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보지 말 것 - 미니어처 왕국 훔쳐보기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 그늘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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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책 『열어보지 말 것』에서 가장 중요한 물상인 '상자 속 미니어처 왕국'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어릴 때 많이 읽었던 동화 속 세계를 그리는 소설 같은 느낌이다. 요즘은 우리가 읽었던 동화 중 상당수가 '잔혹 동화'였다는 사실이 동심의 세계를 와장창 깨뜨렸지만···, 판타지 소설로 멋진 세상을 그리는 것은 동심이 아직 남아 있어서일까? 여전히 독자의 궁금증과 호기심을 자극한다. 판타지가 아니더라도 독자 입장에서는 관계 없다. 그리스 신화 속 '판도라의 상자'처럼 신비감은 오히려 증폭되니까.

이 소설 작품은 현실과 환상이 맞닿는 문턱에서 시작된다. 폭우 속에서 주운 상자 속 ‘미니어처 왕국’을 들여다보는 소년의 이야기부터 흡혈귀의 기억, 멈춰버린 평원, 기묘한 로봇과 불사의 약, 그리고 알 수 없는 대륙 너머로 떠나는 여정까지···. 세계관을 공유하는 소설 속 여섯 편의 이야기는 모두 독립적인 서사를 품고 있지만 정교하게 맞물리며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된다. 시작은 작은 상자 하나이지만, 현실과 비현실, 관찰과 개입, 성장과 상실이라는 목표로 나아가기 위해 세계관을 밀도 있게 쌓아 올리는 보기 드문 작품이다. 일본의 스타 소설가이자 이 작품의 저자 쓰네카와 고타로는 마치 정교한 축소 세계를 조립하듯 판타지적인 상상력과 심리적 섬세함을 오가며 다층적인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단순히 환상이나 탈출의 판타지가 아니라 우리가 마주해야 할 세계를 ‘다른 시선으로 보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책이라는 평가는 이미 출판사 소개글에도 있다. 여섯 편의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를 연결하는 서사의 조각들은 현실의 답답함을 해결하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묻는다. ‘관찰자’로 머물 것인가, ‘변화’의 일원이 될 것인가?

이 책은 6장(章)과 다섯 개의 '이야기의 조각'이 연속적으로 되풀이되며 전개된다. 이러한 형식은 신비감이나 환상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소설의 끝까지 이어 나가는 데 매우 유용하다. 책 표지는 물론 앞 부분의 일러스트는 환상의 세계를 연상시킨다. 매우 간단한 표제어 '열어보지 말 것' 역시 신화적 요소와 맞물리며 궁금증을 한껏 끌어 올린다.


앞서 언급한 대로 여섯 개의 장은 〈상자 속 왕국〉, 〈스즈와 긴타의 은시계〉, 〈단시간 접착제〉, 〈통찰자〉, 〈내추럴로이드〉, 〈끝없는 대륙, 불멸의 야차〉라는 제목으로 더욱 신비로운 느낌이다. 각 장의 끝 부분에 이어지는 다섯 개의 '이야기의 조각' 역시 각각의 제목을 갖고 있다. 「흡혈귀의 여행」, 「정지된 평원」, 「가이다 사이이치로의 아침」, 「팬레터」, 「땅끝에서 미지의 세계로」 등이다. 

소설은 작고 평범한 상자 하나로부터 시작된다. 주인공 소년은 어머니를 잃었던 어느 폭우의 날, 진흙더미 속에서 나무 상자를 하나 줍는다. 그런데 그 상자 속에는 정교하게 움직이는 세계가 하나 존재한다. 숲과 마을, 사람, 성, 그리고 용과 흡혈귀까지. 미니어처 왕국처럼 보이는 그 세계는 실제처럼 살아 숨 쉰다. 처음에 단순한 관찰의 대상에 불과했던 그 세계는 점차 소년의 유일한 탈출구가 되고, 곧이어 다른 인물 ‘에카게 구미’를 통해 진짜 전환점을 맞는다. 과 연… 우리는 상자 속 세계로 들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여섯 편의 이야기는 모두 세계관을 공유하지만 서로 다른 서사를 풀어낸다. 그리고 다섯 개의 조각 이야기들이 이 모든 서사를 엮어 하나의 세계관으로 완성해 낸다. 각 이야기는 독립적으로 읽히나 서로의 파편을 반사하며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구성한다. 독특하면서도 유기적 구성이다. 특히 상자 속 세계의 흥망과 혁명은 단순한 판타지를 넘어 마치 우리가 사는 사회의 구조나 윤리, 권력을 반영하는 듯하다. 어쩌면 저자가 현실감을 불어넣기 위해 집어넣은 듯하다. 일본의 스타 작가이자 이 소설의 저자 쓰네카와 고타로는 이 모든 것을 ‘작은 것’에서 시작한다. 관찰만 하던 인물이 결국 변화에 개입하고, 상자 속 미니어처 왕국은 더 이상 모형 세계가 아닌 거대한 서사의 무대로 확장된다.


이 소설 작품은 작은 것을 열었을 때 일어나는 세계의 균열과 진화를 담아내고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진정한 울림은 단지 환상적인 설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선택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책의 제목은 ‘열지 말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곧 알게 된다. 상자를 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결국 모든 이야기는 작게 열린 틈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은 작은 상자로부터 하나의 세계가 태어나고, 발전하고, 붕괴하는 과정을 압축적으로 그려냈다. 

처음에는 단순히 정교하게 꾸며진 상자 속 모형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분명 권력 구조와 계급 질서, 저항과 억압이 자리한다. 미니어처처럼 보였던 세계는 곧 ‘살아 있는 왕국’이 되고, 우리는 그 흥망성쇠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저자는 이 상자를 통해 문명 단위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환상 세계를 마치 역사 다큐멘터리의 형식으로 설계해 낸다. 판타지 장르에서 보기 드문 ‘세계 자체를 주인공으로 삼은 서사’다.

작품의 주요 전환점은 에카게 구미라는 인물을 통해 발생한다. 관찰자였던 주인공의 시선은 그녀의 행동을 따라 적극적인 개입의 방향으로 바뀐다. 현실에서 폭력과 외면에 시달리던 에카게는 상자 속 세계로 들어가 민중을 조직하고, 왕권을 몰아내며, 결국 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봉기에 앞장선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움직이지 못하니 불쌍하다, 삶을 살아갈 수 없으니 불쌍하다, 저들도 움직이고 싶을 텐데, 라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시간이 정지된 자들은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습니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고, 뇌파도 사고도 없으니까요. 저들의 입장에서는 고통도 불행도 없는 셈이죠.”(p.169)


붕괴는 우리가 흔히 비슷한 구조의 소설에서 보아왔던 영웅 서사라기보다 문명의 재구성에 가까운 느낌이다. 이와 유사한 감각은 마지막 장 「끝없는 대륙, 불멸의 야차」에서도 반복된다. “문명이 정점에 달했을 무렵, 세계의 종말이 가까워졌다. (중략) 음악도, 문학도, 건물도, 조각도. 유일하게 기계 생명치엔 시그마만이 그 모습을 관망했다.” 

이 문장은 인간이 구축한 세계가 어떻게 무너지는지, 그걸 덤덤하게 바라보는 소설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 책은 결국 작은 상자 안에서 하나의 문명을 일으키고, 해체하고, 다시 쓰는 이야기다. 작가는 단지 인물을 움직이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 자체가 어떻게 움직이고 멈추는지를 거시적인 시선으로 보여준다. 상자는 유한적인 공간에 불과하지만, 동시에 구조이며, 그 안의 변화는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비춘다. 왕국이 무너지는 순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이 이야기는 작은 개인의 서사가 아니라 완성된 세계의 흥망사라는 것을 말이다.

이 책 『열어보지 말 것』은 표면적으로 이세계 판타지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보는 자’와 ‘믿는 자’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섯 편의 단편에는 각기 다른 기묘한 물건이 등장한다. 

상자 속에는 친절한 흡혈귀와 용이 사는 왕국이 펼쳐진다. 시간을 이동하는 시계, 자아를 가진 로봇, 불사의 묘약. 신들이 잃어버린 왕국 속 물건이 우리의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스위치를 가진 자만이 볼 수 있는 상자 속 미니어처 왕국. 연결된 세계관을 따라 맞춰지는 이야기의 조각! 미지의 세계, 끝내 단 한 곳을 가리키는 여섯 편의 모험담! 이 물건들은 단순한 환상 장치가 아니라 ‘인간’에게 경계 너머의 세계를 ‘보는 능력’을 준다. 하지만 이러한 능력은 마냥 축복이라고만 할 수 없다. 오히려 질문에 더욱 가까울 수도 있겠다. 이 소설은 무언가를 본다는 관점보다는 행동이 더 깊은 윤리적 혼란을, 그리고 세계의 질서를 깰 수 있음을 보여준다.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은 신의 선물처럼 보이는 물건을 손에 넣는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무엇을 할 것인가?’ 보다 ‘무엇을 보았는가?’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보다는 '이세계'의 작동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믿는 자들은 물건을 쟁취할 수 있고, 그것을 쟁취하여 '이세계'의 그림자를 본 자만이 흔들린다. 이 소설 작품이 무섭도록 집요하게 파고드는 건 보는 자, 그리고 믿는 자의 불안정한 마음이다.

그러니 결국 이 세계라는 건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결핍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기묘한 물건들이 열어젖히는 세계는 환상적이라기보다 해석 불가능한 현실의 거울에 가깝다. 상자, 시계, 로봇, 묘약 등은 모두 인간의 결핍을 확대할 뿐이다. 기묘한 신의 물건들은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 보는 자는 점점 말을 잃고, 믿는 자는 끝내 자신을 잃게 되는 이야기의 장이 여기에 있다. 

이 소설은 무언가를 초월하는 판타지적인 서사라고만 단정 지을 수 없다. '이세계'는 멀리 있는 미지의 공간이 아니라 우리가 끝내 이해하거나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뒷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책장을 덮을 때쯤, 이 책은 질문을 한 가지 남긴다. “당신은 그것을 믿는가? 아니면 단지, 보고만 있는가?”


“시간은 지금부터 일주일 주겠네. 일주일이 지나면, 상금 이야기는 없던 일이 되는 거야. 그리고 그 뒤에 내가 자네의 방이든 어디든 상자를 발견한다면, 그땐 어떤 핑계를 대도 소용없어. 자네는 범죄자니까. 나는 ‘발견한’ 사람에게는 엄청난 보상을 할 테지만, ‘훔친’ 사람에게는 아주 지독하게 대할 셈이거든. 만일 경찰이 개입한다면 고등학교는 꿈도 못 꾸겠지. 자넨 퇴학이야. 그러니 신중하게 선택하게. 모두가 불행해질 선택은 나도 바라지 않아.”(p.46)


“모든 생물이 죽음을 맞이하고 세계가 어둠에 잠기고 나면, 파괴의 혼돈기가 시작돼. 지각 변동이 일어나지. 땅이 갈라지고, 산은 무너지고, 생물은 이미 멸종되고 없는 상태에서 문명 역시 대부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미증유의 지각 변동과 폭풍이 계속될 거야.”(p.401)


저자 : 쓰네카와 고타로


1973년 도쿄에서 태어나 다이토분카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여행을 하면서 프리터 생활을 했지만, 데뷔작인 『야시』로 '놀라운 발상 전환의 재능을 가진 작가'라는 찬사를 받으며, 2005년 제12회 일본호러대상을 수상하며 일본 문단에 등단했다. 2005년 데뷔작 『야시』는 제134회 나오키상 후보에 오르는가 하면 제12회 일본호러대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의 짧은 소설은 호러 소설보다는 환상소설에 가깝다는 평가를 들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가 소설 속에 담고 있는 세계는 무엇인가를 사지 않고는 벗어날 수 없는 기괴한 공간임과 동시에 현실과는 너무도 다른 신비로운 세계이다. 그래서 책을 놓은 후에도 그 기이한 세계에 대한 깊은 이미지를 각인하게 되는 그만의 상상력과 그것을 펼쳐내는 전개력에 독자들은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우리가 딛고 있는 현실과는 너무도 다른 이야기, 그것을 통하여 미로처럼 헤메이는 우리의 욕망과 운명을 그려내고 있는 작가이다. 

스티븐 킹과 미야자와 겐지를 좋아하는 그는 두 번째로 쓴 장편 『천둥의 계절』로 2006년 제20회 야마모토 슈고로 상 후보에 오르며 단숨에 주목받는 작가로 떠올랐다. 『가을의 감옥』은 2007년 제29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신인상에 후보에 오른 작품으로 각기 다른 상황에 처한 주인공의 '고독'을 테마로 다룬 작품집으로, 작가의 독특한 작품세계가 다층적인 시공간으로 확장되며 발전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초제』는 제22회 야마모토 슈고로상 후보에 오르는 등 문단의 주목을 받아왔다. 

『금색기계』는 당대 최고의 작가들이 거쳐간 미스터리 분야 최고 권위상인 2014년 제67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하며, 완벽하게 새로운 세계의 판타지만들어냈다는 평을 받았다. 『멸망의 정원』은 한 해 동안 출간된 문학 작품 중 ‘가장 재미있는 소설’에 시상하는 2018년 제9회 야마다 후타로상 최종 후보로 선정된 작품이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놀라운 세계관을 보여주며, 평단의 인정과 독자의 지지를 동시에 끌어냈다. 대조적 세계관을 제시한 것은 물론, 긴장감과 감동까지 더한 전례 없는 디스토피아 소설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현재, 호주 여행에서 만난 아내와 함께 오키나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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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이 차오르는 중입니다
서윤빈 지음 / 열림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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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유례없는 폭우와 기록적인 폭염. 인류 존속의 위기라고 구호처럼 외치던 일들이 지구촌을 덮치고 있다. 가끔 벌어지는 이상 기후가 아니다. 나라 안팎이 온통 기후 재앙으로 지구가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현실감이 느껴질 정도다. 이젠 봄 여름 가을 겨울이란 계절의 구분도 무색하다. 기후 재앙이 일상이 된 세상이다. 그래도 "살아 있는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처절한 각오로 지구촌 인류는 삶을 영위하는 형국이다. 이 책 『종말이 차오르는 중입니다』는 Cli-fi SF(기후 소설)로 새로운 장르로 분류된다. 기존의 '기후 재난'이란 과학 소설(SF) 가운데 가장 핫한 장르가 된 듯하다. "기후 위기는 지금 인류의 존속을 위협하는 최대 재앙이다"는 경고를 수십 년 전부터 지적되었지만 정작 마땅한 대안은 없어 보인다. 기후변화협약 등 수많은 기후 위기를 대처해 어느 정도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근본적인 대책은 되지 못한다. 특효약 없는 질병처럼 느껴진다. 함께 살아가야 할 것이란 예측에 아연실색하면서도, 인간의 능력으로 해낼 수 있을까?란 질문에 '할 수 있다'는 답변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이미 해수면 상승으로 도시의 절반이 물에 잠기고 있는 도시들이 현실에도 있다. 인도양의 휴양지 '몰디브'와 태평양의 투발루·나우루·키리바시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조금씩 그 면적은 넓어진다. 북극의 빙하가 녹아 내린 것뿐만 아니다. 태평양의 비는 훨씬 더 자주, 오래, 거세게 내린다. 수증기 양이 훨씬 많다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이제 장화를 신고 걷기보다 배를 타고 이동하는 쪽을 더 자주 택해야 하는 세상에서 살아간다. 그렇게 '조금 더' 심각해진 현재가 되어버린 세상은 당연하다는 듯 재난을 일상처럼 받아들인다. 저자 서윤빈은 그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다. 연작소설이면서 풍자소설처럼 현실을 찌르는 묘사가 잔잔하면서도 강렬하게 다가온다. 

지구촌 마지막 남은 도피처에서 아직은 숨쉬는 인간들이 살아 있지만, 검게 변해 버린 해변의 모습은 하루하루가 지옥처럼 느껴질 정도다. 다행스럽게도 이 작품은 검은 모래사장의 재앙 속에서도 서로를 향해 손 내미는 ‘모래알들의 연대’를 보여준다.


누군가는 아픈 엄마를 돌보며 정체불명의 생선을 배달하고, 누군가는 수장된 아이의 관이 다시 떠오르는 걸 지켜본다. 또 누군가는 기이한 생물이 드나드는 집에서 오래전 할머니와 어머니가 남긴 일기를 읽는다. 검게 변한 해변은 사람들의 피부를 녹이고, 젊은이들은 그 안에 매장된 희망을 캐러 향한다. 

모든 구분이 무화되고 일종의 순환이 가속화되는 세계에서 누군가는 실종된 이의 이름을 간절하게 외친다. 이들의 서사는 “당신의 일이었다는 사실조차 희미해진 기억들”을 끄집어내며, 파국 속에서도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인물들의 감각에 집중한다. 종말은 더 이상 먼 미래의 파국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조용히 밀려오는 파도처럼 우리 곁에 '차오르고' 있다. 

삶은 끝을 지나 또 다른 끝을 향해 나아가며, 흩어진 감각들은 서로를 건너다보는 법을 배운다. 이 소설 작품집은 기후 재난과 불평등, 그리고 그 안에서 생존을 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비현실적인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끝까지 견딜 수 있을까.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대상 수상 작가 서윤빈이 낸 첫 연작소설집이다. 이 작품집은 기후 위기 이후 대한민국 사회를 배경으로, 재난 속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인물들의 단면을 피카레스크 형식으로 엮어 낸다. 모두 7편의 소설이 서로 서로 연결되는 내용이 등장한다. 편지, 공문, 일기, 르포르타주 등 각기 다른 형식을 취하면서도, 재난 이후의 일상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감각의 균열을 중심에 둔다.

‘후무후무누쿠누쿠아푸아아’라는 이름을 가진 정체 모를 생선, 발코니에 가득한 날치 사체의 비린내, 다코야끼 반죽처럼 흘러내리는 피부, 집이 떠오를까 봐 집 곳곳을 밟으며 돌아다니는 가족, 죽은 아이가 든 관에 몸을 묶고 항해를 떠나는 남자, 무엇이든 분해해서 신이라고까지 불리는 청소부 등 과장된 재난의 장면들을 현실적으로 겪어 내야 하는 인물들이 이곳에 있다. 배달 노동자가 폭우를 무릅쓰고 물을 헤치며 도착한 고급 아파트 단지는 높은 담 안에서 무심하고 평화롭다.


홀로 남겨진 남자를 찾아오는 것은 사이비를 포교하려는 남녀뿐이다. 오염된 것이 분명한 악취 가득한 해변은 멋진 사진이 찍힌다는 이유로 명소가 된다. 도시가 물에 잠기자 집값을 형성하는 중요 요인은 땅의 높이가 된다. 무력한 청년들은 도박에 빠지거나 스스로 실험체가 되어 시간을 죽이고자 한다. 모든 걸 분해할 수 있다는 ‘청소부’의 메커니즘은 베일에 싸여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은 계속해서 어디선가 읽었거나 들은 이야기 혹은 지식을 중얼거리지만, 그 공허한 말들은 유기적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미끄러지며 아무것도 바꾸어 놓지 못한다. 이야기는 재난의 원인을 추적하기보다, 각기 다른 위치에서 그것을 감당하는 사람들의 선택과 감각에 주목한다. 

기후 재난 서사 속에서도 일상적으로 파고드는 감정, 접촉, 기억의 흐름을 따라간다. 이 인물들은 어떤 특별한 영웅이 아니라, 익숙한 일을 계속해 나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손을 내밀고, 망각된 이름을 부르며, 이어질 수 없는 것을 잠시나마 이어 본다.

저자는 재난 이후의 세계를 단지 인간 중심으로 그리지 않는다. 사물과 목소리, 기억과 죽음까지도 하나의 유기체처럼 연결되는 이 풍경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가 이미 달라졌음을 말해 준다. 게다가 작가는 이 연작소설을 통해 재난의 위협이 동등하지 않게 다가오는 현실을 보여 준다. 어떤 이에게는 생존이 가능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그것마저 불가능하다. 


그날 이후로 이미지 씨는 틈날 때마다 해변을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 남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막상 해변을 계속 바라보면서 그녀가 발견한 것은 예상한 것보다 더 기이한 현상이었다. 여태까지는 단지 사람이 많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늘 같은 사람들이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나와서 햇볕을 쬐고 있었다. 해변을 따라 늘어선 관목이 되고 싶기라도 한 걸까. 여름이었는데도 이미지 씨는 목덜미를 스치는 서늘함에 두 손으로 목을 감쌌다.(p.99)


그 차이를 지우지 않으면서도, 연결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인물들의 흔적을 조용히 따라간다. 세계는 이미 달라졌고, 이 책은 그 안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는 사람들’의 작은 움직임을 기록한다. 이것은 생존을 감행하는 이들의 이야기이자, 세계가 끝나고도 남아 있는 감각에 대한 기록이다. 저자는 이 소설집을 통해 지금-여기의 재난을 예고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것을 통과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목소리를 건져 올린다.

이 책은 7개의 단편 소설이 연작으로 이어져 있다. 각 단편마다 따로 제목이 있으며, 내용은 서로 연관성이 있다. 각 소설마다 한 장(章)씩 7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게」, 2장 「농담이 죽음이 아니듯 우리는 땀 대신 눈물을 흘리는데」, 3장 「트러블 리포트」, 4장 「애로 역설이 성립할 때 소망의 불가능성」, 5장 「리버사이드 아파트 여름맞이 안전 유의 사항」, 6장 「생물학적 동등성」, 7장 「생물학적 동등성」 등이다. 

「게」는 폭우 속에서 정체 모를 생선을 배달하는 라이더의 모습이 눈에 띈다. 

".내게는 눈도 없고 귀도 없으나 그렇기에 온몸으로 세계를 받아들인다. 내 세계는 당신의 기억이다. 당신이 잊었거나 꿈이라고 여길 뿐인 기억들.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와 뒤섞여 이제는 당신의 일이었다는 사실조차 희미해진 기억들. 그것들을, 나는 당신을 대신해 기억한다."(p.9) 2장 「농담이 죽음이 아니듯 우리는 땀 대신 눈물을 흘리는데」에는 발코니에서 떠나보낸 아이의 관이 계속해서 되돌아오고, 그 관을 계속해서 다시 떠내려 보내는 아버지의 모습이 담겨 있다.


아이를 보내신 분께. 협박인지 무단 투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아이를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두 번이나 보내신 걸 보면 뭔가 의도가 있는 것 같은데 저로서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다시 보내신다면 경찰을 부르겠습니다. 현명하게 처신하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ETA 드림.(p.51)



3장 「트러블 리포트」에는 숨이 멎을 정도의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검은 해변 '블랙번'. 그런 해변에 중독된 사람들과 녹아내리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슈슈가 블랙번 해변에 터를 잘 잡았다고 여길 무렵 인간들이 나타났다. 인간들은 훌륭한 번식의 매개체이긴 했다. 인간을 타고 포자들은 해변을 넘어 더 멀리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들은 슈슈를 밟아 죽이는 폭력적 존재이기도 했다. 밝힌 슈슈는 터져 죽었다. 인간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슈슈들의 시체가 공기 중에 흩날렸다. 슈슈의 터진 사체에 사람의 피부를 녹일 정도의 유독성이 있는지까지는 샤오밍도 아는 바가 없었다. (중략) 자연에 조화 따위는 없습니다. 모든 건 생존 투쟁일 따름이지요. 상대를 미워하든 말든 아무 상관 없습니다. 무릇 미움 없이 죽고 죽일 때 더 많이 죽이기 마련입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땅에는 끝날 때까지 투자하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겁니다."(p.107~108) 

또 4장 「애로 역설이 성립할 때 소망의 불가능성」 주변이 전부 물에 잠겨버린 빌라에서 3대째 살아가는 한 가족의 기록을 담았다. 5장 「리버사이드 아파트 여름맞이 안전 유의 사항」은 4월 평균 기온 35℃를 넘는 시대에 한 아파트의 공고문으로 붙어 있는 내용이다. 이밖에 6장 「생물학적 동등성」과 7장 「생물학적 동등성」은 동명 제목이지만 내용은 다르다. 6장엔 석유가 나온다는 블랙번에 가고 싶어 하는 생동성 실험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자가 나오고, 7장은 실종된 남편을 찾아다니는 '지연'. 도시의 쓰레기를 먹고 다니는 거대한 거머리처럼 생긴 덩어리의 청소부가 각각 등장한다.

연구원의 태도에는 정확히 어떤 종류라고 콕 짚기 힘든 무심함이 배어 있었다. 세상의 안전한 테두리를 피부처럼 받아들여 한 번도 그 영역 바깥으로 나가거나 곤란함에 처해 본 적 없는 듯한 무구함이랄까. 그에게는 늘 어디선가 보호받고 있다는 기색이 묻어났다. 사람에 따라 거기에 순수함이나 쾌활함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연이 느낀 건, 일종의 담장이었다.(p.230)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소설집은 대한민국의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기후 재앙 SF 연작소설'이다. 책 속 일부 내용은 미래가 아니라 현실인 듯한 착각마저 일으키기도 한다. 어쩌면 저자가 의도적으로 현실의 이야기를 끼워넣었을지도 모르겠다. 기후 재앙은 올 여름 우리나라 전부를 폭염과 폭우로 마치 지옥불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에 더욱 실감이 간다. 현실을 찌르는 묘사가 잔잔하면서도 강렬하게 다가온다. 

책을 읽어 갈수록 '2025년 대한민국의 기후는?'라는 생각이 계속됐다. 기온이 39도까지 오르고 도로가 잠기고 물이 역류하는 뉴스가 매일같이 들리는 요즘이다. 지구 어딘가에서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고, 또 어디선가는 폭염으로 수십 명씩 죽어나가고... 예전에 디스토피아 소설에서 보았던 폐허과 감염병, 그리고 동식물이 보이지 않는 도시의 모습. 현실과 가까운 미래의 경계선에 선 듯한 모습이다. 때문에 책 속의 각종 장치나 표현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듯하다. 들이 허구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소설 속 인물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즐겁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라 대부분 생존을 위한 버티기인 것처럼 보인다. 

독자의 상상력으로는 소설 속 인물과 현실 속 독자들이 혼동해도 좋을 만큼 비슷한 생각이어서 소설 속 문자는 생생하고 꿈틀거린다. 생존을 위해 빗속을 뚫고 배달을 하거나 생체 실험의 피험자가 되거나, 오래된 아파트 안에서 죽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우리들의 현실과 너무나 닮아 있다. 이들은 우리 주위의 평범하고 소시민적 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의 이웃이기도 하다. 예견된, 가까운 미래의 고통을 미리 알고 대비해야 한다는 게 저자의 글 속에 감춰져 있는 듯하다. 


밝아서 보이지 않는 빛. 세상은 시작과 동시에 끝났다. 박수를 치는 것처럼. 남은 소리가 메아리쳐 돌아오는 시간. 우주. 고요한 우주. 사진과 영상이 구분되지 않는 우주. 단 한 번의 두드림. 그것은 시간. 약한 두 번째 두드림. 그것은 방향. 영원이 끝나고도 남아 있는 것. 어머니 슈슈. 모든 그림자의 기원.(p.257)


저자 : 서윤빈


고려대학교에서 전기전자공학을 전공했다. 전깃줄이 하늘을 일곱 조각으로 잘라놓은 걸 보다가 문득 소설을 쓰게 되었다. 완전 힙합 같은 글을 쓰고자 하며, 유머를 잃지 않기 위해 늘 수련하고 있다. 특별히 불행할 이유가 없는데도 우울한 청소년기를 보냈던 기억에 청소년 소설을 쓰게 되었다. 스스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청소년들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지면 좋겠다. 2022년 「루나」로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소설집 『파도가 닿는 미래』 『날개 절제술』, 장편소설 『영원한 저녁의 연인들』 『유니버셜 셰프』, 동화 『장난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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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 심리학 개념어 사전
대릴 샤프 지음, 고혜경 옮김 / CRETA(크레타)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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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이 책 『융 심리학 개념어 사전』은 카를 구스타프 융이 사용한 용어와 개념어만을 모아 정리한 사전이다. 국내 최초의 사전이라고 한다. 오늘날 대중에 널리 쓰이는 MBTI 모델의 원형이 되는 유형학을 제시한 융이 다루는 핵심 용어를 융 전집에서 직접 발췌한 원문과 함께 소개한다. 무의식, 자아, 페르소나, 그림자, 아니마/아니무스, 자기(self) 등 융의 주요 개념들을 융이 직접 전하는 목소리로 접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융의 사유와 개념의 맥락을 체감할 수 있다. 

출판사의 소개글에 따르면 지금까지 심리학 전반을 다룬 사전은 있었지만, 융의 개념어만을 집중적으로 다루며 원문과 함께 해설한 작업은 이 책이 처음이다. 사전의 형식을 취했지만 단순한 정의에 그치지 않고, 각 개념어는 융이 실제로 사용한 서술과 맥락 속에서 개념을 이해하도록 돕는다고 밝힌다. 이 책은 내면으로 눈을 돌려 자기탐색의 영역을 무의식으로 확장하려는 이들에게, 융이 그린 ‘영혼의 지도’를 펼쳐 보일 길라잡이가 되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융의 실제 서술을 그대로 담고 있어 융 심리학 입문자는 물론 연구자들에게도 신뢰할 만한 자료가 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사고형, 감정형, 감각형, 직관형 등 유형 이론, 내향형과 외향형이라는 성격의 특성을 설명하는 융의 실제 문장을 확인할 수 있어, MBTI의 뿌리를 이해하려는 일반 독자에게도 지적 흥미를 채워줄 것이는 소감을 말하고 있다.

독자들이 사전을 보다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카를 융의 저서와 이론, 생애까지도 두루 살펴볼 이유가 있다. 특히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와의 친소(親疏) 관계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독자는 생각한다. 이에 앞서 저자 대릴 샤프의 〈서문〉이 중요할 것이다. "카를 구스타프 융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자신의 심리학에 대한 체계적인 요약은 제시하지 못했다. 지난 30여 년간 융의 아이디어를 수천의 사람들이 설명하고, 탐색하고, 확충해서 다양한 결실을 보았다. 『융 심리학 개념어 사전』은 독자들에게 원출처가 어디인지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 책은 융이 사용했던 관련 용어들과 그 개념들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을 위해서 쓰였다. 융의 『전집』을 중심으로 엄선, 발췌했으며, 다른 저자들에 대한 참고문헌은 없다. 이 사전은 융의 견해를 비판하거나 방어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풍요로운 융의 사고에 대한 지침이자 융의 관심삳르의 광범위한 범위와 상호 관련성에 대한 해설서다."(p.8)


카를 구스타프 융은 스위스 정신과 의사이며,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이다. 일찍이 단어연상 검사 연구로 콤플렉스의 개념을 정립했고, '조발성 치매(정신분열증)'의 심리적 이해와 치료를 처음으로 시도했다. 한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활동에 적극 참여했으나 그의 '성욕 중심설'에 이의를 제기하여 독자적인 학설을 내세워 분석심리학이라 불렀다. 여기에서 집단무의식이론이 나왔는데, 이 개념은 원형이론과 결합되어 종교심리학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분석심리학의 기초를 세운 융의 업적은 오늘날 심리학뿐 아니라 종교와 문학 등 인문 전 분야의 연구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14년본 『해외저자사전』에 따르면 1895년 오스트리아 빈의 유대인 정신과 개원의 중 한 명이었던 프로이트는 『히스테리 연구』를 발표하고 1900년 『꿈의 해석』을 세상에 내놓은 이후 일약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프로이트는 매주 수요일 저녁에 정신분석 사례를 토론하거나, 문학작품을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하는 모임인 〈수요회〉를 결성했다. 정신과 의사뿐 아니라 루 살로메 등의 문화예술인들까지 참여하면서 수요회는 점점 더 활성화되었다.

어느덧 정신분석은 유럽 전역으로 조금씩 퍼져나가며 중요한 학문이자 치료법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정신분석학의 지지자가 되거나 제자가 되었다. 칼 아브라함, 알프레드 아들러, 산도르 페렌치 등이 핵심 멤버였다. 하지만 빈을 중심으로 하는 프로이트의 모임은 유럽 전역을 아우르지 못했고, 대부분의 멤버들이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유럽의 소수민족인 유대인었다. 이것이 정신분석학 발전의 한계로 작용할 것을 절감한 프로이트는 적극적으로 외연을 넓히고자 했다.

이때 스위스 정신과 의사 카를 구스타프 융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프로이트보다 스무 살 정도 어리고 스위스 출신에, 목사의 아들이며, 무엇보다도 유대인이 아니었다. 게다가 당시 가장 유명한 정신과 의사 중 한 명인 오이겐 블로일러가 운영하는 〈부르크휠츨리〉라는 명문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융은 1906년 프로이트의 자유연상이론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단어연상검사를 개발하기까지 했다. 예를 들어 ‘구름’이라는 단어를 듣고 떠오르는 단어를 말하는데, 이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한다. 이때 만일 ‘하늘’이라고 답한다면 자극이 된 ‘구름’을 듣고 대답하기까지의 시간차를 정교하게 측정한다.


너무 빠르거나 늦게 대답하는 단어가 있다면 그 단어와 무의식적 콤플렉스가 연관이 있다는 것이 융의 생각이었다. 정신분석이 비과학적이고 지나치게 성(性)에 집착한다고 비판받았던 프로이트에게 융의 단어연상검사는 가뭄에 단비와 같았을 것으로 추론된다. 프로이트는 제자 아브라함에게 “융의 지지가 훨씬 귀중하네. 오로지 그가 나타났기 때문에 정신분석이 유대인의 민족적 관심사가 될 위험에서 벗어났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프로이트는 융과 적극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했고 융도 프로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동등한 자격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처럼 교수님과 우정을 나눌 수 있게 해주실 것”을 요청하는 등 프로이트의 제자가 되어 더욱 친근하고 특별한 관계가 되는 것을 기꺼이 여겼다. 프로이트는 1911년 국제정신분석학회를 처음 발족하면서 초대 회장으로 융을 선출할 것을 다른 제자들에게 지시했다. 즉, 공식적으로 융을 자신의 후계자로 낙점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프로이트의 생각대로 되는 듯했다. 사람들은 정신분석을 신기해하면서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특히 문화예술계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빈 출신 유대인의 비기(秘技)로 인식되던 정신분석이 유럽 전체에서 받아들여졌고, 미국에서 프로이트는 명예박사학위를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정신의학에서 정신분석의 비중이 더욱 커지면서 제자들 사이에 균열이 생겼고, 스승의 이론에 의구심을 가지며 자기만의 깃발을 세우고 싶다는 야심을 갖게 되는 이들이 나왔다. 그 첫 번째 인물이 아들러였다.

아들러는 1870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헝가리계 유대인이었다. 빈 대학을 졸업해 의사가 되었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모임의 초기 멤버로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했기에 은연중에 빈에서는 2인자로 인정받았다. 1902년에 매주 수요일 저녁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에 관심있는 지인들과 함께 토론을 하는 모임으로 시작한 수요회가 1908년 정식으로 빈 정신분석학회로 발족하면서 초대 회장을 맡았다. 프로이트도 아들러를 아껴서 1906년 아들러가 처음으로 발표한 「신경증의 심리학적 근거」에 대한 논문이 자신의 이론과 차이가 있음에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 책의 역자 고혜경은 신화학자이자 꿈 분석가로, 강단에서 꿈과 융 심리학 그리고 개인의 신화와 집단의 꿈을 가르치고 연구하고 있다. 이번 번역작업을 통해 융이 다루는 각 개념어의 맥락을 확인하고, 전문가의 자문을 거쳤다. 역자 고혜경은 〈역자 서문〉을 통해 융을 ‘진정한 영웅’이라 평가한다. “아무도 탐색하지 않은 세상을 먼저 탐험하고 그 세계를 탐색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지도를 그렸기” 때문이다. 융은 중년의 위기 상황에서 눈을 내면으로 돌려 무려 16년간의 고독하고 지난한 실험을 자기 자신에게 감행함으로써 인간의 심층을 탐구했다. 융은 현대인이 각종 신경증과 정신병으로 시달리는 이유는 무의식과 단절했기 때문이라 진단하며, 무의식을 탐색해 자신을 발견하는 여정을 담아 현대인을 위한 ‘영혼의 지도’를 선사했다.

〈역자 서문〉에 따르면 융은 인간의 심층은 개인적인 것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조상과 역사의 무게라는 것을 인식한다. 아울러 아니마, 아니무스, 자기, 집단 무의식, 원형, 개성화 이론이 이렇게 탐색하던 중에 잉태되었다. 이후 융의 삶은 이 시기에 경험한 내용을 정교하게 이론화하고 체계화시키는 것으로 채워졌다. 융은 현대인이 각종 신경증과 정신병으로 시달리는 이유를 한마디로 무의식과의 단절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무의식에 접근하여 탐색하고 통합하는 과업이 개인의 건강뿐 아니라 시대적인 미션으로 대두된 이 시점에서 융의 삶은 현대인에게 모델이 되어줄 것이라고 설명한다.

앞서 융이 저서에서 사용한 단어 중 자주 거론되던 아니마(Anima)에 대해 살펴본다. 책에서 아니마는 '남성 내면의 여성적인 측면'이란 뜻으로 풀이한다. "아니마는 남성의 정신에 있는 개인적 콤플렉스이자 여성에 관한 원형 이미지다. 모든 사내아이에게서 새롭게 구현되는 무의식의 요소이고, 투사가 일어나도록 하는 원인이다. 처음에 아니마는 자신의 어머니와 동일시되고, 이후 다른 여성들 사이에서 경험될 뿐 아니라 남성의 삶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친다."(p.28)

저자 대릴 샤프는 이 용어의 출전을 「집단 무의식의 원형」이란 저작물에서 찾는다. 이 저작물에서 "아니마는 생명 자체의 원형이다."라고 적혀 있다. 아니마의 해석은 이 책의 일곱 페이지에 걸쳐 설명한다.



현대인은 각자가 속한 공동체나 조직 안에서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문제에 직면한다. 심리를 통해 나 자신은 물론 타인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이어지면서 심리학과 MBTI에 대중적 관심도 높아진다. 불안, 정체성, 관계, 트라우마 등의 주제는 이제 일상에 자연히 녹아들어, 심리학은 삶의 언어로 자리 잡았다. MBTI가 대중에게 친숙해지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원형인 융 심리학은 어렵다. 이 책은 이러한 틈을 메우고자 융이 사용한 개념어를 중점적으로 선별해 융의 전집에 등장하는 맥락 속에서 용어를 독자가 직접 체감하도록 구성했다. 

"기능 유형은 사고형, 감정형, 감각형, 직관형이라 부를 수 있는데, 기본 기능의 특질에 따라 크게 두 가지, 즉 합리적인 유형과 비합리적인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사고형과 감정형은 전자에 속하고 감각형과 직관형은 후자에 속한다. 이는 리비도의 움직임에 대한 지배적인 경향에 따라 두 가지 유형으로 더 나눌 수 있는데, 바로 내향형과 외향형이다."(p.255) - 「정의」 《전집》 6권

이 책은 프린스턴대학교 출판부에서 편찬한 볼링겐 시리즈 중 융의 《전집》 20권을 기반으로 개념어를 정리했다. 각 항목에는 해당 개념이 등장하는 융의 원문을 직접 인용했다. 해당 부분의 출처는 미주에 모두 실었으며, 독자의 편의를 위해 각 전집에 실린 글 제목을 번역해 해당 부분을 찾기 쉽도록 안내했다. 또한 출처에 실린 책은 참고문헌 목록으로 정리해 융의 세계를 탐구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했다. 또한 번역어가 주는 왜곡을 피하고자 용어를 싣는 순서 역시 원전을 따라 ‘가나다’ 순이 아닌 알파벳 순으로 실었다. 예를 들어 ‘Adaption(적응)’은 다음과 같은 융의 문장이 실렸다.

"[개성화를] 목적으로 삼기 전에 최소로 필요한 집단 규범에 적응하는 교육적 목표가 먼저 성취되어야 한다. 식물이 고유한 본성을 만개하려면, 먼저 씨앗이 파종된 토양에서 자랄 수 있어야 한다. - 「정의」 《전집》 14권

생명의 영속적 흐름은 거듭 새로운 적응이 필요하다. 적응은 결코 한 번에, 그리고 전부 달성되지는 않는다."(p.22) 「초월적 기능」 《전집》 6권


Persona 페르소나

용어가 암시하듯, 페르소나는 단지 집단적 정신의 가면일 뿐이다. 개성을 가장하는 가면을 쓰고 자신과 타인에게 개인이라고 믿게 만들지만, 실상 당사자는 단순히 집단정신이 말하는 역할을 연기할 뿐이다. 페르소나를 분석할 때 우리는 가면을 벗겨내고, 개인적으로 보였던 것이 실제로는 집단적이었음을 발견한다. 바꿔 말해, 페르소나는 집단정신의 가면일 뿐이었다. 본질적으로 페르소나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모습으로 보여야 할지에 대해 개인과 사회가 타협한 결과물이다. 사람은 이름을 갖고, 직위를 얻고, 특정 임무를 수행하면서 이러저러하게 보이는 인물이 된다. 이 모든 것이 어떤 면에서는 실제일 수 있지만, 본질적인 개성을 기준으로 보면 부차적인 현실일 뿐이다. 또한 이렇게 타협하는 과정에서 종종 자기 자신보다는 타인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p.181)


Unconscious 무의식

의식은 이성을 방어하고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며, 무의식의 혼란스러운 삶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자신의 길을 걷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 이는 열린 갈등과 열린 협력을 동시에 의미한다. 결국 인간의 삶은 이러해야 한다. 이는 망치와 모루의 오래된 게임이다. 둘 사이에 인내하는 쇳덩이는 파괴될 수 없는 전체, 즉 ‘개인individual’으로 단련된다.(p.267)


저자 : 대릴 샤프(Daryl Sharp)


캐나다 토론토에서 개업 중인 융 학파의 정신분석가. 융 심리학 책들을 주로 출판하는 이너시티북스의 발행인이기도 하다. 취리히에 있는 칼 융 연구소를 졸업한 그는 융 학파의 분석 방식으로 중년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저서로 『비밀스런 까마귀-갈등과 변형』, 『성격의 유형-성격 유형에 대한 융의 모델』 등이 있다.


역자 : 고혜경


신화학 박사이자 그룹 투사 꿈작업가. 현재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에서 꿈과 융 심리학 그리고 개인의 신화와 집단의 꿈을 가르친다. 오클랜드 창조영성대학원에서 제레미 테일러 박사를 만나 꿈 세계를 접한 후 좀 더 깊이 꿈 말을 이해하기 위해 미국 퍼시피카대학원에서 신화학으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오랜 기간 꿈 일기를 작성해오면서 꿈이 가진 놀라운 힘을 느꼈다. 꿈 공부 후 한국에 돌아와 지금까지 그룹 투사 꿈작업과 워크숍을 이끌며 이 땅에 꿈 친구를 늘리는 데 열정을 쏟고 있다.

지은 책으로 《선녀는 왜 나무꾼을 떠났을까》 《태초에 할망이 있었다》 《나의 꿈사용법》 《꿈에게 길을 묻다》가 있고, 옮긴 책으로 《꿈으로 들어가 다시 살아나라》 《꿈이 이끄는 치유의 길》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여신의 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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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잘데기 있는 사전 - 말끝마다 웃고 정드는 101가지 부산 사투리
양민호.최민경 지음 / 호밀밭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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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부끄러웠지만 사투리가 지금은 당당히 세계로 알릴 만큼 합리적이고 멋진 언어로 제자리를 잡아가는 모양새다. 날것 그대로 K-컬처와 함께 세계로 나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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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잘데기 있는 사전 - 말끝마다 웃고 정드는 101가지 부산 사투리
양민호.최민경 지음 / 호밀밭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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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스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사투리'는 어느 한 지방에서만 쓰는, 표준어가 아닌 말이다. 이에 비해 ‘표준어’는 한 나라에서 공용어로 쓰는 규범으로서의 언어다. 의사소통의 불편을 덜기 위해 전 국민이 공통적으로 쓸 공용어의 자격을 부여받은 말이라고 사전은 풀이하고 있다.(『표준국어대사전』) 이 책 『쓰잘데기 있는 사전』은 '부산 사투리' 가운데 TBN 부산교통방송 〈달리는 라디오〉의 목요일 고정 코너 「배아봅시데이」에서 2년간 소개한 부산 사투리를 담았다. 토박이조차 설명하기 어려워하는 일상의 단어를 중심으로 정리했다. 공동 저자(양민호 최민경, 이하 저자)는 사투리의 특성상 사전에 등재되지 않는 비표준어가 많고, 어원이 밝혀지지 않은 경우가 흔하다고 말한다. 이 책 『쓰잘데기 있는 사전』은 활용 문구와 정의, 그리고 어원까지 최대한 유추해 풀었다.

저자는 부산에 거처를 잡은 외지인들이다. 부산 생활을 시작하고, 마음에 질문을 품었다고 한다. ‘이게 무슨 뜻이지?’ 계속 들으니 그 속의 정서와 리듬을 알게 되고, 거칠게 느껴지던 언어가 정감 있는 언어로 들리더라고 털어놓는다. 사투리는 심금을 울리고 온기를 전하는 말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방언', '지방어', '지역어'라고도 많이 썼다. 통상적으는 한 언어의 변종 정도의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라는 의미다. 한때는 사투리가 표준어에 비해 열등하다는 편견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표준이 아닌 말'이나 '교양 없는 말'로 정의되기도 했으나, 언어 구조상으로 방언과 표준어 또는 방언들 사이의 우열 관계란 성립하지 않는다. 현재는 이러한 정의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투리의 이미지가 바뀌고 있다. 저자는 "(사투리는) 촌스러운 옛날 말이 아니다. 브랜딩, 캠페인, 방송 매체에서 활발히 다루며 그 중심에 ‘부산 사투리’가 있다. 경제적 가치를 지닌 ‘돈이 되는 언어’면서, 타인으로부터 손쉽게 친근함을 불러일으킨다. 이 책을 읽으면 새로운 홍보 카피나 사람 냄새 나는 문장이 떠오르고, 어릴 적 어른들과 나눈 대화를 추억한다. 또한, 부산 여행이 더욱 즐거워진다."라고 출간 후 소감을 남겼다. 더욱이 나라의 정책도 '지방화', '분권화'하고 있다. 지방문화 시대에 따른 것으로 사투리는 제 대접을 받는다고 봐야 할 듯하다.



저자는 〈서문〉을 통해 출간 취지와 소감을 밝히고 있다. "말은 지나간 시간을 품고 있다. 그중에서도 사투리는 고향의 땅과 바다, 사람의 체온을 담고 있는 언어다. 단어 하나에 웃음이 들고, 말끝마다 정이 묻어난다. 이 책 『쓰잘데기 있는 사전』은 말끝마다 웃고 정드는, 101가지 부산 사투리에 관한 이야기다."(p.2) 이 책에서 저자는 '부산 사투리'라 부르는 것은 특정 지역 사투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오늘날 부산에서 통용되거나, 부산 사람들의 말 속에서 살아 있는 표현을 중심으로 삼았다고 저자는 밝힌다. 정확한 어원이나 경계가 모호한 단어도 있지만, '부산답다'고 느끼는 말,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정서와 리듬을 담는 것으로 기준을 삼았다고 덧붙인다.

〈서문〉에 따르면 시인 안도현의 글을 통해서도 사투리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 사투리는 흙냄새가 나고 고향의 일부를 느낄 수 있는 존재다. '괜찮으세요?'보다 '괘안심까?'라고 말하면 마음이 포근해진다. 부산 말도 그렇다. '단디'에는 부산 사람 특유의 성실함과 꼼꼼함이 묻어 있고, '은다'라는 한마디에 정서적인 거절과 거리 두기의 뉘앙스를 담는다. '내나'에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 안다는 공감이 깃들어 있으며, '마!'라는 짧은 한마디엔 짜증과 다정함, 싸움과 웃음이 동시에 실려 있다. 이렇듯 사투리는 그 자체로 부산의 정서요, 부산의 풍경이다.

저자는 전작 『사투리, 부산의 마음을 전하다』에서 "부산 사투리는 긴말 대신 함축된 표현으로, 복잡한 감정을 단숨에 전한다."고 썼다. 항구와 시장, 골목과 사직구장에서 오고 간 이 말들은 짧지만 깊고, 거칠지만 따뜻하다. 부산이라는 도시가 품은 생동감과 굴곡, 그리고 사람 냄새는 이 사투리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부산 출신이 아닌 저자는 이사 와 부산에 터를 잡고 살며 점점 부산 말에 스며들었다고 밝힌다. 단지 말의 재미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투리라는 언어에는 그 지역의 시간과 정서, 생존과 유머,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이 책에서 101번째 단어까지 실은 것도 그런 마음에서였다고 털어놓는다. 부산 말은 딱 떨어지는 깔끔한보다, '한 줌 더'의 정서가 어울린다. 이 책에서 주저 없이 한 단어를 더한 이유다.


저자의 부산 사투리 사랑은 작지 않은 듯하다. 저자는 이 책이 단어를 정리한 사전이 아니라고 밝힌다. 말의 체온을 기억하기 위한, 마음을 전하는 사투리 스케치북이라고도 말한다. 어쩌면 언젠가 잊힐지 모를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기억을 불러일으키길 바람과 기대가 크다. 이 책에는 한 글자부터 다섯 글자 이상까지 모두 101개의 사투리가 담겨 있다. 한 글자 사투리로 역시 '마!'가 첫 번째 등장한다. 저자는 이 말을 "짧지만 강렬하고 한 글자로도 충분한 부산의 말맛"이라고 귀띔한다. "마, 니 지금 뭐 하는 기고?"란 예문을 보여 준다. 이 단어의 정의와 특성으로는 ① 응원 구호, 강조 또는 친구를 부르는 말 ② "마!" 한 글자에 담긴 부산의 힘과 리듬이란 표현으로 규정한다. 

"마!"가 처음 사용된 것은 롯데 자이언츠의 성적이 부진하던 2002년이라고 알려져 있다. 당시 롯데 자이언츠의 응원단장이 상대편의 에이스급 투수가 등판했을 때 견제하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점차 다른 투수들의 견제구에도 사용되면서 정착했다. 응원가에 맞춰서 "마!"를 반복하여 상대 투수의 혼을 빼놓는 것이다. 한 신문 보도에 따르면 함성의 심장부인 1루에서 "마!"를 집중해서 외칠 때의 소리는 107데시벨에 이르러 비행기 이착륙 소음과 맞먹는다고 한다. 이 대목을 읽을 때 독자는 롯데 자이언츠의 야구 경기에서 처음 나왔다는 말을 믿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마치 독자의 마음을 알기라는 듯하다. 저자는 바로 다음 문장에서 바로 잡는다. "사직구장에서 사용하는 "마!"는 뒤에 느낌표가 붙는 느낌이다. 이때는 짧고 굵게 한마디를 던지는 응원 구호기 때문에 뜻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다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마'에서 파생되었다고 불 수 있다. 친한 사이에서 상대방을 부를 때 사용하는 "마!"에서 나왔을 수 있다. 이때 동년배가 아랫사람에게 사용한다. "야!", "이놈아!", "인마!" 정도의 의미다. 또는 '하지 마'가 줄어든 것으로 활용하기도 한다고 저자는 구별한다.

저자는 또 물론 '마'는 다른 의미도 갖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냥'이라는 뜻이다. '마' 뒤에 물결 부호가 붙는 느낌이란다. 이때 문장의 제일 앞이나 중간, 또는 맨 마지막에 붙는다고 설명한다. "마~ 그대로 해 주이소", "그대로 마~ 해 주이소", "그대로 해 주이소 마~" 이런 식이다.


독자도 대학 다닐 때 경상도 사투리를 충분히 들은 기억이 있다. 물론 나중에는 TV나 인터넷에서 사용될 때 더 많이 듣긴 했지만.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는 대부분 서울 말을 쓰는 친구들과 함께 지내다 대학에서는 지방에서 올라온 사투리를 그대로 쓰는 친구들이 대거 입성(?)했다. 독자가 학교 다닐 때 서울 지역 고등학교는 이런 분위기가 상댱했다. 일반적인 추세라고 봐야 할 것도 같다. 대학 때 4년 동안 함께 지내며 친구가 된 학우들도 부산과 대구의 사투리가 조금은 다른 부분들이 있었다. '쌀'을 '살'로 발음하는 것은 공통적이었는데, '은지예' '어데예'는 각기 다른 지방에서 사용된다는 말도 들었다. 서울 말을 쓰는 독자 입장에서 왜 경상도 말이 조금 다르지? 하는 정도의 궁금증은 있었지만 "원래 아래 해변(남해안) 쪽으로 갈수록 억양이 드세다고 한다. 그것은 전라도 쪽도 마찬가지여서 쉽게 이해가 됐다. 서남해안 쪽이 전주, 광주에 비해 훨씬 강한 억양과 단어 발음도 거칠었다. 당시 '난 긍께 전라도랑께.'처럼 말 끝에 '께'를 붙이는 습관이 있고, 경상도 사람은 '반갑데이, 내는 마~.' 처럼 '마'를 붙이는 습관이 있었다고 독자는 판단했다. 사실 언어 자체가 다르지는 않은데 대체로 억양이 강하다는 점은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에 게재된 수많은 말 중에 독자에게도 예전 대학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도 있고, 이것은 일본 말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하는 의심스러운 단어도 있다. 저자가 잘 알아서 설명하지만 혹시 모를 오류가 있다면 언어를 전공한 독자들이 의문점을 서평에 더해주길 바란다. 언어 연구, 더욱이 사투리 연구는 처음 들어본 말들의 향연인 듯하다. 그러나 저자의 풀이만으로도 읽는 즐거움은 물론 우리말에 대한 애착이 점점 커진다. 

독자가 학교 다닐 때는 ‘사투리’ 하면 드세거나 알아듣기 힘들다는 이미지가 있었다. 또 서울에서 취직해 살기를 원하는 친구들은 될수록 사투리를 쓰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사투리로 쓰는 독특한 말은 비교적 쉽게 바뀌지만 억양은 고치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특히 경상도 지방의 강한 억양이 훨씬 오래동안 고쳐지지 않는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전라도 지방의 사투리는 경상도 사투리에 비해 억양이 비교적 서울 말에 접근하기 쉬웠다. 이들의 표준어 사용에는 대체로 경상도가 뒤늦게 이루어진다는 점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됐다.


그런데 지역 갈등은 언어적 변신에도 관여됐다. 전라도 사람들에 근거 없는 편견이 서울에 와 있는 전라도 사람들은 전라도 말투를 고치려 애썼다는 점도 안다. 산업화 시대 농업에 치중했던 전라도는 경상도에 비해 서울로 삶터를 옮기는 사람들의 비율이 훨씬 높았다. 그러나 말투만 들어도 어디 출신인지 알고, 판단하던 시절이었다. 전라도 사람들은 애써 서울 말에 일찍 마스터하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억양 차이가 비교적 적어서 쉽게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삶과 사회 생활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한 상경인들의 숨은 노력도 한몫 했으려니 생각하니 조금은 씁쓸하다. 

이런 편견에 가려져 발견하지 못한 사투리의 쓰임새가 많다. 사투리는 지역이 가진 역사와 지형, 정서에 따라 발전하는 언어의 범주가 다른데, 유독 부산에서 발전한 언어가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특정 단어는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대표적으로 ‘박상’, ‘빼다지’, ‘개우지’, ‘양분식’, ‘오찻물’, ‘홍큐공’, ‘바보축구온달’ 등이 있다. 사투리는 브랜드나 캠페인의 카피로 쓰이거나, 예능 프로그램에서 종종 언급되며 유머 코드로 활용된다. ‘라면 끼리는 남자’를 줄인, 일명 〈라끼남〉의 ‘끼리다’(끓이다)도 역시 책에서 소개하는 사투리다. 저자의 설명은 이렇다. 끓이다가 끼리다로 변형된 이유는 알 수 없다. 모음 조화 및 발음의 편의성 측면에서 지역 사투리는 발음을 쉽게 하기 위해 음이 바뀌는 경우가 많다. 특히 경상도 사투리는 발음을 간략하게 하거나 쉬운 발음으로 바꾸는 경향이 있다. 어간과 어미의 변화에서 '끓이다'에 'ㅎ'이 탈락해 '끌이다'로 바뀌고, 연음 법칙 현상이 일어나 '끄리다'의 모음 'ㅡ'보다 편한 'ㅣ'로 변화해 '끼리다'가 되었다고 추측한다.(p.159)

이밖에도 부산 사투리의 특징 중 함축성을 지닌다는 점이 있는데, “마!”라는 짧은 단어의 용도가 다양하다. 친구를 부르거나 야구장에서 응원 구호로도 쓰인다. 또한, 부산의 사직구장에서 펼쳐지는 ‘봉다리’ 응원은 매력적이다. 사실 함축성도 있고, 연음 등 쉬운 발음을 그대로 옮겨 적는 과정에서 '피해'를 보는 단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울 표준말보다 제주 사투리가 음절 면에서 훨씬 줄어든 상태라고 주장한 연구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단어의 수나 음절의 수가 줄어든다는 것은 진보적 변화다.


사투리에 대한 연구 저서나 기록이 별로 없어서, 유래를 마음껏 상상할 수 있지만 한편으론 억지로 문법이 언어를 장악하면 결국 언어는 모순에 빠져 자칫 후퇴시킬 수도 있다. 역사 속 사람이 사는 삶 속에서 역사가 변하듯이 언어도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화한다. 그것을 표준말이라고 한데 묶은 것은 어린이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일 텐데 정확한 어원이나 시대적 변화 등을 파악하지 않고 표준어를 등재시켜 놓고 사투리는 제외하려는 것은 그닥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언어의 쇠퇴로 이어질 수 있다. 사투리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외국의 사투리 정책에 대해서도 잘 살펴야 한다. 비교하고 열등하다고 억압하면 언어 침략에 속수무책이 될 수 있다. 그것은 한글을 창제하고도 정작 관료나 공식 문서에 사용하지 못했기에 조선 시대 우리말은 엄청나게 사라져 버렸고, 한자 우대로 한자 문화에 예속되는 것은 심화되었다. 

사투리를 보존한다는 건 여러 단어를 조합하며,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행위다. 이것은 과거와 공생하려는 노력이자 앞으로의 생활에 보다 편리함을 위해서다. K-컬처와 함께 사투리의 세계화가 가속화되길 바란다.


저자 : 양민호(梁敏鎬)


1972년 출생. 전주대학교 일어교육과 졸업 후,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 도쿄(東京)외국어대학 석사과정을 거쳐 도호쿠(東北)대학 문학연구과 박사과정을 졸업하였다. 저서로는 일본에서 출판된 『일본어 변이론의 현재』(공저, 2024), 『일본어 어휘로의 어프로치』(공저, 2015), 『외래어 연구의 신전개』(공저, 2012)가 있다. 국내에서는 『바다를 건넌 물건들 I, II』(공저, 2022, 2023), 『바다를 건넌 사람들 I』(공저, 2021), 『동북아해역과 인문학』(공저, 2020), 『동북아해역과 인문네트워크』(공저, 2019), 『소통과 불통의 한일 간 커뮤니케이션』(공저, 2018) 등이 있다. 그리고 역서로는 『경제언어학-언어, 방언, 경어』(공역, 2015)이 있다. 현재 국립부경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HK조교수(일본어학, 사회언어학, 언어지리학 전공)로 재직 중이고, 국립국어원 공공용어 번역 표준화 위원회 일본어 자문위원, 한국방언학회 연구이사이며, 부산교통방송(TBN) 부산사투리 ‘배아봅시데이’ 코너에도 출연하고 있다.


저자 : 최민경


1983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한 후, 동대학교 국제대학원 국제학과 석사과정, 일본 히도쓰바시대학(一橋大學) 사회학연구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전공은 역사사회학·일본지역연구로, 특히 국제 이주, 디아스포라 관련 연구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2019년부터 국립부경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HK교수로 근무하고 있으며, 주요 저역서와 논문으로는 『동북아해역과 글로벌리즘: 컬처, 로컬, 모빌리티』(공동 저자, 2024), 『바다를 건넌 물건들 Ⅱ』(공동 저자, 2023), 『해항의 정치사』(단독 번역, 2023), 「해역도시는 이민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일본 요코하마를 중심으로」(2024), 「어업이민을 통한 해방 후 해외이주정책의 이해」(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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