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과 탄광
진 필립스 지음, 조혜연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무엇에 홀린 듯, 서평단 공지를 보고 무심코 신청했다가 설 연휴 직전에 툭, 받았다.

연휴 기간동안 잊고 있다가, 2주 안에 리뷰를 써야 한다는 서평단 조건을 떠올리고 읽기 시작했는데, 흡인력이 대단해서 좀처럼 빠져나올 수 없었다. 


 1920년대 미국 앨라배마주 카본힐. 

카본힐은 인구의 75%가 탄광에 종사하는 광업 도시로서, 탄광노조의 중간 관리자급 인부인 베테랑 광부 앨버트는 리타라는 사랑스러운 아내와 버지, 테스, 잭 삼남매를 위해 매일매일 석탄 가루를 마시는 성실한 가장이었다. 기본적으로 매우 너그러웠고,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대하기 위해 애썼으며, 가족들에겐 생활력 강한 가장이었고, 광대하진 않지만 어느정도 땅을 갖고 있는 지주이기도 했던 그는 모든 이웃에게 따스한 사람이었다.

 리타 역시 매우 좋은 사람이었다. 항상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음식을 내어주고, 산더미 같은 집안인을 하며 남편이 벌어오는 생활비를 알뜰하게 쪼개서 경제적으로 잘 쓸 줄 아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안주인이었다. 

고학년인 버지는 엄마를 닮아 매우 아름다운 소녀로 자라나고 있었고 맏이답게 사려깊고 동생들을 잘 챙겼다. 테스는 좀 더 말광량이 기질이 있었지만, 상상력이 풍부하고 매우 활달했다. 막내인 잭은 아직 어렸지만, 아들 노릇을 하는 중이었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배 곯을 일도 없었던 이 따스한 가정에 폭탄같은 일이 벌어진다.

테스네 집은 숲과 연결되어 있었다. 뒷마당에는 숲에서부터 흐르는 개울이 지나고 있었고, 앨버트는 이를 생활용수로 사용하기 위해 두터운 우물을 만들어 놓았다. 뒷마당 우물가는 테스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로 어린 소녀의 공상의 도화지였다. 

 그 날, 어둑한 저녁에도 테스는 잔잔한 생활 소음을 BGM삼아 뒷마당이 보이는 부엌 문에 기대 어둠에 잠겨가는 숲과 우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우물 뚜껑문을 열고 무언가를 던졌다. 너무 어두워서 형체만 보였지만, 분명 아기였다.

 테스는 자기가 본 것을 가족들에게 말하지만, 상상력이 풍부한 테스의 말을 가볍게 넘겼다.

다음 날, 리타가 길어올린 우물 양동이 안에서 퉁퉁 불은 아이의 사체가 발견되기 전까지 말이다.      

 


이야기의 배경은 1920년대 중~후반 탄광마을 카본힐을 주로 다루고 있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의  전간기, 작품 안에서는 경제 대공황의 전조가 보이기 시작한다. 

작품은 총 9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고, 각 장은 주요 등장인물들이 1인칭 화자로 등장하는 작은 장들로 다시 나뉘어 있다.

이는, 2000년대 초반부터 꾸준히 활용되어온 기법으로 나는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과 조지 R.R. 마틴의 [얼음과 불의 노래]시리즈에서 처음 접했다. 

모든 등장인물이 각자 자신의 시점으로 서사를 이끌어간다.

이 시점들이 아주  친절하게 챕터로 나뉘어 있으며 매 챕터는 짧고 간결하다. 이러한 구조와 형식은  사건이 아니라 인물에 집중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쉽게 따라갈 수 있다. 


시대적 정서보다는 작가 개인의 향수가 물씬 느껴지는 매우 목가적인 작품이다. 카본힐이라는 마을의 정경, 탄광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들, 가족들이 사는 집과 경작하는 땅, 해먹는 음식 등 소소하고 일상적인 일들이 따스하게 그려지고 있다.

우물 속에 던져진 아이라는 충격적인 소재로 시작되지만, 이렇게 따스한 필체로 버지와 테스의 성장을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물론 당시 시대상에 비춰지는 인종차별, 경직된 사회적 성 역할에 대해서도 풍부하게 담겨 있지만, 먹고, 놀고, 일하는 것을 그리듯 일체의 감정과잉 없이 서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볼륨이 결코 두껍지 않지만, 담겨있는 정서도 매우 풍부하고, 인물 개개인에 대한 내러티브도 풍성할 뿐 아니라, 제공되는 정보의 양도 꽤 많다.

열심히 읽다보면, 주요 인물들의 삶을 거의 다 알아낼 수 있는데, 책의 두께를 보면 '어떻게 이렇게 간결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정말 필요한 이야기만 쏙쏙 뽑아 잘 만들어냈고, 감정과 정서의 흐름도 매우 균형적이다. 


나는 처음 이 작품을 펼쳤을 때, 비극적인 이야기를 상상했다.

전간기를 다룬 소설들이 대부분 그렇게 비극적이었기 때문인데, 다행히 이 가족에겐 전쟁과의 접점이 없었다. 잭의 나이로 보아 2차 세계대전은 잘 피해갔겠지만, 베트남 전쟁과 한국전쟁을 위한 징집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 작품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사건이 그것을 피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잭에게는 전쟁에 대한 공포보다, 언젠가 탄광에서 일해야 한다는 일상의 공포가 더 컸을 것이다.

그리고, 앨버트와 리타는 자식들에게 그런 삶을 피하게 해주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고, 이 작품은 다행히 비극적으로 종결되지는 않았다.

작품에 총이 등장하면 반드시 쏘아져야 하듯, 탄광은 반드시 무너져야 하는데, 다행히 내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진짜 다행다행)

무척 목가적이고 따스한 소설이었다.

읽는 내내 어렸을 때 작은 TV에서 봤던 [초원의 집] 같은 외화(지금으로 치면 미드.ㅋㅋ)가 떠올랐고, 연상 작용으로 그 시기의 나의 삶들도 많은 것들이 함께 떠올라서, 오랫동안 추억에 잠길 수 있었다. 

시대와 문화를 떠나 부모님이야말로 가장 영향력 짙은 선생님이고, 가정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교육기관일터다.

 


p.s

재미있게도, 이 작품 직전에 시대적으로 거의 비슷한 시기를 다룬 뮤리얼 스파크의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를 읽었다.

두 작품 모두 영미권 여성 작가의 소설로 1920~40년대를 다루고 있고, 소녀들의 성장을 다루고 있다. 

한쪽은 대도시, 이쪽은 시골 탄광촌.

여러모로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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