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걸 크러시 - '남성' 말고 '여성'으로 보는 조선 시대의 문학과 역사
임치균 외 지음 / 민음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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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의 걸크러시

 : 임치균

 : 민음사

읽은기간 : 2024/02/08 -2024/02/15


제목이 맘에 들어서 읽었다.

억압받고 살았던 조선시대 여인들과는 좀 다른 삶을 살았던 여성들의 삶을 모은 책이다. 

동성연애를 했던 사람도 있고, 저잣거리에서 술을 마시고 참형을 당한 죄인에게 호통치는 사람까지 당차고 강했던 여성들을 알려준다.

시대와 문화를 뛰어넘는 사람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지만 상당히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난 그렇게 못살텐데, 정말 대단한 분들이다.

다만, 소설속 주인공까지 섞여 있다보니 실제인물인지 가공의 인물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잘 구분이 되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p18 몸종이 소용찬에게 하는 충고다. 거짓 명성 속에 살면서 잘난 선비인 척하지 말고 능력에 맞게 돈이나 벌면서 속세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라는 말이다. 계속 거짓 명성으로 살아간다면 이 세상에서 화를 당할 것이라는 경고도 잊지 않는다.

p40 청춘의 마음으로 성적 욕망을 이기지 못하여 밤마다 옷을 풀어헤치고 남편을 잠자리로 데려가 온몸을 어루만지며 성관계를 강하게 요구하였으나 그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긴 밤을 헛되이 보내고는 고달픈 아침을 기다립니다. 표정을 밝게 하고 말과 웃음을 꾸며 내어 지난밤의 서운한 마음을 물리치려 하다 보니 남편을 보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p54 간음에 관련된 다툼에서는 한번 지목되면 여러 사람이 따라서 사실로 여기게 된다. 도둑의 누명은 끝내 벗을 수 있으나 간음에 대한 모함은 씻기 어렵다.라고 한 속담은 바로 이를 일컬은 것이다. 만일 실제 음란한 행실이 있었다면 움츠러드는 것은 당여한 이친, 이처럼 통쾌하게 죽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정약용, 흠흠신서

p80 주부는 다모에게 상으로 돈 열 꾸러미를 준다.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지는 않았던 듯하다. 이렇게 보면 주부는 법도 지키면서 사람의 인정도 살피는 참 괜찮은 법 집행관이다. 다모는 돈 열 꾸러미를 노파에게 주면서, 다시는 밀주를 빚지 말라고 당부한다. 빈곤해 밀주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노파의 처지까지 헤아리는 다모의 모습은 끝가지 멋지다

p118 부랑이 여자였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주변 반응 역시 우리가 알던 조섬의 남성적 시선이 아니었다. 모든 비장은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칭찬해 마지않았다.

p133 금원은 열네 살이 되었을 때 부모의 공식적인 허락을 받은 후 남자로 변장해 세상을 만나기 시작했다. 충청북도 제천에 있는 의림지를 시작으로 단양 지역을 거쳐 금강산 일대를 마음껏 누비고 관동팔경을 빠짐없이 유람한 후 설악산을 관통했다

p147 속된 말로 호연재에게는 스왜그가 있다. 가진 것이 없던 때에도 호연재는 시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한껏 드러내고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현실적인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한가로움. 시는 호연재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p158 김삼의당은 조건이 달렸다. 향촌의 양반 출신이지만 실상은 거의 평민층에 근접한 몰락 가문의 여인인 김삼의당으로서는 학문과 문학이 사치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삼의당은 악조건 속에서도 자기 계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김삼의당은 남성 중심의 문학 세게에서 인정받는 여성 문인으로 우뚝 선 것이다.

p168 허균은 기생들과의 염문으로 관직에서 파직될 만큼 천성이 자유롭고 호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매창에게는 수청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끝내 동침하지 않았다. 매창을 하룻밤의 수청 대상이 아닌 오랜 시간 시를 나눌 수 있는 벗으로 삼은 것이다. 매창으로서도 자기의 시를 품평해 주는 좋은 스승이자 친구를 만났으니 참으로 행복한 일이었다.

p181 이숙희는 조선의 이름난 여성 문학가도 아니요, 문집을 남긴 여성도 아니다. 그렇다고 뒤늦게 배움을 깨달아 본격적으로 학문을 시작해 남편에게 학문에 대한 자세를 일러 준 이름난 여성도 아니다. 숙희가 학문에 매진하고 싶어 어떤 큰 일을 벌였다는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이숙희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은 할아버지 아문건의 일기속에서 보았듯 그녀가 배움의 의지를 표현한 여아였다는 것이다. 이숙희는 단지 공부가 하고 싶었을 뿐이다. 배움의 목적과 깊이,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이숙희가 배우고 싶다는 데 무슨 대단한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p199 사주당은 자신이 어머니와 소통했던 편지 두루마리와 남편과 성리학적 이치를 논했던 기록,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직접 필사한 격몽요결을 제외한 모든 기록물은 불태워 달라고 부탁했다. 편지 두루마리는 여성이자 딸로서 사주당의 정체성을 상징하고, 남편과 주고받은 기록은 한 사람의 아내이자 학문적 동지로서 사주당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그리고 격몽요결은 율곡 이이가 지은 아동교육을 위한 교과서이기도 하므로 위대한 어머니로서 사주당의 정체성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p245 일상적인 사랑은 정말 매력적이다. 가히 종교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열정적인 사랑은 결국 두 사람의 관계를 제외한 인간관계를 파괴하기도 한다. 그래서 가정의 내적 관계와 사회적 질서에서의 책임과 의무라는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파괴적인 성격을 갖는다.

p273 무운은 무려 1년이 넘는 기간을 이경무와 함께 지내지만, 끝내 동침하지 않는다. 일전에 있었던 자신의 수절 의지가 진심이었음을 보여 준 것이다. 이렇게 무운은 이경무가 자신의 사랑을 배신하고 수절 의지를 무시했을지라도 스스로 한 다짐을 굳게 지켜 나간다.

p321 조선시대, 그것도 한양 한복판에서 한껏 멋을 낸 노처녀가 대낮에 술에 취해 저잣거리를 활보하는 장면도 특이하거니와, 국가에 반역을 꾀한 역적의 잘린 머리 앞에서 그 뺨을 후려치는 모습은 자못 기괴하다. 가부장의 말을 잘 듣는 착한 딸인 요조숙녀나 요리와 바느질, 옷감 만들기, 남편 내조, 자식을 돌보는 현모양처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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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10만 부 기념 스페셜 에디션)
송길영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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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 송길영

 : 교보문고

읽은기간 : 2024/02/03 -2024/02/07


빅데이터 분석가인 송길영님의 책..

기존 책들이 빅데이터의 분석을 기반으로 현시대의 트렌드와 방향을 이야기를 해서 재미있게 읽었던 것에 비해 이번책은 그렇게 감흥이 있지는 않았다.

약간은 뻔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뤄서 그런듯... 

아마 기존 책들이 재미있어서 더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제일 주목했던 이야기는 앞으로는 근근이 먹고 살게된다는 것...

AI시대에 결국 내가 가진 경쟁력은 내가 갖고 있는 서사인데 그 서사는 시장이 작을 수 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그 작은 시장에서 나는 근근이 먹고 살게 된다는 것이다.

충분히 그럴듯하다. 

대량생산이 아니다보니 시장은 작아지고, 그 작아진 시장에서 까다로운 고객을 만족시키기는 그리 쉽지 않을 테니까...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량생산 업종은 여전히 존재할 것 같다.

할줄 아는게 월급쟁이밖에 없는데...

월급쟁이와 자신의 능력을 파는 자영업자.. 어느 길이 내가 갈 길인가?

법적으로 월급쟁이를 못하는 유통기한이 다가오는 내가 더 고민하게 된다..


p19 권위는 인정을 기반으로 합니다. 수용자가 인정하지 않으면 권위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권위를 유지하려는 사람도, 권위를 찾는 사람도 원하는 것인 합당한 인정입니다. 정당한 인정이 권위의 출발점이 것입니다.

p51 분당 사람들은 성남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판교 사람들은 분당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서판교는 판교라 하지 않고 반드시 서판교라 합니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이라는 물리적 주소를 갖고 있지만 심리적 위계는 역순입니다.

p57 예일대학교 로스쿨 교수인 대니얼 마코비츠의 책 <엘리트 세습>의 원제는 메리토크라시의 함정입니다. 이 책은 엘리트들이 사회문화적 지원이 없었다면 그 자리에 갈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유명 대학 입학생의 부모들이 상대적으로 소득분위가 높다는 것은 이미 데이터로 증명되었습니다.

p78 임직원은 구성원으로, 채용은 영입으로 표현하는 것은 조직이 더 수평적인 관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p97 전화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전화로 주문할 때마다 메모장에다 주소와 메뉴를 쓰고 읽는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앱이 좋은 게 아니라 전화가 싫다는 이야기였습니다.

p107 그거 있잖아. 그 김 대리랑 말이야. 그때 우리가 거기에 가서 그 사람들이랑 그거 먹었잖아. 그거 뭐야? 그러면 자실의 00회사 사람들과 먹었던 그 집 말씀이시죠? 잠실이 아니고 건대예요라고 귀신같이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이 비서는 아르바이트로 시작해서 비서가 되었고 심지어 임원이 자녀와 이야기하다 서로 이해를 못하면 대신 통화해서 소통을 이어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분 별명이 한국어 통역사라고 합니다.

p148 AI는 모든 것을 해줄 수 있는 만능의 기술이 아닐 수 있지만, 그렇다고 어떤 분야에도 쓸모없는 모용지물 역시 아닙니다

p160 아이들이 몸으로 하는 활동을 좋아하여 나중에 그런 진로에만 관심을 가지면 어떡하냐는 걱정을 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몸을 쓰는 일 말고 치과의사 같은 전문의 체험시간을 길게 늘려달라는 주문이 따라옵니다. 직업에 귀천을 두는 것도 편협하지만 근본적 문제는 미래 직업의 분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그것을 지금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p184 권위 해체가 어디까지 갈지느 ㄴ아직 모르겠습니다. 다만 충성심이란 말은 평생직장처럼 다음 세대는 전혀 감조차 못 잡는 희귀 단어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핵개인들은 한 회사에서 일생을 보낸 사람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는지 질문합니다.

p192 청부살인은 살인 교사로 번역될 때에만 법률행위의 출발점이 됩니다. 이렇게 변호사 수임료 중 상당 부분이 일상의 사건을 법률 용어로 번역하는 비용입니다.

p202 직장인에게 소속감과 명분은 사실 돈보다 더 근본적인 동기부여입니다. 자신의 일이 사회에 공헌하고 있다는 대의명분이 빈약하고, 그 안에서 자신이 성장한다는 서사가 희미할 때, 숫자의 무한 비교에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숫자에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엄청난 흡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p234 운 좋게 아이를 사랑으로 돌봐 줄 좋은 도우미를 찾는다 해도 치솟는 주거와 생활 비용이 만만치 않아 그 대가를 시장 기준으로 지급하고 나면 한 달 벌어 한 달 살기 빠듯합니다. 결국 가장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친정어머니가 시장가격보다 낮은 처우로 투입되는 것입니다.

p240 31세 이후에는 새로운 음악을 듣지 않는다는 뇌 과학 분야의 연구가 있습니다. 플레이 리스트를 보면 그 사람의 나이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우리는 10대와 20대에 들었던 음악을 나이 들어서도 듣습니다. 새로운 취향을 탐색하는 호기심에도 노화가 진행되는 것입니다.

p247 상대에 대한 배려는 내가 어떻게 비춰질까 돌아보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자신이 속해 있던 규범을 돌아보고 새로운 규범에 자신을 맞춰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어떤 중장년은 지금 시대의 문화를 잘 몰라서 하는 행동 때문에 새로운 세대로부터 차별의 시선을 받고 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p270 L은 파키스탄 사람과 결혼하자 그의 가족, 그 인구집단 전체가 ‘내 삶으로 들어왔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표현은 너무나 예쁘게 들립니다.

p286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는 파는것이 인간이다라는 책에서 모든 인간은 자기 세일즈를 해야 된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팔아야 할까요? 가장 경쟁력 있는 상품은 서사입니다. 각자의 서사는 권위의 증거이자 원료입니다.

p296 문제는 쪼갤수록 팬이 작아진다는 사실입니다. 상업적인 표현으로는 마켓이 작아집니다. 중세 병참사 중 창의 역사에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결국 앞에서 기술한 것처럼 근근이 먹고살아야 합니다.

p308 앤디 워홀이 말했습니다. 미래에는 누구나 15분간 유명세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미술품의 대량생산을 최초로 시도하여 유명해진 팝아티스트의 예언은 참으로 절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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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인들 세트 - 전2권 - 서로마 몰락부터 종교개혁까지, 중세 천년사를 이끈 16개 세력
댄 존스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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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세인들2

 : 댄 존스

 : 책과 함께

읽은기간 : 2024/01/29 -2024/02/03


2권도 계속해서 읽었다.

2권에서는 몽골, 흑사병, 그리고 르네상스 초기까지 표현되었다..

중세를 어디까지 가르느냐는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나는 서로마제국 멸망부터 동로마제국 멸망까지로 보고 있는데 저자는 좀 더 후반기까지 보고 있다. 

덕분에 신대륙 이야기도 읽을 수 있었다.. 

통사보다는 좀 더 각론에 가까운 내용이어서 좀 더 세심하게 읽을 수 있었다.

통사도 읽고 각론도 읽어서 역사를 배우는 즐거움을 더 배가시키고 있다.

즐거웠다.. 역사는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있다. 


p438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다비드 왕에 대한 소문이 완전히 허구는 아니었다. 무적의 지배자가 동방에서 막을 수 없는 기세로 진군해 오고 있다는 인도의 향신료 상인과 십자군 전쟁포로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만 자기네 앞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을 뿐이었다

p443 가혹은 모든 몽골의 행위의 특징이었다. 테무진과 그의 장군들은 원정과 정복 과정에서도 엄격하고 끔찍할 정도로 잔인한 전투 규칙에 따라 작전을 벌였다. 몽골의 지배에 즉각 복종하는 사람이나 도시는 모두 자기네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저항과 반발의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대학살과 초토화가 따랐다. 몽골의 사절을 박대한 적은 몽골이 자기네를 끝까지 따라오리라는 것을 각오해야 했다.

p449 베네치아인은 불과 몇 년 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향한 4차 십자군에서 그들이 이득을 추구하는 데서 몽골인만큼이나 잔인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베네치아인은 타협을 봤고, 흑해 크롬반도에 있는 수익성 좋은 솔다이아(오늘날의 수다크) 식민지의 그들의 무역 경쟁자 제노바인을 몽골인이 공격해주기로 했다.

p463 그가 키이우로 돌아오자 그곳에 있는 러시아인들은 깜짝 놀랐다. 그들은 마치 그가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조반니는 죽지 않았다. 그는 일생일대의 여행에서 살아남았다.(그리고 때로는 그것을 즐겼다) 그의 세대 유럽인에게 비로소 개방된 땅이었다

p468 더욱 충격적이게도 홀라구가 압바스 할리파 알무스타심을 처형했다. 알무스타심은 몽골이 접근해올 때 항복을 거부하는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어찌할 수가 없었다. 순니파 이슬람 세계의 최고 영적 지도자는 융단에 말려 말들에게 짓밟혔다. 이렇게 해서 750년의 우마이야 타도 혁명까지 거슬러 올러가는 역사를 가진 왕조의 불빛이 꺼졌다. 몽골인의 무자비에는 한도가 없는 듯했다. 그리고 그들이 파괴하기 어려울 정도로 성스러운 것은 이 세상에 없었다.

p479 그들의 이야기는 참으로 이상하며, 그리고 아마도 중세 전체를 통틀여 가장 잔혹한 이야기일 것이다. 칭기스 칸이 개척하고 완성한, 그리고 테무르가 능숙하게 모방한 몽골의 정복 방식은 20세기의 공포독재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p484 코르출라 전투는 베네치아의 호시절로 기억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제노바의 승리로도 기억되지 않았다. 대신에 달마치아 해안 앞바다 공해상의 이 유혈 충돌은 베네치아의 전쟁 포로 가운데 한 사람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는 상인 가문 출신의 전직 모험가였다. 그는 당시를 살던 어느 누구보다도 더 멀리 세계를 여행해, 많은 특이한 일을 보고 여러 놀라운 사람을 만났다.

p488 마르코가 쿠빌라이를 위해 수집한 다양한 이야기는 동방견물록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그것은 쿠빌라이를 즐겁게 했듯이 유럽인도 경탄하게 만들었다.

p497 13세기 말이 되면 샹파뉴나 플란데런의 특설 시장에서는 이탈리아 기업 연합의 대표들이 서북 유럽의 여러 양모 생산자 및 의류 제조업자의 대리인과 거래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대금을 미래의 어느 시기에 열리는 시장에서 몇 달 또는 심지어 몇 년 앞당겨 청산한다는 지불일정을 계약서로 작성했다.

p514 뤼베크는 지리적 이점으로 북적거리는 항구가 되어, 북유럽의 기독교도 국가와 새로 식민화한 발트해 주변 지역을 연결하며, 목재, 모피, 호박, 수지가 많은 이 지역의 풍부한 상업적 가능성을 이용했다. 그곳에 살면서 일하는 상인들의 야망은 시간이 흐르면서 뤼베크가 단치히(그단스크), 리가, 베르겐, 함부르크, 브레멘, 그리고 심지어 괼른 같은 발트해와 그 너머 지역의 비슷한 도시국가군 가운데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p528 그 시대의 과실을 즐긴 것은 결코 그들 만이 아니었다. 상업혁명 동안에 중세 사회와 경제에 일어난 변화는 수백 년 뒤에 올 서방 자본주의의 황금시대를 위한 초석을 놓았다. 오늘날 중국수출, 은행 신용장, 여행보험, 채권 및 주식 투자로 생활이 나아진 사람은 중세에 무언가를 빚지고 있다. 우리는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 있다.

p531 왕은 적어도 1305년 봄부터 사적으로 신전기사단에 의구심을 표출하고 있었다. 기사단에 성적 비행과 신을 믿지 않는 타락이 만연해 있다고 그가 정말로 믿었는지 어떤지는 분명치 않았다.(지금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비틀거리는 경제를 부양하고 자신의 대외 전쟁 자금을 댈 가능성 있는 자원으로서 기사단의 재산에는 분명히 관심이 있었다.

p537 신전기사단 문제에 관한 기록에서 파리대학이 한 역할은 보통 그저 지나가는 말로 언급된다. 그러나 그 학자들의 견해는 논쟁의 모든 쪽에 있는 사람에게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결코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다.

p540 이시도로의 선천적인 영리함은 그 자체로 그를 주목할 만하게 만들었다. 그는 생전에 최소 스물네 권의 책을 썼다. 역사 연대기, 자연과학적 현상에 대한 연구, 수학 교과서, 기독교 교부에 대한 약전, 경구 모음, 그리고 그의 대백과사전 어원까지. 어원에서는 고슴도치의 식습관에서 세계 대륙의 지리적 배열에 이르기까지 교양 있는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묘사하고자 했다.

p577 장기적으로는 서방의 대학 내 지적 생활의 모형이 자리를 잡았다. 두 가지 충돌하는 양망이 작동되고 있는 모형이다. 한편으로 대학은 사회의 지적으로 보다 활기차고 두려움 없는 사람이 가서 배우고 연구하고 자기네가 발견한 대로 세계에 도전할 수 있는 기관이 된다. 그러나 대학은 또한 안팎에서 정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신앙의 보루 노릇을 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지금 서방 세계의 대학을 보고 대체로 정말 변한 것은 그리 많지 않구나 하고 생각할 만하다.

p591 잉글랜드의 군주 가운데 에드워드 1세만큼 열의를 가지고 성채 건설에 전념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웨일스의 공사 외에 런던탑과 (케임브리지, 채스터, 코프에 있는) 다른 플랜태저넷 성채 재건에 많은 돈을 투자했다. 그런 의미에서 13세기 말은 축성의 전성기였다.

p611 14세기 초에 링컨의 탑은 확대되고 확장되어 더욱 높아졌다. 이 공사는 1311년 마무리되었는데, 나무로 만들고 끄트머리는 납으로 마무리한 그 뾰족탑은 높이가 160미터나 되었다. 이것은 이집트 기자에 있는 쿠푸의 대피라미드보다 11미터쯤 더 높았다. 대피라미드는 거의 4000년동안 지구상의 가장 높은 인공 구조물이었는데, 링컨 대성당은 그 지위를 이어받아 1548년 강풍으로 뾰족탑이 부러질 때까지 유지했다.

p619 1418년(아르놀포의 본래 성당 초석이 놓인 지 122년쯤 뒤다)이 되어서야 피렌체 대성당 수수께끼의 공사 해법이 제시되었다. 그 사람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라는 수학 천재였다. 그는 공개 수주 경쟁에서 승리했고, 완전히 새로운 건설 체계와 약 400만 개의 벽돌을 위치로 들어 올리는 기중기를 만들어내야 했다. 이 건설 작업은 20년 가까이나 걸렸다. 그것은 고통스럽도록 지루한 공사의 진을 빼는 결말이었다. 그러나 브루넬레스키가 돔을 완성하자 지금 산타마리아 델피오레로 알려진 이 대성당은 곧바로 1000년 전 고전 세계가 마감된 이후 보기 어려웠던 일종의 경이로 인식되었다.

p627 1340년대 이후 아시아, 유럽, 북아프리카와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 일부 지역을 할퀴면서 흑사병으로 알려진 세계적으로 유행한 전염병은 역시 세계적으로 유행한 우역과 비슷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바로 몽골이었다.

p656 여러 곳의 많은 사람이 대체로 같은 시기에 거리로 나와 자기네 환경을 바꾸고자 하는 혁명의 순간이다. 그들은 서로 다른 지역적 과제에 대응하고 서로 다른 언어로 자유를 외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용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p662 페스트균의 맹공으로부터 살아남은 세계는 갑자기 새로운 사상, 발견, 기술로 넘쳐났다. 그 가운데 일부는 고전기의 것이 되살아났고, 어떤 것은 새로우 발명되었다.

p668 그는 재미있고 다양한 자리를 누렸다. 그 대부분의 기간 동안 그는 서부 지중해 최고의 그리스어 학자였다. 그러나 자신의 독설 때문에 외모를 희생해야 했고 목숨도 잃을 뻔했다. 필렐포의 사고방식대로, 그는 자신의 원칙을 고수하고 그 때문에 고생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때 이렇게 썼다. “나는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에 기생충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아첨하고 알랑거리는 법을 배운 적이 없고, 무조건 복종하는 법도 배운 적이 없다”

p697 활기차고 많은 후원금이 오가는 문예부흥기 세계에서 살며 일하기 위해서는 그 무서운 현실과 유혈, 범죄, 전쟁의 편재를 받아들여야 했다. 따라서 레오나르도가 루도비코 스포르차에게 자신을 그저 천사처럼 그리는 것 이상을 할 수 있다고 내세운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진정으로 위대해지려면 실용주의라는 수단이 필요함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창의력을 온갖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어야 했다. 필요하다면 사악한 것까지도 포함해서 말이다.

p702 레오나르도보다 40세 이상 어린 프랑수아는 진정한 문예부흥의 아이였다. 프랑수아는 자신의 동년배이자 스파링 상대였던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키가 크고 잘생겼으며, 좋은 것과 인본주의의 풍부한 과실에 본능적인 애호를 갖고 있었다

p705 이 모든 부는 어디서 왔을까? 해답은 서방에 있었다. 레오나르도가 죽던 그해에 독일의 판화가이자 화가인 알브레히트 뒤러는 문예부흥기의 스케치와 색칠에 관한 여러 가지 기법과 통찰을 가지고 뉘른베르크로 왔다. 채울 수 없는 호기심을 지닌 여행광이었고, 레오나르도와 다르지 않은 관심 범위와 지적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와 네델란드를 여행하며 회화와 판화, 해부학과 기하학에 관해 많은 것을 배웠다.

p711 소문이 서방에서 돌았기 대문에 메흐메드는 처음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들어가서 자신에게 승리를 허락한 데 대해 무함마드에게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그분께서, 내가 새 로마를 정복하고 복속시켰듯이 옛 로마를 정복하고 복속시킬 수 있는 수명을 허락해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p728 1492년 1월 2일 동이 트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서른을 갓 넘은 무함마드는 의식 절차에 따라 알함브라를 에스파냐군 장교에게 넘겨준 뒤 말을 타고 그라나다 교외로 나갔다. 그곳에서 그는 페르난도왕 및 이사벨 여왕을 만나 그들에게 도시의 열쇠를 건넸다. 그는 페르난도에게 아라비아어로 이렇게 말했다. “신은 당신을 매우 사랑하십니다. 전하, 이것이 이 천국의 열쇠입니다. 저와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당신의 것입니다”

p735 역사를 꼭 선한 사람이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지금까지 이 책에서 해온 중세사 여행은 그런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따라서 콜롬보에게 어떤 잘못과 결점과 편견(분명히 그의 시대 기준보다는 21세기의 기준과 더 큰 차이를 보일 것이다)이 있더라도 그는 중세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이며 지금도 그렇게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카리브해에서 돌아온 순간 그가 인류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p739 콩키스타도르는 우월한 기술과 무기를 전개하고 천연두 같은 질병(아메리카 토착민은 이에 대해 저항력이 거의 또는 전혀 없었다)을 가져와 아메리카의 고대 왕국을 쓸어내고 그 대신에 대서양 건너의 자기네 제국을 건설했다.

p745 이 마법이 좋은 것일 뿐만 아니라 반복될 수 있음을 알게 되자 이제 수백 년 뒤에 ‘카레이라 다인디아’(인도 항로)로 알려지게 되는 길으 ㄹ따라 연례 선단이 파견되었다. 포르투갈 선단은 대서양의 무역풍과 인도양의 계절풍 패턴의 이점을 살려 리스본에서 출발해 카부베르드로 가고 서남쪽 브라질로 갔다가 다시 아프리카의 남쪽 끝을 돌아 거기서 인도로 갔다.

p752 구텐베르크는 이것이 너무 힘들다는 것을 알았고, 성인이 된 후 상당한 시간을 사본 제작 혁신을 추구하는 데 들였다. 그가 처음으로 인쇄라는 개념을 생각해 낸 것은 아니었다. 날짜가 박힌 중국의 첫 인쇄 두루마리(금강경리나는 불경 사본이었다)는 868년 목판으로 찍은 것이었고, 금속활자는 한국에서 13세기부터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런 기술은 서방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때까지는 말이다.

p763 면죄부 모든 영혼에 대해 팔 수 있다면 시장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수 있다고 계산한 식스투스는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면죄부를 죽은 자를 대신해 살 수 있다고 공언했다.

p770 루터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인 듯했다. 현대에 나온 루터의 전집은 100여 권에 달한다. 온갖 종류의 문제가 다 있고, 그가 믿은 것이 신의 인간 사랑에 관한 진실이었음을 꾸미거나 숨기지 않는다는 큰 주제로 묶이는 것이었다. 기성 질서 옹호자를 짜증 나게 하면서 루터의 저작이 거듭거듭 주장한 것은 그가 세속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성과 은총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이었다.

p785 오랜 경험을 가진 성직자 출신으로 클레멘스 7세라는 이름을 택했다. 클레멘스는 거의 프랑수아만큼이나 카를 5세를 경계했다. 그래서 그는 프랑수아가 제국의 포로였을 때 했던 모든 약속을 공식적으로 면제시켜줬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갔다. 클레멘스는 프랑수아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되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교황청이 프랑스와 공식 동맹을 맺겠다고 약속했다.

p791 수녀는 강간당했다. 사제는 제단에서 살해당했다. 교회를 어느 정도까지 훼손해야 하는지를 놓고 에스파냐인과 독일인 사이에 간간이 언쟁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이는 성직자 자신에게는 아무런 도움이나 위안도 되지 않았다. 그들이 아주 살해되지 않는다 해도 “찢어지고 피 붇은 옷차림으로, 무차별적인 채찍질과 몽둥이질로 온몸에 긁히고 멍든 자국을 드러낸 채” 거리를 방황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p789 10-12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역자처럼 ‘중세=암흑시대’관념을 벗어버리지 못한 사람들에게 필요하다. 새로운 기법들을 개발해 상업을 한 단계 올려놓은 상인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대학을 만든 학자들, 거대한 역사를 설계하고 지휘한 건설자들이다. 중세는 결코 암흑시대가 아니었고, 그 시기에도 발전은 이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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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인들 세트 - 전2권 - 서로마 몰락부터 종교개혁까지, 중세 천년사를 이끈 16개 세력
댄 존스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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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세인들1

 : 댄 존스

 : 책과 함께

읽은기간 : 2024/01/10 -2024/01/20


요즘 중세에 대한 책들이 쏟아진다.. 덕분에 읽을 수 있는 중세관련 책들이 많아졌다.

중세는 관광지 상품으로나 알려져있지, 그 시대 자체는 폄하되고 인정받지 못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새롭게 중세를 보는 책들도 많아지고 연구들도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다.

유럽과 이슬람의 이야기가 주류였는데 훈족의 이동에 따른 혼란들을 설명하면서 동서양의 만남도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다. 

특히 십자군은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을 고려해가며 설명하고 있어, 훨씬 입체적이다. 

2권을 빨리 읽어야겠다. 


p14 훈족의 왕 아틸라부터 잔 다르크까지 수많은 남자와 여자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역사의 적어도 10여개 분야(전쟁과 법에서 미술과 문학에 이르기까지)에 무모하게 뛰어들게 될것이다.

p29 아우구스투스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로마인의 생각은 갈렸다. 고상한 선지자이자 비길데 없는 정치군인인가, 아니면 부패하고 잔인하며 믿을 수 없는 폭군인가?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렇게 물었으나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황제로서 이룬 성과는 부정하기 어렵다

p36 세계를 강타한 자들이 도시를 약탈해 육지가 남아나지 않았는데, 그들이 바다를 털고 있다. 적이 부유하면 그들은 탐욕을 부리고, 적이 가난하면 그들은 지배하려 한다. 동쪽도 서쪽도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만이 빈자와 부자에 대해 똑같은 열의로 탐낸다. 그들은 강도와 살육과 약탈에 제정이라는 거짓이름을 붙인다. 그들은 황무지를 만들어놓고 이를 평화라 부른다

p40 이 주장의 핵심에는 태고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왕국의 지배자들을 고무해온 두 가지 오래된 논쟁이 있다. 국가가 이전의 적을 어떻게 자기네 사회에 끌어들일 것인가. 그리고 국가 또는 사회의 구성원 자격에 대한 문호를 외국인에게 개방하는 것이 그들의 혈통과 특성을 강화하는가, 희석하는가? 이는 로마의 수백 년 제정 시대를 시끄럽게 했던 논쟁이었고, 중세와 그 이후까지 유산을 남겼다.

p57 데키우스 치하에서, 그리고 이후 발레리아누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 치하에서 기독교도는 채찍질을 당하고 가죽이 벗겨지고 야생동물에게 던져졌으며 여러 창의적인 방식으로 살해당했다

p65 훈족은 전문적인 기마궁술을 이용해 잔인한 도살자의 명성을 쌓았고 스스로도 그것을 열렬하게 강조했다. 그들은 전사 계급이 이끌고 혁명적인 군사기술을 이용할 수 있었던 유목 문명이었다.

p67 티베트고원의 칭하이성에서 나온 치렌향나무 표본이 제공한 나이테 자료에 따르면 아시아 동부 지역은 350년에서 370년 사이에 큰 가뭉을 겪었던 듯하다. 이 가뭄은 지난 2000년 동안 기록된 가뭄 가운데 가장 심한 것이었다.

p110 티우다레익스는 대왕이라는 별호를 가질 운명이었고, 자신이 알았던 대로의 삶을 살았다. 수도 라벤나 같은 시범 도시들에서 그는 방어 성벽, 거대한 궁궐, 대성당, 영묘, 공공건설에 막대한 투자를 했다.

p120 여 해 동안 믿음직한 제국 행정 요원이었던 프로코피오스는 유스티니아누스의 전쟁과 대민 행정에서의 업적에 관한 역거운 기록 몇 가지를 썼다. 역사 이야기와 뻔뻔한 선전을 섞은 것들이었다.

p123 이들 법률가는 유스티니아누스가 즉위한 지 불과 20개월 만에 이 법률들을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으로 알려진 로마법의 단일 확정본으로 요약하고 편집하고 정리했다. 이 법전은 529년 4월 7일 반포되었으며, 제국의 모든 속주에 전달되어 그곳에서 자동적으로 다른 모든 법전을 대체했다.

p127 유스티니아누스는 그 후 어디서든 동성애자와 남색으로 드러난 자들을 거세한다는 포고를 내렸다. 많은 사람이 고통스럽게 죽었다. 말랄라스는 이렇게 썼다. “그때 이후로 동성애 욕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포심이 생겨났다”

p143 539년(또는 540년)에 또 하나의 거대한 화산 분출이 있었다. 아마도 현대 엘살바도르의 일롱팡고였을 것이다. 이런 자연적인 폭발이 한데 합쳐져 수천억 세제곱미터의 돌을 토해내고 100만톤 이상의 유황과 재를 지구의 하늘로 뿜어 올렸다. 이로 인해 인류 역사상 가장 격심한 지구 환경 위기 가운데 하나가 발생했다.

p147 영광스러운 이 새 성당을 장식한 근사한 모자이크 가운데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은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와 황제 테오도라의 초상 차지가 되었다.

p164 7-8세기 이슬람 정복전쟁의 많은 부분이 그렇듯이, 다마스쿠스 포위전에 관한 당대(그리고 당대에 가까운 시기)의 기록은 뒤엉켜 있어 정리하기 어렵다. 그러나 약간의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랜 기다림 끝에 할리드 이븐알왈리드와 아라비아군이 다마스쿠스인의 저항을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줄여갔다는 것이다.

p167 632-642년 아라비아인의 시리아 정복은 그 시기의 가장 놀라운 성과 가운데 하나였다. 우선 그것은 동로마 제국의 동쪽 날개를 최종적으로 그리고 영구히 잘라버렸다. 700년 가까이 로마 영토였던 곳이었다. 동로마의 국경은 이제 소아시아 동쪽 끈의 아마누스산맥(현재의 누르산맥)으로 후퇴했다. 중세 시기에 이르면 그 너머로 진출하는 일이 거의 없다.

p169 다마스쿠스는 630년대에만 포위된 것이 아니었다. 그곳은 1120년대 2차 십자군 병사들에게 공격당했고, 1400년에 몽골족과 튀르크족 이슬람교도들에게 포위당했고, 1840년대와 1860년대에 종교적 대량 학살을 겪었고, 1920년대에 프랑스의 폭격을 당했고, 현재의 시리아 내전에서 여러 파벌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들 충돌 가운데 마지막 것에서는 야르무크 수용소로 알려진 다마스쿠스의 한 지역에서 악명 높은 전투가 벌어졌다.

p189 우마이야 왕조는 100년도 못 되는 기간 동안 권력을 행사했지만, 이 시기는 흥미로운 전화기였다. 이슬람 세계의 수도가 마디나에서 다마스쿠스로 옮겨 갔고, 이슬람교도 거주지의 경계가 서방 이방인이 사는 남프랑스까지 멀리 뻗쳤다.

p194 우마이야는 로마를 모방하려는 의욕이 강했기 때문에 660년대에서 710년대 사이에 반복적으로 옛 로마 국가를 대대적으로 탈취하려 했다. 그 결과로 서아시아와 남부 지중해 일대에서 광범위한 전쟁이 벌어졌고 10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p197 이 경험은 소아시아에서 가졌던 우마이야의 야심을 영원히 좌절시켰고, 이를 돌이켜 본 많은 역사가가 두 번째 포위전의 실패를 서방 역사의 전환점으로 보았다. 이슬람 군대의 첫 번째 발칸반도 확산이 멈춘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중세 말까지 기독교도의 손에 남았고, 이슬람교도는 15-16세기에 이르러서야 오스만의 정복으로 옛 로마 영토에 뛰어들어 동유럽에 진출했을 뿐이다

p205 우마이야 이슬람 사원이 이런 점에서 이국적이고 낯설어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또한 수백 년에 걸쳐 현지 양식을 흡수해 이슬람 특유의 요소와 융합한 여러 대형 이슬람 사원의 선구이기도 했다.

p225 왕릉 주위에 건설되어 몇 킬로미터 밖에서도 볼 수 있었다. 힐디릭 1세의 무덤은 프랑크인이 단순한 떠돌이 전사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 지배자들은 5세기 말에 이미 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고, 사방으로 말을 타고 며칠 거리에 이르는 지역의 통치자로 자임했다

p228 743년 샤를 마르텔이 죽고 그의 아들들 및 친척들이 그 유산과 상속을 놓고 다투게 되자 불운한 힐디릭 3세가 테우데릭의 후계자로 점지되었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힐디릭 3세는 메로빙 왕조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751년, 그의 머리칼은 마르텔의 아들 고마 페팽의 명령에 따라 잘렸다. 그리고 이와 함께 왕조가 멸망했다

p232 스테파투스 교황의 방문 이듬해에 이 프랑크왕은 두 번 이탈리아로 진격했고, 두 번 모두 랑고바르드와 그 왕 아이스톨프를 매우 강력하게 응징했다. 역사 기록자 프레데가리우스는 이렇게 썼다. “그는 이탈리아땅을 사방으로 광범위하게 파괴하고 불태워 이 지역을 초토화했다. 랑고바르드의 모든 요새를 무너뜨리고 많은 금은보화와 수많은 장비, 그들의 모든 천막을 빼앗아 가졌다”

p237 샤를마뉴의 군대는 피레네산맥의 론세스바에스 고개에서 몰라 그 뒤를 추격한 적의 매복 공격을 받았다. 프랑크군은 기습에 허를 찔렸다. 그들의 보급품을 노획당했다. 그들의 후위는 포위당해 잘려 나가고 긴 시간의 싸움 끝에 살육당했다. “그 죽음에 대해서는 복수를 할 수 없었다”라고 아인하르트는 썼다. 공격자들이 어둠 속으로 재빨리 달아났기 때문이다. 이일은 굴욕으로 기억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샤를마뉴 군대의 사망자 가운데 흐로딜란트(프랑스어로 롤랑)라는 장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p262 869년에 이스트앵글리아왕 에드먼드가 노르드인의 손에 죽었다. 880년대가 되면 잉글랜드의 절반 정도가 스칸디나비아인의 통제하에 들어가거나 직접 지배를 받았다. 노르드인의 전진은 웨식스왕 앨프레드가 색슨쪽에서 용감하게 이끈 긴 투쟁 끝에야 저지되었다.

p270 멍청이 샤를에게 공식적으로 항복을 할 시간이 되자 흐롤프르는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다른 사람의 무르ㅠ 아래 무릎을 꿇지 않을 것이고, 누구의 발에도 키스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그는 부하 하나를 시켜 자기 대신 그일을 하게 했다. 뒤동은 이렇게 썼다. 그 전사는 “즉각 왕의 발을 붙잡아 그것을 자기 입까지 올린 뒤 거기에 키스를 했다. 그는 여전히 선 채였다. (그 때문에) 왕은 벌러덩 나자빠졌다. 그러자 커다란 웃음이 터졌고, 사람들은 크게 고함을 질렀다.”

p278 유의 대표 수도원으로 발전하는 것은 바로 클뤼니였다. 부르고뉴에 있었지만 프랑스 전역과 함께 잉글랜드, 이탈리아, 이베리아반도, 독일 서부가지 영향력을 확대했다. 10세기 중반 이후 이곳은 한창때 수백군댕의 부속 수도원을 거느린 국제 조직의 본부였다.

p291 오동의 조치가 지금은 가혹해 보이겠지만 그런 개혁의 필요성은 컸다. 카롤링 지배자들이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사람이) 수도원이 제대로 운영되어야 하고 베네데토 규칙이 준수되어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요구했지만, 지금 남아 있는 당시의 자료에는 수도원의 표준이 무너진 충격적인 사례가 많다. 수행자와 수녀가 조금 편해지려 하고 세상으로부터의 고립을 즐기려 한 때문이다.

p304 이상한 일이지만 클뤼뉘에 있는 모수도원은 이들에 필적할 만큼 훌륭한 유물을 기증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 수도원이 그러한 개혁된 수도원의 거대한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선 10-11세기에 클뤼니는 엄청나게 부유해졌다.

p315 어떤 의미에서 이것들이 모두 개인적인 것은 아니었다. 베르나르와 피에르는 경쟁자로서 충돌했지만 적으로서 충돌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양피지 위에서 번갈아 상대를 후벼 파고, 생색을 내고, 무시하고, 아는 체하고, 헐뜯고 노골적인 무례를 저질렀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서로를 존경했으며, 1150년에는 예수 탄생 기념일을 함게 보내기도 했다. 물론 극도로 금욕적인 클레르보가 아니라 안락한 클뤼니에서였다. 그들을 연결해 주는 것(수도원 생활, 명상, 규칙, 질서, 속세의 죄, 천국의 보상, 외교)이 그들을 갈라놓는 것보다 강했다.

p339 그는 완강하고 확고하게 전쟁터에서 자신의 맹렬한 공격 원칙을 고수했으며, 전장을 벗어나면 신사도를 세심하게 지켰다. 그리고 결국 그의 노력은 보상을 받았다. 1094년 6월 15일, 발렌시아가 함락되었다. 로드리고의 부하들은 도시를 열심히 털었고, 시민들로부터 많은 양의 금과 은을 빼앗아 차지했다.

p355 크레티엥 드트루아의 아서 로망스 수레의 기사 랜슬럿에서 비극적이고 용감한 기사 렌슬럿은 자신의 기사도적인 귀네비어 왕비 숭배를 갈 데까지 간 연애로 변질시킴으로써 아서왕을 배신했다. 반복되는 이 로망스의 주제는 바로 순결하고 품격 있는 사랑과 실제의 간통 및 불륜 사이에 선을 긋기가 이렇게 어렵다는 것이다.

p369 중세 분장놀이에 탐닉한 잉글랜드 왕은 헨리가 마지막이 아니었다. 런던탑에는 또한 찰스 1세와 제임스 2세를 위해 만들어진 멋지고 화려하게 장식된 갑옷도 전시되어 있다. 그들의 치세가 다사다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갑옷들은 의례에서 과시하는 외에는 중세의 갑주로서 실제로 사용되지 않았다.

p392 그들이 서로를 짖어발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십자군과 이슬람 교도가 서로 목을 베고 불태워 죽일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고 가까이 사귀고 교역하고 교류하던 시기와 장소가 매우 많았다. 이것은 십자군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쓰자는 것이 아니다. 그저 중세사에서 십자군의 중요성과 그것이 현대 세계에 남긴 유산에 대해 너무 흔히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며 그 이상은 없다는 식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음을 말하려는 것일 뿐이다.

p402 라인란트의 새로운 세대 유대인이 매 맞고 강탈당하고 불구가 되고 눈이 멀고 살해되거나 쫓겨다니다가 결국 자살했다. 어처구니없는 규모의 역사 재연이었다.

p419 자기네가 십자군에 들인 경비를 돌려받은 베네치아인은 알렉산드리아나 그 밖의 어느 곳으로도 가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닻을 올리고 고국으로 돌아가 딴 돈을 계산했다. 그리스 역사 기록자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는 이 모든 것을 폭거라고 표현했다.

p421 카타리파는 서방 교회의 위계를 거부하고 자기네 스스로 독자적인 성직자를 택했으며, 성찬식과 세례, 기타 교회 의식을 거부함으로써 기독교 금욕주의에서 이단으로 넘어갔다. 이는 그들을 매우 용인할 수 없는 처지로 내몰았다. 특히 인노켄티우스처럼 교회 전반에 명령과 통제의 권위를 강제하려고 심하게 집착했던 교황에게는 말할 것도 없었다.

p428 프리드리히 호엔슈타우펜은 일생 동안 교황들과 끊임없이 다투었고, 놀랍게도 네 번이나 파문당했다. 사실 그가 1229년 성묘교회에서 예루살렘왕으로 즉위하던 그 순간에 그는 서류상 로마 교회와 교신이 금지된 상태였다.

p431 이것은 십자군이라는 말의 마지막 언급은 결코 아니었다. 십자군은 중세가 끝난 뒤에도 이어졌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극우, 신나치주의자, 이슬람 테러리스트가 좋아하는 표현법이다. 이 모두는 그것이 1000년 동안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관계를 규정했다는 생각(분명히 허점이 많은 생각이다)을 고수하고 있다. 그들은 옳지 않지만, 그 잘못이 그들의 독창인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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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 우리가 사랑한 노래들
배기성 지음 / 흠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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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때 그시절, 우리가 사랑한 노래들

 : 배기성

 : 흠영

읽은기간 : 2024/01/09 -2024/01/09


지금이야 세계적인 가수들이 많지만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만의 가수들이었다..

그래도 너무 멋진 가수들이다. 

내가 어릴때 즐겨 듣고 부르던 노래들이 이젠 역사가 되어 책에 나온다. 

신기하다. 

암울한 시기였지만 대중가요는 힘없이 굴복하지 않았다... 

가수들도, 노래들도, 나도 참 열심히 그리고 잘 살았다.. 

좋다.. 


p23 가왕 조용필에 대해 세간에서 말하는 것이 있다. “조용필은 항상 가장 먼저 호명되고 가장 마지막에 나온다”

p39 1986년 무렵부터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에 자리 잡은 것이 있다. 다른 아닌 전형이다. 우리는 각자의 개성을 점차 잃어버리고 매스미디어에 나오는 삶에 우리 자신의 삶을 맞추기 시작했다.

p44 오직 시국 사건에만 비상한 능력을 발휘하던 대한민국 경찰은 이 박종운을 추적하던 중 그가 박종철의 집에서 하루 묵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박종철은 곧바로 체포되었고, 차가운 남영동의 대공분실에서 잔혹한 물고문을 당하다가 질식사했다.

p77 같은 시대 같은 문화권에서 같은 언어를 쓰고 살아도 어떤 이는 이들의 음악을 방탕하다며 배척했고 어떤 이들은 순순하고 열정적이라고 느끼며 열광했다

p81 이는 정확히 유신 철권통치와 제5공화국이라는 희대의 독재정권을 포괄하는 기간인데, 이 시기 대한민국은 중앙정보부와 대통령경호실 그리고 대통령비서실 이 세 기관에 의해 강압적이고 획일적으로 다스려졌다.

p149 신중현은 1960년대 펄 시스터즈를 시작으로 1969년 김추자, 1971년 김정미 두 섹시스타를 길러내 큰 성공을 거둔다

p165 주기철 목사는 전국의 수많은 종교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용기를 내서 신사참배 거부 의사를 밝히는 이들이 많아졌고, 기독교인을 예수쟁이라고 일컫는 기자들도 줄었다. 일제가 무력으로 기독교를 탄압하려 했던 것이 도리어 이 땅에 기독교가 보편 종교의 하나로 자리하는 데 결정적 계기로 작용한 것이다.

p178 1966년 발표된 이금희의 키다리 미스터 김이라는 노래다. 이런 노래가 어째서 금지곡 신세가 되었을까. 이 노래가 금지곡이 된 이유는 놀랍게도 단신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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