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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경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7월
평점 :
일본의 장르소설 작가들은 대단히 두터운 필모그래피를 자랑하곤 한다.
[십이국기] 로 유명한 오노 후유미는 그로테스크하고 잔혹한 [시귀] 시리즈로 더 먼저 알려졌고, [모방범] 과 [화차] 의 미야베 미유키는 [브레이브 스토리] 라는 판타지 시리즈를 꾸준히 펴내고 있다. 미스테리 작가인 온다 리쿠 역시 [도코노 시리즈] 라는 현대 배경의 판타지 시리즈를 보유하고 있고, 여행 에세이는 물론, 나오키 상을 받은 [꿀벌과 천둥] 이라는 순문학까지 이름이 닿아있다. 히가시노 게이고 역시 [편지] 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같은 미스테리와는 거리가 먼 작품들도 꽤 있다. (워낙 다작이기도 하셔서)
이런 필모그래피를 보면 너무 쉽게, 한 작가의 작품 한두 편만 읽고 그 작가의 작품세계 전반을 섣불리 단정해 온 것 같아 죄송스러운 마음까지 든다.
나에게 '요네자와 호노부' 라는 이름은 출세작인 [빙과]로 인해 비교적 '소프트한 미스테리' 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꽤 많은 작품들이 고등학생과 학교를 배경으로 삼는다 해도 집단 괴롭힘, 자살, 살인, 성폭력, 감금, 가정폭력, 존속살인, 원한 등 성인 범죄를 능가하는 잔혹한 테마를 다루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빙과' 의 학교에서는 다행스럽게도(?) 그런 하드코어한 사건을 다루지 않기 때문이었다.
[야경] 에 실려있는 총 여섯편의 작품은 그런 나의 편견을 보기 좋게 깨뜨려 주었다.
이는 온다 리쿠의 [밤의 피크닉] 먼저 읽고 단편집인 [도서관의 바다]를 읽었을 때의 경험과 비슷했다.
기 이야기꾼의 진정한 면모.
표제작인 '야경' 부터, '사인숙', '석류' , '만등', '문지기', '만원' 까지 비슷한 작품이 한편도 없다.
'야경' 은 제목 그대로 밤에 순찰을 도는 직업을 가진 사람, 즉 경찰관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총기 소지가 불법인 국가에서 경찰의 총기 사용은 대단히 민감한 문제다. 어지간한 흉악범과 대치중이라도 총기를 사용한다면 대부분 과잉진압으로 손가락질 받기 일쑤다. 조금 과한 감도 없지 않다고 생각되지만, 그런 경계심이 총기 사용에 대해 법보다 더 강력하게 총기 규제의 정서를 환기시킨다는 사실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화자인 '나' 는 파출소 소장이다. 경찰대를 졸업하면 바로 간부 계급인 경위로 부임하는데, 9급 경찰 공무원으로 응시해서 붙으면 경찰학교(경찰대와는 다름)에서 일련의 훈련과정을 겪은 뒤 순경으로 일선 현장에서 시작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나' 와 가지이, 가와토는 모두 경찰 공무원, 순경으로 시작한 경찰들로 보인다. 특히, '나' 는 이십 년 경력의 베테랑으로 묘사되는데, 어떤 동기는 과장까지 된 걸 보면, 승진의 '테크트리' 에서는 꽤나 벗어난 상황임을 알 수 있다.
'나' 는 신입인 가와토를 사실 '경찰에 맞지 않는' 유형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전에 그렇게 판단했던 부하 직원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경험 -승진의 테크트리에서 벗어나게 된 이유로 보인다- 이 있어서 이번엔 결코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마음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신입 순경 가와토의 장례식과 함께 이야기가 시작된다.
가와토는 흉기를 든 '다자와' 라는 인물과 대치중에 총기를 사용했으나,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가와토가 쏜 총알은 다자와에게 정확히 명중했으나, 다자와도 죽음의 순간에 최후의 일격을 뻗었던 것이다.
이야기는 차근차근 과거로 되짚어간다. 가와토가 '나' 에게 배속되던 시기부터, 경찰서를 찾아온 민원인들을 상대하고, 경찰서 앞 공사장에서 어떤 일이 생기고, 총기를 수령하는 그 날 아침까지.
지속적으로 '총기' 와 '총알' 을 강조하며 독자들을 이끈다. 아주 훌륭한 떡밥에, 아주 완벽한 수거!!!
군더더기 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흐름과 적절하게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 내러티브가 풍성한 캐릭터까지 아주 좋았다
특히 마지막 반전은 리얼리티가 훌륭해서, 설득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뒤의 작품들도 전반적으로 매우 훌륭했다.
상대적으로 '사인숙' 이 가장 평범했고, '석류' 는 에로틱한 애착관계에 관한 소시오패스적 접근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한때 인터넷에 떠돌았던 '소시오패스 이야기' (아버지 장례식장에 찾아온 남자를 다시 만나기 위해 엄마를 살해한다는 딸의 이야기)의 다른 변주처럼 읽혔다. '만등' 은 해외 자원 개발 공사를 따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회사원의 끔찍한 선택에 관한 이야기다. 잘못된 하나의 선택이 또 다른 극단적 선택으로 인도하지만, 그 선택의 결과와 상관없이 주인공의 운명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고 만다. '문지기' 는 자동차 추락사가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언덕에 관한 취재를 하는 프리랜서 기자의 이야기이고, 마지막, '만원' 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 으로 유명해진 '감성 스릴러' 라는 하위 장르의 카테고리에 넣을 수 있겠다.
모든 작품들이 짜임새가 훌륭했고, 깔끔한 구성과 적재 적소에서 복선을 훌륭하게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허투루 버린 떡밥이 없는, 뿌린 떡밥은 반드시 회수하고야 마는 딱 떨어지는 완결성이 돋보였다. 모든 작품들을 그대로 연극 무대에 올리거나 영화로 만든다면 그대로 각색하면 될 정도로 공간의 이해와 적용, 그에 걸맞는 직업인에 대한 철저한 취재와 활용이 돋보였다.
단편이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최소화된 공간에, 뚜렷한 캐릭터를 올려 가장 효율적인 동선으로 이끄는 재주가 무척이나 능란하게 느껴졌다.
각각의 단편들에 등장하는 모든 직업들이 다 다르고, 전문직인 데다 묘사가 무척이나 훌륭하다.
'야경' 의 경찰, '사인숙' 의 온천장 직원, '만등' 의 자원 개발 회사의 해외 파견 사원, '문지기' 의 기자, '만원' 의 변호사까지, 직업의 전문성과 성격, 말투 등을 아주 현장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작가의 취재력도 취재력이지만, 직업과 직종, 그 직종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특수성을 짚어내는 통찰력을 읽을 수 있었다.
'야경' 다음으로는 '만등' 이 너무 좋았다. 그 자리에서 두 번이나 다시 읽고도, 오랫동안 머릿속에 빙빙 맴돌았다.
'악의 평범성' 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인간이 악해지는 이유는 인간의 본성과 관계 없이, '악' 을 평범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조건과 환경만 제공된다면 누구나 끔찍한 악마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만등' 의 주인공 역시 그러한 상황에 놓여있었고, 자연스럽게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만다.
악은 반드시 처벌받고, 선은 반드시 상찬 받는다고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어딘가에선, 반드시 그러기를 바란다.
적어도, '정의' 에 있어서만큼은 우리 모두가 이상주의를 버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만등' 의 주인공이 명백한 악이고, 기발한 방법으로 심판을 코앞에 두었다면, '문지기' 는 악도 모호하고, 정의의 실현도 모호하다.
나는 삶에 대해 운명론적 시각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모든 게 우연이라고 믿지도 않는다.
적당한 운명; 필연과 적당한 우연. 그런 것들이 랜덤하게 얽혀가는 게 삶이라고 생각한다.
'행운' 과 '불운'. '필연' 과 '우연'. 그리고, 삶과 운명.
두 작품의 화자들은 모두 안타까울 정도의 운명을 맞이한다.
'만등' 과 '문지기' 는 요네자와 호노부라는 작가가 갖고 있는 인간의 본성, 사회성, 그리고 운명에 관한 상반된 시각을 보여준다.
이 두 편 만으로 선과 악도, 정의와 불의도 나눌 수 없는 복잡한 인간의 삶에 대해 한번쯤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그 나눔의 기준이 명백히 '상대적' 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같은 행위도 어떤 경우엔 선, 정의이고, 또 다른 어떤 경우엔 악, 불의가 되기도 한다.
물론, 이토록 불분명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소설이 재미있는 이유겠지...
다시 말하지만, 모든 작품이 참 좋았다.
어떤 작품에서는 목덜미가 서늘할 정도로 번득이는 스릴을 선보이기도 했고, 톱니바퀴처럼 맞아떨어지는 추리소설만의 장르적 쾌감을 보여주기도 했다. 고전적인 방식의 수수께끼 풀이, '오싹한 귀신 이야기' 풍의 기담 소개, 시간대를 쪼개 자유롭게 배치하는 현대적인 글쓰기와 캐릭터의 매력이 드러나는 감성적인 접근까지.
요네자와 호노부라는 작가가 얼마나 다재다능한 이야기꾼인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