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먼웰스
앤 패칫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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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방검사보인 앨버트 커즌스는 모처럼 휴일인 일요일에 넷째 아이를 임신한 아내와 세 아이의 뒷치닥거리를 피하려고 지방경찰청 형사인 픽스 키티의 둘째 딸 프랜시스의 세례파티에 참석했다. 한 주 동안 여러 범죄자들을 상대하며 진이 빠질대로 빠진 앨버트였지만, 금요일까지만 해도 주말은 온전히 임신한 아내와 아이들에게 쏟기로 다짐했지만, 아내와 아이들과 토요일 반나절을 보내자 그 다짐은 거품처럼 꺼졌다. 초대도 받지 않았지만, 직장 동료라는 핑계로 '일 때문에' 라며 집에서 빠져나올 구실은 픽스의 파티 뿐이었다.

 픽스의 둘째 딸 세례파티는 꽤 시끌벅적한 파티였다. 픽스는 사교성이 좋은 형사였고, 경찰서 동료들은 물론 커즌스와 함께 일하는 지방검사보도 초대되어 있었다. 픽스는 불청객인 앨버트를 반갑게 들였고, 앨버트도 여러 사람과 그럭저럭 잘 어울렸다.

그리고, 픽스 키팅의 아내, 베벌리 키팅과 마주친다. 


 이 작품은 이혼하고 재혼한 두 가정의 여섯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픽스와 베벌리 사이에서 태어난 키팅가의 두 아이 캐럴라인과 프랜시스, 앨버트와 테리사 사이에서 태어난 커즌스가의 네 아이 캘빈, 홀리, 저넷, 앨버트가 그들이다.

1960년대 미국.

자녀의 양육권은 으레 부인에게 갔다. 남자는 섣불리 친권을 주장할 수 조차 없었고, 대신 상당한 합의금과 자녀들이 성인이 될 때 까지의 양육비(때론 대학 등록금까지)를 부담해야 했다. 자녀에 대한 책임감이 별로 없어보였던 앨버트였지만, 친권과 양육비 대신 1년에 4주간 함께 있을 수 있는 권리를 요구했고, 지방검사보였던 직업 덕에 어렵잖게 획득할 수 있었다. 

 그 때문이었다.

이 여섯 아이가 일년에 4주씩 버지니아에서 함께 보내야 하는 이유가.

앨버트는 자신의 자식들이 버지니아에 올 때마다 직장에서 일이 많아진 이유는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럴거면 왜 굳이 4주의 교섭권을 따내려고 기를 썼는지, 원...

키팅가의 두 아이와 커즌스가의 네 아이들은 모두 아주 개성이 넘쳤다.

사실 초반엔 이 아이들의 개성들이 워낙 뚜렷해서, 그 캐릭터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재밌었다.

이름은 헷갈렸을지언정, 캐릭터는 헷갈리지 않았다.

이 작품이 끊임없이 아무 징조 없이 시공간을 뛰어넘고 주된 화자를 바꾸지만, 전혀 서사가 헷갈리지 않았던 주요한 이유이다.


캘 커즌스가 가장 나이가 많았고, 캐럴라인 키팅이 조금 어렸다. 그 밑으로 캘빈, 홀리, 저넷 커즌스 순이었고, 프랜시스 키팅, 앨버트 커즌스 순이었다. 

도입부의 세례파티의 주인공이 바로 프랜시스였고, 그 때 앨버트의 아내인 테리사는 앨버트를 임신하고 있었다. (막내아들 앨버트의 이름에 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도입부에 등장한다. 이후, 소설에서 아빠 앨버트는 버트, 앨버트 주니어는 앨비, 로 통칭된다.)    



소설은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 시종일관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주된 화자도 자주 변하지만, 주요 화자는 프랜시스(이후 프래니)이다.

전체적인 감상부터 말하자면, 개인적으로는 2019년 최고의 발견이라고 할 정도로 감명깊게 읽은 소설이다.

일단, 소설적 완성도가 매우 뛰어나며, 작가의 스토리 텔링 기술이 기가 막히다.

이는 아주 독창적인 건 아니고, 제니퍼 이건 등 영미권 여성작가들에게서 먼저 보았던 기술이긴 하지만, 마치 영화처럼 씬이 바뀌는 느낌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개인적으로는 그 무엇보다도 이 스토리 텔링 기술에 푹 빠져서, 사실상 헤어나기가 힘들었다.

오렌지 향이 가득했을 것 같은 끈적한 불륜의 현장에서 순식간에 알콜냄새 가득한 병원으로. 그리고 약간 더 과거의 시끌벅적한 바bar로.

그리고 더 과거의. 더 시끌벅적한 공항으로, 그리고 한적한 버지니아의 시골로. 

그러다 또 불현듯, 어느 시점의, 어느 시간대로.

너무 자유롭게 휙휙 옮겨다니는데, 어딘가 덜컥대거나 물음표 하나 없이 자연스럽게 인식된다.

이건 진짜 놀라운 경험이었는데, 영화처럼 페이드 아웃이나 오버랩이 있는 것도 아니다. 챕터가 나뉘어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자연스럽게 시공간을 옮겨다닐 수 있는지... 헷갈려서 앞장을 넘긴게 아니라, 명확한 장치가 있었나 싶어서 앞장을 다시 읽은 책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정말정말 자연스럽고 능숙하며 관능적인 스토리텔링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스토리텔링' 이라는 개념이 아름답다고 느낄 정도. 



부모세대의 사랑과 이혼, 그리고 자식 세대의 사랑과 결별을 뒤섞어 40~50년대, 전후 미국의 부흥기는 프래니의 부모님을 통해서, 그리고 60~70년대는 프래니와 형제들을 통해 경제 성장의 후광을 충실히 누리며 한 세대 만에 크게 바뀐 사회 전반의 모습을 매우 잘 그려내고 있다. 서서히 변화하는 여성의 사회 참여의 형태 뿐 아니라 그 한계는 물론, 아프리칸과 동성애에 대한 인식, 다양한 문화를 향유하는 방식등 미국 중산층의 변화 그 자체를 매우 훌륭하게 펼쳐낸다.  

작가의 자전적 경험들을 녹여낸지라 정말 하고싶은 말이 많았을 것 같은데, 정말 적절한 부분만 적당히 펼쳐낸 듯 하다. 여러 인물의 이야기가 다채롭고 풍성하게 펼쳐지지만, 사실 이야기의 볼륨 자체는 그리 많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적절하게 시공간을 뒤섞고, 굉장히 많은 생략과 압축을 통해 '잘라냄의 묘미' 마저도 보여준다. 이런 기술들은 사실 장르적 기술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순문학을 추구하는 작가들은 다소 꺼려하는 이런 기술들과 그것들이 충분히 활용된 작품들이 유수의 문학상을 받거나 후보에 오르는 것을 보면 확실히 우리나라 밖의 작가들은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를 거의 나누지 않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이를 떠나, 많은 작가들이 입을 모아 "어떤 이야기를 할지를 결정하는 것보다 어떤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결정하는 것이 더욱 힘든 일이다" 라고 말하는데, 앤 패칫은 그 힘든 일을 아주 잘 해냈다. 내러티브가 엄청나게 풍부하지만, 볼륨은 그에 비하면 그다지 엄청나지 않고, 전개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 그러면서도 모든 캐릭터들의 개성이 아주 뚜렷하고, 설득력도 높다. 

그 누가 뭐래도,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의 기술적 완성도만큼은 흠 잡을 곳이 없다.   



한 인간이 자신의 삶 속에서 온전히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과연 하나라도 있을까? 

세상에 그 어떤 인간도 태어남과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설사, 자살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100% 자신의 선택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심리상태, 살아온 환경, 주변에서 강해지는 수많은 압박 등,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인간의 선택을 좌우한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대부분 아주 작은 것들 뿐이고, 따지고 보면 그조차도 대부분 여러 환경에 의해 선택 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그런 작은 것들이 모여 한 사람의 삶을 이뤄낸다.

프래니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들이 그런 것들이다.

아빠와 언니의 영향이 있었지만, 프래니는 로스쿨을 선택했고, 공부를 하다보니 자신에게 공부에 대한 재능이 없음을 깨달았다.

이제 프래니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학업을 계속 할 것인가, 멈출 것인가 정도이고, 학자금 대출을 받기 위해 몸을 팔 것인가, 바에 다니며 웃음을 팔 것인가 정도이다.

그 중 쉬운 길을 선택해도 프래니의 선택이고, 어려운 길을 선택해도 프래니의 선택이다.

그렇다면, 과연 프래니는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산 것일까, 아닌 것일까? 

누군가를 사랑하고, 결혼하고, 이혼하는 것은 주도적인 것일까, 그 반대일까? 

앨버트와 베벌리가 첫눈에 뭔가를 느끼고, 3년 뒤에 이혼하고, 재혼하게 된 것은 주도적인가, 아닌가.

커즌스와 키팅의 아이들이 서로 의붓 형제자매가 된 것은 주도적인가, 아닌가.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선택이고, 아닌가? 


이 작품은 가족에 대한 전통적 가치관을 정립하면서 무너뜨리는 동시에,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은 듯 하지만, 결코 많지 않음을, 선택한다고 믿지만, 실은 선택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 

눈을 돌리면, 발길을 돌리면 다른 삶이 펼쳐질 것 같지만, 그러기 위해선 신데렐라의 마녀처럼 거부할 수 있는 거대한 뭔가가 필요하다.

홀리가 정신과 의사의 '약물치료' 를 '명상' 으로 잘못 듣게 한, 프래니가 일하는 바에 나타난 리언 포즌과 같은, 캘이 태어날 때 부터 갖고 있던 알레르기나 부모의 이혼, 때로는 몸과 마음에 생긴 거대한 종양 같은.

[커먼웰스] 라는 책은 앨버트가 초대받지 않았던 픽스와 베벌리의 두번째 아이 세례 파티가 아니었으면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앨버트와 테리사가 결혼하지 않았으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고.

결국 한 사람의 삶은 가족, 사회, 국가라는 전통적인 네트워크 안에 허술해보이지만, 결코 허술하지 않은 그물망에 묶여있고, 아마 인류가 존속하는 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P.S

그런 관점에서 제목을 한번 되짚어보면, 참 여러 의미가 담겨있는 듯 하다.

'커먼웰스' 는 사전적으로는 독립된 공화국으로 republic과 비슷한 의미지만, 보다 용례가 확장되어서, 연방제 국가, 연방, 나아가 민중 결사체나 공동체에도 사용된다고 한다. 

Commonwealths of Nations 영연방,   Commonwealth of Australia 호주의 공식 국호, Commonwealth of Dominica 도미니카 공화국 등이 있고, 미국에서는 메사추세츠, 버지니아, 켄터키, 펜실베이니아 주는 공식 명칭을 우리가 흔히 '주' 라고 번역하는 state 가 아니라, commonwealth 를 쓴다고 한다. (하지만, 행정적, 의미적으로 state와 큰 차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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