능의 첫번째 의무'는 인간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인 까닭에 집밖으로 외출하는 것도 막으며 '현관문'을 잠궈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공지능'은 인간을 위한 편리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활동'조차 감시하고 짜여진 계획표대로만 움직여야 하는 끔찍한 감옥으로 바뀌고 말았다.

  이런 갑갑하고 끔찍한 곳에서 아이들은 하나둘 탈출해서 옛날 학교가 있던 자리의 '지하창고'로 모이게 된다. 인공지능의 발달로 학교가 필요없는 곳이란 '판단'을 내리게 되자 인공지능은 '학교'를 철거하고 그 위에 '공장'을 만들어서 어른들의 직장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른들도 즐겁진 않다. 그 공장에서도 '인공지능의 감시(?)'는 물 샐 틈도 없이 철저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하창고에 '또 다른 교실'을 만들어서 아이들 스스로 공부하고 토론하는 학교를 만들자 아이들은 좋아했다. 그렇지만 인공지능은 하나둘 사라지는 아이들이 늘어나자 '아이들이 모여있을 만한 곳'을 찾아냈고, 그곳에 경찰을 투입해서 어린이들을 체포하기에 이른다. 또다시 '감옥'으로 되돌아오게 된 아이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깐따야'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깐따야'는 누규?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책이 사라지고, 학교가 사라지면 아이들은 왜 즐거워하는 걸까? 작가 고정욱은 책도 좋아하고, 학교도 좋아하는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삼아 '사라져버린' 소중한 것을 되찾는 이야기를 전개했다. 그렇지만 현실의 어린이들도 그럴까? 십중팔구 아닐 것이다. 어른들이 책과 학교가 소중하다는 '사실'은 알면서도, 그것들의 진정한 즐거움을 어린이들에게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른들도 책을 안 읽고, 학교 가기 싫어한다. 그런데도 어린이들에겐 그렇게나 싫을 것을 '강요'하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러니 어린이들에게 '왜' 책읽기가 즐거운 일이고, 학교에 가서 '어떻게' 해야 재미난 곳인지 제대로 알려줄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책과 학교'는 모르는 것을 알고 이해하게 해준다. 그러니 몰랐던 것을 '알아내는' 즐거움을 맛보게 해주면 된다. 그런데 그런 '즐거움'을 느끼기도 전에 가르쳐준 것을 무조건 '암기'시키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시험'을 치루고 평가를 내린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줄을 세우고, 상을 주고 벌을 내린다. 옛날처럼 모른다고 때리진 않지만 안다고 상을 줘도 그 '즐거움'이 오래가지 않는 것이 문제다. 또한 '배운 것'은 적절하게 써먹어야 배움의 즐거움이 새록새록 솟아날텐데, 써먹기는커녕 외우고, 또 외우고, 또또 외우고, 장장 12년 동안 외우기만 시켜놓고 '수능(사고력)시험'을 치르고, '취직시험'을 또 치른다. 그렇게 어렵사리 회사에 취직을 하면, 그동안 배운 것은 써먹을 것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사회생활'에 첫발을 내딛고서는 또다시 새롭게 배워야 한다. 당췌 왜 외웠는지도 모를 지식만 잔뜩 머리에 남을 뿐이다. 이러니 '책과 학교'가 재미나 즐거움이 가득할리 없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발달하면 좀 나아질까? 우선, 단순암기 평가는 무의미하므로 '기존의 지식'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창의성', 이것과 저것을 어떻게 해서 뭐라도 만들어내는 '융합성'을 평가의 새로운 잣대로 삼아야 하겠지만, 어린 학생들에게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능력'을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기초지식'을 배우는 학교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며, 적어도 '초등학교'까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물론 교육현장의 모습은 많이 바뀔지라도 인간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지식'을 배우기 위해서라도 또래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서 생활하는 '학교'는 분명히 유지될 것이다. 그리고 그 학교에는 기본적으로 '책'을 교과서로 삼을 것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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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사라진 날 저학년 읽기대장
고정욱 지음, 서현 그림 / 한솔수북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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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들에겐 '상상력'을 자극하는 책이 제격이다. 그래서 '교훈'보다는 '재미'를 앞세운 책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 '책시장'은..특히, '어린이책시장'은 오직 재미만을 추구한 책이 많이 없다. 거의 대부분이 '교훈적인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미성숙한 인격체'라는 편견이 가득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우리 나라 어른들은 어린이들에게 '가르치길' 좋아해서 그런 것일까? 물론 어린이들에게 해를 끼치는 '비교육적인 요소들'은 빼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건전'해야 하고 '도덕'에 위배되지 않아야 한단 말이다. 외국의 '어린이책' 가운데에는 '재미'를 추구하다보니 위험천만한 장난질을 저지르기도 하고, 귀신과 괴물 등 상상력의 '도'를 넘어서기도 하며, 어린이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폭력'을 다룬 내용도 심심찮게 보이는데, 그런 것들은 애초에 '가져오질 않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 <책이 사라진 날>은 재미보다는 '교훈'적인 내용에 치중하여서 좀 안타까운 어린이책이다. 그래도 '비교육적인 요소'는 쏙 빼놓았기에 비교적 '건전한 도서'라고 볼 수 있다. 줄거리도 너무 복잡하지 않고 단순해서 '저학년 어린이'도 어렵지 않게 책을 읽고 주제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다. 그렇더라도 아무리 저학년을 대상으로 삼았더래도 '너무 뻔한 내용'인 것은 우리 아이들에게 '상상력'을 펼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격이 될테니, 조금쯤은 심오한 철학이야기를 담았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책의 줄거리는 느닷없는 외계인의 침공으로 시작하지만, 그 때문에 세상의 모든 책들을 빼앗겨 버린다는 '설정'은 탁월했다. 그래서 온세계의 아이들은 외계인 덕분에 하루종일 놀기만 하면 된다. 학교를 갈 필요도 없고, 책을 읽을 필요도 없다. 오히려 외계인의 명령을 어기고 '책'을 읽다가 들키는 날엔 외계인 광선총에 맞아 '미생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그저 놀기만 하면 된다. 정말 아이들이 원하는 세상이 아닐까?

  그런데 '놀기'보다 '책읽기'를 좋아하는 두 명의 어린이가 있다. 그 어린이들은 세종대왕처럼 책을 다 빼앗긴 뒤에 병풍 뒤에 남았던 '책 한 권'을 몹시 바랐다. 그래서 외계인들이 책을 뺏아다가 쌓아둔 '책산'을 향해 몰래 잠입해 갔다. 그리고 감시망이 소홀한 틈을 타서 '책 한 권씩' 빼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날마다 몰래몰래 책을 읽다가 '책산'의 내부를 마치 피라미드 속의 미로처럼 파고 들어가 손전등에 의지해 책을 무지하게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엔 외계인들에게 발각이 되고 두 명의 어린이는 '미생물'이 될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게 되는데...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두 어린이는 책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살아나게 된다. 그리고 외계인들도 책속의 '지식' 덕분에 고향별로 돌아가 행복하게 살았다면서 끝을 맺는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책속에 무슨 비밀이 담겨 있었길래 지구인과 외계인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게 된 걸까?

  아이들은 '책읽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림책과 동화책을 좋아하던 시절이 지나고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좀 더 어려운 책', '좀 더 글밥이 많은 책'으로 확장해가며 읽으려 들지 않는다. 왜냐면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 머리가 커지게 되면 '책 읽으라는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억지로 읽기는 하지만, 결국엔 '만화책'과 '게임'에 푹 빠지고 만다. 무언가 '징검다리'가 필요하단 말이다. 그림책과 동화책은 정말 재밌다. 하지만 10살(초등3학년쯤)이 넘어가면 점점 '글밥'이 많은 책을 읽으라는 강요가 시작되는데, 이때 그 많은 글밥이 '무슨 내용'이 담겨 있고, '어떻게 이해 해야' 하는지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으면 '책읽기'는 엄청난 스트레스 유발 원인이 되고 만다. 그래서 책읽기를 할 때는 '선생님'과 '학부모'의 역할이 무척이나 중요하다.

  이렇게 초등어린이들에게 적절한 '독서교육'을 시키기 위해선 선생님도 책을 읽어야 하고, 학부모님들도 부지런히 책을 읽어줘야 한다. 그래야 '같은 책'을 읽고 공감하기도 하고, 토론(이야기)을 나눌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때에는 절대로 '교훈'을 억지로 주입하려 들거나, '정답'을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모든 것이 '정답'이기 때문이다. 딴에는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책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상상력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창의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로 키우고 싶다면 아이들의 표현에 '맞장구'를 쳐주기 바란다. 어른들의 관점에서 "과학적으로 어쩌구~", "현실적으로 저쩌구~"라는 토씨는 절대로 하지 말길 바란다. 그저 아이들의 상상력에 함께 뛰어들고, 흠뻑 젖어들며 재미난 이야기에 빠져들길 바란다.

  물론 '시간'을 정해놓는 것은 좋다. 10분, 30분 동안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쳤으면 '일상'으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규칙을 정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경우에 따라서 '상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구분이 되지 않아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수도 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상상'보다는 '현실'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고, 그 경계에 '문'을 만들어서 언제든 스스로 드나들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이는 '놀이'를 할 때나 '게임'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시간 정하기'는 그래서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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