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이 당신의 지혜가 된다면 - 이 시대 최고의 정신적 스승이 우리에게 던지는 12가지 질문
스티브 레더 지음, 김태연 옮김 / 토네이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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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나의 인생이 당신의 지혜가 된다면』은 '유언 편지'에 관한 이야기다. 유언 편지란 말 그대로 죽음을 앞두고 가족이나 친구 또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말을 일컫는 것이다. 이 유언의 법적 효력을 따지는 일이라면 굳이 별도의 책을 낼 필요가 없을 터다. 이 책에서 저자 스티브 레더가 말하는 유언 편지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남길 유언이다. 그것은 평생 자신이 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얻은 지혜이자, 물질보다 값진 '말의 유산'을 의미한다. 저자는 35년 동안 랍비로 살아오며 천 번이 넘는 장례식을 주관하고, 천 명이 넘는 유가족들과 상담하면서 깨달은 점을 독자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이 책을 출간했다.

저자 스티브 레더는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12가지 질문을 던진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우리가 세상을 떠난 후에 남겨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치관, 지혜, 경험 등의 이야기, 즉 물질보다 값진 ‘말의 유산’을 남길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책을 썼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이 책의 질문에 답하며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것을 주문한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에야 비로소 남기고 싶은 말, 사랑하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생각하지 말고, 지금 당장 제대로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떠나보내기 안타까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재산보다는 '말의 유언'이기 때문이다. 그럼 유언을 왜 미리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저자는 사람들은 죽음을 앞두고 재산 이외에는 다른 유산이 없다고 생각한다. 재산을 남기는 것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남은 삶에 가장 큰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에서다. 그러나 남겨진 사람들은 유언을 기억하고 유언대로 살아가기 위해 힘을 기울일 것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에 따라 저자는 남겨진 사람들의 삶에 훨씬 큰 도움이 될 유언을 미리 쓰라고 권유한다. 이 유언 편지는 저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마지막 말을 전할 때를 “기다리지 말라”는 것이다. 당신의 마지막 순간이 언제가 될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누구나 죽음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태어난다. 하지만 마치 끝없는 생을 누릴 것처럼, 현재보다는 과거에, 과거보다는 미래에 더 많은 신경을 쓰며 소중한 시간을 흘려보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앞으로 경제적 여유가 생길 날을, 아이들이 다 자라 시간적 여유가 생길 그때를, 다음 달의 해외여행을, 대출금 상환이 끝나는 그날만을 기다리며 현재를 견디고 살아간다. 하지만 인생은 유한하고, 미래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우리의 마지막 날이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이 시대 최고의 정신적 스승’이라 불리는 스티브 레더는, 우리가 현재보다는 미래를 위해, 그리고 돈이나 집 같은 물질적인 것을 위해 인생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덧붙인다. “정작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우리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자가 유가족들에게 가장 자주 듣는 말이 “엄마가 지금 옆에 계셨으면 뭐라고 하셨을까?”라는 말이라고 한다. 그 다음으로 자주 듣는 말은, 엄마가, 아빠가, 할아버지가, 혹은 할머니가 가장 좋아했던 격언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돌아가신 분들의 삶의 길잡이가 되어주었던, 그리고 지금은 사랑하는 가족들이 세상을 살아갈 때 도움이 될 지혜가 담긴 조언들을 일컫는다.

저자는 우리는 가족뿐만 아니라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 다시 말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주위 모든 사람들의 경험, 지혜, 실패, 아름다움을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고 설명한다. 물론 이것은 그들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알지 못하는 이야기로부터 가치관, 이상, 옳고 그름의 가치를 배울 수는 없다. 이 책이 우리가 세상을 떠난 후 남겨질 사랑하는 이들에게 인생의 경험과 지혜를 전해줄, 가장 우아하고 강력한 방법으로 ‘말의 유산’을 미리 쓸 것을 당부하는 이유다.

 

 

저자에 따르면 고대 유대인들의 전통 중에 ‘유언 편지’라는 것이 있다. 후대에 남겨줘야 할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편지로 남기는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직접 부딪히고 겪으면서 배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전하는 데 이보다 매력적인 방법이 있을까? 어쩌면 인생의 이야기를 남기는 일은,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필생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간을 내기 어렵다거나 시작할 방법을 모른다는 핑계로 이를 미룬다. 하지만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이 있다. 돈 보다 더 중요한 유산이 바로 정신적 가치, 즉 ‘말의 유산’이라는 사실이다.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가 여전히 내 곁에서 전해주었으면 하는 귀중한 것들, 예를 들어 가치관, 조언, 깊은 사랑, 살면서 축적된 삶의 지혜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들은 누구나 몇 마디 짧은 말로도 사랑하는 이들의 긴 삶에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해줄 수 있다. 그 말들은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으며, 그들을 웃게도 하고 생각하게도 할 것이며, 고뇌와 고통으로부터 지켜주기도 할 것이다. 지금 이 책의 질문에 답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원하는 대로 살고 있는지 자문해보라.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전하라. 당신이 이 세상에 없을 때에도 그들이 마음속에 지니고 살아갈 촌철살인의 지혜를 건네라. 저자는 히브리어로 '말'과 '물건'은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고 설명한다. 둘 다 'davar(다바르)'이다. 저자에게는 이 부분이 매우 심오한 의미로 다가온다. 말에는 무게가 있다. 소유했다가 남겨주고 가는 물건만큼이나 실체가 있다. '남기는 말'의 무게를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유언 편지란 결국 우리의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이다. 이 유언 편지는 타인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인생은 우리 힘으로 통제할 수 없다'는 생각, 혹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은 중요하지 않다'는 회의적인 생각을 떨쳐낼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이야기는 중요하다. 특히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우리는 우리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결정할 수 있으며, 원하는 방향으로 흐름을 바꿀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는 자신에게 던지는 올바른 질문을 통해 가능하다. 그 질문은 당신의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상기시켜주고, 남은 삶에서 소중히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 줄 것이라고 확언한다.

이 책은 모두 12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가 앞서 언급한 질문 12가지가 각각의 장으로 나뉘어 있다.

1장 「가장 후회하는 것은 무엇인가」, 2장 「마음 가는 대로 행동했던 순간은 언제인가」, 3장 「무엇이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가」, 4장 「뼈저린 실패의 경험을 말하였는가」, 5장 「인생의 가장 큰 시련을 극복하게 해준 것은 무엇인가」, 6장 「좋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7장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가」, 8장 「누군가와 관계를 끊었던 경험이 있는가」, 9장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10장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을 남겼는가」, 11장 「묘비명으로 무엇을 쓸 것인가」, 12장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남길 축복의 말은 무엇인가」 등이다. 1장에서 저자는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라. 당신이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랑하는 이들이 당신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도록 진실되게 말하라. 설령 그것이 부끄러운 과오라 할지라도 모두 다 터놓고 이야기하라"고 권유한다.

 


 

이처럼 저자는 12개의 '인생의 질문'을 갖고 답을 찾기 위해 심사숙고하며 노력할 것을 권유한다. 저자 역시 그렇게 해서 이미 자신의 사랑스러운 자녀들에게 40세와 59세에 두 번을 썼다고 말한다. 앞으로도 더욱 정진해 더 쓸 수도 있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이 책의 뒷 부분에는 그가 쓴 '유언 편지'가 게재돼 있다. 저자는 이 질문들이 ‘아름다운 삶의 가치를 보존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의도를 가지고 작성했다고 밝히고 있다

12가지 질문들은 사실 단순하다. 하지만 인생에서 가장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스티브 레더는 주위의 다양한 사람들에게 이 질문에 답해줄 것을 요청했고, 그들의 답변을 보며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이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은 일에 대해 후회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사람들의 후회에는 다양한 공통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비슷한 것을 후회한다.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놓쳐버린 기회, 다시 말하면 실현시키지 못한 꿈을 아쉬워한다. 너무 오랫동안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혼자 괴로워하며 전전긍긍했던 일에 대해 후회한다. 또한 소중한 사람들과 중요한 순간에 함께하지 못해서 영원히 놓쳐버린 시간들을 후회한다. 이런 후회들이 너무 많아서 놀랐고, 익명으로 처리함으로써 그 답장들을 각 장에 맞게 배치했다.

이 책에 실린 12가지 질문들은, 결국 어떻게 하면 우리가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여정이다. 책 속에서 자신의 인생을 고백한 사람들처럼, 누구에게나 후회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후회를 기록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과정에서부터 우리는 많은 것을 깨닫게 될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그리고 이 책의 질문에 답하는 일은, 우리가 앞으로 덜 고통스럽고, 더 아름다우며, 더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란 기대감이 크다. 지금 당장, 한 번뿐인 삶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이 책의 질문에 답하며 독자들 개개인의 삶을 기록할 것을 권유한다.

 


 

“당신이 자신을 위한 묘나 묘비를 가질 계획이 있는지와는 별개로,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하기 위해 묘비명의 문구를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 짧은 문구로 압축해서 삶의 핵심을 정리하다 보면, 당신이 추구하는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묘비명은 당신이 죽고 난 후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아직 살아있는 지금, 묘비명의 문구를 생각해보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이다.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관에 대해, 또 그 가치관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당신이 되고 싶은 그런 사람이 되기에 너무 늦은 때란 없다.”(p.236)

 

저자 : 스티브 레더(Steve Leder)

 

〈뉴스위크〉가 선정한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대 랍비 중 한 명으로, 로스앤젤레스 윌셔 불러바드 유대교 회당의 선임 랍비이다. 노스웨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옥스퍼드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했으며, 이후 히브리연합대학에서 1986년 히브리문자 석사 학위를, 1987년 랍비 서품을 받은 다음 그곳에서 13년 동안 설교학을 가르쳤다. 퓰리처 상 수상 극작가 웬디 웨서스타인Wendy Wasserstein이 “스티브 레더는 우리가 현대의 현인에게서 구하는 모든 것을 갖춘 사람으로, 박식하고 자상한 데다 포용력이 있고 유머감각이 뛰어나다”고 극찬할 정도로, 그의 글과 강의는 종교를 뛰어넘어 대중에게 큰 감동과 위안을 안겨주고 있다. CBS, ABC, NPR, PBS, FOX 등 여러 채널의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왔으며, 〈뉴욕 타임스〉 〈타임〉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빌리프넷닷컴Beliefnet.com〉 등의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미국 인기 드라마 〈웨스트 윙The West Wing〉의 한 에피소드에 사형 제도에 관한 그의 설교가 삽입되기도 했다. 흑인/유대인 담화 연구로 워싱턴 DC 종교행동센터에서 코블러 상Kovler Award을, 전미 유대인 언론인 협회에서 루이스 래퍼포트 우수 주석가 상을 받았다.

첫 저서 『범상한 것들의 비범한 속성The Extraordinary Nature of Ordinary Things』이 아마존 베스트셀러에 오른 데 이어, 『고통이 지나간 자리, 당신에겐 무엇이 남았나요?More Beautiful than Before』는 출간 즉시 첫 주에 아마존 베스트셀러 10위권 내에 진입하며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그 밖에 『돈으로 행복해지는 비결More Money than God 』을 썼다.

 

역자 : 김태연

 

명지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와 호주 서시드니대학교에서 한영통번역을 공부했다. 현재 출판 에이전시 유엔제이에서 영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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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익명 소설
앙투안 로랭 지음, 김정은 옮김 / 하빌리스(대원씨아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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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프루스트는 무거운 눈꺼플을 들어 올려 은근한 눈빛을 냈다. 그녀가 여기 있는 이유를 다 안다는 듯 은근히 빈정대는 기색이었다. 비올렌은 그 유명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작가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거무스름한 눈자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듯하게 정리된 콧수염, 흑단 같은 머리카락, 수달 모피가 달린 코트를 입은 프루스트는 침대 옆에 놓인 원목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상아와 은으로 된 둥근 지팡이 손잡이에 오른손을 얹고, 왼손으로는 코트에 붙은 모피를 가만히 쓸면서 안 그래도 윤기가 절로 흐르는 털을 더욱 반들거리게 한다."(p.9)

이 책 『익명 소설』의 맨 앞 부분 도입부다. 마르셀 프루스트와 그의 대표작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도입부에 배치한 저자 앙투안 로랭의 의도가 궁금하다. 프루스트는 프랑스의 소설가로서 공쿠르 상을 수상했다. 레지옹에서 출생했다. 공쿠르상 수상 작가아 레지옹 출생이란 점이 연관이 있을까 싶다. 물론 프루스트는 혼자 있는 게 아니고 이 소설의 주인공 비올렌과 함께 있다. 소설은 비올렌 시점으로 진행된다.

"미처 인식하지 못했는데, 갈색 머리의 한 젊은 여자가 침대 발치에 앉아 비올렌에게 잘 들리지 않는 말을 중얼거리며 벽을 쳐다보고 있었다. 틀어 올린 머리, 기다란 흰 원피스, 조개껍데기에 새긴 카메오* 속 인물상 같은 모습은 다른 방문객들과 마차가지로 이 방에 실재하는 버지니아 울프가 확실했다. (중략) '눈을 떴어요···. 그녀가 돌아왔어요.'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플라비에 교수님 좀 불러와요. 괜찮아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같은 목소리가 이어서 말했다. 비올렌은 그렇다고, 혼자가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마르셀 프루스트, 미셀 우엘백, 조르주 페랙, 버지니아 울프, 파트릭 모디아노**가 그녀와 함께였기 때문이다."

 

* 카메오 : 천연 보석이나 조개껍데기에 인물을 양각으로 조각한 것이다. 고대부터 제작하기 시작해 혀재까지도 펜던트 등의 장신구로 사용된다.

** 마르셀 프루스트와 버지니아 울프를 제외한미셀 우엘백, 조르주 페렉, 파트릭 모디아노는 현존하는 프랑스 현대 소설가들이다.(이상 역자 주)

 


 

마르셀 프루스트는 이 책 『익명 소설』과 연괸된 무엇이 있을 듯하다. 독자들이 이 책을 읽을 때 왜 도입부에 마르셀 프루스트와 버지니아 울프, 프랑스 현대 작가들을 배치했는지를 함께 파악하는 것은 이 소설 읽기의 또 하나의 재미가 될 것이다. 독자가 이 서평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 잠시 프루스트에 대해 관련 책을 찾아보았다. 프루스트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파리의 콩도르세 중학으로 진학하여 상류사회의 자제들이 모이는 모임을 함께했다. 성인이 된 후 자유로운 분위기 또 사교계와 문학 살롱에 출입하면서 카이야베 부인, 스트로스 부인 등 여러 인물들과의 만남이 작가로서의 인간관찰의 안목을 길러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제1권 〈스왕가(家) 쪽으로 Du Co te de chez Swann〉는 1911년경에 대체로 완성을 보았으나 출판사를 구하지 못하여 1913년이 되어 가까스로 자비출판했다. 그리고 나서 비로소 주목받기 시작하였는데,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도 있고 해서 제2권 〈꽃피는 아가씨들의 그늘에 A l'Ombre des jeunes filles enfleurs〉가 발간된 것은 1918년이었다. 이듬해에 공쿠르상을 수상하여 프루스트는 비로소 연래의 꿈이었던 문학적 영광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코르크로 둘러싼 병실 안에서 죽음의 예감과 대결하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완성을 위한 수도사와 같은 생활을 계속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대하소설이다. 〈수앙가(家) 쪽으로〉(1913), 〈꽃피는 아가씨들의 그늘에〉(1919년, 같은 해 공쿠르상 수상), 등 앞서 언급한 작품 외에 〈게르망트 쪽〉(1920), 〈소돔과 고모라〉(1922), 〈사로잡힌 여자〉(1923), 〈달아나는 여자(사라진 알베르틴)〉(1925), 〈다시 찾은 시간〉(1927)의 7편 16권으로 되어 있다. 〈사로잡힌 여자〉 이후는 작가의 사망 후에 간행되었다. 이 작품은 파리의 부르주아 출신 문학청년인 ‘나(마르셀)’의 1인칭 고백형식으로 쓰인 ‘시간’의 방대한 파노라마이다. 제3공화정 시대의 귀족·부르주아의 풍속사(風俗史)인 동시에, ‘화자(話者)’의 기억을 통해 탐색된 인간의 심층심리학 책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그 복잡다기한 구조 때문에, 고딕양식의 대성당에 비유되기도 하고, 교향악에 비유되기도 한다.

 

 

『잃어버린~』의 주제는 뛰어난 지성과 애처로울 만큼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화자 마르셀의 절대적 행복을 추구하는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행복한 유년시절, 사교계 생활, 연애경험 등을 기억에 의해 재구성한 것으로, 복잡하게 얽힌 테마를 긴밀하게 결부시키면서, 잔혹한 시간의 흐름에 풍화(風化)되어가는 사람들이나 자기 자신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사회를 그려낸 하나의 커다란 그림 두루마리이다. 어차피 ‘시간’이 갖는 파괴력 앞에 허무하게 무너져버리는 것이며, 인생은 결국 ‘잃어버린 시간’에 불과하다. 프루스트는 모든 것을 서서히 좀먹고 파괴해가는 ‘시간’의 힘을 뿌리칠 수 있는 무엇인가 절대적인 것을 갈망한다. 작품의 끝부분에서, 화자는 게르망트가의 파티에 참석하여, 일찍이 자기가 그처럼 찬미하였던 사람들의 늙은 모습을 대하자, 인간 존재의 공허함을 느낀다. 그러나 그 때 연달아 그의 속에 되살아나는 ‘무의지적(無意志的) 기억(감각 속에 남아 있던 기억)’의 힘이 지나간 시간을 다시금 찾아내게 하며, 예술작품에 그것을 정착(定着)시킴으로써 자기가 ‘시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과거는 풍화하여 잊혀져버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에 침전하여 사소한 감각적 경험을 계기로 되살아남을 지적하고, 예술은 그러한 초시간적 감각을 고정시킴으로써 영원에 접촉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프루스트는 이 테마를 1870년(프랑스-프로이센전쟁)에서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시기, 이른바 ‘벨 에포크(la belle epoque:좋은 시대)’의 프랑스를배경으로 전개한다. 거기에는 사교계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를 움직인 여러 가지 사건(드레퓌스 사건 등)이나, 그 무렵 인기가 있던 예술작품이 정밀히 분석되고 묘사되었다. 저자 앙투안 로랭이 자신의 작품 『익명 소설』에서 프루스트와 여러 소설가들을 함께 등장시킨 이유는 뭘까?

 


 

소설은 허구다. 여기서 '허구'란 상상에 의한 창작품, 즉 문학예술품이란 말이다. 영어로는 'fiction'이란 말이 어원상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인 것 같다. 라틴어 픽티오(fictio: 형성하는 것)가 어원이라고 한다. 사실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이나 묘사와는 달리 가공의 인물이나 이야기를 구상하는 것을 일컫는다고 하니 딱 맞는 말인 것 같다. 우리는 왜 소설이라고 했을까? '허구'에 방점을 둔 의미가 아니라 '이야기'라는 사실에 방점을 둔 것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은 허구인 만큼 어떤 일이 벌어져도 현실과는 아무 관계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소설 내용이 현실이 되었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것도 살인 사건과 관련된 것이라면? 문제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인다. 살인 사건이 나면 형사들이 사건을 저지른 범인을 잡아야 할 터, 수사가 개시될 터이다. 그렇다고 작가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는 없을 터. 이 책 『익명 소설』은 소설이 현실화됨으로써 사건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어느 날 파리의 한 출판사로 소설 투고 하나가 들어왔다. 그렇고 그런 원고 사이에서 모처럼 ‘될 것’ 같은 작품이었다. 예상대로 소설은 출간되고 나서 권위 있는 상의 후보에까지 오르며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 잘나가는 신작에는 말 못할 비밀이 있었다. 바로 소설을 쓴 작가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작품의 내용과 현실의 살인 사건이 정확히 일치한다고 주장하는 형사까지 나타난다. 출판사로서는 수사 형사가 찾아와 물은다면 당연히 작가의 인적사항을 넘겨줘야 할 터이다. 그러나 출판사는 작가의 인적 사항은 전혀 갖고 있지 않다. 독자가 출판사의 운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모르지만 출판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 같다. 작가가 누군지도 모르는 소설을 책으로 발간해 돈을 벌었다면 당연히 출판에 따른 책임이 출판사 측에 있는 것 아닐까? 물론 범인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소설의 내용이 현실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과 여러가지가 정황상 들어맞고 범죄 수법이나 묘사 등에서 비슷하다면 수사 형사로서는 당연히 와서 물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문학 작품상 중의 하나인 공쿠르상 수상 후보에까지 오를 정도로 성공적인 소설이라면 말이다. 당연히 수사 형사가 찾아오고 출판사 사람들은 마땅히 협조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익명으로 투고한 작품을 원고 검토부에서 출판을 결정해 히트를 친 소설인데. 다시 말해 작가의 인적 사항은커녕 출판사의 그 어느 누구도 작가를 아는 사람이 없다. 대형 출판사의 원고 검토부에 쏟아져 들어오는 수많은 원고 중에 작가를 알 수 없는 투고가 존재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드문 일이라고 한다. 대개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는 이유는 무명작가 신세에서 벗어나려는 개인적인 목표가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익명 소설』은 정반대의 경우가 등장한다.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출판사 중 한 곳에 『설탕 꽃들』이라는 제목의 원고 하나가 우편으로 도착하고, 이 출판사 원고 검토부의 책임자인 비올렌 르파주는 원고 뒤에 숨은 작가의 정체를 파헤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원고는 책으로 출간된 이후 세간의 감탄을 불러 모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아 프랑스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거머쥘지도 모르는 화제의 작품이 됐으니 작가를 찾아야 하는 것은 이제 사건을 떠나서도 필요한 일이 됐다. 당연히 작가를 찾아내야 하는 비올렌의 임무는 더욱 절실해진다. 설상가상으로 소설이 실제 범죄 사건과 동일하게 진행되고 있다며 작가의 신원을 밝히라는 형사까지 찾아오니 출판사 측은 괴롭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사건 수사 형사 탕슈 경위에 따르면 1년이라는 시간적 공백을 두고 두 건의 살인 사건이 발생했는데 피해자 셋은 어린 시절부터 어울린 친한 친구 사이라고 한다. 문제는 이 친구 무리는 모두 넷이고, 이대로라면 남은 한 명 역시 살해될 위험에 처했다는 의미가 된다.

과연 작가는 누구일가? 소설 원고와 실제 사건이 관련이 있는 걸까? 누군가가 연쇄 살인을 당하고 있다면 앞으로 발생할지 모르는 범죄를 막을 가능성이 남아 있을까? 저자 앙투안 로랭은 이 모든 미스터리를 작품의 전반부에 배치해 독자의 이목을 집중시킨 다음, 후반부에 깜짝 놀랄 만한 반전 결말로 이어질 수 있게 함으로써 앞서 제기한 미스터리들을 깔끔하게 해결한다. 이와 같이 작품의 앞부분에서 제기된 의문점들이 마지막에서 환하게 밝혀지는 역동적인 구성은 독자들에게 쾌감과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앙투안 로랭은 전작에서 보여 주었던 집필 성향대로 『익명 소설』에서도 다양한 장르를 기꺼이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혼합했다. 작품 속에 경찰과 범죄자 들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미스터리 수사물로 분류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가는 이러한 장르적 크로스오버를 활용한 과감한 전개 방식과 페이지를 넘길수록 점점 더 숨 가쁘게 진행되는 소설의 리듬을 통해, 독자들이 소설에 빠져들 수밖에 없게 한다.

한편, 이 작품에는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우러난 출판사와 작가의 관계, 작가 지망생들의 좌절과 문학 사랑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특히 작가의 재치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등장인물 간의 지적인 대화 장면들은 마르셀 프루스트, 파트릭 모디아노, 미셸 우엘벡 같은 프랑스 문학의 거장들이 써 내려간 작품의 그것들과 견줄 만하며 그만큼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익명 소설』은 스릴러 소설이다. 그는 이 소설을 두고 ‘단순한 탐정 소설을 넘어서는 신비한 작품’이라며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국내에 오랜만에 소개되는 앙투안 로랭의 신작을 통해 문학성을 겸비한 미스터리 스릴러의 세계로 빠져들어 보자. 이 소설은 전개가 빠르고 정신적 문제와 지역간 차이 등으로 급진전을 막아서며 속도를 조절한다. 그리고 오리무중이던 사건은 비올렌의 펜촉 끝에서 절정으로 치닫고 대반전이 일어난다. "제 이름은 비올렌 르파주이고, 본명은 엘렌 르파주입니다."(p.210)

 

르파주 편집자님, 탕슈 경위입니다. 소피 탕슈. 문제가 생겼습니다. 파리에서 뵀을 때 사진을 보여 드리지 않았습니까? 1년 전에 발생한 두 사건의 사진 말입니다. 편집자님, 간밤에 새로운 범죄가 발생했고, 편집자님이 출간한 책의 147쪽 내용과 정확히 일치합니다.(p.150)

 


 

제 생각은 옳았습니다. 그 남자들은 모두 책에 나오는 대로 죽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p.222)

 

저자 : 앙투안 로랭(Antoine Laurain)

 

소설가, 기자,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 골동품 열쇠 수집가. 1970년대 초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예술사와 영화를 공부했다. 몇 편의 단편 영화를 감독하며 골동품 판매상으로 일했다. 사정이 어려워져 일을 접고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은 로랭은 2007년 데뷔작 『만약에Ailleurs si j'y suis』로 드루오상을 수상했다. 2012년 출간된 『프랑스 대통령의 모자Le chapeau de Mitterrand』는 평단의 찬사를 받으며 랑데르노상과 독서의 즐거움을 기준으로 삼는 [여행자의 릴레이상]을 수상하고 일약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또한 2015년 로뱅 다비스의 각색으로 프랑스 2 채널에서 텔레비전 영화로 방영되기도 했다.

2014년에 발표한『빨간 수첩의 여자La femme au carnet rouge』는 어느 날, 길에서 강도에게 핸드백을 빼앗긴 여자와 길에서 우연히 핸드백을 주운 남자가 겪게 되는 일을 그리고 있다. 앙투안 로랭 특유의 가볍고 산뜻한 문체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전개는 우리를 순식간에 소설 속으로 밀어 넣는다. 로랭은 데뷔 이후 『연기와 죽음Fume et tue』(2008), 『노스탤지어의 사거리Carrefour des nostalgies』(2009), 『프랑스 랩소디Rhapsodie francaise』(2016) 등의 소설을 내고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역자 : 김정은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하고 이화여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에서 한불 번역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관광공사, KBS 등에서 통번역 업무를 했다. 현재 출판 번역 에이전시 베네트랜스에서 리뷰어 및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익명 소설》, 《인생의 고도를 바꿔라》, 《나의 스트레스 없는 일 년》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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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필요한 시간 - 전시 디자이너 에세이
이세영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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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은 예술품들이 우리를 기다리는 특별한 장소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작품만을 감상하지 않으며 작품이 놓인 공간의 부위기까지 모두 느낀다." 전시 디자이너로 본 예술 경험에 공감이 가며 행복한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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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필요한 시간 - 전시 디자이너 에세이
이세영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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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도 팬데믹 이전에서 전시회를 꽤 자주 갔었다. 그림을 좋아해서 갔다기보다 솔직하게 '자의반타의반'이었다. 마지못해 간 것이고, 절반의 자의를 담았다고 하는 게 맞다. 그러나 자주 다니다 보니 유명 전시회가 있는 날엔 으레 다른 약속을 잡지 않는 여유(?)도 생겼다. 작품 해설이나 궁금한 점에 대한 답변은 늘 같이 간 사람에게서 들었다. 그도 그림을 전공하거나 미술에 관련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그림을 워낙 좋아해 많은 책을 읽고 '미술잡학박사'란 독자가 붙인 별명을 갖고 있다. 그때나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화가나 큐레이터에 대해 약간의 지식만 갖고도 전시회를 간 보람을 느꼈던 시절이다. 독자는 이 책을 읽는 순간부터는 감상 포인트를 하나 더 갖게 됐다. 바로 전시 공간을 꾸미는 '전시 디자이너'의 관점이다. 전시 디자이너란 직업이 따로 있는 줄도 모르면서 전시회를 다녔다고 말하는 것이 뒤늦게 부끄럽기도 하다.

이 책 『예술이 필요한 시간』의 저자 이세영이 전시 디자이너다. 저자는 "전시를 구성하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 관람객들은 가장 먼저 작가, 큐레이터를 떠올린다. 하지만 이들과 함께 작품이 진열되는 화이트 큐브를 꾸미고, 관람객들이 전시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공간을 완성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전시 디자이너"라고 설명해준다. 컴퓨터로 보면 하드웨어 담당 책임자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저자 이세영은 개막 전부터 화제를 모은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를 비롯해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소장품전 〈하이라이트〉, 〈빛: 영국 테이트미술관 특별전〉 등 해외 유명 걸작전을 담당해온 전시 디자이너다. 건축을 전공하고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큐레이팅 인턴으로 예술계에 입문해 큐레이터를 거쳐 전시 디자이너로 자리매김하기까지의 과정을 공간에 얽힌 이야기들과 함께 이 책에 담았다.

 


 

저자 이세영의 시선이 닿은 곳들은 다양하다. 일상에 지쳐 떠난 곳에서 마주한 장소에서부터 전시를 관람하는 방식과 작품을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준 공간까지, 지금까지의 여정을 그 안에 고스란히 녹여낸다. ‘왜 이 일을 시작했을까?’, ‘정말 하고 싶은 일이기는 할까?’, ‘계속 고통받으며 일하는 것이 과연 맞을까?’라는,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질문들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이 책은 일상을 바라보는 그녀만의 시선을 통해 우리에게 따뜻하고 잔잔한 위로를 건넨다. 독자에게는 그림이나 전시회 예술품 관람의 또다른 관점을 하나 더 추가해준 셈이다.

저자가 큐레이터를 하다 전시 디자이너로 변화를 꾀한 직접적인 원인은 모르지만 미술 전공자가 아니면서 큐레이터의 생활이 적성에 안 맞았던 것으로 짐작한다. 건축 정공을 했다니 어쩌면 전시 디자이너와 건축 디자이너는 비슷한 직업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예술 추구 측면에서 말이다.

어느 날 아침 출근에 무심코 열어본 메일함에서 몇 개월 전 휴가와 함께 신청해두었던 베네치아 비엔날레 오프닝 초대장을 발견했다. 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면서 일도 인간관계도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은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던 시기였다. 일은 하면 할수록 늘어만 갔고, 퇴근은 저점 기약이 없어졌다. 베네치아도, 비엔날레도 지구 반대편 먼 곳에서 일어나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메일을 지웠다."(p.79)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맞는 것인가' 하는 매일 하던 고민을 수없이 더 하고 어쩌면 다른 방법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회사에서 바로 베네치아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고 저자는 털어놓는다. “내가 정말 미술관을 그만두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여행을 다녀오고 또 한번 예술에 대한 애정과 목표가 생긴다면 자연스레 큐레이터로서의 커리어를 다시 시작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여행에서 진정으로 예술과 함께하는 삶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이 내가 꼭 미술관 큐레이터여야만 한다는 의미가 아님을 깨달았다.”(p.83)

 


 

미술관 큐레이터이자 전시 디자이너로 전시를 만들어온 지 햇수로 10년이 되는 저자는 지금도 여전히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위로와 휴식이 되어준 공간을 떠올리며 예술에 대해 생각한다. 좋은 전시란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가 하면 어떤 작품도 소외되지 않고 디자인이 작품을 압도하지 않는, 아티스트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하는 전시를 만들고자 노력한다.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도 그렇게 해서 완성되었다고 밝힌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이 전시는 지난해 가을,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렸고, 오픈과 동시에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자신이 담당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전시를 관람한 저자는 이후 서울시립미술관으로부터 전시 디자인 프로젝트를 제안받고 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그리고 전시를 준비하며 최대한 힘을 빼고 휘트니 미술관에서 본 전시를 그대로 살리려 노력한다.

저자는 호퍼의 그림을 실제로 봐야 하는 이유가 너무도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점은 색감이라고 설명한다. 사람들은 호퍼의 작품을 대부분 어둡고 무채색이 지배하는 우울한 그림이라고 오해하곤 한다. 그러나 그의 그림을 실제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림자와 대조를 이루는 빛 아래의 풍부하고 아름다운 원색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어 전시장에서 직접 마주할 때야 비로소 그 특별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 책에 담긴, 전시 디자이너가 전시를 관람하고 기록하는 방식과 전시를 통해 전달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해석해내는 과정은 우리가 지금까지 본, 그리고 앞으로 만나게 될 전시에 다가가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한다.

“나는 디자인을 하는 내내 무엇보다 호퍼의 작품이 한국의 서울, 지금 우리 현실 속에서 관람객들을 만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경험한 휘트니 미술관의 전시들과 호퍼의 그림들, 그가 평생을 지낸 뉴욕과 작품 속에 등장하는 거리의 장면을 함께 떠올렸다. 관람객이 전시장에서 단순히 벽에 걸린 작품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맥락과 의미를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기를 바라면서...”(p.239)

 


 

저드 재단,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서울시립미술관,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쾨니히 갤러리 등 이 책에 등장하는 공간들은 익숙하기도, 낯설기도 하다. 하지만 그곳에 담긴 이야기들을 읽어 내려가다보면 어쩐지 저자와 우리의 삶이 맞닿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출근하는 쳇바퀴 같은 일상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어디로 갈지 몰라 헤매는 순간들. 그럼에도 저자는 매 순간 놓이는 선택의 기로에서 도망치지 않고 자신만의 길과 방향을 찾는다. 그렇기에 이 책은 우리와 같은 모양으로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이야기이자, 눈을 사로잡는 전시 뒤에 감춰진 전시 디자이너의 기록이며, 인생의 대부분의 순간을 예술로 가득 채운 인물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에서의 소중한 경험을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컬렉션 디렉터인 그라치아 콰로니는 저자에게 많은 조언을 통해 저자가 예술과 예술가를 다시 바라보고 또 바라보라고 조언했음을 기억해낸다. 이 배움의 과정에서 저자는 일단 모든 작품 각각을 적절한 환경에서 효과적으로 선보이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너무나 당연하고 단순한 깨달음이지만 전시를 만드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지켜지기 어려운 기본이기도 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좋은 전시를 위해서는 예술가 혼자서 전체를 조율할 수 없다. 전시야말로 종합예술이기 때문이다.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과의 작업은 나에게 전시란 모든 작품이 소외되지 않고 완벽한 환경에서 아티스트의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라는, 너무 당연해서 모두가 쉽게 잊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나는 아티스트를 위한 전시를 만든다."(p.49)

 


 

저자는 루브르를 한 달 넘게 돌아보며 가장 관심을 끈 것이 미술 작품이 아니라 인종과 성별, 나이를 불문하고 미술관에 방문하는 다양한 사람들이었다고 회상한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 겨울학기 최종 결과물의 주제 피사체로 루브르 박물관을 선택했다. 파리는 고개만 돌려도 매력적인 공간이 넘쳐나지만 루브르 박물관 건물과 이오 밍 페이의 유리 피라미드가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다른 어떤 곳보다도 아름답고 낭만적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루브르 박물관 건물은 루브르 궁전을 개조한 것으로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에 머물기로 하면서 왕실의 수집품을 전시하는 용도로 사용한 곳이다. 미술관은 가치를 매기기조차 힘든 예술품들이 우리를 기다리는 특별한 장소다.

저자는 그곳에서 사람들은 작품만을 감상하지 않으며 작품이 놓인 공간의 분위기까지 모두 느낀다고 말한다. 전시실의 규모와 건축적 장식, 조도, 온도, 습도, 작품과의 거리, 그리고 함께 있는 사람들을 비롯해 문과 창 너머로 보이는 겹겹의 풍경 등 전시실을 메우는 수많은 요소가 만들어내는 인상을 기억에 남긴다는 저자의 말은 전시 디자이너의 일과 예술과의 관계에 대한 영감을 독자에게 전해준다.

 

"나는 루브르에서 미술관이라는 공간을 만드는 요소들, 오래된 궁전을 현대적인 미술관으로 탈바꿈해나가며 변화시킨 여러 전략을 카메라 뷰파인더 너머로 세밀하게 찾아내는 일을 반복했다. 세계 최고의 박물관에서 일어나는 아주 일상적이면서도 특별한 장면들을 3인칭 관찰자로 지켜보며 기록하는 과정 대부분은, 최고의 전문가들이 투입되어 세심하게 디자인된 압도적 규모의 공간과 그 안을 채우는 역동적인 에너지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공간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수많은 사람의 노력과 의도를 생각하고 실제 그 공간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동선과 움직임, 반응을 지켜보며 건축의 진정한 의미란 건물의 설계와 구축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분명 나는 사진을 배우기 위해 파리에 갔고, 전공인 건축과 공간을 주제로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내가 진짜로 배우고 느낀 것은 그 안을 채우는, 매 순간을 특별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예술적 콘텐츠의 의미와 경험이었다."(p.98~99)

 


 

앞서 언급한 대로 저자가 베네치아 여행을 결심할 때는 큐레이터로의 자신의 역할에 의심을 품고, 자신이 하는 일이 맞지 않아 매우 혼란을 겪을 무렵이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이때 저자는 베네치아에서 무엇을 보고 어떤 결심을 했을까. 독자의 궁금증이 되살아났다. 그가 베네치아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에 대해 쓴 글을 여기에 소개한다. 책에 따르면 베네치아 대운하에 있는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은 18세기 건물 팔라초 베니에르 데이 레오니를 페기 구겐하임이 1949년에 사들여 개조해 살았던 곳이다. 그녀는 1979년 81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할 때까지 30년간 이곳에서 예술 작품의 수집과 전시를 지속했다. 전 생애에 걸쳐 끊임없이 예술을 위한 활동을 이어나갔고 하나의 위치나 장소, 역할에 머무르지 않았다. 유연하게 움직이고 변화했으며, 예술적 책임은 과거를 기록하는 것이 아닌 미래를 위한 것임을 밝히는 선구안을 드러냈다.

베네치아를 떠나기 전날 뉘엿뉘엿 지는 해가 붉게 물들인 대운하를 건너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간 저자가 느낀 것은 바다에 인접한 18세기 건물은 미술관이 아니라 컬렉터 개인의 은밀한 공간을 방문하는 듯 친근한 분위기를 풍겼다고 말한다. 그날 저자가 정원을 오래도록 떠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미술관 외벽에 걸린 마우리초 난누치의 설치작품 〈번화하는 장소, 변화하는 시간, 변화하는 생각, 변화하는 미래〉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저자가 베네치아로 떠난 이유, 가장 고민하던 생각과 결심에 말을 건네는 듯한 이 작품을 보면서 위로와 큰 조언을 얻은 기분이 들었다고 기억한다.

 

"내가 존재하는 장소와 시간, 생각과 미래를 끊임없이 변화하는 태도로 마추한다는 것이 의미와 그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 작품이 제작된 시기는 페기 구겐하임이 세상을 떠나고 한참이 흐른 뒤겠지만, 작가가 관람객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컬렉션의 철학과 명확한 비전으로 점철되어 있었다."(p.84~85)

 


 

내가 전시 디자이너로서 전시를 관람하고 기록하는 방식은 큐레이터나 일반 관람객들과는 조금 다르다. 우선 나는 관람 전에 전시의 전체 맥락과 기획 의도를 자세히 살펴본다. 그리고 전시장에서 제공하는 도면을 보고 동선을 탐색하고 공간과 작품의 배치 및 관계를 파악한다. 실제 전시장에서는 관람객이 입구에서부터 출구까지 전시를 경험하는 시선인 체험적 과정을 기본으로, 작품을 따라 형성되는 전체적인 전시 스토리라인을 읽어낸다. 전시된 작품을 개별 작품들만으로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공간적 맥락에서 어떻게 연결되고 분절되는지를 자세히 살피고 이들이 만들어내는 맥락과 서사를 통해 전시가 이야기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해석한다.(p.109)

 

저자 : 이세영

 

1982년 서울에서 태어나 선화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미국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Rhode Island School of Design)에서 실내 건축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디자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파리에서 사진을 공부했고 덴마크, 런던, 밀라노 등지에서 다양한 디자인 작업과 워크숍에 참여했다. 2010년부터는 대학에서 서양 건축사 및 건축과 문화, 색채학, 디자인 전략 등을 강의하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의 전당, KT&G 상상마당 등에서 전시 기획과 디자인 마케팅 특강을 진행했다. 2011년 뉴욕 현대미술관 사진부서에서 큐레이터 사라 마이스터(Sarah Meister)의 큐레이팅 인턴으로 예술계에 입문한 이후, 광주비엔날레 국제 큐레이터 코스를 거쳐 대림 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했다.

2015년 전시 디자인 스튜디오 ‘논스탠다드(nonstandard)’를 설립하고 서울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전남도립미술관, 경기도어린이박물관, 서울공예박물관, 서울식물원, 예술경영지원센터, 삼성문화재단 리움 미술관 등과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2017년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소장품전 《하이라이트》의 전시 디자인을 총괄했고, 《빛: 영국 테이트미술관 특별전》, 서울시립미술관과 휘트니 미술관이 공동 기획한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 등 해외 유명 걸작전의 전시 디자인을 담당했다. 현재 전시 디자인 프로젝트와 함께 관련 학술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건축과 예술을 주제로 한 칼럼을 여러 매체에 기고하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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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전쟁
길승수 지음 / 들녘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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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려시대에도 외적의 침입으로 전 국토가 전란에 휩싸인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인류사에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한 몽골의 칭기스칸 제국인 원(元)나라를 제외하곤 전쟁에 패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고려 시대는 옛 고구려 영토를 회복한다는 명분 아래 만주나 몽골 지역을 틈틈이 엿보며 나라의 힘을 키웠기에 가능한 일이지 않았나 싶다. 다만 우리를 침략한 거란이나 원나라도 나름 엄청나게 세력을 키워서 침략했기에 쉽게 이기지 못했고, 그나마 원 제국과의 전쟁에선 끝내 항복하고 말았다. 이 책 『고려거란전쟁』은 세력을 키워 고려를 침략했던 거란과 고려의 전쟁을 다뤘다. 고려의 북진정책 및 친송정책과 정안국에 위협을 느낀 거란이 993년(성종 12), 1010년, 1018년(현종 9)의 3차에 걸쳐 고려에 침입한 사건을 정사인 『고려사』를 바탕으로 다룬 책이다.

고려 건국 당시, 지금의 몽골과 만주지방에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중 거란족은 야율아보기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916년(발해 애왕 16) 요(遼)나라를 건국하였다.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와 국경을 접하게 되자 고려 태조는 북진정책을 추진, 발해 유민을 포섭하였다. 거란은 고구려 장수왕 때 출복부(出伏部) 등 일부가 예속되었지만 고려와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 922년(태조 5) 야율아보기가 낙타와 말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적대관계를 유지하였고, 942년 거란의 태종이 낙타 50필을 보내자 사신은 섬으로 유배보내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에서 굶겨 죽여버렸다.

 


 

이는 고려의 태조 왕건 때부터 추진한 북진정책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으로 그 뒤에도 계승되어 정종 때 광군(光軍) 30만을 조직한 것도 요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송이 건국하고 고려가 송과 화친정책을 실시하자 송은 고려와 협력하여 거란을 공격할 뜻을 비췄고, 압록강 유역의 정안국(定安國)도 송과 화친하면서 거란을 협공할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요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이에 요의 성종(聖宗)은 986년 정안국을 멸망시킨 다음 991년 위구(威寇)·진화(振化)·내원(來遠) 등의 압록강 유역에 성을 쌓고 고려 침략을 준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바로는 거란의 1차 침공(993년) 때 활약한 고려의 서희는 담판의 대가로, “거란의 소손녕이 고려를 침공하자, 서희가 담판을 벌여 소손녕을 설득해서 물러가게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길승수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말로만 얻을 수 있는 평화가 과연 가능할까? 역사학자로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게 역사 어디를 찾아봐도 말로 군사를 물려 되돌아가는 침략군은 없다. 저자는 오랜 연구와 자료 조사 끝에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장면을 다시 되돌려보도록 복원해냈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의 실제 모습을 살펴볼 때 서희가 적절히 군대를 움직여 거란군의 진격을 막아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담판이 없었더라도 거란군은 물러갔을 것이다.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은 전쟁 후 평화 조건을 정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파악해낸 것이다. 그 담판 때문에 소손녕이 물러간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잊지 않는 것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릇된 역사 서술로 잘못 배운다면 차라리 모르는 게 오히려 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역사 바로잡기의 역할도 함께 해낸 것이다.

 


 

이 책은 거란의 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빌미로 40만 대군을 앞세워 고려를 침공하고, 고려는 수도 개경을 함락당하는 부분도 잘 기술되어 있다. 이 때가 거란의 2차 침공(1010년)이다. 당시 고려에서 활약한 주요 인물이 바로 양규와 김숙흥이다. 그들이 2,000여 명의 병력으로 40만 거란군을 상대했던 장면은 지금 보아도 눈부시다. 그런데 의문이 있다. 당시 현종은 어떻게 해서 많은 신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감찬의 항전 건의를 받아들였을까. 어떤 전략이 있었던 것일까. 반면, 말과 낙타, 무기 등 거의 모두를 잃고 사실상 패전과 다름없는 상황에 놓인 거란이 그럼에도 다시 고려를 침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거란은 그 뒤로도 총 일곱 번에 걸쳐 고려를 침입한다). 고려를 둘러싼 당대의 국제정세가 어떠했기에 거란은 이토록 긴 시간 동안 한 나라를 계속 침공했던 것일까. 구주대첩(1018-1019)에서 고려의 승리를 이끈 사람은 강감찬 한 명이었을까···. 고려와 거란 사이에 벌어진 지난한 전쟁에 대해 품어볼 만한 의문은 이렇듯 한두 개가 아니다. 저자는 바로 이 같은 여러 가지 의문에 주목하여 ‘고려거란전쟁’에 대해 잘못 알려져 있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실, 그리고 진실한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썼다. 이 책의 출간 취지다.

이 책은 고려와 거란의 오랜 전쟁에 대한 진실과 사실, 그리고 숨겨진 이야기를 밝힌다. 드라마를 보는 듯 현장감을 즐기게 해주는 삽화와 당대의 지리적 요소 및 전투 상황의 이해를 높여주는 지도 배치로 역사서를 소설처럼 재구성한 것도 이 책의 독창성을 돋보이게 한다. 물론 기술도 많은 부분 드라마틱하게 재구성되었다. 물론 우리가 배운 『고려사』를 바탕으로 저자가 작가적 상상력을 가미한 것일 뿐 허구의 사실이 아님을 미리 밝혀둔다.

 


 

고려와 거란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 대해서는 그간 ‘사료(史料) 부족’을 이유로 깊이 다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물론 이 점은 고려사 전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한계로, 조선사에 얽힌 온갖 장르의 결과물은 많아도 고려사를 바탕으로 한 결과물은 상대적으로 빈약한 배경이기도 하다. 저자 길승수는 그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고려사(高麗史)』, 『요사(遼史)』, 『송사(宋史)』 등을 꾸준히 공부하여 당대의 상황을 파악하였고, 흔히 역사책을 “읽기 어렵다”고 하는 독자들의 선입견을 깨기 위해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되 내용에 좀 더 흥미롭게 다가갈 수 있는 몇몇 장치를 마련했다.

첫째, 주요한 장면의 이해도를 높이고 독자의 친근감을 배가해주는 요소로 ‘대사’를 활용했다. 극적인 장면의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대본처럼 대화체를 곳곳에 배치했다는 것이다. 둘째, 드라마틱한 내용을 삽화로 구성하여 마치 영상을 감상하는 듯한 재미를 주었다. 요즘 애니메이션 기법을 도입했다는 의미다. 셋째, 당대 상황과 정치지형 및 전투루트 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꼼꼼히 재현한 지도를 그려넣었다. 이는 역사적 팩트에 충실하되 흥미를 잃지 않는 역사서를 구성하기 위해 무려 14년이란 시간을 바친 역작을 남긴 이유로 그대로 작용한다. 아주 특별하고 흥미로운 장르의 역사교양서 『고려거란전쟁』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 책 「밀어붙여, 우린 할 수 있어!」란 제목의 〈프롤로그〉부터 고려거란전쟁이 한참인 듯한 급박한 상황이 대화체로 통해 시작한다. 1019년 2월 1일 검차를 밀고 있는 고려 군사들은 훗날 구주대첩이라고 불리게 될 전장에 서 있었다.

 


 

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격려했다. 하나가 되어,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사용할 순간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가족이나 친구들을 거란군에 잃은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무너질 수도 없었다. 거란군의 침략은 벌써 10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었다. 거의 매년 거란은 고려을 침략했고 무수한 고려인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특히 9년 전(1010년), 3년 전(1016년)에는 양측의 주력군 간에 대규모 회전이 벌어졌었다. 그 두 번의 전투에서 고려군은 모두 패해서 수만 명이 전사했다. 이 전투에 고려의 운명이 달려 있었다. 이번에는 달라야 할 터였다. 그때 북쪽에서 불던 바람이 갑자기 방향을 바꿔 남쪽에서 불어오기 시작했다. 총사령관인 강감찬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가 때먗춰 왔군~"(p.12~13)

이 책은 모두 5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왕좌를 향하여」, 2장 「제 1차 고려거란전쟁」, 3장 「영웅들이 나타나다」, 4장 「계속되는 위기」, 5장 「구주대첩」 등이다. 1장에서는 고려 건국 때부터 국내 정세와 중국 대륙을 비롯한 주변국의 정세가 잘 나타나 있다. 쉽게 말해 국제 정세가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그 변화가 고려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아볼 수 있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저자가 이를 놓칠 리 없다. 가능한 한 사건은 정사에 따르고, 각각의 상황을 표현할 때는 심리적 묘사나 행동의 변화 등을 자세하게 전달하기 위해 대화체로 드라마틱한 부분을 강조한다. 독자로서는 편하게 읽고 드라마를 통해 역사 지식과 이해를 넓힐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고려가 건국할 무렵 야율아보기가 순식간에 거란족을 통합하고 주변 부족들을 정복해나갔고 발해와도 지속해서 전쟁을 벌였다. 책에 따르면 915년에는 압록강까지 군대를 몰고 왔으며, 917년에는 만리장성을 넘어 유주(지금의 북경 부근)를 공격했다. 거란을 통합한 야율아보기는 924년과 925년에 걸쳐서 지금의 몽골을 지나 3,000km를 행군하여 부도성이라는 곳을 점령한다. 이로써 서쪽 부족을 모두 복속시켜 동서교역로를 장악하게 된다. 국력을 키운 거란은 곧바로 발해로 말머리를 돌려 불과 한 달만에 속수무책의 발해를 멸망시킨다.

 


 

고려는 건국한 후 꾸준히 왕권 강화와 국력 신장을 추구했다. 태조 왕건의 고구려 옛 영토 회복이라는 명분에 따른 것이다. 960년에는 이윽고 중국 대륙이 다시 송나라로 통일된다. 거란의 수 차례에 걸친 침략을 근근이 막아내던 고려에 최후통첩이 도착했다. 1018년 12월 21일경, 거란군이 개경으로 오고 있다는 첩보가 도착했다. 극도로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고려 조정에서는 거란군의 진젹을 막기 위한 시도를 계속했다. 개경에 있던 모든 가용 자원을 끌어모아 자비령 등 험준한 길을 막아서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거란군은 거침이 없었다. 12월 28일경,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은 자비령을 통과했다. 이제 개경의 문 앞까지 온 것이다. 거란군을 막을 수단은 아무것도 없었다. 서경에서 패한 지채문이 그 전날 개경에 들어와 있었다. 지채문은 카탄에서 패한 사실을 현종에게 보고했다. 그 보고를 들은 신하들은 항복할 것을 발의했다. 거란군이 고려의 모든 방어계획을 돌파하여 개경에 이르자, 조정의 중론은 항복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태조 왕건이 삼한을 통일하고 나라를 건국한 지 백여 년, 그동안 고려는 큰 위기 없이 성장해왔다. 17년 전 거란의 소손녕의 침공이 있었으나 잘 극복해내었고, 거란의 재침에 대비하여 서희가 주도해서 방어계획을 만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항복하면 고려의 운명은 끝이다.

항복을 주장하는 대신들 사이에서 왜소한 늙은 관료가 현종을 바라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신, 강감찬,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63세 예부시랑 강감찬. 강감찬은 성종 2년(983년)에 장원급제를 해서 27년 동안 관직을 이어어고 있었다. 평범한 관료에 불과했지만 위기 상황이 찾아오자, 그의 강인함과 비범함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일은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우리의 군세가 적어 적들을 상대할 수 없으니 일단 예봉을 피해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현종이 말했다. “시간을 번다고 거란군을 물리칠 수 있겠소?” 강감찬이 힘주어 말했다. “시간을 번 뒤에, 서서히 이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p.179)

 


 

팽팽했던 승부의 추는 이제 고려 쪽으로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드디어 거란군 진영이 무너졌고 거란 군사들이 무질서한 패주를 하기 시작했다. 소배압은 명령을 내려 상황을 수습해보려고 했지만, 이미 패신의 광풍이 거란군을 휩쓸고 있었다. 소배압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소배압은 갑옷과 병장기를 모두 버렸다. 갑옷은 패주하는 데 아무런 쓸모가 없는 물건이었다. 거란군 총사령관 소배압은 전장을 떠났다. 거란군들은 무작정 북쪽으로 내달렸다. 고려군들은 그런 거란군을 추격하며 주살했다. 거란이 패주하면서 버리고 간 무기와 갑옷들로 다니는 길이 막힐 지경이었으나 고려군들은 악착같이 거란군을 뒤쫓았다. 거란군 10만은 이 전투에서 대개 죽거나 사로잡혔다. 거란으로 무사히 돌아간 인원은 수천 명에 불과했다. 거란군이 이토록 참혹하게 패배한 것은 거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고려 입장에서는 이때까지의 패배를 모두 설욕하고도 남는 대승리였다.(p.311)

 

저자 : 길승수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역사 콘텐츠를 좋아해서 역사학과와 관련 학과를 다녔다. 어느 날 역사 소설을 쓰기로 결정하고 ‘고려와 거란의 2차 전쟁’을 다룬 소설 《고려거란전기, 겨울에 내리는 단비》를 썼고 후속작품인 《고려거란전기, 구주대첩》을 집필 중이다. 방송활동으로는 역시 고려거란전쟁을 다룬 〈JTBC 평화전쟁1019〉에 작가와 자문으로 참여했으며, 2023년 11월에 방영 예정인 KBS 대하사극 〈KBS 고려거란전쟁(가제)〉에 원작자와 자문으로 참여하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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