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인들 세트 - 전2권 - 서로마 몰락부터 종교개혁까지, 중세 천년사를 이끈 16개 세력
댄 존스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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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세인들2

 : 댄 존스

 : 책과 함께

읽은기간 : 2024/01/29 -2024/02/03


2권도 계속해서 읽었다.

2권에서는 몽골, 흑사병, 그리고 르네상스 초기까지 표현되었다..

중세를 어디까지 가르느냐는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나는 서로마제국 멸망부터 동로마제국 멸망까지로 보고 있는데 저자는 좀 더 후반기까지 보고 있다. 

덕분에 신대륙 이야기도 읽을 수 있었다.. 

통사보다는 좀 더 각론에 가까운 내용이어서 좀 더 세심하게 읽을 수 있었다.

통사도 읽고 각론도 읽어서 역사를 배우는 즐거움을 더 배가시키고 있다.

즐거웠다.. 역사는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있다. 


p438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다비드 왕에 대한 소문이 완전히 허구는 아니었다. 무적의 지배자가 동방에서 막을 수 없는 기세로 진군해 오고 있다는 인도의 향신료 상인과 십자군 전쟁포로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만 자기네 앞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을 뿐이었다

p443 가혹은 모든 몽골의 행위의 특징이었다. 테무진과 그의 장군들은 원정과 정복 과정에서도 엄격하고 끔찍할 정도로 잔인한 전투 규칙에 따라 작전을 벌였다. 몽골의 지배에 즉각 복종하는 사람이나 도시는 모두 자기네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저항과 반발의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대학살과 초토화가 따랐다. 몽골의 사절을 박대한 적은 몽골이 자기네를 끝까지 따라오리라는 것을 각오해야 했다.

p449 베네치아인은 불과 몇 년 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향한 4차 십자군에서 그들이 이득을 추구하는 데서 몽골인만큼이나 잔인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베네치아인은 타협을 봤고, 흑해 크롬반도에 있는 수익성 좋은 솔다이아(오늘날의 수다크) 식민지의 그들의 무역 경쟁자 제노바인을 몽골인이 공격해주기로 했다.

p463 그가 키이우로 돌아오자 그곳에 있는 러시아인들은 깜짝 놀랐다. 그들은 마치 그가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조반니는 죽지 않았다. 그는 일생일대의 여행에서 살아남았다.(그리고 때로는 그것을 즐겼다) 그의 세대 유럽인에게 비로소 개방된 땅이었다

p468 더욱 충격적이게도 홀라구가 압바스 할리파 알무스타심을 처형했다. 알무스타심은 몽골이 접근해올 때 항복을 거부하는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어찌할 수가 없었다. 순니파 이슬람 세계의 최고 영적 지도자는 융단에 말려 말들에게 짓밟혔다. 이렇게 해서 750년의 우마이야 타도 혁명까지 거슬러 올러가는 역사를 가진 왕조의 불빛이 꺼졌다. 몽골인의 무자비에는 한도가 없는 듯했다. 그리고 그들이 파괴하기 어려울 정도로 성스러운 것은 이 세상에 없었다.

p479 그들의 이야기는 참으로 이상하며, 그리고 아마도 중세 전체를 통틀여 가장 잔혹한 이야기일 것이다. 칭기스 칸이 개척하고 완성한, 그리고 테무르가 능숙하게 모방한 몽골의 정복 방식은 20세기의 공포독재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p484 코르출라 전투는 베네치아의 호시절로 기억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제노바의 승리로도 기억되지 않았다. 대신에 달마치아 해안 앞바다 공해상의 이 유혈 충돌은 베네치아의 전쟁 포로 가운데 한 사람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는 상인 가문 출신의 전직 모험가였다. 그는 당시를 살던 어느 누구보다도 더 멀리 세계를 여행해, 많은 특이한 일을 보고 여러 놀라운 사람을 만났다.

p488 마르코가 쿠빌라이를 위해 수집한 다양한 이야기는 동방견물록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그것은 쿠빌라이를 즐겁게 했듯이 유럽인도 경탄하게 만들었다.

p497 13세기 말이 되면 샹파뉴나 플란데런의 특설 시장에서는 이탈리아 기업 연합의 대표들이 서북 유럽의 여러 양모 생산자 및 의류 제조업자의 대리인과 거래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대금을 미래의 어느 시기에 열리는 시장에서 몇 달 또는 심지어 몇 년 앞당겨 청산한다는 지불일정을 계약서로 작성했다.

p514 뤼베크는 지리적 이점으로 북적거리는 항구가 되어, 북유럽의 기독교도 국가와 새로 식민화한 발트해 주변 지역을 연결하며, 목재, 모피, 호박, 수지가 많은 이 지역의 풍부한 상업적 가능성을 이용했다. 그곳에 살면서 일하는 상인들의 야망은 시간이 흐르면서 뤼베크가 단치히(그단스크), 리가, 베르겐, 함부르크, 브레멘, 그리고 심지어 괼른 같은 발트해와 그 너머 지역의 비슷한 도시국가군 가운데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p528 그 시대의 과실을 즐긴 것은 결코 그들 만이 아니었다. 상업혁명 동안에 중세 사회와 경제에 일어난 변화는 수백 년 뒤에 올 서방 자본주의의 황금시대를 위한 초석을 놓았다. 오늘날 중국수출, 은행 신용장, 여행보험, 채권 및 주식 투자로 생활이 나아진 사람은 중세에 무언가를 빚지고 있다. 우리는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 있다.

p531 왕은 적어도 1305년 봄부터 사적으로 신전기사단에 의구심을 표출하고 있었다. 기사단에 성적 비행과 신을 믿지 않는 타락이 만연해 있다고 그가 정말로 믿었는지 어떤지는 분명치 않았다.(지금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비틀거리는 경제를 부양하고 자신의 대외 전쟁 자금을 댈 가능성 있는 자원으로서 기사단의 재산에는 분명히 관심이 있었다.

p537 신전기사단 문제에 관한 기록에서 파리대학이 한 역할은 보통 그저 지나가는 말로 언급된다. 그러나 그 학자들의 견해는 논쟁의 모든 쪽에 있는 사람에게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결코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다.

p540 이시도로의 선천적인 영리함은 그 자체로 그를 주목할 만하게 만들었다. 그는 생전에 최소 스물네 권의 책을 썼다. 역사 연대기, 자연과학적 현상에 대한 연구, 수학 교과서, 기독교 교부에 대한 약전, 경구 모음, 그리고 그의 대백과사전 어원까지. 어원에서는 고슴도치의 식습관에서 세계 대륙의 지리적 배열에 이르기까지 교양 있는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묘사하고자 했다.

p577 장기적으로는 서방의 대학 내 지적 생활의 모형이 자리를 잡았다. 두 가지 충돌하는 양망이 작동되고 있는 모형이다. 한편으로 대학은 사회의 지적으로 보다 활기차고 두려움 없는 사람이 가서 배우고 연구하고 자기네가 발견한 대로 세계에 도전할 수 있는 기관이 된다. 그러나 대학은 또한 안팎에서 정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신앙의 보루 노릇을 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지금 서방 세계의 대학을 보고 대체로 정말 변한 것은 그리 많지 않구나 하고 생각할 만하다.

p591 잉글랜드의 군주 가운데 에드워드 1세만큼 열의를 가지고 성채 건설에 전념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웨일스의 공사 외에 런던탑과 (케임브리지, 채스터, 코프에 있는) 다른 플랜태저넷 성채 재건에 많은 돈을 투자했다. 그런 의미에서 13세기 말은 축성의 전성기였다.

p611 14세기 초에 링컨의 탑은 확대되고 확장되어 더욱 높아졌다. 이 공사는 1311년 마무리되었는데, 나무로 만들고 끄트머리는 납으로 마무리한 그 뾰족탑은 높이가 160미터나 되었다. 이것은 이집트 기자에 있는 쿠푸의 대피라미드보다 11미터쯤 더 높았다. 대피라미드는 거의 4000년동안 지구상의 가장 높은 인공 구조물이었는데, 링컨 대성당은 그 지위를 이어받아 1548년 강풍으로 뾰족탑이 부러질 때까지 유지했다.

p619 1418년(아르놀포의 본래 성당 초석이 놓인 지 122년쯤 뒤다)이 되어서야 피렌체 대성당 수수께끼의 공사 해법이 제시되었다. 그 사람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라는 수학 천재였다. 그는 공개 수주 경쟁에서 승리했고, 완전히 새로운 건설 체계와 약 400만 개의 벽돌을 위치로 들어 올리는 기중기를 만들어내야 했다. 이 건설 작업은 20년 가까이나 걸렸다. 그것은 고통스럽도록 지루한 공사의 진을 빼는 결말이었다. 그러나 브루넬레스키가 돔을 완성하자 지금 산타마리아 델피오레로 알려진 이 대성당은 곧바로 1000년 전 고전 세계가 마감된 이후 보기 어려웠던 일종의 경이로 인식되었다.

p627 1340년대 이후 아시아, 유럽, 북아프리카와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 일부 지역을 할퀴면서 흑사병으로 알려진 세계적으로 유행한 전염병은 역시 세계적으로 유행한 우역과 비슷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바로 몽골이었다.

p656 여러 곳의 많은 사람이 대체로 같은 시기에 거리로 나와 자기네 환경을 바꾸고자 하는 혁명의 순간이다. 그들은 서로 다른 지역적 과제에 대응하고 서로 다른 언어로 자유를 외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용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p662 페스트균의 맹공으로부터 살아남은 세계는 갑자기 새로운 사상, 발견, 기술로 넘쳐났다. 그 가운데 일부는 고전기의 것이 되살아났고, 어떤 것은 새로우 발명되었다.

p668 그는 재미있고 다양한 자리를 누렸다. 그 대부분의 기간 동안 그는 서부 지중해 최고의 그리스어 학자였다. 그러나 자신의 독설 때문에 외모를 희생해야 했고 목숨도 잃을 뻔했다. 필렐포의 사고방식대로, 그는 자신의 원칙을 고수하고 그 때문에 고생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때 이렇게 썼다. “나는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에 기생충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아첨하고 알랑거리는 법을 배운 적이 없고, 무조건 복종하는 법도 배운 적이 없다”

p697 활기차고 많은 후원금이 오가는 문예부흥기 세계에서 살며 일하기 위해서는 그 무서운 현실과 유혈, 범죄, 전쟁의 편재를 받아들여야 했다. 따라서 레오나르도가 루도비코 스포르차에게 자신을 그저 천사처럼 그리는 것 이상을 할 수 있다고 내세운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진정으로 위대해지려면 실용주의라는 수단이 필요함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창의력을 온갖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어야 했다. 필요하다면 사악한 것까지도 포함해서 말이다.

p702 레오나르도보다 40세 이상 어린 프랑수아는 진정한 문예부흥의 아이였다. 프랑수아는 자신의 동년배이자 스파링 상대였던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키가 크고 잘생겼으며, 좋은 것과 인본주의의 풍부한 과실에 본능적인 애호를 갖고 있었다

p705 이 모든 부는 어디서 왔을까? 해답은 서방에 있었다. 레오나르도가 죽던 그해에 독일의 판화가이자 화가인 알브레히트 뒤러는 문예부흥기의 스케치와 색칠에 관한 여러 가지 기법과 통찰을 가지고 뉘른베르크로 왔다. 채울 수 없는 호기심을 지닌 여행광이었고, 레오나르도와 다르지 않은 관심 범위와 지적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와 네델란드를 여행하며 회화와 판화, 해부학과 기하학에 관해 많은 것을 배웠다.

p711 소문이 서방에서 돌았기 대문에 메흐메드는 처음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들어가서 자신에게 승리를 허락한 데 대해 무함마드에게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그분께서, 내가 새 로마를 정복하고 복속시켰듯이 옛 로마를 정복하고 복속시킬 수 있는 수명을 허락해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p728 1492년 1월 2일 동이 트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서른을 갓 넘은 무함마드는 의식 절차에 따라 알함브라를 에스파냐군 장교에게 넘겨준 뒤 말을 타고 그라나다 교외로 나갔다. 그곳에서 그는 페르난도왕 및 이사벨 여왕을 만나 그들에게 도시의 열쇠를 건넸다. 그는 페르난도에게 아라비아어로 이렇게 말했다. “신은 당신을 매우 사랑하십니다. 전하, 이것이 이 천국의 열쇠입니다. 저와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당신의 것입니다”

p735 역사를 꼭 선한 사람이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지금까지 이 책에서 해온 중세사 여행은 그런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따라서 콜롬보에게 어떤 잘못과 결점과 편견(분명히 그의 시대 기준보다는 21세기의 기준과 더 큰 차이를 보일 것이다)이 있더라도 그는 중세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하나이며 지금도 그렇게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카리브해에서 돌아온 순간 그가 인류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p739 콩키스타도르는 우월한 기술과 무기를 전개하고 천연두 같은 질병(아메리카 토착민은 이에 대해 저항력이 거의 또는 전혀 없었다)을 가져와 아메리카의 고대 왕국을 쓸어내고 그 대신에 대서양 건너의 자기네 제국을 건설했다.

p745 이 마법이 좋은 것일 뿐만 아니라 반복될 수 있음을 알게 되자 이제 수백 년 뒤에 ‘카레이라 다인디아’(인도 항로)로 알려지게 되는 길으 ㄹ따라 연례 선단이 파견되었다. 포르투갈 선단은 대서양의 무역풍과 인도양의 계절풍 패턴의 이점을 살려 리스본에서 출발해 카부베르드로 가고 서남쪽 브라질로 갔다가 다시 아프리카의 남쪽 끝을 돌아 거기서 인도로 갔다.

p752 구텐베르크는 이것이 너무 힘들다는 것을 알았고, 성인이 된 후 상당한 시간을 사본 제작 혁신을 추구하는 데 들였다. 그가 처음으로 인쇄라는 개념을 생각해 낸 것은 아니었다. 날짜가 박힌 중국의 첫 인쇄 두루마리(금강경리나는 불경 사본이었다)는 868년 목판으로 찍은 것이었고, 금속활자는 한국에서 13세기부터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런 기술은 서방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때까지는 말이다.

p763 면죄부 모든 영혼에 대해 팔 수 있다면 시장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수 있다고 계산한 식스투스는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면죄부를 죽은 자를 대신해 살 수 있다고 공언했다.

p770 루터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인 듯했다. 현대에 나온 루터의 전집은 100여 권에 달한다. 온갖 종류의 문제가 다 있고, 그가 믿은 것이 신의 인간 사랑에 관한 진실이었음을 꾸미거나 숨기지 않는다는 큰 주제로 묶이는 것이었다. 기성 질서 옹호자를 짜증 나게 하면서 루터의 저작이 거듭거듭 주장한 것은 그가 세속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성과 은총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이었다.

p785 오랜 경험을 가진 성직자 출신으로 클레멘스 7세라는 이름을 택했다. 클레멘스는 거의 프랑수아만큼이나 카를 5세를 경계했다. 그래서 그는 프랑수아가 제국의 포로였을 때 했던 모든 약속을 공식적으로 면제시켜줬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갔다. 클레멘스는 프랑수아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되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교황청이 프랑스와 공식 동맹을 맺겠다고 약속했다.

p791 수녀는 강간당했다. 사제는 제단에서 살해당했다. 교회를 어느 정도까지 훼손해야 하는지를 놓고 에스파냐인과 독일인 사이에 간간이 언쟁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이는 성직자 자신에게는 아무런 도움이나 위안도 되지 않았다. 그들이 아주 살해되지 않는다 해도 “찢어지고 피 붇은 옷차림으로, 무차별적인 채찍질과 몽둥이질로 온몸에 긁히고 멍든 자국을 드러낸 채” 거리를 방황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p789 10-12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역자처럼 ‘중세=암흑시대’관념을 벗어버리지 못한 사람들에게 필요하다. 새로운 기법들을 개발해 상업을 한 단계 올려놓은 상인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대학을 만든 학자들, 거대한 역사를 설계하고 지휘한 건설자들이다. 중세는 결코 암흑시대가 아니었고, 그 시기에도 발전은 이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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