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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밥상 - 우리의 밥상은 어떻게 만들어져 왔을까
김상보 지음 / 가람기획 / 2023년 7월
평점 :
예전에 '사극 전성시대'라고 할 만큼 각 방송국에서 사극 경쟁을 하다시피 한 시절이 있었다. TV 평론가들은 "일주일 내내 사극을 즐길 수 있는 시대"라고 평가하면서 사극이 우리가 옛날 사는 모습을 철저한 고증을 거쳐 극에 반영했기 때문으로 인기 요인을 꼽았다. '일주일 내내'란 의미는 3개 방송국에서 월·화, 수·목, 토·일로 요일을 두루 이용했기 때문이다. 시간 대도 뉴스가 막 끝난 후 '프라임 시간'이라 시청률이 높은 데 한몫 했다고 평자들은 풀이하기도 했다. 독자도 사극을 좋아했기 때문에 일부러 시간에 맞춰 TV 앞에서 충분한 시간 시청할 수 있었다. 〈대장금〉이란 프로그램은 최고의 시청률을 올리는 프로그램으로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주요 내용은 '조선 시대 왕들은 무엇을 먹었나'에 맞춰져 있었지만 높은 인기를 유지했다. 프로그램은 동남아시아 등 외국으로 팔려나가 최근까지도 그곳에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그때 독자는 양반과 일반 백성들은 무얼 먹고 살았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지만 자세하게 방송했던 사극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독자 역시 사학이나 음식을 전공하지 않았기에 그저 의문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책을 보면서 다시 그때의 궁금증이 되살아났다. 왕들이 먹은 음식이야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 중 최고의 재료로 최고의 음식 장인들이 만들어 제공했기에 신기함은 있었지만 약간의 위화감마저 느껴지기도 했다. 당시 조선 백성들은 굶어 죽는 예가 많았다고 들었는데 왕의 음식은 호화롭기 짝이 없고, 특히 듣도 보도 못한 진귀한 음식이 자주 나왔기에 하는 말이다.
이 책 『조선의 밥상』은 조선시대에 백성들이 무얼 먹고 살았나에 중심을 둔 것은 아니고, 주로 양반이나 잔치 음식 등이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어 아쉬운 대로 궁금증은 조금 면한 보람은 있었다. 어쩌면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이 양반 이상 계층의 음식이었을 것이란 추정은 쉽게 할 수 있다. 일반 백성이나 천민들이 먹던 음식을 누가 기록으로 남기지는 않았을 것이란 추측은 쉽게 할 수 있으리라. 책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이미 화려한 음식문화를 향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화려한 음식'은 모두 양반 계층에서 먹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면 맞을 것 같다. 저자 김상보는 이익의 『성호사설』에 “부유하거나 귀한 집에서는 하루에 일곱 차례 먹는데, 술과 고기가 넉넉하고 진수성찬이 가득하니, 하루에 소비하는 것으로 백 사람을 먹일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외국인의 시선에서 보아도 마찬가지였는데, 일본인이 쓴 『조선만화』에는 “신선로 속에 들어가는 국물은 소머리를 끓여서 만든 즙으로 이 속에 잣, 밤이 들어가기 때문에 맛이 있다. 신선로 냄비를 중심으로 4~5명이 둘러앉아서 먹는데, 건더기를 다 먹고 즙만 남으면 이번에는 조선 명물 우동을 넣어 끓여 먹는다. 신선로의 묘미는 이 우동을 끓여 먹는 데에 있다. 특히 기둥의 노와 냄비가 일체 되어 있는 것이 신선로의 특색이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또, 『조선의 실정』에서는 “조선인의 체격은 대개 우량하다. 키가 크고 골격도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민)족이 이러한 체질을 가지게 된 것은 일반의 풍습으로서 육식을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어육은 말할 필요도 없이 소고기, 돼지고기를 많이 먹고 있는데, 도저히 일본 민족에 비할 바가 아니며 옛날부터 조선의 집단지에는 어느 곳에도 상당의 도살장이 있다.”고 쓰여 있다. 종합해 보면, 조선시대 사람들은 하루 7끼 밥과 국수 등을 먹고, 화려한 모임 음식을 다양하게 즐겼으며, 1년 내내 고기를 즐겨 먹은 듯하다. 이때 조선 사람 중에는 양반 아래 계층은 없다. 슬프게도.
그러나 저자 김상보는 많은 자료를 취재하고 수집하고 분석 연구한 결과 이 책 『조선의 밥상』을 펴냈다. 임진왜란 이후부터 구한말까지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사람들이 요리해 먹었던 이런 다양한 음식들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동시에 음식 문화와 조선 민중의 삶에는 어떠한 관련이 있으며, 어떻게 음식 문화가 전개되어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폭넓게 예로 들어 기술하고 있다. 조선 민중의 범위는 위로는 왕에서부터 아래로는 서민까지 포함된다고 저자는 적고 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궁중의 음식 문화가 일반 서민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오늘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조선 사회는 철저한 신분제도가 사회를 유지하는 가장 큰 기틀이었다. 서양의 귀족 계급에 해당될 터다. 그런 중요한 규율이니만큼 의식주에 있어 반상의 법도가 아주 엄격했고, 일상생활의 규범에서도 세세하게 정해진 방식이 있었다. 『조선의 밥상』은 궁중, 관청, 양반가, 중인가로 나누어 왕족, 양반, 중인의 밥상을 들여다보고, 그 작은 상 안에 담긴 법도와 문화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 설명한다.
책에 따르면 조선왕조에서는 18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밥·국·반찬 모두를 포함해 왕과 왕족은 7기, 양반은 4기, 중인은 2기를 차려 먹었다. 그렇다면 ‘그 밥상을 차린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궁중에서 왕족들이 직접 밥상을 차리지 않았음은 확실하고, 궂은일은 죄다 솔거노비에게 맡겼을 종가의 귀한 마나님들이 부엌 아궁이에서 불을 때고 있는 모습도 상상하기 어렵다. 더 나아가 사무역을 통해 양반을 뛰어넘는 부를 축적하여 호사스러운 생활을 영위하던 잘사는 중인 집안의 여인들이 요리하는 모습도 잘 연상되지 않는다.
지체 높은 집안의 안채 부엌에서는 한 달에 거의 한두 번 꼴로 있는 제사에 올릴 음식과 사랑채에 든 바깥손님을 위한 음식 및 일상 음식을 만들었다. 제사음식에서 가장 중요한 떡 치는 일은 물론 남자종의 몫이었다. 그 외에 솔거노비 중 통지기라는 여자종은 물통이나 밥통을 지거나 찬거리를 사 오는 여자종이었고, 대개 밥을 하거나 장 담그고 반찬을 만드는 여자종을 식모라 불렀으며 반찬 만드는 여자종을 찬모라고도 하였다. 한편 관아와 역의 부엌에서는 주방장 격인 총책임자 칼자, 그 바로 아래 부주방장 격인 국을 끓이는 갱자를 필두로 생선을 잡아 오는 사람, 채소를 기르는 사람, 꿩을 잡아오는 사람들이 소속되어 각자 식재료 공수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결혼의 풍습도 음식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이 뻔하다. 고려시대서부터 조선 초기까지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처가살이혼은 조선시대 들어와 시집살이혼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사실 고려시대 때부터 시집살이혼으로 사회 관행을 변화시키려는 지도자들의 시도가 있긴 했다는 게 저자의 연구 결과다. 1349년 공민왕이 노국공주와 결혼할 때 북경에서 친영(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신부를 직접 맞이하는 의식)함으로써, 시집살이혼의 서막이 올랐다. 그러나 고려 말의 개혁조치는 더 이상 그 빛을 보지 못하다가 다음 정권으로 이행되었다.
고려왕조가 멸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시집살이혼이 본격화됐다고 저자는 분석하고 있다. 우리가 알다시피 삼국시대 혼인은 물론 자유혼이었다. 이때 신랑집에서는 혼례 때 드는 잔치 비용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돼지와 술을 피로연에 소용되는 ‘이바지’용으로 신부집으로 보내는 것이 전부였으며, 그 이외의 폐물을 신부집에 보내는 것은 수치스러워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가부장제가 강화되며 시집살이혼이 완벽하게 사회에 정착하게 되고, 혼례 과정에서 준비되는 음식들과 그 음식을 사용하는 관례가 변화하게 됐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그 변화한 관례들을 예식에 준비했던 음식과 더불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또 이 책에서는 조선시대의 외식 메뉴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는데, 그 묘사들이 무척 생생하고 자세하여 흥미롭다. 장시에서 판매하는 국밥을 이야기하면서 서술된 그 앞에 꽂아 놓은 소머리와 밥을 먹으면 숙박까지 가능했던 주막의 풍경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생경하기까지 하다. 가끔씩 사극에서 접하기는 했지만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을 토대로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돼 있어 이채롭다. 이 책에서는 특히 구한말 궁중음식을 술안주로 선보인 요릿집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한일합방 이후 세워진 조선식 요릿집의 대표 격인 ‘명월관’을 그 예로 들고 있다. 명월관은 궁내부 주임관 및 전선사장으로 있으면서 어선과 향연을 맡아 궁중요리를 담당했던 안순환이 1909년 지금의 세종로 동아일보사 자리에서 문을 연 곳인데, 그해 관기 제도가 폐지되고 기생조합이 생겨남에 따라 일본 요릿집에 게이샤를 두듯이 자연스럽게 관기들이 명월관에 모여들었다고 적고 있다. 이에 따라 궁중요리와 관기들이 일반인에게 공개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지체 높은 양반 집안의 여성들은 주로 집안의 음식을 관리 감독하는 역할을 하며 직접 손에 물을 묻히진 않았던 듯하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집안마다의 특색 있는 음식들과 가양주의 제조법은 어떻게 전수되어 왔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자신이 직접 만들어보지도 않은 음식 제조법을 어떻게 가르쳤으며 전승되어 왔을까? 하는 자연스러운 궁금증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조리서라 불리는 『음식지미방』은 다른 이름으로 ‘규곤시의방’이라고도 한다. 이는 ‘규방에 거처하는 부녀자가 쓴 책’이란 뜻이다. 이 외에도 『주식시의』나 『규합총서』 등과 같이 안주인이 쓴 필사본 조리서가 등장한 것은 며느리에게 술과 술안주를 포함한 집안 내력 음식에 대한 조리비법을 전하려는 시어머니들의 노력의 결과라 생각된다는 게 저자의 연구 분석 결과이다. 아울러 우리는 이와 같은 책을 통해 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즉, 비록 집안의 궂은일은 노비들이 도맡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일부 안주인들은 직접 요리하기도 했을 것이란 추측이 그리 어렵진 않다.
또 조선왕조에서는 나라에서 큰일을 치를 때 후세에 참고를 위하여 그 일의 처음부터 끝까지의 경과를 자세히 적어 책으로 남겼다. 우리들이 잘 아는 ‘의궤’이다. 이 책 『조선의 밥상』에서는 『원행을묘정리의궤』에 기록된 것을 토대로 조선시대 궁중 밥상(수라)에 올랐던 주식류, 탕류, 찜류, 구이류, 젓갈류, 나물류를 포함하여 회, 버터(수유), 포와 다식 같은 음식과 유밀과, 떡 등의 간식과 술, 계절별·절기별로 먹었던 풍류 가득한 음식까지 두루 소개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살면서 숱하게 먹어 온 자연스러운 식단부터,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생소한 음식까지 다양하게 담겨 있는 『조선의 밥상』.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우리 음식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가끔은 책에 기술된 시기와 절기에 따른 음식들의 의미를 곱씹으며 챙겨 먹어 보는 것으로 옛 풍류를 재현할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난로회란 10월 초하루에 화로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면서 먹는 모임으로, 이때 술안주로 화로 위에 올려놓은 번철 위에 양념한 소고기를 구워 먹는다는 것이다. ……전립꼴의 사면에서는 고기를 굽고, 가운데 우묵한 곳에는 고기를 구울 때 생기는 고기즙이 모이게 되고, 여기에 갖은 야채를 넣어서 잠시 끓여 먹는 음식이라는 것이다. 전철 또는 전립투는 냄비 이름이었다. ……이 전철을 19세기 말경에는 전골로 부르게 되었다.(p.198) - 「제2부 찬품 각론, 탕류」 중에서
저자 : 김상보
1986년 한양대학교 이학박사 학위 취득. 1993~1994년 일본 국립민족학박물관 객원교수. 1978~2015년 대전보건대학교 교수. 현재 전통식생활문화연구소 소장. 한국의 식음료 문화를 평생에 걸쳐 연구한 학자로, 우리 문화를 대중에게 쉽게 알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문화체육관광부 우수 학술도서’에 다수의 저서가 선정되어 그 노력을 인정받고 있으며, 현재도 전통식생활문화연구소 소장으로서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조선왕조 궁중의궤 음식문화》(1995), 《한국의 음식생활문화사》(1997), 《조선왕조 궁중음식》(2004), 《다시보는 조선왕조 궁중음식》(2011), 《약선으로 본 우리 전통음식의 영양과 조리》(2012), 《우리 음식문화 이야기》(2013), 《화폭에 담긴 한식》(2015), 《조선왕실의 풍정연향》(2016), 《한식의 도를 담다》(2017), 《전통주 인문학》(2022) 외 다수. 역서로는 《원행을묘정리의궤》, 《찬품조》, 《어장과 식해의 연구》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