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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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단편은 반드시 뚜렷한 기승전결이 압축되어 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이야기가 있어야 했고, 살아있는 인물들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이 어우러지는 간결한 이중 삼중의 플롯들이 겹쳐 있어야 했고, 뒷머리를 짜르르 울리는 반전도 있어야 했다. 문장은 주제와 메시지를 중심으로 응결되어 있되, 단어들은 적당하게 중의적이어야 했다. 플롯에 따른 인물들은 때로 다르게 해석될 수 있어야 했고, 인물에 따른 플롯 또한 때론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야기는 완벽하게 닫혀야만 했다. 작품의 시작을 알리는 첫 글자에서부터, 끝을 알리는 마침표 하나까지. 군더더기가 없이 꽉 맞물려 있어야 했다.

내가 생각했던 단편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각기 다른 돌들이 마치 테트리스 게임처럼 완벽하게 계산된 틀 안에서 꽉꽉 맞물려진 모양.

장편이 긴 호흡의 자유로운 이야기라면, 단편은 순식간에 숨통을 틀어막는 일격 필살과도 같은 정련된 날카로움이라고 생각했다.

때론 긴 여운도 괜찮았다. 이야기의 구조상으로는 정확하게 짜여있지만, 의도적으로 뒷문만 열어놓은 모양새. 결말까지 가는 인과관계가 차근차근 맞아떨어지며 결말에 가서는 보다 여러 의미로 재해석 될 수 있는 활짝 열린 결말.

 

하지만, 그런 편견들은 독서의 폭을 아주 약간 넓히는 순간 와장창 부서져 버렸다.

삶이란 언제나 완전무결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래서 누가 어떻게 될지.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어떤것도 완결되지 않는다. 때론 그 어떤것도 완결시키지 못한 채, 삶 자체가 종결되어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종결일 뿐, 완결일 수 없다. 어쩌면, 내가 살면서 벌려놓은 수많은 일들은 대를 이어 어떤 누군가가 끊임없이 연결시켜 나가기 때문이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야기이다. 영원히 이어지고, 때론 영원히 되풀이 된다.

 

[로봇] 에서 수경은 자신이 '로봇' 이라고 주장하는 한 남자와 잠깐동안 만남을 갖는다. [로봇] 은 완전하게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랑은 인간이 가진 감정 중에서 가장 폭력적이고 가장 복합적이며, 가장 혼란스러운 감정이다. 수 많은 사람들은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만큼의 사람을 사랑을 회피한다. 하지만, 살아있는 동안 사람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은 언젠가 누구에겐가 어떻게든 찾아든다. 어느날 갑자기 자신을 로봇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눈 앞에 나타날 수도 있고,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 있다. 그리고, 이윽고 그 사람을 위해 죽을 수도 있게 될 것이고, 그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삶 속에서 가장 불완전하고, 가장 위험한 순간일수도 있다.

 

사랑은 때론 이유없는 집착을 불러오기도 한다. [여행] 에서 한선은 다른 남자와 결혼을 앞둔 수진과 마지막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생각만해도 소름끼치는 순간이기도 하다. 옛 연인이. 물론 꽤나 깊은 관계였던 남자이긴 하지만, 결혼을 불과 며칠 앞두고 집요하게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한선은 인생에 중요한 무언가를 그녀가 가지고 갔다고 생각한다. 그 공허함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랑, 연애란 자기 마음을 통째로 남에게 들이 미는것이다. 줘버리는 것이다. 오랫동안 연애를 못하는 남녀들은 대부분 자기 마음을 남에게 맡기기가 두려운 경우가 많다. '이 사람에게 내 마음을 줘도 될까? 내 마음을 받아줄까? 내 마음을 맡겨도 될 만큼 능력이 있는 사람일까? 줬다가 다시 잘 찾아올 수 있을까??' 한 번 줘 버린 마음은 온전히 되찾아올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 연애가 중간에 깨지고 다시 남남이 되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부부가 되든. 마음을 떼어 주는 순간, 삶은 더이상 혼자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때문에 사람은 사랑했던 대상에 어떻게든, 어떤 식으로든 집착하게 된다.

 

[악어] 는 '재능' 에 관한 이야기이다.

예술의 세계는 재능의 세계이다. 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살리에르는 모차르트처럼 될 수 없다. 내가 하루에 한시간만 자고 미친듯이 수영을 한다고 해도 박태환을 따라잡을 수 없다. 사실 하루에 몇시간씩 만화를 그렸지만, 일찌감치 데뷔하는 만화작가들의 발 뒤꿈치에도 못 미친다. 예술은 분명 타고나는 사람의 세계이다. 재능이란 말 그대로 태어나면서 부터 갖게 되는 일종의 능력이다. 왜? 왜 나에겐 없고 그에겐 있을까? 어째서?? 하지만, 아무리 의문을 갖고 발버둥치고 노력을 해도 그들의 세계에 가까이 갈 수 없다. 기술은 연습에 따라 능숙해질 수 있지만, 센스는 결코 연습할 수 없다. 예술의 세계는 언제나 소수의 천재들이 발전시켜 나간다. 아니, 어느 분야이든, 세상은 언제나 소수의 천재들이 발전시켜 나간다. 그건.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렇게 수많은 사랑과 증오, 복수와 만남등에 관한 이야기들이 김영하 작가 특유의 담담하고도 리얼한 서술로 펼쳐진다.

위의 세 작품들 말고도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조] 와 [퀴즈쇼], [오늘의 커피] 였다.

딱 한쪽(!!) 분량의 작품인 [명예살인] 도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조] 의 경우는 김영하 작가의 장편들이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관음적인 느낌을 주는 서술도 대단히 인상적이었고, 뒷통수 치는 반전에 등장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강렬한 인상도 마음속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퀴즈쇼] 는 꽤 인위적인 장치들이 대단히 흥미롭게 맞물려 있었다. 마치 김영하 작가가 작정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보여질 정도! 게다가 꽤나 해피한 엔딩도 오히려 김영하 작가였어서 굉장히 신선했다. 소설속의 소설을 보는 느낌이랄까? 온통 리얼리즘으로 가득한 다큐멘터리 사이에서 통속적인 드라마 한 편이 끼어있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소설들의 배치 또한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앞 뒤에 배치되어있는 '바다 이야기 2' 와 '오늘의 커피' 모두 그냥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 마냥 리얼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커피]  역시 짤막한 작품이었는데, 김영하 작가가 가지고 있는 플롯을 만들어내는 능력에 감탄에 감탄을 더할 수 밖에 없게 했다.

아니 어쩜,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재밌게 풀어낼 수 있지?? 할 정도.

아...역시...이래서 재능은 재능이구나... 하는 감탄만이 신음처럼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아...감상을 적어나가다 보니, 책에 수록되어있는 작품들을 다 언급할 것 같다.

 

최근 한국 문학의, 아니 개인적인 생각으로, 세계 문학의 흐름은 '판타지'이다. 누가 얼마나 더 절묘하게 비트느냐.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더 진짜같이 그려내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판타지리얼리즘' 이라는 애매모호한 합성단어로 표현하기도 하는 듯 하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 사이에서 얼마나 절묘하게 줄타기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독자들이 환상인지 현실인지 헛갈릴수록 좋다. 현실이 점점 더 싸이코틱해 지면서 이런 현대문학의 흐름도 점차 거세지고 있다. 끊임없이 팩션이 솟아나오고, 몇 년 간 발표되는 젊은 작품들은 문학성과 대중성, 거기에 참신한 발상까지 고루 갖춘 '판타지리얼리즘' 에 입각한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확실한건, 그 모든 근간은 결국은 리얼리즘이라는 사실이다.

현실을 글로 녹여내지 못하는 작가는 결코 환상과의 사이에서 균형잡힌 줄타기를 할 수가 없다.

수많은 대가들이 여전히 정통 역사물에 사명을 갖고 있으며, 현실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말이다.

 

김영하 작가는 내가 알기엔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뉘는 작가군 중 한명이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가슴 깊숙히 묻어놓은 수많은 속물스러움들을 표면으로 어떻게든 끌어 올리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집도 여전하다. 한결 능란해진 유머와 위트, 그리고 리얼한 묘사들 사이로 바득바득 속물스러움들을 찾아낸다. 울렁거리는 목을 움켜잡지만, 꾸역꾸역 입 밖으로 쏟아낸다. 내가 쏟아낸 나의 본성들을 바라보며, 다행히 역겨워하지는 않게 되었다. 그냥, 나도 사람이고, 결국 나도 속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작가와 함께,  나도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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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불로문의 진실 - 다시 만난 기억 에세이 작가총서 331
박희선 지음 / 에세이퍼블리싱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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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은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궁인 동시에, 가장 한국다운 정원이 있는 곳이다.

빽빽하고 빡빡하게 우뚝우뚝 솟아있는 나무들 사이에 분명 인위적이지만, 인위적으로 보이지 않는 길들이 나 있고, 아름다운 단청을 지닌 건물들이 고요하게 자리잡고 있다. 확실히, 그곳은 공기부터 다르다. 창덕궁 주변만 가도 공기가 다르다. 무성한 수풀은 담장 위로도 거침없이 뻗어있고, 자동차의 매연이 느껴지지 않을정도로 청아한 공기를 내뿜는다.

한국에 고궁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어디나 통일성을 해치는 듯 한 구조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수 세월동안 전쟁이나 재해로 소실된 부분을 증축하거나, 일제 강점기 일본의 만행으로 통째로 드러내지거나, 갖다 심어진 건물들도 있다. 그리고, 이 작품에 등장하는 불로문이나 청의정, 기암괴석들 처럼 의도적으로 세워진 건축물들도 있다.

 

이야기는 일제시대에서 시작된다.

경성대학 법학부에 재학중이던 청년 시형은 우연히 일본 730부대의 대장 와타나베를 습격하는 독립군들을 목격하게 된다. 와타나베를 암살하고 그가 가지고 있던 서류가방을 빼앗는데 성공한 독립군 무리. 하지만, 시형은 수많은 일본군과 730부대의 부대장인 겐조에게 쫓기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볼 뿐이었다. 자취방으로 돌아가던 시형은 일본군에게 쫓기던 독립군 중 한명이었던 인국과 마주치게 되고, 엉겁결에 시형은 인국이 가지고 있던 와타나베의 서류가방을 건네받게 된다. 서류 가방 안에는 오래된 고서인 '동굴궐지'  한 권과 괴이한 문양을 본뜬 탁본 한 장, 그리고 말라 비틀어진 정체를 알 수 없는 식물의 뿌리가 들어있었다. 시형은 이렇게 수천년의 역사를 지닌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마칠 퍼즐처럼 많은 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춰나가는 듯한 작품인 '불로문의 진실' 은 '다빈치 코드' 의 열풍 이후 우리나라를 휩씁고 지나갔던 '팩션' 이라는 장르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간 수 많은 작품들이 팩션이라는 이름 아래 솟아났다 사라졌지만, 개인적으로 다빈치 코드가 제시했던 '팩션' 의 정형에 가장 부합한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 아닐까 싶다. 과거와 역사를 아우르는 설정과 시간을 넘나드는 방대한 퍼즐, 얼키고 설킨 인간관계. 그리고 그것을 짜 맞춰 나가는 과정은  뛰어난 어드벤쳐 게임처럼 논리적이고 인과적으로잘 맞아 들어간다. 게다가 요소요소에 숨겨둔 캐릭터들 또한 상당히 흥미롭다.

  

하지만, 안타까운 점은 그런 훌륭한 아이디어들이 적재적소에서 명민하게 활동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먼저, 스토리 텔링의 문제를 거론해야 겠다. 한 명의 독자로서, 이 작품은 플롯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단순하고 일관적인 이야기의 흐름을 보여준다. 솔직히, 그냥 긴 시놉시스라 봐도 무방하다. 중간중간 들어있는 과거의 장면들을 빼고 본다면, 메인 스토리 텔링은 그냥 '대화' 이다. 주인공이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고, 또 다시 찾아가서 대화를 나눈다. 작은 사건들이 일어나긴 하지만, 주인공의 행보나 심경에 어떠한 변화도 주지 않는다. 사건의 흐름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냥 퍼즐들이 평이하게 죽 하나하나 맞춰져 나간다. 극적인 효과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중간 중간에 들어가는 과거 일화들은 오히려 좀 낫다.

 

진시황대 서불의 이야기와 조선조 숙종의 이야기가 한 편씩 끼어 있는데, 서불과 숙종의 이야기엔 오히려 몰입감이 강하다.

그 작은 두 토막의 이야기들에는 확연히 플롯이 존재한다. 독자의 호흡을 빼앗고 흥미를 유발시킬만한 요소들이 잘 스며들어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 또한 메인 스토리의 흐름에는 오히려 독이 된다.

이 이야기들을 주인공이 찾아내는 방식이 아니라, 그냥 난데없는 과거사가 등장하는 것이다. 주인공 시형과 그가 살아가는 일제 강점기의 이야기엔 어떠한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 설명적인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다. 메인 스토리에 몰입되다가도 작가는 난데없이 독자들을 타임슬립 시키는 것이다. 독자들을 완벽하게 이야기에서 제외시켜 버림으로서 작품은 또 다시 흡인력을 잃게 된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캐릭터는 독자를 안내하는 동시에, 독자를 이야기속으로 끌어 들이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플롯이 빈약해도 캐릭터가 강렬하면 재미있는 작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플롯이 아무리 제 역할을 다 한다 해도 캐릭터가 빈약하면 작품은 그만큼 더 재미가 없어진다. 독자들은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캐릭터를 통해 감정을 이입하고, 일종의 간접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로문의 진실] 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안내자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했지, 이야기속으로 독자들을 끌어 들이는 데에는 완벽하게 실패했다. 오히려 캐릭터들 또한 이야기에 밖에 머무는 듯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떠한 갈등이나 고민없이 퍼즐들을 풀어나가고 있다. 그냥 누군가를 찾아가서 물어보면 답이 툭툭 나온다. 그 누군가를 찾아 나가는 과정도, 그냥 어떻게 알아서 간다. 가면, 거기 답을 잘 아는 사람이 떡 하니 버티고 있다. 마치, 수학 문제집을 풀다가 막히면 바로 해답지를 보는 듯 하다.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과정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빈약한 캐릭터들은 빈약한 플롯과 만나 아무런 매력이 없어져 버린다. 갈등을 겪지 않는 캐릭터는 독자들에게 어필 할 수가 없는것이 당연하다.

이들의 성격조차 작가의 서술 한두마디로 설명되고 있다.

"시형은 어떠어떠한 성격의 어떤 인물이었다. 인한은 이런이런 성격이었다."

이렇게 말이다.

그러다 보니, 후반부에 자리잡고 있는 인물 반전들이 그다지 충격적으로 와닿지 않는다.

캐릭터들에 이입이 되어있지 않은 상황이기에 인물을 통한 반전이 독자들의 감정에 그다지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것이다.

차라리, 이야기 속에 짜투리로 등장하는 서불과 숙종이 훨씬 매력적으로 보일 정도이다.

설정이 메인스토리가 되어버린 격이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불로문의 진실] 이 가지고 있는 소재들은 [다빈치 코드] 의 그것보다 나으면 나았지 부족할 건 없었다.

건축물, 괴이한 문양들,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고궁인 창덕궁. 거기에 진시황과 숙종을 아우르는 폭넓은 역사. 불로초라는 매력적인 식물.

조금만 더 작가가 욕심을 부리고, 플롯과 캐릭터에 공을 들였으면 어땠을까 싶다.

 

한국형 팩션은 수 년 전 등장했던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빈치 코드] 의 열풍보다도 훨씬 예전부터 우리의 작가들 또한 역사적인 픽션을 시도해 왔다. 그도 그럴것이, 어느 나라의 역사에든 미스테리가 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이 '이상' 이라는 조금 매니악한 인물을 포커스에 맞추고 있었지만, [불로문의 진실] 은 위에도 언급했듯,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열광할만한 소재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아쉽고, 또 아쉽다.

차라리 이 작품이 이렇게 단번에 책으로 출간되었을 게 아니라, 신춘문예나 여러 공모전을 통해 많은 심사위원들에 눈에 비춰지고, 그로 인해 다듬어질 기회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올해, 아니 최근 몇년간 내가 읽었던 몇 권 안되는 한국 문학들 중 가장 아쉬운 작품으로 꼽아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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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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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언제나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 직면하게 된다.

그 순간들은 대부분 명확한 두갈래의 길로 갈려져 있다. 때론 세갈랫길, 혹은 네갈랫길로 보이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선택의 여지가 둘 뿐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그 두 길의 대부분은 '안정' 과 '도전' 인 경우가 많다. 때론 안정 자체가 도전이고, 도전 자체가 안정인 경우도 있지만, 다시 말하면 '현실' 과 '이상' 이란 뜻이다. 사람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보수적이 되기 마련이다. 육체는 약해져서 쉬이 피로를 느끼게 되고, 그동안 쌓아서 깔아둔 바닥에서 쉬이 몸을 일으키지 못한다. 좋게 말하면 현실에 안주하고, 조금 나쁘게 말하면 현실과 타협한다.

 

하지만, 삶은 때로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하곤 한다.

'남들이 다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한다' 는 선택 말고, '하지 않으면 죽으니까 반드시 해야한다' 는 선택을 말한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굴지의 로펌에서 엄청난 연봉을 받고 부유하게 살아가는 미국의 중상위층 계급을 형성하고 있는 변호사 '벤 브래드포드.

그는 처음부터 현실을 선택해오던 사람이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수많은 배경들을 업고, 역시 자신도 그 배경 안으로 걸어 들어간 전형적인 미국 부유층의 외아들. 그런 그에게도 사진사라는 꿈을 꾸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도 수많은 선택의 순간들이 있었다. '안정' 과 도전'. '현실' 과 '이상'. 그런 상황에서 '도전' 을 택하기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도전' 을 택하는 순간 지금 이 순간의 달콤한 '안정' 을 산산히 깨부수고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벤은 도전이 주는 불안정함, 그리고 불안정함이 주는 고통과 괴로움에 맞설 용기가 아주 조금 부족했다.

그렇게,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오던 벤에게 엄청난, 정말 엄청난 일이 벌어지게 된다.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는 외길뿐인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이 작품은 크게 3부로 나뉘어 있다.

1부는 누구나 꿈꿀만한 부와 가정을 이뤄낸 한 남자의 이야기. 하지만, 세상에 언제나 '만족할만한' 삶이라는 것은 없다. 세상엔 기회비용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삶 전체를 관통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항상 한 가지를 얻기 위해 다른 한 가지를 포기할 수 밖에 없다. 벤 브래드포드는 현실을 위해 이상을 포기했던 것이다. 그의 아내 베스 또한 그랬다. 그녀는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꿈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점차 남편과 현실을 포기하게 된다.

벤 브래드포드와 그의 아내 베스의 불화가 처음부터 아주 대놓고 등장한다.

미드 '위기의 주부들' 이나 'O.C' 등을 떠올리게 하는 부유한 거리에서 부족함 없이 지내는 벤의 가족. 하지만, 그 전반에 깔려있는 불협화음와 위화감. 그것들이 아주 리얼한 필체로 그려져 나간다. 꿈을 포기한 댓가로 얻은 현실. 아내의 꿈을 포기하게 만든 댓가로 얻은 현실. 그리고, 그런 현실을 기반으로 다시 꿈을 향한 삶을 살고 싶지만, 그게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현실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약들을 물처럼 마시며 사는 현대인의 단면.

 

2부와 3부는 벤이 예기치 않은 큰 사건을 겪으면서 다른 방향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내용이다.

이제야말로 벤의 인생은 외길이 되어버렸다.

1부에 등장하는 벤의 삶과 2,3부에 등장하는 벤의 삶의 큰 차이점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었다.

선택, 그리고 결과. 많은 일들이 좀 어이없을 정도로 벤의 의도대로 풀려나가는 것 같다는 부분이 상대적으로 긴장감을 많이 떨어뜨렸지만, 작가의 탁월한 문장력이나 꼼꼼한 심리묘사가 돋보였다. 사실, 사건 그 자체만 놓고 본다면 작품 자체의 이야기는 밋밋하기 짝이 없다. 긴장이나 갈등을 조성할 수 있는 요소가 중간중간 굉장히 많이 등장하지만, 그 장치들을 거의 활용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이 작가의 의도였을 것이다. 작가는 환경적인 갈등이나 긴장감을 불어넣기보다 주인공 내면의 긴장과 갈등에 집중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때문에 이야기는 후반부로 갈수록 몰입감이 떨어지고, 클라이맥스는 지지부진하다.

차라리 초반에 보여졌던 가정, 현실, 사회와의 치열한 갈등들이 훨씬 좋았다고 느껴진다.

1부는 드라마, 2부는 스릴러, 3부는 로드무비 - 그런 느낌이다.

분위기도, 느낌도, 이야기의 구조도 모두 별개의 것이 되어 꽤 신선한 느낌을 주지만, 개인적으로는 작품의 완성도를 많이 떨어뜨리게 되지 않았나 싶다. 후반부는 너무 주인공의 의도대로, 그리고 너무나 뚜렷한 인과관계대로 밋밋하게 흘러간 점이 너무너무 아쉽다. 훨씬 다양하고 복잡한 내러티브를 이끌어낼 요소들이 너무나 많았는데, 작가가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것에 너무나 집중한 나머지 많은 이야기적 재미의 요소들을 포기한 것 같아 대단히 아쉽다. 

 

한 사람이, 자신이 자신임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예로부터 많은 철인들은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들을 사색해 왔다. 아주 유명한 명제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는 말도 있고, '네 자신을 알라' 라는 말도 있다. 수많은 장르 소설가들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이용해 인간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로봇, 안드로이드, 사이보그 등등. 신이 아닌 인간이 창조한 피조물들. 그는 스스로를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인간사회는 몇가지 단순한 표식들을 이용해 타인을 증명한다. 이름, 주민등록번호, 운전면허증, 자격증, 여권, 주민등록등본, 인감, 사인, 필체, 지문, 치과기록,동공 등등. 피나 유전자를 이용하기도 한다. 그래, 그렇게 사람은 스스로를 뭔가 표식을 통해 증명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인생' 이 나의 것이라고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

당신.

우리는 정말 우리의 인생을 살고 있는가?

부모님의 인생, 선생님의 인생, 아내와 자녀의 인생, 사회의 부품으로서의 인생. 마지못해 살아지는 인생.

그것들이 온전히 나의것. 당신의 것. 우리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어떤 절대적인 자가, 당신에게 '너의 인생이 너의 것임을 증명해 보아라.' 라고 한다면 과연 증명해낼 수 있을까?

거기서, 내가 졸업한 학교의 졸업장들이나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나 속해있는 팀의 구성원이라는 자격증을 내민다고 증명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돈을 모아온 통장을 내밀어서 거기 찍혀있는 숫자들을 내보이면, 역시 증명할 수 있을까???

 

삶을 살면서, 인생을 바쳐 하고픈 일을 찾기도 쉽지 않지만, 설령 찾았다고 한들 그 일에 인생을 바치기도 쉽지 않다.

우리의 눈에 삶은 언제나 외길인 듯 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선택의 기회들 속에서 우리는 매번 한 길만을 보게 된다. 그게 도전이든, 혹은 안정이든.

나는 잘 모르겠다.

아마,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모를것이다.

난 제대로 선택했을까?

내가 선택한 이 길의 끝엔 과연 뭐가 있을까?

삶의 끝은 당연히 죽음이다.

그래, 그렇다면, 내 삶의 끝엔 어떤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까?

바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난 삶이란 죽음으로 가는 과정일뿐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그리고, 이 작품을 생각이 달라진 뒤에 만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삶이란 단지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죽음 자체를 배재시키기 때문이다.

삶이란, 영원으로 가는 과정이다.

그 누구도 내일 당장 죽을거라고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가지 않는다.

삶은 영원하다.

내일도, 모레도 계속된다.

이런 영원한 삶을 , 난 하고픈 일을 하며 살아가고 싶다.

내일 한다고?

 

오, 하지만,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내일의 삶은 내일부터이다.

어쩌면, 당신의 삶 속에서 '선택' 할 수 있는 순간은 바로 지금 뿐일 수도 있다.

때로 삶이란, 운명이란, 당신의 눈 앞에 정말 외길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딱 하나의 외길.

벤 브래드포드에게 그랬듯 말이다.

 

어쩌면 삶이란, 인간이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어느것도 선택하지 못했으면서, 선택했다고 착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삶이라는 단어에 '나의' 라는 건방진 소유격을 써서는 안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삶이란 생각보다 엄청나게 길고,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일어나며, 엄청나게 많은 다른 삶들과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난, 살아있어서 좋다.

아마, 벤 브래드포드도, 결국은 그렇게 되뇌일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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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 - 2010 제34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청춘 3부작
김혜나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설마 '섹스' 나 '정사' 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고 청소년 유해 게시물, 19금 딱지가 붙는건 아니겠지....

 

 

 

 

한 때 소설속에 등장하는 정사장면은 사랑과 화합의 상징이었다.

겉돌던 두 남녀가 결국 소통에 극적으로 성공하고, 마음이 서로에게 맞닿아있다는 증거라도 보여주겠다는 듯 했다. 소설속의 주인공들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수많은 창조적인 메타포들로 도배되다 싶이 했었다. 이제는 클리셰에 가깝지만, 너울너울 나부끼는 얇은 실크 커텐이나 솜털같은 침대, 귓가에 울린다는 종소리나 뜨거운 불기둥 같은 묘사는 오히려 직유에 가까울 정도였으니. 당연하게도, 그런 메타포들은 남성 작가와 여성 작가가 완벽하게 그 궤를 달리했다. 공격적이고 일방적이며 보다 욕구에 충실한 남성 작가들의 메타포는 울렁거릴정도로 선정적이었고, 여성 작가들의 메타포는 보다 은밀하고 포용적이었으며 아름다웠더랬다.

 

문화가 더욱 개방되며, 무라카미 하루키나 무라카미 류의 작품들을 접했을땐, 그야말로 화들짝 놀랐더랬다.

일본 소설들은 보다 적나라한 시각적 묘사들로 정사장면을 그려내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메타포란 불필요했다. 애초에 정사장면을 메타포로 그려내려고 했던 적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농밀하고 디테일한 묘사는 거의 야동을 보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인터넷만 틀면 헐벗은 여자들의 정사장면을 가림 없이 볼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던, 나의 고교시절엔 그런 일본 소설들이 남학생들 사이에서 포르노와 함께 손에 손을 타고 옮겨다니곤했다. 일본 소설에 등장하는 정사장면들은 성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던 당시엔 자극적이고 선정적이었지만, 어느정도 나이를 먹은 지금은 그런 자극을 크게 느끼지 못한다.

그 장면들이 자극적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를 어느정도는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먹고 마신다. 섹스또한 그러하다. 우리보다 일찍 개방적인 성문화를 가지고 있던 그들에게 섹스란 그냥 당연한 것이었다.

쌀을 씻어서 솥에 앉히고, 뜸을 들인 뒤, 반찬을 조리해서 테이블에 올려놓고, 숟갈로 떠먹는 장면을 묘사할땐 메타포가 불필요한 것 처럼, 섹스 또한 그랬던 것이다. 굳이 메타포로 아름답게 승화시킬 필요도 없고, 상징적인 의미를 애써 부여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이런 성 문화가 우리나라에도 찾아오면서 최근 한국의 현대문학에서도 거침없고 가감없는 정사장면들을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유교관념에 의해 혼전순결이 중시되던 풍조는 사라진지 오래고, 성경험 시기도 10대 중후반으로 훌쩍 뛰어넘었다. 이 세대는 우리 이전 세대보다 섹스가 보다 친숙하고 쉽다. 생명의 잉태, 가족의 탄생, 사랑의 결실, 소통과 조화의 증거. 이런 단어들은 섹스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런 관점에서 나의 세대는 그 중간 어딘가에 위치하지 않았나 싶다. 내가 10대때와 20대때. 그리고 30대에 접어든 이 시기에 섹스에 관한 사회적 분위기는 엄청나게 달라졌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성을 만나, 보다 쉽게 하룻밤을 함께한다. 만난지 몇시간만에 키스...이런전 이제 구시대의 질문에 불과하고, 만난지 얼마만에 모텔이나 러브호텔로 가느냐...가 더 설득력있는 질문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이런 과도기 시대에 섹스에 대한 관념이 변하고, 문학작품 속에서 그 역할이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개인적인 성 관념을 떠나 한명의 독자로서 대단히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 역시 비교적 유연하게 흐름을 타며 작품들을 즐겨왔지만, [제리] 에 등장하는 정사장면에 대한 묘사는 그야말로 문화 충격에 가까울 정도였다. 뭐랄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포르노에 등장하는 오럴섹스를 보았을때의 느낌이랄까. 뒷골이 저릿 할 정도의 강렬한 불쾌감. 성적인 흥분은 훨씬 뒤에 찾아드는, 역겨움. 위화감. 내가 [제리] 의 정사장면에서 그런 위화감과 역함을 느낀건 단지 그 묘사가 디테일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디테일한 묘사는 위에 언급한 무라카미 류나 하루키와 비슷한 정도. 글로 정사장면을 묘사할때 메타포를 배재한다면, 그저 도색사진이나 포르노를 보는 그대로 묘사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으니까.

 

내가 [제리] 의 정사장면에서 위화감과 역함을 느낀건, 작가가 '섹스' 라는 행위 자체를 '단절' 과 '불협화음' 의 메타포, 은유이자 상징으로 사용하기 있기 때문이다. 단절과 불협화음은 언제나 지극한 고통을 가지고 온다.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 는 섹스를 통해 순전히 고통만을 느낀다. 그녀가 고통을 어느정도까지 즐기는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사디즘과 마조히즘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육체의 고통을 이기기 위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인간의 뇌는 때때로 고통과 쾌락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주인공인 '나' 는 그정도는 아닌 듯 하다. 그녀는 단순히 '그냥' 고통을 참아내고, 섹스를 한다. 그녀의 사고방식은 오히려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모습을 닮아있다. 작품속에서 '내' 가 '나눈다' 고 서술하는 '섹스' 는 단순히 폭력에 가깝다.

작품속에 등장하는 섹스장면을 모조리 신체적, 물리적 폭행으로 치환시켜도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주인공 '나' 는 끝까지 그런 섹스는 '나눈다' 고 서술하는데, 그런 점이 오히려 그녀가 '당하고 있는' 지독한 폭행을 보다 강하게 느낄 수 있게 만든다.

 

내가 작품을 읽으면서 위화감과 역함을 느꼈던 건 아마 이렇게 읽었기 때문이리라.

난 폭력이 정말 싫다. 베고 썰고 하는 게임도 전혀 좋아하지 않고, 설사 한다고 해도 만화풍의 느낌이 완연한 게임을 하지, 리얼하게 팔다리가 뜯겨져 나가고 시뻘건 선혈이 낭자한 장면들엔 얼굴을 찌푸린다. 누가 눈 앞에서 뺨을 얻어맞는 장면만 봐도 화가 치밀정도로(아이러니 하지만) 싫어한다. 영화도 물론 잔인한 슬래셔 무비는 전혀 안보고, 심지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도 안(이라고 쓰고 못 이라고 읽어도 된다) 봤을 정도다. 이런 나이니, 섹스가 폭력으로 읽혔고, 책 전체가 그것으로 도배되어있다시피 했기때문에, 작품을 읽는 내내 상당히 힘들었다. 뭐, 아직 나에게 섹스에 대한 긍정적인 인상이 충분히 남아있음 또한 한 몫 했을 것이고. 이 작품이 섹스를 다루는 방식은 그야말로, 거식증 환자가 음식책을 만드는 수준이었으니.

 

이 작품은 그렇게 힘겹게 충분히 책장을 넘길 가치는 충분했다.

내가 저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통 단절의시대, 불협화음과 계급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시대 청춘들의 단상은 명확히 와닿았다. 한때는 사랑의 결실, 증거와도 같았던 섹스가 욕망의 배출구도 아닌, 일방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에 가까울 정도인 현대의 젊은. 아니, 어린 청춘들. 우유부단하고, 자신이 당하는 폭력의 의미와 본질조차 파악하지 못한채 수도권 2년제 야간대학을 다니고 있는 여자인 '나' 는 '88만원 세대' 라고 불리기도 하는 98%의 젊은이들의 일그러진 단상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선택받은 2%를 바라볼 수도, 쳐다볼 수도 없는 대부분의 젊은이들. 충분한 기회를 보장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가 늪에 빠져있다고 생각하는, 가련하고 안타까운 꿈을 잃은 세대들. 우리 세대는 세대간의 경쟁에서는 애초부터 게임이 안되고, 세대 안에서의 경쟁조차 할 수 없는 교육을 받고 자라났다. 그야말로 계급사회의 교육을 받고 자라난 셈이다.

 

그런 이 세대의 일그러진 단상을 이렇게 직접적이고 디테일하게 들이민 작가가 지금껏 있었던가.

언제나 우회적으로 윗세대 탓을 하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자학적이고 자조적이었지 않았는가. 가까운 일본에서는 그것이 니힐리즘이 가득한 공허한 작품 투성이가 되었다가, 이제는 이런 상황을 유희적으로 받아들이는 낙천주의가 퍼져있는 듯 하다. 우리 문학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이 작품을 보고는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후 재벌 중심의 사회구조를 만들어 폭발적인 성장을 했고, 그런 버블경제가 일거에 무너지며 오랜 경제 침체기를 겪고있는 일본은 우리와 많이 닮아있다. 문학 사조의 유행 또한 엇비슷하게 나아가고 있으며,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히 우리 민족성은 일본과는 많이 다르다.

기본적으로, 대륙과 머리를 마주하고 있는 지정학적 위치와, 수많은 외세의 침입을 받아왔던 민족성엔 '한' 뿐 아니라 '저항정신' 이 뿌리깊이 박혀있는 것이다. 게다가 아직까지 북한이라는 시한폭탄을 머리에 이고 있는 현대의 우리들에게도 저항정신은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미 여러 현대의 한국문학들은 니힐리즘이나 낙천주의 같은 '이즘' 을 뛰어넘는 독특한 느낌의 현실주의적인 작품들이 눈에 띄고 있다.

[제리] 또한 그 연장선으로, 보다 은밀한 불가침의 영역처럼 여겨졌던 '섹스' 의 리얼리티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듯 하다.

 

작품을 종결짓는 마지막 챕터 몇 페이지는 마치 영화 '매트릭스' 나 ' 인셉션' 혹은 우리의 고전인 '구운몽'이나 장자의 '호접몽' 등을 떠오르게 했다.

불이 꺼진 캄캄한 복도를 걷는 '나' . 사방에 불꺼진 방들이 가득하지만, 결국 '나' 는 푸르스름하게 퍼져나오는 빛을 향해 걸어간다.

온통 까만 실내에서 유일하게 빛이 있는 사각형의 수조. '내' 가 수조안의 열대어를 바라보는 것인가, 수조안의 열대어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현실과 환상이 모호한 속에서도 '나' 는 결국 빛을 향해 나아간다.

 

'나' 나 '제리' 의 삶이 내일 당장 변하지는 않을것이다.

그녀나 그는 내일도, 모레도,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김혜나 작가는 이렇게 충격적인 데뷔작을 통해 화려하게 등단했다. 나보다 딱 한살 어린 여류작가의 모습은 마치 김영하 작가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를 떠올리게 한다. 나에겐 그정도의 충격이었다. [제리] 라는 작품은. 자, 이제 김혜나 작가는 현대 문학에 강렬한 현실주의를 던져 질문을 던졌다.

이런 황폐한 세상속에서, 대한민국의 여자로서 그리고 남자로서. '나' 는 그리고, '제리' 는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해답에 도달할 것인가??

아마 우리가, 큰 사고없이 제 수명대로 잘 살아간다면, 언젠가 난 그녀가 내놓는 해답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해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그리고 애정을 담아 바라볼 수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난 인생은 경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생이 경쟁이라면, 태어날때부터 장애를 안고 있거나, 남들과 다른 환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물주는 뭐라고 변명할 것인가?

아 ---- 조물주는 변명따위 안하려나?? ㅋㅋㅋ

삶은 흐르는 강물이고, 표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이다. 누구보다 먼저 바다에 도달하고, 누구보다 먼저 표적을 꿰뚫어서 뭐를 할것인가??

인생이란 거대한 트랙 안에서, 나 아닌 남을 앞질러서 뭐를 더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그의 수명이나, 인생을 얻어올 수 있는가??

짜디짠 바닷물을 더 많이 마시고, 화살을 쏜 사람에게 다시 수합되거, 활에 걸릴 것인가??

 

우리는 이미 아주 중요한 격언을 하나 알고 있다.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

 

만약 내가 [제리] 의 '나' 나 '제리'를 만난다면 그렇게 말해줄 것이다.

너무...

생각없어 보이나?????ㅋㅋㅋ

 

 

 

 

+덧:  예기치 않게 비슷한 나이의 여류 작가들의 작품을 연달아 읽게 되었다.

장은진 작가, 김희진 작가, 그리고, 김혜나 작가. (우연찮게도 다 김씨다, 역시 한국엔 김씨가 젤 많아~!)

애정을 듬뿍듬뿍 담아, 좋은 작품 앞으로도 쭉쭉, 부탁~~~~~~~~~~~~해요~~~~~~~~

아니, 좋은작품 아니어도 좋으니, 다작해주시길. 에쿠니 가오리 한창때만큼은 해줘야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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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호텔
김희진 지음 / 민음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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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해본적이 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고, 나에 대해 깊이있는 질문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굉장한 위화감이 있었다.

'카메라가 나를 내려보고 있었고, 한쪽편에 앉은 인터뷰어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상황 자체가 대단한 위화감이 있었다.

불특정 다수에게, 나의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꺼낸다는건, 그렇게 쉬운일은 아니다.

하물며, 뭔가를 숨기고 있다면 어떨까. 게다가 깊은 마음의 상처도 가지고 있다면 어떨까.

 

잡지 기자인 '강인한' 은 인터뷰 하기 어려운 인터뷰이들을 전문으로 하는베테랑 인터뷰어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여러가지 스킬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꺼리는 사람들의 마음의 빗장을 풀게 만들고, 결국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하게 만드는 전문가이다. 강인한이 이번에 타겟으로 삼은 여자는 '고요다' 라는 필명을 가진 신인 작가이다. 어느날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해서 어마어마한 상금이 걸린 공모전의 대상을 거머쥐고, 그 작품을 통해 엄청난 인세를 받아내고 있는 묘령의 여작가. 하지만, 완벽하게 자신을 감추고 있어서 신상에 대한 것은 터럭 한 올 만큼도 알려지지 않은 베일에 쌓인 사람. 강인한은 그녀의 집으로 무작정 찾아간다. 외딴 곳에 자리잡고 있는 성채와도 같은 3층짜리 대저택에 혼자 살고있는 '고요다'. 대문 안으로 한 발짝도 들여보내주지 않는 고요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강인한은 필사의 작전을 구사한다.

 

인류의 가장 큰 적은 무엇일까?

지구를 침공하는 외계인? 정체를 알 수 없는 슈퍼 박테리아?? 수천만을 순식간에 죽음으로 몰고가는 바이러스??

 

아마도, 외로움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나 여기 있어요' 라고 외치고 다닌다. '누가 내 말 좀 들어주세요' 라는 말도 함께 외친다. 가장 큰 공포는 지극한 외로움이다. 함께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고, 내 자신을 인정해줄 타인이 없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공포일것이다. 때문에, 인간은 누구나 타인을 '선택' 한다. 그리고, '선택 받음' 을 갈구한다. 어쩌면 '결혼' 이라는 사회적 약속이 싹트게 된 계기도 그 부분에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넌 이 사람을 선택했어, 또는 선택 받았어. 그러니까 죽을 때 까지 이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을거야.' 라는 약속을 통해 남은 생을 위안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이란 감정은 잠깐이고, 그 약속 하나를 통해 남은 전 생애를 그래도 평안하게 마무리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종족번식의 과제를 열심히 이행하면서 말이다.

 

삶은 끊임없는 외로움과의 싸움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외로움은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연인이 없을 때 보다, 있을때 외로움은 더 강렬하다.

작품속에 등장하는 '고요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처음 혼자가 되었을땐 외로움의 고통이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생존을 위해 방을 빌려주면서 외로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다.

 

"정들 만하면 떠나 버리는 사람들이 싫었더든요. 한 사람씩 떠날 때마다 공허해지는 순간들도 싫었고요.

차라리 아무도 없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뭐든 애초에 없었던 걸로 쓸쓸해하진 않으니까요."

"이해해요. 더 외로운 건 남겨진 쪽이니까요..."  p. 178 中 고요다와 강인한의 대화.

 

강인한과 고요다의 대화를 보면, 사람과 사람이 친해지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상처를 내보이고, 약점을 내보인다. 감정의 가장 깊숙한 곳, 그 곳에 아직 시뻘겋게 벌어져있는 상처를 내보인다.

약점을 보듬어주고, 상처를 핥아주며 둘은 서서히 친밀감을 갖게 된다.

또한, 연애의 일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남녀들은 이성의 마음을 열어내기 위해 거짓을 꾸며내곤 한다.

약점을 토로하도록, 깊은 곳을 드러내도록, 살살 꼬드기고, 협박하고, 회유한다. 그렇게 알아낸 약점과 깊은곳을 찾아서 만져주고 핥아줘서 선심을 얻어내고자 한다. 연애란 일종의 수싸움과도 같다. 조금이라도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이다.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 같던 초 중반을 지나, 후반부가 되면 이야기는 보다 관념적으로 선회한다.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 하 편의 후반부를 읽는 느낌이었다. 상징적이고 관념적인 사건들이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작가의 메시지는 보다 어지럽게 얽혀든다. 자신을 사랑한 사람들이 모두 고양이로 변했고, 그런 고양이들을 데려다 키우며, 타인들과의 관계를 단절시킨 상처투성이의 여류 작가. 과연 이 복잡다단한 장치들을 둘둘 감은 고요다는 어떤 메타포인가? 아이러니의 복합체인 고요다를 통해 저자는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 남자인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하기 짝이없는 여자들만의 정신세계를 표현한 것일까??

자신을 사랑했던 수많은 남자들의 속에서. 도저히 '대화' 가 통하지 않는 수많은 '자신을 사랑했던 남자' 였던 고양이들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는 외로운 사람 '고요다'. 뻑하면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들때문에 짜증났던 '고요다'?  자뻑도 이런 자뻑이 없고, 공주병도 이런 공주병이 없다.

 

하지만, 남자로서 주인공 고요다는 몰라도, 고양이들은 이해가 된다. 나도, 쉽게 쉽게 홀랑홀랑 빠져드는 성격이니까. 그렇게 한번 빠져들면 몸도 맘도 재산도 다 훌훌 갖다 바치는 남자니까. 고양이가 되서라도, 그 사람 곁에 머물고 싶다고 생각하는 단순한 남자니까. 그 여자의 마음은. 일단, 생각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남자니까. 나 역시 고요다를 사랑했다면, 그녀가 주기적으로 불러들이는 섹스 파트너보다는, 그녀의 고양이가 되고싶으니까.

결국 난 고양이가 되겠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도, 어떻게 할 수도 없이 빠져드는 것. 그 무엇보다 위험한 사랑이다.

 

고요다는 마치 블로그나 트위터 스타의 모습과 닮아있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쌓여 있지만, 그들에겐 껍데기의 모습만 보여주고, 깊은 이야기는 철저하게 숨기며,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만이 주위에 가득한. 사람들은 많으나, 정작 소통을 부족한 현대인들의 모습. 현대인들은 주변에 들끓는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보다 강렬한 외로움을 느끼고, 그 외로움을 해갈하기 위해 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 때문에 보다 강렬한 외로움을 느끼고, 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때론 애완동물에 심취하지만, 그들 또한 외로움을 완전히 해갈해주지는 못한다.

결국 외로움을 해갈해주는 건 무엇일까??

저자는 일단 결론을 유보한 듯 하다. 저자의 페르소나일 주인공 '고요다'는 자신의 세계속으로 들어간다.

창작. '소설' 을 쓰기로 한 것이다. 재미있게도 필명을 사용하는 극중 주인공 '고요다' 의 본명 또한 저자와 이름이 같다.

 

마지막 장에서, 고요다는 강인한 기자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 고양이로 변하지 않은 그를 확인하게 된다.

과연 그때 고요다의 마음은 어땠을까?

정말, 고양이로 변하지 않은 그의 모습에 안도감을 느꼈을까??

자신과 완벽하게 소통을 했음에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그의 모습을 보고 일말의 아쉬움도 없었을까??

여기에 하나의 메시지가 있다.

고요다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낱낱이 꺼내 보였을지 몰라도, 강인한은 거짓만을 말했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언제나 '솔직함' 을 전제할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더 이상 세상은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일터다.

사랑하고 고양이가 될 것인가, 사랑하지 않고 거짓말쟁이 사람이 될 것인가?

 

 

 

 

+덧
 

또 하나 재미있는건, 이 작품의 저자인 김희진 작가의 쌍둥이 자매인 장은진 작가는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를 통해, 결국 해답은 '사람이다' 라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를 먼저 아주아주 감명깊게 읽었고, 김희진 작가가 그녀의 쌍둥이 자매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두 작품의 차이점을 은근히 의식하면서 작품을 읽어내렸다는 것을 고백해야 하겠다.

두 작가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상당히 비슷하다.

가족들을 다 잃은 주인공을 등장시키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깊숙한 외로움을 끄집어내기 위해 불청객들이 난입한다는 점도 같다. 그 불청객들이 엄청난 철면피에 뻔뻔하기 그지없으며 상당한 능력자들이라는 점도 같다고 볼 수 있다. 미스테리한 기법으로 다소 쇼킹한 반전에 다다른다는 점 또한 닮아있다.

일단 '현대인의 풍요로운 듯 하지만 굉장히 빈곤한 소통' 을 다루고 있다는 점 역시 같지만, 그걸 해석한 결론은 꽤나 다르다. 둘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가 완벽히 다르며, 각자의 작품이 내뿜고 있는 색채 또한 완연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김희진 작가는 장은진 작가에 비해 보다 냉정한 느낌이랄까. 불쌍한 고요다에게 접근했던 강인한이 거짓을 무기로 고요다의 마음 깊숙한 것들을 끄집어내게 만들었다는 점이 김희진 작가가 냉정하게 바라보는 현실을 대변하는 듯 했다.

 

두 작품을 비교해 보는 즐거움은 정말 굉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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