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
길승수 지음 / 들녘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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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려시대에도 외적의 침입으로 전 국토가 전란에 휩싸인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인류사에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한 몽골의 칭기스칸 제국인 원(元)나라를 제외하곤 전쟁에 패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고려 시대는 옛 고구려 영토를 회복한다는 명분 아래 만주나 몽골 지역을 틈틈이 엿보며 나라의 힘을 키웠기에 가능한 일이지 않았나 싶다. 다만 우리를 침략한 거란이나 원나라도 나름 엄청나게 세력을 키워서 침략했기에 쉽게 이기지 못했고, 그나마 원 제국과의 전쟁에선 끝내 항복하고 말았다. 이 책 『고려거란전쟁』은 세력을 키워 고려를 침략했던 거란과 고려의 전쟁을 다뤘다. 고려의 북진정책 및 친송정책과 정안국에 위협을 느낀 거란이 993년(성종 12), 1010년, 1018년(현종 9)의 3차에 걸쳐 고려에 침입한 사건을 정사인 『고려사』를 바탕으로 다룬 책이다.

고려 건국 당시, 지금의 몽골과 만주지방에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중 거란족은 야율아보기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916년(발해 애왕 16) 요(遼)나라를 건국하였다.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와 국경을 접하게 되자 고려 태조는 북진정책을 추진, 발해 유민을 포섭하였다. 거란은 고구려 장수왕 때 출복부(出伏部) 등 일부가 예속되었지만 고려와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 922년(태조 5) 야율아보기가 낙타와 말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적대관계를 유지하였고, 942년 거란의 태종이 낙타 50필을 보내자 사신은 섬으로 유배보내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에서 굶겨 죽여버렸다.

 


 

이는 고려의 태조 왕건 때부터 추진한 북진정책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으로 그 뒤에도 계승되어 정종 때 광군(光軍) 30만을 조직한 것도 요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송이 건국하고 고려가 송과 화친정책을 실시하자 송은 고려와 협력하여 거란을 공격할 뜻을 비췄고, 압록강 유역의 정안국(定安國)도 송과 화친하면서 거란을 협공할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요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이에 요의 성종(聖宗)은 986년 정안국을 멸망시킨 다음 991년 위구(威寇)·진화(振化)·내원(來遠) 등의 압록강 유역에 성을 쌓고 고려 침략을 준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바로는 거란의 1차 침공(993년) 때 활약한 고려의 서희는 담판의 대가로, “거란의 소손녕이 고려를 침공하자, 서희가 담판을 벌여 소손녕을 설득해서 물러가게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길승수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말로만 얻을 수 있는 평화가 과연 가능할까? 역사학자로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게 역사 어디를 찾아봐도 말로 군사를 물려 되돌아가는 침략군은 없다. 저자는 오랜 연구와 자료 조사 끝에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장면을 다시 되돌려보도록 복원해냈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의 실제 모습을 살펴볼 때 서희가 적절히 군대를 움직여 거란군의 진격을 막아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담판이 없었더라도 거란군은 물러갔을 것이다.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은 전쟁 후 평화 조건을 정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파악해낸 것이다. 그 담판 때문에 소손녕이 물러간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잊지 않는 것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릇된 역사 서술로 잘못 배운다면 차라리 모르는 게 오히려 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역사 바로잡기의 역할도 함께 해낸 것이다.

 


 

이 책은 거란의 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빌미로 40만 대군을 앞세워 고려를 침공하고, 고려는 수도 개경을 함락당하는 부분도 잘 기술되어 있다. 이 때가 거란의 2차 침공(1010년)이다. 당시 고려에서 활약한 주요 인물이 바로 양규와 김숙흥이다. 그들이 2,000여 명의 병력으로 40만 거란군을 상대했던 장면은 지금 보아도 눈부시다. 그런데 의문이 있다. 당시 현종은 어떻게 해서 많은 신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감찬의 항전 건의를 받아들였을까. 어떤 전략이 있었던 것일까. 반면, 말과 낙타, 무기 등 거의 모두를 잃고 사실상 패전과 다름없는 상황에 놓인 거란이 그럼에도 다시 고려를 침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거란은 그 뒤로도 총 일곱 번에 걸쳐 고려를 침입한다). 고려를 둘러싼 당대의 국제정세가 어떠했기에 거란은 이토록 긴 시간 동안 한 나라를 계속 침공했던 것일까. 구주대첩(1018-1019)에서 고려의 승리를 이끈 사람은 강감찬 한 명이었을까···. 고려와 거란 사이에 벌어진 지난한 전쟁에 대해 품어볼 만한 의문은 이렇듯 한두 개가 아니다. 저자는 바로 이 같은 여러 가지 의문에 주목하여 ‘고려거란전쟁’에 대해 잘못 알려져 있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실, 그리고 진실한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썼다. 이 책의 출간 취지다.

이 책은 고려와 거란의 오랜 전쟁에 대한 진실과 사실, 그리고 숨겨진 이야기를 밝힌다. 드라마를 보는 듯 현장감을 즐기게 해주는 삽화와 당대의 지리적 요소 및 전투 상황의 이해를 높여주는 지도 배치로 역사서를 소설처럼 재구성한 것도 이 책의 독창성을 돋보이게 한다. 물론 기술도 많은 부분 드라마틱하게 재구성되었다. 물론 우리가 배운 『고려사』를 바탕으로 저자가 작가적 상상력을 가미한 것일 뿐 허구의 사실이 아님을 미리 밝혀둔다.

 


 

고려와 거란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 대해서는 그간 ‘사료(史料) 부족’을 이유로 깊이 다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물론 이 점은 고려사 전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한계로, 조선사에 얽힌 온갖 장르의 결과물은 많아도 고려사를 바탕으로 한 결과물은 상대적으로 빈약한 배경이기도 하다. 저자 길승수는 그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고려사(高麗史)』, 『요사(遼史)』, 『송사(宋史)』 등을 꾸준히 공부하여 당대의 상황을 파악하였고, 흔히 역사책을 “읽기 어렵다”고 하는 독자들의 선입견을 깨기 위해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되 내용에 좀 더 흥미롭게 다가갈 수 있는 몇몇 장치를 마련했다.

첫째, 주요한 장면의 이해도를 높이고 독자의 친근감을 배가해주는 요소로 ‘대사’를 활용했다. 극적인 장면의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대본처럼 대화체를 곳곳에 배치했다는 것이다. 둘째, 드라마틱한 내용을 삽화로 구성하여 마치 영상을 감상하는 듯한 재미를 주었다. 요즘 애니메이션 기법을 도입했다는 의미다. 셋째, 당대 상황과 정치지형 및 전투루트 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꼼꼼히 재현한 지도를 그려넣었다. 이는 역사적 팩트에 충실하되 흥미를 잃지 않는 역사서를 구성하기 위해 무려 14년이란 시간을 바친 역작을 남긴 이유로 그대로 작용한다. 아주 특별하고 흥미로운 장르의 역사교양서 『고려거란전쟁』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 책 「밀어붙여, 우린 할 수 있어!」란 제목의 〈프롤로그〉부터 고려거란전쟁이 한참인 듯한 급박한 상황이 대화체로 통해 시작한다. 1019년 2월 1일 검차를 밀고 있는 고려 군사들은 훗날 구주대첩이라고 불리게 될 전장에 서 있었다.

 


 

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격려했다. 하나가 되어,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사용할 순간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가족이나 친구들을 거란군에 잃은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무너질 수도 없었다. 거란군의 침략은 벌써 10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었다. 거의 매년 거란은 고려을 침략했고 무수한 고려인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특히 9년 전(1010년), 3년 전(1016년)에는 양측의 주력군 간에 대규모 회전이 벌어졌었다. 그 두 번의 전투에서 고려군은 모두 패해서 수만 명이 전사했다. 이 전투에 고려의 운명이 달려 있었다. 이번에는 달라야 할 터였다. 그때 북쪽에서 불던 바람이 갑자기 방향을 바꿔 남쪽에서 불어오기 시작했다. 총사령관인 강감찬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가 때먗춰 왔군~"(p.12~13)

이 책은 모두 5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왕좌를 향하여」, 2장 「제 1차 고려거란전쟁」, 3장 「영웅들이 나타나다」, 4장 「계속되는 위기」, 5장 「구주대첩」 등이다. 1장에서는 고려 건국 때부터 국내 정세와 중국 대륙을 비롯한 주변국의 정세가 잘 나타나 있다. 쉽게 말해 국제 정세가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그 변화가 고려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아볼 수 있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저자가 이를 놓칠 리 없다. 가능한 한 사건은 정사에 따르고, 각각의 상황을 표현할 때는 심리적 묘사나 행동의 변화 등을 자세하게 전달하기 위해 대화체로 드라마틱한 부분을 강조한다. 독자로서는 편하게 읽고 드라마를 통해 역사 지식과 이해를 넓힐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고려가 건국할 무렵 야율아보기가 순식간에 거란족을 통합하고 주변 부족들을 정복해나갔고 발해와도 지속해서 전쟁을 벌였다. 책에 따르면 915년에는 압록강까지 군대를 몰고 왔으며, 917년에는 만리장성을 넘어 유주(지금의 북경 부근)를 공격했다. 거란을 통합한 야율아보기는 924년과 925년에 걸쳐서 지금의 몽골을 지나 3,000km를 행군하여 부도성이라는 곳을 점령한다. 이로써 서쪽 부족을 모두 복속시켜 동서교역로를 장악하게 된다. 국력을 키운 거란은 곧바로 발해로 말머리를 돌려 불과 한 달만에 속수무책의 발해를 멸망시킨다.

 


 

고려는 건국한 후 꾸준히 왕권 강화와 국력 신장을 추구했다. 태조 왕건의 고구려 옛 영토 회복이라는 명분에 따른 것이다. 960년에는 이윽고 중국 대륙이 다시 송나라로 통일된다. 거란의 수 차례에 걸친 침략을 근근이 막아내던 고려에 최후통첩이 도착했다. 1018년 12월 21일경, 거란군이 개경으로 오고 있다는 첩보가 도착했다. 극도로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고려 조정에서는 거란군의 진젹을 막기 위한 시도를 계속했다. 개경에 있던 모든 가용 자원을 끌어모아 자비령 등 험준한 길을 막아서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거란군은 거침이 없었다. 12월 28일경,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은 자비령을 통과했다. 이제 개경의 문 앞까지 온 것이다. 거란군을 막을 수단은 아무것도 없었다. 서경에서 패한 지채문이 그 전날 개경에 들어와 있었다. 지채문은 카탄에서 패한 사실을 현종에게 보고했다. 그 보고를 들은 신하들은 항복할 것을 발의했다. 거란군이 고려의 모든 방어계획을 돌파하여 개경에 이르자, 조정의 중론은 항복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태조 왕건이 삼한을 통일하고 나라를 건국한 지 백여 년, 그동안 고려는 큰 위기 없이 성장해왔다. 17년 전 거란의 소손녕의 침공이 있었으나 잘 극복해내었고, 거란의 재침에 대비하여 서희가 주도해서 방어계획을 만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항복하면 고려의 운명은 끝이다.

항복을 주장하는 대신들 사이에서 왜소한 늙은 관료가 현종을 바라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신, 강감찬,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63세 예부시랑 강감찬. 강감찬은 성종 2년(983년)에 장원급제를 해서 27년 동안 관직을 이어어고 있었다. 평범한 관료에 불과했지만 위기 상황이 찾아오자, 그의 강인함과 비범함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일은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우리의 군세가 적어 적들을 상대할 수 없으니 일단 예봉을 피해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현종이 말했다. “시간을 번다고 거란군을 물리칠 수 있겠소?” 강감찬이 힘주어 말했다. “시간을 번 뒤에, 서서히 이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p.179)

 


 

팽팽했던 승부의 추는 이제 고려 쪽으로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드디어 거란군 진영이 무너졌고 거란 군사들이 무질서한 패주를 하기 시작했다. 소배압은 명령을 내려 상황을 수습해보려고 했지만, 이미 패신의 광풍이 거란군을 휩쓸고 있었다. 소배압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소배압은 갑옷과 병장기를 모두 버렸다. 갑옷은 패주하는 데 아무런 쓸모가 없는 물건이었다. 거란군 총사령관 소배압은 전장을 떠났다. 거란군들은 무작정 북쪽으로 내달렸다. 고려군들은 그런 거란군을 추격하며 주살했다. 거란이 패주하면서 버리고 간 무기와 갑옷들로 다니는 길이 막힐 지경이었으나 고려군들은 악착같이 거란군을 뒤쫓았다. 거란군 10만은 이 전투에서 대개 죽거나 사로잡혔다. 거란으로 무사히 돌아간 인원은 수천 명에 불과했다. 거란군이 이토록 참혹하게 패배한 것은 거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고려 입장에서는 이때까지의 패배를 모두 설욕하고도 남는 대승리였다.(p.311)

 

저자 : 길승수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역사 콘텐츠를 좋아해서 역사학과와 관련 학과를 다녔다. 어느 날 역사 소설을 쓰기로 결정하고 ‘고려와 거란의 2차 전쟁’을 다룬 소설 《고려거란전기, 겨울에 내리는 단비》를 썼고 후속작품인 《고려거란전기, 구주대첩》을 집필 중이다. 방송활동으로는 역시 고려거란전쟁을 다룬 〈JTBC 평화전쟁1019〉에 작가와 자문으로 참여했으며, 2023년 11월에 방영 예정인 KBS 대하사극 〈KBS 고려거란전쟁(가제)〉에 원작자와 자문으로 참여하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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