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함께 간 한국의 3대 트레킹 : 지리산 둘레길 편 형제가 함께 간 한국의 3대 트레킹
최병욱.최병선 지음 / 이담북스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 중 등산을 취미로 갖는 분들이 많다. 건강을 위해 등산처럼 좋은 취미도 없다. 미세먼지 등으로 심각하게 오염된 대한민국의 대기가 산악 지역에 가면 그나마 깨끗해서 상쾌한 기분을 맛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기 때문이다. 대기가 이렇게까지 오염된 것이 공식으로 발표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봄철 중국에서 불어오는 황사 때나 문제되던 공기질이 이렇게 나쁜지를 알게 된 것은 21세기 들어서면서부터다.

대도시, 도시, 군단위 지역 등으로 대기오염도가 높아지자 예전엔 시간 없고 힘들어 잘 안 가던 동네 뒷산이 그렇게 소중하게 보인 적이 없었을 터다. 독자도 마찬가지다. 등산을 원래 잘 다니지 않았지만 지리산은 노고단 피아골 정도로 돌아내려온 적은 있다. 마음 먹고 갔지만 지리산 종주에는 2박3일이 소요된다는 안내자 역할을 한 지인의 말대로 하루만에 독자는 생애 '위대한' 등산을 마쳤다.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가 더 힘들었다. 내려와 일주일을 꼬박 다리를 절며 일해야 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피아골 쪽으로 하산하는 코스는 힘든 길이라는 것이다.

 


 

지리산은 그렇게 만만한 산이 아니다. 요즘에야 7,000미터가 넘는 고봉들이 즐비한 에베레스트 산에 가는 것이 예삿일인 전문 산악인들이 많지만 그때 당시 일반인으로서는 지리산 1,915미터도 꿈의 높이였다. 더욱이 보존가치도 높아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 1호로 지정(1967년)돼 보호되고 있다. 지리산에 갔다가 지리산이 좋아 아예 눌러사는 산악인도 여럿 있다고 들었다. 아름답고, 웅장하고, 식생이 훌륭한 우리의 명산이다.

여기에 둘레길이 생겼다. 지리산 정상에 오르기 힘든 분들을 위해 지리산을 감상하고, 분위기에 심취할 수 있는 트레킹 길이다. 지리산둘레길은 지리산을 둘러싼 3개 도(전북, 경남, 전남), 5개 시군(남원, 함양, 산청, 하동, 구례)의 21개 읍면 120여 개 마을을 연결하는 295km의 장거리 도보길로 지리산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옛길, 고갯길, 숲길 등을 모아서 만들어졌다.

 


 

이 지리산둘레길을 산애호가 두 형제가 다녀왔다. 산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길 나선다는 최병욱 저자다. 친동생인 최병선(바이러스 과학자)씨도 함께했다. 두 형제는 지리산둘레길을 다녀온 후 "우리나라의 산천 평야가 아름답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고 말한다. 이곳엔 상큼한 숲의 향기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역사적인 발자취, 볼거리, 먹거리 등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계절에 따라 바뀌는 경치 또한 일품이라고 하는데, 봄에는 갖가지 꽃들과 파릇파릇한 새싹을, 여름에는 울창한 숲을, 가을에는 황금빛 들판을, 겨울에는 흰 눈이 쌓인 설경을 만나 볼 수 있다. 즐기고 싶은 계절을 선택하여 지리산둘레길을 둘러보는 것도 도보 여행의 묘미가 될 것이다.

지리산의 품속에 안겨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걸으면서 이곳의 향기, 볼거리, 먹거리를 마음껏 즐기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지난해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등산객이나 둘레길 여행자가 많지 않았지만 코로나 팬데믹이 종식되면 사정이 달라질 것이다.

 


 

두 형제는 지리산둘레길을 걸으며 어느 때보다 여유롭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지리산둘레길은 숲이 우거져 시원한 느낌을 한가득 주었고, 솔향기와 참나무숲 내음이 피로를 풀어주어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다. 다양한 식생을 자랑하는 지리산이니 가능할 일이다. 또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는 두 형제에게 평온함을 선사했다. 지리산은 웅장하지만 어머니처럼 포근한 산이기도 하다.

이밖에도 지리산둘레길 구간마다 길을 특색있게 꾸며놓아 도보 여행자의 눈길을 잡아 끈다. 그 모습은 세계 어느 곳보다도 아름답고 넉넉하다. 구간마다 지역 특성에 맞게 은행나무길, 살구나무길, 개오동나 무길, 석류나무길, 구찌뽕나무길, 산수유길, 돌배나무길, 이팜나무길, 단풍나무길, 벚나무길, 꽃복숭아나무길 등을 조성해 놓아 매우 인상적이다.

 


 

지리산둘레길은 눈뿐만 아니라 입도 즐겁게 해주었다. 지리산 흑돼지와 고사리, 목통마을의 토종꿀, 고로쇠수액, 두릅, 엄나무순, 삼화실의 취나물, 정금리의 녹차밭, 섬진강의 재첩, 은어, 하동의 매실, 배, 한우고기, 산동의 산수유, 악양면의 대봉감, 광의면의 단감, 시천면의 지리산 곶감, 산청의 약초 등 모두 다 표현하지 못할 만큼 이곳엔 사시사철 풍성한 음식이 가득하다. 좋은 경치에 맛있는 음식까지 있는데, 이보다 행복한 여행이 또 있을까?

도시에서 벗어나 잠깐의 휴식을 즐기고 싶거나 마음의 여유를 느끼고 싶을 때 두 형제가 다녀온 지리산둘레길을 걸어보길 두 형제는 추천한다. 이곳에서 힐링은 물론 상큼한 숲 내음 향기와 아름다운 볼거리, 풍부한 먹거리를 통해 아주 만족스러운 추억을 가슴 깊이 간직하리라 두 형제는 장담한다.

 

이팝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잠시 쉬면서 우계리 들판을 바라보았다. 서당마을의 지리산둘레길 주막갤러리에 도착해 시원한 맥주와 음료수로 더위를 식힌 다음 라면을 끓여 점심식사를 했다. 맥주가 이렇게도 시원할 수가 없었고, 라면도 지금까지 먹어본 라면 중 제일 맛이 좋았다. 너무 배가 고프니 시장이 반찬이라고 모든 것들이 맛있었다. 가격은 또 왜 이렇게 싼지…….(p. 150)

 


 

화개장터는 섬진강 물길을 따라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내륙의 산물과 남해의 해산물을 서로 교류했던 장소로 지금은 상설시장으로 꾸며놓고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었다. 8월 초순 집중폭우로 섬진강이 범람하여 침수됨으로써 피해가 컸는데 주민들이 합심하여 많이 복구되어 있었다.(p. 172)

 

구례 산수유꽃축제의 본고장 인산동마을의 산동면사무소에 주차하고 지리산둘레길 마지막 구간 트레킹을 시작했다. 원촌초등학교를 지나 현천마을로 들어 서는 초입의 삼성마을에서 광활한 황금 들녘과 저 멀리 보이는 지리산 자락이 어울려 한 폭의 멋진 산수화를 빚어냈다. 대표적인 산수 유마을인 현천마을로 오르는 길목에는 대추와 석류들이 주렁주렁 열렸고 논에는 황금빛 벼가 무르익어가고 있어 가을의 풍성함을 느낄 수 있었다.(p. 224)

 

 


 

저자 : 최병욱

 

1980년 3월부터 35년간 대전동아공고, 동아마이스터고에 근무하면서 기술인력 양성에 일생을 바쳤다. ‘해외여행 20번, 백두대간종주 2회, 우리나라의 명산 등산 1,000회’를 인생의 목표로 정해 놓고, 1980년부터 목표 달성을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2017년 6월 기준, 해외여행 24회, 백두대간종주 3회, 명산 등산 1,216회를 실시함으로서 인생의 목표를 달성했고, 에베레스트 ABC 트레킹과 백두산도 다녀왔으며, 석가모니의 인도 성지순례도 다녀왔다. 그리고 인생 100세 시대를 맞이하여 다시 제2의 인생의 목표를 설정했다. 지리산둘레길, 제주도올레길, 해파랑길 완주, 코리아둘레길 4,500km 완주, 국토대장정(땅끝에서 통일전망대까지), 블랙야크 100명산 등산, 108 사찰 탐방, 108 암자 탐방, 백만배 절하기, 지구 한바퀴(4만 km) 걷기, 책 500권 읽기, 추가로 해외여행 20번 등이다. 제2의 인생 목표 달성을 위해서 오늘도 열심히 수련하며 정진하고 있다.

 

저자 : 최병선

 

과학자이자 바이러스 전문가로서 27년여 동안 질병관리본부 국립보건연구원에서 ‘에이즈 완치’를 위해 매진하고 있다. 석·박사와 박사후연수도 오로지 에이즈 연구에만 몰입하였고 현재는 대한에이즈학회에서 부회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2018년 한국대표 3대 트레킹(제주올레길, 지리산둘레길, 해파랑길) 완주를 통해 새로운 인생의 희열을 맛본 다음 트레킹 마니아로 변신해 ‘코리아둘레길 4,500km 완주’라는 새로운 미래 목표에 도전 중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생이라는 멋진, 거짓말 - 어쩌다 보니 황혼, 마음은 놔두고 나이만 들었습니다
이나미 지음 / 쌤앤파커스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읽은 독자로서는 행운이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하다. 노후를 준비해야 할 즈음 어떻게 해야 할까에 고민하던 독자의 걱정을 이 책 한 권이 말끔히 걷어주었기 때문이다. 이 책 『인생이라는 멋진, 거짓말』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는 데 중점을 둔 것이 아니고 앞으로 살 삶에 훨씬 무게가 실린 책이다. 물론 저자인 이나미의 삶은 안 봐도 훌륭한 지식인으로 우리 사회에 많은 기여를 하신 분이니 돌아봐서 아쉬울 것도, 후회할 것도 없는 삶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만족하는 삶, 풍요로운 삶, 타인에게 베풀고 나누어주는 삶을 사는 동안 그 틈의 서운하고 안타까운 일이 없을 리 없다. 그의 삶은 그런 일도 모두 훌륭하게 극복하고 평온한 삶의 순간에 이르렀는데 다시 성찰하고 반성하는 많은 내용을 이 책에 실었다. 자신의 가치관과 인생관에 비추어 안타깝고 후회할 일이지, 보통의 삶에서 보면 매우 잘산 삶이라고 독자는 판단하고 있다. 그렇게 조그만 후회도 놓치지 않고 반성하는 삶을 살아온 저자에게 후회할 정도로 큰 과오는 없었으리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옛날 기준으로는 '장수'라는 환갑이 되어서야 조용히 삶을 관조하는 평온한 삶에 반성할 일이 얼마나 있으랴 싶다. 그러나 그의 지식과 경험으로 얻은 지성(知性)과 성품은 자신이 후회할 일도, 반성할 일도 하나 놓치지 않고 되돌아봄으로써 아름다운 나머지 삶을 살아가고자 이 책을 쓴 것이다. 독자로서는 감동이고 존경의 마음이 인다.

 


 

저자의 삶을 잠깐 되돌아본다. 요즘 육십이라는 나이는 퍽 애매하다. 환갑 잔치를 앞둔 할머니, 할아버지를 떠올리던 것은 아주 옛말. 중년보다 더 중년 같은 외모에, 자식들 수발을 받기는커녕 여전히 품에 끼고 등골 빼주느라 경제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그렇다고 ‘중년’이라고 일컫기에는 숫자 ‘60’이 주는 노쇠함이 묵직하다.

그러니 중년도 아닌, 노년도 아닌 어중간한 나이라는 것. 젊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영락없는 ‘노인’의 모습인지 어딜 가든 영 반겨 하지 않는 눈치라 서운한데, 입장 바꿔보면 자신들보다 더 나이 든 노인들이 달갑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다.

"아, 그런데 나도 사실 양로원 봉사는 좀 버겁다. 삼십여 년 같이 산 시어머니만으로 충분하다는 느낌이다. 게다가 노인 아파트에 혼자 사시는 어머니도 자주 찾아뵙지 못하면서 어떻게 양심 없이 다른 노인을 찾겠는가. 어머니도 손주나 증손주가 환갑 된 딸보다는 훨씬 더 반갑고 예쁘다 하시지 않는가.

아마 이래서 아주 늙지도 않고 아주 젊지도 않은, 노인도 아니고 중년도 아닌 어중간한 이들이 그렇게 떼로 몰려다니며 카페고 식당이고 여행지를 시끄럽게 만드는 모양이다. 나이로 대우받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나이 든 사람들 섬기기도 뭐하고. 결국 다른 세대 사람들 눈살이나 찌푸리게 만드는 건 아닌지 반성해야겠다."

- 「아주 늙지도 않고, 아주 젊지도 않은」 「홀로 서는 법」(독자 요약)

 


 

이 책은 정신의학과 의사이자 분석 심리 연구가인 이나미 박사가 육십이라는 나이를 지나며 보이는 것들, 알게 된 것들, 받아들이게 된 것들을 담담하고 차분하게 써 내려간 책이다. 독자는 이 책을 읽으며 분석심리의 창시자 구스타프 칼 융의 모습이 떠오른다. 정신의학자인 융은 어린 환자들을 돌보는 모습이 마치 성자가 돌보고 치료하는 모습으로 그린 책을 읽은 적이 있어서다. 그는 의사로, 심리학자로, 저술가로, 작가로 TV 프로그램에도 자주 출연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린,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성공한 여성’이다. 그와 동시에 어느 누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삶도 살아내고 있다.

딸, 며느리, 아내 그리고 엄마로서의 삶 말이다. 이제는 솜털 같은 손주를 둔 할머니로서의 삶도 추가되었다. 그런데도 반성할 게 남았다는 것은 그의 인품에서 비롯된 측은지심의 발로가 아닌가 싶다.

 


 

사실 저자는 피아니스트를 꿈꿨지만 현실에 타협해버렸던 학창 시절, 자퇴서를 품고 다녔던 의과대학 시절, 일요일도 빠지지 않고 이른 아침에 밥상을 차려드려야 했던 시부모 밑에서의 시집살이, 치매에 걸린 시부모를 모셨을 때의 처절한 나날들… 그는 젊은 날 사는 게 너무 힘들고 버거워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했다고 한다. 한때는 집에서고 밖에서도 소처럼 일하다, 폭삭 쓰러져 입원을 하기도 했다. 그때는 오히려 죽음을 떠올릴 시간조차 없었다.

아이들에 대한 책임, 아픈 부모들에 대한 부담, 자신을 키워준 사회에 대한 염치…. 그런 것들 때문에라도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 그렇게 놓아버린 죽음에 대한 유혹들이 육십이라는 나이에 서고 보니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어쩌면 굳이 힘들게 죽지 않아도, 아주 자연스럽게 나이가 들어서, 아무에게도 상처나 죄의식 같은 것을 심어주지 않아도 고되고 무거운 삶을 떠날 수 있는 날이 바짝 당겨져 와 있는 느낌 때문일까? 이 어찌 성자(聖者)의 측은지심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쩌다 겪은 일도 저자에게는 삶의 원칙에 적용되었나보다. 재미로 봤을 타로점도 삶의 지혜로 바꿔놓는다. 그만큼 넉넉한 품성의 소유자인 것 같다.

‘사주 타로’ 봐주는 곳에 들어가 식구들 일을 묻다가 “나는 언제 죽어요?”라고 물었다가 혼이 났다. 그런 건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어찌 보면 인간적인 점쟁이였던 듯. (…) 따지고 보면 자신이 죽을 날짜를 알게 된다는 것은 일종의 사형수가 되는 것과 같다. 그때부터 죽음은 타인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몫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지막을 알지 못하면 죽음과 관련된 난리법석과 귀찮음과 슬픔과 허무함 따위는 나와 상관없는 듯 평온하게 살 수 있지만, 나의 마지막을 확실히 알게 되면 매일 마지막을 상상하느라 죽음이라는 콤플렉스에 사로잡힐 것 같다. (…)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언제 죽을지 사실 궁금하지 않다. 점쟁이에게 내가 언제쯤 죽겠냐고 물었던 것은, 그 당시 내 나름 사는 게 너무 힘들고 팍팍했기 때문에 이 고생이 언제쯤 끝나는 것이냐고 물어보고 싶었던 것일 게다.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편해진 것일까. ‘때가 되면 죽겠지.’ 하고 느긋하게 생각한다.(p. 45)

 


 

의사로서 저자는 당연히 '죽음'과 늘 가까운 곳에 서 있다. 의사라는 직업이 그렇게 때문이다. 그것은 의사가 되기 위해 들어간 의과대학에서 수없이 배우고 들은 얘기일 테니 자신에게 크게 와닿지 않았을지라도 현실이 그렇다. 그렇게 저자는 이 책에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고, 또 깊이 생각해보았다가도 다시 멀찍이서 바라보기를 반복한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이야기를 하는 듯싶지만, 그의 글을 따라 읽는 동안 마음은 전혀 무겁거나 우울하거나 어두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계속해서 삶에 불을 켜는 듯한 기분이 든다. 상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시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충만한 ‘현재’를 실감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거대한 담론이나 철학적인 내용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네 삶의 면면에 대해 소탈하고 담담하게 이야기해나가기 때문일 것이다.

"아들, 며느리, 손주가 사돈댁으로 가 꽤 오랫동안 머물 때는 해방이 되는 느낌이다. 아이 없는 집이라 썰렁해도 모든 것을 노인에게 맞추며 살 수 있다. (…) 하지만 아이와 헤어지고 나면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자꾸 보고 싶다. 아이 냄새가 코를 간지럽힌다. 나를 보며 쓱 웃어주는 미소가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내가 뭐라 하면 답을 해주는 그 소리도 들린다. 하루하루 새로운 음절을 내며 스스로 배우고, 어떤 때는 그 소리가 낯선지 눈이 동그래지는 손주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정신 차리자. 이나미. 아들, 며느리, 손주는 언젠가 내 앞에서 모두 사라져 제 갈 길 가는 별개의 존재다. 홀로 서는 법. 절대 잊어버리지 말고 갈고 닦아라."(p. 20)

 


 

중년에서 노년으로 가는 길목에서의 삶, 그쯤에 서서 생각해보는 죽음과 여러 이별, 그리고 그 이후에 대한 이야기들은 같은 시간을 살아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것들이다. 아니, 공감을 넘어 삶을 ‘공유’하는 차원의 감정의 교류를 느낄 수 있다. 젊은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는 삶의 숭고함을 가슴 저릿하게 경험할 수도 있다.

"자신의 인생이 얼마 안 있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무(無)’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사는 동안 남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 무지 애를 썼고, 이름을 떠올리면 추억으로 미소라도 짓게 만드는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된 거 아닐까요. 아름다운 지구에서의 찰나, 생겼다 없어지는 한 점 먼지에 불과한 ‘거짓말’ 같은 인생. 그럼에도 내 영혼은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사라진 후에도 나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기에…. 감히 이 찰나의 거짓말에 ‘멋진’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고 싶습니다."

- 「들어가는 말」 중에서

 


 

철저한 계획이나 거창한 목표는 없어도 그저 사고나 실수, 얼굴 붉힐 일 없이 넘기는 것만으로 다행이라 생각하며 살다 보니, 쓸데없이 나이만 잔뜩 먹었습니다.

누구의 도움 없이 내 힘만으로 살았던 순간은 없었는데도, 투덜거리고 불안해하고 원망하며 슬퍼했던 때는 왜 그리 많았을까요. 예전 같으면 노파라는 소리를 들을 처지라, AI와 로봇과 디지털 첨단 기술의 시대에 살려니 실수도 어려움도 답답함도 넘쳐납니다. 그럼에도 의사니, 교수니, 분석가니 하는 가면을 쓰고 숙고 없이 내놓은 수십 권의 책이 많이도 쌓였네요. 아, 정말 뻔뻔하군요! 딸, 며느리, 아내, 엄마 그리고 할머니로서의 삶이 앞뒤 재지 않고 지르는 용기를 주었기 때문일까요.

앞으로는 좀 더 지혜로워져야겠습니다. 옹졸하고 부족한 저를 참아주며, 귀한 시간, 귀한 자리를 저와 함께 나눈 분들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하니까요. 환자로 친구로 친지로 가족으로, 제가 걸어온 길목마다 저를 성장시켜준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책 출간에 부쳐 쓴 저자의 마음이 오롯이 독자에게 전해져오며 전율 같은 공감과 감동을 느낀다. 또 독자도 앞으로의 삶을 자서전을 쓰는 심정으로 살기를 다짐해본다. 독자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책을 읽고 감동을 느낀다. 진심으로 저자에 감사한다. 가슴이 답답하거나 힘들고 지칠 때 언제나 꺼내 다시 읽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른의 교양 - 지적이고 독립적인 삶을 위한 생각의 기술
천영준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2월
평점 :
예약주문


 

이 책을 배움의 기회로 삼는 독자들은 '어른'의 의미와 '교양'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출발하는 게 좋을 듯하다. 정확하게 하지 않을 경우 아주 쉬운 단어인 교양과 어른이 부조화로 자칫 전체 책의 의미를 훼손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어른의 정의를 제대로 세우고, 교양은 우리가 뭘 갖춰야 하는지를 아는 게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내용의 의미에 의문이 가지 않을 터다. 교양의 사전적 정의는 학문, 지식, 사회생활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품위 또는 문화에 대한 폭넓은 지식으로 풀이하고 있다. 또 어른은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어른과 교양은 어느 부분 중복되는 뜻이 포함돼 있다. 교양이 단순한 지식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듯 어른 역시 단순하게 '다 자란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독자는 생각한다. 두 단어의 뜻을 바탕으로 이 책의 제목인 『어른의 교양』을 의역해보면 학문과 지식을 쌓아 성인(成人)이 된 사람이 갗춰야 할 성품과 지식, 그리고 공동사회에 책임의식을 가진 사람을 '교양인'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어른의 교양이 무엇인지를 더 적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천영준은 철학, 예술, 역사, 정치, 경제 분야의 대가들과 그들의 생각을 통해 진짜 어른이 되는, 즉 자신만의 생각과 교양으로 다져진 어른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 다섯 분야와의 대가들과의 만남은 교양인이 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준다. 책의 분량으로서는 이 같은 일을 이 책이 감당하기에는 무리일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지표이고 징검다리일 뿐이다. 실제 스스로가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며 우리 사회를 문화사회로 이끌어가는 교양인의 역할은 자신들의 실천에 달려 있음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저자는 그 안내자 역할을 할 뿐이다.

 


 

책에 따르면 어른의 교양이란 어른들만을 위한 매뉴얼도, 말로 젠체하며 뽐낼 수 있는 지식도 아니다. 나이를 벗어나 진정한 어른으로서의 품위를 갖고자 하는 사람이 쌓아야 하는 최소한의 소양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의 평판이나 분위기 속에서도, 내 머리로 사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생각의 기술’이야말로 어른이 갖춰야 할 교양이다.

이에 따라 저자는 이 책을 5부로 구성한다. 철학, 예술, 역사, 정치, 경제 5가지 개념을 ‘생각의 기술’이라는 관점으로 풀어내 설명한다. 남과 다르게 생각하는 법(철학)부터 새로운 콘텐츠를 만드는 법(예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법(역사),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정치), 인간의 심리로 부의 흐름을 읽는 법(경제)까지, 불확실한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을 나만의 지적 무기를 찾는 여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특히 각 분야를 대표하는 인류의 역사 속 사상가 30인이 삶의 어둡고 축축한 길을 걸어가며 얻어낸 통찰을 ‘지적 독립’이라는 시각에서 정리한 점이 돋보인다. ‘생산적 의심을 훈련하라’는 조언에서부터 ‘갑질에 굴복하지 말라’는 통쾌한 일침까지, 독립적인 생각으로 무장한 이들의 삶을 살펴보는 일은 남과 다른 나를 만드는 첫 단계이다.

 


 

역사 속에서 잘 나오는 인물 30명의 면모는 독자들도 대개 알고 있는 분들이다. 긍정적 인물이 대부분이고 한두 명의 부정적 인물도 예로 들고 있다. 잘못된 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인물을 예로 든 것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저자의 의도가 있음은 물론이다.

1부 [철학] 남과 다르게 생각하는 법

* 같은 것을 보고도 본질을 꿰뚫는 판단의 기술

2부 [예술] 새로운 콘텐츠를 만드는 법

* 평범함을 아름다움으로 만드는 관점의 기술

3부 [역사]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법

* 일상의 갈등을 해결하는 되새김의 기술

4부 [정치]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 적도 내 편으로 만드는 관계의 기술

5부 [경제] 심리로 부의 흐름을 읽는 법

*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 되지 않는 경쟁의 기술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에서부터 자신의 과거에 종속되는 경로 의존성을 이야기한 노스에 이르기까지 30명의 대가들이 던지는 화두는 저마다 다르다. 또 오늘날에는 큰 비중을 두지 않아도 될 인물도 있다. 그러나 당대에는 물론 앞으로 다시 부각될 인물이기에 여기에 끼어 들어간 인물은 아니다.

이들이 말하는 모든 걸 다 받아들이고 소화할 수는 없겠지만 저자가 프롤로그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들의 생각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생각을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의 만의 색깔로 그려나가는 것"이다.

배우지 않고 교양인이 될 수는 없다. 교양인이 아니라 보통사람도 되기 어렵다. 배우지 않고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을 정도로 우리 인류의 삶은 발전했기 때문이다. 날 때부터 교양인은 없다. 그들의 생각을 따라가기에도 벅차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런 과정을 겪지 않는다면 진정한 어른이 되기 어렵다.

자신을 다듬어가는 일은 평생에 걸친 작업이다. 기나긴 여정이 필요한 작업이기에 어렸을 때부터, 가급적 빨리 시작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이 자신의 생각을 다듬기 시작하려는 청소년부터 아직 자신의 색깔을 찾지 못한 모든 이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라는 데 동의한다.

 


 

'지적이고 독립적인 삶을 위한 생각의 기술'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철학, 예술, 역사, 정치, 경제를 아우르는 실전 인문학을 표방하면서 '각자도생의 시대'의 팍팍한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지적 도구라 소개한다.

이 책은 앞서 소개한 5가지 분야를 다루면서 동서양을 넘나드는 30명의 사상가와 철학자들의 통찰을 담았다. 어른이라면 어설픈 지식으로 가르침을 설파하는 '지식 상인'을 그만두고 진정한 교양인으로 거듭나는 일을 위해 단 하루도 배움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 책에 나온 대가들의 말을 따로 챙겨두었다 따로 필사본을 만들어보는 것도 매우 흥미롭게 배우는 방법이 될 것이다.

긍정보다는 부정을 삶의 정수로 보았다는 세네카를 "예측하는 습관이 삶을 바꾼다"로 저자는 소개했다. 실패를 두려워하며 걱정만 하는 것도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는 저자의 생각이 세네카의 습관과 잘 어울린다.

 


 

이와 같이 이 책은 30명의 대가들을 백화점식으로 열거하면서 그들의 사상과 철학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이해준다각 부의 소제목으로 열거된 인물들이 한 행동과 말한 내용은 저자의 손과 머리를 거쳐 채에 1차로 걸러진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의미가 깊고 넓다.

30명 대가들의 남긴 업적이나 사상, 철학 등은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아는 것들이지만 저자의 손에서 더 곱고 흡수하기 쉽게 걸러서 나온 것들이니 자칫 소화불량이 우려될 정도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음미하듯 한 문장 한 문장을 대하면 분명 대단한 교양을 쌓을 기회를 얻게 될 것으로 독자는 판단한다.

그만큼 쉽게 쓰였으니 물 마시듯 마셨다간 나중에 뭔가 하나도 건지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까 우려돼 독자로서 조바심이 난다. 아주 천천히 수시로 들춰보는 것을 습관을 들인다면 독자들의 교양은 꽤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 있을 정도로 잘 쓰인 책이라는 데 독자로서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긍정의 답을 말할 수 있다. 독자는 이런 책을 쓴 저자와 동시대의 사람으로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동이 된다. 독자의 '최애책'으로 꼽을 만하다.

 


 

저자 : 천영준

 

기술정책학자. 현재 기업의 홍보와 위기관리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다. 기술과 사회정책 그리고 정치와 관련된 글을 쓰고 활동해왔다. 연세대학교에서 경영학 및 교육학(학사), 정보산업공학(석사), 과학기술정책(박사)을 전공하고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주로 빅 데이터, 디지털 경제, 조직 혁신 등을 주제로 《기술 예측과 사회 변화(Technological Forecasting and Social Change)》 《개인 및 유비쿼터스 컴퓨팅(Personal and Ubiquitous Computing)》과 같은 국제 저널에 논문을 발표해왔다.

데이터와 콘텐츠를 이용하는 사용자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다 ‘인간주의’라는 개념에 천착하게 되었고, 사람의 인식과 행동 본질에 관련된 옛사람들의 연구를 추적하기 위해 고전 원문 읽기를 시작했다. 『논어(論語)』와 『군주론(Il Principe)』, 셰익스피어 희·비극 등의 텍스트를 탐독함과 동시에 깊은 성찰을 통한 치유, 중심 잡기, 홀로서기와 관련된 지성인 운동을 준비하고 있다. 아직 한국에 진정한 근대가 찾아오지 않았다고 보며, 제대로 된 근대인의 모티브를 찾기 위한 인물 분석 작업도 하고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매일경제》 《데일리한국》에 전문가 칼럼을 연재했고, 주요 기업의 사장단 회의 및 고위자 과정 등에서 강의했다. 《시사저널》 《지구와 에너지》에 리더십과 인문 고전, 갈등 관리와 관련된 글을 쓴다. 저서로 『바흐, 혁신을 말하다』와 『기술경영(공저)』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계인
김민현 지음 / 스윙테일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주어진 시간은 단 7일, 나를 토막 살인한 범인을 찾아야 떠날 수 있다.”

이런 카피 문장이라면 소설 애독자들에겐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다. 죽었는데 범인을 찾는다고?

이 책 『경계인』은 카카오페이지 웹툰화가 확정되며 큰 기대감을 불러 모은 '저승' 미스터리 판타지이다. 독자들이 잘 아는 이승과 저승의 사이에 있는 사람을 뜻하는 '경계인'임을 알 수 있다. 이승과 저승의 세계라면 70년대 흑백 TV로 방영돼 인기를 모았던 '전설의 고향'부터 최근 영화에서 큰 인기를 모았던 '신과 함께 : 인과 연'이 생각난다. '전설의 고향'은 아무도 가보지 못한 세상이어서 호기심이 발동하고 교훈적인 얘기를 담아낼 수 있어 옛날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21세기 현재도 신비롭고 무섭고, 있을 것 같은 세상 '저승'에 대한 얘기는 젊은 층에게도 흥미를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을 충분한 재확인시켜 주었다.

 


 

독자는 이를 '상상력의 과학화'로 이름 짓고 판타지 미스터리 무대의 맨 앞에 나선 이런 미스터리 스릴러를 즐길 생각이다. 그것은 '삶의 미래'도 중요하지만 '죽음의 과거'도 인문학적 해석에 상상력이 더해지면서 연령 계층에 관계없이 흥미롭고 즐거운 이야깃거리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카카오페이지와 CJ ENM이 주최한 ‘제3회 추미스 소설 공모전’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경계인』은 어느 날 갑자기 토막 살해된 회사원이 저승과 이승을 오가며 죽음의 진실을 찾아간다는 이야기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관한 디테일한 묘사, 촘촘하게 설계된 복선과 반전, 매력적인 캐릭터와 흡입력 있는 전개로 심사위원들의 극찬을 받은 이 작품은 저승 판타지와 미스터리의 절묘한 결합으로 소설적 재미는 물론 ‘삶과 죽음’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생각하게 한다. ‘나’를 토막 살인한 범인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은 단 7일. 과연 주인공 주현은 자신이 죽임을 당한 이유를 찾고 악귀로 남는 대신 저승으로 무사히 떠날 수 있을까.

 


 

눈앞에 보이는 토막 살해된 시체가 다름 아닌 '나'라면 어떤 기분일까? 『경계인』은 주인공 주현이 토막 살해된 자신의 시체를 발견하는 것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떻게 자신이 이렇게 됐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 주현. 분명 퇴근 후에 차를 몰고 집으로 가다가 빨간불에 걸려 멈춰 섰는데, 눈을 떠보니 토막 난 채 죽어 있다. 대체 누가, 왜 주현을 죽인 것일까.

『경계인』은 주인공이 자신을 죽인 범인을 찾는 저승 미스터리다. 잔인하게 살해당한 주현은 자신을 죽인 범인을 찾기 전까지는 절대 저승에 가지 않겠다며 저승사자 우진과의 저승 동행을 거부한다. 하지만 살해당한 영혼이 저승에 가지 않으면 악귀로 변해 이승의 질서를 흔들어놓을 터. 베테랑 저승사자 우진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주현의 요구를 들어준다. 그렇게 주어진 단 7일간의 시간.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경계인의 세계에서 주현의 숨 막히는 범인 찾기가 시작된다.

 


 

‘나’를 죽인 범인을 찾는다는 흥미로운 설정과 죽음 이후의 세계라는 판타지적 요소를 활용한 이 작품은 소설적 재미를 주는 것은 물론 삶과 죽음을 통해 인간의 어두운 이면을 그려낸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그 뒤에 버티고 있는 꼬일 대로 꼬여버린 인간의 마음,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시작된 뒤틀린 인간의 욕망 등 경계인의 눈으로 바라본 객관화된 인간 세상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카카오페이지 연재 당시 속도감과 몰입감에, 예상치 못한 반전까지 독자들로부터 극찬을 받은 『경계인』. 과연 주현은 자신이 죽은 이유를 밝혀내고 저승으로 떠날 수 있을지, 경계인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저승 사람도 아니고 이승 사람도 아닌 그 중간쯤에 있는 자라고 생각하면 된다네. 우리는 경계인이라고 부르지.”

- 본문 중에서

 


 

'추미스'란 단어도 처음 들었다. 약자를 하두 많이 써서 약자인 줄은 알았으나 추리 미스테리 스릴러의 줄임말이라 한다. 뜻이 통하면 되지만 너무 약자를 쓰다보면 자기소개서나 시험 같은 데에서 약자를 남발해 낭패를 보는 일이 없기를 조심스럽게 바란다.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자들을 일컫는 경계인. 『경계인』에서 묘사되는 경계인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현실보다 더 현실 같다. 저승사자들의 사무실에서는 여느 회사처럼 7시가 넘어도 말단 저승사자들이 부장 저승사자의 눈치를 보며 퇴근하지 못한다. 이곳에서는 마치 출입국사무소처럼 망자들을 심사해서 G2, G4 등 이승에 머무를 수 있는 기간이 다른 비자를 발급한다. 망자들의 생전 자산은 노잣돈으로 계산되어 저승으로 떠나기 전에 이승에서 여행 경비로 쓰인다. 망자들을 위한 여행 가이드북도 있다. 저승사자들의 사무실에서는 ‘심맥’이라는 커피믹스를 마시고, 망자들의 지하철에는 ‘마음의 힘이 되는 보교생명’ 광고판이 걸려 있다. 이렇듯 현실세계를 비튼 경계인들의 세계 묘사는 위트가 넘친다.

반면 경계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인간들의 세상은 질투와 배신, 거짓과 탐욕이 난무한다. 우정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를 향한 발톱을 세우고, 사랑이라는 허상 아래 뒤틀린 욕망의 잣대를 들이댄다. 자신은 결백하다고 생각하지만, 돌이켜보면 무심코 뱉은 말로 상대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위트와 해학이 넘치는 추리 미스터리 『경계인』.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죽음 이후의 이야기로 과연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인지 삶에 대한 태도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이다.

 


 

“잘 생각해보세요. 저승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서 벌을 내리지 않는 곳이 아니에요. 지은 죄를 정확히 찾아내 그에 맞는 벌을 내리죠. 하지만 저는 저승 사람이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솔직하게 말씀해주시면 최대한 감형 방법을 찾아드릴게요.”

주현은 성민을 바라보았다. 손은 떨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저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습니다.”

평정을 가장하며 말하는 주현을 성민은 다시 한번 찔러보았다.

“윤리적으로요? 아니면 심정적으로요?”

“둘 다입니다! 저는 그냥 평범하게 살아왔어요!”(P. 99)

 

그러나 피 묻은 티셔츠가 발견된 이상 이야기가 달라진다. 헤어진 뒤에도 휴대폰 사진을 지우지 않았다는 점에서, 피해자가 주현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렸다고는 단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쩌면 휴대폰이나 SNS상에 흔적이 남지 않는 방법으로 지속적으로 집착했고, 분노한 주현이 피해자를 살해했을 가능성이 있다.

서둘러 주현을 불러 조사를 시작하려 했다. 그런데 마침 오늘 점심시간에 윤진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왔다. 박주현이라는 사람의 실종 사건이 접수되었는지 확인하고 싶다고 했다. 동명이인이 아닐까 싶었지만 사건 자료를 확인해보니 아니었다. 틀림없는 그 주현이었다.(P. 140)

 


 

“몽마예요.”

“몽마가 뭐죠?”

“사람의 꿈속에 나타나는 귀신 같은 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저승은 이승의 일에 관여하지 못한다. 여러모로 불편했던지, 저승의 일부 연구자들이 경계인을 통하지 않고 직접 이승에 관여할 방법을 찾기 위해 자체적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오랜 연구 끝에 찾아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살아 있는 사람의 꿈속에 들어가는 것이었다.(P. 174)

 

저자 : 김민현

 

렌카라는 필명으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경계인』은 CJ ENM과 카카오페이지가 주최한 ‘제3회 추미스(추리,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 공모전’에서 금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어느 날 갑자기 살해당한 회사원이 저승과 이승을 오가며 흡혈귀와 함께 죽음의 진실을 찾아가는 미스터리 판타지다. 촘촘하게 설계된 복선과 반전, 매력적인 세계관의 묘사와 흡입력 있는 전개로 큰 기대를 불러 모으며 출간 전 웹툰화가 확정되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탄금 - 금을 삼키다
장다혜 지음 / 북레시피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선 후기 한 거상(巨商)의 집안이 알지 못한 이유로 하루아침에 격랑 속으로 휘말리며 풍비박산된다. 이후 벌어지는 이복남매와 야릇한 감정과 거상의 재산을 가로채려는 사람들의 각종 추한 면모들이 드러나고 등장인물의 뚜렷한 성격과 스토리의 상황이 잘 맞물리며 멋진 시대극을 창출해낸다. 『탄금』은 소설로서 장다혜 작가의 첫 번째 작품이라는 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잘 빚어진 도자기를 하나 한국문학사에 올려놓았다. 장르소설이며 미스터리 스릴러로 분류되는 이 소설은 가장 작품성을 높이는 스토리 구성과 반전으로 극적 효과를 높임으로써 작가의 문재(文才)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시대극의 재미는, 도처에 산재하는 갖가지 제약과 한계가 더 많은 갈등을 조장하고 더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데 있다. 『탄금』 역시 큰 얼개가 되는 홍랑의 실종과 귀환, 그를 둘러싼 믿음과 의심 사이에 데릴사위, 씨받이, 양자, 무당, 추노꾼, 싸울아비, 피장이 등 조선 시대만의 독특하고 간간한 인물들이 등장하여 복잡하게 얽힌 사건들을 이어간다. 저자는 24절기를 빌려 이렇듯 복잡한 사건과 감정의 흐름을 날로 삼고 씨로 삼아 탄탄히 직조된 서사구조를 만들어 지금껏 보지 못한 놀라운 작품을 완성해낸다. 무엇보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완성도 높은 이런 시대극이 작가의 첫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프랑스와 영국에서 호텔 관련 학교를 다녔고 두 나라에서 호텔리어로 일했던 장다혜 작가는 어려서부터 독서를 무척 즐겼고 20대 초반에는 작사가로(이소은의 「사랑한다」, 박혜경의 「A Lover's Concerto」, 이수영의 「눈물이 나요」등), 30대엔 에세이스트로 활동하였다. 40대가 되어서야 첫 소설 『탄금』을 쓰게 되었다. 스스로를 밀어붙이지 않고,'내킬 때만' 글을 썼다는 작가는 써놓은 글을 몇 개월 지난 뒤에 객관적 시선으로 다시 보면서 주요 인물들의 감정선을 새롭게 다듬고 문장들을 수정했다고 밝힌다. 그런 작업을 반복하기를 수차례, 한국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줄 역사 서스펜스 로맨스

『탄금』이 5년 만에 드디어 완성되었다.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다 묘사와 스토리가 탁월한 작품을 창작한다는 게 오랜 시간 긴 침묵의 공부와 사색이 있었으리라.

독자가 즐거이 누릴 시대극의 묘미가 산재해 있는 이 소설은 언어 선택 하나하나에 깃든 고심과 정성의 흔적이 엿보인다. 심열국이 업무를 보는 집무재를 비롯하여 응달 귀퉁이라는 뜻을 지닌 재이의 처소 요암재, 동궁같이 밝은 정동향에 위치한 홍랑의 처소 광명재 그리고 무진의 처소인, 말 그대로 이름 없는 무명재와 더불어 인물의 이름들 또한 의미심장하다. 하잘것없는 뜻을 지닌 재이의 이름과 밝은 무지개를 뜻하는 홍랑의 이름은 과연 이들이 남매라고는 하나 태생을 짐작케 하고도 남는다. 양자로 들인 무진 또한 없을 무無, 다할 진盡이라는 뜻의 이름자를 지님으로써 평탄지 않은 앞날을 예고한다.

 


 

『탄금』은 1980년대 초 프랑스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에서 영감을 받은 소설로, 시대극의 독특한 재미를 선사한다. 사극에서 맛볼 수 있는 대화체의 묘미와 탄탄한 줄거리 전개 또한 이 소설의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아름다운 한글 어휘와 다채로운 고어들, 구수한 방언들로 일구어낸 정교한 문장들은 우리의 글맛을 곱씹어 새롭게 느끼게 하며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빠져드는 독서의 즐거움을 전한다.

『탄금』에는 새 시대를 여는 임금도, 전장에 선 명장도, 국운을 틀어 쥔 궁궐여인들도 없다. 절망의 힘으로 또다시 절망과 싸워야 하는 시대의 부스러기들만이 있을 뿐이다. 또한 작가는 풍파에 휩쓸린 인간의 몰락과 복수를 예술품 거래 상단이라는, 참신한 배경을 바탕으로 섬세하게 풀어내며 사라져가는 토속신앙을 두루 재현하여 조선의 숨겨진 단면을 펼쳐 보인다.

"틈틈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도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하염없는 기다림, 어긋난 약속, 전달되지 못한 서신과 같은 애틋한 낭만들을, 또 지엄한 법도 아래 오가는 눈빛과 꼭꼭 여민 의복 사이로 드러난 살결처럼 금지된 긴장감을 소홀히 하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제일 공을 들인 부분은 미스터리를 끌고 나가는 홍랑이 단편적 인물이 되지 않도록, 식상한 복수를 꿈꾸지 않도록, 끊임없이 감시하고 수정하는 일이었습니다. (……) 그렇게 여러 이름을 지닌 미스터리한 인물, 홍랑이 만들어졌습니다. 시대극이다 보니 캐릭터를 구축함에 있어 가장 고심했던 건 역시 여성인 재이였으나 가장 정이 갔던 건 무진이었습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이 소설의 큰 얼개는 당시 시대상으로 보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상정한 데서 비교적 합리적 설득력을 독자들로부터 확보하고 있다. 고가의 미술품 거래로 돈왕이라 불리게 된 조선의 거상 심열국. 어느 날 그의 외동아들 홍랑(8세)이 실종된다. 심열국과 민씨 부인은 수많은 재물과 사람을 풀어 아들을 찾고 시체에까지 현상금을 붙이지만 실마리도 찾지 못한다. 씨받이가 낳은 딸 재이(9세)는 홍랑의 수호부를 빼앗았다는 죗값으로 별채에 감금당하고, 양반 핏줄인 무진(11세)이 양자로 들어온다. 가문의 흉사로 인해 하루아침에 남매가 된 두 사람은 서슬 퍼런 상단에서 오로지 서로만을 의지한 채 자라난다. 십 년 후, 추노꾼 독개는 홍랑을 찾아 데려온다. 곧 성대한 잔치가 벌어지지만 떠들썩한 상단에서 재이와 무진만은 홍랑을 사기꾼이라 확신하고 그의 면전에 멸시의 말들을 쏟아낸다. 하나 시간이 흐를수록 재이는 홍랑의 진심에 혼란스러워하고 끝내 친아우로 인정하게 되지만 동시에 그의 매력에 속절없이 빠져든다. 아우의 귀환에 대한 감격도 잠시, 재이는 마땅히 끝내야 할 연모를 접지 못해 애달파한다. 무진은 홍랑에게 제 자리를 박탈당하고 설상가상 재이의 마음마저 빼앗기자 홍랑의 뒤를 캐려고 혈안이 된다. 진정 홍랑의 정체는 무엇인가? 각자 믿고 싶은 것과 믿고 싶지 않은 것 사이에서 교묘한 외줄타기가 계속되고, 결국 시대의 금기와 모순, 그 추한 민낯이 드러나는 대반전에 이르러 모든 상황은 단박에 전복된다. 과연 금을 삼킨 자는 누구인가?

 


 

풀물이 잔뜩 밴 재이의 광목 치마는 닳고 닳아 해거름에 다리속곳이 다 비쳤다. 트실트실한 볼은 군불 한 자락 못 쬐고 동절기를 난 듯 벌겠고, 가시랭이가 붙은 산발에선 풋내가 풀풀 풍겼다. 잔망스러운 뒤통수에 깡똥하게 달린 홍댕기는 차라리 거무튀튀한 팥죽색이었다. 얇은 은박이 죄 벗겨져 얼룩덜룩 자국만 남은 것이, 댕기가 주인보다 나이를 더 먹은 듯도 하였다. 남매가 한 핏줄이 분명한데도 곡해를 사는 결정적 이유는 다름 아닌 피부색이었다. 천방지축 깨춤을 춰대며 온데를 쑤시고 다니는 누이는 잘 여문 보리알처럼 갈색인 반면, 방 안에 들어앉아 서책만 뒤적이는 아우는 갓 탈곡한 쌀알마냥 희디희었다. 그 대비는 단순한 성정 차이가 아니었다. 온종일 밖으로만 나돌아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애꾸라기 계집과, 불면 날아갈까 쥐면 터질까 시시각각 과보호를 받은 옥동의 삶의 차이였다. 한 해 먼저 태어났다곤 하나 이지러질 재?, 떠날 이(離)라는 하찮은 이름의 계집은 실상 무지개 홍(虹)에 밝을 랑(朗) 자를 쓰는 금자를 이길 재간이 없었다. (p. 13~14)

남녀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홍랑과 재이, 그리고 주변인으로서의 역할밖에 하지 못하고 사그라져버린 무진. 상단주인 심열국과 민씨 부인, 심열국의 수하 방지련과 민씨 부인의 심복 육손. 무진의 수원인 부영과 홍랑의 벙어리 의제 인회. 제 성정에 눈먼 민씨 부인을 쥐락펴락하는 귀곡자와 송월 객주의 존재. 그리고 재이를 가장 가까이서 수발하는 을분 어멈과 을분에 이르기까지 실타래같이 얽힌 이야기에 어느 누구 하나 관여하지 않은 인물이 없다. 
그만큼 사건의 얼개는 정교하고 탄탄하다. 또한 모두가 반전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이라 할 만큼 이야기는 풍성하고 다채롭다. 특히나 결말로 치달을수록 전혀 예상치 못한 비밀스러운 사건들이 드러나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이러한 반전의 요소들은 이 소설이 선사하는 여러 묘미 중 하나일 뿐이다. 각 인물의 성정이 드러나는 묘사 하나하나는 긴박하게 전개되는 이야기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아홉 살 누이에게 홍동백을 따다 주겠다고 했던 그날 밤 이후로 사라져버린 아우가 10년 후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한 채 살벌한 검계가 되어 돌아왔다. 진짜 아우가 아니라고 수십 번을 부정해보지만 서서히 이끌리는 감정을 어찌하지 못하고 재이는 누이로서, 또 여인으로서 갈망에 젖어 홍랑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우애와 연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재이. 어느 한 군데 정 붙일 수 없었던 무진 또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누이를 향한 연정을 끊어내지 못해 괴로워한다. 이와 같은 설레고 애달픈 감정선을 타고 상단의 비리가 얽힌 비참하고 잔인한 이야기가 맞물린다.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은 더 큰 죄와 악으로 치닫고 마침내 업을 지닌 자들은 더없이 잔혹하고 고통스러운 최후를 맞닥뜨린다. 아름다운 서정과 잔혹함이 공존하는 영상미 가득한 소설이다. 실제 표지부터 속지까지 들어간 그림은 로맨스 소설로서의 면모도 갖추고 스릴러 분위기도 보여준 잘 그린 그림으로 보인다.

조금의 방심도 용납지 않는 서스펜스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 작품은 대중소설인 만큼 흥미로움의 요소가 주를 이룬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에 못지않게 내재한 울림이 묵직하게 전해진다. 신분제도의 부조리나 탐관오리의 횡포는 물론 피가 튀는 칼부림 장면에, 이루어질 수 없기에 더 안타깝고 애절한 사랑의 이야기가 포개어짐으로써 소설의 분위기는 상승한다. 얽히고설킨 인물들이 선사하는 놀라운 반전과 속도감 있는 전개는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소설의 결말에 이르면 독자는 (잔인한 고대 중국의 형벌인, ‘금을 삼키다’라는 뜻의) ‘탄금’을 제목으로 택한 이유를 납득하게 된다. 책을 읽는 내내 가벼이 떨쳐버리기 어려운 서글픈 서정과 처절하고 애절한 운명을 이 소설은, 독자에게 감당하게 한다.

 


 

"민씨 부인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의붓딸년을 경멸스러운 눈씨로 을러댔다. 아직도 씨받이 하씨 년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 너절한 것 하나 꼬꾸라진 일로 부군께서 삼 년을 심란해하셨다. 이름 석 자 아는 것이 전부인, 예쁘긴커녕 답답한 이마에 작은 이목구비를 한, 실로 볼품없는 계집이었다. 잡스러운 딸년도 저승꽃으로 만들면 속이 다 시원할 텐데 손을 대면 부정 탄다는 귀곡자의 말에 민씨 부인은 재이가 제 풀이 꺾여 고사하길 부추기는 수밖에 없었다."(p. 110)

"그 새벽, 모닥불을 지피던 홍랑은 마침내 강물로 뛰어들어 동이 트도록 찬 물살을 거스르고 또 거슬렀다. 그때마냥 끓어오르는 흉심을 그는 모질게 다잡았다. 차마 맘껏 탐할 수 없었다. 연약하고 야들한 꽃잎은 위험천만한 독화였다. 팽그르르 돌며 저무는 낙화처럼 애련을 가장하고 있을 뿐이었다. 치명적 향취에 홍랑은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까지, 여기까지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진정 사달이 날 것이었다. 마지막 숨을 부여한 그가 독가시에 찔리지 않도록 자근자근 여인을 떼어내었다."(p. 314)

 

저자 : 장다혜

 

1980년생. 20대 초반에 작사가로 상업적 글쓰기를 시작, 30대엔 에세이스트로 활동하였고 40대가 되면서 첫 소설 『탄금』을 썼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쓰는 글의 호흡이 점점 길어졌으나 소설은 말 그대로 아직 작은 이야기인지라, 언젠가는 대설大說을 쓰고픈 욕심이 있다. 여운과 벅참의 크기가 남다른 글을 쓰고 싶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