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경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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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장르소설 작가들은 대단히 두터운 필모그래피를 자랑하곤 한다.

[십이국기] 로 유명한 오노 후유미는 그로테스크하고 잔혹한 [시귀] 시리즈로 더 먼저 알려졌고, [모방범] 과 [화차] 의 미야베 미유키는 [브레이브 스토리] 라는 판타지 시리즈를 꾸준히 펴내고 있다. 미스테리 작가인 온다 리쿠 역시 [도코노 시리즈] 라는 현대 배경의 판타지 시리즈를 보유하고 있고, 여행 에세이는 물론, 나오키 상을 받은 [꿀벌과 천둥] 이라는 순문학까지 이름이 닿아있다. 히가시노 게이고 역시 [편지] 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같은 미스테리와는 거리가 먼 작품들도 꽤 있다. (워낙 다작이기도 하셔서)
이런 필모그래피를 보면 너무 쉽게, 한 작가의 작품 한두 편만 읽고 그 작가의 작품세계 전반을 섣불리 단정해 온 것 같아 죄송스러운 마음까지 든다.  

 

나에게 '요네자와 호노부' 라는 이름은 출세작인 [빙과]로 인해 비교적 '소프트한 미스테리' 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꽤 많은 작품들이 고등학생과 학교를 배경으로 삼는다 해도 집단 괴롭힘, 자살, 살인, 성폭력, 감금, 가정폭력, 존속살인, 원한 등 성인 범죄를 능가하는 잔혹한 테마를 다루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빙과' 의 학교에서는 다행스럽게도(?) 그런 하드코어한 사건을 다루지 않기 때문이었다. 

[야경] 에 실려있는 총 여섯편의 작품은 그런 나의 편견을 보기 좋게 깨뜨려 주었다.

이는 온다 리쿠의 [밤의 피크닉] 먼저 읽고 단편집인 [도서관의 바다]를 읽었을 때의 경험과 비슷했다.

기 이야기꾼의 진정한 면모.

표제작인 '야경' 부터, '사인숙', '석류' , '만등', '문지기', '만원' 까지 비슷한 작품이 한편도 없다.

'야경' 은 제목 그대로 밤에 순찰을 도는 직업을 가진 사람, 즉 경찰관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총기 소지가 불법인 국가에서 경찰의 총기 사용은 대단히 민감한 문제다. 어지간한 흉악범과 대치중이라도 총기를 사용한다면 대부분 과잉진압으로 손가락질 받기 일쑤다. 조금 과한 감도 없지 않다고 생각되지만, 그런 경계심이 총기 사용에 대해 법보다 더 강력하게 총기 규제의 정서를 환기시킨다는 사실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화자인 '나' 는 파출소 소장이다. 경찰대를 졸업하면 바로 간부 계급인 경위로 부임하는데, 9급 경찰 공무원으로 응시해서 붙으면 경찰학교(경찰대와는 다름)에서 일련의 훈련과정을 겪은 뒤 순경으로 일선 현장에서 시작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나' 와 가지이, 가와토는 모두 경찰 공무원, 순경으로 시작한 경찰들로 보인다. 특히, '나' 는 이십 년 경력의 베테랑으로 묘사되는데, 어떤 동기는 과장까지 된 걸 보면, 승진의 '테크트리' 에서는 꽤나 벗어난 상황임을 알 수 있다.

'나' 는 신입인 가와토를 사실 '경찰에 맞지 않는' 유형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전에 그렇게 판단했던 부하 직원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경험 -승진의 테크트리에서 벗어나게 된 이유로 보인다- 이 있어서 이번엔 결코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마음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신입 순경 가와토의 장례식과 함께 이야기가 시작된다.

가와토는 흉기를 든 '다자와' 라는 인물과 대치중에 총기를 사용했으나,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가와토가 쏜 총알은 다자와에게 정확히 명중했으나, 다자와도 죽음의 순간에 최후의 일격을 뻗었던 것이다.         

이야기는 차근차근 과거로 되짚어간다. 가와토가 '나' 에게 배속되던 시기부터, 경찰서를 찾아온 민원인들을 상대하고, 경찰서 앞 공사장에서 어떤 일이 생기고, 총기를 수령하는 그 날 아침까지. 

지속적으로 '총기' 와 '총알' 을 강조하며 독자들을 이끈다. 아주 훌륭한 떡밥에, 아주 완벽한 수거!!! 

군더더기 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흐름과 적절하게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 내러티브가 풍성한 캐릭터까지 아주 좋았다

특히 마지막 반전은 리얼리티가 훌륭해서, 설득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뒤의 작품들도 전반적으로 매우 훌륭했다.

상대적으로 '사인숙' 이 가장 평범했고, '석류' 는 에로틱한 애착관계에 관한 소시오패스적 접근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한때 인터넷에 떠돌았던 '소시오패스 이야기' (아버지 장례식장에 찾아온 남자를 다시 만나기 위해 엄마를 살해한다는 딸의 이야기)의 다른 변주처럼 읽혔다. '만등' 은 해외 자원 개발 공사를 따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회사원의 끔찍한 선택에 관한 이야기다. 잘못된 하나의 선택이 또 다른 극단적 선택으로 인도하지만, 그 선택의 결과와 상관없이 주인공의 운명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고 만다. '문지기' 는 자동차 추락사가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언덕에 관한 취재를 하는 프리랜서 기자의 이야기이고, 마지막, '만원' 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 으로 유명해진 '감성 스릴러' 라는 하위 장르의 카테고리에 넣을 수 있겠다.

 

모든 작품들이 짜임새가 훌륭했고, 깔끔한 구성과 적재 적소에서 복선을 훌륭하게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허투루 버린 떡밥이 없는, 뿌린 떡밥은 반드시 회수하고야 마는 딱 떨어지는 완결성이 돋보였다. 모든 작품들을 그대로 연극 무대에 올리거나 영화로 만든다면 그대로 각색하면 될 정도로 공간의 이해와 적용, 그에 걸맞는 직업인에 대한 철저한 취재와 활용이 돋보였다.

단편이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최소화된 공간에, 뚜렷한 캐릭터를 올려 가장 효율적인 동선으로 이끄는 재주가 무척이나 능란하게 느껴졌다. 


각각의 단편들에 등장하는 모든 직업들이 다 다르고, 전문직인 데다 묘사가 무척이나 훌륭하다.

'야경' 의 경찰, '사인숙' 의 온천장 직원, '만등' 의 자원 개발 회사의 해외 파견 사원, '문지기' 의 기자, '만원' 의 변호사까지, 직업의 전문성과 성격, 말투 등을 아주 현장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작가의 취재력도 취재력이지만, 직업과 직종, 그 직종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특수성을 짚어내는 통찰력을 읽을 수 있었다.


'야경' 다음으로는 '만등' 이 너무 좋았다. 그 자리에서 두 번이나 다시 읽고도, 오랫동안 머릿속에 빙빙 맴돌았다.

'악의 평범성' 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인간이 악해지는 이유는 인간의 본성과 관계 없이, '악' 을 평범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조건과 환경만 제공된다면 누구나 끔찍한 악마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만등' 의 주인공 역시 그러한 상황에 놓여있었고, 자연스럽게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만다. 

악은 반드시 처벌받고, 선은 반드시 상찬 받는다고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어딘가에선, 반드시 그러기를 바란다.

적어도, '정의' 에 있어서만큼은 우리 모두가 이상주의를 버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만등' 의 주인공이 명백한 악이고, 기발한 방법으로 심판을 코앞에 두었다면, '문지기' 는 악도 모호하고, 정의의 실현도 모호하다.

나는 삶에 대해 운명론적 시각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모든 게 우연이라고 믿지도 않는다. 

적당한 운명; 필연과 적당한 우연. 그런 것들이 랜덤하게 얽혀가는 게 삶이라고 생각한다.

'행운' 과 '불운'. '필연' 과 '우연'. 그리고, 삶과 운명. 

두 작품의 화자들은 모두 안타까울 정도의 운명을 맞이한다.  

'만등' 과 '문지기' 는 요네자와 호노부라는 작가가 갖고 있는 인간의 본성, 사회성, 그리고 운명에 관한 상반된 시각을 보여준다.

이 두 편 만으로 선과 악도, 정의와 불의도 나눌 수 없는 복잡한 인간의 삶에 대해 한번쯤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그 나눔의 기준이 명백히 '상대적' 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같은 행위도 어떤 경우엔 선, 정의이고, 또 다른 어떤 경우엔 악, 불의가 되기도 한다.

물론, 이토록 불분명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소설이 재미있는 이유겠지... 


다시 말하지만, 모든 작품이 참 좋았다.

어떤 작품에서는 목덜미가 서늘할 정도로 번득이는 스릴을 선보이기도 했고, 톱니바퀴처럼 맞아떨어지는 추리소설만의 장르적 쾌감을 보여주기도 했다. 고전적인 방식의 수수께끼 풀이, '오싹한 귀신 이야기' 풍의 기담 소개, 시간대를 쪼개 자유롭게 배치하는 현대적인 글쓰기와 캐릭터의 매력이 드러나는 감성적인 접근까지. 

요네자와 호노부라는 작가가 얼마나 다재다능한 이야기꾼인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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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물고기 묘보설림 4
왕웨이롄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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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이벤트를 통해 만나보았다.


4편의 단편과, 한편의 중단편, 총 5편의 작품이 실려있는 작품집이다.

'소금이 자라는 소리를 듣다'

'책물고기' 

'아버지의 복수'

'걸림돌'

그리고

'베이징에서의 하룻밤'


가장 첫머리에 자리잡고 있는 '소금이 자라는 소리를 듣다' 부터, 시각적 자극이 대단했다. 

거대한 소금사막에서 소금을 채취하는 인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항상 함께 술을 마시던 '자오' 형이 소금 사막 가운데 바다처럼 넓게 펼쳐져 있는 소금호수에서 익사한 뒤, '나'는 술을 거의 끊은 상태로 시작한다. 

온통 새하얀 소금의 대지와 붉은 노을, 옛 친구인 샤오딩의 그림과 샤오딩의 아내 진징까지, 작품에 묘사된 모든 것들이 시각적인 환상을 불러 일으켰다. 

자오형의 죽음과 '나' 와 고등학교 친구인 샤오딩의 과거가 거대한 소금 산지와 어우러지며 작품 후반까지 대단히 미묘한 위화감을 만들어낸다. 주제의식을 전달하기 위해 형식을 간략화 했지만, 마치 장편 한편을 읽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기승전결이 매우 뚜렷한 작품이었다. 

단편소설은 대체적로 간결한 편인데, 이 작품은 간결하면서도 복잡한 느낌을 줬다.

혹시, 이게 뜻글자인 한자를 번역하는 과정에 생기는 미묘한 시너지일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책물고기' 는 작품 안에서 언급되듯 카프카의 '변신' 에서 모티프를 가져왔다. 중국은 신과 요괴의 고향이다. 온갖 상상도 못할 기기괴괴한 생명체들이 이야기가 수천년에 걸쳐 쌓여왔다. 그런 맥락에서 '책물고기' 는 가장 중국 다운 소설이었다. 재기발랄하고 유쾌한 아이디어가 전형적인 사건 해결의 플롯 안에서 펼쳐진다. 소재 자체는 재미있었으나, 첫 작품에 비해 아주 특별한 느낌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복수' 와 '걸림돌' 은 작가의 개인적인 일화를 바탕으로 전개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현장감이 느껴졌다. 

이 두 작품은 나란히 개제된 것이 편집자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비슷하면서 다르다. 두 작품 모두 정서가 아주 비슷해서 마치 한 작품의 서로 다른 목차처럼 느껴질 정도다. 

'아버지의 복수' 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북방의 고향을 떠나 남방 지역의 광저우에 정착한 인물이다.

중국은 정말 너무나 거대한 땅덩이를 갖고 있어서, 북방 민족과 남방 민족의 차이가 뚜렷하다. 이는 중국의 기나긴 역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흔히 중국의 북방민족은 고지식하고 우직한 성품을, 남방민족은 영리하고 유연한 성품을 지녔다는 편견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아버지의 복수' 는 중국의 인종적 편견을 화두로 한 풍자극임을 알 수 있다. 

북방의 고향을 떠나 남방의 광저우에 정착해 세일즈나 택시운전 같은 전형적인 '남방인에 어울리는' 일을 하며 살아온 아버지. 아버지는 북방인이의 특징을 지우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지만, 결국엔 고집세고 아둔하다는 북방인의 편견과 딱 맞는 행동을 보이고 만다. 

'걸림돌' 은 화자가 기차 안에서 만난 '파란눈의 중국인' 에 대한 이야기이다.
제 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엄혹한 '유태인 사냥' 을 피해 중국으로 피난한 유럽인들이 아주 많았다. 할머니의 부모님도 그런 사람들 중 한명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중국 대사관의 도움으로 할머니와 할머니의 엄마는 무사히 국경을 넘어 상해까지 도착했지만, 할머니의 아빠는 나치에 의해 중국 대사관이 몰수되면서 비자를 발급받지 못하고 아우슈비츠로 끌려가고 말았다. 

어린시절 중국으로 넘어왔던 할머니는 중국에서 자라 교사로 정년까지 일하다가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 오스트리아로 향하는 중이었다. 할머니가 75년만에 고향으로 향하는 이유는 조부모님이 살던 집 앞에 '걸림돌' 을 놓기 위해서였다.

(각주를 통해 걸림돌에 대한 정보가 책에 적혀있긴 했지만, 마침 이 책을 읽던 중에, '알쓸신잡' 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걸림돌' 에 대한 에피소드가 방영되어서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제 2차 세계대전 도중 나치에 의해 희생된 이들을 기리기 위해, 그들이 살았던 집 앞에 황동으로 된 블럭을 끼워넣는 운동이 전 유럽에 걸쳐 진행됐다. 일반 보도블럭보다 아주 살짝, 1mm정도 튀어나오게 넣어서,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발밑에 툭 하고 걸리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지나가던 사람이 바닥을 내려다보면, 손바닥만한 돌 위에 사람의 이름과 생몰년, 간략한 메시지가 적혀있는 것이다. 

지금 살아있는 사람과 과거에 살았던, 나치에 의해 끔찍한 죽음을 당했던, 사람의 이름. 유태인 뿐 아니라, 성소수자, 장애인, 나치에 저항한 시민들 모두가 그렇게 황동판에 이름을 달고 자신이 살았던 집 앞에 걸림돌로 박혀있다.   

이 운동은 독일의 예술가에서부터 시작됐고, 독일의 주 정부와 지방정부, 유럽 전역의 정부들과 폭넓은 공조를 이끌어냈다. 

일본인들이 소녀상으로 시비거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할머니는 걸림돌을 놓고, 이스라엘을 거쳐 중국으로 돌아올 계획을 하고 있었다. 

화자의 조부모님도 중국에서 홍콩을 향해 목숨을 건 도피를 했던 분들이었다.

할머니와 화자는 그런 부분들을 공유하며 짧고도 긴 길동무가 된다.

'걸림돌' 은 한편으론 지나치게 '올바른' 작품이라 조금 오글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대로 '아버지의 복수' 와 대칭점에 놓고 읽으면, 중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흥미로운 지점들을 읽을 수 있다.

'베이징에서의 하룻밤' 은 분량으로 구분하면 단편보다는 중편에 가까워 보인다.

다른 세편을 더한 것과 비슷한 분량이다. 

이 작품은 읽는동안 무라카미 하루키와 김연수, 김경욱 작가 같은 이름들이 떠올랐다. 

나에게 이 작가들은 현 세대 아시아 남성들의 연애감성을 가장 잘 표현해내는 작가들이다. 

미화도 과장도 없이, 가장 적확한. 

한국, 중국, 일본은 모두 과도기를 겪고 있다.

중국은 그 광대한 영토 때문에 모든 변화가 느리고, 일본은 빠른 개항과 침략전쟁으로 인해 누구보다 먼저 변화를 모색했다. 

한국은 일제의 침략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변화했다.

모든 변화에는 반작용이 따른다. 모든 국가, 모든 민족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변화의 대가를 치른다. 

이러한 변화의 모습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 '연애' 와 '결혼' 이라고 생각한다.

아시아 전체 젊은이들의 연애와 결혼은 10년씩 쪼개도 모자랄 정도로 급격하게 변해왔다.

연애관, 결혼관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부터 연인들이 가는 장소, 결혼을 치르는 공간, 결혼식의 행태, 연애의 행태. 윤리관, 이성관, 성과 욕망, 쾌락을 대하는 태도, 구애의 방식, 구애의 언어, 싸움의 방식, 싸움의 언어, 절차, 연인간에 일어나는 범죄의 종류, 법. 

'베이징에서의 하룻밤' 은 작품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게 3인칭으로 쓰여있다. 

단순히 1인칭을 3인칭으로 바꾼 정도의 주인공 시점이지만,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듯 건조하고 담담하게, 그리고 내밀하게 남녀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회한과 기대를 오간다. 

평이한 이야기를 절묘하게 나누어 배치해서 읽는 맛이 쏠쏠했다. 그래. 이건 홍콩 중국 로맨스 영화의 느낌이다. 첨밀밀이나 중경삼림 같은. 

오랜만에 아련한 마음을 잠시 맛봤다. 연인들의 이야기는 주인공들의 매력이고 나발이고, 너무 길면 지겹다. 중편 정도가 딱 적당.


마지막 작가의 말도 인상에 남았다. 

'신비한 이야기가 사라졌다'.

이야기가 없는 시대. 이야기꾼들은 무엇은 이야기해야 하는가.  

모든 작가들의 영원한 숙제일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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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과 고전부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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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것은 미스테리다' 는 말은 바꿔말하면, 세상 모든 것이 서스펜스라는 의미기도 하다.

사실 너무 당연한 명제이기도 한데, 인간의 마음은 아주 연약해서 한없이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불안함' 은 곧 서스펜스와 연결된다. 

예를들어, 아침에 분명히 챙겨나왔던 지갑이 점심시간 이후에 사라지고 말았다. 

한달치 용돈과 교통카드와 체크카드, 신용카드,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심지어 도장 한번 찍으면 런치세트가 무료인 단골 레스토랑의 적립식 카드까지 들어있는데!!!  

'내 지갑이 어디갔을까?' 

지갑의 행방에 관한 미스테리는 자신의 일상과 연관되기에 곧바로 서스펜스와 연결된다.


이처럼, 특정 이야기 안에서 서스펜스를 일으키는 방법은 결코 어렵지 않다.

독자에게 위화감을 줄 수만 있으면 된다. 

결국 어떤 방법을 통해, 어느 정도의 강도로, 그리고 어느 정도의 길이로 유지시킬 수 있는지가 관건일터.

수없는 경험을 통해, 지갑이 언제나 큰 손해 없이 내 손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지갑을 분실하는 일 정도는 서스펜스를 불러 일으킬 정도로 불안하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은 특정 자극에 쉬이 무뎌지기도 한다.

서스펜스를 일으키는 기술은 쉽고 적확한 반면, 트릭은 한정적이고, 응용 방법도 제한적이기에 명확한 패턴이 만들어진다. 
패턴이 반복되면 독자들에게 꾸준히 흥미를 줄 수 없기에, 자칫하다가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방향으로 빠질수도 있고, 소위 '반전' 이라 불리는 전복의 플롯과 같은 특정 패턴에 매몰될 수도 있다.  

2000년대 초반부터는 동시대의 민감한 사회적 이슈를 녹여내는 방법이 주로 활용되고 있다. 빈부격차, 이념, 난민, 종교, 성별, 인종갈등, 정치적, 경제적 이슈 등등을 활용해 '사회파' 라는 접두어를 탄생시켰고, SF, 판타지, 무협등 다른 서브 장르들과 조합되기도 한다.   


[빙과]는 오히려 그런 새로운 방식보다는 '정공법' 이랄 수 있는 고전 추리물의 방식을 따른다.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오레키 호타로는 만사를 귀찮아하는 성격이다. 불필요한 일은 하지 않는 인간이다. 오랜 친구인 후쿠베 사토시는 그를 '회색' 이라고 말하며 '에너지 절약 주의자' 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사토시는 호타로의 정 반대 인간이다. 밝고 명랑한 에너지가 넘치는 부류. 가끔 여자로 오해받을 만큼 호리호리한 외모에 걸맞는 섬세한 취미를 갖고 있고, 수예부이기도 하다.

에너지 절약주의자 답게 고등학교에서도 어떠한 부활동도 하지 않으려 했지만, 같은 학교를 졸업한 누나가 외국 여행 중 편지로 권한 '고전부' 에 가입한 호타로는 고전부의 부장격인 '지탄다 에루' 라는 동급생을 통해 고전부의 과거로 향하는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 와중에 사토시가 고전부에 양다리를 걸치고, 초등학교때부터 친구였던 도서부원 이바라 마야카 역시 고전부에 이중 가입하면서 고전부의 33년 역사가 시작된 태초의 사건을 향한 미스테리의 여정에 뛰어든다.    

 

그 시작은 고전부의 전통인 '문집' 이었다.

그리고 33년전 고전부의 일원이었던 지탄다의 삼촌 세키타니 준과 관련된 어떠한 '사건'.

그 사건과 지탄다의 '신경쓰이는 일' - 고전부에 대해 삼촌에게 물어보고, 어떠한 대답을 들었는데, 자신은 울어버리고 말았던 - 과의 연관성을 깨닫고 지탄다와 호타로, 사토시와 이바라까지 고전부의 과거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결과를 제시하고, 과정을 찾아나가는 방식.

답을 보여주고, 논리적인 추론으로 증명해가는 방식이다. 

이것은 아주 단순하고 기본적인 미스테리의 플롯이다.



이런 단순한 플롯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단연 '인물' 이다.
사건을 일으키는 인물, 사건을 해결하는 인물, 그 주변의 인물들.
미스테리와 서스펜스, 트릭은 익숙해지면 흥미가 반감된다.
하지만 잘 구축된 '캐릭터' 는 반복되는 패턴 안에서도 지속적으로 매력을 쌓아갈 수 있다.
 
홈즈, 포와로, 마플, 콜롬보, 갈릴레오, 해리 보슈, 리스베트, 코난, 김전일 등...
형形만 놓고 보면 비슷한데, 인물들이 너무나도 다르다.
결국 미스테리의 본질 역시 '사람 이야기' 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말미에 놓여있는 '해설' 에도 친절하게 잘 나와있지만, [빙과] 는 셜록 홈즈 등 고전 추리 소설의 장점들을 고스란히 이식한 작품이다.
미스테리와 서스펜스는 거의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활용된다. 호타로가 얼마나 홈즈같은지 보여주기 위한 장치에 가깝다는 의미다.

마지막 '빙과' 의 트릭을 밝히는 장면이야말로 캐릭터성의 백미다.
회색에 가깝다고 주장하는 인물이, 사실은 가장 공감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호타로의 추론은 논리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감성에서 시작된 것이다.
물론, 마지막에 범인이 감정적으로 폭발하며 일체의 범행을 자백하는 클리셰도 넘쳐나지만, '빙과' 의 클라이맥스는 정말이지, 인간적이면서 신선했다.

모든 미스테리는 사람의 마음.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면 의외로 쉽게 풀린다.
아니, 그 반대인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니.
사람의 마음이 미스테리의 근원이니, 세상 모든 일은 미스테리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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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크러시 1 - 삶을 개척해나간 여자들 걸크러시 1
페넬로프 바지외 지음, 정혜경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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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당첨된 리뷰도서. 

솔직히 처음 제목만 봤을땐 큰 흥미를 갖진 못했다. 

'걸크러시' 라는 조어를 좋아하지도 않을뿐더러 남성중심 사회에서 남성으로 살아온 내가 '여성의 삶' 을 다룬 책을 읽고 어떤 감상을 적을 수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여전히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문장과 단어를 고르고 있다.

다시 돌아가서, 이 책의 리뷰어를 모집한다는 포스팅을 처음 보았을 땐, 그닥 관심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소개 내용을 천천히 읽어보니 조금씩 마음이 동하기 시작했다. 

먼저 블로그에 연재 형식으로 그려진 만화 - 웹툰의 형태라는 것이 좋았고,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이 흥미로웠다. 

기원전 4세기의 산부인과 의사부터 미국 원주민인 아파치 부족의 전사, 최초의 수영복을 고안한 수영선수와  2차 세계대전때 스파이로 활약했던  프랑스의 무용수, 뜬금없는 등대지기는 물론 트랜스젠더와 측천무후까지. 

어느정도 이름을 들어본 이들도 있었고, 생소한 인물도 있었다.

리뷰어에 선정되지 않아도 보려고, 온라인 쇼핑몰 장바구니에도 담고, 도서관에 신청도서로 넣기도 했는데,



난 그다지 관심없는(^^;;), 색색의 굿즈들과 함께 포르르 날아와 주셨다.


총 열 다섯가지 이야기. 

그 중 마리포사는 세 명의 자매니까, 열 일곱명의 여성들이 등장한다.


목차는 아래와 같다.


클레망틴 들레_수염 난 여자
은징가_은동고와 마탐바 왕국의 왕
마거릿 해밀턴_무서운 배우
마리포사 자매_독재 정권에 맞선 자매들
요세피나 판호르큄_사랑 앞에 완고했던 여인
로젠_아파치 전사이자 주술가
애넷 켈러먼_인어가 된 소녀
딜리아 에이클리_탐험가
조세핀 베이커_무용가, 레지스탕스 활동가, 한 가정의 엄마
토베 얀손_화가, 무민 시리즈 창조자
아그노디스_부인과 의사
리마 보위_사회운동가
조르지나 리드_등대지기
크리스틴 조겐슨_셀러브리티
무측천_황제 

 

만화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통적인 유럽식 그래픽 노블로, 그림만큼 글씨도 많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아주 간략화된 인물 평전이랄 수 있는데, 업적을 중심으로 발랄하게 구성되어 있다.

특히, 그 시대를 살아간 주인공들이 결코 녹록한 삶을 살지 않았을텐데, 가벼운 필치로 경쾌하게 풀어내고 있다. 

지나친 미화나 엄숙주의는 결코 찾아볼 수 없고, 곳곳에서 깨알같은 유머들이 툭툭 터진다.  

그림체는 장 자끄 쌍뻬를 연상시키는 전형적인 유럽식 신문 카툰인데, 선이 무척 매력적이고, 인물들의 개성도 아주 잘 담아내고 있다.

한 인물의 이야기가 끝나면, 두 페이지 전체를 튼 일러스트가 자리잡고 있는데, 그 인물의 아이덴티티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아주 좋은 일러스트레이션들이다. 나에게 날아온 굿즈들 중에 하나로 B3 정도 크기의 포스터가 그런 일러스트 중 하나로 구성되어 있었다.

   

목차를 보면, '애넷 캘러먼' 의 일러스트레이션임을 한눈에 알 수 있을터다.



 역시나 여전히 조심스럽게 감상을 적어보련다.

나는 우리 사회가 가부장적인 권위주의 사회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교육을 받아왔다는 사실도 인정하고, 여권 신장이 우리 사회 전체의 숙제 중 하나라는 점 역시 인식하고 있다.

다만, 그 방법에 있어서는 사회적 공감대와 연구가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남성들을 끌어 내리는 방법이 아닌, 여성들이 끌어 올려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남녀가 함께, 우리 공동체 전체가 함께 연구하고 고민해야 하는데, 지금은 초기라 다소 첨예한 갈등국면이 이어지고 있지만,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조금 누그러지리라 본다. 

여성불평등은 인류 역사와 함께 태동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고, 인권에 대한 인식, 평등에 대한 인식이 자리잡은지는 고작 몇백년이다.계급, 인종, 성별 그 모든 것에 대한 평등 운동은 인류 역사에 비추면 이제 막 걸음마 단계일 뿐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은 아주 좋은 여성주의 입문서로 기능할 것이다.

지금보다 여성들에 대한 인식이 더 열악했던 과거, 시대의 편견을 직시하고 정면으로 받아낸 여성들의 이야기. 

모든 인물들의 삶이 인상적이었지만, 여성이고 동시에 아프리칸이었던 조세핀 베이커와 리마 보위가 가장 오래 남았다.

1906년생인 조세핀 베이커는 여성이면서 흑인이었고, 댄서였다.  

그는 자신의 여성성을 십분 발휘하여 과감한 공연을 펼쳤고, 그 덕에 많은 사랑을 받았다. 프랑스에서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모국인 미국에서는 여성이고 흑인이라 극심한 차별을 받았다. 
결국, 자신에게 큰 사랑을 보내줬던 프랑스를 사랑했고, 결국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으나, 기다렸다는 듯이 나치 침공 ㄷㄷ 

이렇게 유머러스하게 표현했지만, 얼마나 상심이 컸을까??

진정한 의미의 멘탈붕괴였을텐데, 조세핀 베이커는 사교계 인맥을 이용해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비밀 요원으로 활약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삶이 드라마틱하지만, 조세핀 베이커는 그야말로 켄 폴릿 작품 급으로 드라마틱하다. 


리마 보위는 상대적으로 가장 최근 인물이다. 1972년생으로 2011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은 분이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우리 사회는 수많은 차별의 연합체이다.

인간은 너무나 어리석어서 아주 작은 차이를 구실로 차별한다. 

리마 보위가 태어나고 자란 라이베리아 역시 그랬다.

아프리카는 서구 열강들의 무분별한 식민통치의 산물로 적대하는 여러 종족들이 한 국가, 한 도시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이슬람교와 기독교 갈등까지 있다. 부족갈등과 종교갈등으로 내전이 끊이지 않았고,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이들은 노인과 아이보다도 여성이다.   

폭력, 학대, 내전, 임신, 

                                

리마 보위는 한국 일일 드라마급 파란만장이다.

더 다행인것은 노벨평화상으로 보상받고, 앞으로도 쭉 활약할 사람이라는 것.                            

이 책 덕에 알게되어 구글링을 통해 많은 정보들을 접했는데, 정말 엄청난 사람이다. 

모든 평등 운동은 하나로 통한다는 것.

벨 훅스의 페미니즘 모토인  "모든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 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이다.


일련의 사회적 운동이 갈등을 야기할 수는 있다.

아니, 갈등을 야기하는 것은 당연하다.

진정한 권리는 투쟁을 통해 쟁취해야 비로소 자기것이 되는 것처럼, 갈등 자체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운동이 또다른 차별로 점철되어서는 안된다. 남성을 차별하는 것으로 남녀 평등을 이뤄낼 수는 없다는 의미다. 

갈등을 최소화 할 수 있는 부분부터 차근차근 시작해야 한다.

최근들어 나 역시 동참하고 있는, '그녀' 라는 대명사에 대한 문제의식 같은 부분.

이 책에는 '그녀' 라는 인칭대명사가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3인칭 대명사는 모두 '그' 로 통칭되어 있다.

이는 최근에 제기된 우리 언어의 성 차별 문제와 맥을 함께한다.

우리 언어는 외국에 비해 남녀 구별이 뚜렷하지 않다. 때문에, 남녀를 구별하는 단어에서 성차별적 요소가 더욱 도드라진다.

'그' 와 '그녀' 가 대표적이다.

'그' 는 3인칭 대명사로 기본형인데, 유독 여성만 접두어가 붙어 '그녀' 로 변형된다.

'그남' 은 없다. 처음부터 없었다. 

남성이 '기본형'이고, 여성은 '파생형'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명백히 차별적이다.

그러면 해결법은?

간단하다.

'그녀' 를 안쓰면 된다. 

기본형인 '그' 만 쓰면 된다. 굳이 남녀를 나눌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특히나 '그녀' 는 문어체이기 때문에, 굳이 안써도 된다. 세상의 모든 '그녀'를 '그' 로 바꿔도 문법이나 맥락면에서 전혀 껄끄러움이 안느껴진다.  그러면 외국어 Her 는 무엇으로 대체하나?? '그' 라고 하면 된다. him 도 '그'  라고 하면 되고.

우리 말의 인칭대명사는 원래 남녀구별이 없다. 외려 3인칭에만 있는게 이상한거였다.

다행히 이런 문제제기는 폭넓게 호응을 얻어 많은 텍스트들에서 '그녀' 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이처럼 사회적 공감대를 구할 수 있는 부분부터 차근차근 해나가면 된다.   

 

우리 사회의 페미니즘은 이제 막 두 다리에 힘을 느껴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조금 어려운 단어를 익혀 세상 모든걸 물어보는 세살 아이 정도에 불과하다. 우리 사회엔 리마 보위가, 조세핀 베이커가 없었을까??

아니다. 우리에게도 신사임당, 논개, 유관순, 남자현 열사 같은 분들이 계셨다. 다만, 이렇게 발굴할 생각조차 '덜' 했을 뿐.  

김영하 작가는 TV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 사회의 여성들이 이제 막 '말을 하기 시작' 했고, 우리(남성)들은 가만히 '들어야 할 때' 라고 했다.

비록 듣자마자 바로 완벽히 동의할 수는 없더라도, 우리 사회의 남성으로서 충분히 곱씹고,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해볼 만한 문장이다.

그리고, 이 책이 그 이유가 조금은 될 수 있을터다. 

단순한 걸크러시가 아니다.

은연중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차별을, 그것을 품고 있는 사회를, 모두 CRASH 하기 위한 CRUSH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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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타카코 씨 2
신큐 치에 지음, 조아라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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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코믹스 측에서 책을 보내주셨다! @.@ 

AK출판사(AK커뮤니케이션즈)는 코믹스 보다는 작법서로 잘 알고 있었다.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만화 작법서와 창작 활동에 큰 도움을 주는 자료서들을 뚝심있게 펴내는 출판사.

'들녘 출판사'의 '판타지 라이브러리' 시리즈의 출간이 멈추면서, AK 커뮤니케이션의 '트라비아북' 시리즈가 서브컬쳐장르의 아카이브 역할의 바통을 넘겨받았다.  

작법서와 트라비아북 모두 소재가 다채로운데, 메이드, 슈퍼히어로부터 전차, 크툴투까지 괴랄하고 아스트랄한 경지까지 뻗어있다.

그야말로 오타쿠들을 위한, 오타쿠의 자료들인데, 코믹스쪽에서 출간해내는 책들도 덕스럽긴 마찬가지다.

나는 요코야마 미츠데루의 일본 역사 만화들을 통해 AK의 만화들을 접했다.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장편 일본 역사물은 물론, 데츠카 오사무의 걸작집도 읽어봤지만, 이런 평범한 코믹스도 출간하는줄은 전혀 몰랐다. ㅋㅋㅋㅋ


이 작품은 정말 너무 소소한 일상물이다. 작품이라고 하기보다 소품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꽤 잘되는 레스토랑의 직원인 타카코가 출근해서 일을하고, 동료 직원이나 친구들과 어울리는 등 평범한 일상속의 소소함 속에서 행복을 찾아내는 이야기이다.

1권을 읽지 않았지만,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에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로 짧은 에피소들이 잔잔하게 흘러간다.   


최근들어 우리나라에 '소확행' 이라는 단어가 유행한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90년대에 썼던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 이라는 에세이에서 파생된 이 단어가 수십년이 지난 한국에서 세삼스레 유행한다는게 좀 의아하지만, 우리 사회가 일본 사회를 10여년 차이로 뒤따르고 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어느정도 수긍이 가기도 한다.

이제 우리 사회도 뜬구름 잡는 듯한 큰 희망이나 바램보다 일상에서 손에 꼭 쥘 수 있는 작은 것들을 통해 충분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쪽으로 변화했다는 뜻이리라. 

이 책은 그러한 '최근' 의 '우리' 에게 무척 잘 어울리는 책이다.

일상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들.


사람의 삶에 뭔가 의미가 있을까? 

매일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똑같은 장소에 가서,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오직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던질 수 있는 질문이며, 오직 살아있으므로 생각해볼 수 있는 의문이다.


또 다른 우문을 던져보자면, 

굳이 삶에 의미가 있어야 하나?? 

단지, 살아있음. 그 자체가 의미가 될 수는 없을까?


우리가 삶 속에서 반드시 뭔가를 이뤄야 할까?

하루하루를 챗바퀴처럼 돌면서,무엇을 위해 괴로움과 고통으로 하루하루를 지워내야하나??


왜 우리에겐 살아가는 이유가 필요할까?
사실은, 이유따위 없어도, 이렇게 잘 살아갈 수 있는데.

살아있기에 이유를 찾고, 이유를 찾기위해 살아간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자연의 거대한 섭리의 하나로서, 치열하게 의미를 찾고, 이유를 탐구하며 살아간다.
오직 인간만이 궁금해하는 그것.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결코 필요하지 않은 그것.
오직 나에게만 궁금하고, 오직 나만이 찾으며, 내가 숨쉬는 데에 결코 필요하지 않고, 내가 밥먹는 데에 결코 필요하지 않은,
내 삶의 의미와 이유.
타카코씨의 삶은 어쩌면 그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해서든, 하루하루를 만끽하는 삶.
그래,
적어도 이 책을 읽는 동안엔 운도 좋게 속 편한 가정에서 태어난, 배부른 돼지만이 느낄 수 있는 게으른 만족감을 한껏 즐겨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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