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제국의 연대기 - 전쟁, 전략, 은밀한 확장에 대하여 걸작 논픽션 19
대니얼 임머바르 지음, 김현정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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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2019년에 미국에서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켰다는 카피와, 미국인들도 제대로 몰랐던 미국의 역사에 대한 내용이라는 책 설명에, '설마' 하는 마음이 들었더랬다. 다소 의심스러웠던 마음으로 책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서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럴 만 했겠다' 싶었다.


책의 서문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이미지. '로고 지도' 와 미국의 현재 실제 영토의 지도를 비교해준다.

 


(미리보기에서 가져온 바로 그 페이지)

이 페이지를 보는 순간, 나는 다소 충격을 받았더랬다. 

미국령을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다. 알래스카와 하와이도 잘 알고 있고, 괌, 푸에르토리코 같은 미국령, 그리고 필리핀처럼 한때 미국령이었던 지명들도 알고 있었지만, 미국이 의도적으로 미국 본토만을 중심으로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실제로 많은 미국인들도 이 대목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이미지가 작아 아래 글씨들은 잘 안보일지 모르지만, 저자는 꽤 도발적으로 주장을 펼쳐내고 있다. 문장과 단어들은 매우 적확하고, 매우 깔끔하게 읽힌다. 어학 실력은 형편없어서 번역까지 지적할 깜냥은 안되므로 그 부분은 패스하고... 오역으로 느껴졌던 부분이 두어문장 있었던 것 같은데, 워낙 방대한 볼륨의 책이라 단순 실수로 보이는 지점들이었다. 주석과 감사의 말을 빼면 590페이지다. 


다양한 국가와 역사적 사건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저자는 의도적으로 매우 유명한 사건과, 매우 유명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논지를 펼쳐내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찾아들었던 이유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에서의 미국의 활약에 대한 의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록적으로 보자면, 미국은 1770년대 중 후반에 정부가 성립되었다.

하지만, 초기의 미국 정부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에 난리도 아니었다. 워낙 넓은 땅에 다양한 유럽 출신 유지들이 굳건히 자리잡고 있었고,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긴 했지만, 많은 부분에 여전히 깊은 관계를 맺으며 다양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바로 1810년대엔 영국과 캐나다 연합 군대에게 워싱턴이 털린적도 있었고, 1860년대엔 남북전쟁도 있었다. 이 전쟁이 수습된지 50여년 후.

미국은 어떻게 유럽에 참전할 수 있을 정도로, 아니 참전할 정도가 아니라 전쟁을 끝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국가가 될 수 있었을까?

그 지점이 꽤나 궁금했다.


 초반에는 바로 그 시점. 특히 루스벨트가 서부를 누비던 시기를 잘 보여준다. 저자는 백인우월주의를 바탕으로 금광이 있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땅을 흡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첫번째 위기는 산업화와 영토 확장으로 인한 폭발적인 인구증가에서 비롯됐다. 멜서스는 이런 속도로 인구가 증가한다면 식량 생산을 앞질러서 "인류는 때 이른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라고 했다. 농업 방식이 오래 지속되려면 질소의 순환을 관리하는 방법이 있어야 한다.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지혜를 바탕으로 순환 작물을 통해 오랜 시간동안 꾸준히 쌓아야 충족되는 것인데, 산업화로 인한 도시화가 이러한 순환주기를 깨뜨렸던 것이다. 19세기 미국 동부의 농가들은 타격을 받았다. 에이커당 작물의 생산률이 반 이하로 급감한 것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많은 연구 끝에 페루 연안의 친차 제도에서 서식하는 가마우지, 얼가니새 및 펠리컨에게서 나오는 질산이 풍부한 똥, 즉 해조분이었다. 

 당시 이러한 해조분은 다른 모든 것처럼 영국이 독점하고 있었고, 미국은 해조분이 쌓여있을 태평양의 무인도들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미국이 발견한 그런 무인도들은 점유권을 주장하고, 그 독한 해조분들을 채취하는 일은 대부분 흑인들이 투입됐다. 너무나 척박하고 괴로운 환경 속에서 일꾼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이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비로소 해외 영토에 대한 법적, 전략적 개념을 획득하게 된다. "새똥이 널려 있는 바위와 섬들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든지간에 그곳은 결국 미국의 일부였다." 수십년 후, 이 곳들은 비행장 건설에도 적합한 곳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많은 미국의 해외 영토들이 어떻게든 연방으로 편입되기 위해 노력하는 부분은 얼핏, 로마 제국 말기, 시민권을 얻기 위한 시칠리아 동맹시들과의 갈등이 떠오르기도 했다. 새삼, 미국 사람들이 로마 역사에 열광하는 이유도 이해하게 됐다.

 

 사실 이 책이 더 강조하는 부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중심으로 재편된 세계에 관한 부분이다. 

미국이 푸에르토리코를 차지해야 했던 이유, 괌, 사모아 제도, 하와이, 미드웨이 환초 등 태평양의 섬들을 가져야 했던 이유. 

나아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의 필리핀을 차지해야 했던 이유와, 일본에게 빼앗긴 이후, 다시 되찾는 과정. 그리고 이후 미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필리핀의 노력. 더글러스 맥아더가 필리핀에서 성장했고, 필리핀을 중심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터다. 독립을 추구하지만, 독립할 수 없었던 푸에르토리코의 경제적, 현실적인 고민,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이후, 필리핀을 독립시키고, 초토화시킨 일본을 점령하지 않았던 이유.  미국 상원의원에서 벌어진 제국주의와 반식민주의의 치열한 대립, 

그리고 전 세계에 산적해있는 약 800여개의 미군부대로 나아간다.

이란, 이라크 전쟁과 걸프전, 그리고 9.11 테러와 아프가니스탄 침공.

후세인과 오사마 빈 라덴. 

그리고 세계에서 모국어로 쓰는 빈도는 두번째이지만, 제2외국어로는 가장 많은 사람이 쓰고 있는 언어, '영어'를 위한 치밀한 전략.

그 실패의 잔재들과, 전략 밖에서의 뜻밖의 승리. 


대충 생각나는 것만 짧게 담아내기엔 너무너무 많은 내용들이, 줄줄이 비엔나처럼 얽히고 설키면서 정신없이 펼쳐진다.


올 한해, 아니 최근 몇년간 읽은 인문, 역사서중 가장 쉽고 재미있게, 술술 읽히면서도 익히 알려진 유명한 사건들 이면의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나사산에서 시작된 '국제 표준'에 관한 치열한 외교전이라거나 고무를 개발하는 과정 등등은 결국 전쟁이 아니었으면 쟁취하지 못했을 편리함이라는 사실에서 씁쓸함을 느끼기도 한다.

하기사, 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어야 잠재력을 발휘하는 법이기도 하니까...

미국은 일본의 침공이라는 역사적 위기 앞에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했고, 그 결과 영국, 독일보다도 빠르게 화공학, 원자물리학 분야에서 성과를 이뤄낼 수 있었다. 


결국 식민지의 필요성은 전쟁 수행 능력과 결부된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불법 침략하고, 타이완, 싱가포르, 필리핀 등을 침공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원자재를 조달하고, 병참선을 구축하기 위함이다. 미국도 태평양의 섬들이, 필리핀이 필요했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하지만, 항공모함과 비행기의 발달로 '영토' 의 필요성은 점차 약해져갔다. 미드웨이와 괌이 중요했던 이유, 여전히 중요한 이유는 아시아를 견제할 수 있는 항공기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영토를 점령하지 않는 대신, 곳곳에 미군 기지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제 2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제국주의가 변화하기에 좋은 구실이었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세웠던 기지들을 철수하는 대신, 부지를 임대하는 방식으로 지배 방식을 변환시켰다. 오키나와의 미군부대는 하나의 커다란 예시였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은 오키나와를 점령했었다. 1970년 일본의 시위대가 폭동을 일으켜 미군부대로 쳐들어간 2년 뒤, 오키나와를 반환했지만 그 후에도 미군부대는 여전히 상주해있다. 미군부대는 양가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많은 주민들이 미군부대의 철수를 요구하지만, 그들 중 태반은 미군부대를 통해 일상을 유지한다. 철수와 유지에 대한 찬반 비율은 미묘하다. 심지어, 초토화되었던 일본의 산업과 경제가 일어선 계기는 미국의 군수품 조달을 통해서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대규모 군수품 조달을 일본에 맡겼다. 도요타는 한국전 직전 회사 규모를 축소할 정도로 상태가 안좋았고, 일본중앙은행은 '신의 도움' 이라고 할 정도로 산업 전반이 일어서는데 도움을 줬다.

무엇보다, 일본이 미국이 세운 국제표준에 적응할 시간을 줬다. 


이러한 현상은 미군부대가 상주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동등하게 일어나지는 않는다.

오사마 빈 라덴의 집안도 미군의 사업을 수주하는 업체였고, 오사마 빈 라덴 본인도 미군들의 휴양시설을 짓는 사업에 성공하기도 했다.

세계 각지에 퍼져가는 미군부대는 번영과 증오를 함께 퍼뜨리고 있다. 무려 800여 곳이라고 한다. 저자는 이것을 "점묘 제국주의" 라고 표현했다. 다소 도발적이고 신선한 내용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적이지 않은 책은 아니다. 미국의 관점에서, 왜 세계는 미국을 증오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자성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무엇보다 "제국주의" 라는 개념 안에 여러가지 것들을 억지럽지 않게, 논리적으로 끼워 맞춰내는 저자의 통찰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무척 인상적인 마지막 한 페이지를 옮겨본다.


" 이상하게도 미국은 제국주의라는 비난에 자주 시달렸으나 영토 차원에서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미국을 로고 지도로 나타내기 위해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은 나머지, 제국을 부르짖으며 열렬히 비판하는 전문가들조차 해외 영토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확장된 미국 영토의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런 영토가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는 식민지나 기지 근처에 사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전 세계에 중요한 문제다. 미국 입장에서 제2차 세계대전은 영토에서 시작된 전쟁이었다. 테러와의 전쟁은 군기지에서 시작됐다. 피임약, 화학요법, 플라스틱, 고질라, 비틀스, 초원의 집, 이란-콘트라, 트랜지스터라디오, 미국이라는 이름 자체에 이르기까지 영토 제국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그들의 역사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영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하다. 식민주의는 정체적 배경에서 그 존재가 가장 두드러진다. 매케인, 페일런, 오바마 그리고 트럼프는 모두 식민주의의 영향을 받아왔다. 이는 이상하고도 놀라운 사실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놀라움을 뛰어넘어 미국의 역사는 제국의 역사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

  p.590


저자는 결국 제국주의 시대에 흩어진 미군부대가 다양한 국가에서 다양한 문명에 영향을 줬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다. 현재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아이돌 음악도 결국 미군 부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밴드, 그룹, 댄서를 빼놓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군 부대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 역시 마찬가지다. 북한이 머리맡에 있다는 점을 빼고라도, 미국이 결코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하지 않으리라는 명백한 이유가 이 책에 잘 서술되고 있다.

이는 단순히 북한, 중국,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방어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국으로서의 미국을 유지하고, 지탱하는 최소한의 깃발.

그것이 미군 기지이다. 


이 리뷰를 정리하는 동안, 또 미군 기지로 인해 시끌시끌하다.

미군이 순환 배치와 전략적 유연성을 갖추려 한다는 정책을 발표했기 때문인데, 다시 말하지만, 그렇다고 미군이 한국에서 기지를 철수할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미군 군인의 물리적인 숫자를 줄일 수는 있다. 이 책에도 언급되는데, 더이상 보병의 '쪽수' 는 그다지 중요한 전략적 개념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기지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상주인구가 있어야 하고, 기지가 설치되어 있는 국가, 지역, 주민들의 성격에 맞춰 재편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는 전쟁을 수행하는 능력이라기보다, 미국의 지배 전략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또 크게 나뉜다.

미군들의 비행을 보도하며 반미감정을 증폭시키면서도, 미군이 쪽수를 감축할까봐 호들갑을 떤다. 

이 책이 예로 든 다른 나라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 안에 묶여있는 식민지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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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이방인 - 드라마 <안나> 원작 소설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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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업작가로 세편의 작품을 발표하고 영국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화자는 현재 대학교수인 남편과 별거중이다. 영국에서 만난 남편과 함께 귀국해 제법 고난한 시간을 보냈고, 둘 사이에서 생긴 아이가 보육원에 갈 나이쯤이 되자 대학 교수로 제법 탄탄한 기반 위에 올라선 남편은 마치 그 시간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화자의 작품 활동을 위해 시간도, 장소도 아낌없이 제공했다.
 영국으로 떠난 남편과 별거하며 자연스레 그 기반들을 잃은 화자는 번역 작업을 주로 하며 근근히 아이를 살피며 삶을 이어가던 중, 자신이 2003년 문창과를 졸업하며 자비출판했던 소설 "난파선" 이 신문지상에 실린 것을 보게 된다. 게다가 작가의 이름은 자신이 아닌 "이유상" 이라는 이름이었고, 이 소설의 작가를 찾는다는 광고 문구를 발견한다.
 자신의 작품을 도난당했다는 불쾌감에 화자는 곧바로 전화를 걸어 광고를 실었다는 여성, "선우진" 과 만나 "이유상" 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선우진의 남편 이유상.
그는 사실 "이유미"라는 여성이었다.  

남장여성의 이야기는 아주 오래된 설화들 중 하나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도 유명한 "뮬란" 같은 작품이나, 조선시대 "방한림전" 같은 고전문학속에도 등장하고, 그리스, 로마, 이집트 신화속에도 등장한다. 이는 여성들이 사회적, 직업적으로 완벽하게 분리되어 구별되어왔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남성들은 성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여성으로 분장한다면, 여성들은 사회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남성으로 분장한다.
이는 피해자로서의 여성을 그리기에 매우 적절한 장치인 동시에, 사회의 맹점을 드러내기에 매우 효율적이다.

 최근 몇년의 한국 문단은 바야흐로 여성문학, 특히 피해문학의 시대로 봐도 무방하다.
수많은 미투 폭로가 쏟아지며 이른바 "젠더권력" 의 추가 급격히 기우뚱거리기 시작했고, 문단도 그에 따라가기 시작했다. 최근 몇년간 이름난 문학상의 수상작들은 대부분 여성들의 피해를 다룬 소설들이고, 사이사이 퀴어 소설이 들어있다. 화제성이 있으면 우르르 몰려가는게 우리 문화의 특징이라면 특징일텐데, 부디 이번엔 후르륵 끓고 멈추는 정도가 아니라, 오랫동안 보글보글 끓어 좋은 국물이 우러났으면 좋겠다.
문학은 더이상 대중을 선도하거나 사회를 앞서갈 수는 없다. 정보의 바다는 매일매일 업데이트되고, 대중은 실시간으로 그것들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시점에서 재해석되는 문학은 필연적으로 한박자 늦게 뒤따를 수 밖에 없다. 이제 문학의 가장 큰 역할은 문제를 발견하고, 대중들이 알기 쉽게 인식토록 하는 것이다.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문제들을, 다양한 계층이 동감하고, 공감할 수 있게 하는 것. 최근 한국 문단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일련의 기조는 그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친밀한 이방인]은 내가 개인적으로 받은 이러한 최근 한국 문학의 흐름에서 다소 벗어나있다. 여성과 남성의 대결구도를 거의 배제하고, 피해의식도 거의 발현시키지도 않고, 딱히 여성들의 연대 같은 의식적 고양을 추구하지 않으면서도 여성들의 고단한 삶을 충실히 그려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남성과 여성의 오래된 차별은 단순히 성별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이 남성을 이긴다고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고, 이 세상에서 어느날 하루 아침에 모든 남성이 싹 사라진다고 해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여성과 남성의 성 '대결 구도'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문제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인습적으로 규정해온 성역할은 오롯히 동물적인 분류에서 시작됐다.
체격, 근육량, 생리, 임신 등등의 신체적 특징들에 더해 정신이나 의식까지 싸잡아 "여성의 정의" 라는 프레임에 가두었다. 다른 수많은 차별들과 마찬가지로. 사실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남녀의 신체적 특징들은 거의 다 상쇄되었다. 물론, 아직도 신체적 특징이 유리하게 작용되는 면이 있지만, 그런 부분들도 사회적 합의를 통해 '반 동물적', 즉 이성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이를 위해서는 남녀간의 성대결이 아니라, 소통과 타협, 연대를 통해 해결해야하는데, 아직은 서로가 등을 돌리고 각자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친밀한 이방인] 은 매우 훌륭한 통역사와 같다.
이 작품 안에서는 모든 인물들이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고, 서로를 돕는 동시에 상처를 준다. 남성, 여성의 차이는 없다. 오직 사회와 삶 자체가 부조리하고,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선사하며, 그 안에서 순응할지, 극복할지는 각자의 몫으로 주어진다.
 
 [친밀한 이방인] 은 작가인 화자가 쫓는 이유미, 또는 이유상의 다채로운 인생역경을 통해 우리 사회의 일면을 날카롭고도 충실하게 담아낸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호 의존할 수 밖에 없고, 제법 정교해 보이는 인간의 공동체의 얄팍함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꽤나 부유한 축에 속하는 부모로부터 아낌없는 지원과 사랑을 받으며 자란 이유미는 아버지의 몰락과 함께 사회의 변두리로 점차 밀려나기 시작한다. 부족할 것 없는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고교 졸업 후부터 삶이 수렁으로 빠져들어가기 시작한다.
대학에 떨어졌지만, 붙었다는 거짓말을 시작으로 이유미의 삶은 거짓에 거짓이 붙어 한없이 부풀기 시작한다. 두 번의 결혼과 파혼이 있었고, 큐레이터부터 간호조무사, 의사, 작가까지 다양한 직업을 전전한다. 거짓으로 쌓아올린 커리어는 의사라는 엘리트 직업에까지 이르렀고, 남편들과의 결혼생활들은 이유미의 거짓말이 드러나는 순간마다 박살났다.
하지만, 이유미는 쉽게 낙망하지 않는다. 끝끝내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고, 또 새로운 서류로, 신분증으로, 명함으로 마치 변검의 배우처럼 자유롭게 탈을 바꿔 쓰며 삶을 살아낸다. 이 모습에서 나는 꽤나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작품은 대단히 치밀하게 짜여져있다.
적절한 생략과 압축이 매우 효율적이고 적재적소에서 활용되어서, 전체적인 볼륨이 작은 작품이지만, 내러티브가 매우 풍성하게 느껴진다. 특히, 이유미의 삶을 쫓는 화자가 이유미의 주변 인물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 방식이 매우 효과적이었다. 물론 이런 기법이 독창적인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남발되면 오히려 이야기가 산만해지고, 주제의식을 전달하기 어려워진다. 때로는 작위적이기까지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매우 잘 활용되었다. 이유미의 탈이 주변 인물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과연 "나" 라는 존재는 무엇으로 존재하는지, 작가의 통찰력이 느껴졌다.
많은 거짓들을 스스로 쌓아간 이유미이지만, 뜻밖에, 마지막 거짓말은 선우진의 오해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은 소설적으로 매우 휼륭한 접근이라고 느껴졌다.  

인간이 얼마나 주도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애초에 '주도적' 이라는 개념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우리는 태어남과 죽음 조차 주도적으로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자살은 죽음을 선택하는 것 아니냐, 고 반문할 수 있지만, 나는 자살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사회에 의해, 혹은 마음의 병으로 인해 타살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삶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기껏해야 점심 메뉴도, 우리가 '먹을 수 있게' 설계된 것들 사이에서 선택할 뿐이다. 책상이나 돌멩이를 점심메뉴로 선택할 수는 없잖은가.
지극히 동물적인 틀 안에서 선택할 수 있다.
내가 제 아무리 주도적인 선택을 한다 한들, 자연재해나 전염병 한방에 모두 무의미해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 중,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주도적인 삶일까??
이토록 수동적인 삶 속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릴 수 있는가?
[친밀한 이방인] 은 이에 대한 작가의 물음으로 읽혔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때론 이성적으로 유리한 것들을 취하며 카멜레온처럼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던 이유미의 삶은 언듯 주도적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마지막 선택은 수동적으로 읽힌다. 
그리고, 부모님의 기대와 남편, 아이를 위해 떠밀리고 떠밀리다가 불륜이라는 선택을 하고, 이혼위기를 맞이한 화자는 수동적으로 쫓기듯 살아갔지만, 마지막 선택은 주도적으로 읽혔다.
마지막으로, 이유미에 얽힌 하나의 반전과, 내 예상을 살짝 빗나간 화자의 마지막 선택이 이 질문에 대한 작은 실마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두 인물의 결말이 너무나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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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과 탄광
진 필립스 지음, 조혜연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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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에 홀린 듯, 서평단 공지를 보고 무심코 신청했다가 설 연휴 직전에 툭, 받았다.

연휴 기간동안 잊고 있다가, 2주 안에 리뷰를 써야 한다는 서평단 조건을 떠올리고 읽기 시작했는데, 흡인력이 대단해서 좀처럼 빠져나올 수 없었다. 


 1920년대 미국 앨라배마주 카본힐. 

카본힐은 인구의 75%가 탄광에 종사하는 광업 도시로서, 탄광노조의 중간 관리자급 인부인 베테랑 광부 앨버트는 리타라는 사랑스러운 아내와 버지, 테스, 잭 삼남매를 위해 매일매일 석탄 가루를 마시는 성실한 가장이었다. 기본적으로 매우 너그러웠고,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하기 위해 애썼으며, 가족들에겐 생활력 강한 가장이었고, 광대하진 않지만 어느정도 땅을 갖고 있는 지주이기도 했던 그는 모든 이웃에게 따스한 사람이었다.

 리타 역시 매우 좋은 사람이었다. 항상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음식을 내어주고, 산더미 같은 집안인을 하며 남편이 벌어오는 생활비를 알뜰하게 쪼개서 경제적으로 잘 쓸 줄 아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안주인이었다. 

고학년인 버지는 엄마를 닮아 매우 아름다운 소녀로 자라나고 있었고 맏이답게 사려깊고 동생들을 잘 챙겼다. 테스는 좀 더 말광량이 기질이 있었지만, 상상력이 풍부하고 매우 활달했다. 막내인 잭은 아직 어렸지만, 아들 노릇을 하는 중이었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배 곯을 일도 없었던 이 따스한 가정에 폭탄같은 일이 벌어진다.

테스네 집은 숲과 연결되어 있었다. 뒷마당에는 숲에서부터 흐르는 개울이 지나고 있었고, 앨버트는 이를 생활용수로 사용하기 위해 두터운 우물을 만들어 놓았다. 뒷마당 우물가는 테스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로 어린 소녀의 공상의 도화지였다. 

 그 날, 어둑한 저녁에도 테스는 잔잔한 생활 소음을 BGM삼아 뒷마당이 보이는 부엌 문에 기대 어둠에 잠겨가는 숲과 우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우물 뚜껑문을 열고 무언가를 던졌다. 너무 어두워서 형체만 보였지만, 분명 아기였다.

 테스는 자기가 본 것을 가족들에게 말하지만, 상상력이 풍부한 테스의 말을 가볍게 넘겼다.

다음 날, 리타가 길어올린 우물 양동이 안에서 퉁퉁 불은 아이의 사체가 발견되기 전까지 말이다.      

 


이야기의 배경은 1920년대 중~후반 탄광마을 카본힐을 주로 다루고 있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의  전간기, 작품 안에서는 경제 대공황의 전조가 보이기 시작한다. 

작품은 총 9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고, 각 장은 주요 등장인물들이 1인칭 화자로 등장하는 작은 장들로 다시 나뉘어 있다.

이는, 2000년대 초반부터 꾸준히 활용되어온 기법으로 나는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과 조지 R.R. 마틴의 [얼음과 불의 노래]시리즈에서 처음 접했다. 

모든 등장인물이 각자 자신의 시점으로 서사를 이끌어간다.

이 시점들이 아주  친절하게 챕터로 나뉘어 있으며 매 챕터는 짧고 간결하다. 이러한 구조와 형식은  사건이 아니라 인물에 집중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쉽게 따라갈 수 있다. 


시대적 정서보다는 작가 개인의 향수가 물씬 느껴지는 매우 목가적인 작품이다. 카본힐이라는 마을의 정경, 탄광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들, 가족들이 사는 집과 경작하는 땅, 해먹는 음식 등 소소하고 일상적인 일들이 따스하게 그려지고 있다.

우물 속에 던져진 아이라는 충격적인 소재로 시작되지만, 이렇게 따스한 필체로 버지와 테스의 성장을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물론 당시 시대상에 비춰지는 인종차별, 경직된 사회적 성 역할에 대해서도 풍부하게 담겨 있지만, 먹고, 놀고, 일하는 것을 그리듯 일체의 감정과잉 없이 서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볼륨이 결코 두껍지 않지만, 담겨있는 정서도 매우 풍부하고, 인물 개개인에 대한 내러티브도 풍성할 뿐 아니라, 제공되는 정보의 양도 꽤 많다.

열심히 읽다보면, 주요 인물들의 삶을 거의 다 알아낼 수 있는데, 책의 두께를 보면 '어떻게 이렇게 간결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정말 필요한 이야기만 쏙쏙 뽑아 잘 만들어냈고, 감정과 정서의 흐름도 매우 균형적이다. 


나는 처음 이 작품을 펼쳤을 때, 비극적인 이야기를 상상했다.

전간기를 다룬 소설들이 대부분 그렇게 비극적이었기 때문인데, 다행히 이 가족에겐 전쟁과의 접점이 없었다. 잭의 나이로 보아 2차 세계대전은 잘 피해갔겠지만, 베트남 전쟁과 한국전쟁을 위한 징집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 작품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사건이 그것을 피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잭에게는 전쟁에 대한 공포보다, 언젠가 탄광에서 일해야 한다는 일상의 공포가 더 컸을 것이다.

그리고, 앨버트와 리타는 자식들에게 그런 삶을 피하게 해주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고, 이 작품은 다행히 비극적으로 종결되지는 않았다.

작품에 총이 등장하면 반드시 쏘아져야 하듯, 탄광은 반드시 무너져야 하는데, 다행히 내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진짜 다행다행)

무척 목가적이고 따스한 소설이었다.

읽는 내내 어렸을 때 작은 TV에서 봤던 [초원의 집] 같은 외화(지금으로 치면 미드.ㅋㅋ)가 떠올랐고, 연상 작용으로 그 시기의 나의 삶들도 많은 것들이 함께 떠올라서, 오랫동안 추억에 잠길 수 있었다. 

시대와 문화를 떠나 부모님이야말로 가장 영향력 짙은 선생님이고, 가정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교육기관일터다.

 


p.s

재미있게도, 이 작품 직전에 시대적으로 거의 비슷한 시기를 다룬 뮤리얼 스파크의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를 읽었다.

두 작품 모두 영미권 여성 작가의 소설로 1920~40년대를 다루고 있고, 소녀들의 성장을 다루고 있다. 

한쪽은 대도시, 이쪽은 시골 탄광촌.

여러모로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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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먼웰스
앤 패칫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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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방검사보인 앨버트 커즌스는 모처럼 휴일인 일요일에 넷째 아이를 임신한 아내와 세 아이의 뒷치닥거리를 피하려고 지방경찰청 형사인 픽스 키티의 둘째 딸 프랜시스의 세례파티에 참석했다. 한 주 동안 여러 범죄자들을 상대하며 진이 빠질대로 빠진 앨버트였지만, 금요일까지만 해도 주말은 온전히 임신한 아내와 아이들에게 쏟기로 다짐했지만, 아내와 아이들과 토요일 반나절을 보내자 그 다짐은 거품처럼 꺼졌다. 초대도 받지 않았지만, 직장 동료라는 핑계로 '일 때문에' 라며 집에서 빠져나올 구실은 픽스의 파티 뿐이었다.

 픽스의 둘째 딸 세례파티는 꽤 시끌벅적한 파티였다. 픽스는 사교성이 좋은 형사였고, 경찰서 동료들은 물론 커즌스와 함께 일하는 지방검사보도 초대되어 있었다. 픽스는 불청객인 앨버트를 반갑게 들였고, 앨버트도 여러 사람과 그럭저럭 잘 어울렸다.

그리고, 픽스 키팅의 아내, 베벌리 키팅과 마주친다. 


 이 작품은 이혼하고 재혼한 두 가정의 여섯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픽스와 베벌리 사이에서 태어난 키팅가의 두 아이 캐럴라인과 프랜시스, 앨버트와 테리사 사이에서 태어난 커즌스가의 네 아이 캘빈, 홀리, 저넷, 앨버트가 그들이다.

1960년대 미국.

자녀의 양육권은 으레 부인에게 갔다. 남자는 섣불리 친권을 주장할 수 조차 없었고, 대신 상당한 합의금과 자녀들이 성인이 될 때 까지의 양육비(때론 대학 등록금까지)를 부담해야 했다. 자녀에 대한 책임감이 별로 없어보였던 앨버트였지만, 친권과 양육비 대신 1년에 4주간 함께 있을 수 있는 권리를 요구했고, 지방검사보였던 직업 덕에 어렵잖게 획득할 수 있었다. 

 그 때문이었다.

이 여섯 아이가 일년에 4주씩 버지니아에서 함께 보내야 하는 이유가.

앨버트는 자신의 자식들이 버지니아에 올 때마다 직장에서 일이 많아진 이유는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럴거면 왜 굳이 4주의 교섭권을 따내려고 기를 썼는지, 원...

키팅가의 두 아이와 커즌스가의 네 아이들은 모두 아주 개성이 넘쳤다.

사실 초반엔 이 아이들의 개성들이 워낙 뚜렷해서, 그 캐릭터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재밌었다.

이름은 헷갈렸을지언정, 캐릭터는 헷갈리지 않았다.

이 작품이 끊임없이 아무 징조 없이 시공간을 뛰어넘고 주된 화자를 바꾸지만, 전혀 서사가 헷갈리지 않았던 주요한 이유이다.


캘 커즌스가 가장 나이가 많았고, 캐럴라인 키팅이 조금 어렸다. 그 밑으로 캘빈, 홀리, 저넷 커즌스 순이었고, 프랜시스 키팅, 앨버트 커즌스 순이었다. 

도입부의 세례파티의 주인공이 바로 프랜시스였고, 그 때 앨버트의 아내인 테리사는 앨버트를 임신하고 있었다. (막내아들 앨버트의 이름에 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도입부에 등장한다. 이후, 소설에서 아빠 앨버트는 버트, 앨버트 주니어는 앨비, 로 통칭된다.)    



소설은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 시종일관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주된 화자도 자주 변하지만, 주요 화자는 프랜시스(이후 프래니)이다.

전체적인 감상부터 말하자면, 개인적으로는 2019년 최고의 발견이라고 할 정도로 감명깊게 읽은 소설이다.

일단, 소설적 완성도가 매우 뛰어나며, 작가의 스토리 텔링 기술이 기가 막히다.

이는 아주 독창적인 건 아니고, 제니퍼 이건 등 영미권 여성작가들에게서 먼저 보았던 기술이긴 하지만, 마치 영화처럼 씬이 바뀌는 느낌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개인적으로는 그 무엇보다도 이 스토리 텔링 기술에 푹 빠져서, 사실상 헤어나기가 힘들었다.

오렌지 향이 가득했을 것 같은 끈적한 불륜의 현장에서 순식간에 알콜냄새 가득한 병원으로. 그리고 약간 더 과거의 시끌벅적한 바bar로.

그리고 더 과거의. 더 시끌벅적한 공항으로, 그리고 한적한 버지니아의 시골로. 

그러다 또 불현듯, 어느 시점의, 어느 시간대로.

너무 자유롭게 휙휙 옮겨다니는데, 어딘가 덜컥대거나 물음표 하나 없이 자연스럽게 인식된다.

이건 진짜 놀라운 경험이었는데, 영화처럼 페이드 아웃이나 오버랩이 있는 것도 아니다. 챕터가 나뉘어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자연스럽게 시공간을 옮겨다닐 수 있는지... 헷갈려서 앞장을 넘긴게 아니라, 명확한 장치가 있었나 싶어서 앞장을 다시 읽은 책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정말정말 자연스럽고 능숙하며 관능적인 스토리텔링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스토리텔링' 이라는 개념이 아름답다고 느낄 정도. 



부모세대의 사랑과 이혼, 그리고 자식 세대의 사랑과 결별을 뒤섞어 40~50년대, 전후 미국의 부흥기는 프래니의 부모님을 통해서, 그리고 60~70년대는 프래니와 형제들을 통해 경제 성장의 후광을 충실히 누리며 한 세대 만에 크게 바뀐 사회 전반의 모습을 매우 잘 그려내고 있다. 서서히 변화하는 여성의 사회 참여의 형태 뿐 아니라 그 한계는 물론, 아프리칸과 동성애에 대한 인식, 다양한 문화를 향유하는 방식등 미국 중산층의 변화 그 자체를 매우 훌륭하게 펼쳐낸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들을 녹여낸지라 정말 하고싶은 말이 많았을 것 같은데, 정말 적절한 부분만 적당히 펼쳐낸 듯 하다. 여러 인물의 이야기가 다채롭고 풍성하게 펼쳐지지만, 사실 이야기의 볼륨 자체는 그리 많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적절하게 시공간을 뒤섞고, 굉장히 많은 생략과 압축을 통해 '잘라냄의 묘미' 마저도 보여준다. 이런 기술들은 사실 장르적 기술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순문학을 추구하는 작가들은 다소 꺼려하는 이런 기술들과 그것들이 충분히 활용된 작품들이 유수의 문학상을 받거나 후보에 오르는 것을 보면 확실히 우리나라 밖의 작가들은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를 거의 나누지 않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이를 떠나, 많은 작가들이 입을 모아 "어떤 이야기를 할지를 결정하는 것보다 어떤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결정하는 것이 더욱 힘든 일이다" 라고 말하는데, 앤 패칫은 그 힘든 일을 아주 잘 해냈다. 내러티브가 엄청나게 풍부하지만, 볼륨은 그에 비하면 그다지 엄청나지 않고, 전개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 그러면서도 모든 캐릭터들의 개성이 아주 뚜렷하고, 설득력도 높다. 

그 누가 뭐래도,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의 기술적 완성도만큼은 흠 잡을 곳이 없다.   



한 인간이 자신의 삶 속에서 온전히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과연 하나라도 있을까? 

세상에 그 어떤 인간도 태어남과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설사, 자살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100% 자신의 선택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심리상태, 살아온 환경, 주변에서 강해지는 수많은 압박 등,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인간의 선택을 좌우한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대부분 아주 작은 것들 뿐이고, 따지고 보면 그조차도 대부분 여러 환경에 의해 선택 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그런 작은 것들이 모여 한 사람의 삶을 이뤄낸다.

프래니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들이 그런 것들이다.

아빠와 언니의 영향이 있었지만, 프래니는 로스쿨을 선택했고, 공부를 하다보니 자신에게 공부에 대한 재능이 없음을 깨달았다.

이제 프래니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학업을 계속 할 것인가, 멈출 것인가 정도이고, 학자금 대출을 받기 위해 몸을 팔 것인가, 바에 다니며 웃음을 팔 것인가 정도이다.

그 중 쉬운 길을 선택해도 프래니의 선택이고, 어려운 길을 선택해도 프래니의 선택이다.

그렇다면, 과연 프래니는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산 것일까, 아닌 것일까? 

누군가를 사랑하고, 결혼하고, 이혼하는 것은 주도적인 것일까, 그 반대일까? 

앨버트와 베벌리가 첫눈에 뭔가를 느끼고, 3년 뒤에 이혼하고, 재혼하게 된 것은 주도적인가, 아닌가.

커즌스와 키팅의 아이들이 서로 의붓 형제자매가 된 것은 주도적인가, 아닌가.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선택이고, 아닌가? 


이 작품은 가족에 대한 전통적 가치관을 정립하면서 무너뜨리는 동시에,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은 듯 하지만, 결코 많지 않음을, 선택한다고 믿지만, 실은 선택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 

눈을 돌리면, 발길을 돌리면 다른 삶이 펼쳐질 것 같지만, 그러기 위해선 신데렐라의 마녀처럼 거부할 수 있는 거대한 뭔가가 필요하다.

홀리가 정신과 의사의 '약물치료' 를 '명상' 으로 잘못 듣게 한, 프래니가 일하는 바에 나타난 리언 포즌과 같은, 캘이 태어날 때 부터 갖고 있던 알레르기나 부모의 이혼, 때로는 몸과 마음에 생긴 거대한 종양 같은.

[커먼웰스] 라는 책은 앨버트가 초대받지 않았던 픽스와 베벌리의 두번째 아이 세례 파티가 아니었으면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앨버트와 테리사가 결혼하지 않았으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고.

결국 한 사람의 삶은 가족, 사회, 국가라는 전통적인 네트워크 안에 허술해보이지만, 결코 허술하지 않은 그물망에 묶여있고, 아마 인류가 존속하는 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P.S

그런 관점에서 제목을 한번 되짚어보면, 참 여러 의미가 담겨있는 듯 하다.

'커먼웰스' 는 사전적으로는 독립된 공화국으로 republic과 비슷한 의미지만, 보다 용례가 확장되어서, 연방제 국가, 연방, 나아가 민중 결사체나 공동체에도 사용된다고 한다. 

Commonwealths of Nations 영연방,   Commonwealth of Australia 호주의 공식 국호, Commonwealth of Dominica 도미니카 공화국 등이 있고, 미국에서는 메사추세츠, 버지니아, 켄터키, 펜실베이니아 주는 공식 명칭을 우리가 흔히 '주' 라고 번역하는 state 가 아니라, commonwealth 를 쓴다고 한다. (하지만, 행정적, 의미적으로 state와 큰 차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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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도시 이야기
최정화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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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시에 이 전염병이 발병한 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동휘는 시의 하급 보안/정보 공무원으로, 이 병에 관해 중앙 정부에서 주관한 집체 교육에 참가했더랬다.

병의 이름은 '다기조' 병. 피부가 하얗게 말라붙는다 해서 '다기'(daggi 동물의 보호용 껍질) 발병한 뒤, 병증이 진행되고 말기 증상까지 이겨낸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옮기 뒤에야 완치가 된다고 해서 '이조'(izo, 스스로 소멸되지 않고 이동함으로써 숙주를 떠나는 전염의 방식)라는 이름이 붙었다. 

 진행과정은 나름 정연했고, 병의 진행과정은 거의 동일했다.

불규칙한 과호흡 -> 가벼운 건망 증세 -> 갈증 -> 기침 -> 단기 기억상실, 허언증 -> 이상 음성 -> 신체 말단 근육 소실 -> 청색증 -> 자기 인식 불능 -> 신체 말단 부위의 각질화.  

 전염 과정은 불명확했다. 병자와의 접촉이 전염 요인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으나, 어떻게든 전염된다는 사실 역시 확실했다.

병은 대체적으로 신체 말단 부위가 각질화 해서 몸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끝났다. 걸리면, 신체 말단 부위를 반드시 잃게 되는 무서운 전염병. 남는 것은 '영구한 기억 손상'과 그에 따른 일종의 '현실 재인식'.

그 어떤 대책도 속수 무책이었고, 결국 중앙 정부는 병의 진원지라고 판단한 L시를 봉쇄하기에 이른다. 

 병에 걸린 사람들은 대부분 갈증과 기침 단계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티가 났다. 그리고, 결국 L도시는 기억을 잃은 사람들과 하얀 각질로 뒤덮인 사람들로 가득 차다가, 결국 신체 말단 - 주로 손 - 을 잃은 사람들로 가득해졌다.

 동휘 역시 마찬가지였다.

딸을 잃고, 뒤이어 다기조에 걸린 아내가 손을 잃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기 전에- 이혼을 하게 되고, 결국은 동휘 역시 다기조에 걸려 하얀 석고처럼 손목에서 떨어져내리는 자신의 오른손을 목격하기에 이른다.

  

  이 작품의 중요한 테마는 두가지다.

우선, '기억' 이다. 다기조병에 걸린 환자들은 손을 내주고, 기억을 잃게된다. 다기조 환자들은 처음엔 자신이 아이를 어디에 두었는지 잃어버리고,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잃어버리고, 결국은 아이가 있었다는 기억조차 잃어버린다. 많은 아이들이 실제로 다기조로 사망한다. 그리고 부모들의 상실감 또한 다기조로 잊혀진다. 그렇다면, 이 병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아이들은? 

다소 개연성이 떨어져 보이는 설정들이 눈에 띄는데, 결국, 이 병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메타포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다 상관 없게된다.

기억은 한 사람을 구성하는 기본이자 전부다. 타인은 언제나 나의 경험과 그로 인해 쌓은 기억이라는 필터를 통해 마음속에 저장된다. 그것이 편견이건, 오해건, 이해건, 나를 아는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그 100명의 마음 속 '나' 는 모두 다른 모습으로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 사람의 정보-직업, 출신지, 출신학교, 토익, 토플성적, 연봉, 가족관계 등등- 와 어우러진다.  

결국 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자신보다,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자신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다기조병을 앓고 난 사람들은 결국 이 모든 기억이 무의미해지므로, 종이에 기록된 정보를 통해 타인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외부의 정보에 지극히 민감해지고, 언론과 대중매체에 쉽게 현혹되게 된다.

기억을 통해 쌓은 타인에 대한 경험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눈앞에 보이는 정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 역시 저자가 은유하고자 한 대상이 어떤이들이었는지 제법 명확히 느껴진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억에 가장 깊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작품의 두번째 테마인 '상실' 이다.

우리의 기억에 가장 강렬히 남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상실' 이다.

어렸을 때 한번이라도 부모님 손을 놓쳐 길을 잃어 본 경험은 있을 것이다. 그 경험은 굉장히 오래 남아 일종의 트라우마가 될 정도가 된다. 애완동물을 떠나보내거나 잃은 기억, 열심히 모은 용돈을 잃어버린 기억, 친한 친구와 헤어지거나, 사별한 기억....

사소한것부터 중요한것까지, 상실의 경험은 마음에 깊이 각인되어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다기조' 는 손이나 발을 대가로 기억을 앗아간다.

그리고 다기조병으로 아이를 잃은 L시의 대부분의 부모들에게 다기조는 저주라기보다 축복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이 두 테마가 가장 극적으로 맞물리는 순간은 동휘가 병을 이겨내고 딸의 죽음을 기억하는 장면이다.

작가는 지속적으로 독자들에게 동휘의 상황을 명백히 알려줌에도, 이 장면에서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지하철에서 읽다가 눈물이 왈칵 차올라서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흔히, 가족을 잃는 경험을 '수족이 떨어져 나간 것 같다' 는 표현을 하곤 한다.

'다기조' 라는 병은 이 오랜 말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것이 아니었을까?

정말로 손발을 떼어주고, 아이를 잃은 기억을, 나아가 그 당시의 주변 인물들을 모조리 잊을 수 있다면, 많은 부모들은 그것을 선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 저자는 이 두가지 테마를 통해 '세월호' 를 끌어올린다. 

어느새 우리 사회가 잊어가는 참사와, 여전히 잊지 못하는 유가족들. 

어떻게든 수면 밑으로 끌어 내리려는 세력들과, 어떻게든 수면 위로 끌어올리려는 세력들.


 서사는 치밀하고 균일하게 구성되어 있어서 읽는 맛이 상당하다. 

화자가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과 잃지 않으려는 노력들이 겹쳐지며 과거와 현재, 왜곡된 기억과 진정한 현실이 끈적하게 달라붙는데도, 서사가 치밀하다고 느낀 이유는 감정의 흐름이 일관적이고, 캐릭터의 변화가 체계적이기 때문이다. 

불규칙하게 들쭉날쭉하는 왜곡된 기억과 진실이 그물처럼 촘촘히 조직되어 있어서 잠깐 집중력을 놓치면, 바로 앞페이지의 내용과 뒷페이지의 내용이 연결되지 않는 지점들이 있는데, 이런 연결성의 단락들을 통해 화자의 정신적인 상황을 적확하게 이해하고, 따라갈 수 있게 된다. 

모든 인물의 변화에는 이유가 있고, 과정이 있어서 인과가 명확하다. 

이 때문에 인물들이 다소 리얼하지 않은 느낌-작위적이기까지 한-이 들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전반적인 흐름에 통일성을 주며 마지막 페이지까지 가고 나면 그 이유가 납득이 간다. 

작가가 다루고 있는 소재와, 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화자의 왜곡된 기억 안에서는 평안하고 안온한 느낌을 주지만, 진실 앞에서는 불안하고 위화감을 준다.  

왜곡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달콤하고, 편안하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언론의 말을 믿고, 정부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지금도 그러라고 외치는 이들이 있다.

그게 '통합' 이라고. 무조건 자기들을 믿고, 자기들을 따르라며.

반면, 각자 자신의 목소리를 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자유롭게 원하는 바를 말하라고. 다만, 그 말에 대한 책임은 각자가 공평하고 평등하게 댓가를 치뤄야 한다고.

'통합' 을 외치는 쪽에서는 이걸 '분열을 조장한다' 며 비난한다.

이거 왠지, 중국 정부가 홍콩 프리, 를 외치는 이들을 탄압하고 압박하는 장면 같지만, 어느쪽이 더 사회주의 사상에 가까운지, 공산주의에 가까운지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냥, 다 잊고, 묻자고. 좋은게 좋은거 아니냐고.

그러면, 모든게 편하고 안온해진다고.

과거의 상처를 스스로 파헤치며 들추는 이들에게 말한다.

일제 강점기도, 그 당시의 성노예와 육체노역으로 끌려간 사람들을, 한국전쟁때 학살당하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군홧발 아래 참혹하게 살해당한 사람들과 자유를 외치다 머리가 터져 죽은 사람들, 참혹한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해 스스로의 살갗을 불에 태운 사람들, 생떼같은 자식들을 바닷속에 수장시킨 부모들에게 말한다. 

분열을 조장하지 말라고. 좋은게 좋은거라고. 다 잊고, 묻으라고.

이제 그만 들추라고. 


진실은 언제나 시끄러운 법이다.

'인권' 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 건 17세기다. 고작 400여년에 불과한 개념이다.

그 이후 계몽주의가 태동했고, 비로소 '평등' 과 '자유' 라는 이념이 등장했다.

절대왕정 시대, 인류는 얼마나 '통합' 되어 있었는가?

보통사람들은 얼마나 '닥치고' 살아왔는가??

인류가 그래도 나름 평등한 발언의 기회, 표현의 자유를 얻기까지 문명이 탄생하고 수천년이 지나서야 가능했고, 아직도 완벽히 자유롭진 못하다.

별로 오래 전 일도 아니다.

진정한 현실은 원래 시끄러운 법이고, 민주주의의 가장 강력한 개념은 "표현의 자유" 다.


이 작품 안에서 과거의 기억을 잃고, 정부의 선전에 호도되어가는 사람들은 마치 나치 히틀러를 연호하는 군중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떤 특별한 상황이나 현상이 아니라, 그 상황과 현상을 자기 입맛대로 한두마디로 정리한 하나의 '의견' 에 수렴되는 사람들. 

우리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의 아이콘은 언론이다.

전제군주 시대의 평민들처럼 언론들이 어떠한 한 집단, 한 단체에게 굽신거리게 된다면, 그 언론은 더이상 가치가 없어진다.


이 작품 속 다기조병 환자들처럼 말이다. 


대중도, 사람도, 언론도, 그리고 정부조차도 "모두 없었던 일" 로 치부해버린 일.

그 일을 기억하려는 사람을 도시 외곽으로 몰아내고, 격리시켜, 그 사람들조차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드는 일.

우리 사회는 그 일을 할 수 있다.

가까운 일본만 봐라.

모든게 '오해' 라고 하지 않나.

엄청난 돈을 쏟아 피해자들을 왜곡하고,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우리에게 덤터기를 씌우고 있다.

인간의 수명 앞에서 기억은 왜곡되고, 돈 앞에서 역사는 조작되는 법이다.


"역사는 오래 기억하는 사람들의 것. 

우리가 함께 기억할때 가치를 지닙니다."

우토로 마을을 향한 아름다운재단의 홍보 문구다.


이 책은 결국 세월호를 향한 이야기이지만, 민주주의와 자유, 그리고 우리 공동체를 향한 메시지를 담고있다.

진실은 시끄럽고, 고통스럽고, 아프고, 괴로운 법이다.

힘센 자 옆에 빌붙어 기생하며 호도하고, 왜곡하는 일은 쉽고, 배부르고, 안온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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